배틀로얄(BATTLE ROYALE) :: 제２부 - 중반전 #.8

　매킨토시 파워북 150이 경고음과 함께 허무하게도 네트워크 접속이 끊어지고 나서, 이미 다섯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통신 단말기가 아닌, 그저 계산기가 되어 버린 150의 화면, 윈도 가운데 있는 문서를 스크롤하면서 미무라 신지는 한숨을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전화를 만져, 직접 확인하고 다시 접속을 시도했지만 150의 단색 화면은 똑같은 메시지를 표시할 뿐이었다. 최종적으로는 모뎀과 전화의 접속 코드를 모두 떼어냈다. 결국 휴대전화 자체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었다. 전화회선에 연결되지 않은 이상 이제 신지의 집에 있는 컴퓨터에 접속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사귀고 있는 여자애들 모두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나는 이제 곧 죽게 될 테지만, 너를 제일 좋아했어.」 라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해 보는 것도 물론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뭔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전화를 분해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신지는 포기했다. 소름이 끼쳤다. 회선이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확실해졌다. 즉, 정부는 신지가 고생해서 만든 전화, 아니 고생해서 위조한 '제２의 롬(ROM)', DTT의 기술직원이 사용하는 회선 검사용 전화의 그 번호를 막아, 그 접속도 다른 일반 전화와 마찬가지로 끊어져 버린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어떻게 그런 대응책을 세울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킹을 눈치 채게 할 만한 어수룩한 짓은 했을 리가 없다. 그것만은 자신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정부는 컴퓨터 회선 내부의 방어 시스템, 경계 시스템, 혹은 수동 조작에 의한 감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신지가 해킹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이상….

 

　신지는 '그것'을 처음 알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자기 목에 감겨있는 목걸이를 손으로 만졌다. 정부가 안 이상, 당장 이 안의 폭약을 원격 조작으로 터뜨려 자기를 죽이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마 유타카도 함께. 그래서인지 점심 때가 지나 먹은, 정부가 지급한 빵과 물은 더욱 맛없게 느껴졌다. 유타카는 신지가 컴퓨터 작업을 멈춘 것을 보고 설명을 해 달라고 했지만, 신지는 그냥, 「틀렸어. 이유는 모르지만, 글렀어. 전화가 망가졌는지도 모르지.」 라고만 대답했다. 

　유타카도 그 뒤로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아침에 앉아 있던 위치에 주저앉아 있다. 이따금 울리는 총소리 때문에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눈 것 이외에는 완전히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타카에게 '대단해'라는 소리를 들은 미무라 신지의 화려한 탈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나를 바로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기필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신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초등학교 때부터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던 작고 낡은 포켓 나이프를 꺼냈다. 금속으로 만든 작은 원통이 하나 달려 있었다. 신지는 여기저기 흠집 투성이가 된 그것을 눈 앞에 들어 들여다보았다. 이 칼도 숙부가 아주 오래 전에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원통은, 그렇다, 왼쪽 귀에 한 피어싱과 마찬가지로 숙부가 돌아가셨을 때 신지가 받은 또 하나의 유품이었다. 숙부는 지금 자기가 그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켓 나이프에 달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이 항상 가지고 다녔다. 엄지 손가락 정도 크기인 원통은 뚜껑 안에 고무 링을 넣은 방수 케이스로, 군인들이 휴대하는 그런 케이스에는 대부분 부상당했을 때를 대비해 이름과 혈액형, 그리고 성냥을 넣는 사람도 있다. 숙부가 죽기 전까지, 신지는 그 내용물이 그런 것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숙부가 돌아가신 뒤, 신지가 뚜껑을 열어 그 안에서 본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케이스 자체가 완전히 특수한 합금을 깎아 만든 것이었고, 안쪽에는 다시 두 개의 같은 모양을 한 작은 케이스를 담고 있었다. 

　신지는 두 개의 케이스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는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른 짐작이 가는 것은 그 두 개는 조합하여 사용해야 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한쪽이 나사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한쪽에 꽉 물려 있었다. 각각 다른 케이스에 넣어 놓은 것은 함께 두면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니까….

 

　그리고 이런저런 조사를 하여 그 정체를 파악한 뒤에도(당연히 따로 분리해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서 갖고 다닐 수도 없다.) 숙부가 어떤 의도로 그걸 계속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는 특별하게 무슨 용도가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의 신지가 그걸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누군가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신지에게 숙부의 과거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는 했다.

　신지는 약간 뻣뻣한 캡을 비틀어, 그것을 열었다. 이것을 열어 본 것은 숙부가 돌아가신 직후 이래로 처음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케이스를 손바닥 위에 꺼내고, 그 가운데 작은 것의 뚜껑을 열었다. 쇼크 방지를 위해 안에는 솜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솜 안에는 구리의 둔탁한 누런 빛이 들여다 보였다. 신지는 잠시 그것을 들여다 본 다음, 뚜껑을 닫았다. 다른 하나의 작은 케이스와 함께 원래 있던 상태대로 큰 케이스에 넣었다. 사실은 만약에 이것을 사용해야 할 시기가 온다고 해도 이 섬을 탈출한 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은 분교의 컴퓨터를 고장을 낸 다음에 필요한 것을 갖추어 사카모치를 습격할 때에 쓰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것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신지는 뚜껑을 꼭 닫고, 이번에는 칼자루에 접혀 들어가 있는 칼날을 일으켜 세웠다. 해가 서쪽에서 꽤 기울어 있어, 그 은빛 그물에 비치는 수풀 속은 유난히 노란색 기운이 돌았다. 그리고는 교복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모두 함께 '우리는 서로 죽인다.' 라고 쓴 그 연필이었다. 지도에 금지 구역을 적어 넣을 때, 학급 명부에 사망자 이름을 체크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연필심은 꽤 뭉툭해져 있았다. 신지는 나이프로 그 연필을 약간 깎았다. 그리고 교복 다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뒤집었다. 지도의 뒤는 당연히 백지였다. 

 

　「유타카.」 

　신지가 부르자, 무릎을 안고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유타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 났어?」 

　그 때 유타카의 뭔가가 신경을 거슬렸는지 잘 알 수는 없었다. 말투였는지, 말 자체였는지, 어쨌든 신지의 마음 어딘가에서 순간 '뭐야, 이게.' 라고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탈출 방법을 궁리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너는 멍하니 거기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거야? 가나이 이즈미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주제에 아무 생각도 없잖아. 너는 패스트푸드를 사러 온 손님이고, 나는 점원인가? 제길, 그렇다면 포테이토나 먹으면 될 거 아니야? 

 

　그러나 신지는 참았다. 

　유타카의 둥근 얼굴에서 볼의 살이 상당히 빠져 있어, 광대뼈의 라인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무리도 아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투의 긴장 때문에 상당히 지쳐있을 것이다. 신지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체육은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다(중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 예외가 두 명이 나타났다. 그 '와일드 세븐' 나나하라 슈야와 기리야마 가즈오였다. 농구라면 몰라도, 다른 종목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숙부가 자주 등산을 데리고 가 주어, 거의 체력으로 승부를 걸 때는 내가 이길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더 서드 맨' 미무라 신지와 같은 기초 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타카는 솔직히 말하자면 체육을 잘 못하고, 감기가 유행할 때면 학교를 자주 빠졌다. 신지와는 피로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잘 돌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신지는 뭔가를 문득 깨닫고 깜짝 놀랐다. 지금 유타카에게 조금이라도 화를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도 역시 지쳐 있다는 증거다. 물론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런 상황이니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안 돼. 정신을 차려애 해. 그렇지 않으면? 이게 농구 게임이라면 지더라도 후회만으로도 끝날수있을 테지만 이 게임에선 당연히, 죽게 된다. 신지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왜 그래?」 

　유타카가 물어, 신지는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지도를 좀 검토해 보고 싶은데, 괜찮겠니?」 

　유타카가 신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신지가 소리를 질렀다. 

　「벌레가 기어가고 있어. 네 목에!」 

　유타카가 깜짝 놀라 손을 목으로 들어올렸다. 

　신지는 「내가 봐 줄게.」 라고 말리며, 유타카에게 다가갔다. 유타카의 목덜미에, 아니, 실은 다른 데 눈길을 주면서…. 

　「아, 도망갔다.」 

　신지는 말하면서 유타카의 뒤로 돌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신지. 잡았어? 신지?」 

　유타카가 겁먹은 듯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신지는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나서 유타카의 목덜미를 얼른 손으로 훑었다. 있지도 않은 벌레를 얼른 스니커 바닥으로 밟고, 그걸 집어 올려(그런 척을 하고) 수풀 속으로 던졌다(그런 척을 했다). 

 

　「잡았어!」 

　그리고는 유타카의 앞쪽으로 돌아오면서, 덧붙였다. 

　「작은 지네 같은 것이었어.」 

　유타카가 「에이, 징그러.」 라고 하면서 목덜미를 문지르며, 신지가 그것을 던져 버린(척을 한) 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신지는 살짝 웃으며 「자, 지도.」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타카가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그 지도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신지는 검지를 세워 살짝 흔들며 유타카의 말을 막아 놓고, 연필을 잡고 지도의 뒷면에 글씨를 썼다. 왼손잡이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써도 별로 잘 쓴다고는 할 수 없는 신지의 서투른 글씨가 종이 끄트머리에 몇 글자 쓰여졌다. 

 

　"도청당하고 있는 것 같아." 

 

　유타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어떻게 알았어?」 

　신지는 급히 유타카의 입에 손을 뻗었다. 유타카가 알겠다는 투로, 크게 뜬 둥근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는 손을 떼고, 말했다. 

　「알아. 나는 벌레에 대해서는 빠삭하거든. 그건 독은 없는 놈이었어.」 

　그리고 노파심에서 다시 연필을 놀렸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있는 거야. 의심받을 말은 하지 마." 

 

　「알겠지. 그리고 해킹이 실패한 이상, 이제 우리에겐 방법이 없어.」 

　슬쩍 넘어가기 위해서, 신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글씨를 썼다. 

　"그래서 정부는 내가 너에게 설명하는 것을 듣고, 매킨토시를 이용한 접속을 끊어 버린 거야.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어. 정부는 우리들처럼 저항하려고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예상해 놨겠지. 그렇다면 가장 빠른 예방책은 도청이야. 당연하지." 

　유타카가 자기도 연필을 주머니에서 꺼내, 신지가 어설프게 쓴 글씨 바로 아래 쓰기 시작했다. 유타카의 글씨는 신지보다 훨씬 나았다. 

　"이렇게 넓은 섬에 도청기를?" 

　"청" 자는 신지가 한자로 쓴 것을 그대로 베껴 쓴 것 같았다. "기"는 한자가 틀렸지만, 뭐 상관없다. 국어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누군가를 찾을 생각이야. 우리 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신지는 말하면서 자기 목에 잠긴 목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유타카가 눈을 둥글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는 다시 연필을 놀렸다. 

　"금방 네 목을 조사했어. 카메라까지 내장된 것 까지는 않아. 도청기 뿐이야. 그리고 이 근처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신경 쓰이는 건 인공위성인데, 뭐 여기 정도면 나무에 뒤덮여 우리가 무얼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거야."

 

　유타카가 또 눈을 크게 뜨고 머리 위를 올려다 보았다. 두 사람은 푸른 하늘로부터 완전히 차단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유타카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얼굴이 굳어졌다. 연필을 꾹 잡고 지도 위에 글씨를 썼다. 

　"결국 컴퓨터 작업은 나한테 이야기해서 실패한 거네. 내가 없었으면 잘 되었을 텐데."

　신지는 연필을 쥔 왼손 검지로 유타카의 어깨를 슬쩍 찌르면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연필을 놀렸다. 

 

　"맞아.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마. 내가 부주의했지. 정부가 눈치 채자마자 이 목걸이를 터뜨려 우리를 날려 버렸을지도 몰라. 놈들이 자비심을 발휘해서 우리를 살려 두는 거야."

　그러자 유타카가 목걸이가 감겨 있는 목덜미에 다시 손을 들어올리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신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어디 숨어 있는 것 같던데….」 

　"알겠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계획을 여기에 쓸게. 나는 적당히 얼버무릴 테니까 맞장구를 쳐 줘."

　유타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말했다.

　「응, 그렇지만 믿을 수 있는 녀석이 별로 없잖아.」 

　잘했어, 라고 생각하며 신지는 씨익 웃었다. 유타카도 마주 보고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만 슈야 같은 녀석이면 괜찮을 거야. 슈야를 어떻게든 만났으면 좋겠는데.」 

　"먼저 하나 단서를 달게. 해킹이 제대로 되었다면 다른 애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몰라.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부터 도망가는 걸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건 괜찮아?"

　유타카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글씨를 썼다. 

　"슈야도 찾지 않을 거야?"

　"그래.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는 이제 다른 애들을 생각해 줄"

　여유라는 글자를 한자로 쓰려고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신지는 국어 성적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여유가 없어. 그건 괜찮아?" 

　유타카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내가 생각한대로만 되면 게임은 그 순간 스톱이 될거야. 그러면 다른 애들에게도 도망칠 찬스가 생길지 몰라."

　유타카는 고개를 두 차례 살짝 끄덕였다. 

　「다들 우리처럼 산 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집 안에 숨어 있는 녀석도 있을까?」

　「글쎄….」 

　신지는 다음에 쓸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타카가 먼저 썼다. 

　"생각한 대로라니?"

 

　신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필을 고쳐 쥐었다. 

　"사실 나는 아침에 실패 이후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길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유타카가 이번에는 연필을 쓰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게임의 중지 선언 말이야. 사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고."

　유타카가 약간 놀란 듯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지는 슬쩍 웃어보였다. 

 

　"네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분교에 컴퓨터에 들어가서 나는 무엇보다 먼저 거기 들어있는 모든 파일의 백업 파일을 찾았어. 그리고 파일 검사 소프트. 바로 찾았지. 그리고 데이터를 받기 이전에 그 두 군데에 바이러스를 심어 놓았어. 보험 삼아서 말이야."

　유타카가 "바이러스?" 하고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앗, 유타카, 입 말고 손을 좀 써야 하지 않겠어? 신지는 손을 움직였다. 

 

　"결국 놈들은 무슨 트러블이 생겼다고 판단해서 파일을 검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백업 파일로 파일을 복구하려 했을 때는 바이러스가 분교의 컴퓨터 시스템에 들어가도록 말야. 그러면 시스템이 엉망이 되서 이 게임은 계속될 수가 없게 돼."

　유타카는 감탄했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조금씩 끄덕였다. 그러자 신지는 이런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야기하고 싶어져 글씨를 썼다. 

　"내가 설계한 엄청난 바이러스야.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 무좀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하겠니. 그것보다 100배는 심할 거야."

　유타카가 애써 웃음 소리를 참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작동하기 시작하면 모든 데이터가 날아가고, 『스타 스팽글드 버너』 만 계속 연주하게 돼. 미제 알레르기인 정부 녀석들, 돌아버리겠지."

　유타카가 계속 웃음을 참듯이, 배를 잡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신지도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느라 노력했다. 

　"어쨌든 아까 내 해킹이 들통나서, 놈들이 그 파일을 복구시키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러면 게임은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어. 결국 놈들은 간단한 조치만 하고 만 거야. 하긴 사실 내가 진짜 파일을 조작한 건 아니니까."

 

　「샅샅이 뒤져 볼까?」 

　「위험하잖아.」 

　「그래, 그렇지만 우린 총이 있잖아.」 

 

　"그리고 말이야. 내 작전이라고 하는 건 놈들에게 그 파일을 복구하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 바이러스가 작동하겠지."

　신지는 파워북 150을 끌어당겨 조금 전에 바라보고 있던 문서를 유타카에게 보여주었다. 데이터의 다운로드는 중단되었지만, 그때까지 복사가 끝난 것 가운데 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파일이다. 

　「M01」부터 「M21」까지, 이어서 「F01」부터 「F21」까지의 연속 번호 다음에는 열 자리의 마치 전화번호처럼 보이는 번호가 있는데, 이것도 일련번호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번호는 무작위 번호인 것처럼 보였는데, 무려 16자리나 되는 번호가 있었다. 각 자리 모두 각각 3개의 문자열을 쉼표로 구분하고 있었다. 파일 자체의 이름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를 [Guadalcanal shiroiwa3b] 로 되어 있었다. 

 

　"뭐지? 이게?"

　유타카가 썼다.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목걸이를 관리하기 위한 번호일 거라고 생각해."

　유타카는 아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즉 「M01」은 남자 1번(아카마츠 요시오), 「F01」은 여자 1번(이나다 미즈호. 약간 묘한 여자애다).

　"내 추측으로는 일종의 휴대전화 같은 시스템일 거라고 봐. 각자의 목걸이 번호가 있고, 동시에 인증 번호가 있어. 아마 폭파를 할 때에도 이 번호로 하겠지, 결국은."

　신지는 손을 멈추고 유타카의 얼굴을 보았다. 계속해서 글씨를 썼다. 

 

　"데이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특히 이게 감염되면 우리들은 이제 목걸이가 폭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바이러스는 계속 감염되기 때문에 플로피 같은 데에 예비 파일을 갖고 있어도 헛일이야. 수동으로 조작한다면 문제지만, 그래도 시스템 자체가 망가지니까 시간은 벌 수가 있지."

　「대충 있을 만한 곳에 돌맹이를 던져서 누가 튀어 나오는가. 확인하는 건 어때?」 

　「잠깐. 그러다 여자애가 있다가 큰 소리라도 지르면 우리도 위험하고 그 애도 위험하잖아. 그 애가 나쁜 애가 아닐 경우지만.」 

　「으음~」

 

　"그걸 어떻게 하려고?"

　신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글씨를 썼다. 

　"그 분교를 나올 때 방위군 녀석들이 있던 방 봤니?"

　유타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컴퓨터가 있었어. 기억나?"

　유타카는 또 눈을 둥글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난 여유가 없었어." 라고 썼다. 

　신지가 살짝 웃었다. 

 

　"나는 놈들이 눈치 채지 않게 잘 보아 두었어. 데스크 톱 타입의 컴퓨터가 죽 놓였더라. 대형 서버도 하나 있었고. 그리고 약간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녀석이 한 명 있었어."

　휘장을 한자로 쓸 수 있을까? 

　"군복 마크를 보고 알게 되었는데, 컴퓨터 전문 기술병이야. 그러니까 아까 사카모치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게임을 작동시키는 컴퓨터는 틀림없이 거기 있어. 그래서 우리로서는 그 분교를 공격해서 데이터를 조금이라도."

　아아, 모르겠다. 

 

　"데이터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하면 되는 거야. 아니, 재료만 확실하게 있으면 컴퓨터 그 자체를 거의 박살낼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신지는 일단 글씨 쓰던 손을 멈추고, 마술사 같은 몸짓으로 손을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지도에 글씨를 썼다. 

　"분교에 폭탄을 던지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바다로 도망치는 거지."

 

　유타카는 이번에는 진짜로 눈을 크게 떴다. "폭탄?" 이라고 소리지르지 않게 입 시늉으로만 말했다. 신지는 씨익 웃었다. 

　「먼저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너도 그런 포크를 들고 싸울 수는 없잖아?」 

　「음, 그렇지.」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은 가솔린이야. 주유소가 부두 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미 글렀고. 이 섬에도 차가 몇 대 있겠지. 가솔린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찾을 거야. 최악의 경우에는 경유라도 괜찮아. 그리고 비료."

　유타카가 "비료?" 라고 묻듯이 눈썹을 모았다. 신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료의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또 한자를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이건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를 두들기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관없다. 분자식은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초산 암모니아란 거야. 그것도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것하고 가솔린만 있으면 폭탄을 만들 수 있어."

　신지는 주머니에서 나이프와 거기 달린 원통을 꺼내 유타카에게 보여주었다. 

　"이 안에 뇌관이, 기폭 장치가 들어 있어. 어째서 내가 이런 걸 갖고 있는가는 복잡한 이야기니까 집어치우고, 어쨌든 갖고 있어."

 

　유타카는 약간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씨를 썼다. "너희 숙부?"

　신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워낙 숙부 이야기만 하니까 유타카도 대충 상상이 가는 모양이다. 

　유타카가 다시 글씨를 썼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분교에 던지지? 접근할 수가 없는데. 나뭇가지로 커다란 새총 같은 걸 만드나?"

　하하하, 신지는 웃었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목표를 정확하게 노릴 수 없다. 몇 발이든 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뇌관이 하나밖에 없는 이상, 찬스는 단 한 번뿐이다. 

　"로프와 도르래."

　유타카가 "아" 하는 소리를 내듯이 입을 벌렸다. 

 

　"말하자면 로프웨이를 만드는 거지. 분명히 그 분교가 있는 구역에는 이제 접근할 수가 없어. 그렇지만 이쪽 산과 분교를 사이에 둔 맞은편 평지 쪽은 아직 괜찮아."

　신지는 지도를 뒤집어서 유타카에게 보여주었다. 

　"산에서 평지로, 아니, 평지에서 산쪽으로 로프를 치는 거야. 아마 3백미터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걸로 재빨리 로프를 팽팽하게 당긴 다음 산 위에서 도르래에 매단 폭탄을 내려 보내. 그리고 분교 위에 갔을 때 로프를 끊는 거야. 아니면 로프를 느슨하게 만들거나. 특제 덩크 슛이 되는 거지."

　유타카가 다시 감탄한 듯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움직이는 게 찾기 쉬울지도 몰라.」 

　「그래, 그렇지. 누군가를 찾는 것보다는 간단하겠지.」 

　"작업을 위해서도 그게 좋아. 도르래는, 어디선가 우물을 본 것 같으니 구할 수 있을 거야. 가솔린은 차에서 구할 거고. 문제는 로프와 비료야. 그렇게 긴 로프가 있을지."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유타카가 곧 급히 글씨를 썼다. 

　"그렇지만 그 수밖에 없잖아? 해 보자."

　신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글씨를 썼다. 

　"잘 하면 사카모치나 그 방위군 녀석들 대부분을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어쨌든 아까 이야기한, 쓴 대로야. 데이터에 문제가 생겼다고 놈들이 생각하게만 해도 충분할 거야, 그러면?"

 

　자기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에 당하는 일은 없어지겠지."

　"그 다음에는 바다로 도망치는 거야?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나는 수영을 잘 하지도 못하고."

　자신 없다는 듯이 신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엄칠 정도의 스피드."

　신지는 거기서 유타카의 손을 막고 자기가 썼다. 

 

　"오늘은 보름이야. 조류를 이용하는 거지. 내 계획대로 타이밍만 맞추면 시속 6.7킬로미터로 움직일 수가 있어. 시간을 맞추어 필사적으로 헤엄치면 제일 가가운 섬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유타카는 이번에는 눈을 둥글게 뜨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런데 감시선은?"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발각당할 위험은 있어. 그렇지만 놈들은 컴퓨터를 믿고 있기 때문에 배 쪽은 아마 방심하고 있을 거야. 동서남북에 한 척씩이라고 하면 감시하기에는 부족한 편이고. 바로 그게 빈틈이지. 어쨌든 컴퓨터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있는 곳은 알 수 없게 될 거야. 감시선에서는 우리를 눈으로 찾을 수밖에 없어. 아무리 정부가 인공위성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밤에는 그 카메라가 거의 효과가 없을걸. 그리고 목걸이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없어. 그렇다면 우리에겐 도망갈 찬스가 생기는 거지."

　"그렇지만 역시 도망가는 건 어렵구나."

　"그 점에 대해서도 한 가지 생각이 있어.

 

　신지는 이번에는 데이 팩에 손을 넣어 소형 트랜시버를 하나 끄집어냈다. 이것도 민가에서 주운 것이다. 

　"이걸 만져서 약간 출력을 올려 볼 생각이야.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바다로 나가면 적당한 위치에서 해난 구조를 요청할 거야. 낚싯배가 전복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둘러대면서 말이야."

　유타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다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부근에 있는 배에 구조를 요청하는 거구나."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부도 그런 정도는 예상을 할 거야. 그래서 장소를 거짓말로 이야기하는 거지. 우리가 도망가는 방향과는 정반대 지점을 알려 주는 거야."

　유타카는 다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글씨를 썼다. 

　"신지, 대단해."

　그러자 신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좋아, 그럼.」

　시계를 보았다. 4시를 넘어서 있었다. 

　「5분 뒤에 행동 개시다.」 

　「응.」  

 

　평소에는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도 힘이 들었다. 신지는 지쳐서 연필을 내던졌다. 지도 뒷면에 마치 컴퓨터 통신의 로그 파일처럼 수많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이지 연필로 글자를 쓰는 것보다는 키보드가 편하다. 유타카가 키보드를 두드리면 150타 정도는 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다시 한 번 연필을 잡고 덧붙여 썼다. 

 

　"그다지 좋은 계획이라고는 할 수 없지.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어. 그렇지만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어."

　어깨를 움츠리며, 유타카의 얼굴을 보았다. 유타카가 씩 웃으며 썼다. 

　"어쩔 수가 없잖아."

 

 

 

 

　북쪽 산의 남쪽, 짙은 숲으로 뒤덮인 사면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남학생은 왼손에 든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앞 머리카락에 볼륨을 넣은 리젠트 머리를 오른손에 든 빗으로 정성스럽게 빗고 있었다. 사실 여자애들까지 포함해서 게임 개시 이후 3학년 B반 학생들 가운데 이만한 여유를 보이는 것은 이 친구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도 아니다. 그는 투박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옷치장에는 지독하게 신경을 쓰는 남학생이었다. 그건 B반 학생 대부분이 뚜렷하게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친구들에게 '즈키'라고 불리는, 아니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하면 전에 그렇게 불렸던 이 친구는 어쨌든 오카마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는 이곳은 미무라 신지와 세토 유타카가 조금 전까지 숨어 있던 장소에서 수평 거리로 거의 서쪽 정면으로 200미터 정도 덜어진 곳이다. 또 나나하라 슈야 일행이 있는 보건소에서는 북서쪽으로 약 6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미나미 가오리가 시미즈 히로노의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한 농가 바로 위에 해당된다. 고개를 들면 아직 구사카 유미코와 기타노 유키코의 시체도, 또 미나미 가오리의 시체도 이미 보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미나미 가오리의 시체는 그가 본 일곱 번째 시체였다. 

 

　에이! 정말 짜증나, 또 잎사귀가 붙었네. 잠깐만 누워도 이 모양이니. 남학생은 빗을 든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움직여 머리카락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너머의, 바로 아래 약 20미터 정도 되는 수풀을 바라보았다. 

　기.리.야.마.군. 잘.잤.어? 

　남학생은 두꺼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조심성이 부족한 거 아니야? 그 대단하다는 너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네가 죽이지 못한 내가 여기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그렇다, 지금 거울과 빗을 손에 들고 있는 이 오카마는 바로 기리야마 가즈오가 지시한 집합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기리야마의 학살을 피한, 지금은 패밀리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즈키오카 쇼(남자 14번)였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수풀 속에는 이미 여섯 명을 처치한, 기리야마 가즈오가 있었다. 벌써 두 시간 이상 거기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쇼는 다시 거울 안의 자기 얼굴로 눈길을 돌려, 이번에는 피부를 체크하면서, '기리야마 군'이라는 호칭 때문에 같은 패밀리의 누마이 미츠루와 자주 옥신각신하던 일이 떠올랐다. 「야, 즈키. 보스는 보스라고 불러.」 라느니 어쩌니.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것이 거의 없는 미츠루도 이 '남녀'만은 다루기 까다로웠는지, 쇼가 여유를 부리며 흘기는 눈으로, 「뭐야, 자잘한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셔. 남자답게 않게스리!」 라고 하면 그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퉁명스럽게 다물 뿐, 그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보스라고 부르라고? 쇼는 좌우의 눈을 번갈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생각했다. 그렇지만 너는 그 보스에게 당했잖아? 정말 바보라니까. 

 

　그렇다. 즈키오카 쇼는 누마이 미츠루보다 약간 신중하다고 할 수 있다. 미츠루가 죽기 직전에 '놈은 그걸 알고 있었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기리야마 가즈오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즈키오카 쇼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배반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라고. 그런 점에서 싸움만 하는 건달이었던 누마이 미츠루에 비해,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경영하는 게이 바에 출입하면서 어른들 세계를 보아 온 쇼가 조금은 더 세상을 알고 있었던 셈일지도 모른다. 

 

　쇼는 분교를 나온 뒤 약속 장소인 섬의 남쪽 끝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해안에서 약간 내륙 쪽으로 난 길을 거쳐, 숲 사이를 헤쳐 나갔다. 덕분에 고생은 괘 했지만, 그래도 더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해안에 있는 잡목 숲에 숨어서 보았던 것이다. 모래사장을 둘로 나누듯이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간 바위 위, 교복과 세일러복 차림의 세 사람이 세 사람이 쓰러져 있고, 달빛에 그늘이 진 바위에 움푹 팬 곳에 기리야마 가즈오가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바로 누마이 미츠루가 도착했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바위 위에서(그 피 냄새는 쇼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기리야마와 두세 마디 나눈 뒤, 머신 건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쇼는 생각했다. 큰일났군. 그 뒤에, 그곳을 떠나 걷기 시작한 기리야마 가즈오의 뒤를 밟기 사작하기까지, 이미 쇼는 다음 행동 방침을 정해 두고 있었다. 이 게임의 우승후보 가운데 가장 유력한 사람은 분명히 기리야마 가즈오였다. 기리야마와 미츠루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기리야마가 싸울 자세가 되어 있는 한, 그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적어도 머신 건(그것이 과연 기리야마의 무기였을까, 아니면 그가 죽인 세 명 가운데 누군가의 무기였을까?)과 미츠루가 갖고 있던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정면 대결을 하면 어느 누구도 기리야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다만 즈키오카 쇼는 자신의 어떤 능력에 대해서만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디에 숨는다거나, 상대방의 빈틈을 노려 물건을 훔친다거나, 그리고 미행이라거나(좋아하는 남자를 보면 스토커가 되곤 했었다…) 말하자면 살금살금 하는 행동? 살금살금이라니, 무슨 실례의 말씀? 모두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쇼의 데이 팩에서 나온 무기는 하이 스탠더드 22구경 2연발 델린저였다. 카트리지는 매그넘이어서 아마 가까운 거리라면 치명상을 입힐 수가 있을 테지만, 총격전에 적합한 총은 아니다. 

　그래서 쇼는 생각했다. 만약에 기리야마 가즈오가 우승을 향해 질주하더라도, 그 과정 중에는 반드시 누군가 필적할 상대? 아마 가와다 쇼고라거나, 어쩌면 미무라 신지(음, 신지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정도(만약에 총을 지니고 있다면?)와 싸워 어느 정도 부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전투의 피로도 계속 누적될 것이 틀림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까지 기리야마를 미행하다가 진짜 마지막 순간에 기리야마를 뒤에서 쏘면 되잖아? 기리야마가 마지막의 누군가를 해치우고 방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 델린저로. 설마 아무리 기리야마라고 해도 자기가 미행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특히 처음 모이기로 한 장소에 가지 않고 도망친 내가 뒤쫓으리라고는? 

 

　동시에 그것은 클래스메이트를 계속 죽여야만 하는 이 게임에서 자기가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즈키오카 쇼가 윤리 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다. 그저 그가 생각한 것은 나는 죄 없는 애들을 죽이기는 싫어, 우아하지 못한 짓이야.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기리야마, 나는 그냥 그의 뒤를 밟을 뿐. 그가 눈 앞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해도 나는 말릴 수가 없잖아. 그런 건 위험한 짓이지. 그래서 마지막에, 말하자면 정당방위로 기리야마를 죽이는 거야.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걸? 대충 이런 식의 생각이었다. 또한 기리야마 가즈오를 미행하는데는 특별한 메리트가 있었다. 기리야마가 지나간 자리를 정확하게 따라가면 누군가에게 갑자기 습격 당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만약에 습격 당한다 해도, 어쨌든 제1격을 피하기만 하면 다음에는 그 소란 때문에 기리야마가 움직일 것이다. 재빨리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적은 기리야마가 해치워 줄 것이다. 하긴 그 다음에는 기리야마를 뒤쫓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런 사태는 피하고 싶었지만. 

 

　고민한 끝에, 미행의 기본 간격을 20미터로 정했다. 기리야마가 전진하면 자기도 전진하고, 멈추면 멈추기로 했지만, 그 '금지 구역'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기리야마도 당연히 그건 고려하고 있을 테고, 다소 여유를 갖고 금지 구역을 피할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그 정도 거리에서 따라붙으면 금지 구역에 걸릴 염려는 없다. 기리야마가 멈추는 곳에서 지도를 체크하고, 금지 구역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상황은 쇼가 생각한 대로 전개되었다. 

 

　기리야마는 남쪽 끝을 떠나, 일단 마을에 있는 민가 두 세 군데에 들어간 뒤(분명히 뭔가 필요한 물건을 찾았을 것이다) 어떤 생각에서인지 이번에는 북쪽 산으로 향해, 거기서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멀리서 총성이 울렸을 때, 그쪽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거리를 판단했는지 결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구사카 유미코와 기타노 유키코가 바로 위 산꼭대기에서 마이크로 소리치자,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도 그 애들의 부름에 대답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그러고 보면 그때 다른 총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무래도 유미코와 유키코에게 소리치는 걸 멈추고 숨으라고 하는 표시였을 것이다. 아아, 대단하다. 인도주의적인 사람이 있구나, 라며 쇼는 감동했다. 물론 감동만 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그 뒤에 산의 북쪽 사면으로 내려갔다.

　점심 전에 또 한번 멀리서 총소리가 났지만, 그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 3시 조금 전에 산 이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또 움직였다. 그러나 총소리를 따라간 기리야마가 본 것은(따라서 쇼가 본 것은) 농가의 농기구를 넣어두는 헛간 같은 곳에 쓰러져 있는 미나미 가오리의 시체뿐이었다. 기리야마는 가오리의 시체에서 소지품을 뒤지기 위해서인지 거기까지 내려갔지만, 아마도 짐은 누군가가 먼저 가지고 가 버린 뒤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약간 이동해서… 지금 여기, 내 바로 아래 있는 수풀 속에 있는 것이다. 

 

　기리야마의 작전은 적어도 지금 현재로는 아주 단순한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소재가 파악되면 달려가 총탄을 퍼붓는다. 구사카 유미코와 기타노 유키코를 죽인 잔인함에 쇼는 약간 질렸지만(정말이지 너는, 기리야마 가즈오란 아주 평범한 이름인데 하는 짓은 정말 엄청나구나. 나는 즈키오카 쇼라고 하는 마치 연예인 같은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평범한데), 그러나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기리야마가 자기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기리야마는 아마도 조용히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고 있는지도 몰랐다. 

 

　쇼는 잘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당연했다. 책을 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기본 체력은 더 강하다고 적혀 있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골초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담배 연기, 그 냄새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는 기리야마에게 자기 존재를 눈치채게 할지도 몰랐다. 아니, 전자 라이터의 찰칵거리는 소리야말로 치명적이다. 기리야마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쇼는 주머니에서 외국 담배인 버지니아 슬림 멘솔(이름이 좋다. 이 나라 물건은 입수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있는 곳에서는 있기 때문에 훔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파트의 자기 방에 잔뜩 쌓아 두었다)을 꺼내더니, 그 가느다란 담배를 입술 사이에 살짝 물었다. 희미하게 담배잎과 특유의 박하 향이 콧구멍을 찌르고, 금단 현상이 누그러졌다. 사실은 가슴 깊숙이 빨고 싶지만, 간신히 참았다. 나는 죽을 수가 없어. 아직 즐기고 싶은 일들이 있는걸. 내 나이가 몇인데. 

　기분 전환을 위해서 왼손에 든 거울을 들어 담배를 물고 있는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리고, 곁눈질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아아, 난 참 멋져, 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리하고. 당연하지, 이 게임에서는 내가 우승할 테니까. 아름답운 것만 살아남는 거야. 그건 하느님이…. 

 

　시야 끄트머리, 눈 아래 수풀이 살짝 움직였다. 쇼는 서둘러 입에 문 담배를 빼어 들고, 거울과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델린저를 집어 들었다. 데이 팩은 왼손에 들었다. 수풀 끄트머리에서 기리야마 가즈오의 올백 머리가 나타났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고 나서, 북쪽 방햔 정확하게 쇼의 왼쪽, 언덕 위로 눈길을 보냈다. 쇼는 분홍빛 꽃송이를 잔뜩 피워 올린 철쭉나무 뒤에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눈썹을 약간 치켜떴다. 왜 그럴까?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다. 기리야마가 보고 있는 방향에 뭐가 있는 것일까? 

 

　그 쪽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기리야마는 수풀에서 불쑥 몸을 드러냈다. 왼쪽 어깨에 데이 팩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는 머신 건을 걸치고 그립을 잡았다. 그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쇼가 있는 높이까지 이르더니, 더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쇼도 몸을 일으켜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쇼의 움직임은 177센티미터의 비교적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양이처럼 재빨랐다. 나무들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기리야마의 검은 교복으로 부터 꼭 20미터의 거리를 지키고 잇었다. 그런 점에서 쇼의 자부심은 나름대로 능력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에 가는 기리야마의 움직임 또한 정확하고 신속했다. 이따금 나무 뒤에 숨어서 전방을 살피고, 높이 자란 수풀이 잇는 곳에서는 땅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그 아래를 확인하면서 나아갔다. 다만…. 등 뒤가 비었어, 기리야마 군. 

 

　그런 상태로 100미터쯤 올라갔을까? 산꼭대기의 전망대가 바로 왼쪽에 보였다. 기리야마는 거기서 멈추어 섰다. 기리야마의 앞쪽에서 숲이 끝나고, 비포장도로의 가느다란 길이 끊겨 있었다. 폭은 2미터 정도도 되지 않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한 정도의 폭이었다. 아아, 쇼는 생각했다. 이것은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 아까도 길이 끊겨 있었다. 미나미 가오리의 시체를 보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 기리야마가 눈길을 주고 있는 오른쪽. 그곳은 산 꼭대기까지 가는 길 중간에 있는 휴식처라고나 해야 할까, 약간 넓은 빈터가 있고, 다리 하나 짜리 벤치와 함께 베이지 색 공중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리야마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쇼가 있는 곳 너머까지 눈길을 돌렸지만, 쇼는 물론 이미 수풀 속에 몸을 숨긴 뒤였다. 기리야마는 불쑥 길쪽으로 나서더니, 그 화장실로 뛰어갔다. 쇼 쪽을 향해서 난 문을 열고, 그리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도망치려는 생각에서인지, 문을 완전히 잠그지는 않고, 약간 열어 두었다. 

 

　어머, 쇼는 손을 입에 가져갔다. 어쩜 저럴 수가. 그리고 쇼는 일단 자세를 낮춘 채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참았다. 쇼가 기리야마의 뒤를 쫓고 있던 그 동안, 기리야마가 용변을 본 적은 분명히 없었다. 어쩌면 날이 밝기 전에 들어갔던 민가에서 화장실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수풀 속에 몸을 가만히 숨기고 있을 때 처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쇼는 그렇게 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기리야마는 누가 뭐라 해도 부잣집 도련님이다. 제대로 된 화장실 이외에 곳에서 용변을 본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까 지나쳤던 이곳의 화장실을 떠올리고, 여기까지 되돌아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 맞아. 아무리 기리야마라고 하더라도 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후후후, 그렇지만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드네. 바로 물이 변기를 두드리는지, 후두두둑하는 소리가 쇼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자 쇼는 다시 후후후,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쇼는 문득 왼쪽 손목을 뒤집어 시계를 보았다. 이 지역은 분명히 사카모치가 5시부터 '금지구역'에 들어간다고 한 D=8 근처일 것이다. 우아한 이탤릭체 숫자가 새겨져 있는 여자용 시계의 문자판. 바늘은 오후 4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사카모치의 방송에 따라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이건 정확하다). 쇼는 지도를 끄집어 내, 북쪽 산 근처를 살폈다. 그러나 지도에는 산길을 나타내는 점선만 있을 뿐, 가로세로의 실선으로 나누어진 D=8 구역 안에도 밖에도 눈 앞에 있는 휴식처와 공중 화장실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쇼는 순간 긴장해, 자기 목덜미에 있는 그 금속성 목걸이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대며, 조금 전에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도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는 화장실 쪽을 바라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그렇다. 저 기리야마 가즈오가 아무리 용변이 급해도 자기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숨어 있던 수풀에서 움직이기 전에 신중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마 화장실이 그 D=8 구역에 걸리는지 아닌지, 눈짐작을 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있는 위치는 기리야마가 들어간 화장실에서 30미터 정도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기리야마가 더 금지 구역에 가까이 있으니, 기리야마가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도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 여기서 근거 없는 공포감 때문에 기리야마를 놓치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쇼는 조금 전에 주머니에 넣었던 버지니아 슬림을 다시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 정도는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짙푸른 하늘에 서쪽으로부터 오렌지 빛이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떠 있는 두세 조각의 작은 구름들에 그 오렌지 빛이 더욱 선명하게 비쳤다. 아름답구나, 마치 나처럼. 

 

　후드득 소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쇼는 다시 살짝 웃었다. 무척 오래 참은 모양이네, 기리야마 군.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아, 피우고 싶구나, 담배. 샤워를 하고, 손톱 손질을 하면서 좋아하는 스크루드라이버를 만들어 글라스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연기를 즐기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 아! 어서 끝났으면 좋겠네, 이거. 기리야마 군, 쉬를 빨리 끝내 줘.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쇼는 그제야 문득, 아래로 처진 느낌이 드는 굵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담배를 입에서 떼고, 몸을 땅바닥에서 불쑥 일으켰다. 수풀을 따라서 약간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 자세히 보았다. 

 

　아직 계속되고 있는 후드득거리는 소리. 그리고 기리야마가 아까 해 놓은 대로, 문은 약간 열려 있다. 때마침, 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때 휘익 바람이 불어,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화장실 안의 천장에 정부가 지급한 물병이 끈에 매달려 있고, 물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마 칼 같은 걸로 구멍을 뚫었는지, 그 물병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떨어져, 물병의 움직임에 맞추어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쇼는 잔뜩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저 아래 쪽 멀리에, 나무들 사이로 멀어져 가는 교복의 뒷모습을. 그 뒷모습만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좀 이상해 보이는 올백 머리를. 어? 어? 기리야마 군? 어? 그럼 대체? 어, 어, 그럼 나는? 기리야마의 모습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을 때, 쇼의 귀에는 둔하게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일종의 소음기를 붙였거나, 아니면 베개를 덮고 쏘는 총소리 비슷했다. 과연 그것이 정부에서 몸소 제작한 프로그램 전용 목걸이에 내장된 폭탄의 구조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폭발음이 그 자신의 몸 안에 메아리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약 100미터 아래쪽에서, 기리야마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손목시계만 슬쩍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오후 5시 정각에서 초침이 7초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몸을 약간 뒤척이더니, 노리코가 눈을 떴다. 오후 7시가 지난 시각이라, 어두컴컴해진 천장을 멍하니 두리번거리다가 곁에 있는 슈야를 보았다. 슈야는 침대 곁에 갖다 놓았던 의자에서 몸을 약간 일으켜, 노리코의 이마에 놓여 있던 젖은 타월을 걷어내 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살짝 얹었다. 조금 전에도 확인했지만, 열은 이미 거의 내렸다. 슈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슈야.」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노리코가 슈야를 불렀다. 

　「…지금, 몇 시?」 

　「7시 지났어. 푹 잤니?」 

　「그래….」 

　노리코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슈야가 서둘러 손을 뻗어, 노리코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나……」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은 이제 내린 것 같아. 가와다가 어쩌면 패혈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아마 심한 감기에 걸렸던 것 같아. 피로해서.」 

　「그래.」 

　노리코는 스스로도 안심한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슈야를 다시 바라보았다. 

 

　「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무슨 소리야.」 

　슈야는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리고 물었다. 

　「밥 먹을 수 있겠어? 밥을 했어.」 

　노리코는 눈을 둥글게 뜨고 슈야를 보았다. 

　「밥?」 

　「그래, 잠깐 기다려 봐. 가와다가 준비해 놓았어.」 

　슈야는 방을 나갔다. 

 

　부엌 입구에 들어서자, 가와다는 벽 쪽 의자에 걸터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 창문으로 하루의 마지막 남은 햇살이라고 해도 좋을 푸르른, 아니 남색에 가까운 빛을 띤 햇살의 입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가와다가 있는 자리에는 이미 거의 옅은 어둠 속에 들어가 있었다. 슈야를 보더니, 물었다. 

　「노리코는 일어났니?」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은 어때?」 

　「이제 괜찮아. 다시 오르지는 않아.」 

　가와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잠시도 놓지 않고 있는 쇼트 건을 집어 들었다. 가스 화로 위에 얹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슈야와 가와다는 이미 지어 놓은 밥과 된장국을 배불리 먹은 뒤였다. 된장국의 재료는 집 뒷마당에 돋아나 있던,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풀잎뿐이었지만. 

 

　「밥, 식었니?」 

　슈야가 묻자, 가와다는 「5분에서 10분 정도만 기다려. 차려서 갖다 줄게.」 라고 짧게 대답했다. 슈야는 「고마워.」 라고 말하고 진찰실로 돌아왔다. 다시 침대 옆에 걸터앉아, 노리코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가와다가 갖다 준대. 진짜 밥이야.」 

　노리코는 고개를 끄덕엿다. 그러고 나서, 「여기 화장실, 있어?」 라고 물었다. 

　「아, 그래. 이쪽이야.」 

　슈야는 노리코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부축하며, 계속 팔을 잡고 대기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노리코는 아직도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까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비하면 많이 좋아져 있었다. 

 

　노리코가 침대로 돌아올 때 슈야는 다시 부축해 주었다. 노리코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자, 전에 어렸을 때 자혜관의 안노 선생님이 자기에게 그렇게 해 주었듯이, 노리코의 어깨에 모포를 둘러 주었다. 

　「밥 먹고 나서….」 

　슈야는 모포 자락을 여며주면서 말했다. 

　「좀 더 자 두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11시 이전에 나가야 하니까.」 

　노리코가 슈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직 기운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11시부터 여기는 금지 구역에 들어가.」 

 

　그것은 오후 6시에 있었던 사카모치의 방송에서 공지된 내용이었다. 이곳 말고도 G=1이 오후 7시부터, I=3이 오후 9시부터 금지 구역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섬의 남서쪽 해안과 남쪽 산의 남쪽 사면이다. 금지 구역이 어디부터 시작되는지, 실제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상 이제는 섬의 남서쪽 해안 일대는 거의 접근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노리코는 무릎께로 시선을 떨구고, 이마 위, 앞머리 아래로 오른손을 넣으며 말했다. 

　「나는 바보같이 잠만 잤네.」 

　슈야는 노리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자는 게 더 낫지. 아직 더 자야 할 것 같은데. 푹 쉬는 게 좋아.」 

 

　그러나 노리코는 불쑥 슈야 쪽으로 시선을 들면서 물었다. 

　「가오리 말고, 누가 죽었어?」 

　슈야는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구사 다카코하고 그리고 즈키오카 쇼, 니이다 가즈시가 죽은 것 같아.」 

 

　사카모치의 방송에 따르면 정오부터 6시 사이에 그 네 명이 죽었고, 남은 인원은 이제 스물 한 명이었다. 게임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열여덟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로이와 중학교 3학년 B반 친구들은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사카모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즈키오카 군은, 금지 구역에 걸렸습니다. 다들 조심하도록.󰡓이라고. 즈키오카 쇼가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사카모치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슈야는 오후에 특별하게 큰 폭발음 같은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사카모치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단단한 체격과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약간 여자처럼 굴었던 그 기리야마 패밀리의󰡒즈키󰡓는 뭔가 주의를 게을리한 관계로 금지 구역에 걸려 폭탄에 목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 기리야마 패밀리는 우두머리인 기리야마만 남기고 모두 퇴장한 셈이 된다. 

 

　슈야는 노리코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다가 노리코가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나간 사내아이 이야기가 아직 반은 환자 상태인 노리코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노리코가 조용히 말하면서, 「이거 고마워.」 라면서 모포 아래, 내내 입고 있던 슈야의 교복 저고리를 벗기 시작했다. 

　「입고 있어도 되는데….」 

　「아니야. 이젠 괜찮아.」 

 

　슈야는 저고리를 받아들고, 노리코의 어깨에 모포를 다시 걸쳐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와다가 들어왔다.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려, 접시를 얹은 둥근 쟁반을 웨이터처럼 받쳐 들고 있었다. 접시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쟁반을 내리면서, 농담하듯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슈야가 슬쩍 웃었다. 

　「국수가게 주인 같네.」 

　「섭섭하지만 국수가 아니야. 누님 입에 맞으시려나?」 

　가와다는 침대 위, 노리코 옆에 접시가 놓여 있는 쟁반을 내려놓았다. 노리코가 접시를 들여다보면서 「죽?」 하고 물었다. 

　「예스, 맴.」 가와다가 말했다. 

　예, 사모님. 완벽한 영어 발음이구나, 라고 슈야는 생각했다. 

　「고마워.」 

　노리코가 말하면서, 놓여 잇던 스푼을 집어 들었다. 접시를 들고 한술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네.」 라고 소리쳤다. 

　「달걀이 들어 있어.」 

　슈야는 가와다의 얼굴을 보았다. 

 

　「저희 업소의 스페셜 메뉴입니다.」 

　품위 있는 말투로 대답한 가와다에게, 슈야는 「어디 있었어, 달걀이?」 라고 물었다. 

　아마 정부가 서둘러 주민을 내몰았기 때문인지, 이곳 냉장고 안의 생선이나 식료품은 모두 썩어 있었다. 이 섬 어느 집을 뒤져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와다가 슈야를 곁눈질로 보며 미소 지었다. 

　「닭을 기르는 집이 있었어. 모이를 주지 않아서 닭은 힘이 없었지만.」 

　슈야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아까 우리가 식사를 할 때 달걀은 없었잖아.」 

　가와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나 밖에 없었어. 나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어.」 

　슈야는 코웃음을 쳤다. 

 

　가와다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차를 내 왔다. 식사를 하고 있는 노리코와 함께, 슈야와 가와다는 차를 마셨다. 차는 약간 달작지근하고 은은한 냄새가 났다. 

　「제길.」 

　슈야가 중얼거렸다. 

　「셋이 이렇게 있으니 무지 평화로운 기분이 드네.」 

　가와다가 웃으며 「나중에 커피도 끓여줄게.」 라고 말했다. 

　「노리코는 홍차를 좋아해?」 

　노리코가 스푼을 입에 문 채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가와다.」 

　슈야가 입을 열었다. 물론 자기들이 살인 게임에 내몰려 있다고 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노리코가 몸을 회복 하자 기쁜 마음에 약간 말이 많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셋이서 이렇게 차를 마시자. 나무 그늘에 앉아 벚꽃을 보면서.」 

　그건 아마 바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가와다는 슬쩍 어깨를 움츠려 보았다. 

　「록커답지 않네, 슈야. 꼭 노인네 같잖아.」 

　「가끔 그런 소릴 들어.」 

　그러자 가와다가 '풋' 하며 웃었다. 슈야도 웃고, 노리코도 웃는 듯 했다. 

 

　노리코가 죽을 다 비우고는, 「잘 먹었어.」 라고 말하자, 가와다가 접시를 받아들었다. 슈야에게 빈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찻잔을 달라는 표시를 했다. 슈야는 찻잔을 건네 주었다. 

　「가와다.」 

　노리코가 가와다를 불렀다. 

　「이제 기운이 나네.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번거롭게 해서.」 

　가와다는 슬쩍 웃으며 「유 어 웰컴」 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항생물질은 공연히 썼던 것 같아, 아마도.」 

　「아니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걸 맞아서 마음 푹 놀고 잔 것 같아.」 

　가와다가 웃었다. 

　「뭘, 아직 패혈증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데. 어쨌든 좀 더 쉬도록 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러고 나서 가와다는 슈야에게 물었다. 

　「나, 눈 좀 붙여도 되겠어?」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하니?」 

　「아니, 그렇진 않은데, 잘 수 있을 때 자 두고 싶어서. 여기서 나가면. 밤중에는 내가 깨어 있을게. 그래도 괜찮겠어?」 

　「그래. 알았어.」 

　가와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쟁반을 들고 방을 나가려 했다. 

　「가와다, 여기서 자지 그래.」 

　노리코가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그러나 가와다는 문 앞에서 얼굴만 돌리고, 괜찮아, 하는 느낌이 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커플을 방해할 수야 없지. 나는 저 쪽 방 소파에서 잘게.」 

　고개를 숙이면서 덧붙였다. 

　「사랑을 나눌 때는 옆 방 손님 생각도 좀 해 주시고.」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노리코의 뺨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가와다는 바로 나갔다. 잠시 후 여닫이 문 너머로, 가와다가 부엌에서 옆 대기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졌다. 

 

　노리코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가와다, 재미있는 친구야.」 

　식사를 했기 때문인지 표정에 약간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 

　슈야도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전혀 없지만, 신지하고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어.」 

　체격이나 얼굴의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왠지 거칠고 무뚝뚝한 말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살맞게 느껴지는 모습은 "제３의 사나이" 미무라 신지를 닮았다. 왠지 우등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느낌도, 그렇지만 실제로는 무서울 정도로 머리가 좋고 믿음직스럽다는 점도. 

 

　「그래.」 

　노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그러네.」 

　그러더니 노리코가 불쑥 말했다. 

　「신지는 어디 있을까?」 

　슈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연락을 취할 길이 없을까 계속 궁리해 왔지만, 노리코가 앓기 시작하면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렇구나. 그 녀석이 있었다면.」 

　가와다에 미무라 신지까지 있으면 천하무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스기무라 히로키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다. 두려울 것이 없다. 

 

　「나 지금도 기억이 나.」 

　노리코가 말하면서 고개를 약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학급 대항─올해 말고 작년─결승전 때, 신지가 고군분투했지만 D반은 신지와 같은 농구부 멤버가 네 명이나 있어서 30점이나 뒤지고 있었잖아. 그런데 슈야가 소프트볼 하던 곳에서 달려왔고, 그리고 역전승 했었어.」 

　「그랬지.」 

　노리코가 말이 많아졌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 적이 있었지.」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했어. 이겼을 때는 유키에하고 함께 꺄악 꺄악 소리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지.」 

　「그래.」 

 

　슈야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 때는 얌전한 노리코가 제일 크게 소리지르던 것을. 그리고 아카마츠 요시오는 아니더라도 체육은 젬병이던 구니노부 요시토키가 노리코와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슈야가 그쪽을 보자 요시토키가 엄지와 검지, 새끼 손가락을 세우고 오른쪽 주먹을 흔들고 있었다. 작은 동작이었다. 큰 소리로 응원해 주던 노리코 같은 여자애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슈야에게 가장 기뻤던 축하는 요시토키의 손짓이었다. 요시토키. 

 

　슈야는 멍한 눈길을 노리코에게 돌렸다. 그리고 노리코가 엎드린 채로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야는 모포로 간싼 노리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노리코가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렇게 좋은 반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니까.」 

　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약간 남아 있는 열 때문인지, 아니면 약 때문인지 모르지만, 노리코는 약간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있는 것 같았다. 노리코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러자 노리코가 「미안해.」 라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슈야, 신경 쓰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뭔데?」 

　노리코는 슈야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여자애들에게 인기 아주 좋다는 거 알고 있지?」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슈야는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나 노리코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메구미, 그리고 유키코도 그랬을 거야, 아마.」 

　슈야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토 메구미와 기타노 유키코. 이미 이 게임에서 퇴장한 두 사람의 이름. 

　「그….」 

　이런 경우에는 "그"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까? 

　「그 두 사람이, 뭘?」 

　노리코는 슈야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둘 다 너를 좋아했었어.」 

 

　슈야는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정말?」 

　「응.」 

　노리코는 눈을 슈야에게서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애들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그런 거 알 수 있어. 그러니까, 기억해 줘.」 

　고개를 숙이고,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왠지 지금 내 입장에서 그런 소리 하는 게 건방징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슈야는 잠깐 에토 메구미와 기타노 유키코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깐이었다. 

　「그래?」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도망치고 난 뒤에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이야기 듣는 거.」 

　「미안해. 쇼크였어?」 

　「응. 약간.」 

　「그렇지만….」 

　노리코는 또 고개를 숙였다. 

　「내가 죽어버리면 알 수가 없잖아.」 

　슈야는 고개를 번쩍 들고, 오른손으로 노리코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제발. 이제 그런 가정은 하지 마. 알았어? 우리는 마지막까지 함께야. 함께 살아남을 거야.」 

　노리코는 슈야의 눈초리에 놀란 듯이, 다시 한 번 「미안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슈야가 말했다. 

 

　「저어.」 

　「응?」 

　「노리코를 좋아하는 녀석을 알아, 나.」 

　이번에는 노리코의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나 같은 애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그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슈야는 그런 노리코의 눈동자 속에서 사라져가는, 창문을 통해 커튼 너머에서 비치는 햇빛이 보일 듯 말 듯한 사각 하일라이트로 비치는 것을 보았다. 물었다. 

　「그 사람, 우리 반이야?」 

　슈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붙임성 있는 동그란 눈을 떠올리면서. 제길.10년 넘게 사귄 친구와 삼각관계로 고민한다면 얼마나 평화로운 일일까? 그렇지만 이제,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젠 영원히 그럴 수가 없다. 

 

　「아니.」 

　노리코는 약간 안심했다는 듯이 자기 스커트의 무릎 언저리로 시선을 떨구며, 그저 「그래?」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누구지? 나는 클럽 활동도 하지 않고, 다른 반 애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슈야는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어. 여길 빠져나가면 이야기할게.」 

　노리코는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슈야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청결해야 하는 보건소답지가 않았다. 갓에 먼지가 쌓인 형광등이 매달려 있었지만, 불을 켤 수는 없었다. 하긴 켜도 불이 들어올 리가 없겠지만. 

　「그래?」 

　「에토 메구미와…기타노 유키코가? 그게 정말이라면 나 같은 애 어디가 좋았던 걸까?」 

　이제 거의 캄캄해졌지만, 노리코가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내 생각을 이야기해도 괜찮겠어?」 

　「그래.」 

　노리코가 고개를 숙였다. 

　「넌 전부 좋아.」 

　슈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야, 그게.」 

　「좋아하면 그런 거야.」 

　노리코는 묘하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 사람 그렇게 생각하지?」 

　슈야는 니타니 가즈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망설였지만, 나름대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응, 그래. 그런 느낌이지.」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노리코는 약간 우습다는 듯이 말하며, 후훗, 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왜?」 

　「한심해서.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역시.」 

　슈야는 이제 어둠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노리코의 얼굴 쪽으로 바라보며, 더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것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노리코를 좋아하는 녀석의 마음도 알아.」

　노리코는 다시 고개를 들어 슈야를 보았다. 

　「노리코는 정말 멋진 여자애야.」 

　노리코의 눈썹이 분명히 움찔 움직였다. 입술이, 왠지 허전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거짓말이라도 기쁘네.」 

　「거짓말 아니야.」 

　슈야가 말했다. 노리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탁이야. 잠깐 괜찮겠어?」 

　슈야는 뭘? 하고 묻듯이 눈을 떠보였지만, 그 표정이 노리코에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리코는 상반신을 약간 일으켜, 정면에 앉아 있는 슈야의 어깨에 가만히 두 손을 얹고 머리를 슈야의 어깨에 기대왔다. 노리코의 어깨 정도까지 오는 짧은 머리카락이 슈야의 뺨과 귀에 살짝 닿았다. 창 밖의 희미한 빛이 마침내 달빛으로 바뀔 때까지, 꽤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남은 인원 2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