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로얄(BATTLE ROYALE) :: 제２부 - 중반전 #.6

　『자, 죽은 사람은… 이상입니다.』 

　사카모치의 밝은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오의 방송이었다. 새로운 장례식 대기자 리스트에 들어 있는 것은 오오키 다츠미치, 모토부치 교이치, 그리고 물론 기타노 유키코, 구사카 유미코의 이름도 있었다. 그 밖에도 구라모토 요지, 야하기 요시미가 죽었다. 

 

　『이어서 오후부터 해당되는 금지 구역과 시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 메모하세요.』 

　슈야는 또 주머니에서 지도와 펜을 꺼냈다. 가와다도 지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우선 1시부터 J=5입니다. 그리고 3시부터 H=3, 5시부터 D=8입니다. 알겠습니까?』 

　J=5는 섬의 남동쪽 해안, H=3는 남쪽 산의 꼭대기 부근, D=8은 북쪽 산의 정상 남동쪽에 해당하는 사면이었다. 슈야 일행이 있는 C=3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일단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러분, 친구들이 죽어서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힘을 내야 합니다. 어린 새가 날개를 열심히 움직이지 않으면 큰 하늘을 날 수 없어요. 자, 그럼 나중에 다시─.』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대사를 내뱉으면서 사카모치의 방송은 다시 끊어졌다. 

 

　슈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도를 접고, 표시를 해 둔 클래스 명부를 바라보았다. 

　「이제 스물다섯 명이네, 제길.」 

　가와다가 다시 담배를 물고, 손으로 가리면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순조롭게 죽어가고 있는 거지.」 

　그러자 슈야는 가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와다는 연기를 뿜으면서 슈야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가와다가 이야기하는 의미는 안다. 

　클래스메이트들이 죽어 갈 수록, 슈야 일행은 탈출할 찬스에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시간 제한도 멀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할 것까진 없잖아?」 

　가와다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미안해.」 라고 말했다. 

 

　슈야는 또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러나 억지로 가와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세우고 있던 두 무릎을 끌어당겨, 그 다리 사이를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노란 꽃이 풀 사이로 두 세 송이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줄기를 개미가 한 마리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까 록 이야기를 했을 때는 왠지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가와다에게는 어딘가 아직 낯선 부분이 있다. 가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차가운 성격이었을까? 

　속으로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사카모치가 발표한 여섯 사람 가운데 자기가 그 죽음을 보지 못한 것은 구라모토 요지와 야하기 요시미뿐이었다. 그 두사람은 사귀는 사이였던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둘이서 함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11시가 지나서 들려온 두 발의 총소리. 그것은 그 두 사람을 죽인 총소리였을까?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그들을 죽인 것은 도대체…. 

　기타노 유키코와 구사카 유미코를 죽인 머신건 소리가 귀에 되살아 났다. 그 "누군가"와 같은 녀석일까? 그렇지 않으면….

 

　「슈야!」 

　가와다가 불러, 슈야는 고개를 들었다. 

　「아침 안 먹었지? 정부가 지급한 형편없는 빵이지만 잡화점에서 구한 딸기 잼과 커피가 있어. 먹지 않겠니?」 

　가와다는 자기 데이 팩에서 평평한 병과 작은(200g짜리다.)캔 커피를 꺼내 보였다. 병에는 딸기 그림이 들어있는 상표가 붙어 있고, 윤기가 도는 짙은 빨간색 내용물이 유리 안쪽에 보였다. 캔 커피는 가와다가 아까부터 다시 탄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 놓았던 깡통의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일 거다. 가와다는 플라스틱 컵 꾸러미를 끄집어 냈다. 

　「여러 가지를 가져왔구나.」 

　「그래.」 

　가와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데이 팩에서 또 기다란 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이것 봐. 와일드 세븐도 한 상자.」 

　그러자 슈야도 기분을 바꾸어 약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데이 팩에서 빵을 꺼냈다. 노리코도 빵을 하나 끄집어냈다. 

 

　「노리코, 먹어 둬.」 

　「아니….」 

　노리코는 무릎을 껴안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나…. 괜찮아.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왜, 식욕…?」 

　슈야는 말을 하면서 다시 시선을 떨군 노리코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노리코의 말수가 적어져 있었다. 

　「노리코?」 

　슈야는 노리코에게 다가갔다. 가와다는 캔 커피 뚜껑을 막 따려는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노리코.」 

　슈야는 노리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노리코는 무릎을 안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노리코가 눈을 감고, 손을 풀어 슈야의 팔에 걸치고 체중을 맡겨 왔다. 그 손, 그리고 세일러복을 입은 어깨, 검은 헝겊 너머로 전해오는 노리코의 체온이, 마치 작은 새를 안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슈야는 오른손을 뻗어 노리코의 앞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엄청나게 뜨거웠다. 동시에 노리코의 이마에 난 삭은땀이 슈야의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슈야는 당황하며 가와다를 돌아보았다. 

 

　「열이 있어! 가와다!」 

　「괜…찮아.」 

　노리코가 힘없이 말했다. 

　가와다가 캔 커피를 발 옆에 놓고 일어섰다. 슈야와 위치를 바꾸어, 노리코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리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자기 턱을 만지더니, 다음에는 노리코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시계를 보면서 잠시 맥을 보는 것 같았다. 

　「잠깐 실례할게.」 

　그러면서 노리코의 입술에 오른손 손가락을 살짝 대고, 입을 벌렸다. 다음에는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겨, 뒤집어진 부분을 들여다 보았다. 

　「춥지는 않니?」 

　노리코에게 물었다. 노리코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간….」 

 

　「슈야!」 

　가와다가 슈야를 불렀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슈야가 황급히 물었다. 

　「왜 그런 거야?」 

　「괜찮으니까 저고리 좀 빌려줘.」 

　그러면서 자기도 교복 저고리를 벗었다. 슈야도 서둘러 자기 저고리를 벗어 가와다에게 건네주었다. 가와다가 두 벌의 저고리를 조심스럽게 노리코의 몸에 감았다. 

　「빵, 그 잼과 물도 좀 집어 줘.」 

　가와다가 말하자, 슈야는 서둘러 노리코에게 건네주려던 빵과 물, 그리고 가와다의 데이 팩위에 놓여 있던 잼을 가져왔다. 먼저 빵과 물을 가와다에게 건네주었다. 잼의 뚜껑을 열어, 그것도 건네주었다. 가와다는 거칠게 병 안에 빵을 구겨 넣어, 붉은 잼을 발랐다. 그걸 노리코에게 내밀었다. 

 

　「먹어 둬, 누님.」 

　「응…. 그렇지만…..」 

　「알았으니까 먹어. 조금이라도 괜찮아.」

　가와다가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노리코는 내키지 않은 손길로 빵을 받아 들더니 한두 입 베어 물었다. 상당히 힘겹게 먹는 듯했다. 그리고 나머지 빵을 가와다에게 내밀었다. 

　「더 먹지 그래?」 

　노리코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게 고개를 젓는 것조차 힘겨운 것 같았다. 가와다는 노리코에게 좀 더 먹이고 싶은 것 같았으나, 일단 포기했는지 빵을 옆에 놔두고, 주머니에서 약이 든 케이스를 꺼냈다. 

 

　「감기약이야. 먹어 둬.」 

　그러면서 노리코에게 아침에 준 진통제와는 다른 캡슐을 건네주었다. 노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가와다의 부축을 받으면서 물병의 물로 그것을 삼켰다. 노리코의 입가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가와다가 손수건으로 살짝 닦아 주었다. 

　「오케이, 누워 있어. 누님.」 

　노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교복 저고리 두 벌을 두른 채로 풀 위에 누웠다. 

 

　「어떻게 된 거야, 가와다? 괜찮은 건가?」 

　슈야가 진정되지 않은 말투로 묻자, 가와다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건 몰라. 그냥 감기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상처가 감염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어쩌면.」 

　「뭐라고?」 

　슈야는 누워 있는 노리코의 오른쪽 종아리, 붕대 대신 반다나로 감은 부분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대로 치료를 했었잖아?」 

　가와다는 또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부상당한 뒤로 꽤 산 속을 걸어 다녔잖아. 그 때 뭔가 잡균이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슈야는 잠시 가와다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노리코 옆에 무릎을 꿇었다. 노리코의 이마에 손을 댔다. 

　「노리코!」 

　노리코가 눈을 뜨고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약간 지친 것뿐이야. 걱정하지 마. 괜찮아.」 

　그러나 그 숨소리를 들어보면 도저히 괜찮은 것 같지 않았다. 슈야는 또 가와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약간 흥분한 말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가와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디로 이동하자. 적어도 어느 집이든 어디든 따뜻하게….」 

　가와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막았다. 

　「잠깐 기다려. 상태를 보자, 일단.」 

　그러면서 이불 역할을 하는 교복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한 번 더 노리코의 몸을 꼭 감싸 주었다. 

　「그렇지만….」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노리코가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슈야 쪽을 보며, 「미안해…. 슈야.」 라고 했다. 가와다에게도 「미안해.」 라고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슈야는 입술을 꾹 다물고 노리코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치구사 다카코(여자 13번)는 나무 둥지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남쪽 산 중턱 근처, 산꼭대기에서 보면 동쪽이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으로 따지면 H=4 와 H=5 의 경계 부근이 된다. 주위는 키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뒤섞인 잡목 숲이지만, 지금 다카코가 바라보고 있는 산꼭대기 쪽으로 갈수록 나무들의 키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다카코는 지급된 무기인 아이스 피크를 고쳐 잡고,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 숨어 있던 집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집은 이 섬이 프로그램 실행 장소로 결정되기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었는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폐가였는데, 닭장 같은 것이 본채 옆에 붙어 있었다. 그 녹슨 함석지붕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온 걸까? 200미터? 아니면 아직 100미터도 못 온 걸까? 

 

　다카코는 시로이와 중학교 육상부의 단거리 대표 주자였기 때문에 (중학교 여자 200미터 종목에서 역대 현 2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거리에는 거의 육간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산의 기복과 한쪽을 뒤덮은 숲, 그리고 긴장감 때문에 그 감각 자체도 무너져 버리고 말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부가 지급한 맛없는 빵과 물로 식사를 마치고, 다카코가 결심을 하고 그곳을 나온 것은 손목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기를 기다려서였다. 게임 개시 이후, 여러차례 총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다카코는 계속 폐가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숨어 있어 봤자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누군가, 적어도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찾아내 함께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기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마찬가지로 자기를 믿어줄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가 없다. 다만….

 

　다카코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기다란 눈의 라인은 약간 강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냘프고 뾰족한 턱이나 꾹 다문 입, 날렵한 콧날의 라인과 어울려 귀족적으로 보인다. 블릿치가 들어간 갈색의 긴 머리카락은 언뜻 보기엔 언밸런스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왼쪽 귀에 둘, 오른쪽 귀에 한 개가 있는 피어싱, 왼손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에 낀 디자인 링, 두 손목에 찬 모두 다섯 개의 브레이슬렛, 그리고 외국 동전을 가공한 펜던트 등의 액서세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자기주장을 나타내며, 그 아름다운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님들은 그 머리카락과 좀 화려해 보이는 B급 액세서리들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육상부의 대표 선수인 덕분에 직접적으로 잔소리를 들은 경험은 거의 없다. 말하자면 다카코는 자존심이 아주 강해, 학급의 다른 여자애들처럼 자질구레한 교칙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인지, 프라이드가 높은 이유인지, 그렇지 않으면 원래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다카코에게는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유일한 친구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기타자와 가호루라는 여자애가 있었지만, 그 애는 반이 달랐다. 다만, 그런 다카코에게도 단 한 사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클래스메이트가 있었다.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으로 단 한 사람,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였다. 

 

　그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그 분교를 나설 때, 다카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먼저 나간 누군가가 무기를 준비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단 하나뿐인 출구로 어슬렁어슬렁 나가는 것만큼 위험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그렇다면 적어도 예상되는 습격자의 의표를 찌르는 동작으로, 단숨에 분교에서 달아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카코는 교실에서 그 복도로 나와, 출구 안쪽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정면에는 숲이, 왼쪽에는 산이, 오른쪽에는 공터가 있었다. 습격자가 있다면, 정면의 있는 숲이나, 왼쪽 산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카코는 몸을 낮추고 출구를 잽싸게 빠져나가, 분교 외벽을 따라 단숨에 오른쪽으로 달려 나간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을 같은 곳을 지나는 길을 달려, 좁은 길로 뛰어들어 남쪽 산기슭까지 무조건 달렸다. 그저 분교에서 빨리 떨어져, 몸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분교 앞, 숲이나 혹은 산 쪽에 습격자가 아닌 누군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 즉 어쩌면 자기보다 먼저 출발한 "그"만은 그 숲이나 산에 몸을 숨기고, 자기를 기다려 주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전속력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한 게 아닐까?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건 무리였을 거야. 그 상화이라면 누구라도 분교 주위를 얼쩡거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와 자신은 분명히 소꿉친구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친구로 지내왔을 뿐인 스기무라 히로키(남자 11번)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를 기다려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나친 상상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지금은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스기무라 히로키를 찾을 수만 있다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장인 우츠미 유키에? 아니면 다른 아주 평범한 여자애? 무엇보다 불의의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야기는 나눌 수 있고, 물론 아주 냉정한 아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지나치게 냉정한 아이는 오히려 무서울까? 그 누군가를 어떻게든 찾아 내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다카코는 소리 내어 아이들을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증명된 일이다. 다카코가 있던 폐가에서도 북쪽 산꼭대기에서 구사카 유미코와 기타노 유키코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다카코가 생각해 낸 것은 숨어있던 폐가에서 나와, 일단 남쪽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거기 도착하면 그 다음에는 수풀 속에 누가 숨어 있는지 확인하면서 산을 빙 내려오면 된다. 폐가에서 나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작은 돌맹이를 수풀에 몇 개 던져 보는 방법으로 누가 있나 없나를 체크할 수 있었다. 상대를 확인하고 나서 말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것이다. 남쪽 산꼭대기 부근은 오후 3시부터 금지 구역이 된다고, 정오에 사카모치가 방송을 통해 말했다. 그렇지만 잘만 하면 그 때까지는 그 지역을 구석구석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있다면 3시 이전에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방이 움직인다면 찾아 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다카코는 정부가 지급한 시계의 바늘이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했다. 보통은 브레이슬렛을 끼고 있기 때문에 손목 시계 같은 것을 차지 않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느 상황이다. 그리고 목에 채워진 목걸이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억지로 벗으면 폭발합니다.」 

　그것이 목을 조여 숨쉬기가 불편했고, 목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이 됐다. 펜던트의 체인이 그 목걸이에 스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다카코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왼손의 아이스 피크를 (아니, 이런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꼭 움켜지고는,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돌맹이를 오른손으로 끄집어 내, 앞과 좌우를 향해 던졌다. 툭, 툭 하면서 돌이 수풀 속에 떨어졌다. 잠시 기다렸다. 반응은 없다. 다카코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숨을 돌린 다음, 수풀 사이로 나 있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발을 내딛었다. 바로 그 순간,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10미터 정도 떨어진 수풀 속에서 사람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약간 헝클어져 있지만,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의 뒤통수와 학생복을 입은 등이 보였다. 그 뒤통수가 주위를 둘러보는지 좌우로 약간 흔들렸다. 다카코는 흠칫 놀라 발길을 멈추었다. 

 

　골치 아프군. 남자다. 남자는 거북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기무라 히로키 이외의 남자는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물론 히로키는 아니었다. 다카코는 숨을 죽이고 뒷편에 있는 수풀 속으로 도망치려고 발을 움직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역시 몸이 떨렸다. 순간,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카코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한 그 남자는 니이다 가즈시(남자 16번)였다. 

　아아, 제길. 어째서 이런 곳에서 재수 없게도 저런 녀석을…. 

　다카코는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는 자기 온몸을 가즈시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은 위험하다. 몸을 휙 돌려, 아까 오던 길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기다려!」 

　등 뒤에서 가즈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사삭, 수풀을 헤치며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기다리라니까!」 

　이번에는 더 큰 목소리였다. 

　「거기 서!」 

 

　쳇! 저 녀석 바보 아니야! 다카코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발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가즈시는 총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쏠 생각이었으면 이미 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큰 목소리였다. 가즈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도 드러나 버린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에 자기가 확인한 것처럼 어쩌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속도를 늦추면서 가즈시가 완만한 경사를 달려 내려왔다. 가즈시의 오른손에 화살이 장착된 장총 비슷한 무기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다카코를 겨냥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에 겨누면 그걸 피해 다시 도망칠 수 있을까? 멈추어 선 것은 잘못된 일일까? 아니야. 마음 속으로 다카코는 고개를 저었다. 니이다 가즈시는 축구부의 포워드다. 그리고 구기 운동부의 주전 선수급이라면 흔히 육상부의 에이스급보다 발이 빠른 경우도 있다. 다카코가 아무리 여자 가운데는 뛰어난 스피드를 지니고 있어도, 결국은 잡히고 말 것이다. 어쨌든 때는 늦었다. 

 

　가즈시가 다카코와 4,5미터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비교적 큰 키, 넓은 어깨, 단단한 체격이었다. 보슬보슬한 머리는 축구 선수들 사이에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길게 길러 커트를 했지만 지금은 연장전까지 치른 격렬한 게임을 금방 마친 듯이 부스스했다. 치열이 약간 고르지 못한 것만 빼면 꽤 핸섬인 편인 얼굴에 뜻 모를 웃음을 띄고 있었다. 다카코는 가즈시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저 녀석은 어쩔 작정일까?

 

　물론 적의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를 겨우 발견한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다카코는 특히 니이다 가즈시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일종의 버르장머리 없음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리고 교만함을 들어도 좋을지도 모른다. 다카코와 가즈시는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지만 (히로키는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가즈시는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공부나 스포츠를 그럭저럭 잘했고, 그 때문에─하긴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을지는 몰라도─어쨌든 상당히 유치하게 구는 행동이 꽤 눈에 띄었다. 특히 함부로 행동하거나, 실수를 하면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

　그리고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1학년 때 다카코와 다른 애들이 보기에는 미남인 가즈시 사이에 어떻게 해선지 스캔들이 난 적이 있다(중학교 꼬마 애들은 워낙 그런 소문 퍼뜨리기를 좋아한다고 해 버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때 가즈시는 일부러 다카코 자리까지 와서, 다카코의 어깨에(무례하게도!)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스캔들 난 것 같아.」 

　다카코는 부드럽게 자세를 바꾸며 가즈시의 손을 뿌리치고, 

　「어머, 영광이네.」 라고 가볍게 받아넘기면서도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너무 일러, 공부 좀 더 하셔.) 그러나 지금은 아마 그런 정도로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다카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빨리 이 녀석 앞에서 사라지는 게 좋다. 그게 기본선이다. 

　「큰 소리 내지 마, 바보야.」 

　「미안해!」 

　가즈시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네가 도망가니까 그렇지.」 

　「미안하지만」 하고 다카코는 바로 대답했다. 언제나 간결, 단도직입. 그게 내 장점이다. 

　「너하고 함께 있고 싶지 않아.」 

　가즈시가 얼굴을 보면서 긴장된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여기서 헤어지는 게 서로 낫지 않겠어?」 

　가즈시의 얼굴이 불만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어째서지?」 

 

　다카코는 속으로 다시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는 녀석이기 때문이야. 

　「이유는 어차피 아는 거 아니야? 알겠지? 그럼 이만.」 

　다카코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몸을 돌리려 했다. 스스로도 발이 약간 떨리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그래서 멈췄다. 가즈시가 오른손에 든 보우 건을 다카코에게 겨누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다카코는 천천히 한 번 더 가즈시를 바라보았다. 가즈시의 오른선에 있는 보우 건에 방아쇠에 걸려 있는 그 손가락에 신경을 쓰면서,「무슨 짓이야?」그렇게 말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왼쪽 어깨의 데이 팩을 스륵 내려 손으로 끈을 잡았다. 가즈시가 들고 있는 보우 건을 이걸로 막을 수 있을까? 

 

　「이러고 싶지는 않아.」 

　가즈시가 말했다. 바로 저런 말투, 다카코가 가장 싫어하는 말투다. 말로는 변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우위에 서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하고 함께 있어, 응?」 

　다카코는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그 때 또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교복 치마는 폐가에 숨어 있을 때 망가진 문에 걸려 찢어져 있어, 마치 드레스의 슬릿처럼 터져 있었는데, 그리로 드러난 오른쪽 다리를 가즈시가 힐끔 쳐다본 것이다. 그 눈 안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함이 엿보여 소름이 끼쳤다. 

　다카코는 발의 위치를 약간 바꾸면서, 가능하면 그 다리가 가즈시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웃기지 마. 그런 거 들이대면 함께 있으려 해도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럼 도망가지 않겠어?」 

　가즈시는 여전히 오만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손에 든 보우 건은 내리지 않았다. 다카코는 참았다. 

　「어쨌든 그거 좀 치워.」 

　「도망가지 않는 거다.」 

　「안 들려?」 

　다카코가 힘주어 말하자, 가즈시는 마지못해 보우 건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이상하게 시침 뚝 딴 말투로 말했다. 

 

　「나, 전부터 너를 좋게 생각했었어.」 

　다카코는 또렷하고 아름다운 활 모양의 눈썹을 치켜떴다. 질리겠군. 협박해 놓고, 좋아한다고? 

　가즈시의 눈이 다시 다카코의 다리 쪽으로 쏠렸다. 이번에는 뻔뻔스럽게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래서 너를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함께 있자.」 

　다카코는 또 어깨를 움츠렸다. 화가 나서 이번에는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말했다. 

　「좀 전에 이야기했잖아. 사양한다고.」 

 

　「그럼 이만.」

　다카코는 다시 뒤돌아─아니, 이번에는 가즈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뒷걸음질쳤다. 바로 가즈시가 손에 들고 있던 보우 건을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이 떠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애 표정이 되었다. 엄마, 사달란 말이야! 

　「어지간히 해.」 

　「그럼, 여기 있어.」 

　가즈시가 반복했다. 동시에 고개를 그 모습을 보니 아마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듯했다. 다카코도 반복했다. 

　「나는 싫다고 했어.」 

　가즈시는 보우 건을 내렸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노려보았다. 

 

　「너!」 

　초조한 나머지 다카코가 말했다. 

　「어쩔 작정이니? 확실하게 이야기해. 나를 당장 죽일 것도 아니라며? 나는 함께 있는 게 싫다고 하는데 함께 있자고 하고, 어쩌자는 거야?」 

　「내가….」 

　가즈시는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다카코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를 지켜주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 있어. 둘이 있는 게 더 안전하잖아?」 

　「농담하지 마.」 

　이번에는 다카코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있었다. 

　「그런 걸 들이대면서 지켜 주겠다니. 나는 널 믿을 수가 없어. 알겠어? 이제 됐지? 난 가겠어.」 

　「움직이면 쏜다.」

　가즈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에 든 보우 건이 똑바로 다카코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가즈시를 상식의 라인에(하긴 어처구니 없는 상식이지만) 머물게 했던 마지막 울타리가 무너진 것 같았다. 

 

　「계집애 주제에,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 계집애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듣자, 다카코는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즈시는 계속 내뱉었다. 

　「너 처녀지?」 

　마치 너 혈액형이 B지? 라고 묻는 것 같은 가벼운 말투로. 

　「…….」 

　다카코는 할 말을 잃었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멍청이가? 

 

　「아니야? 스기무라 히로키는 여자애하고 잘 배짱이 없잖아?」 

　가즈시가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아마 같은 반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저 녀석도 다카코가 스기무라 히로키와 사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중의 의미로 다카코를 화나게 만들었다. 히로키와 자기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깔보는 듯한 말투로 히로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 다카코는 자기 입술이 마치 웃는 듯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전부터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버릇이다. 최고로 화가 났을 때는 언제나 씨익 웃어 버린다. 웃는 얼굴로 가즈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그러는 다카코의 웃음을 뭔가 잘못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가즈시도 약간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군.」 다카코는 웃으면서 가즈시를 노려보았다. 

　그래, 사실이 그렇지. 얼핏 보면 좀 야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씀하신대로 나는 처녀올시다. 아직 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부끄러움이 많은 소녀지. 그런데,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이 개 자식아! 가즈시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찌 되었든 죽게 될 거야. 죽기 전에 한 번 정도는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상대라면 나쁘진 않을걸.」 

 

　다카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잠시 어이가 없어 가즈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입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손이 닿을 정도의 범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질렸다' 고 하는 감정의 범위가 단숨에 지평선 너머로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함장 콜롬부스, 저기가 산살바도르 섬 같습니다. 오케이, 야만인이다. 야만인에 주의해라. 다카코는 시선을 떨구고 그리고 마침내 낮은 웃음소리를 입 밖으로 흘려냈다. 왠지 너무 우스웠다. 정말 이건 올해 최고의 히트다. 고개를 들었다. 가즈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회만은 줘 볼 작정이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나는 너하고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순순히 그걸 내리고 날 보내 줘.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걸로 생각하겠어! 어쩔 거야?」 

　가즈시는 보우 건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리고, 다카코에게 겁을 주었다. 

　「나야말로 마지막이야.」 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들어, 다카코!」 

 

　어떤 의미에서는 터닝 포인트가 된 대화를 속 후련하게 받아들인 것은 다카코의 타고난 성격이었을까? 그래, 이젠 어떻게 되든 내 책임이 아니야. 그러자 다카코는 한심한 녀석과의 대화를 빨리 집어치우기 위해 한 걸음 나아갔다. 

　「역시. 나를 강간하고 싶다는 거로구나? 그런 거지? 어치피 죽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지?」 

　가즈시는 다카코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런 소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게 그 소리 아니야. 다카코는 속으로 비웃었다. 다음에는 강간할 생각은 없지만, 옷을 벗으라고 할 생각이니? 

　다카코는 웃음을 띤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 말이야. 그 변변치도 않은 물건보다는 목숨에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는.」 

　그러자 가즈시의 목에서 얼굴 방향으로 단숨에 붉은 빛이 번져 올랐다. 입가가 일그러지더니, 그 입에서 격한 말이 쏟아졌다.

　「까불지 마. 정말 강간 당하고 싶어?」 

　다카코는 또 웃으며 대답했다.

　「거 봐, 이제 진심이 나오잖아.」 

　「까불지 말라고 했어!」 가즈시가 말했다. 

　「나는 지금 널 죽일 수도 있으니까!」 

 

　다카코는 화가 치밀었다. 조금전에 가즈시가, 「죽이지는 않을 거야.」 라고 마치 고양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가즈시가 약간 틈을 두었다가, 아주 자신만만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아카마츠 요시오를 죽였어.」 

　다카코는 약간 놀랐지만, 눈썹을 모으고 「그래?」 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저 모양으로 숨어 있던 걸로 보아, 아마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아카마츠 요시오를 죽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올까봐 두려워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녀석은 도망 다니며 살아 남았다가 마지막에 자기보다 약한 상대가 살아 남아 있다면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가즈시는 바로 다음에 한 말로 다카코의 추측이 거의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이걸 시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을 거야.」 

　다카코는 조용히 가즈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아하, 이제 다 알겠어. 결국 그렇다 이거지. 처음부터, 강간이건 뭐건 어쨌든 나를 제 멋대로 해 보고, 언젠가는 죽일 작정이셨군. 다른 애들이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게 되면? 그러면 그 때까지 몇 번 할 수 있을까를 꼽아보기라도 한 거야? 혐오감과 분노 때문에 등줄기가 꿈틀거렸다. 

 

　「시합이라….」 

　가즈시가 한 말을 되씹으며 다카코는 씨익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렇지만 여자애들을 상대로 그런다는 건 창피하지 않아?」 

　그러자 순간 가즈시가 움찔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눈이 빛나고 있었다. 

　「죽고 싶어?」 

　다카코는 바로 대답했다. 

　「쏴 봐.」 

 

　순간 가즈시가 머뭇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카코는 주머니에서 몰래 꺼내 들고 있던 조약돌을 그 얼굴을 향해 던졌다. 가즈시가 얼굴을 감싸고 그 돌을 막는 사이에 휙 몸을 돌려, 데이 팩을 버리고 아이스 피크만 쥔 채로 아까 왔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가즈시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육상부 에이스의 스타트 대시로 15미터 정도는 충분히 달렸다고 생각했을 때, 오른쪽 다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다카코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뺨이 축축한 흙 위로 튀어나온 나무 뿌리에 긁혀 피부가 벗겨졌다. 이어서 느껴진 다리의 아픔보다도, 다카코는 자기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내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저 개 자식! 

　다카코는 몸을 휙, 돌리며 땅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오른쪽 허벅지 뒤쪽에 스커트를 뚫고 들어온 은빛 화살이 꽂혀 있다. 상처 아래쪽의 잘 발달된 근육 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가즈시는 뒤따라왔다. 다카코가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보우 건을 철퍼덕,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대신 바지 벨트에서 두 개의 나무 몽둥이를 짧은 쇠사슬로 연결한 쌍절곤 같은 것을 오른손으로 뽑아 들었다. 쇠사슬이 철렁거리며 흔들렸다. (다카코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건 아카마츠 요시오를 쓰러뜨린 뒤 그가 집어든 덴도 마유미의 데이 팩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가즈시에게 지급된 무기는 어찌된 일인지 샤미센 줄이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다카코는 땅바닥에 떨어진 보우 건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 후회하게 될 거야. 저걸 내버린 걸. 

 

　「네 잘못이야.」

　약간 숨을 헐떡이며 가즈시가 입을 열었다.

　「날 열 받게 했으니까.」 

　다카코는 땅바닥에 앉은 자세로 가즈시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 또 변명거리를 찾고 있군. 저런 녀석과 2년 넘게 같은 반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를 했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잠깐 기다려.」

　가즈시가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 다카코는 무릎을 딛고 일어서더니, 뒤로 오른손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단숨에 화살을 뽑아냈다. 살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스커트도 찌익 하고 찢어졌다. 이런, 슬릿이 둘이 되어 버렸네. 화살을 집어던지고, 가즈시를 노려보면서 일어섰다. 괜찮아. 통증은 심하지만, 일어서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아이스 피크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집어 치워.」 가즈시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다카코는 아이스 피크를 수평으로 눕혀, 가즈시의 가슴을 겨누었다. 

　「시합이라고 했지. 좋아. 상대가 되어 드리지. 너 같은 놈에겐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내 모든 걸 걸고라도 널 없애 버리겠어. 알겠어? 알겠냐구! 멍청이어서 모르겠니?」 

　그래도 아직 가즈시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상대가 여자인데다, 부상까지 당한 상태여서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 다카코가 말을 이었다. 

　「반 쯤 죽여 놓고 강간하겠다는 생각 따윈 집어 치워. 알겠어. 꼬마야? 네 물건보다는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라구.」 

 

　그러자 가즈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쌍절곤을 얼굴 높이로 들어올렸다. 다카코도 아이스 피크를 움켜쥐었다. 가즈시와 다카코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키 차이는 15센티미터 정도, 체중은 거의 20킬로그램 정도는 차이가 났다. 다카코는 B반 여자애들 가운데 거의 최고의 운동 능력을 자랑하지만, 그래서 이길 확률은 낮을 것이다. 그러나 질 수 없다. 절대로. 갑자기 가즈시가 움직였다. 앞으로 나오면서 쌍절곤을 위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휘둘러 공격해 왔다! 

　다카코는 그 공격을 왼팔로 받았다. 외쪽 솜목에 찬 두 개의 브레이슬렛 가운데 하나가 '핑'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날라올랐고(아끼는 남미 인디오 공예품이었는데, 제길), 찡하게 저려 오는 느낌이 팔에서 뇌의 중심까지 순식간에 전해졌다. 그 통증을 느끼면서도 오른손의 아이스 피크를 휘둘렀다. 가즈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펄쩍 뛰어 물러났다. 다시 2미터 정도의 거리. 다카코는 왼팔이 시큰거렸다. 그렇지만 괜찮아,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 

 

　두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테니스의 백핸드 요령으로 퍼 올리듯이, 쌍절곤을 휘둘렀다. 다카코는 고개를 숙여 몸을 굽히면서 공격을 피했다. 긴 머리카락을 쌍절곤이 스치면서, 몇 가닥인가가 허공에 날렸다. 다카코는 바로 가즈시의 오른쪽 손목을 향해 아이스 피크를 휘둘렀다. '착' 하는 가벼운 감촉이 전해지고, 가즈시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또 거리가 벌어졌다. 쌍절곤을 쥔 가즈시의 손목에 붉은 빛이 보였다. 그러나 데미지는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오른발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허벅지에서 그 아래쪽은 거의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다. 헉헉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자기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즈시가 다시 쌍절곤을 휘둘러 왔다. 다카코 쪽에서 보면 머리 왼쪽 위에서 어깻죽지 부근을 노리고. 

 

　다카코는 앞으로 다가섰다. 권법 도장에 다니는 스기무라 히로키가 언젠가 가르쳐 준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타이밍을 맞춰 주지 않으면 데미지는 훨씬 적어져. 두려워할 필요 없이 앞으로 다가서는 것도 때론 중요한 거야." 쌍절곤을 어깨에 맞았지만, 히로키의 말대로 쇠사슬 부근에 맞아 그리 큰 충격은 없었다. 다카코는 가즈시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눈을 크게 뜬 가즈시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아이스 피크를 위로 휘둘렀다. 가즈시가 비어있는 왼손으로 다카코를 힘껏 밀쳐냈다. 다카코는 상처 입은 오른쪽 다리가 균형을 잃어, 뒤로 벌렁 자빠졌다. 가즈시가 자칫하면 찍힐 뻔했던 가슴께를 왼손으로 문지르면서 다카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카코에게, 가즈시는 다시 거침없는 쌍절곤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얼굴을 향하여! 

　다카코는 아이스 피크를 집어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쨍󰡑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아이스 피크가 바로 옆 땅바닥에 떨어졌다. 다카코의 손바닥에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다카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즈시를 노려보면서 뒤로 물러났다. 가즈시가 웃음이라도 짓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제길, 이 녀석은 성격이상자다. 여자애를, 그것도 둔기로 두들겨 패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기까지 하고 있다! 

 

　가즈시가 다시 한 번 쌍절곤을 휘둘렀다. 살짝 상반신을 끌어당겨 굽혔다. 그러나 쌍절곤은 피하는 다카코의 몸을 따라왔다. 어느 정도 쌍절곤 다루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가즈시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팔을 뻗은 것이다. 깡, 하고 왼쪽 머리 부분에 충격이 왔다. 다카코의 몸이 비틀거리며 꺾였다. 왼쪽 콧구멍에서 뜨뜻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다카코의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가즈시는 '성공이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비틀거리는 자세에서도, 다카코의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눈이 반짝 빛났다. 몸을 쓰러뜨리며 긴 다리를 뻗어, 가즈시의 왼쪽 무릎을 바깥쪽에서 힘껏 걷어찼다. 윽, 하고 가즈시가 신음소리를 내며 왼쪽 무릎을 꿇었다. 그 왼쪽 무릎을 축으로 허우적거리며 몸이 반 바퀴 정도 회전했다. 등이 반쯤 보였다. 이 순간 아이스 피크를 집어들려고 했다면 다카코는 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카코는 그러지 않았다. 가즈시의 등에 달려들었다. 마치 업히듯이, 가즈시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다카코의 체중이 실리자, 가즈시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순간 다카코가 선택한 것은 손가락이었다. 검지와 중지 아니, 가장 힘이 들어가는 것은 역시 엄지와 중지일 것이다. 그리고 다카코는 한번도 손질을 게을리 한 적이 없는 손톱, 육상부의 고문인 오오다 선생에게 아무리 꾸중을 들어도 뾰족하게 길러 깎지 않았던 손톱을 이용했다. 

　다카코는 마치 말 타듯이 가즈시를 타고 올라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잡아당겼다. 위치는 가늠할 수가 있었다. 가즈시가 다카코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카코의 오른손 중지와 엄지는 굳게 닫힌 가즈시의 눈꺼풀을 뚫고,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가즈시가 절규했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몸을 일으켜, 쌍절곤도 내던지고 다카코의 손을 움켜쥐었다. 몸을 마구 휘둘러 다카코를 떨쳐내려고 했다. 다카코는 가즈시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더 힘을 주었다. 엄지와 중지가 제２관절까지 가즈시의 눈을 파고 들어갔다. 다카코의 손가락에 뭔가 충격이 전해지며, 안구가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 의외였던 것은 생각보다 눈알이 작구나, 하는 것이었다. 다카코는 상관하지 않고, 힘껏 손가락을 안쪽으로 구부렸다. 가즈시의 눈에서 피와, 끈적끈적한 반투명 액체가 마치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악!」 

 

　가즈시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마구 휘둘렀다. 얼굴에 있는 다카코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더니, 다카코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다카코는 얼른 가즈시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가즈시가 잡고 있던 머리카락 몇 올이 뽑혔다. 몇 십 가닥 정도는 빠진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아이스 피크를 찾았다. 바로 발견했다. 다카코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즈시는 소리지르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듯이(사실은 그렇지만, ) 팔을 휘두르다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즈시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꺼풀 가장자리에서 안쪽까지가 완전히 새빨개져 있어, 마치 알비노 원숭이 같았다. 

 

　다카코는 오른쪽 발을 절룩이며서 가즈시에게 다가가, 부상을 입은 다리를 들어올려 가즈시의 무방비 상태인 사타구니를 밟았다. 육상 연습용으로 쓰는, 흰 바탕에 보라색이 들어 있는 워밍업 슈즈는 자신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그 아래로 작은 동물을 밟은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이 전해왔다. 가즈시가 「으윽」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사타구니를 옆으로 돌아누워, 마치 태아처럼 몸을 구부렸다. 다카코는 이번에는 왼발로 가즈시의 목을 밟았다. 체중을 실었다. 가즈시가 두 팔을 뻗어, 그 다리를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며 힘없이 때리고 쥐어 뜯었다. 

 

　「사….」 

　가즈시의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목이 눌려 있어, 마치 바람 새는 소리처럼 들렸다. 

　「살려줘….」 

 

　그런 게 아니잖아., 너. 다카코는 생각했다. 자기 입술이 웃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화내고 있는 게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나는 즐기고 있는 거야, 틀림없이.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내가 요한 바오르 2세나 달라이라마 13세도 아닌데, 뭐 상관 없잖아? 

　다카코는 무릎을 굽혀, 가즈시의 입 안(충치 치료 흔적이 몇 군데 보였다)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아이스 피크를 쑤셔 넣었다. 다카코의 발을 떼어 내려고 하던 가즈시의 두 팔이 그 움직임에 딱 멈추었다. 다카코는 아이스 피크를 눌렀다. 별 저항 없이, 그것은 가즈시의 목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가즈시의 몸이, 가슴에서 손톱 끝까지, 수영의 버터플라이에서 막 출발하는 선수들의 동작처럼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리고는 이내 멈추었다. 팔이 축 늘어졌다. 아르비노 원숭이 같은 눈은 여전히 뜨고 있고, 그 주위에는 물감을 칠한 듯이 끈적끈적한 피가 거미집 모양으로 묻어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갑자기 심해지면서, 다카코는 가즈시의 머리 옆에 쓰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기 이빨 사이로 새나오는 호흡이 200미터 기록 측정을 반복하고 난 뒤처럼 갈라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겼다. 싱겁다는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격투를 한 것은 겨우 30초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오래 걸렸다면 절대로 이길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겼다. 어쨌든, 어쨌든. 

　다카코는 피에 물든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으면서 마치 마술사처럼 아이스 피크를 목에서 토해내려고 하는 가즈시의 시체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자, 여러분, 금방 삼킨 것을 이번에는 토해내 보이겠습니다. 

 

　「다카코.」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 다카코는 앉은 채로 휙 돌아보았다. 동시에 손을 뻗어, 가즈시의 입에서 아이스 피크를 뽑아들었다(그러자 가즈시의 머리가 약간 들여올려지더니 다시 땅바닥에 떨어졌다). 

　소마 미츠코(여자 11번)가 다카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카코의 시선이 미츠코의 오른손에 꽂혔다. 대형 자동권총이 그 가냘픈 손 안에 있었다. 

　소마 미츠코가 어쩌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만약에 니이다 가즈시와 마찬가지로 싸울 생각이라면(그럴 가능성이 크다. 누가 뭐래도 '그 유명한' 소마 미츠코니까) 승산이 없다. 권총을 상대해야 한다면 승산이 없다. 

　도망쳐야 해. 도망치는 게 좋다. 다카코는 다시 아픈 발을 절룩이며 일어서려고 했다. 

 

　「괜찮니?」

　미츠코가 물었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총을 다카코에게 겨누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다카코는 뒷걸음치며,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오른발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대답했다. 

　「그저 그래.」 

　미츠코는 가즈시의 시체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카코가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 피크를 보았다. 

 

　「그걸로 해치운 거지? 대단해. 같은 여자로서 존경해.」 

　진짜 감탄했다는 말투였다. 게다가 들떠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카코는 또 「그저 그렇지.」 라고 대답했다. 오른발에서 피가 많이 나서 그런지 몸이 비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어.」 미츠코가 말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만은 나에게 알랑거리지 않는 여자애였어.」 

 

　다카코는 미츠코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로이와 중학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미소녀 두 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액세서리로는 눈이 으깨진 남자애의 시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미츠코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카코는 누군가에게 알랑거리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었고, 미츠코에게 말을 걸 때도 다른 애들처럼 머뭇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은 프라이드 때문에도 싫었고, 별로 미츠코가 두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카코는 전에(그래봐야 겨우 두세 달 전이다) 좋아했던 선배의 말버릇을 떠올렸다. 스기무라 히로키에 대한 아주 애매한 마음과는 달리, 그 선배를 무척 좋아했다. 시합 전에도 친구들의 싸움에 휩쓸려 심한 상처를 입고 육상부실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도, 그 선배는 그 독특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두려울 것 없어]

 

　누구에게도 알랑거리지 않는다, 우아하게 있자. 다카코는 중학교에 들어온 이후 그 선배를 내내 지켜보았고, 다카코의 지금 스타일도 그 선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선배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아주 멋진, 그랬다, 오가와 사쿠라를 닮은, 깊은 숲 속의 호수처럼 조용한 느낌이 드는 사람. 하긴 그것도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동시에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니이다 가즈시와 상대하고 있을 때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그 선배의 말을 자기가 생각해 냈다고 하는 것은, 나는 역시 미츠코를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약간 샘이 났었어.」

　미츠코가 말을 이었다. 

　「넌, 예뻤고, 나보다 착한 여자애였지.」 

　다카코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어째서 미츠코는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미츠코의 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투가 현재형으로 되돌아갔다. 

 

　「너 같은 여자애가 난 정말 좋아. 내가 약간 레즈비언 끼가 있는 건가? 호호. 그래서 정말….」 

　다카코는 눈을 크게 떴다. 몸을 휙 돌려 달려갔다. 오른발을 약간 절고 있었지만, 그래도 육상부 에이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속도였다. 

　「그래서 정말─」 

 

　미츠코는 콜드 가버먼트를 쓱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세 번 연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숲 속의, 완만한 비탈을 벌써 20미터 정도 달려가, 계속 멀어져 가는 다카코의 세일러복 등에 정확하게 세 개의 구멍이 뚫리고, 다카코는 헤드 슬라이딩하듯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엎드린 채로 주르륵 땅바닥을 미끄러져 왼쪽은 하얗고, 오른쪽은 새빨갛게 대조를 이룬 멋진 다리가 스커트를 뒤집으며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땅바닥에 떨어졌다. 미츠코가 총구를 내리면서 말했다. 

 

　「정말로 아쉬워.」 

 

 

 

 

　노리코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가와다가 준 감기약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시계는 오후 2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은 동안에 노리코의 얼굴은 많이 여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슈야는 물병 가운데 하나에 남은 물 전부로 노리코가 갖고 있던 반다나를 다시 적셨다. 땀에 젖은 노리코의 얼굴을 닦고, 다시 노리코의 이마 위에 얹었다. 노리코의 눈은 감고 있었지만, 고맙다는 듯이 턱을 당겨 고개를 끄덕였다. 

　슈야는 다시 가와다 쪽을 보았다. 가와다는 계속 같은 자세로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른손은 살짝, 무릎 위에 놓인 레밍턴 쇼트 건의 손잡이 부근에 놓여 있다. 

 

　「가와다.」 

　슈야가 불렀다. 

　「응?」 

　「가자.」 

　가와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담배를 입에서 뗐다. 

　「어디로?」 

　슈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노리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 

 

　가와다는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노리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혹시 패혈증이라면….」

　잠깐 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따뜻하게 하고 잠을 자는 정도로는 낫지 않아.」 

　「그래서?」 

　슈야는 또 안달이 나서 견딜 수 없었지만,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지도에 보건소 같은 표시가 있어. 거기까지 가면 좀 더 쓸만한 약이 있지 않겠어? 마을 북쪽에 떨어져 있어. 아직 금지 구역에도 들어있지 않고.」 

　「그래, 그렇지.」 

　가와다는 입가에 연기를 천천히 토해내면서 대답을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슈야는 한 번 더 말했다. 

　「가자.」 

　가와다는 고개를 숙였다. 담배를 한 번 더 빨더니 땅바닥에 비벼 껐다. 

　「보건소까지 1.5킬로미터는 돼.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슈야는 이를 악물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보건소가 금지 구역에 들어가 버리면 어쩌려고?」 

　가와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너!」 

　슈야는 말을 이었다. 속이 타서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가와다와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말끝이 떨렸다. 그러나 말했다. 

　「네가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지는 않아. 그렇지만 그렇게 위험한 게 싫은거야? 그렇게 자기 자신만 중요한 거야?」 

　슈야는 잠시 가와다의 눈을 노려보았다. 가와다는 차분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슈야….」 

　등 뒤에서 노리코의 목소리가 들려와, 슈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노리코는 고개만 옆으로 돌려 슈야를 보고 있었다. 이마의 반다나가 땅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그만 둬. 가와다가 없으면, 우린 살아 나갈 수가 없어.」 

　고통스러운 듯한 숨소리 사이사이로 말이 끊어지면서 거기까지 말했다. 

　「노리코!」 

　슈야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넌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어. 살아 나가기 전에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쩔 거야?」 

　슈야는 다시 가와다 쪽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난 혼자라도 노리코를 데리고 갈 거야. 계약은 파기한다. 혼자서 행동해 줘.」 

　슈야는 내뱉듯이 말하고, 자기와 노리코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깐.」 

　가와다가 말했다. 천천히 일어서더니, 노리코 쪽으로 다가가, 노리코의 오른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슈야가 노리코 옆에 붙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거의 20분마다 반복해 온 행동이었다. 또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만지더니, 옆에 있는 슈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약을 써야 하는지 넌 모르잖아.」 

　고개를 기울여 슈야를 보았다. 

　「알았어. 나도 갈게.」 

  

【남은 인원 24명】

 

 

 

 

　등에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지 30분 이상이 흘렀는데도, 또 그 상처와 니이다 가즈시에게 보우 건으로 화살을 맞은 다리의 상처로도 많은 피를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치구사 다카코는 아직 살아 있었다. 소마 미츠코는 바로 떠나갔지만, 그건 다카코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다카코는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가족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집 문 앞에서 다카코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동생인 아야코가 울면서 말했다. 

　「안녕, 언니. 잘 가.」 

　다카코의 얼굴과 많이 닮은 핸섬한 아버지와 작고 둥근 얼굴을 한, 동생과 비슷하게 생긴 어머니는 그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세 사람 옆에서는 강아지인 "하나코"가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주 작았을 때부터 다카코가 키워 온, 영리한 암컷이었다. 아아, 다카코는 꿈 속에서 생각했다. 어처구니없군. 나는 겨우 15년 밖에 살지 않았는데. 아야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탁한다. 넌 정말 응석받이니까, 언니를 좀 보고 배워서 잘 해야 해. 

　아, 정말 한심하구나. 아직 나는 제대로 사귀어 본 남자애도 없는데. 

 

　거기서 장면이 바뀌었다. 육상부 부실이었다. 2학년 여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부실은 2학년 가을 무렵에 철거되고, 새로운 클럽 하우스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아. 이건 환상이 아니야.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다. 

　선배가 있었다. 짧게 깍아 앞을 세운 머리카락, 가슴에「FUCK OFF!」라고 쓰여 있는 흰 T셔츠, 녹색 바탕의 검은 라인이 들어간 경기용 팬티. 약간 장난기 어린, 그렇지만 부드러운 눈. 그 선배였다. 장애물 경주가 특기였는데, 얼마 전부터 아픈 무릎에 열심히 테이프를 감고 있었다. 부실에는 다카코와 그 선배 뿐, 아무도 없었다. 

　「선배, 선배!」 

　다카코가 말했다. 

　「선배 여자친구, 멋지던데요.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런, 선배와 이야기할 때만은 나도 평범한 여자애가 되어 버리는 구나. 이렇게 촐랑댈 수가. 

　「그래?」 

　선배는 고개를 들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카코가 훨씬 예쁜걸!」 

　다카코는 약간 복잡한 심정으로 웃었다. 처음으로 자기 용모를 칭찬해 준 것은 기뻤지만, 그런 식으로 다른 여자를 사귀면서 네가 더 예쁘다고 말하는 선배와 그 선배 애인의 관계는 아주 친하고 신뢰로 가득찬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카코, 사귀는 녀석이 없니?」 

　선배는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공원이 있었는데. 시야의 위치가 상당히 낮았다. 아아, 이건 어렸을 때의 나로구나. 초등학교 2학년인가? 아니면 3학년 때? 앞에서 스기무라 히로키가 울고 있었다. 지금처럼 키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카코가 더 컸다. 히로키는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화를 심술궂은 애들에게 빼앗긴 것 같았다. 

　「너,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한심해. 더 강해져야지. 아 참, 이리 와 봐.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았거든. 보러 갈래?」 

　「응….」 

　히로키는 눈물을 훔치며 따라왔었다. 

 

　그러고 보니, 히로키가 검법 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건 그 다음 해쯤부터였다. 그때부터 키가 쑥쑥 크더니, 다카코보다 훨씬 더 크게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는 서로 집에 놀러 오가는 사이였다. 울적해 있는 다카코에게 어느날 히로키가 물었다. 

　「왜 그래, 다카코? 무슨 일 있니?」 

　다카코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너라면 누가 좋아한다는 소릴 들으면 어떡할 거야?」 

　「응.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몰라.」 

　「…너 누구 좋아하는 애는 있어?」 

　「응. 없어. 아직은.」 

　다카코는 잠시 또 생각했다. 뭐야, 그럼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한다는 거야? 

　「아, 그래? 그럼 얼른 좋아하는 애가 생겨서 사랑 고백을 해 봐.」 

　「난 배짱이 없어서 못할지도 몰라.」 

 

　장면이 또 바뀌어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그 첫날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히로키가 물었다. 

　「야, 육상부 선배 가운데 무지 멋있는 남자 선배가 있다면서?」 

　의외로, 그 선배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의미가 들어있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뭐, 그냥. 잘 돼 가?」 

　「전혀. 그 선배는 애인이 있는걸. 넌 걸 프렌드 아직 없어?」 

　「쳇, 그만 둬.」 

 

　우리는 항상 엇갈렸다. 서로 약간은 좋아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까? 적어도 나는 약간이지만, 네가 좋았어. 그건 그 선배를 좋아했던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야. 이해해 줄 수 있겠니? 

　현재의 히로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고 있었다. 

　「다카코, 죽지 마.」 

 

　뭐야, 너 남자답지 못하게. 울지마. 덩치는 커다란 녀석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네. 신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다카코는 꼭 한 번 더 정신이 들었다. 멍한 눈을 떴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 속에 스기무라 히로키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로키의 등 뒤로 나뭇가지와 그 틈새로 복잡한 무늬를 그린 푸른 하늘 몇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생각한 것은 히로키가 울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의문은 그 뒤로 다가왔다. 

　「어떻게….」 

　자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녹이 슨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할 때 나는 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아, 이제는 얼마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기 있지?」 

 

　히로키는 「그냥」 이라고만 말했다. 히로키는 다카코 옆에 무릎을 꿇고, 다카코의 머리만을 살짝 들어 일으켜 준 것 같았다. 자기는 엎어졌었는데, 지금은 누워 있다. 히로키가 자기를 수풀 속으로 옮겨 왔는지, 오른손 바닥에 풀이 만져졌다(왼손은 아니, 좌반신 저체가 마비되어 있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니이다 가즈시에게 옆머리를 맞은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히로키는 그러고 나서 조용히 물었다. 

　「누구에게 당했어?」 

　그렇다. 그건 중요한 정보였다.

　「미츠코야.」 

　다카코가 대답했다. 니이다 가즈시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조심해.」 

　히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안해.」 라고 말했다. 

　다카코는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히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그 분교 밖에서 숨어서 널 기다렸어.」 

　히로키는 그렇게 말하고, 뭔가 참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그 때 아카마츠 요시오가 돌아왔어. 그래서 내가 잠깐 거기 신경을 쓰는 사이에, 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잖아. 놓치고 말았어. 네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 불러 보았지만 너는 이미 멀리 가 버렸었나 봐.」 

 

　다카코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분교를 나와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데, 얼마 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해─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계속 힘껏 달렸다. 아아. 히로키는 나를 기다려 준 거다. 내가 어쩌면, 하고 생각했던 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그리고 아마─조금 전에 히로키는 "그냥" 이라고만 말했지만, 나를 계속 찾아다닌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다카코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신 얼굴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랬었구나. 고마워.」 

 

　다카코는 이제 자기가 말을 많이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느라 몇 가지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묘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그걸 묻고 말았다.

　「너 좋아하는 애 있니?」 

　히로키는 눈썹을 약간 움직이더니, 조용히 「있어.」 라고 대답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히로키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로 씨익 웃었다. 

　「틀렸어.」 

　「그래, 그럼….」 

　다카코는 한 번 숨을 크게 쉬었다. 이상하게도 아주 차갑고, 그리고 왠지 동시에 아주 뜨겁게 느껴지는 독이 몸 안에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이라도 껴안아 줘. 금방…. 끝날 테니까.」 

 

　그러자 히로키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카코의 몸을 끌어당겼다. 다카코의 머리가 뒤로 넘어갈 뻔 했지만, 히로키가 받쳐주었다. 아직 한 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 남아, 히로키.」 

　한 마디 더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다카코는 히로키의 눈을 들여다보며 방긋 웃었다. 

　「너 이제 멋진 남자가 되었네.」 

　「너야말로!」

　히로키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애야.」 

 

　다카코는 픽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말할 만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저 히로키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마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외톨이로 죽지는 않을 거다. 마지막에 함께 있어 줄 누군가가 바로 히로키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 자세로 있다가, 치구사 다카코는 약 2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스기무라 히로키는 생명을 잃고 온몸을 중력에 맞긴 채 축 늘어진 다카코의 몸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었다. 

 

【남은 인원 2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