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3권 한여름의 1페이지 -6- 타쿠야 군을 찾아라

- 타쿠야군을 찾아라! -

 

 

1.

 

역건물 1층에 있는 찻집의 창가에 한 남성이 앉아 있다. 나이는 대략 70세를 넘은 듯. 로맨스그레이라고 하지. 머리는 검정과 흰색이 조화롭게 섞여 깨끗한 잿빛을 이루고 있었다. ─ 아주 조금, 흰색쪽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연록빛 여름 모시슈츠에 밝은 노란색 티셔츠를 차려입은, 몹시 화려한 복장의 할아버지였다. 
훌렁 돌아가는 시계를 붙잡아 누르며 시간을 확인한다. 8분후면 11시. 망설이고 있을 틈같은 건 없었다.
"손님 혼자신가요?"
입구에서 웨이트리스가 말을 걸었지만, "잠깐 실례할게요" 라고 대답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봐요?"
"아, 네. 그런 셈이에요"
대충 얼버무리고는 미리 봐둔 자리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물론 약속을 한 기억이 없는 로맨스그레이는 자기자리 옆으로 젊은 처자가 다가와도 아무 반응없이,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小父さま)"
마음을 굳힌 마미는 말을 걸었다. 사실은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될만큼 나이차가 났지만 <아저씨> 쪽이 느낌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로맨스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미의 얼굴을 보자, "어라?" 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 표정이다. 이윽고 겨우 답이 나왔나보다. 5초정도 고민한 후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 잘못본 게 아닌가요?"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요. 여기 앉아도 될까요?"
마미는 그 자리에 놓여있던 가죽가방을 팔에 끼고 <아저씨> 정면에 앉았다.
"아직 된다 안된다고는 말안했는데... "
"어머, 죄송합니다"
곤혹스러운듯한 로맨스그레이에게 일단 사과의 말을 했지만, 결코 다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마미는 애써 앉은 이 의자에서 조금도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무슨 용건이인가요? 전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거짓말"
"왜 거짓말이라는거죠?"
"왜냐면 말이죠. 만나기로 했다면 맞은편 자리에 자기 가방을 놓아두지 않을테니까요"
"아아, 과연 그렇군요"
아저씨는 왼손바닥을 오른주먹으로 퐁 때렸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몸을 약간 내밀고는 목소리톤을 낮추고 마미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건가요? 쓸쓸한 노인과 놀아주고 보답으로 용돈을 받는다던가 하는, 그 ─ "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렸다.
"원조교제말인가요? 아니에요"
그에 관해서는 결단코 부정. 이 할아버지한테 그럴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상대의 한마디를 듣고 마미는 '나야말로' 라고 생각했다.
"전 단지 이 자리를 양보해 주셨으면 하는 것 뿐이에요"
"호오, 이 자리를"
왜 또 그런 말을? ─ 하고 흐름상 당연히 노인이 물어왔다. 마미는 가게 입구에서 속공으로 짜낸 시나리오 대사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실은 제 남자친구가 바람을... "
"바람? 그거 참 생생한... "
생각했던 대로, 아저씨는 자기 일처럼 열심히 얘기를 들어주었다. 이대로 간다면 동정해서라도 이 자리를 양보해 줄 지 몰라 ─. 마미는 여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저 분수대 앞에서 여자와 만나기로 했다는 정보를 몰래 입수했거든요"
"그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아저씨의 말에 잠깐 스톱이 걸렸다.
"아 그러니까... "
아차. 거기까진 생각못했는데. 마미는 급히 시나리오에 새로운 대사를 추가시켰다.
"그 사람 친구한테... 서요"
"호오, 그래서?"
그런 설명으로 납득한건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아저씨가 얘기를 재촉해서 마미는 계속 말했다.
"바람피는 현장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이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에요. 그럴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가 필요하거든요"
손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서 호소했다.
"하지만 사진찍는 일뿐이라면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절 봤다가는 그 사람 도망쳐버려요"
자신이 생각해도 연극부에서 가입권유받아도 좋을 만큼 박진감있는 연기로 마미는 졸라댔다. 그러자.
"그도 그렇군. 알겠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노인은 납득해준 것이다.
"그럼 양보해 주시는거죠?!"
날아오를 것처럼 기뻐하자 이번에는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조금 더 여기에 있고 싶은데"
"하지만 방금 '알겠네' 라고... "
좋다가 말았잖아. 그렇게 낙담하고 있으려니까.
"그러니 어떤가. 자네만 괜찮다면 합석하는 걸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물론 마미는 반대할 리 없었다. 눈앞에 알지도 못하는 노인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마당에, 역앞광장 분수대가 보이는 이 자리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야 불만같은 건 없었으니까.
"고맙습니다 아저씨"
교섭이 성립되자, 마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에게 주문했다.
"답례로 아저씨가 드시고 계신 그 커피값도 제가 낼게요"
"이런 그거 참 기쁘군"
아저씨는 집게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쓸으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주문은 뭘로 하실 건가요?"
물이 든 유리잔을 놓고서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애플소다"
마미는 메뉴판을 훌훌 넘겨보고 적당히 주문했다. 지금부터 들어갈 잠복취재로 머릿속이 가득해서 이것저것 고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애플소다 하나말씀이군요. 또 주문하실 건 없으신가요?"
웨이트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을 때, 맞은편 좌석에서 "잠깐만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가로 믹스샌드"
"엣"
마미가 놀라서 쳐다보자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고 말했다.
"잘 먹겠네"
─ 어쩐지지 이상한 아저씨한테 걸려버린 것 같다.

 

 

2.

 

"잘 보이나?"
"네. 그럭저럭요"
웨이트리스가 물러가자 마미는 창에서 보이는 풍경을 관찰했다.
생각했던대로 이 위치에서 광장이 제일 잘 보였다. 분수대 앞에는 만날 약속을 한 듯한 사람들이 20명정도, 서있는 사람 앉은 사람,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아직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리코짱의 모습은 아직 보이질 않았다.
"자네 애인은 와있나?"
"그러니까... "
곤란하다. 마미는 타쿠야군의 얼굴을 몰랐다. 타쿠야군과 노리코짱의 투샷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타쿠야군을 찾아내어 그 사람이 바로 "내 애인" 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이건 난해한 문제다. 대체 누가 타쿠야군이란 말인가.
토요일 점심.
게다가 여름방학이라고 하는 덤까지 붙어 있다. 쓰윽 훑어보니 역앞 광장 분수대 앞에는 20세 전후의 남성만 해도 대여섯명. 동안일 경우를 고려해 좀더 낮춰 잡는다면 열명 전후까지 이른다.
누구나가 이 사람이 타쿠야군이야 라고 하면 그렇다고 여겨질만한 젊은이들뿐.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 사람이다 라고 할만한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 있었다.
정말이지 홈페이지 자기소개에 얼굴사진 정도 걸어놓으면 좋잖아. ─ 그런 자기 멋대로의 불만을 마미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타쿠야군에게 마구 발산하고 싶었다.
"아직 안온 것 같은데요"
어서 노리코짱이 오게 해주세요. 몰래 마리아님에게 기도했다. 역시 JR선의 인명사고 영향으로 늦어지는 걸까. 노리코짱을 통하지 않으면 타쿠야군이 누군지 마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약속시간은?"
"확실히, 11시였어요"
"지금 이 시간이군 그래"
"네, 그렇네요. .... 늦네"
마미의 애교웃음을 쿵짝쿵짝 경박한 음악이 덮었다. 분수대 옆의 시계탑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11시를 알리고 있었다.
타쿠야군 후보청년들은 거의 동시에 시계탑을 봤다. 후보가 아닌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아"
마미는 무심코 탄성을 질렀다.
"왜 그러느냐? 왔어?"
아저씨가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대며 밖을 봤다.
"아, 아뇨"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이제와서 얼버무려봤자 이미 때는 늦었는지라 마미는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왜 그럴까.
답 ─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에.
아마 훨씬 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흰바탕에 감색 꽃모양이 그려져있는 원피스는 아까부터 몇번인가 눈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타쿠야군과 노리코짱의 일만 몰두해 있어서 한동안 눈치못챘던 것 뿐이었다. 햇살을 막으려고 깊이 눌러쓴 챙넓은 모자가 마침 또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탓도 있다.
(저건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 토도 시마코양... !)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안갔다. 시마코양의 동생인 노리코짱이 오늘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타쿠야군하고의 약속과는 관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노리코짱이 언니한테 그를 소개시켜 주려고?)
그건 더더욱 흥미깊은 전개였다. 생각지도 못한 시츄에이션. 츠키야마 미나코님이 안다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겠지.

─ 타이틀은 틀림없이, <언니, 내 남자친구를 봐주세요>

"저기 있는 여성이 뭔가 문제라도?"
마미의 시선을 따라가본 아저씨가 물었다.
"저 사람이 애인의 여자예요"
형편상 미안하게 됐지만, 시마코양에게는 "바람피는 애인의 상대"역을 부여했다. 원래부터 시나리오는 단지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받으려고 지어낸 것이니까 거의 자포자기상태였다.
"어여쁜 처자군. ... 아니, 실례"
"하?"
뭐가 실례란걸까.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생각해보니 바람난 애인의 상대를 두고 예쁘다고 칭찬하면 여자로서는 그다지 기분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좀더 불쾌한 표정을 확실히 드러냈어야 했다고 마미는 반성했다. 좀더 자신의 역을 충실히 연기할 필요가 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애플소다 주문하신 손님"
"아, 네"
웨이트리스에게 대답하고 쥬스를 눈앞에다 둔다.
"이쪽은 믹스샌드"
주문한 건 할아버지였지만, 둘이서 먹는 걸로 착각한 듯 샌드위치가 담긴 하얀 큰접시를 테이블의 한가운데에 놓고 가버렸다.
"안에 뭐가 들었나. ... 토마토오이하고 달걀, 아보카드인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기뻐보이는 아저씨. 그 모습을 곁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마미는 내용물이 뭔가하는 흥미보다, 어린이런치도 아닌데 샌드위치의 산에 꽂힌 작은 깃발에 눈이 쏠렸다.
"어느 나라 국기지... 빨강, 노랑, 초록"
이쑤시개에 달린 조그만 깃발. 일장기 말고는 처음 봤다.
"아무거나 찔러넣은겐가. 아까 필라프에 성조기가 꽂혀있던 걸 봤지"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을 때, 마미는 깃발과 딱 맞아떨어지는 빨강, 노랑, 초록의 무언가가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걸 봤다. 뭐였을까 하고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아저씨의 "우왓!" 하는 외침에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무, 무슨 일이죠?"
놀라서 맞은 편 좌석을 봤지만, 거기엔 아저씨의 모습은 없었다.
"아저씨?"
"... 콘택트렌즈를 떨어뜨렸어"
아저씨는 테이블 밑에 기어들어가 있었다.
"콘택트렌즈? 큰일이네요"
마미가 함께 찾으려고 하자 아저씨는 "움직이지 말게나" 라고 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라며 마미는 내딛었던 발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전신경을 집중시켰다.
"아, 찾았다 찾았어. 이거 괜히 소란을 피웠구나"
테이블 아래에서 나온 아저씨는 왼손 엄지와 검지를 꼭 붙인 채로 유리잔에 있는 물로 씻어낸 후, "잠깐 실례"라고 말하며 뒤돌아봤다. 아마 콘택트랜즈를 다시 끼고 있나 보다.
일단 안심하고 다시 분수대 앞에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새로운 타쿠야군 후보가 추가되어 있었다.
"우왓!"
이번에는 마미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왜 그러느냐?"
아저씨가 되돌아보며 물었다.
"아, 아뇨. ─ 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미는 중얼거렸다.
"그 사람?"
"아, ... 네"
격렬한 운동을 한 뒤인양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높이 울렸다. 마미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새로운 타쿠야군 후보가 입고 있는 셔츠. 그 셔츠는 빨강, 노랑, 초록의 신호등칼라다. 전에 코우노신씨가 맘대로 빌려갔다고 하는 타쿠야군 셔츠의 특징과 꼭 맞아떨어졌다. 이 셔츠가 일본 전국에서 몇장이나 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셔츠를 입고 있는 청년 두 사람이 같은 달 같은 시간에 이 좁은 광장에 우연히 같이 있을 확률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아마 상당히 낮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드디어 그 사람이 왔어요"
마미는 신입 타쿠야군 후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타쿠야군 후보가 아니다.
(찾았다)
저 사람이야 말로 시무라 타쿠야다.

 

 

3.

 

그 청년은 신장 170cm정도, 굳이 말한다면 야위어 보이지만 적당히 근육도 붙어 있는 균형잡힌 체형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는 약간 밝은 갈색으로 가볍게 웨이브가 들어가 있었다. 뭐 얼핏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학생같은 느낌이다. 멋지다, 라기보다 귀여운 타입. 좀 동안이라 그런걸까.
그를 보고 누구랑 닮았다고 마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이돌그룹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저 사람이 자네 애인인가?"
아저씨가 물었다.
"그래요"
두 사람은 창주변에 놓인 관엽식물 뒤에 몸을 숨기듯이 밖을 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무지 수상쩍은 2인조였다.
"흐음. 애인하고는 어디서 알게 됐지?"
"그러니까 음., 학교 선후배사이예요"
관찰하느라 정신없어서 적당히 대답하니까 아저씨가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언제?"
"그걸 왜 묻죠?"
마미는 창에 바짝 붙이고 있던 몸을 일단 떼내고 아저씨 얼굴을 봤다.
"아니, 그냥 흥미가 있어서"
아니 그냥?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라고 마미는 생각했다. 학교 선후배라고 말했으니까 끈질기게 파고들지 않아도 될텐데 왜 일부러 "언제?"하고 확인하려는걸까.
"고등학교 때, 요"
대답하면서 마미는 이 할아버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수상한 점쟁이라든가─. 그렇게 경계를 하고 있으려니까 아저씨가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요?"
마미는 다시 유리창 밖에 집중했다. 이상한 건 당신이야, 라고 속으로 말했을 뿐, 물론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자네의 애인과 그 바람끼 상대. 약 5미터정도 가까운 거리는 있는데도 왜 둘 다 그걸 모르고 있을까?"
확실히 그렇다. 아는 사람이 같은 곳에 있는데다 눈치채지 못할 거리도 아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온 거니까 상대를 찾으려는 자세로 있을 것이다.
"펜팔친구라나봐요"
마미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위험하다, 위험해. 이건 캐스팅 미스다.
시마코양과 타쿠야군은 노리코짱을 사이에 두고 아는 사이니까 아마 직접 면식은 없을 것이다. 
"그럼 저들은 오늘 처음 만나는건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구먼. 서로 눈에 띄는 표시를 몸에 달던가 하는 약속정도는 정해뒀어야지"
생판 남의 일인데도 아저씨는 흥분하며 말했다.
"아니, 그보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펜팔친구의 사진도 본 적이 없는지가 신기하지 않나? 대체 저들은 어느 시대 젊은이들인게야"
어느 시대라고 말해본들. 그거라면 펜팔친구라고 하는 고풍스러운 관계도 역시 딴지를 걸만한 부분이고.
"글쎄요. 저기, 공통의 친구의 중계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JR선 사고로 늦고 있어서"
"꽤나 자세하구먼"
"... 라는 미확인정보를 친구한테서"
어쩐지 상당히 구차한 변명이 되어가고 있다고 마미 자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사실대로 밝혔더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몰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다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니까 사실대로 말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성실치 못한 애인을 규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라면 그나마 간신히 용서받을 행위라고 예상한 결과에서 나온 설정이다.
"과연 그렇군"
아저씨는 가볍게 끄덕였다. 아무튼간에 얼렁뚱땅 넘어간 것 같기도 하다. 마미가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
"오오"
타쿠야군같은 인물이 시마코양을 흘끗 쳐다봤다.
(그래. 그 사람이 노리코짱 언니야!!)
마미는 기도하는 자세로, 염력을 보냈다. 하지만 청년은 또다시 금방 시선을 거두고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두리번두리번. 역시 누군가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 약속한 인물은 아직 안온 것 같고.
이번에는 시마코양이 주위를 둘러보며 분수대 주변을 잠시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방금 막 신호등칼라 셔츠를 스쳐지나갔다.
(시마코양. 그 사람이 타쿠야군!)
하지만 역시 염력은 닿질 못했다. 시마코양은 화려한 셔츠를 흘끔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자네, 왜 그리 힘을 잔뜩 주고 있나?"
"아, 아뇨"
이러고 있는 동안에 시마코양은 분수대를 한바뀌 돌아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이래선 다 틀렸다.
쌍륙게임(*)에서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갔더니 거기가 "출발지로 되돌아간다" 같은 기분이다. 마미는 탄산이 빠져나간 애플소다를 쭈욱 빨아마셨다. 노리코짱이 올 때까지 당분간은 현상유지가 계속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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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륙게임 : 두편이 15개씩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판 위에 말을 써서 먼저 나가면 이기는 보드게임. 서양의 백가몬.

 

 

4.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과거 타쿠야군 후보라 불리던 청년들은 한 사람씩 계속 약속상대가 도착해 그 장소를 떠나갔다. 그런데도 변함없이 시마코양과 타쿠야군 유력후보인 청년은 나란히 서있는 채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더더욱 그가 타쿠야군이라고 확신을 더해가는 마미였다. 접시 위에 있던 샌드위치는 곁들여 나온 파슬리를 빼곤 전부 없어졌다. 하나도 남김없이 할아버지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저씨, 저한테 신경쓰실 것 없어요"
마미가 입을 열었다.
"응?"
"계산은 제가 할테니까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주세요 라고 말해둘 참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뭔가 착각했는지
"그래? 그럼 사양않도록 하지. 아가씨 여기 블루마운틴 하나 추가해주게"
크게 손짓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에엣?!"
"주문받았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와서는 빈 샌드위치 접시와 테이블 위의 계산서를 가지고 가버렸다.
"잘 먹겠네"
아저씨는 신호등칼라의 작은 깃발을 손가락으로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말했었지? 난 여기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고"
" .... "
거짓말인지 진짠지 모르겠지만, 이 할아버지, 적어도 커피 한 잔분은 더 버틸 작정인가보다.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마미는 유리창 바깥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이후 가능하면 할아버지는 무시하자. 샌드위치와 커피값은 뼈아프지만, 자리값이라 치면 그만이다. 우연히 합석한 노인한테 일일히 신경쓰다간 취재같은 건 못한다.
"기다리셨습니다. 블루 마운틴 나왔습니다"
커피가 나왔다. 하지만 마미는 그쪽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놓는 둔탁한 소리. 웨이트리스가 인사하고 가버리는 기척. 보지도 않았는데 마치 보이는 것처럼 확실히 그 상황이 마미 눈에 떠올랐다. 거꾸로 유리창 너머 분수대 앞의 풍경은 보고 있으면서도 머리 속에 화면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된거다. 자신은 창 밖을 보느라 정신없다, 라는 자세만이라도 맞은 편 자리에 있는 노인에게 표시나면 그만인 것이다.
"자네도 뭔가 주문하는게 어떻겠나?"
"괜찮아요"
대답정도라면 하겠지만 물론 고개는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쥬스는 이미 사과냄새 나는 얼음물이 되버렸잖은가?"
" .... "
무시.
"여기 후로즌 요구르트 애프리컷 샌드위치같은 건 어떠냐? 캬라멜바나나 쵸콜렛 파르페도 맛있어 보이는데"
보란 듯 메뉴판을 눈 앞에서 시끄럽게 팔랑거린다. 
"필요없다고 말했.. !"
그만 열받아서 마미는 고개를 돌렸다.
" ─ 잖아요"
하지만 그 때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아까까지 없었던 것을 발견하고 스윽 혈압이 내려갔다.
" .... "
틀린 곳 찾기. 자, 아까하고 어디가 다른걸까.
"겨우 이쪽을 보는구먼"
아저씨는 승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상태로 보아 자신의 실수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까부터 줄곧 생각해봤는데"
"네?"
무시하기 작전을 휴전하고 마미는 아저씨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얼굴 한가운데에 추가된 바로 그 작은 물건.
"자넨 거짓말을 하고 있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저씨쪽 아닐까요?"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마미는 입을 열었다.
"뭘?"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 아저씨.
"그럼 묻겠는데요. 어째서 안경을 쓰고 계신거죠?"
"그야 안경을 쓰지 않으면 메뉴판에 적힌 깨알같은 글자를 못읽으니까"
"콘택트렌즈 하고서요?"
"앗, 아뿔싸"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다.
아까 콘택트렌즈를 떨어뜨렸다가 주워서 씻은 뒤 눈에 다시 끼는 퍼포먼스를 연기했지만 일반적으로 콘택트렌즈와 안경은 동시에 쓰지 않는 법이다.
"그 안경, 도수가 있는 것 같아 보이니까 역시 콘택트렌즈가 거짓말이겠군요?"
다시 생각해보면 마미는 콘택트렌즈 본체를 보지 못했다. 단지 그 태도를 보고 거기에 있다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었다. 콘택트렌즈는 작고 얇은데다 투명하니까.
"상당한 추리구나"
"하지만 왜 콘택트렌즈를 떨어뜨렸다고... "
"자네와 마찬가지일세. 이 자리에서 버티려고 거짓말한 것뿐이네"
"에?"
"아까 얘기를 계속하지. 난 확실히 거짓말을 했네. 하지만 자네도 거짓말을 했으니까 비긴 셈이 아닌가?"
"제가, 무슨 거짓말을?"
짐작가는 데가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에 있는 청년. 그는 자네 애인이 아냐"
"... 어째서요?"
마미가 묻자 아저씨가 조그맣게 웃었다.
"자넨 남성인가?"
"아뇨"
웬 번지수 잘못찾은 질문을 하고 있지.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를 어떻게 해야 남자로 착각할 수가 있담. 설사 안경이나 콘텍트렌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잖겠어.
"그런가. 아니, 자네가 남성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야"
"하?"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남학교였다네. 하지만 자넨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었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창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신호등칼라의 셔츠를 입은 청년은 자신의 출신학교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계속 시계만 쳐다봤다.
".... 또 거짓말을"
"어쿠 이런. 이건 거짓말이 아닐세. 뭣하면 3천엔 내기해도 좋아"
"3천엔?"
이거 또 현실적인 액수를 제시해 온다. 고등학생 여자애 지갑에 확실히 들어있음직한 금액. 이게 가령 30만엔이라고 했다면 장난친다고 생각하고 상대안하려고 했겠지. ... 그건 곧 정말로 내기에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이 할아버지.
"믿지 못하겠나? 그럼 이 가게를 나가서 한걸음에 분수대앞까지 달려가 그 사람한테 확인해 보는게 어때. ─ 단,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
" .... "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아마 그 정보는 맞을 것이다.
"저기 있는 사람과 아는 사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그러니 깜짝 놀랬다네. 자네 애인이라고 들었을 때는 말일세. 하지만 자넨 그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 아마 여기서 보이는 청년 가운데 적당한 애인역을 캐스팅한 것에 지나지 않아. 틀렸나?"
정답.
단, "적당히"란 단어는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셔츠라고 하는 확실한 단서로 고른 거니까.
셔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미는 팟 깨달았다.
"그 사람이 아까 이 유리창 앞을 지나가니까 아저씨는 급히 몸을 숨긴 거였군요. 콘택트렌즈를 찾는 척 하면서"
"정답일세. 그가 날 발견하면 조금 귀찮아지거든"
"귀찮아져요?"
마미는 유리창 저편에서 계속 기다리느라 지친 청년과 눈앞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는 노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혹시말이죠.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란 게 ─"
바로 저 사람일까.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봤자 저 청년이 가디리는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그가 타쿠야군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면 타쿠야군이 기다리는 사람은 니죠 노리코짱이니까. 노리코짱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건 그가 타쿠야군이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아니. 그게 아냐. 난 그와 만날 약속을 한 게 아닐세"
아저씨는 약속설을 부정했다.
"그럼 왜 이곳에 있는거죠?"
"어떤 의미에선 자네와 같다고나 할까. 여기에서 지켜보고 있는거지. 그의 행동을 포함해서 광장의 모습을 말일세"
살짝 웃으며 중얼거리는 시선의 앞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거기서 마미는 감이 왔다.
"설마, 코우노신씨?!"
그러자 아저씨는 천천히 마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
"코우노신씨죠? 타쿠야군의 할아버지이신"
표정을 살피며 거듭 질문했다.
"─ 잘못봤네"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입으로는 잘못봤다고 하면서도 명백히 동요하고 있다. 도대체가 관계없다면 이렇게까지 "코우노신"이라는 이름에 과잉반응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왜 아까 '어떻게 그 이름을..?' 이라고 말하신거죠? 코우노신이란 이름에 짚이는 데가 있어서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고 새삼 다시 보니 그들은 나이는 비록 틀리지만 멀리서도 알아볼만큼 얼굴이 아주 닮았다. 저 청년을 처음에 봤을 때 마미는 '누군가 닮았네'하고 생각했다. 그건 TV에서 자주 보는 아이돌도 뭐도 아닌, 눈앞에 있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후후"
유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아저씨는 시선을 다시 마미에게로 돌렸다. 작전을 바꾼걸까.
"지금 당장은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하지. 자네 역시 아직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코우노신씨"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니까"
아저씨는 코우노신씨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증거로 보아 코우노신씨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하고 있던 코우노신씨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너무 달랐다. 타쿠야군이 그렇게까지 깎아내리고 있으니까 좀더 신통찮은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너무나 의외로, 세련된 신사였다.
"코우노신씨가 아니라면 그걸로 됐어요"
마미는 질문을 약간 바꿔봤다.
"저기있는 사람이 시무라 타쿠야군인지만 대답해주세요"
"글쎄다, 누구려나. 나이가 드니까 사람이름도 자주 까먹고 해서 말이야"
또 시치미뗀다. 손자이름을 잊어먹는 할아버지가 어디있어. 혹시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치매상태가 위중한 할아버지가 혼자서 외출을 어떻게 해.
이렇게 되면 뭐든지 숨김없이 말하는 수밖에 없어. 마미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협력을 구하자고. 위험한 도박이지만 그만큼 이겼을 때 얻어들이는 것도 크다.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 약간 테이블쪽으로 몸을 내미는 자세를 취한 뒤,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속닥거렸다.
"실은 전 친구 노리코짱의 보이프렌드인 타쿠야군을 보러 온거예요"
"호오"
그 고백을 듣자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럼 그 노리코짱이라는 애한테 직접 부탁해보면 되지 않나. 소개해달라고 말일세. 그렇게 하면 이런 곳에 잠복해서까지 몰래 숨어서 찍을 필요도 없잖은가"
"옳은 말씀입니다만, 전 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쿠야군을 꼭 소개시켜주고 싶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라니?"
"전 학교 신문부 소속이에요"
"아아... 그렇게 된 거로구나"
"네. 그런거죠"
전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납득한 모양이었다. 이해가 빨라 아주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신문부가 잠복취재할 정도라. 그 노리코짱이 아이돌스타인지 뭔지 하는 앤가?"
"그래요"
별칭. 로사 기간티아 앙 부통(백장미 봉오리)이라고 하죠.
"흐음. 이 할애비가 공부부족으로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학교내에서, 지역한정 아이돌이니까요. 무리도 아녜요"
"그렇구나. 그럼 알고 있는 편이 더 이상한 셈인가"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혹시 코우노신씨도 타쿠야군의 걸프렌드를 보러 온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노리코짱이 상당히 늦네요"
"그렇군"
마음이 느슨해져서인지 아저씨는 이미 "코우노신"이나 "타쿠야군"을 일일히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학교얘기에 흥미가 쏠렸는지 적극적으로 마미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노리코짱이란 아이말인데,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건 자네 시나리오에서는 그 애가 펜팔친구를 만나게 해주는 소개인역이란 말인가?"
"에? 아, 네. 그렇죠"
"그럼 저 애인역인 처자의 정체는 무엇이지?"
애인역의 처자. 아저씨는 시마코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노리코짱의, 언니.... 아니, 진짜 언니가 아니라, 친한 선배란 의미로, ─"
그러자 마미의 대답을 듣고 있던 아저씨는 말을 탁 끊었다.
"이제 알겠군. 자네 학교는 리리안 여학원이었어"
"엣... "
"물론 그 학교특징인 쇠르(자매)제도 지식정도는 가지고 있지. 전통있는 여학교니까"
노인이라고 해서 방심해선 안된다. 리리안 여학원은 메이지 34년부터 있었던 유서깊은 학교. 나이드신 분들이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전혀 없는 것이다.
"....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마미는 완패를 인정했다. 자매제도가 있는 건 리리안 여학원에서도 고등부뿐이다. 그 말은 곧,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신문부인 마미의 신원까지 이 노인에게 훤히 드러난 셈인 것이다. 더 이상 얕은 잔꾀는 통하지 않아. 마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자넨 어디서 타쿠야와 코우노신이란 이름을 들었나? 노리코짱이란 여자애가 가르쳐 주던가?"
"아뇨. 저기, 인터넷 홈페이지에서요"
"아아, [타쿠야군의 불전]말이군"
"알고 계셨나요?!"
"물론이지"
그럼 [코우노신의 단칸방]도 체크가 끝난 상태란 말인가. 심하게 적혀 있었는데 대체 어떤 기분일까. 기자혼이 꿈틀거려 무심코 내용감상을 물어봤더니 "노코멘트"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와서 뭘 아까운 체 하고 있어. 아저씨 마음속의 세큐리티 기준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밑천을 다 드러냈으니까, 조금은 정보를 주세요"
망했다는 생각으로 마미는 요청해봤지만.
"자네가 마음대로 말한 것뿐이잖은가.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아저씨의 입은 단단했다.
"그냥 듣기만 했단 말씀인가요? 전 아저씨의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어'라는 말을 계기로 다 말씀드렸는데"
"알았네 알았어. 그럼 자네에게 한가지 중요정보를 가르쳐주지. 이 깃발은 기니공화국 국기일세. 거꾸로 하면 말리공화국이지. 아주 비슷해보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해"
또 말귀를 못알아들은 척하고 얼버무리려 한다니까. 이 너구리 할배.─ 겉으로 보면 뭐랄까 사슴 친구정도 되겠지만.
"... 박식하시네요"
야유를 담아 마미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데미지를 안받은 모양이다.
"인생, 매일매일이 공부지. 난 이미 은퇴한 할애비지만, 자유로운 시간을 얻어 여러가지 일에 도전하고 있다네. 공부에서 놀이까지. 젊은이들이 할만한 일도 말일세"
아아,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손자를 의식하고 있었구나. 묘하게 납득이 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젊은이의 샘플이니까.
"슬슬 11시 30분이구나"
손목시계를 보며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어떤가 자네. 잠깐 분수대까지 가서 노리코짱의 언니를 이 찻집으로 데려오지 않겠나?"
"엣?"
"모자를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더위속에서 기다리는 건 슬슬 한계일테지. 노리코짱이 오면 여기서 보고 알 수 있을테고"
"제가, 가는 건가요?"
"난 못가니까"
모르는 젊은 처자에게 말을 걸었다가 헌팅이라고 오해받기 싫다는 걱정도 약간은 들겠지. 그렇지만 아저씨한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분수대 앞에는 줄곧 기다리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다. 아저씨는 그 사람에게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쯤에서 수분을 섭취하게 해서 쉬게 하는 편이 좋아"
수분이라면 그녀 바로 옆에 대량으로 있지만, 저걸 마실 수는 없는데다, 그 안으로 뛰어드는 건 더더욱 무모했다.
"열사병은 잘못되면 죽지"
심각한 화제인데도 할아버지는 태평스레 읆조렸다.
"... 알았어요. 데리고 올게요. 가면 되잖아요"
자기가 행동하지 않은 탓에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하면 뒷끝이 나빠서 견딜 수 없다.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의 기사는 목이 빠지게 원하지만, 학교신문에서 다루기 힘든 대사건은 사양하고 싶다.
마미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아저씨가 "잠깐 기다리거라"라며 스톱을 걸었다. 분수대 앞에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아, 네"
노리코짱 기다리길 포기한걸까. 시마코양은 찻집 유리창 시계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하죠?"
쫓아가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자 아저씨는 "뭐 좀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고 말했다. 금방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말대로, 2분정도 있으니까 시마코양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손에 녹차캔을 쥐고서 말이다.
"역앞 매점에라도 가서 사온거겠지... 제법이구나"
"어떻게 하죠?"
"그렇군. 그녀가 저 녹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릴까"
"네"
왜 자신은 할아버지의 지시나 받고 있는 걸까. 마미는 그게 궁금해졌다. 하지만 경험의 힘이랄까, 그 판단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무언가를, 할아버지는 가지고 있었다.
시마코양이 홀짝홀짝 녹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11시 40분이 되었다. 옆에 서있는 화려한 셔츠의 청년은 시계탑을 보고 자기 시계를 보고 흘끔 시마코양을 보고, 그리고 또 손목시계를 본다.
"두고보거라. 이번에는 그가 움직일테니"
청년이 한숨을 크게 쉬고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아저씨 예언대로 천천히 걸어서 분수대 앞에서 멀어져갔다. 예언한 지 1분도 안지났다.
10분정도 전에 시마코양이 잠깐 사라졌던 것과는 반대방향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경우, "잠깐 매점에나 들러서 마실 거나 사러 갈까"는 아닌 듯했다.
"노리코짱이 안올거라 생각해서 포기하고 먼저 불상전에 간걸까"
마미는 자기나름대로 추리해봤다. 하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왜요?"
"아니, 그냥"
아저씨의 예언은 얕잡아볼 수 없으니까 아저씨가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마미는 생각했다.

청년의 모습이 완전히 유리창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슬슬 가보련다"
"엣"
아저씨가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마미는 적잖이 쇼크를 받았다. 아니 그보다 자신이 쇼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쇼크였다. 
귀찮게 여겨진 때도 있었지만, 어느샌가 분수대 앞에 펼쳐질 드라마를 함께 지켜보는 사이라는 친근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이 결말을 마지막까지 함께 지켜볼 것이다. 마미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저씨는 사실 신호등칼라의 셔츠를 입은 그 사람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사라지자 분수대 앞의 특등석은 이미 아저씨에게 있어서는 이용가치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네는?"
"이곳에 좀더 있을게요"
마미는 대답했다. 함께 가게를 나갈 기분이 아니었다.
"노리코짱이 안올 것 같으면 분수대 앞에 있는 저 애를 어디 시원한 곳에 피난시키려구요"
"그렇구나. 그럼 먼저 실례하마"
아저씨는 테이블 위의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아, 제가"
"됐어. 재밌는 얘기를 들려준 보답으로 내가 사지"
"엣... "
아저씨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기니공화국 국기를 윗주머니에 꽂았다.
(코우노신씨, 멋져요... !)
마미는 무심코 그 말을 입에 올릴 뻔했다. 그는 아마 50년 전에는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있었을 것이다. 외모도 행동도 스마트하니까.
잘 먹었습니다, 라는 인삿말을 하고 팔로 끼고 있던 아저씨의 가방을 건네줬다.
"아저씨가 기다리던 분은 결국 오지 않았네요"
"아니, 실은 벌써 와 있단다. 조금 기다리게 했지만 말이야"
아저씨는 멋적은듯이 웃고 난 뒤, "그럼" 하고 뒤돌았다.
(벌써 와 있어... ? 어디에... ?)
마미는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저씨가 알고 있었으니까 약속한 인물은 여기서 보이는 곳에 있는 셈이다. 어디에 있는걸까.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 사람은.
아저씨가 앉아 있던 의자에 가서 한층 더 두리번거리고 있자, 계산을 마친 아저씨가 갑자기 돌아왔다.
"무, 무슨 일이죠?"
마미는 마친 보여선 안될 장면을 보인 것처럼 허둥거렸다.
"비장의 정보를 자네한테 일러준다는 걸 깜박해서 말이야"
"뭔가요?"
물어보자 아저씨는 입옆에다 손을 칸막이처럼 세우고 마미의 귀 옆까지 얼굴을 다가가서 나직이 속삭였다.
"자넨 모르고 있나본데, 타쿠야군과 시마코양은 안면이 있다네"
"안면이 있다... 엣?!"
하지만 그 두 사람은 계속 같이 서있었는데도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혹시 아저씨의 말이 맞다고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저 신호등칼라 셔츠는 타쿠야군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아저씨!"
정신차리고 일어섰을 때는 이미 아저씨는 가게 문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 .... "
마미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일단 앉아서 물을 마셨다. 그 청년이 타쿠야군이 아니라고 한다면 코우노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때 문득 생각이 났다.
"나, 시마코양의 이름을 말한 적 없는데... "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는 노리코짱의 언니 이름을 알고 있는거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미도 모르는, 시마코양과 타쿠야군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왜... 어떻게... "
혼란스럽고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본 바로 그 때 니죠 노리코짱이 분수대 앞에 막 도착했다.
"지각이야, 노리코짱... "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일단 마미는 손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준비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건 나중이다. 지금은 이 잠복취재가 헛수고로 끝나지 않도록 기사에 붙일 수 있는 사진을 한장이라도 좋으니 찍어야만 한다.

타이틀은 <백장미자매, 한여름의 하루>

츠키야마 미나코님이 내건 "그가 로사 기간티아 앙 부통(백장미 봉오리)의 애인이다!"와 비교하면 약간, 아니 상당히 박력이 떨어지지만 별 수 없다. 서로 다가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프레임 속에 담아 셔터를 막 누르려고 한 순간,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정확히는 찻집 유리창 앞)를 무언가 연록색의 물체가 휙 지나갔다.
"뭐지?"
마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육안으로 그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러자 연록색으로 보인 건 연록빛 모시슈츠였다. 찻집에서 나간 수수께끼의 할아버지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밖을 거닐고 있었다.
"아저씨... ?"
분수대 앞에는 두 사람의 소녀가 서있었다.
한 사람은 서양인형, 또 한 사람은 이치마쯔 인형(*). 그녀들은 여름모시슈츠를 알아보고는, 손을 들고 웃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이런 멍청한 일이.. "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개에 마미는 넋이 나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 뒤돌아 서있던 타쿠야군이 마미에게 등뒤로 V사인을 보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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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찌마쯔 인형 : 뱃속에 피리를 장치한 흙으로 구워서 만든 일본 전통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