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3권 한여름의 1페이지 -3- 이제, 결행

- 자, 결행 -

 

 

1.

 

그 "남자"라는 키워드가 까다롭겠는데, 하고 동생의 친구는 중얼거렸다.
"남성혐오증이라고 말은 간단히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 그 정도가 다 다른데다가, 그렇게 된 원인에도 주목을 기울여 분석할 필요가 있을테고. 하지만 그런 건 지금은 잠시 제쳐두고요. 결국 남자=혐오스러운 것, 이 수식이 이미 자리잡아 버린 바람에 귀찮은거죠"
"수식?"
유미가 되물었다.
"기호든 도식이든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약속된 패턴이랄까. 예를 들어 ─, 유미누나"
"응?"
"2x2는?"
"4"
"9x7은?"
"63"
"그렇죠?"
"하아?"
갑자기 구구단을 외우게 해놓고 "그렇죠?" 라고 물어본들 뭔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2x2 라고 하면 4라고 바로 나오죠? 그 때 숫자 2가 2개있으니까 4, 그렇게 생각하고 답한 건 아니잖아요"
"응. 정말 그러네"
2x2 는 그렇다쳐도, 9x7 이라면 분명 9를 7개 더하거나 하진 않지. 초등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운 이후로는 그렇게 쓰는 거라며 외운대로 사용할 뿐이니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날렸다.
"유미누나의 언니인 사치코님은, 직접적인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추리해보건데 몇개의 샘플데이터에 기초해서 남성을 혐오하기에 이르렀단 얘기죠. 선천적인 알러지가 아니라고 한다면요"
"으음"
몇명의 다른 여성과 사귀고 있다는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존재가 어린 사치코님의 마음을 상처입혔다. 약혼자로 정해진 사촌은 자상하고 정결했으니까 이 사람이라면 하고 기대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임이 판명.
결벽증의 사치코님이 "남자따위" 라며 완전히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아아, 그렇구나. 남자라고 하면 사치코님의 마음 속에선 '싫어'라는 신호가 바로 켜진다는 얘기네"
"그 말대로죠. 남자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세상에는 여러가지 타입이 있거든요. 아, 유미누나도 보고 싶은 맘이 생기면 우리 하나데라에 꼭 한 번 놀러오세요. 버라이어티풍으로 깔려 있으니까 참고가 될걸요 "
거기서 유키가 보리차를 들고 방에 들어와서, 헛기침을 했다.
"어이, 코바야시. 내 누나 꼬시지마"
"으게엑, 시스콘이냐 유키치"
" ... 헛소리 작작해. 유미방에서 쓸데없는 말 나불거릴 시간있거든, 내 방에 돌아가서 영단어 하나라도 더 베껴. 아니면 다른 용무라도 있어? 벌써 다 베꼈냐? 그럼 얼른 돌아가던가. 사정해서 온 것도 아니면서"
"섭섭하게 구는구만 유키치여. 저 방은 지옥. 이 방은 천국이다. 몸이 저절로 휘청휘청 이 방을 향하는 건 어쩔수 없는 일 아니냐"
유키에게 응석부리는 코바야시군. 그는 오늘 연락도 없이 후쿠자와 집에 들렀고, 그 때문에 친구의 방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참으로 한심한, 다른 말로 하자면 참으로 딱한 손님인 것이다.
창문열고 선풍기 빙빙 돌려봤자 거기서 거기인 한여름의 오후.
"뭐 어때서 그래 유키. 한숨돌릴겸 여기서 쉬었다 가지? 아직 얘기중이지만 코바야시 말도 꽤 흥미깊고 말야"
"아아, 상냥하셔라 유미누나. 전 유미누나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었어요"
코바야시가 커다란 밤나무 아래서 놀 때의 포즈처럼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며 기쁜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생이라고 해봤자, 실은 같은 나이인데. 코바야시하고는.
"유미. 너무 봐주면 이 자식 기어올라"
"기어오를 것 같으면 유키가 펀치든 킥이든 먹여서 막아 줄거지?"
"어쩔 수 없네"
억지로 떠맡은 듯한 태도를 취하는 유키. 신뢰받는다는 게 기뻤는지 약간 콧구멍을 벌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에어컨 바람이 직접 닿는 위치를 골라서. 정말이지 시원한 위치를 잘도 찾아낸다니까. 고양이같은 애다.
"그래서, 얘기를 계속하자면"
코바야시는 보리차를 반정도 단숨에 마신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키치라면 괜찮다고 하는 사실은 사치코님한테는 아주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째서?"
"피가 이어지지 않은 젊은 남자. 그건 남성혐오증의 여성에게 있어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일테죠. 그런데도, 뭐어 유미누나의 동생인데다 덤으로 얼굴도 빼닮았다고 하는 좋은 조건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실적을 한 건 올렸으니까요. 남자=혐오스러운 것 이란 방정식은 이미 부서진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지금이 바로 찬스입니다. 여기서 단숨에 붕괴시켜야죠. 베를린장벽처럼요. 리리안측과 하나데라측에서"
무심코 "응"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큼 설득력있다.
"코바야시 ... 머리좋아보여"
"고맙습니다. 기뻐요"
"유미, 착각하면 안돼. 이 녀석이 잘하는 건 수학뿐이야. 다시말해 계산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것 뿐이야"
"아, 그렇구나"
적어도 오늘 영어가 질색이란 것만은 알겠다. 잘했다면 일부터 교통비들이면서까지 친구집 찾아와서 단어집 베끼게 해달라고는 안할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벽을 붕괴시켜? 사치코님의 벽은 요새처럼 높고 견고한데"
"단숨에는 무리겠지만, 몇번 나눠서 공격하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요?"
"몇번 나눠서... 란 말이지"
"실적을 계속 쌓아나가는 거죠. 하나하나는 작아도 상관없어요. 예를 들면"
코바야시는 시원스레 말했다.
"우리 학교에는 게이뿐만 아니라 하프도 있어요"
" ─ "
그렇게 확실히 대놓고 까발리는 것도 좀. 그럼 마치 하나데라에는 게이가 굴러다니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설마 정말로 그런 곳에 동생이 다니고 있는걸까. 유미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온실에서 자란 아가씨란 걸 까맣게 잊고 있는 코바야시는 유미가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척척 압박하고 압박하고 압박해온다.
"몸은 남자지만, 마음은 여자 그 자체. 외모도 그럭저럭 귀여운 축에 들어가고요. 사복입고 있으면 여고생으로밖에 안보이죠. 그런건 어때요?"
"어때요,라고 말해도 그게 ... "
왠지 더이상 코멘트하기도 뭣하다.
"겉보기에 남자가 아니라면 사치코님이라도 평소처럼 얘기라던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그러니까..."
유미가 곤란해하자, 유키가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근데말야 코바야시. 남자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치코씨가 녀석의 존재자체에 거부반응을 표시할 수도 있잖아"
"어.. 그거 차별아냐?"
"차별이라던가 그런 말 꺼내기 이전에말야, 생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건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거 아니겠어?"
"뭐 그것도 그렇다"
여자마음을 지니고 있고 여자옷을 입고 있지만, 몸은 물론 호적상 성별도 남자란 건가. 어떨까?
유미는 별로 저항감같은 게 없지만, 그건 사람 나름이겠고. 사치코님의 경우는 남성혐오증이 얽혀 있으니 더더욱 복잡했다.

"그럼 비장의 수를 써볼까?"
"비장의 수?"
"코바야시는 사치코님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치코님은 코바야시가 남자란 이유만으로 무서워서 상대해주질 않아요. 그래서 코바야시는 친구에게 상담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자신이 악역이 되어 사치코님에게 시비를 걸테니까 그 때 구해주는거야, 라고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무서운 남자한테서 구해준 코바야시에게 사치코님은 매우 고마워하면서 괜찮다면 차라도, 하는 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코바야시 이야기를 들으며 유미와 유키는 서로 마주보았다. 그거..
"그거 혹시 '울어버린 빨간도깨비' 아냐?"
"어라, 알고 있어?"
그야 아주 유명한 동화니까. 우리집에도 옛날에 한권 있었다. 찾으면 분명 어딘가에있을거야.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거든.
"너무 뻔한 수작이야. 대체 누가 악역인 파란도깨비를 맡으려 하겠어? 서툴게 일벌였다간 경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데"
"아, 그런가"
네가 할래, 하며 유키가 따지고 들자 코바야시는 그 작전을 즉시 취소했다. 비장의 수라고말한 것치곤 너무 빠른 침몰이었다.
"역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걸로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유미누나, 요며칠내로멤버가 모일 예정없어요?"
"그게 말야 ... "
이제부터 매일같이 모일 예정이긴 하지만, 장소가 학교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역앞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는 식이면 일이 잘 풀려 패밀리레스토랑이라던가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가는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레이님과 요시노양이 빠진 채로 진행되고 만다.
사치코님과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레이님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건 뼈아프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데라 학생회에서 차를 함께 마실 것을 제안한다고 가정해볼 때, 그 자리에 있는3학년이 사치코님 한 명뿐이라면 아마 독단으로 거절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레이님이 함께라면, 적어도 "어떻게 할까?" 정도의 상담은 할 것이므로, 이 계획에 한몫 담당하고있는 레이님이 "좋은 기회니까 가자" 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해 준다면 사치코님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일 확률도 쭉 오를텐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야기를 들은 코바야시는 손바닥을 쳤다.
"리리안 여학원 정문 바로 밖에서 우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산백합회 사람들이 나왔을 때 우연을 가장해서 말을 걸게요. 그래서 사치코님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대로 버스에 타고 K역이든 M역이든 가는 걸로 하죠. 그렇게 하면 그, 레이님이었던가요, 그분들도 함께 올 수 있을거고요"
"하나데라 쪽은 그래도 괜찮아?"
"그럼요. 다들 산백합회 사람들과 만나길 기대하고 있거든요. 만사 제쳐놓고 그 쪽 사정에맞추고 말구요"
"기대 ─ "
뭔가 약간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아무쪼록 사치코님에게는 쓸데없는 짓 안하도록 모두에게 일러줘. 남성혐오증 증세가 더 악화됐다간 하나데라 학원제도 못도와주게 될테니까"
"괜찮다니까요. 그림의 떡이라고 할까, 그런 공주님같은 사람은 멀리서 보고 있는 것밖에 못하거든요. 남자란 동물은"
"그런가 ... 흐응, 그렇단 말이지?"
"따라서, 모임 일정과 대강 마치는 시간을 알려주면 결행한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코바야시가 앞장서서 이래야죠 저래야죠 하며 결정해 간다. 카시와기씨 집에서 돌아오면서 계획이 뒤틀려 망연자실해 있던 일이 거짓말같다.
"알았어. 레이님하고 상담해보고 나서 코바야시한테 연락할게"
유미가 대답하자, 코바야시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싶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유키를 쳐다보자 유키가 입술모양으로 "바보" 라고 한다.
"아, 그렇지. 유키한테 말하면 되는구나"
일부러 전화할 것도 없이, 같은 집안에 하나데라 학교 학생회 관계자인 동생이 있었으니까.
"나참, 변함없이 맹하구만"
그런 대화가 왔다리갔다리 2시간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파상 아저씨가 드디어 왔고, 유키방 에어컨은 무사히 수리되었다.

 

 

2.

 

결행일은 8월 셋째주 수요일로 정해졌다. 그다지 깊은 이유는 없지만, 얕은 이유라면 적당히 있다. 
예를 들면. 산백합회 자율등교는 8월 들어서 2주째부터 드문드문 시작되긴 했지만, 시작하자마자바로 느닷없이 부딪히는 것도 조금 난폭스러운데다가, 사치코님의 상태를 관찰하고 나서하자는 의견으로, 약 1주일간의 유예기간을 설정했다. 
플러스. 레이님과 요시노양이 소속중인 검도부 활동일에 겹치지 않는 날로 할 것.
그리고 거리가 혼잡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요일과 토요일은 일단 피하고 볼 것. (일요일은 학교가 문열지 않으니까 모임 자체가 없다)
" '여어, 사치코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인데요. 괜찮다면 차라도 한 잔 어때요. 마침 우리 학생회 멤버가 모여있거든요' "
" ... 못하네. 마치 교과서 읽는 것 같아"
거실소파에 앉아 있는 유미가 서서 연습중인 동생에게 연기지적했다.
"그런 말 해봤자 짧은 시간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전달해야만 하니까 어쩔수 없지 뭐. 도대체가 유미가 거기에 있는데, '여어, 사치코씨' 는 이상하잖아?

'어, 유미'
'유키잖아. 뭐하고 있어?'
'아니 그냥 학생회 모임이야'
'우리들도 그런데'
'헤에 그렇구나. 우리들 지금 패밀리 레스토랑 갈건데 같이 갈래?'
'응 갈래갈래'

이러지 않겠어? 우리들 일상대화라면 말야"
"우웅"
동생 말도 일리있다.
"그럼 그렇게 하자. 단 권유하는 부분에서만큼은 사치코님 보고 '같이 가실래요?' 라고 해줘야 해"
"OK"
유키가 레포트용지에 써있는 문자를 빨간펜으로 수정한다. 그건 코바야시가 지지리도못쓴 글씨로 마구 갈겨쓴 오늘의 대본이었다.
결행시간까지 앞으로 5시간. 후쿠자와 남매는 꽤 성실하니까 유미가 학교가기 직전까지최종체크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와서 대본 뜯어고쳐도 괜찮으려나. 하는 의문마저도지나친 열의덕분에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뭐하니? 어디 학원제 연극이야?"
엄마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며 물으셨다. 철렁한 두사람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온말은.
"리리안"
"하나데라"
서로 상대방 학교에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 과연 닮은꼴 남매. 엄마를 속일 생각은 없지만, 이제부터 사치코님에게 이른바 덜컥 놀래자빠질만한 일을꾸미고 있는 이유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역시 그다지 칭찬받을 일은 아니니까 말하기 곤란하다. 처음부터 사정을 설명해도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유미짱은 하나데라라고 하고, 유키는 리리안? 대체 어디니?"
당연히 엄마는 갈피를 못잡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으셨다.
"어디냐고 물으셔도 그게 ... 그러니까, 합동이라고 할까, 아직 정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고임시로 짠 대사를 살짝 연습해본 것 뿐예요"
엄마 미안해요.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거짓말이 아니니까.
"아아, 그런 거였어? 그거 기대되네"
엄마는 스폰지에서 똑 떨어질 듯한 비누거품을 왼손바닥으로 받치면서 웃으셨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리리안 학원제에 갈테니까. 유미짱이 울부짖어 봤자 소용없어.물론 아빠도 같이"
"우엣"
"당연하잖니.올해는 유키도 나가지? 산백합회 연극에"
"... 글쎄. 산백합회 뭐하는대? 연극한대?"
뒤돌아보고 있던 유키가 유미를 다시 쳐다봤다.
"아마도. 매년 그랬던 것 같으니까"
사치코님과 레이님이 속닥속닥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로 보건대, 아무래도 무대극 냄새가난다.
"뭐, 아직 안물어봤어? 여름방학에 일부러 학교까지 모여서 대체 뭘하고 있는건데?"
"우리 기획물 말고도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동생의 욕바가지에 유미는 혀를 메롱 내밀며 반격.
"그럼 한번 물어보자. 하나데라 학생회는 이 시기에 아무것도 안해?"
"하고 있다니까. 학생회프레젠시 라는 거 기획중이라고"
"한창 준비중이란 말이잖아?"
"윽"
"하나데라 학원제 쪽이 먼저면서"
"우린 연극같은 거 안하니까 상관없어!"
유키가 레포트용지를 소파에 내팽개쳤을 때, 엄마가 앞치마에 걸려있는 설겆이타올을 두사람 사이로 던졌다.
"둘 다 뭐하고 있어? 애들같이. 고등학생이니까 남매싸움하려면 좀더 스마트하게 해줘라"
딸과 아들의 절정에 이른 말다툼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며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남매싸움이래"
"그러게"
두사람은 서로 쳐다봤다. 확실히 좀 심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들어가시고 난 뒤 단숨에 히트다운하자, 유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렇구나. 리리안은 연극이란 말이지 ... 작년 카시와기선배 같은 일을 시킨다면, 확실히말해서 괴롭겠는걸"
왕자님 복장으로 여자와 댄스를 추고. - 뭐어, 대개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그런 창피한 짓을어떻게 해, 라고 생각할테지. 싫은 기색없이 카시와기씨처럼 해내는 사람쪽이 아마 소수일 것이다.
"문제없어. 작년만 해도 카시와기씨 혼자만 부탁했겠다. 유키처럼 말단은 나간다고 해봤자 아마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이야"
"말단" 이라던가 "엑스트라" 라던가, 그다지 적당한 단어라는 생각은 안들지만, 아무튼 유미는 열심히 동생을 격려해줬다.
"그렇겠다. 그렇게 되길 마리아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어"
유키가 천정을 올려다보고선 합장했다.
"어라, 석가님이 아니고?"
"아니, 이 경우는 역시 마리아님이겠지?"
"알았어. 그럼말야 오늘 내가 대신 마리아님께 부탁해볼게"
"마리아님께 꼭 잘 좀 부탁드리더라고 전해줘"
불교계 학교를 다니고 있는 주제에. 유미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이거 열심히 기도해 줘야겠는데. 
꼭 그런 이유때문만은 아니지만, 조금 빨리 집을 나서기로 했다. 앉아 있는 바람에 생긴스커트주름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질러 정돈한다. 등교일도 아닌데 교복을 안입으면 학교에 안들여보내준다니 괴롭다. 안그래도 리리안 교복은 검정색이라 햇빛을 마구 흡수해버리는데. 천이 비교적 얇은 편이고 소매가 짧다곤 하지만, 더운 건 더운 거다.

"수고했어"
조금 늦게 나올 예정이던 유키는 일단 학교에 들른다고 하는데도 사복으로 OK란다. 역시 여학교와 남학교의 차이란걸까. 왠지 불공평한 기분이 든다.
"그럼 나중에 봐"
"그래, 일이 잘 풀리면 좋겠다"
"응"
현관에 둘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포즈.
"다녀오겠습니다"
신발을 신고 기운차게 소리를 내자, 엄마가 마중나오시더니 둘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런, 벌써 화해했어?"
해버리구말굽쇼.
유미는 문을 열고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달려나갔다. 후쿠자와 남매는 코바야시 말대로 "너희 남매 사이좋다" 라고 하는 사이좋은 남매니까.

 

3.

때마침 정류소에 도착하자마자 동시에 버스가 왔다. 차에 올라타자 안에서 여름냄새가 풍겨왔다. 살짝 자극하는 소독약냄새. 이건 잘 알고 있는 냄새다. 학교 수영장과똑같은 냄새. 
어디서 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뒷자석과 그 앞의 2인용 좌석을 점령하듯 머리가 젖어있는 초등학생 여자애들 그룹이 앉아 있었다. 그애들 거의가 졸고 있었다. 창에 머리를 기댄채 꼼짝달싹안하는 아이. 자리에서 떨어질 것 같이 엉덩이 위치가 내려가 있는 아이. 발이 붕 떠있다는 것도 모른채, 또 비닐가방 손잡이가 손목에서 벗겨질 것 같은데도바로 다잡는 것조차 못하고 있다. 모두 수영하느라 피곤했나 보다. 왠지 옛날의 자신도 그 속에 있는 것같은 기분에, 유미는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그 중 한 아이. 잠들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한눈에 수영장 다녀왔음을 알 수 있는 모습. 그리고 자리도 다른 아이들 옆이니까 그 그룹 중 한 명임은 틀림없는 듯 했지만, 어딘지 뭔가 다르게 보였다. 달리는 버스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그녀의 눈동자 속에 똑바로 비춰지고 있는걸까. 흥미가 있다기보다는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의무라도 행하는 양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곤해 졸리지 않은 건 아닐테다. 그 증거로 가끔씩 눈이 감겨가다 졸음기운을 쫓으려고 눈꺼풀을 비비곤 하니까. 차내방송이 다음 정류소 이름을 알린다. 그러자 그 소녀는 벌떡 일어서서 친구들을한사람씩 한사람씩 깨워갔다. (아아, 그랬구나)
유미는 그제서야 알았다. 그애들은 종점까지 갈 것도 아니라서, 도중에 차에서 내려야만했다. 그래서 내릴 곳을 지나쳐 버리는 것이 겁이 나, 저 소녀는 자기 혼자서만이라도필사적으로 잠과 싸워온 것이다. 벨을 누른 뒤, 그 그룹은 무사히 목적지로 보이는 정류소에 내렸다. 자고 있던 아이들 중 몇 명이나 한 소녀의 공로를 알아차리고 있을까. 창에서 내려다보자, 여자애들이 즐거운 듯이 도로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어떤 애가 깨어있던 그 애였는지는 모르겠다. 유미는 수영장 냄새가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다음 정류소에서 탄 꼬마가 "아, 수영장 냄새가 나" 라며 함께 있던 아버지에게 말하고 있었다.

 

 

4.

 

"유미"
M역 남쪽입구에서 북쪽입구로 빠지는 통로의 개찰구 앞을 지나쳤을 즈음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유미는 멈춰서서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잘못들을 리 없다. 그건, 너무나 좋아하는언니의 목소리.
"평안하세요, 언니"
"조금 빨리 오는 바람에 아무도 못만날줄 알았는데"
사치코님은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다가와서 말했다. 학생가방 대신 어깨에 걸친 토토백이 왠지 무거워 보였다. 유미의 시선을 알아챈걸까. 사치코님은 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미소지었다.
"오늘 도서관 개방일이잖아. 요전번에 빌렸던 책이 들어있어. 아, 혹시 유미도 도서관에 들르려고 일찍 온거야?"
"에, 아뇨"
오늘이 도서관 개방일이란 건 몰랐다. 아니, 잠깐만. 도서위원회가 배포하고 있는 '라이브러리' 회지에 예정이 적혀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일일이 체크같은 건 안하니까.
"덥네"
북쪽입구로 나오자 사치코님은 손으로 머리 위를 가렸다. 로터리 안쪽 인도는 내리쬐는햇살에 바짝바짝 타올라서, 가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싹 말라버리는게 아닐까 싶을만치열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가게 앞에다 물을 뿌리는 곳도 있긴 했지만, 눈깜빡할 사이에 말라버리고 말았다.
M역발 순환버스는 정류소에서 출발시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냉방이 빠져나가지않게끔 꽉 닫혀있는 승차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운전수 아저씨에게 타겠다는 의사를전한다. 푸슈 하고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정기권이 떨어져서, 두사람 다 버스카드를 기계에 통과시키고 올라탔다.
냉방이 된 차 안에서 5분정도 있으니 버스는 안내신호와 함께 발차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아서 마치 전세낸 것같은 모습이다.
빈자리는 잔뜩 있었지만, 2인용좌석에 둘이서 사이좋게 나란히 앉았다. 창쪽에 어깨를기댄 사치코님은 잠시 아무 말없이 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는 아까 그 소녀의모습이 살짝 겹쳐보였다. 
조용한 옆모습. 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걸까.아마 바로 옆자리에 있는 동생이 몇 시간후에 하나데라 학생을 끌어들여 자신과 대면하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하고 있을테지.
"유키씨말인데"
갑자기 사치코님이 입을 열었다.
"앗, 넵"
콩닥.
설마 텔레파시로 마음 속을 읽은걸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사치코님의 말은 타이밍이 좋았다.
"동생이, 무슨 일이라도?"
흠칫거리며 물었다. 승객이 두 사람밖에 없는 차 안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다학교 앞 정류소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언니가 던진 얘기를 계속무시하고 있을만큼 유미는 배짱이 좋지 않았다.
"요전에 스구루씨에게 살짝 물어본 적이 있는데, 유키씨가 하나데라 학생회 임원이라며?"
"하아.. 임원요? 잘은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대단한 직함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냥 도와주러 다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하지만 상관없어"
사치코님은 미소짓는다.
"누나인 유미한테는 미리 양해를 얻어두고 싶어서 그래. 리리안 학원제 때는 유키씨한테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요청해도 될까?" 도 아니고 "요청할까 생각중이야" 도 아닌, "요청할 테니까" 다. 이미 결정났나 보다.
"하아, 리리안 학원제에 유키를 말이죠"
그런가. 사치코님은 자신이 괜찮은 유키를 지명함으로써, 낯선 남자를 가능한한 접근못하게 하겠다는 작전으로 나왔다는 말이렷다. 용케도 머리를 굴리셨군요.
"올해는 뭘하나요?"
"물론 연극이야"
"역시"
미안하네, 유키. 누나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 유미는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기도도 올리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마리아님의 힘을 빌린다 한들 취소될 리 없을테니까.
"작년에는 하나데라와의 모임을 전부 보이콧했으니까, 언니들이 왕자역에 스구루씨를기용했다는 것도 모른채 큰 소동을 피웠지만 올해는 이걸로 안심이야"
" .... "
언니, 그런 걸로 안심하면 큰일나요. 산전수전 다겪은 선배들은 졸업해 버렸지만, 남은 동생들이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치코님은 리리안보다 먼저 하나데라 학원제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는 것같다. 그게 아니면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9월이 되면 하나데라 고교 학생회 앞으로 정식문서로 요청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유미가유키씨한테 넌지시라도 좋으니까 전해줄래. 갑자기 알게 되면 놀랄지도 모르니까"
"하.. 하아"
하지만. 굳이 유미를 통하지 않더라도, 아마 사치코님은 몇 시간후면 유키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을테다.
"하지만 신기하네. 작년 스구루씨 일이 있었니까 유미를 동생으로 삼을 수 있었는걸"
"하아..."
그 "동생" 이 바로 이번 음모의 주모자인데요. 유미는 점점 가만히 있기 힘들어져서, 그만 무심코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저 ... "
하지만
"아, 다 왔어"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사치코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는 평소보다 대폭 시간단축해서 목적지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애초에 두 사람밖에 승객이 없었으니 당연 도중에 내리는 손님도 없을테고, 또 공교롭게도 타는 승객도 없었기때문에, 버스는 마치 급행열차처럼 정류소를 휙휙 통과해서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뭐라고 했니 유미?"
승강구 계단을 내리며 사치코님이 물었다.
" ... 아뇨"
생각을 고쳐먹고는, 유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자백했다간, 모든 게 물거품. 사치코님이 도망치거나 했다가는 산백합회 동료는 둘째치고 오늘 모일 하나데라 멤버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치코님의 말이 가슴을 쿡 찌른다.
"죄송합니다. 그만 잊어버렸어요"
자기가 한 말도 쿡, 쿡
"그래?"
"네"
이런 일로 흔들리는 자신은 얼마나 소심한 인간인가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까딱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절대 암흑가의 보스는 되지 못할 성격이다. 걸으면서 발밑만 계속 보는 건, 아마 언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탓이다. 금이 간 자리에서 잡초가 돋아난 보도.아이스캔디 막대기가 떨어져 있다. 걸음을 옮기려는 가죽구두 위를, 개미가 재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유미의 머리는 점점 아래로 처지고 있다.
"유미 얘도 참"
등뒤에서 사치코님이 불러세운다.
"아, 네. 어라?"
아래만 보고 걷다보니 어느새인가 사치코님을 앞질러 척척 걸어나가고 있었나보다. 두 사람의 거리는 5미터정도 떨어져 있었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안들렸어?"
사치코님은 가방에서 뭔가 꺼내려고 멈춰섰나 보다. 하지만 유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자, 이거"
뒤따라온 사치코님이 내민 건 젖은 작은 수건이었다.
"유미 목덜미가 드러나서 더워보여. 외견상 보기안좋아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양지 에서는 이걸 두르고 있도록 해"
대답보다 먼저 섬뜩 목 뒤가 차가워진다.
"고, 고맙습니다"
"천만에"
보살펴줄 때의 언니는 늘 어딘지 기뻐보인다. 이런 자상한 언니를 함정에 빠트리려 하다니, 얼마나 잔인한 동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뭘 그리 정신없이 보고 있었어? 벌레? 파브르라도 되고 싶니?"
섬뜩
" ... 아얏!"
"왜 그러니 유미?"
언니와 함께 아래를 보자, 검은 개미가 진짜로 유미의 장딴지를 물고 있었다.

 

 

5.

 

이렇게 되면 교문을 보는 것도 괴로워진다. 앞으로 몇시간 후면 이 앞에 하나데라 학생들이 모일테고 남매가 꾸민 음모극의 막이 오르는 것이다. 문을 지나 은행나무길에 발을 들여놓자 테니스코트에서인지 볼이 라켓줄에 부딪힐 때나는 파앙하는 작지만 기분좋은 소리와 응원소리가 들려왔다. 오른편에 있는 대학부지에서도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였다. 
갈림길에서 마리아님에게 손을 모아 기도드렸지만, 마리아님에게 무얼 부탁해야 좋을지 모른 채, 그저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에 와서 유키의 일은 부탁드릴 수 없었다. ─ 아니 그보다, 사치코님의 일로 머리가 꽉차서 동생의 일같은 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 사치코님을 따라 도서관에 들렀다. 반납하려고 열람실의 카운터에 낸 책은 전부 5권. 전부 일본 고전문학같았다.
"재밌어. 괜찮다면 유미도 나 다음에 빌려서 봐. 이걸 추천해줄게"
그 중 한 권을 골라 내민다. 유미는 어쩐지 거부할 기운도 사라져서, 도서카드를 도서위원에게 건네주고 대출수속을 밟았다. 도서관에서 나와 교사를 향해 함께 걷는다. 방학중에는 실내화가 아니라 손님용슬리퍼를 쓰기 때문에 일부러 승강구에서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교사 복도를 거치지않고 장미의 저택으로 곧장 향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 뒤쪽으로 빙글 돌았을 때, 유미는 왼손에 든 도서관 책과 목에 두른 젖은 수건의 존재가 갈수록 무겁게 짓눌러와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해요 언니"
더이상 한발짝도 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결국 멈춰섰다.
"갑자기 왜 그러니?"
사치코님은 곧 알아채고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역시 전, 언니를 속이는 짓은 할 수 없어요"
"에?"
언니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언니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상의해서, 머리 속으로 계획을 계속 이러저리 뜯어맞추고 있을 때만 해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사치코님 앞에 서니 아무래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건 역시 어딘가 떳떳치 못한 기분이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어. 떳떳치 못한 기분으로 "언니를 위해서" 라고 정당화시켜 버리는 건,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집에 연락해서, 유키한테 말해서, 저기, 하나데라 쪽은 거절해 둘게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언니"
패닉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주저않자, 사치코님은 유미의 어깨를 잡고 반듯이 세워줬다.
"속인다느니, 거절한다느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못알아 듣겠어. 하나데라가 어떻게 됐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보렴. 유미"
당당한 목소리. 마치 꿈에서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언제나 언니편 입장에 있는 것이 제일이야, 라고. 유미는 그 때서야 겨우떠올린 것이다.

" ... 그렇게 된 일이구나"
대강 이야기를 다 들은 사치코님은 조그맣게 웃었다.
"사정은 잘 알았어. 네가 요즘 여러가지로 바빴던 이유라던가."
두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장미의 저택 뒷편으로 돌아 나무그늘을 아래에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랬어? 그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면서까지 어째서 나한테 털어놓은거니? 이제 조금만 더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언니는 어떻게 하실건데요?"
유미는 질문을 던졌다. 결국 그쪽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상상력을 총동원하던가,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 외에는 달리 결과를 알 길이 없었다.
"글쎄다 ... "
사치코님은 잠깐 생각한 뒤 웃었다.
"그런 뻔히 보이는 연극은 금방 꿰뚫어볼테니까 아주 화를 낼테지.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아우성칠지도 몰라. 손수건에다 화풀이하는 정도는 했을거야. 갈갈이 찢는다던가말야"
그건 무섭다. 엄청나게 무섭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그 모임에는 나갈거야. 나 화났어, 라는 걸 어필함으로써 그럭저럭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내 히스테리는 어리광이 만들어낸 갑옷이야. 유미나 레이, 산백합회 동료들이 받아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큰소리도 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나 역시 나를 걱정한 나머지 나온 행동이란 걸 충분히 이해하고 화를 내는거고"
사치코님은 아주 냉정하게 자신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쁜 방법은 아니었어. 날 속이고 하나데라 학생회와 대면시킨다는 작전은"
"엣, 그런가요?"
"미즈노 요코님 정도면 할만한 일이잖아.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 깜쪽같이 그 가락에 놀아왔었던 일이고"
그럼 멋대로 혼자 분위기타서 술술 털어놓은 건, 즉 사치코님에 대해서 완전히 착각하고 내린 선택이란 말인가. 그러나 유미가 낸 결론은 No 였다.
"하지만. 전 요코님이 아닌걸요"
"그러네"
"이제와서 무슨 소릴 하나 싶기도 하지만. 으으응. 지금에서야 겨우 확실히 깨달은 게 있어요. 저기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게 뭐냐면요, 언니가 자신의 의지로 만나주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하나데라 사람들하고요"
"내 의지로?"
"네"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계획같은 거 안꾸며도, 언니는 머지않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실테니까요"
"에?"
사치코님은 눈을 크게 떴다.

매-앰 맴 맹-
두사람 사이의 침묵을 매미울음소리가 뒤덮는다.
맴맴맴맴, 꽤 시끄러운데도, 신기하게도 사치코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자연의 BGM에 묻혀 사라지는 일 없이 분명하게 유미의 귀에 전해졌다.
"너한테는 정말 가끔씩 놀란다니까"
사치코님은 손을 뻗어 유미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어쩌면 그리 능숙하게 나한테 다가올 수 있는걸까"
"능숙? 능숙.. 이라고 하셨나요?"
말의 의미가 잘 이해가 안돼 다시 묻는다. 어쩐지 칭찬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 신기하네. 요코님과는 전혀 다른데도. 어째선지 난 네 말과 행동에 따라서 기분좋게 움직이고 말거든"
기분좋게 ─ 라는 건 불쾌한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건가요?"
"용서라니? 날 속이려고 했던 일말야?"
"네"
"미수잖니?"
"고, 고맙습니다"
기뻐서 머리를 크게 숙였다. 액션이 지나쳐서 두르고 있던 젖은 수건이 머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미 자백했으니까, 이 얘기는 없었던 일로 하고요. 전 유키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3시 30분에 하나데라 학생회실에서 모인다고 했으니까 아마 아직 집에 있을 거예요"
수건을 줍고 나서, 유미는 그 자리에서 빙글 반쯤 몸을 돌렸다. 언니한테 전부 털어놔서 그런지 우승이라도 한듯한 기분에 날아오를 것 같았지만, 뒤처리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무소 앞 공중전화에 서둘러 가려는 걸 사치코님이 "잠깐 기다려" 라며 손목을 잡고 말렸다.
"나한테 한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줄래?"
그렇게 말하면서 사치코님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집게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우며 웃고 있는 것이었다.

 

 

6.

 

여름방학동안 부활동 등으로 교내시설을 이용하는 학생을 위해 교문은 9시부터 5시까지개방되어 있다. 
산백합회 모임은 멤버의 예정을 고려해서 모이는 날과 시간이 정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오늘은 노리코짱이 오전중에 수영 보충연습수업이 있기 때문에, 오후 1시에 집합하기로되어 있었다. 그 외에, 부활동은 물론 개인적인 용무가 있는 날도 사전에 알고 있으면그 날을 피해서 스케쥴이 조정되었다.
반드시 전원이 모여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조건이라도 붙지 않으면 정말로 매일 9시부터 5시까지 쉬지않고 뼈빠지게 일만 할테니까. 기본적으로 성실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오후부터 일정이 잡힌 날은 대체로 교문닫기 직전까지 학교에 머물게 된다. 다시 말해, 교문을 나서는 건 거의 5시 다되어서란 얘기가 된다. 하지만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모르니까 유키한테는 4시부터 대기하도록 일러뒀다. 
1시에 전원이 모인 장미의 저택은 평소와는 어딘지 다른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이님은아까부터 몇번이나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레이, 예정이라도 있어?"
사치코님도 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떼고 묻는다.
"아니 별 일 아냐"
요시노양은 위로 뻗친 앞머리를 끊임없이 신경쓰고 있다.
얼핏 침착해보이는 시마코양이지만, 단순한 덧셈이 안맞는지 몇번이고 몇번이고 다시 계산하고 있다. 
노리코짱은 평소와 다름없다. 마음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얼굴과 태도에 드러나지 않는 타입이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 ... 노리코짱네 집에선 이렇게 마시니?"
물에 탄 보리차에 포션타입의 크림을 곁들여 내놓는 걸 보면, 꽤나 동요하고 있는 셈인가.

3시 55분이 되었다.
"좀 이르지만, 오늘은 이만 끌낼까?"
사치코님이 벌떡 일어섰다. 
"엣, 벌써?"
사치코님을 제외한 전원이 시계를 들여다 봤다. 그리고 4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미 얼굴을 쳐다봤다. 예정보다 빠르지만 괜찮을까, 라는 눈초리로 물어온다. 뒷정리랑 이것저것해서 5분정도는 곧 지나갈테니까 아마 장미의 저택에서 유유히 걸어서 교문까지 가는 동안에 4시는 지날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요. 제 일도 마침 끝난 참이니까요"
유미도 찬성했다. 아마 사치코님은 불지옥 한가운데서 한시간이나 기다려야 할 유키일행들을 불쌍히 여겨 빨리 끝내주신 모양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신경써주는 모습이 멋져. 새삼 반해버리는 유미였다.
"언니, 기다려주세요"
유미는 삐걱리는 계단을 뛰어내려가서는 먼저 방을 나선 사치코님을 쫓아갔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조금 즐겁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건 언니와 둘만의 비밀이니까.

 

                *

 

" ... 더워"
"피곤해"
코바야시가 차가운 캔콜라를 내민다.
"선물. 선배가 낸거야"
"선배들은?"
유키는 우선 그걸 볼에 갖다대고 자그마한 시원함을 느꼈다. 
"바로 저기 있는 시원한 찻집에서 적당히 쉬고 있어. 아가씨들 모습이 보이면 나보고 신호하라고 하면서말야. 언더스탠드? 유키치군"
코바야시는 유키의 댄개리 셔츠의 가슴포켓을 쥐면서 말했다. 가능한한 아가씨들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도록 옷깃이 달린 셔츠를 갖춰 입으라고 했지만, 취지가 전해지지 않았는지 옷깃을 풀어헤친 알로하 셔츠를 입고 나타난 코바야시. 선배 한 명이 제일 위에 있는 단추를 억지로 채우는 바람에 어째 웃기는 패션이 되어 있다.
"하지만 말야"
중얼거리면서 유키는 캔따개에 손가락을 대고 단번에 땄다. 젠장, 이자식 흔들어놨어.언제나 경계하고 있었건만, 더위에 그만 방심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캔을 쥔 오른손이캔에서 튀어나온 거품으로 엉망이다.
"어째서 나만 이렇게 햇빛 내리쬐는 곳에서 대기해야 하는거지?"
억울한 심정으로, 평정을 가장한 대화를 계속한다.
"그야 네가 대본에 있는 대사를 제일 먼저 말해야 하니까"
벼락치기 각본가는 잘난 듯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아 맞다. 그거 조금 바꿔봤어"
"그럼 안되지. 내 예술작품을 수정해버리면"
"뭐가 예술작품이냐. 유미가 서툴기짝이 없다고 그랬다고"
"오히려 네 연기력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리리안 학원제, 이번에도 무대극이지? 볼만하겠는데"
"내가 나간다고 정해진 건 아냐"
"나갈게 뻔하지. 왜냐면 넌 ... "
"아, 왔다"
은행나무길을 지나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룹. 선두는 계획대로 유미. 옆에는 본 적이 있는 미소녀, 사치코씨가 있다. 시계를 보니 4시를 막 넘어섰다. 예정보다 한시간이나 빠르잖아, 하고 솔직히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른안주감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알았지. 한구절 한마디도 바꾸지마. 그게 오늘 네 사명이니까"
"무슨 소리야. 유미하고 대화를 풀어나가기로 했다고"
"유미짱한테 말할 틈을 주지 않을만큼 네가 후다닥  대사를 해치우면 돼. 그럼 난 선배들한테 신호하고 올게"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코바야시는 내뺐다. 어느새 "누님"에서 "유미누나"로 바뀌었다 싶더니 이번에는 "유미짱"이라고?
"참내 저자식은"
유키는 바지 뒷주머니에 둥글게 말아넣어둔 종이조각을 꺼내들고 내용을 다시 읽어봤다.
" '여어, 사치코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괜찮다면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마침 우리 학생회 멤버가 모여있거든요' "
역시 이런 대사, 일상회화로는 좀처럼 입밖에 낼 기회가 없어 보인다. 도대체가 요즘 "여어"하고 인사하는 젊은이가 있을까.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서 더욱 피곤해졌다. 혹시 코바야시는 특정인물을 염두에 두고 대본을 쓴 게 아닐까.
" '여어, 사치코씨', '여어, 사치코씨' ... 됐나"
계기를 만들 대사를 작은 목소리로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유미일행의모습은 점점, 점점 커져 갔다. 그런데 리리안 학생들 그룹 속에 있으면, 익숙한 누나의모습도 어엿한 아가씨처럼 보이니 신기하다. 
교문앞 정면에서 대기하고 있는 건 역시 부자연스럽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장소를 이동하는 게 오히려 더 한심한 기분도 든다. 저쪽의 모습이 보인다는 건 당연히 이쪽의모습도 훤히 다 보인다는 말이니까.
몸을 기울여 뒤쪽을 흘끔 훔쳐본다. 마침 좋은 타이밍에 코바야시 녀석들이 선배들을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 돌리자, 유미일행과의 거리는 3미터정도 좁혀져있었다. 사치코씨가 이쪽을 알아보고선 미소짓는다. 
지금이다.
유키는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쥐었다.

('여어, 사치코씨')

하지만.
"어머나, 유키씨"
대사직전에 사치코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하지, 유키. 진정해. 곧 다음 대사를 말하면 아직 만회할 수 있어.
"저기, 그러니까.."
하지만 머리속이 새햐얗게 되버려서, 곧바로 생각나질 않는다. 주머니속에 대사가 적힌 종이가 있다. 하지만 그걸 꺼내들고 컨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아, 넵"
그래 그거야. "우연" 이었어, 라니 어이. 어째서 자신이 말하려고 한 대사를 계속해서 사치코님에게 빼앗기는거야. 그제서야 유키는 겨우 눈치챘다.
"그렇지. 괜찮다면 차라도 한잔 하지 않을래? 마침 지금 우리 학생회 멤버가 모여있거든 ─ 하고 계속 말할 참이었는데, 어떻게 할까?"
재밌다는듯이 묻는 사치코님에게, 유키는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거절했다.
당했다.
속이는 편이었을 예정이었지만, 어느샌가 속는 편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친누나의 배신으로 인해.
"너무해 유미양. 사치코님께 들켰으면서도 우리한테는 잠자코 있다니"
아마 이 사람이 요시노양일테지. 양갈래로 땋은 소녀가 입을 크게 열며 항의한다.
"거봐 적을 속이려면 먼저 자기편부터, 이라고 하잖아"
귀여운 동생을 붙잡아놓고서 적취급이냐. ─ 따위의 태클을 여기서 걸어볼만도 하지만.
"유미, 멋지게 해냈구만"
유키가 시선을 던지자 유미는 "응"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서, 결국은 "뭐 아무렴 어때" 하는 기분이 된다. 그야 유미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항복이야? 유키씨"
유미의 대답을 더 보충하며 사치코씨가 기쁜 듯이 웃는다.
"네. 완패입니다"
기분좋게 머리를 숙인 바로 그 때.
"안녕하세요─. 하나데라입니다─!"
선배들이 도착해서 일일이 인사했다.
"히익 ...!"
사치코씨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 아까 했던 말 취소. 사치코씨와의 승부, 오늘은 비긴 걸테지.
왜냐면.
거한에 여장남자, 양아치풍, 오타쿠 ... 여러 타입의 남자들이 집단으로 왁자지껄 모여드는 걸 본 사치코씨는 이미 실신직전이었으니까.
"아앙, 언니! 정신차리세요!"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키는 생각했다.
사치코씨의 남성혐오증 극복대작전은, 꽤나 장기전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