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어머니의 기도 (Stella Dallas) -1- 그 날 아침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아, 잘 잤다!"

 

바닷가에 있는 커다란 호텔의 방에서 한 소녀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로렐'이고,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로렐은 어머니를 따라, 밀햄프턴이라는 마을에서 이 바닷가로 왔습니다.

옆 침대에는 어머니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어젯밤에 아주 늦게 주무셨을 거야. 깨우지 말아야지."

 

로렐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누운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벽에는 로렐이 오늘 입고 가기로 되어 있는 좀 어른스런 여행복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요전에 부지런히 만들어 주신 모자도 꽤 어른스러워 보였습니다.

 

'이 여행복을 입고 이 모자를 쓴 나를 보신다면, 아빠가 뭐라고 하실까? 예쁘다고 하실까?'

 

기쁘기도 하고, 좀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로렐은 이 날, 일 년만에 아버지가 있는 뉴욕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로렐과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로렐은 알지 못했습니다.

네 살 때부터? 아니면 다섯 살 때부터?

로렐은 이상하게 여겨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엄마, 우리 집엔 왜 아빠가 안 계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뉴욕에서 아주 바쁜 일을 하고 계셔. 그래서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못하신단다."

"아이, 시시해."

 

로렐은 응석을 부렸습니다.

 

"로렐, 아빠가 보고 싶니?"

"네, 보고 싶어요."

"좋은 수가 있어. 로렐이 조금만 더 자라 혼자서 기차를 탈 수 있게 되면 뉴욕에 보내도 좋다고 아빠가 말씀하셨거든."

"그게 언제예요?"

"글쎄, 여덟 살쯤 되면 되겠지."

"저 혼자서 가요?"

"그래야지. 엄마는 볼일이 여러 가지로 많으니까 갈 수가 없어."

"그럼 전 안 갈래요. 엄마하고 함께 가지 않으면 싫어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고 하자 반짝반짝 빛나던 로렐의 커다란 눈이 갑자기 흐려졌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로렐을 무릎 위에 안고,

 

"착하지, 우리 아기. 그렇게 슬퍼하지 마. 네가 슬픈 얼굴을 하면 엄마도 슬퍼져요."

 

하고, 로렐의 이마와 볼에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난 혼자서 갔었어. 그게 여덟 살 때였나?'

 

로렐은 어머니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갔던 여름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코 밑에 작고 검은 수염을 기른 훌륭한 신사였습니다. 얼핏 보기에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로렐에게 무척 다정히 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여러 시간 동안 자동차를 몰아 로렐을 데려간 곳은 널따랗고 깊은 숲 속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차 안에서, 준비해 온 천막을 꺼내 쳤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숲 속을 걷자,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쉬잇!"

 

아버지는 조용히 하라고 신호하며 나무 뒤에몸을 숨기고, 로렐에게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건너편 호숫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몸매가 날씬한 사슴이 물가에서, 자기의 모습을 물에 비추어 보듯이 하며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사슴이군요."

 

나직이 속삭이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때, 마음에 드니?' 하고 묻기라도 하듯이 로렐에게 다정히 웃어 보였습니다.

로렐은 금방 이 호수가 좋아졌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아버지와 함께 모아 온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뭇가지 끝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보트를 탔습니다.

 

 

 

이듬해 여름부터 로렐은 아버지한테 가는 것이 싫기는커녕, 기다려지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지난 해에는 미술관에 가서 멋진 그림을 많이 보았지. 그리고 오페라도 구경했지. 정말 훌륭했어.'

 

이렇게 아버지와 지낸 몇 년의 여름을 차례로 생각하며, 로렐은 꿈꾸는 듯한 활홀감에 젖어들었습니다.

 

 

 

"로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갑자기 옆 침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로렐은 번쩍 정신이 들어서 말했습니다.

 

"어머, 엄마. 잠 깨셨어요? 정말 잘 주무시던데."

"네 여행복을 다리고, 갈아 입을 외출복이랑 내복이랑 리본을 트렁크에 챙겨넣고 나니까 새벽녘이 되었더라."

"미안해요, 엄마. 전 어젯밤에 일찍 자서인지, 아침에 무척 일찍 깼어요."

"기뻐서 잠이 오지 않는가 보지?"

"아녜요. 그렇진 않아요, 엄마."

 

로렐은 당황해서 부정했습니다.

어머니의 눈에 어렴풋이 괴어 있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렐은 아버지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도 무척 좋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어머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저어, 엄마……."

 

로렐이 말했습니다.

 

"……제가 뉴욕에 가는 거 싫으시다면, 전 안 가도 돼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당황해서 머리를 저으며,

 

"일 년에 한 번, 너를 아버지에게 보내는 건, 아빠와 엄마의 굳은 약속 때문이야. 아빠는 너를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모른다. 그야, 네가 없으면 엄마는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지. 하지만 참아야지. 로렐이 뉴욕에 아주 가 버리는 건 아니잖니. 자, 공연한 말일랑 하지 말고 준비나 하자."

 

하고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한 시간쯤 뒤, 로렐과 어머니는 여행 가방을 들고 호텔의 훌륭한 식당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 어머니가 무언가를 잊었다고 방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로렐은 커다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였습니다.

 

"아가씨, 오늘 떠나나요?"

 

하고, 어머니와 같은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가끔 식당이나 복도에서 마주치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도 함께 가시죠?"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뇨, 어머니는 안 가세요. 보스턴까지 바래다 주실 뿐이에요."

"어머! 그럼 아가씨 혼자서? 어디까지 가세요?"

"뉴욕까지요."

"그래요? 좋겠군요. 뉴욕에는 틀림없이 아가씨 아버지께서 계시겠군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왜 자기 같은 아이에게 이처럼 끈질기게 말을 걸어 오는지, 로렐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언짢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렐은, 이제 더 물어도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뉴욕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겠지요?"

 

아주머니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나 로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갑자기 심술궂은 표정을 짓더니,

 

"아가씨가 뉴욕에서 아버지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그건 대수롭지 않아요. 그런데 아가씨의 어머니는 이 호텔에 친한 친구도 없고, 조금 있으면 아가씨하고도 헤어지게 돼요. 그건 틀림없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불쾌한 말이었습니다. 뭐라고 한 마디 쏘아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로렐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아주머니 안색은 구리 빛깔이잖아요. 꼭 버섯 같아요. 우리 엄마의 장밋빛 얼굴과는 비교가 안 돼요. 그뿐인가요? 당신의 머리칼이 그게 뭐예요? 희뿌옇고 푸석푸석해요. 우리 엄마 머리칼은 늘 윤기가 흐르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저 쪽으로 갔습니다.

이 때,

 

"오래 기다렸구나."

 

하면서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로렐이 무서운 표정으로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노려보자,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너한테 안 좋은 말이라도 했니?"

"아뇨, 별로……."

 

로렐은 금방 표정을 밝게 바꾸고,

 

"저 아주머니, 제 새 모자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하셨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 그렇지."

 

어머니도 밝은 표정이 되더니,

 

"아무튼, 보스턴의 백화점에서 30달러나 하는 최고급품하고 똑같은 것이란다. 엄마가 만들었다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로렐은 기차가 보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될 수 있는 대로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그 아주머니가 내뱉은 언짢은 말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가씨하고도 헤어지게 돼요."

 

그러고 보니, 로렐이 호텔에서 언짢은 일을 당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로렐은 호텔 로비에서 같은 또래의 소녀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들은 모두 로렐과 마찬가지로, 여름 방학 동안만 아버지나 어머니를 따라 이 호텔에 와 있었습니다.

카드놀이를 한창 재미있게 하고 있을 때, 잘 차려 입은 여자들 서너 사람이 로비로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로렐을 보고,

 

"저런!"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다른 여자들과 둘러 서서 소곤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수잔!"

 

하고 한 소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수잔이라는 소녀가 카드를 놓고 그 여자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여자는 수잔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수잔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이윽고 수잔은 카드놀이를 하던 곳으로 돌아오더니,

 

"난 카드놀이 그만두겠어. 너희들도 그만두고 오래."

 

하고, 로렐 외의 다른 소녀들에게 말하고는 재빨리 어머니한테 가 버렸습니다.

다른 소녀들도 로렐 한 사람을 남겨 두고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른들과 함께 소곤거렸습니다. 모두 가끔 로렐에게 눈길을 돌리곤 했는데, 틀림없이 로렐 이야기를 하느라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로렐은 아무하고도 놀지 않게 되었습니다. 놀고 싶어도, 아무도 놀아 주지 않았습니다. 로렐은 외톨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다들 엄마나 나를 따돌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외톨이고 엄마도 외톨이야.'

 

이렇게 생각하니,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더 그립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나하고 엄마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니,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담!'

 

로렐은 마음 속으로, 그 심술궂은 아주머니의 말에 일부러 반항해 보았습니다.

 

 

 

기차가 보스턴 역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럼 몸조심해라."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를 보자, 로렐은 한껏 명랑한 표정을 짓고 위로했습니다.

 

"한 달 정도는 금방 지나가요.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