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 ~L; Change the World~(새로운 시작) -제６장- 도착

ℒ 6-1

도착

  

이른 아침 오사카 길거리에 덜컥덜컥 손수레를 끄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새벽 안개를 헤치며 나타난 것은 인력거였다. 인부로 분장한 L이 헐떡거리며 마키를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교토에서… 오사카까지는… 먼 길이었어…요."

"류자키가 기구 조종을 잘못해서 그렇잖아!"

"하지만 덕분에 교토 명물 찰떡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키 씨, 몇 번이나 부탁드렸습니다만…."

"또 그 얘기야? 안 돼. 이 휴대 전화는 엄마의 유품이니까 절대로 버릴 수 없어."

"그렇습니까. 유감이군요."

L은 달려 가면서도 주위의 상황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천천히 미행하듯이 따라오는 차가 한 대. 아마도 기구를 써서 날아 왔다는 사실도 위성으로 탐색해서 쉽게 파악했을 것이다.

"과연 FBI, 이미 이 쪽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군요."

"류자키, 지금 뭐라고 했어?"

"아뇨, 혼잣말입니다."

L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 내듯 한층 속도를 올렸다.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을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끌고 다니다니. 어쩔 작정이냐, 얼간이! 혹시 발병하면 어쩔 셈이냐고!"

타카하시는 L을 날려 버릴 기세로 호통을 쳤다. 타카하시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예전에는 니카이도와 수위를 다투던 면역 학자였다. 남에게 야단을 맞는 경험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L은 기묘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마키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도주하는 동안에는 목욕도 거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말끔한 기분이었다.

"마키, 네 옷은 전부 세탁할게. 갈아 입을 옷은 여기에 두었단다."

타카하시의 아내인 히토미가 바깥에서 말을 걸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에 감싸인 마키는 만족스런 기분이었다. 히토미는 어딘지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던 마키는 자신의 팔을 보고 얼어 붙었다. 방금 막 느꼈던 만족스런 기분 따위는 날아가 버린 듯 샤워기의 물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빨간 발진이 생겨났던 것이다. 샤워를 마친 마키는 새파란 얼굴로 돌아왔다.

"왜 그러나요, 마키 씨." L은 이내 마키의 이변을 깨달았다.

"타카하시 씨, 저를 격리해 주세요." "설마. 증세가 나타났나?"

타카하시가 달려들어 마키의 팔을 잡아 당겼다. 팔에 나타난 두 개의 빨간 반점을 보고 심각한 얼굴로 L을 바라보았다.

"증상이 나오는군요." 타카하시는 불안해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씨익 웃더니 마키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숲 속으로 도망 다니니까 그렇지. 이건 진드기야."

마키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좋은 교훈이 되었겠군. 언제 발병할지는 알 수 없어. 2주일이라는 건 이론일 뿐이다. 몸 상태에 따라 2,3일은 달라질 수 있어."

 

"과연, 니카이도가 발견한 것은 아예 새로운 타입의 인터페론이라는 소리군."

L이 선물로 가져 온 교토의 찰떡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타카하시는 니카이도 교수가 남긴 데이터의 항 바이러스 약 조성을 분석하고 있었다. 혼자서 다 먹어 치울 기세로 찰떡이 사라져 간다. 원망스러운 듯, 말 그대로 손가락을 입에 물고서 바라보고 있던 L은 마음을 다잡고 물어 보았다.

"타카하시 씨, 저는 면역학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지식 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인간의 몸이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외부에서 침입하는 이물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어 메카니즘이 존재하고 있어."

"이를테면 인플루엔자에 걸리면 고열이 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지요?"

"그래, 모르는 사람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고열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체내에 들어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누르는 면역 작용으로 몸 자체가…, 윽! 발열…, 하는 거지. 자, 잠깐 기다려."

찰떡이 목에 걸렸는지 타카하시는 가슴을 두드리며 황급히 차를 마셨다.

"후우, 질식할 뻔 했네. 지금 이건 찰떡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면역 작용이다."

"……." "농담이야." "저는 농담은 잘 못 합니다."

"뭐 됐어…. 그러니까…, 아, 그렇지, 발열이나 염증 같은 건 밖에서도 보이는 알기 쉬운 면역 작용이지만, 체내에서도 여러 면역 기능이 몸을 지키고 있어. 예를 들면 대식 세포라고도 부르는 매크로 파지는 그 이름대로 몸 속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둘러싸 소화시키고, 백혈구 중 하나인 호중구도 체내의 이물질을 용해시키지…. 그런 면역을 맡은 물질 중 하나로 항 바이러스 작용을 지닌 단백질인 인터페론이 있네. 인터페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마키가 학교 수업처럼 손을 들었다. "인터페론은 C형 간염의 약입니다!"

"예, 정답! C형 간염이나 종양의 치료에 쓰이는 의약품으로 유명하지. 인터페론이란 체내에 이물질이 침입했을 때에 세포 밖으로 배출되는 단백질이야. 이 녀석이 생산되면 바이러스 주위의 세포에 작용해 그 세포를 항 바이러스 상태로 만들어서 바이러스 증식을 억누르지. 이 녀석이 체내에서 잘 움직이면 에볼라 출혈열이라도 인간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해."

"즉 에볼라 형 출혈열 바이러스에는 인터페론이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맞았어. 출혈열 바이러스는 이 인터페론의 기능을 방해하네. 그럴 때 니카이도가 만들어 낸 인터페론이 도움이 되는 거지."

"출혈열 바이러스로도 면역 작용을 억누를 수 없는 인터페론을 체외에서 보충해 줌으로써 항 바이러스 작용을 하게 만든다는 거죠."

"나, 살 수 있어?"

대화를 듣고 있던 마키가 희망의 빛을 피워 올리듯이 L을 바라보았다. L은 괜찮다는 듯이 마키의 손을 굳게 쥐었다.

"과연, 니카이도는 감염 발생지인 콩고 분지에서 비감염되었던 침팬지에 주목했군. 원래 사람에게는 인간형 인터페론이 아니면 효과가 거의 없다고들 했지만…. 그런데 니카이도의 조성 데이터에 따르면 침팬지의 백혈구 세포가 필요한데…."

"괜찮습니다. 여기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L은 도쿄에서 가져온 용기를 꺼냈다. 스루가가 데스 노트를 블루십에서 탈환했을 때 그와 따로 행동했던 이유는 니카이도 연구소에 숨어 들어 침팬지의 혈액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걸 세포 배양한 다음 거기에 마키의 혈액에서 추출한 바이러스를 집어 넣으면 세포는 바이러스 감염 상태가 되어 인터페론을 생산하지. 그걸 정제하면 항 바이러스 약이 완성되네."

"남은 시간은 충분할까요?"

L의 물음에 타카하시는 벽에 걸려 있는 달력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키가 바이러스를 맞은 지 벌써 1주일…, 그러면 지금 곧 항 바이러스 약을 제조하기 시작해야만 늦지 않아."

"예, 곧바로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신종 바이러스 확산 대책 본부가 이미 편성되었고, 그 대책 본부에는 테러리스트 중 하나가 가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타카하시 씨가 비밀리에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봐, 이봐, 나더러 만들라는 소리인가?"

타카하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소리를 낮추었다.

"나에게는 무리야."

"니카이도 교수님은 가능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 능력을 다투던 동료가 아니셨습니까?"

L이 와타리의 장서였던 <감염증 연구>를 내밀었다. 니카이도와 타카하시의 공저였다.

"나는 옛날에 내가 개발한 백신으로 사람을 죽여 버렸어. 나는… 두렵네."

타카하시는 아래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그 사건에서는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연구로 살아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마키 씨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타카하시는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득하게 봉인해 두었던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품고서도 씩씩하게 행동하는 마키의 모습을 보고 타카하시의 마음은 갈등에 휩싸였다. 말 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히토미가 타카하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여보, 해 주세요." "히토미…."

"니카이도 씨도 틀림 없이 당신이 마키를 구해 주길 바랄 거예요."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타카하시는 이윽고 일어나 마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알았네. 내가 할 수밖에 없겠군." "감사합니다."

L과 마키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항 바이러스 약 제조 과정에는 마키의 혈액에서 바이러스를 채취해 다루어야 해. 바이러스가 공기 감염된다면 다루는 우리들이나 주변에도 감염의 위험성이 높지. 여기에는 레벨４의 바이러스를 다룰 만한 설비는 없어. 기껏 해야 보안 캐비닛이 있는 정도이고, 그것도 고 기밀의 고급은 아니야. 어디 다른 곳의 연구 시설을 빌리도록 해 볼까?"

"아뇨, 아마도 테러 조직 측은 국내의 모든 연구 설비에 손을 써서 우리들이 항 바이러스 약 개발을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즉, 나에게 이 설비로 자신의 몸을 위험에 드러내면서까지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라는 소리인가?"

"괜찮습니다. 타카하시 씨가 발병하기 전에 항 바이러스 약을 제조하는 데에 성공하면 됩니다."

"위험한 모험이로군…. 하지만 아무리 밀폐하더라도 항 바이러스 약 제조 과정에서 바이러스의 확산을 완벽하게 막기란 불가능해. 이렇게 주택이 밀집한 장소에서 한 사람이라도 감염되어 버리면 기하급수적으로 번질 테지. 그러게 되면 이 연구 설비의 규모로는 항 바이러스 약을 제조하기엔 시간이 모자라."

L은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타카하시가 낚아 올린 50센티미터 급 참붕어의 어탁이 자랑스럽게 붕어를 끌어 안은 타카하시의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

   

  

ℒ 6-2

발견

  

"아직 소재가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여자 아이의 정보가 끊긴 지 이틀이 지나자 마토바는 점차 노골적으로 초조해 하기 시작했다.

"L이 바이러스를 들여 놓을 만한 연구소나 실험 시설은 모두 알아 봤습니다만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멤버 중 한 사람이 보고서 다발을 들고 고개를 저었따.

"야마나시 현의 산 속에서 발견된 뒤로는 검문 정보도 아예…. 그야말로 하늘로 날아갔다고밖에는…."

그렇게 말한 코니시는 어깨를 움츠렸다. L이 들었더라면 "잘 알아 내셨군요" 라고 말할 터였다.

"쿠조 씨도 L을 죽이겠다고 호언 장담을 하더니 아무런 소식도 없는 모양이군요."

말을 하면서 차가운 시선을 던지자 쿠조는 그 자리에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키라 대책실의 회선을 해킹해서 정기적으로 미국 대통령을 협박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애매한 대답을 하며 시간만 끌 뿐 L을 살해하려고 나설 기색도 없었다. 협박의 근원인 데스 노트는 쿠조의 손에 있지도 않아서 누군가를 죽여 보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토바는 비오톱을 바라보고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다리를 꼬았다. 바이러스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살포를 통해 감염 피해를 단숨에 일본 전역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자 아이가 어중간한 형태로 바이러스를 흩뿌리는 사태는 어떻게든 피해야만 했다.

"여자 아이의 휴대 전화 GPS도 여전히…, 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화면을 돌린 코니시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지? GPS가 하나만 남았어." 멤버들이 모여 들었다.

"아마도 미끼 발신기는 모두 수명이 다 되었나 보군요."

"그럼 이 GPS는… 여자애가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겠네요."

"아이의 소재지가 확인되었어요. 오사카에 있습니다."

조직 멤버는 쿠조와 함께 일제히 일어섰다.

  

   

ℒ 6-3

제조

  

"크루저로 낚시를 하는 게 꿈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호화로운 20인승 크루저에서 팔짱을 끼고 만족스럽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타카하시는 선내를 돌아 보며 현실로 돌아왔다. 원래는 호화로운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던 메인 선실에는 타카하시의 실험실 실험 기구가 놓여 있었다.

"발상의 전환입니다.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가둬 둘 수 없다면 반대로 바이러스가 확산되어도 피해가 미치지 않는 장소로 가면 됩니다. 항 바이러스 약의 제조가 끝나면 크루저는 타카하시 씨에게 드리겠습니다."

"멍청이! 내 집보다 큰 이런 크루저는 유지비도 감당 못 한다고."

"과연 오사카 인다운 반응이군요."

L은 마치 그 말이 칭찬인 양 감탄하면서 조타실 계단을 올라갔다.

"스루가 씨, 오랜만에 배를 조종하니 어떠신가요?"

스루가는 선글라스를 벗고 어깨를 움츠렸다. 나고야의 지하 공장에 차 수리를 맡기고 한 발 먼저 오사카에 와 있었던 것이다.

"으음, 그럭저럭 감을 되찾았어. 하지만 류자키, 정말로 바다 위에서는 감염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건가?"

"100퍼센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을 타고 확산된 바이러스도 한여름의 강한 자외선으로 거의 사멸됩니다."

"바다 생물에 감염되어 나중에 인간에게 감염되는 건 아니고?"

"출혈열 바이러스는 폐로 감염됩니다. 어류는 폐가 없습니다."

"그럼… 고래나 돌고래라면 걸릴 수 있는 건가?"

"출혈열 바이러스에 감염된 최초의 수중 포유류로 학회에 발표해 주십시오."

L과 스루가의 대화를 말 없이 듣고 있던 타카하시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오염 방호복을 내던졌다.

"이봐, 너희들, 만담은 적당히 해 두고 얼른 옷 갈아 입고 어서 도와. 류자키는 내 조수, 스루가는 크루저 조타수다. 주사기를 다룰 때에는 배를 흔들지 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다시 선글라스를 쓴 스루가는 바다 위를 빙글 돌아 보았다. 서쪽으로 1킬로미터 가량 거리에 고깃배인지 유람선인지 알 수 없는 배가 크루저를 감시하듯 멈춰 서 있었다.

"바다 위에서까지 고생 많군. 대통령도 어지간히 L의 술책에 잘 걸려 든 모양이야. 슬슬 블루십에도 이 쪽 위치가 알려질 때가 됐지만 저 녀석들이 있으면 안심인데. 그나저나 FBI가 우리를 지킬 줄은…. 얄궂은 일이군."

 

 

---

   

   

ℒ 5

해적

  

오사카 만의 조용한 밤 바다에서 두 척의 보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아가고 있었다. 목표인 크루저의 불빛을 앞두고 쿠조가 중얼거렸다.

"바다 위라니, 잘도 생각해 냈군, L. 이렇게 되면 만의 하나의 경우에도 감염은 확산되지 않겠어."

쌍안경을 손에 든 요시자와가 신호를 보냈다.

"선내의 여자 아이를 확인했다. 둘로 나뉘어 5분 뒤에 양 쪽에서 동시 공격한다. L이 데스 노트를 들기 전에 제압하도록."

두 척의 보트에 나눠 탄 블루십 멤버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와 달리 이번에는 바다 위다. 도망칠 곳은 없어."

실컷 헛수고를 해 온 요시자와는 이제야 보복할 기회가 찾아오자 나직이 웃었다. 그러나 끼어 들 듯이 한 척의 배가 보트의 항로를 막아 섰다. 무슨 일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강력한 라이트가 보트 두 척을 비추었다.

"제길, 경찰인가?"

상대는 일제히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필요 최소한도의 움직임만으로 요시자와 일당을 가로막아 L이 탄 크루저로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녀석들은 프로다. 제길! 이래서야 손을 쓸 수 없어."

"선글라스와 마스크…. 저건 데스 노트 대책.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FBI가 L을 지키고 있잖아?"

쿠조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쿠조 씨? 저 녀석들이 L을 죽이도록 손을 썼던 게 아닙니까?"

"L…,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거야…."

쿠조가 FBI의 방침 전환을 알 리가 없었다. 지금도 키라 대책실의 시스템을 해킹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L인 척하며 협박하고 있는 쿠조가 '어째서 L을 죽이지 않지?' 라고 대통령을 몰아 세울 수도 없었다.

"쿠조 씨, 어떻게 할 겁니까? 이래서는 마토바 대표님께 얼굴을 들 수가 없겠어요."

다가갈 수 없는 빛을 바라보면서 쿠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크루저 안에서는 L과 마키가 평화롭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은 거인 대 한신 전. 타이거즈 모자를 눌러 쓴 마키는 메가폰을 들고 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마구 소란을 피웠다. 훈훈하게 지켜 보는 히토미와는 대조적으로 모자를 대충 머리 위에 올려 놓은 L은 희한하다는 듯이 마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쳐! 전 타석 홈런이다─!"

"이 선수의 타율은 2할 5푼 1리니까 전 타석 홈런을 치는 건 5천 번 시합에 한 번 정도겠지요."

L이 시텐노지 명물 만쥬를 먹으면서 냉정하게 말하자 마키는 기분이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어! 못 치는 녀석일수록 응원을 해 주는 게 팬심인 법이라고! 아, 사인 볼 갖고 싶다~!"

"마키 씨는 이 팀을 무척 좋아하는군요."

"당연하지! 오사카 사람 중에 타이거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동안 마키의 흥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L은 만쥬를 입에 물고서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

    

   

ℒ 4

도청

  

"이번에는 또 상당히 오사카다운 외관이 되어 버렸군. 너도 참 고생 많다." 

부두 창고로 옮겨진 이동용 작전 차는 새빨간 빛깔의 타코야키 판매 차로 위장되어 있었다. 나고야의 지하 공장에서 위조되어 지금 막 트레일러로 옮겨 온 참이었다. 크루저로 돌아가려던 스루가는 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바다를 뒤에 두고 창고 그늘에 숨듯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보면, 커플이나 낚시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건 FBI가 아니로군. 분명히 블루십의…?"

감금되었을 때 보았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잠시 상황을 살펴 보자 쉬려는 건지 차에서 나와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경계감이 없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 스루가는 등 뒤에서 몰래 다가가 재빨리 그를 붙잡아 제압했다.

"초보자가 익숙지도 않은 감시를 하는 게 아니지. 심지어 FBI를 상대로. 크루저에 도청기라도 달아 두려고 했나?"

상대는 대답하려 하지 않고 한동안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프로의 구속은 간단히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도련님, 이름을 알려 주실까. 성까지 전부 말야." 상대는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그야 알려줄 수 없겠지. 이 쪽에는 데스 노트가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지…."

만년필로 위장해 안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나이프를 꺼내어 입 속에 재빨리 찔러 넣었다. 경직한 듯이 상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고통을 느껴 본 적 있나?"

나이프 끝이 뺨 안쪽에 살짝 닿아 금세라도 찢어 발기려는 듯 쿡쿡 찔러 댄다. 상대의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저항할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낀 스루가는 구속을 늦추었다.

"나, 나카니시… 타츠히코… 입니다." "호오, 나카니시란 말이지."

스루가는 조수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끌어 당겨 보닛에 내용물을 쏟아 냈다. 생각했던 대로 멍청하게도 면허증이 굴러 나왔다.

"아, 그건…." 스루가는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면허증을 보았다.

"내 눈에는 오니시 타츠야로 보이는데. 언제부터 일본에서는 이 글자를 '나카니시'라고 읽게 됐지?"

면허증을 팔락거리자 오니시라는 남자는 완전히 체념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니시 씨, 부탁이 있어. 부탁을 들어 준다면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어."

"어, 어떻게 하라고?"

상대의 반응을 가학적으로 즐기면서 스루가는 느릿느릿 말했다.

"뭐, 간단한 일이야."

 

"쿠조 씨, 당신의 계획은 하나같이 실패했습니다. 책임을 져 주실까요?"

 

수신기에서는 마토바의 정중하면서도 사람을 업신여기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잡음이 섞인 목소리에 L과 스루가, 타카하시, 마키 네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마키는 곰 인형을 끌어 안고서 여전히 기분 나쁜 목소리로군 하고 생각하며 듣고 있었다.

"그 오니시라는 녀석, 착하게 말을 잘 들었군."

스루가는 약간 자랑스럽게 말하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스루가가 오니시에게 요구한 것은 조직 아지트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수신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한 목소리로 쿠조가 조용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바이러스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마토바 대표님과 다른 분들은 해외로 도망쳐 주세요."

"하지만 항 바이러스 약이 준비되지 않으면 쿠조 씨도 감염될 텐데…."

 

수위에서 술렁이는 소리와 함께 머뭇거리는 목소리도 들려 왔다.

 

"아니요, 아무리 상대가 L이라 할지라도 몇 번이나 작전을 실패한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제가 하겠어요."

쿠조의 목소리는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알려 주듯 단호했다.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으셨다면 하는 수 없지요. 예상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우리들은 죽음을 각오한 쿠조 씨의 결의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계획을 성공시켜 보이겠습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군. 마토바란 놈, 쿠조가 물러 설 곳을 자기가 없애 버린 주제에 그녀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도저히 참고 들어 줄 수가 없다는 듯이 스루가가 내뱉었다. L은 스루가가 사 온 오사카 명물 돼지고기 만두를 들고 마치 골동품이라도 감정하듯 구석구석 살펴 보며 수신기에서 흘러 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 대화에 따르면 그들의 목적은 바이러스로 일본을 괴멸시키는 일인 모양이군요."

"바이러스를 퍼뜨리겠다는 건가. 흉악한 놈들이군."

타카하시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쿠조가 마키에게 주사를 맞아 바이러스 보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아."

"쿠조 씨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대화 말인데요…."

돼지고기 만두를 베어 문 L은 맛이 부족했는지 반으로 갈라 메이플 시럽을 금뿍 부었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스루가와 마키는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정면에서 그 모습을 보고 만 타카하시는 속이 거북한지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저는 이 대화가…, 우리들에게 들려 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들려 주기 위한 대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류자키?"

L이 돼지고기 만두를 내밀자 사양…이라기보다는 거절을 하면서 스루가가 의문을 표시했다.

"그들이 항 바이러스 약을 손에 넣지 않은 채 계획을 실행에 옮기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연구소를 습격한 시점에서 곧바로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테니까요. 이 대화는 계획의 실행이 머지 않았다는 걸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동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 오니시라는 녀석도 일부러 나한테 들켰다는 건가?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혹시 정말이라면 쿠조 씨가…."

마키가 불안한 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L은 흘려 넘기지 않았다.

"마키 씨, 쿠조 씨는 마키 씨를 속이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람입니다."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마키의 우울한 표정은 L이 아무리 돼지고기 만두를 내밀어도 변하지 않았다.

 

 

---

  

    

ℒ 2-1

유괴

  

항 바이러스 약 제조가 일단락되고, 스루가가 식료품을 사러 갔기 때문에 크루저는 부두 외딴 곳에 들어서 있었다. L과 타카하시는 크루저에서 히토미 특제 오사카 명물 튀김 꼬치를 먹으면서 아직 대낮이었지만 간단하게 축배를 들고 있었다.

"내일 정식 테스트를 하고 마키에게 항 바이러스 약을 투여하겠어. 그 뒤 그 녀석들의 테러 계획을 경찰에 알리고 니카이도의 누명을 벗기면 끝나는 거다."

"그렇군요. 나머지는 감염된 쿠조 씨에게 어떻게 항 바이러스 약을 넘겨 줄 것인가…. 뭐, 그들이 경찰에 잡힌다면 얼마든지 방법은 있지만요."

L은 튀김 꼬치를 베어 물고서 다시 소스에 찍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앗! 류자키, 소스는 두 번 찍으면 안 돼!" "그렇습니까?"

"다 같이 먹는 소스니까 일단 입에 댄 음식을 찍으면 당연히 안 되지. 소스 두 번은 엄금이야!"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L이 소스 용기를 들어 올리자 거기에는 '류자키 전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네… 준비성이 좋군." 타카하시는 감탄하며 L의 소스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 소스 나도 좀 주겠나?"

L은 말 없이 타카하시에게 용기를 내밀었다. 튀김에 충분히 뿌린 뒤 덥석 베어 문 타카하시는 입 안에 퍼지는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맛의 조합'에, 차마 뱉어 내지도 못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삼켰다.

"다…달다…. 류자키, 이건 설마?"

"초코 소스입니다. 두 번 뿌리지는 말아 주세요."

"뿌리긴 누가 뿌려! 멍청이."

타카하시는 휴지로 입가를 몇 번이나 닦으면서 요리를 가져온 히토미에게 물었다.

"마키는 안 먹나?"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서…. 잠깐 살펴 보고 올게요. 그런데 당신, 류자키 씨에게 그 이야기를…."

"아, 그랬지."

타카하시는 맥주로 간신히 초콜릿의 단 맛을 지운 뒤에야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듯이 몸을 내밀었다.

"이봐, 류자키. 사실은 히토미와 둘이서 생각해 봤는데, 마키는 부모님을 잃고 외톨이가 됐잖나? 그러니까 우리 집에 양녀로 맞을까 싶은데. 어떤가?"

타카하시의 제안에 L은 싱긋 웃으며 찬성의 뜻을 밝혔다.

"고맙습니다. 이걸로 저도 안심하고…."

"안심하고,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떠올린 듯 L은 말꼬리를 흐리며 잔을 들었다.

"타카하시 씨, 건배하지요." "그래, 항 바이러스 약의 완성과 마키의 행복을 빌며."

잔이 부딪친 그 순간 히토미가 달려왔다.

"여보! 마키가 없어요!"

 

마키의 선실 테이블 위에는 판 초콜릿 한 장과 함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류자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L은 왼손에 초콜릿을, 오른손에 편지를 집고서 크레인처럼 수직으로 들어올려 눈 앞으로 가져갔다.

─류자키, 고마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올게─.

"해야 할 일이라니, 뭐지?" 옆에서 들여다 본 타카하시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L은 마키의 선실에 있던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인터넷의 최신 이력을 조사해 보자 오사카 부근의 일기 예보가 표시되었다.

"일기 예보? 마키는 이걸 보고 나간 건가. 비가 걱정되기라도 했나?"

"아뇨…, 아마도 마키 씨가 확인한 것은 풍향일 겁니다."

L은 평소보다 더욱 과격하게 손톱을 깨물면서 말했다. 타카하시도 이내 알아차린 듯 했다.

"풍향…이라면, 위험하군."

 

잔잔한 오사카 만에 천천히 배가 오갔다. 마키는 깊숙이 눌러 썼던 타이거즈 모자를 벗고 그리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사카에 살았을 무렵에 부모님이며 아마네 미사의 가족과 함께 곧잘 놀러 왔던 곶이었다. 곶 끄트머리에 선 마키는 뒤를 돌아 보았다. 바람은 뭍에서 바다를 향해 불고 있었다.

"아빠, 이러면 괜찮겠지…."

잠시 뒤 마키에게로 곧장 다가오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키, 연락해 줘서 고마워."

"쿠조 씨, 혼자서 왔어?"

"그래, 괜찮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마키는 조용히 결심을 굳히고 쿠조와 마주 섰다.

"항 바이러스 약은 내일이면 완성된대." "그래…."

"타카하시 씨가 모두 다 경찰에 말하겠대. 쿠조 씨의 조직이 테러를 계획했다는 이야기, 아버지가 살해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마키는 쿠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쿠조 씨는 어쩌면 처음부터 죽을 작정이었던 거 아냐?"

쿠조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쿠조 씨가 살아서 그 죄를 갚도록 하는 거야."

아버지를 잃고 류자키와 만난 뒤 줄곧 생각했던 일이었다.

"마키…." 쿠조가 눈을 크게 떴다.

"아빠는 언제나 나에게 말했어. 어떤 때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나는 쿠조 씨가 아버지의 생각을 이어 받아 줄 사람이 되길 원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줘. 그렇게 못하겠다면…."

마키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쿠조 씨를 죽이고 나도 죽겠어."

쿠조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돌아 보았다.

"그래서 이 장소로 불러 냈구나. 여기라면 바이러스는 확산되지 않고 우리들만 죽을 테니까."

마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위험한 바이러스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는 이상, 가족도 '만의 하나의 경우'를 언제나 예상하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마키, 이런 나를 아직도 믿을 수 있어? 용서할 수 있어?"

마키의 마음 속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과 아버지의 믿음을 얻어 내고서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 간 쿠조가 눈 앞에 있었다. 순간 증오의 불꽃이 솟아오를 것 같았지만 마키는 그 감정을 필사적으로 지웠다.

"지금은 아직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쿠조 씨를 믿고 있어."

마키가 똑바로 쳐다보자 쿠조는 칼보다도 그 진지한 눈빛이 꽂혀드는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돌린 쿠조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수면 너머에 건너편 해안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쿠조 씨, 저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모여 있어. 그야 그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정말로 그걸 망가뜨릴 수 있어?"

마키는 예전처럼 쿠조의 옆에 서서 함께 건너편 해안을 바라보았다. 쿠조의 마음 속에 조그만 불꽃이 피어 올랐다.

줄곧 마음 깊은 곳에 감춰 두었던 것. 결코 녹지 않는 빙벽 안쪽에 가둬 두었던 감정. 그것은 '희망'과 '용서'였다.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어릴 적의 따뜻한 기억. 그리고 부모님을 잃은 뒤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사람과, 그에게서 들었던 말들.

계속 봉인해 두었던 기억이 억누를 수 없이 넘쳐 흐를 것 같았다. 이윽고 조용히 결심을 굳힌 쿠조가 말했다.

"알았어, 마키. 모든 것을 세상에 공표하겠어. 네 아버지를 죽여 버린 일, 그리고 우리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쿠조 씨… 고마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절망과 증오와 고뇌를 넘어서 조그만 희망으로 두 손이 이어졌다.

"마키, 여기에 있으면…."

쿠조가 말을 꺼냈을 때, 차 한 대와 오토바이가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더니 모래 먼지를 피워 올리며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멈춰 섰다.

"쿠조 씨, 단독 행동은 곤란하지요. 그 애가 도망치면 어쩔 작정입니까? 그 애는 L의 데스 노트에 대항할 수 있는 소중한 장기 말이니까요."

차 뒷자리에서 마토바가 나타나더니 보기 드물게 초조한 표정으로 쿠조를 질타했다.

"마토바 대표님, 저는…." 쿠조는 마키를 지키려는 듯 등 뒤에 숨기고 섰다.

그러나 마토바의 얼굴을 본 순간, 쿠조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지금 막 생겨난 감정을 뿌리치고 가면을 바꿔 쓴 것처럼 냉정한 웃음을 띠며 마키를 내밀었다. 그 손에는 어느 새 약품이 든 앰플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마토바 대표님, 이 아이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는 항 바이러스 약까지 가지고 와 줬답니다. 이 정도 양이면 멤버들의 몫은 충분합니다."

"어? 쿠조 씨…."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려던 마키의 목소리를 블루십 멤버가 가로막았다.

"크큭, 코니시가 목숨을 걸고 한 역도청 작전이 성공한 모양이군."

비웃는 듯한 요시자와에게 코니시가 머뭇거리며 항의했다.

"코니시라고 하지 말고 오니시라고 불러 주세요."

억지로 차에 밀려 들어가 버둥거리는 마키의 시야에 날아 드는 것이 있었다.

"류자키!" 조직 멤버가 일제히 돌아 보았다. 자전거를 탄 L이 엄청난 속도로 이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런, 영웅은 언제나 뒤늦게 등장하시는군.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 발 늦은 것 같군요. 아가씨와 항 바이러스 약은 고맙게 받아 가겠습니다."

하츠네에게 신호를 보낸 마토바는 차에 타고 출발했다. 하츠네가 허리에 찬 단검을 손에 들고 칼날을 핥으며 L을 기다렸다. 숨을 헐떡이며 다다른 L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우산 하나 뿐이었다.

"그런 걸로 칼에 대항할 생각이야?"

하츠네가 비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칼 끝이 벌처럼 우아하고 재빠른 선을 그리며 L의 팔을 휘감듯이 덮쳐 왔다. 다음 순간 L의 오른팔에서 피가 솟구치며 하얀 셔츠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L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L은 소매를 찢어 내고는 펜싱처럼 우산을 쥐고서 하츠네에게 대항했다.

"움직이기 쉬워졌습니다." "허세는!" 하츠네가 단숨에 들려들었다. 그러나 L은 우산의 길이를 살려 칼날을 비껴 내며 하츠네와 거리를 두었다. 거리가 바싹 붙으면 단검을 가진 하츠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끈질…기네!" 다시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초조해진 하츠네가 발치의 모래를 차 올렸다. L은 엉겁결에 웅크리고 앉아 하츠네를 향해 우산을 펼쳤다.

"소용 없어!" 날카로운 칼날이 우산 천을 쉽사리 찢어 발겼다. 하지만 안쪽에서 나타난 L의 기묘한 모습을 보고 하츠네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머리부터 모래 위에 낙하한 개구리 같은 모습을 한 L은 그대로 모든 체중을 실어 두 다리로 허공을 차 올렸다. 하츠네의 오른쪽 어깨에 명중하자 단검이 허공을 날아가 모래에 꽂혔다. L이 하츠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단검을 손에 들었다.

"제법인걸…. 뭐, 이 정도로 시간을 벌었으면 됐겠지."

하츠네는 오토바이에 올라 타 바이바이 손을 흔들며 달려 나갔다.

L은 마키가 탄 차를 뒤쫓아 달렸다. 구부정한 등줄기를 똑바로 펴고. 근육과 심장과 산소 공급량의 균형을 뛰어넘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 능력에 의한 최대 속도가 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래도 L은 계속해서 달렸다.

모든 불합리한 일들과 싸워 온 사람이 그렇게 해 왔듯이.

정의의 이름 아래 강대한 악과 대치해 온 사람들이 그렇게 해 왔듯이.

차는 멀어졌고, L은 숨을 헐떡거리며 아스팔트에 무릎으로 털썩 주저앉아 땅을 손으로 짚었다.

"라이토 군…,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지 못한 이 마음…, 이것이 라이토 군이 말한 '세상의 현실'입니까?"

차의 후미등이 점차 작아지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최악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팔을 타고 흘러 라이토의 유품인 망가진 시계를 적시고는 아스팔트에 방울져 떨어졌다. 웅크리고 앉은 L은 갑자기 주먹으로 아스팔트를 두들겼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주먹에서 피가 흘러 나와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라이토 군…, 아픕니다. 무척… 아픕니다. 마음이…."

그것은 현실적인 아픔이었다. 고고하고 지고한 명탐정 'L'로서 존재해야만 했던 한 명의 약한 인간이 가둬 두었던, 가둬 둘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었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 'L'은 탐정의 능력 이외의 면에서는 어떤 식으로 묘사되어 왔을까? 혹자는 '엽기 살인에 희희낙락 달려드는 변태 명탐정', 혹자는 '대량 살인을 수치로밖에 재지 못하는 인간 컴퓨터', 혹자는 '은둔형 인격 붕괴자'…. 당사자인 L이 그런 인격 평가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는 본인만이 알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잊는' 법이 없는 L은 해결해 온 수천 가지 범죄의 희생자들의 모습 역시 잊지 않았고, '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꿈결처럼 허물어진 생명을, 비탄에 잠기며 남겨진 사람의 눈물을, 생명을 깃털보다도 가벼이 여기는 범죄자와 대치하는 나날을… 그런 것들을 '일상'으로 삼고 지내 온, 지낼 수밖에 없었던 존재의 마음 속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의 마음의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것은 도저히 혼자서는 짊어질 수 없는, 등골이 휠 만큼의 중압이었을까? 불면증으로 잘못 볼 만큼,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드리울 만큼의 고뇌였을까? 끊임 없이 당분을 필요로 할 만큼 쓴, 쓰디쓴 마음이었을까? 오래 된 병 같은 구부정한 등, 숙명적인 눈가의 그늘, 그리고 괴상한 기호…. 그것은 모두 '정의로울 것, 정의로 존재한다는 아픔'을 마음 속에 가둬 두었던 L이 'L이라는 사실, L로 존재한다는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L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줄곧 봉인해 왔던 마음을 풀어 헤치듯이.

  

    

ℒ 2-2

위장

  

L이 부두로 돌아오자 스루가가 타코야키 판매 차로 바뀐 빨간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는 어떻게 됐어, 설마…?" 다가온 스루가는 L의 팔에 난 상처를 보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통한의 일격입니다." 조용히 고통을 참는 듯한 L의 모습을 보고 스루가는 그 이상 꾸짖을 수도 없었다.

잠시 뒤 L은 조금 전부터 이야기에 끼어 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인물에게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있습니까?" "아, 너무한데. 자기가 불러 놓고."

경시청의 마츠다가 토라진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자기가? 제가 당신을 불렀다고요?"

"어? 하지만 내 컴퓨터에 L이라는 문자가 떠오르면서, 지금부터 보낼 데이터를 오사카의 여기로 가져오라고…."

그렇게 말하며 프린트된 보고서를 내밀었다. "다른 L…인가?" 스루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끼어들었다.

마츠다는 "어?" 하는 표정으로 L과 스루가를 번갈아 보았지만 L은 보고서를 구깃구깃 넘기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L은 조그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퍼즐이 풀린 것 같군요."

스루가가 손목시계를 노려보며 L에게 말했다.

"류자키, 블루십의 요시자와라는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어. 우메다 뉴 스카이 빌딩 30층으로 오후 6시에 나와 둘이서 오라고."

"30층…, 오후 6시라고요?"

"응, 게다가 조건을 두 개나 달았어. 데스 노트를 가지고 올 것과 대통령의 명령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FBI가 참견하지 못하도록 할 것. 제길, 그 녀석들, 마키를 인질로 잡자마자 세게 나오다니!"

"잠시 생각 좀 해도 될까요?" L은 무릎을 끌어 안고서 웅크리고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시간과 장소에 뭔가 걸리는 점이 있었는지 "30층…, 오후 6시…, 데스 노트…." 라고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윽고 L이 일어섰다.

"갈까요. 마츠다 씨도 도와 주시겠습니까?" "어, 나도?"

사정을 모르는 채 휘말려 든 마츠다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예. 마츠다 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역할이 있습니다." "그렇군. 알았어!"

역시 단순한 마츠다는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자 용기가 솟아난 모양이었다.

"스루가 씨, 주위에서 감시하고 있는 FBI를 한 사람 붙잡아 주세요. 그들에게서도 조금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하지만 블루십은 그 녀석들이 참견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블루십 앞에 모습을 보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조금 거칠게 협박을 해도 괜찮습니다."

"알았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 L과 스루가, 마츠다가 타코야키 판매 차에 올라타려 하자 타카하시가 조그만 가방을 L에게 건네 주었다.

"테스트용 항 바이러스 약의 샘플이다. 1인분밖에 없지만 말이야. 아직 테스트도 안 했으니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고맙습니다, 타카하시 씨. 당신은 이대로 항 바이러스 약의 개발을 계속해 주십시오. 곧 대량의 약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반드시 마중을 보낼 테니까요."

"알았네. 하지만 마중이라니…?" L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류자키, 스루가, 마키를 부탁하네!"

달리기 시작한 차를 향해 타카하시가 외쳤다. L은 창으로 팔을 내밀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우메다 뉴 스카이 빌딩 30층이라. 뭐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류자키?"

"오사카 중심부의 고층 빌딩을 만날 장소로 지정했다는 말은, 일본을 괴멸시킬 그들의 계획을 슬슬 실행에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배양한 바이러스를 액체 미립자화해서 30층에서 공중 살포할 작정이겠지요. 오후 6시라는 시각도, 햇빛에 방해를 받지 않고 바이러스 병기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부근에는 오사카 역이며 우메다 역도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장소지요. 발병하게 될 2주일 뒤에는 바이러스 보균자가 된 사람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일본은 괴멸합니다."

"하지만 공중 살포라는 게 그렇게나 효과가 있나? 그야 바깥에서 걷고 있던 사람의 폐에는 들어가겠지만…. 한여름의 빌딩은 어디나 냉방 때문에 창문을 잠가 두고 있어. 생각만큼은 번지지 않을 것 같은데?"

낙관적인 스루가의 예상에 L은 고개를 저었다.

"스루가 씨, 피 한 방울 속에는 수억 개의 바이러스가 존재합니다. 설령 문을 잠가 둔 빌딩이라 해도 건물의 공조 시설에 비 한 방울만큼도 되지 않는 바이러스가 파고들기만 하면 건물 안에 있는 전원을 감염시키기에는 충분합니다."

L은 청바지 주머니에서 마구 구겨진 와타리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와타리…, 아무래도 '잠들 듯이 사망'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어."

뒷자리에서 L의 모습을 보고 있던 마츠다가 끼어 들었다.

"하, 하지만 류자키의 운명은 데스 노트에 적힌 대로 결정되어 있잖아요?"

"아뇨, 데스 노트에 적은 것은 새로 데스 노트에 기록해도 번복할 수 없을 뿐, 아마 지금 권총으로 쏜다면 나는 죽을 겁니다."

"그… 그럴 수가."

"괜찮습니다. 마츠다 씨가 도와 준다면 저는 노트에 적은 대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L은 뒷자리를 돌아 보고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마츠다에게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마토바 씨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항 바이러스 약을 받아 가겠다고. 아무래도 쿠조 씨가 마키 씨에게 항 바이러스 약을 빼앗았다고 위장했고, 블루십 멤버도 그 말을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쿠조가 조직을 배신하고 있다는 건가, 뭣 때문에?"

핸들을 쥔 스루가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쿠조 씨에겐 마토바 씨와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군요."

L은 마츠다가 가져온 보고서를 다시 꺼냈다.

"스루가 씨, 9개월 전 쯤에, 정확히 말하면 270일 전에 FBI에 숨어 들었던 스파이인 로버트 페어맨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페어맨? 아, 그 때는 끔찍했지… 잠깐, 류자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그 자리에? 앗! 그러고 보니 그 때 베어스 크레페라고, 이 차…."

그제야 사실을 깨닫고 놀란 스루가를 곁눈질하며 L은 설명을 계속했다.

"페어맨이 빼앗으려 했던 극비 자료는 1980년 감염증 연구소에서 일어난 수수께끼의 폭발 사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고가 아니라 바이러스 병기 개발을 은폐하기 위한 파괴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입니다. 바이러스 병기 개발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합중국에는 엄청난 스캔들이지요."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

"쿠조 씨의 부모님은 그 감염증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병기 개발에는 관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사건에 말려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쿠조는 미국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얘기인가."

"페어맨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던 존재, 국무장관의 의뢰서를 위조한 인간을 찾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 가지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뭐지?"

"페어맨이 며칠 전에 미국을 떠나 길버트 바인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 잠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이봐, 류자키, 그 보고서는 대체 누가 보냈어?"

L은 보고서를 바라보며 그 작성자를 떠올리듯이 조그맣게 웃었다.

"퍼즐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우메다 뉴 스카이 빌딩의 창문으로는 오사카 역과 주변의 '북쪽 구역' 번화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블루십이 지정한 곳은 30층의 빈 사무실로, 요시자와와 하츠네가 권총을 들고 마키를 확보했다는 우월감을 드러낸 채 L 일행을 맞아 주었다.

"그러면 데스 노트를 꺼내 보실까. 물론 허튼 짓을 하면 곧바로 연락해서 여자 아이를 죽이겠어."

"알겠습니다. 노트를 넘기겠습니다."

L은 순종적인 태도로 포테이토 칩 봉지를 내밀었다. 아직도 그런 봉지에 넣어 두고 있었냐며 스루가가 혀를 찼고, 요시자와도 마찬가지인 듯 수상쩍다는 투로 봉지를 받아 들어 그 안에서 노트를 꺼냈다.

"어이, 명탐정. 댁이 한 말에 따르면 데스 노트가 두 권 있었을 텐데, 다른 한 권은 어쨌어?"

"그건 거짓말입니다. 다른 한 권은 소각 처분해 버렸습니다."

태연한 표정의 L에게 요시자와 뿐 아니라 스루가까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신용이 안 가는걸. 무엇보다 노트의 규칙에 따르면, 노트를 태워 버리면 관련된 인간은 모두 죽어 버리는 게 아니었던가?"

"13일 규칙과 노트를 태우면 건드린 사람이 죽는다는 부분은 키라가 수사를 혼란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가짜 규칙입니다. 뭣하면 그 노트도 태워 볼까요?"

가볍게 말하는 L이 금방이라도 실행할 것 같아서 요시자와는 황급히 노트를 자신에게 끌어 당겼다.

"댁 때문에 몇 번이나 헛수고를 했으니까 말야…. 뭐 됐어. 먼저 이 노트가 진짜인지 어떤지 지금 바로 판명해 보겠어."

"이, 이봐, 지금 바로라니, 설마…?"

스루가가 자기 입으로 말하기 꺼려지는 듯 말을 흐렸다.

"눈치가 빠르군, FBI. 그래, 당신들이 자신의 이름을 써서 노트가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야."

하츠네가 즐거운 듯이 노트를 펼쳤다. 스루가는 도움을 요청하듯이 L을 보았다. L은 자신의 '추리'를 기대하고 있다고 느껴서인지 약간 자랑스럽게 그 '추리'를 과시했다.

"스루가 씨,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을 살려 두면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려 들 테고, 데스 노트가 진짜라는 사실도 확인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적으라는 건 우리들을 처리할 수 있고 노트의 진위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 그런가, 그렇군…, 하하하."

명쾌한 대답에 스루가는 기운이 빠졌다. 너무나도 이해가 빠른 L을 보고 또 가짜가 아닐까 하고 요시자와와 하츠네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럼 명탐정, 당신부터 이름을 써 보실까."

노트와 펜을 건네 받은 L은 뭔가를 생각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요시자와를 향해 말했다.

"이 노트는 사인을 쓰면 그대로 죽고, 이름만 쓰면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심장마비는 괴로울 것 같으니 다른 사인을 써도 되나요?"

얼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요시자와가 좋다고 말하기도 전에 L은 펜 꽁무니를 불안절하게 잡고서 이름과 사인을 적어 버렸다.

"이, 이봐, 류자키. 정말로 써 버렸냐? 뭐야, 추락사?" 스루가는 실성한 것처럼 L의 몸을 흔들었다.

"스루가 씨, 저는 세계 제일의 명탐정입니다. 100퍼센트 이길 확률이 없는 상황에 몰였렸으니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안녕히, 스루! 가…."

말하는 사이에 40초가 지났고, L은 창문으로 다가가 그대로 일상적인 행동의 연장선처럼 훌쩍 뛰어 내리고 말았다.

"이런, 뛰어 내린 건가." 요시자와가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자 차에 치인 개구리 같은 모습으로 주차장 바닥에 들러 붙어 있는 L이 보였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죽었어…. 노트는 진짜다." "과연 명탐정, 체념이 빠르군. 좋아,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FBI."

하츠네가 웃으며 노트를 내밀었다. 스루가는 각오를 한 듯 이름을 적었다. 등 뒤에서 들여다 보고 있던 요시자와는 '스루가'라고 적인 이름을 보고 비웃으며 총구를 스루가에게 들이댔다.

"이봐, FBI. 당신의 본명이 스기타 히데아키라는 사실은 쿠조 씨가 이미 다 알아 봤어. 시간 끌지 말고 얼른 본명을 적어. 그렇지 않으면 그냥 총살될 거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절망에 찬 얼굴을 한 스루가는 고개를 숙이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윽고 목소리를 쥐어 짜듯이 말했다.

"부탁이 있어. 조금만 시간을 주지 않겠나?" "으음? 무슨 뜻이지?"

"이 노트는 사인과 사망 시각을 설정할 수 있어. 사인은 적어도 안락사, 사망 시각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시간을 조금은 줘도 되잖아?"

요시자와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리들은 이제부터 곧장 공항으로 가서 일본에서 탈출해야 하거든. 게다가 L이 저런 식으로 죽었으니 경찰도 올 거야. 당신의 사망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하고 출발할 수 없다고."

"그래. 당신이 죽기 전에 경찰을 부를지도 모르고, 바이러스 살포 장치의 동작을 멈춰 버릴지도 모르잖아."

두 사람이 부정하자 스루가는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들었다.

"반대로 생각해 봐. L이 뛰어 내려서 자살했어. 금방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경찰이 조사하러 올 거라고. 그 때 내 시체가 뒹굴고 있으면 먼저 이 방을 의심할 거고, 자칫하면 바이러스 살포 장치까지 멈춰 버릴지도 몰라."

요시자와와 하츠네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확실히 스루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고 판단한 스루가는 노트의 규칙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봐, 데스 노트는 죽기 전의 상황을 조종할 수 있어. 내가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경찰이 와도 방 문을 열지 않는다는 말을 적어 두면 확실해. 바이러스 살포 장치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도 노트에 적어 두면 되고. 마지막 부탁 정도는 들어 줘. L처럼 마음의 준비도 없는 채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듯이 스루가는 요시자와의 다리에 매달렸다. 요시자와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움츠리곤 시계를 보았다.

"괜찮겠지. 두 시간 주겠어. 확실히 경찰이 조사하러 오면 귀찮으니까. 노트에 이렇게 적어. 스기타 히데아키, 7월 28일 20시 30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누가 와도 문을 열지 않고, 바이러스 살포 장치를 건드리지도 않고 안락사한다고." "아, 알았어…."

떨리는 팔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들은 대로 적은 스루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츠네가 스루가의 앞에 주저앉아 즐거운 듯이 바라보았다.

"안녕, FBI.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

"또 팬티 보여…." "마지막이니까 서비스야."

생긋 웃은 하츠네는 윙크를 하고 일어섰다.

"그럼 이만, FBI. 성불하기를! 당신이 죽은 20분 뒤에는 바이러스 살포 장치가 움직일 거다. 당신들은 바이러스 테러의 실행범이 되는 거야. 마지막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어서 좋겠군."

그렇게 말한 요시자와와 하츠네는 방에서 나갔다. 남겨진 스루가는 창가로 다가가 석양에 물드는 오사카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L을 태웠을 구급차 사이렌이 점차 멀어지며 거리의 소란 속으로 스며 들었다.

 

"정말이지!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해도 이런 역할은 싫다고요. 류자키 바보!"

하얀 긴 소매 셔츠, 청바지에 가발로 분장을 한 마츠다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발을 벗어 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게다가 시체 역할, 제법 잘 하던데요."

이미 29층에서 돌아와 있던 L은 인사를 하면서도, 자신과 똑같은 차임을 한 마츠다를 보고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본 스루가는 말을 할 필요도 없어, 결국 참지 못하고 배를 끌어 안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짜 데스 노트를 받아 갈 줄은 저 쪽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한바탕 웃고 난 스루가가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스루가 씨, FBI 분들께도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29층의 베란다에서 매트로 저를 받아 주신 분들께도, 구급차를 조달해서 마츠다 씨를 수용해 준 분들께도 정말로 고맙다고…. 그리고 이제 대통령 명령에 따른 감시는 필요 없다고 전해 주세요. 앞으로 이틀 동안은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통령의 이름을 노트에 적는 일은 없을 거라고." "으음, 알았어."

스루가가 방에서 나가자 마츠다가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훌륭한 덫이었지만 류자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요?"

"마키애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우리들이 작동 전의 바이러스 살포 장치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죽어 보여서 데스 노트를 진짜라고 믿게 만들고, 스루가 씨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아도 확실하게 죽을 거라 생각하게 할 만한 이 방법 밖에…."

L은 그렇게 말하며 베란다에 설치해 둔 바이러스 살포 장치로 다가갔다.

"바이러스 살포 장치는 바이러스 배양 탱크와 펌프, 모터, 전동 팬이라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모터에 타이머를 장치해 두면 테러 실행범이 도망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작동시킬 수 있지요."

"이렇게 간단한 장치였구나…."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려던 마츠다의 손을 L이 힘껏 후려쳤다.

"아얏!"

"마츠다 씨, 함부로 손을 내밀지 마십시오. 이 안에는 일본 국민 전체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살인 바이러스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데에?"

얻어 맞아서 원망스러운 마츠다였지만, 눈 앞의 조그만 용기에 들어 있는 것이 그만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경악했다. 그것은 데스 노트를 처음으로 만졌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런 데에 말입니다."

L의 말은 손 쉽게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존재 모두에게 향하고 있는 듯, 무거운 울림을 갖고 있었다.

"이런 걸로 사람의 생명을 손 쉽게 빼앗아도 될 리가 없죠." L은 모터의 접속 회선을 끊어 버렸다.

"그럼 이제 이 방을 출입 금지로 해 두고 오사카 경찰의 NBC 테러 대책 전문 부대에게 넘겨 주지요. 우리들은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마츠다 씨의 사격 솜씨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부탁해도 될까요."

"맡겨 둬요. 가자구요!"

 

"하지만 쿠조는 마티를 어떻게 비행기에 태울 생각일까.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은 온 일본에 다 알려져 있잖아. 공항은 제일 경계가 삼엄할 텐데. 게다가 마토바 일당은 국제 지명 수배를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칸사이 국제 공항의 내부 시스템에 접속해 보겠습니다."

타코야키 판매 차의 조수석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던 L은 금세 공항 시스템에 침입해 데이터를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있습니다. 20시 50분 발 로스앤젤레스 행 UA718편에 긴급 환자 수송석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긴급 환자 수송?"

"짐작컨대 마키 씨를 긴습 수술이 필요한 환자로 속여 미국으로 이송한다고 위장하는 방법일 겁니다. 마토바 씨 일당은 의사나 간호사로 동승하겠지요. 의료 기기와 섞어 넣으면 무기나 폭탄도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의 하나 마키 씨나 쿠조 씨가 하늘 위에서 발병하더라도 여객기 그 자체를 바이오 병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미국 상공에서 추락시키면 하늘에서 바이러스가 떨어지겠군…. 하지만 그 경우엔 쿠조도 살아 날 수 없거니와 마토바 및 블루십 인간들도 길동무가 된다고."

"쿠조 씨는 아마도 각오하고 행동하는 거겠죠. 블루십 멤버는 살인 바이러스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미국으로 도망갈 심산이겠지만, 쿠조 씨는 반대로 블루십 멤버 자체를 바이러스 병기로 삼아 미국을 괴멸시킬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에게 부모를 잃었다는 원한을 풀기 위한 자폭 테러라는 소리인가."

뒷자리에서 듣고 있던 마츠다가 끼어 들었다.

"하지만 류자키, 쿠조라는 사람은 니카이도 교수의 연구소에 잠입해 있었잖아요? 블루십이라는 조직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바이러스를 빼앗을 기회는 있지 않았나요? 어째서 그렇게 번거로운 방식으로 미국에 바이러스를 가져가려 한 거죠?"

"어쩌면 쿠조 씨의 복수 상대는 미국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공항에 가면 모든 퍼즐을 풀 대답을 알게 될 겁니다."

"칸사이 공항 발 20시 50분이라. 여기에서는 시간이 걸리겠는데."

스루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루가 씨, 마츠다 씨, 갑시다!"

완전히 운전에 익숙해진 스루가는 음성 가이드를 따라 오사카 번화가를 교묘하게 빠져 나갔다.

─우측으로 꺾어 직진 후 빨간 신호와 동시에 좌측으로 꺾을 것. 두 번째 전봇대에서 보도를 주행해 30미터 앞에서 좌측으로 꺾을 것. 일방 통행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역주행해 주십시오─.

"뭐 이렇게 까다롭게 요구하고 있어!"

스루가는 중얼중얼 불평을 해 대면서도 요구대로 운전을 해 냈다.

"소스가 넘치니까 난폭 운전은 하지 말아 주세요."

L은 어느 새 사 둔 것인지 타코야키에 초코 소스를 듬뿍 부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럴 때에… 하고 스루가가 혀를 차며 어느 정도 분노를 담아 노려 보자, L의 옆모습에는 유례 없이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L 나름대로의 '임전 태세' 준비였던 것이다.

 

교통 법규 위반 표 점수로 따지자면 120점 쯤 위반을 범했을 즈음, 백미러에 순찰차 사이렌의 붉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류자키, 쫓아온다!"

"타코야키 판매 차가 폭주하고 있는데 안 쫓아오는 경찰은 무능합니다."

"냉정하게 할 말이냐!" "교란시키죠. 그 아케이드로 돌입해 주세요."

"돌입이라니, 너 여기는…."

그 곳은 신사이바시의 아케이드, 오사카에서 가장 번잡한 길이다. 백미러로 빨간 불빛이 쫓아 오는 것을 본 스루가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아케이드에 뛰어들어 경적을 울리며 달려갔다. 여름날 밤의 아케이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차체가 작은 만큼 타코야키 판매 차는 사람들 속을 헤치며 달려가기 쉬웠지만, 사이렌을 울리는 순찰차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는 만큼 그 차이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류자키, 따라 잡히겠다. 어떡하지?"

L은 출발할 때에 실었던 커다란 봉지를 손에 들었다.

"자, 준비해 뒀던 물건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스루가 씨, 속도를 줄여 주세요."

"속도를 줄이라니, 그렇게 하면…." "괜찮습니다."

L은 컴퓨터로 자동차 제어 시스템에 접속해 음성 파일을 띄우고 외부 스피커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롯코오로시(역주: 한신 타이거즈 응원가)'가 바깥쪽에서 최고 음량으로 흘러 나갔다. 유전자 속에 '타이거즈 팬'이라고 각인된 오사카 사람들인지라, 폭주하는 타코야키 판매 차를 바라보는 시선이 단숨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재빨리 L이 마이크를 쥐었다. 스피커에서 L의 구수한 오사카 사투리가 울렸다.

"자아, 자! 타이거즈 팬 여러분한테 특별 선물이라요! 타이거즈 선수 사인이 들어간 비장의 물품, 빨리 오는 사람한테 먼저 준다카이!"

그렇게 말하며 봉지 속에서 사인이 들어간 방망이와 글러브, 유니폼을 콩이라도 뿌리듯이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위는 타이거즈 우승 때의 도톤보리처럼 번잡해졌다. 롯코오로시의 음악과 앞다투어 몰려 드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로 순찰차 사이렌도 효력을 잃고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류자키, 너 이런 걸 언제 준비했어?"

"인터넷 경매에서 구입했습니다. 사실은 타이거즈 팬인 마키 씨한테 선물하려고 했지만…."

L은 마키가 갖고 싶어 했던 사인 볼을 바라보다가 그것도 사람들에게 던졌다.

"자, 스루가 씨. 어서 가지요." "아, 으응."

순찰차를 따돌리고 다시 타코야키 판매 차는 달려갔다.

"쾌적한 드라이브로군, 류자키!"

"스루가 씨. 이럴 때에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터놓고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뭐야, 새삼스럽게?"

"사실 데스 노트는 진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는 두 권 다 키라가 죽은 뒤 즉시 소각 처분했습니다."

스루가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L을 쳐다보다가, 차가 보도 위로 올라설 뻔했을 때야 황급히 앞을 보았다.

"진짜는 없다니…, 그럼 너, 뭣 때문에 그렇게 소중하게 숨겨서 다녔던 거야. 게다가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되찾기까지 했는데."

"저는 한 번도 진짜가 있다고 말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딴청을 피우는 L을 보며 스루가는 마음 속 깊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L은 진짜 노트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없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자신이 해 왔던 키라 대책실 침입이나 쿠조와 YB 창고에서 했던 연기, 그리고 블루십에서 목숨을 걸고 했던 탈환도 모두 헛고생이었다고 생각하자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대통령을 협박했을 때에는 이름을 적었던 상대는 분명히 죽었는데. 어떤 트릭을 쓴 거야?"

"제２의 키라, 아마네 미사는 감금에서 해방된 뒤 키라로서의 심판을 재개했습니다. 보고서에 적혀 있는 대로 첫날에는 진짜 데스 노트에, 이틀 째부터는 와타리가 바꾸어 놓은 가짜 데스 노트에…."

"아, 거기까지는 보고서를 읽었으니까 알고 있어. 그래서 아마네 미사가 풀려 난 뒤에 죽은 범죄자는 그 첫날에 이름이 적힌 녀석들 뿐이었지."

"그 첫날에 적었던 이름 가운데 아직 죽지 않은 범죄자가 있었습니다. 이건 보고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요."

"데스 노트에 이름이 적혔는데도 죽지 않았다니, 어떻게 된 거야?"

스루가는 영문을 몰라서 초조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단순히 아마네 미사가 날짜를 잘못 적었던 겁니다. 아마네가 실수로 적은 날짜는 7월 23일."

"즉, 그 날의 그 시각이란 소리군."

"데스 노트에 한 번 적은 것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키라 사건 종결 뒤, 미국 정부나 FBI에서 내가 데스 노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만의 하나의 경우에 이용할 수 있도록 이 사실을 덮어 두고 보고했어요. 그리고 대통령을 협박했던 말인 '핵폭탄 발사'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데스 노트는 다른 사람을 끌어 들이면서 죽일 수는 없어요. 이것도 보고서에는 적지 않았습니다만…."

트릭의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루가가 모두 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류자키, 그럼 왜 대통령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 데스 노트는 처분했고 지금 대통령을 협박하고 있는 사람은 가짜 L이라고. 네가 가짜 L의 방식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잖아. 덕분에 정말로 죽을 뻔 했다고."

L은 대답하지 않고 자동차 건너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스루가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체스 판을 바라보며 몇백 수 앞을 내다 보려는 것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