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 ~L; Change the World~(새로운 시작) -제３장- 탈환

ℒ 13-1

인질

 

"류자키, 경보 음이다! 수상쩍은 차가 이 곳을 둘러싸고 있어."

저녁 반찬거리를 사 온 스루가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FBI 수사관 본연의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얇게 저민 토라야의 양갱을 늘어 놓고 타워를 쌓아 올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L은 컴퓨터를 조작해서 입구와 그 주변의 감시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양복을 입은 회사원처럼 보였지만 그 어색한 움직임을 보니 권총을 숨겨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침입자에 대해서는 보안에 만전을 기해 두었습니다."

L은 놀란 빛도 없이 다시 타워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감시 영상 속에서 상대는 전자 기기를 꺼내어 시정 시스템에 개입, 몇 겹의 보안을 차례로 강제 해제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에러를 알리는 경고 음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일단은 계획대로다─.

스루가는 겉으로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면서 L의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 보고 있었다. 쿠조가 제안한 '작전' 제１탄은 보안망을 망가뜨리고 적이 침입하여 L을 키라 대책실 밖으로 도주시키는 것이었다. 비상 시라면 L은 반드시 데스 노트와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를 꺼낼 테니까. 쿠조와 달리 겅물에 들어올 때에 보안 체크를 받지 않는 스루가가 은밀히 기재를 들여 와 이 시간에 작동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건물 안팎에서 동시에 시스템을 공격해서 보안을 강제 해제시켰던 것이다. 물론 침입한 사람은 적으로 가장한 경시청 테러 대책과 사람이라고 쿠조에게서 미리 들었다. 침입해 온 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감시 영상이 다운되었다. 동시에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던 양갱 타워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상대편에도 해킹 전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마키 씨, 스루가 씨, 도망칠까요. 도주용 특수 차량이 있습니다. 쿠조 씨는?"

"갈아 입을 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어!"

소파에서 뛰어 내린 L은 오른손에 마키의 손을, 왼손에 과자 봉지를 잡고 뛰어 나갔다. 그러나 급 브레이크를 건 것처럼 멈춰 서서 방 중앙으로 돌아왔다.

"뭐 하는 거야, 류자키? 서둘러!"

L이 테이블 아래에 숨겨 두었던 버튼을 누르자 테이블이 솟아 오르더니 안쪽 공간에서 두랄루민 케이스가 나타났다. 과자와 케이스를 저울질하듯이 비교해 본 L은 유감스럽다는 듯 과자 봉지를 포기하고, 그 안에서 꺼낸 막대 캔디 하나만을 입에 물고는 두랄루민 케이스를 들고 다시 달려 나갔다.

 

"류자키, 여기는 키라 대책실이잖아? 좀 제대로 된 차는 없나."

스루가가 질린 듯이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류자키가 올라 탄 차는 선명한 초록색으로 도색된 크레페 이동 판매 차였다. L은 스루가의 비꼬는 말을 듣고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최신예 이동용 작전 차입니다. 강행 돌파할 테니 꼭 붙잡고 있으세요."

정원수를 심어 위장해 놓은 출구로 크레페 판매 차는 갑자기 뛰쳐 나갔다. 금세 뒤에서 차 세 대가 일제히 쫓아와 순식간에 바싹 따라 붙었다.

"류자키, 이런 속도라면 금방 따라 잡힐 거야… 어, 너, 액셀은? 브레이크는? 제대로 운전하라고!"

좁은 크레페 판매 차 실내에서 머리를 콩콩 부딪히면서 스루가가 외쳤다. L은 작전실에서 소파에 앉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끌어 안고 좌석 위에 웅크린 채 오른손으로만 핸들을 잡고 있었다. 왼손은 막대 사탕을 꼭 움켜 쥐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키라 대책실로부터 도로의 정체 상황, 신호 변화 시간, 도로 규제, 철도 차단 시간 등이 모두 입력되어 최적의 루트와 속도를 이 차가 선택해 줍니다."

그 말대로, 크레페 판매 차는 느릿느릿한 속도였지만 신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교차로로 뛰어 들어 한 대를 따돌리고, 차 폭이 아슬아슬한 골목으로 도망쳐 두 대째를 따돌리고, '통과할 수 없는 철도 길'의 순간적인 개방 시간을 노려 건너가 모든 추적자를 따돌려 버렸다. 미러와 외부 감시 영상으로 안전을 확인한 L은 속도를 줄여 창고 거리 한 구석에 차를 숨기즛이 세웠다.

"류자키! 쿠조 씨는 어쩔 거야? 저 녀석들에게 잡히면…."

조수석의 마키가 불안스럽게 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도 바보가 아닐 테니까 상황이 이상하다 싶으면 건물에는 가까이 가지 않을 겁니다."

L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키의 휴대 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착신 표시를 보고 마키의 표정이 굳어졌다.

"쿠조 씨군요?" L은 얼른 휴대 전화를 빼앗아 착신 음량을 최대로 하고 마키에게 돌려 주었다. 마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쿠조 씨! 무사해?"

"미안해, 마키…. 붙잡혀 버렸어. 류자키 씨 좀 바꿔 줘."

L은 마키에게서 휴대 전화를 받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 듯 불안정한 모습으로 쥐었다.

"류자키라고 했던가? 인사라도 해 둬야겠다 싶어 방문했는데 아무래도 집을 비운 모양이라, 전화로 실례하지."

쿠조에서 바뀐 전화 목소리는 초로의 남성 같았다. 정중한 말투이기는 했지만 어딘지 불손한 빛이 담겨 있었다.

"아니, 이 쪽이야말로 집을 비우고 있던 차라 죄송합니다."

잠시 침묵. 그것은 서로의 모습을 알지 못한 채 서로의 마음 속을 탐색하려는 무언의 싸움 같기도 했다.

"자, 나는 이해력이 좋은 인간을 좋아하는데 말이지. 류자키, 자네가 데리고 있는 아가씨가 갖고 있는 것과 우리들이 데리고 있는 여성을 교환하자는 거래에는 동의해 주실는지?"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 넣으면 어디에 쓸 생각입니까?"

상대방의 목소리가 금세 불쾌하다는 빛을 띠었다.

"이해력이 좋은 사람이 좋다고 했을 텐데? 그런 걸 물어 봤자 자네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잖나."

"아뇨, 단순한 범죄 피해 수량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살인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키와 스루가가 L에게 달려들었다.

"류자키! 무슨 소리야. 쿠조 씨를 못 본 척할 셈이야? 그럴 수는 없어!"

"류자키, 지금은 쿠조의 목숨이 우선이다!"

L은 휴대 전화를 든 채로 마키와 스루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은근한 웃음을 흘렸다.

"류자키, 지휘관으로서 조직의 의견을 통일해 주실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거래 장소는?"

"오늘 밤 10시에 요코하마, 다이코쿠 부두의 남쪽 끝에 있는 YB 창고에서 기다리겠네. 차 한 잔 대접하기도 힘들 것 같네만…. 뭐, 고작 몇 분이면 끝날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만의 하나 경찰에 알릴 경우, 혹은 알려져 버린 경우엔 자네가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방법을 선택했다고 받아 들이겠네."

"차는 필요 없지만 뭔가 달달한 걸 준비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쿠조 씨를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좋지." 남자는 유쾌한 듯 웃으며 쿠조에게 전화를 넘겼다.

"쿠조 씨, 아주 간단하게 잡혀 버리셨군요."

"죄송합니다. 수고를 끼쳐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쿠조가 사과했지만 L은 가차 없었다.

"당신을 구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 위험성은 니카이도 교수 아래에서 일했던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류자키,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잖아! 쿠조 씨를 구해야지."

"류자키, 그녀는 일반인이다. 할 수 없잖아. 나도 돕겠어. 우선은 쿠조의 생명이 우선이다."

또 다시 두 사람이 달려들자 L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크레페 차는 타마가와 강변에 멈추어 섰다. 풀벌레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고, 여름 방학이 가까울 무렵이라 그런지 때때로 불꽃이 터졌다. 평온한 여름 밤이었다.

"류자키, 커피다."

크레페 차의 지붕 위에 앉은 L에게 쟁반에 담은 커피 두 잔이 밑에서 올라왔다. 물론 산더미 같은 각설탕과 함께. 요 며칠 사이 스루가는 L의 기호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스루가 씨는 설탕이 몇 개나 필요한가요?"

"아니, 나는 블랙으로…."

"지쳤을 때에는 당분이 필요합니다."

L은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두 컵에 똑같이 각설탕을 넣었다. 스루가가 지붕에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산더미 같은 각설탕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머뭇머뭇 컵을 손에 든 스루가가 커피를 휘저으려 하자, 미처 덜 녹은 설탕이 바닥에 응어리처럼 가라앉아 있어 스푼은 쓰러지지도 않고 컵 중앙에 꼿꼿이 섰다. 스루가는 굳게 각오한 듯이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스에 잠입했던 때에 그 쪽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가 생각나는군. 이 단맛이라니, 뒤통수에서 찌잉 울리는데."

한 입 마신 스루가는 지독한 달콤함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키 씨는?"

"아, 안에서 푹 잠들어 있어. 눈물 자국이 있더군. 아버지가 살해 당하고 믿고 있던 쿠조까지 유괴되었으니, 아무리 똑 부러지는 아이라도 열 살 짜리 여자애야. 짐이 너무 무거워."

"그렇군요."

"그나저나 녀석들의 목적은 대체 뭐지?"

스루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스루가는 상대방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말을 맞춰 두어야만 했다.

"아이를 놓쳐 버릴 만큼 습격이 서투른 걸 보면 훈련을 받은 테러 집단은 아닌 것 같군요. 살인 바이러스를 써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바이러스 자체를 쓰는 게 목적이든가 아니면 어딘가에 팔아 치워서 돈을 벌 생각이든가 둘 중 하나겠지."

"스루가 씨, FBI의 정보망을 써서 정보를 모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쿠조 씨의 신변 조사도."

"아, 알겠어. 하지만 너, 이 상황에서도 아직 쿠조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L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커피잔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잔에서 흘러내리는 설탕을 혀 끝으로 받아 먹고 있었다.

"이봐, 류자키. 여차하면 데스 노트를 쓰는 게 어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스루가가 몸을 내밀었다.

"키라와 싸워 온 제게 데스 노트를 쓰라는 겁니까?"

정색을 하고 말하는 L에게는 스루가도 할 말이 없어서 지붕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FBI 연수생이었던 무렵이 생각나는군. 나오미랑 레이와 함께 훈련을 마치고 지쳐서 늘어진 몸으로 이렇게 뒹굴며 별을 올려다 보았었지."

"좀 더 일찍 제가 키라를 잡아 낼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희생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만 둬. 너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키라와 싸웠잖아."

L은 컵 밑바닥에 남은 설탕을 손가락으로 떠 내면서 스루가를 바라보았다.

"설령 데스 노트를 써야 할 사태가 생긴다 해도, 데스 노트는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면 효과가 없습니다. 쿠조 씨를 유괴한 조직을 모르는 이상, 데스 노트는 무력합니다."

─데스 노트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은 하지 않는군. 그 말은….

스루가는 L의 옆모습을 훔쳐 보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쯤 쿠조는 키라 대책실의 시스템을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망칠 때에 L은 데이터를 모두 소거했다. 쿠조가 바라던 데이터를 키라 대책실에서 입수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역시 계획의 최종 단계까지 가야만 한다. 목을 적시려고 커피를 입에 머금은 다음에야 그것이 '평범한 커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루가는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곧 출발해야겠군, 류자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스루가는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강가의 공중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차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 이르자 휴대 전화를 꺼냈다.

"Y286으로부터 연락. 타깃을 확인했습니다."

"회수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리나?"

"진짜라고 확인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만, 오늘 안에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알았다. 상부는 초조한 기색이지만 내가 막아 두지. 그런데 지난 번 보고에서의 두 가지 현안 사항에 대해서는 확인 되었나?"

"첫 번째인 '사신의 눈 유무'에 대해서도 오늘 밤 안에 확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두 번째…, L이 개인이 아닌 복수의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몇 차례 그럴 법한 발언이 있었습니다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ℒ 13-2

거래

  

한밤중의 창고 거리는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YB 창고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듯 버려진 폐기물과 낡아 빠진 컨테이너 따위가 안쪽에 잡다하게 놓여 있었다. L과 스루가, 마키가 중앙부까지 걸음을 옮기자 열 명쯤 되는 복면 남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라이플을 들고 세 사람을 둘러쌌다. 스루가는 자신들을 둘러싼 복면 남녀의 진형에 남몰래 실망했다. 보통 포위 사격에서 이렇게 사격 대상을 중심에 두는 일은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편을 쏘지 않기 위해서다.

─생초보도 아니고…. 뭐, 지금은 쏠 생각은 없는 것이라고 해 두지….

당연히 그들은 쿠조와 같은 테러 대책과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녀석들이 일본의 테러 대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스루가는 일본의 안전 보장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리더 같은 남자가 한 걸음 나섰다.

"류자키, 오느라 고생 많았군. 기껏 와 주었는데 이런 복면 차림으로 실례 좀 하겠네."

전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정중해서 도리어 상대를 바보 취급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앞에서 L은 스니커를 벗은 오른발 뒤꿈치로 왼발을 비비적 비비적 문지르면서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듯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류자키, 거래를 시작할까."

남자의 말을 신호 삼아, 손이 등 뒤로 묶인 쿠조가 끌려 나왔다.

"쿠조 씨!" "미안해…. 이렇게 되어서."

쿠조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초췌해진 모습을 보자 마키는 L의 제지를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데이터는 이 곰 인형 안에 있어. 얼른 쿠조 씨를 풀어 줘!"

리더 격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조는 속박에서 풀려 났다.

"다행이다! 쿠조 씨."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쿠조는 사랑스럽다는 듯 마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바로 좀 전까지 자신에게 총을 들이대고 있던 남자에게서 권총을 받아 들더니 총구를 천천히 마키에게 향했다. 마키의 표정이 얼어 붙었다. 다른 멤버의 라이플 총구는 여전히 L과 스루가를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래, 쿠조 씨." 쿠조는 마키의 말을 무시하고 L을 돌아 보았다.

"류자키 씨. …아니, 세계 제일의 명탐정 L, 당신이 이런 어린 애에게 줄곧 진짜 데이터를 맡겨 뒀을 리는 없겠죠?"

쿠조가 마키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눌렀다. L이 처음 보는 쿠조의 '또 다른' 얼굴이었지만 예상했다는 듯이 놀라는 빛도 없었다.

"들켰나요?" L은 도발하듯이 눈을 크게 뜨며 혀를 내밀었다.

"류자키! 넘겨 주면 안 돼! 아버지와 약속했어. 나쁜 녀석들에게 넘겨 주면 안 된다고, 내가 세계를 지켜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넘겨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이 참, 귀찮게 됐네."

그렇게 말하며 안쪽에서 나타난 복면의 여자가 주사기를 손에 들고 마키에게 다가오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키의 팔에 주사를 꽂았다.

"무슨 짓이야?" "뭐 하는 거야!"

마키와 쿠조가 동시에 외쳤다. 하츠네는 주사기에 남은 액체를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싫어도 데이터를 넘겨 줄 수밖에 없도록 했을 뿐이야. 이 아이에게 바이러스를 주사했어. 데이터를 넘겨 주면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 주지. 그게 없으면 이 아이의 목숨은 바이러스 잠복 기간인 2주일 밖에 없어. 어때? 데이터를 넘겨 줄 마음이 들었어?"

"알겠습니다. 진짜 데이터를 넘겨 드리지요."

L은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무렇게나 넣어 두었던 마이크로 칩을 쿠조에게 던졌다. 발치에 뒹구는 마이크로 칩을 집어 올린 쿠조는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듯 눈 앞에 들어 올려 빛에 비추어 보았다.

"명탐정 L…, 명탐정답게 우리들이 이제부터 어떤 행동에 나설지 추리해 보시겠어요?"

장난스러운, 도발하는 듯한 표정이 L을 향했다.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넘겨 준 데이터가 진짜라는 보장은 없고, 그렇다고 금방 데이터 분석을 할 수도 없어요. 진짜라고 하더라도 제가 데이터를 복사해 두지 않았을 리도 없지요. 즉…."

"즉…?"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고 제가 가진 것을 모두 체크합니다."

"후후, 정답."

쿠조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불안정하게 세워져 있던 강재(鋼材)를 스루가가 걷어찼다. 5미터는 족히 되는 강재의 묶음이 풀리면서 잇따라 쓰러졌다.

"도망치자! 류자키!"

스루가와 L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진해 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컨테이너 그늘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라이플 총탄이 사방에서 두 사람을 덮쳤다.

"제길! 이 쪽은 무기가 없다고. 류자키, 마지막으로 건넨 데이터는 진짜야?"

"그들에게는 진짜 데이터를 넘겨 주었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이 자리에서 판단할 수 없는 이상 그들의 대응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판에 왜 이 녀석은 상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 질리고 말았지만, 스루가도 상대가 맞힐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２단계도 성공…. 슬슬 제３단계다─.

몇 발째의 탄환이 머리 위를 스쳤을 때, 스루가가 말을 꺼냈다.

"류자키, 이렇게 된 바엔 쿠조의 이름을 데스 노트에 적는 거야."

"데스 노트에?"

"그래. 가지고 있지? 저 쪽은 이 쪽이 어떻게 죽였는지 알 수 없어. 그 녀석의 이름을 써서 죽이면 다른 녀석들도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총을 그만 쏠 거야."

L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부탁해, 류자키. 데스 노트를 꺼내. 이대로는 전멸한다고!"

스루가의 애원에 L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 외엔 방법이 없을 것 같군요."

"좋았어. 그럼 내가 저 녀석들을 견제하지."

말하자마자 스루가는 L을 끌어당겨 장소를 이동했다.

"쏘지 마!"

스루가의 목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물론 창고 안에서 울린 소리의 반향을 이용해 목소리의 출처를 알아 챌 수 없을 만한 장소를 골랐다. 상대가 맞힐 생각이 없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있는 곳을 알면서 쏘지 않는 것은 너무 허술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지? 목숨을 구걸하려고?"

"얌전히 마키를 놓아 줘.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복면 차림의 멤버가 목소리의 출처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군. 지금은 우리들이 그 쪽을 몰아 넣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상황 판단이 잘못 되었던가?"

리더 격인 남자가 솜씨라도 보여 달라는 듯 도발했다.

"너희들도 최근 키라의 활약이 멈췄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L이 키라를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는 키라가 살인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가 있어."

"살인 도구?"

"그래. 이름과 얼굴만 알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궁극의 살인 병기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 지금 바로 죽여 줄까? 멤버의 이름은 전부 파악하고 있다."

"그런 허세는 통하지 않아.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신용하겠지만 말이지."

"역시, 하는 수 없군. 류자키, 쿠조의 이름을…."

고개를 끄덕인 L은 셔츠 아래로 배에 감아 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까만 노트가 나왔다. 스루가가 볼펜을 건네 주자 L은 천천히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먼저 '쿠', 그리고 '조'….

─예상대로다. '사신의 눈'은 갖고 있지 않아….

쿠조가 제안한 계획의 최종 단계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L의 손으로 직접 쿠조의 이름을 데스 노트에 적게 만들어서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잠입 수사를 하는 이상 쿠조도 가명을 쓰고 있으니, 이름을 적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작전이다. 이 작전에 유일한 위험 요소가 있다면 L이 '사신의 눈'을 지니고 있어 쿠조의 '본명'을 알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L이 이름을 기입할 때에는 스루가가 반드시 옆에서 확인하고, 쿠조 이외의 이름을 적기 시작하면 그 전에 빼앗아야만 했다. L이 쿠조의 이름을 다 적은 순간을 노려 스루가는 데스 노트를 빼앗았다.

"쿠조! 작전 종료다. 데스 노트는 회수했어. 넘겨 준 데이터도 진짜라는데."

그렇게 외치며 두 손을 흔들면서 뛰쳐 나간 스루가는 쿠조에게로 달려갔다.

"류자키, 그리고 마키. 미안했어, 둘을 속여서. 뭐 이것도 임무니까 용서해 줘."

"그러면 계획의 제４단계로 나아가 볼까요."

쿠조의 라이플이 천천히 스루가에게 향했다. 스루가의 표정이 어중간하게 미소를 지은 그대로 얼어 붙었다.

"뭐? 왜, 왜 그래, 쿠조? 이 녀석들은 경시청 사람들이…?"

복면을 쓴 멤버들에게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솟아 올랐다.

"경시청의 테러 대책과라고 둘러 댄 말을 설마 이렇게까지 믿어 줄 줄은 몰랐어요."

쿠조는 까치발로 서서 스루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걸로 데이터도 노트도 둘 다 우리들의 손에 들어왔군요."

뺨을 감싸며 아직껏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아연하게 멈춰 선 스루가를 다른 멤버가 두 말 없이 로프로 묶어 버렸다. 붙잡힌 채로 보고 있던 마키는 그제야 쿠조에게 오랫 동안 속아 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쿠조 씨는 역시 이 녀석들의 동료였어? 그럼 쿠조 씨가 아빠를 죽인 셈이잖아."

대답하려 들지 않는 쿠조를 대신해 하츠네가 웅크리고 앉아 마키의 눈 앞에 바이러스가 든 주사기를 늘어뜨렸다.

"맞아, 아가씨. 이 언니는 말이지, 얼굴은 얌전하지만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다. 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하츠네의 말을 쿠조가 가로막았다.

"마키, 요전에 실험 동물 앞에서 이야기했었지. 희생되는 목숨도 이 세상에는 필요하다고."

"아빠는 쿠조 씨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소리야?"

마키의 뺨이 분노로 달아 올랐다.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듯이 쿠조는 시선을 돌렸다.

"마키, 미안해. 사실 아버님께는 계획에 참가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미 멈출 수 없는 작전이야. 톱니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를 한 사람의 손으로는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손으로는 막을 수 없어."

"그래서 바이러스를 써서 세계 인구를 줄여서 선택된 인간들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뜻입니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불쑥 L이 끼어 들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인질도, 데스 노트도 그 쪽에 넘어갔고 이 쪽은 저 혼자, 심지어 빈 손입니다. 죽을 각오는 되어 있지만 저도 탐정입니다. 자신의 추리가 옳았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편히 죽을 수도 없어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계획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쩔까요, 마토바 대표님?"

쿠조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마토바를 바라본다. 마토바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L, 총을 내릴 테니 나오세요."

그 말에 L은 아무런 경계를 하는 빛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컨테이너 그늘에서 어슬렁 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L, 당신의 추리대로 우리들이 하려는 일은 인류 소멸 계획, 종으로 볼 때 지구 상에서 적정 생존 개체수를 대폭으로 초과해 절멸이 우려되는 '인류'를 바이러스로 정화하는 작전입니다."

"아무래도 쿠조 씨 쪽은 인류의 미래에 상당히 비관적인 모양이군요."

L의 말에 쿠조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명탐정 L, 고등 생물이어야 할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당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예, 그 말이 맞습니다, 쿠조 씨. 하지만 저는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고,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쿠조는 그의 속셈을 캐 내려는 듯이 판다처럼 보이는 L의 그늘진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윽고 L의 말이 허세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단히 낙관적이네요. 명탐정이라도 지금의 인류가 직면한 미래에 대해서는 '추리'할 수 없나 보죠?"

"무슨 뜻입니까? 쿠조 씨."

"더 이상 인류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소멸을 봐요. 교토 의정서가 비준되었음에도 최대 배출국인 미국이 이탈했고 개발 도상국에는 소멸 의무가 없어요. 게다가 비준국조차 배출량 거래 같은 말이나 꺼내며 진지하게 배출량을 줄이는 방향으로는 전혀 나아가지 않고 있죠.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대로 높아지면 해발 고도가 낮은 장소에 밀집된 세계의 대도시는 바다에 가라앉게 돼요. 자연 환경의 파괴는 재활용이나 에너지 절약 같은 말로 얼버무리는 사이에 수복이 가능한 시점을 지나 버렸지요. 지구에 사는 인간들 모두가 근본부터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만 해요. 하지만 어리석은 인류는 환경 문제가 대두된 1970년대부터 그 사실을 깨닫고서도 그 날을 뒤로 미루기만 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왔어요."

쿠조의 말은 '지구'라는 생명을 죽이려 하는 범죄자를 눈 앞에 둔 것처럼 격렬했다.

"강의 고맙게 잘 들었습니다, 쿠조 씨. 그렇다고 해서 누가 죽고 누가 살아 남을지 결정할 권리는 당신들에게 없습니다. 그런 짓이 용서되리라고 생각합니까?"

"용서한다든가, 용서받지 못한다든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자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 일을 해야만 해요. 누군가 결단을 내려야만 해요. 아무도 그렇게 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자연계의 균형을 유지하겠습니다. 그 뿐이에요."

주먹을 움켜 쥔 마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를 배신했어? 아빠의 뜻을 이어 받아 세계 평화를 위해 바이러스를 써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쿠조는 마키를 내려다 보며 예전과 변함 없는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마키, 아버님과는 생각이 다르지만, 이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세계 평화의 방법이란다."

"사람을 죽이면서 만드는 평화 따위는 진정한 평화가 아냐! 그러면 키라와 똑같잖아!"

마키의 외침은 희미한 웃음을 띠고 상황을 지켜 보고 있던 복면 멤버의 표정을 심각한 것으로 되돌릴 만큼 비통했다.

"마키 씨가 말하는 대로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손으로 운명을 펼쳐 나갈 권리가 있습니다. 설령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런데 한 발 앞서 인구를 줄이는 테러 행위로 해결하려는 당신들의 행위는 제가 보기엔 절대적인 악입니다."

"테러 같은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위와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우리들은 필요한 죽음과 필요한 삶을 제어할 거예요. 그렇기에 항 바이러스 약을 필요로 하는 거니까…. 뭐, 우리들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는 다음 세대가 판단하겠죠. 물론 그 때에는 L, 당신은 살아 있지 않을 테지만요."

상대를 부정하는 대화 내용과는 달리 L과 쿠조의 얼굴에는 각자 온화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이제는 됐겠지, 명탐정? 우리들도 이래봬도 바쁜 사람들이라서 말이야."

마토바가 과장스런 몸짓으로 손목시계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데이터를 넘겨 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L이 배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아차, 움직이지…."

복면 중 한 사람이 가로 막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L이 배에 감아 두고 있었던 것이 덜컥 덜컥 땅에 떨어졌다. 낙하와 동시에 그 물체는 강력한 빛을 뿜었다. 스트로보 탄이었다.

"제가 아무 준비도 없이 이 자리에 나올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한 세계에 L의 목소리가 울렸다. 처음부터 L이 꿰뚫어 보았던 대로, 테러에 특화된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총을 다루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스트로보 빛을 정면으로 보고 시야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제길! 저런 걸 어느 새 준비해 두고…!"

총을 들고 있어도 어디로 쏘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같은 편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쏠 수도 없었다. 총을 든 여러 명의 초보자를 상대로 할 때에는 우선 '혼란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L은 잘 알고 있었다. 회복되어 가던 마키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주사기였다. 하츠네가 떨어뜨린 것이다. 자신을 붙잡은 팔에서 힘이 빠진 것을 느낀 마키는 단숨에 손을 뿌리치고 그 주사기를 움켜쥐어 쿠조의 팔에 꽂았다. 마키는 분노로 타오르는 눈으로 쿠조를 노려보았다.

"믿었는데. 너 때문에 아빠가 죽었어. 너 따위는 죽어 버려!"

"마키 씨, 도망쳐야죠." L이 달려와 마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싫어! 저 여자를 죽일 거야. 놔!"

마키는 다시금 쿠조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복면 멤버는 점차 시력을 회복해 다시 L에게 라이플을 겨누려 했다. L은 "하는 수 없지요" 하고 중얼거리며 마키의 목 뒤를 눌러 단숨에 기절시켰다. 마키를 끌어 안은 L은 창고 안을 뛰어 다녔다. 폐창고에서 쓰레기인지, 잊히고 만 짐더미인지 알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에 가로막혀 조직 멤버는 좀처럼 라이플을 조준하지 못했다. L의 모습이 컨테이너 안으로 사라졌다가 도로 나타났을 때는 그의 손에 다시 스트로보 탄이 들려 있었다. 도망칠 새도 없이 멤버들은 다시 빛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 겨우 시야를 회복했을 무렵에는 이미 L과 마키의 모습은 사라지도 없었다.

"제길! 놓쳤어."

멤버 중 한 사람이 컨테이너의 배송 표를 보고 넋을 잃었다.

"뭐야, 이 컨테이너는? 오늘 옮겨 왔잖아."

"쓰지도 않는 이런 창고에 왜?"

멤버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라이플을 내리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복면을 벗은 마토바가 올백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면서 사람들을 치하했다.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뭐, 딸을 보균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소의 진전은 있었습니다. 그렇다 쳐도, 세계적인 명탐정 L은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군요."

"어쨌거나 이 쪽은 '이런 일'에는 초보들 뿐이니까요."

서투른 손놀림으로 라이플을 다루던 카가미가 복면을 벗고 땀을 닦았다. 원래는 환경 보호 단체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묶여 있던 스루가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포기한 듯이 주저앉아 있었다. 하츠네가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웅크려 앉았다. 미니 스커트 아래로 허벅지의 반 이상이 드러났지만 신경 쓰는 빛도 없었다.

"어머머, L이 당신은 구해 주지 않았나 보네. 뭐 배신했으니까 당연하지."

"으음. L과 같이 있기도 질렸거든. 이번에는 당신들에게 신세 좀 져야겠어. 그보다 팬티 보이는데."

"괜찮아. 닳는 것도 아니고."

쿠조는 거래를 마치고 술렁거리는 멤버들을 곁눈질로 살펴 보며, 자신이 바이러스를 맞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목숨 따위는 버릴 각오였기 때문에 차라리 바이러스 보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알려지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마음을 다잡은 쿠조는 멤버를 향해 손뼉을 쳤다.

"자, 소란을 알아 채고 경찰이 오기 전에 철수하죠. 아지트로 돌아가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해야죠."

"좋았어."

멤버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에게 들리지 않도록 마토바가 쿠조에게 귀엣말을 했다.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자네가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그 변화는 조금 전의 남자 L 때문인가?"

쿠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츠네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그 애에게 바이러스를 주사했지? 만약의 경우에는 L에게 놓으라고 말했잖아."

분노를 억누르며 캐물었다. 아직도 부족한 듯한 하츠네는 예리한 칼날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잖아. 뭐야? 연구소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 애한테 정이라도 들었어?"

하츠네는 비웃으며 단검 끝을 쿠조에게 향했다.

"어차피 이 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일 텐데."

   

 

ℒ 13-3

증오

  

YB 창고에서 도망친 L은 크레페 차로 도망쳐 넓은 파친코 가게 주차장 한 구석에 몸을 숨기듯이 차를 세웠다. 잠시 뒤 뒷자리에서 잠들어 있던 마키가 의식을 되찾았다.

"괜찮나요?"

마키는 입술을 깨물고서 바이러스를 주입당한 팔의 주사 흔적에서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L은 감정의 변화를 읽어 내려는 듯이 마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마키가 갑자기 차에서 뛰어 내리려 했다. 그러나 L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어디에 갈 생각입니까?"

"놔 줘! 저 여자를 죽일 거야! 믿었는데."

"당신이 단순한 증오만으로 쿠조 씨를 죽이려 한다면, 마키 씨, 당신은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L의 냉정한 말은 마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눈 앞에서 아빠가 죽었어. 그것도 무척 신뢰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해서. 엄마도, 아빠도 잃고서 외톨이가 된 내 마음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아뇨, 압니다."

L은 '그 날' 이후로 계속 가지고 다니는 와타리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저도 고아입니다. 그리고 나를 계속 지원해 주었던 와타리도 키라의 손에 죽었습니다. 저도 외톨이입니다. 그러니까 마키 씨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류자키…, 당신도 그랬구나."

와타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L의 눈동자에서 마키는 지금의 자신과 같이 아물지 않는 슬픔의 빛을 본 듯 했다. 마키는 처음 듣는 L의 과거에 머뭇거리며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범인 측이 마키 씨에게 바이러스를 주사한 것은 예정 외였습니다."

L은 평소처럼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적에게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를 넘겨 주지 않을 것, 마키 씨를 구하기 위해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 줄 사람을 찾을 것, 적이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를 얻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 낼 것…. 큰 일이군요."

손톱을 깨무는 소리가 한 층 커져서 차 안에 울렸다. 마키가 흠칫해서 바라보자 L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뭐야, 류자키…, 즐거워 보이는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고개를 저은 L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먼저 스루가 씨를 구해야겠군요."

조수석에 놓인 노트북에는 GPS 화상이 표시되었고, 그 중 한 가운데에 'S'라는 빨간 문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ℒ 13-4

전과

  

"이게 궁극의 살인 병기 데스 노트…."

테이블 중앙에 놓인 까만 노트의 주위에서는 모두가 손을 대기를 주저하면서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흉흉한 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데에 이름을 쓰기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쿠조는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처음으로 권총을 들었을 때와 같은 막연한 느낌을 맛보았다. 생명의 무게와 그것을 빼앗는 수단의 간편함이 서로 걸맞지 않는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노트의 존재를 반신반의하던 멤버들이었지만, 스루가의 입에서 FBI 장관이나 미국 대통령까지도 이 노트를 손에 넣으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자 그 효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HOW TO USE'를 보면 쓰기가 망설여지는데."

서브 리더인 요시자와가 노트 뒷쵸지를 펼쳐 거기에 적힌 영어 규칙을 번역해서 읽었다.

"'이 노트에 이름을 적은 인간은 가장 최근에 이름을 적은 때로부터 13일 이내에 다음 이름을 적어 인간을 계속해서 죽이지 않으면 그 자신이 죽는다'. 즉 한 번 여기에 이름을 적고 나면 평생 따라 붙는 사신의 게임이 시작된다는 뜻이군."

"그 뿐만이 아냐. '이 노트를 토막 내거나 태우거나 해서 쓸 수 없도록 만들면, 그 때까지 노트에 접촉했던 모든 인간이 죽는다' 라는데.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건드리지 말걸."

호기심을 보이며 제일 먼저 건드리고 만 하츠네가 입을 삐죽거렸다. 요시자와가 노트를 코니시에게 내밀었다.

"이봐, 코니시. 네가 죽이고 싶은 녀석의 이름을 적어 봐."

"어…, 시, 싫어요."

마토바는 떨어져 있는 채상에 앉아 노트에 대한 대응에 만전을 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회하고 있었다. 규칙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조직에 별 쓸모가 없는 하부 구성원에게 기입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원에게 알려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 없다. 한숨을 쉰 마토바는 지도자로서의 얼굴을 되찾고서 일어섰다.

"뭐, 우리들의 제１목적은 데스 노트가 아닌 항 바이러스 약입니다. 노트는 만의 하나의 보험으로 확보해 두지요. 13일 뒤에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소중한 멤버인 당신들에게 적게 할 수는 없습니다. 뭐, 여차 할 때에는 저 스루가라는 멍청한 남자에게 적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멤버들에게서 실소가 흘러 나왔다. 쿠조는 반응을 보며 일어섰다.

"그러면 조금 전의 행동을 총괄해 보도록 하죠. 감시 역 이외에는 전원 모여 주세요. 코니시 씨는 마이크로 칩의 데이터 분석을 우선시 하시고요. 어쩌면 자동적으로 이 쪽의 장소를 알려 주는 프로그램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독립된 컴퓨터로 열어 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총 15명 가량의 멤버가 마토바와 쿠조를 둘러싸고 모였다.

"먼저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계획이 성공에 이르는 제２프로세스의 단계를 맞았습니다. 니카이도가 죽기 직전에 L의 중개 역할인 와타리에게 연락을 하여 L이 개입하리라는 사실은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입니다. L의 개입에 의해 작전 성공률은 67퍼센트의 저하가 예상되었습니다."

거침 없이 설명하는 쿠조에게 멤버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토바의 실질적인 오른팔이자 그늘 속의 작전 참모로 움직이고 있는 쿠조에 대한 멤버들의 신뢰는 두터웠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 마키, 데스 노트를 이 쪽에서 확보하고 L을 죽이는 것이었으나 역시나 L은 생각대로는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데스 노트는 우리 손에 들어왔고 마키를 바이러스 보균자로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나머지는 FBI…, 글쎄요, FBI가 인질로서 기능을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 바보 같은 남자는?"

"묶어서 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 쪽 장소가 알려지거나 하지는 않겠죠?"

"구두에 발신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차에 태울 때 신체 검사를 해서 발견했으니 괜찮습니다."

"과연 L, 마음을 놓을 수 없군요. 앞으로 L은 우리들이 있는 곳을 알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법을 쓸 겁니다. 각자 방심하지 말고 아지트에 드나들 때에는 주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코니시 씨, 데이터 해석은 잘 되어 가나요?"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던 코니시가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리며 몇 번씩 같은 조작을 거듭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숨겨진 프로그램은 없었습니다만, 데이터 앞에 프로그램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게 좀 골치 아픕니다."

"그 말씀은?"

"패스워드가 제어되어 있을 뿐인데 잘못 입력을 하면 모든 데이터가 삭제되어 버려요."

쿠조는 오른손을 관자놀이에 대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L이 뭔가 다시 손을 써 두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해석을 부탁드리겠어요."

"자, 그러면 앞으로 우리들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쿠조 씨."

마토바가 재촉하자 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마키와 스루가를 속일 필요가 없어진 이상 이제부터는 정공법으로 갑니다. 그 아이가 보균자가 된 이상 L은 잠복기 동안에 항 바이러스 약을 개발해야만 합니다. L은 주어진 임무를 반드시 수행할 거예요. 그 애를 두고 보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 수 있는 시설도, 기술자도 한정되어 있지."

"즉 그 애를 붙잡아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도 되고, 그 쪽이 만들기를 기다려 빼앗아도 된다는 셈이군."

멤버들의 낙관적인 모습에 쿠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아직 세계 제일의 명탐정과 상대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공포도, 부담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 점이 답답했다. 사실 그 창문에 몰래 도청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린 멤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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ℒ 12-1

농담

  

아키하바라 뒷골목의 몹시 수상쩍어 보이는 가게에서 L은 소형 발신기와 무슨 소재인지도 알 수 없는 부품을 사 들이고 있었다. 마키는 주위 남자들과 L을 열심히 번갈아 보다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자키는 이런 장소에서는 별로 위화감이 없네."

"잘 모르겠지만 칭찬은 아닌 것 같군요."

아무래도 L은 상처 받은 듯 했지만 표정으로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가득 찬 봉투를 끌어안은 L은 메이드 카페에 들어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인님" 이라는 말과 함께 파르페를 가져온 메이드복 차림의 소녀들을 L은 불가사의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흥미는 파르페로 옮겨 갔다. 파르페 용의 기다란 스푼을, 역시나 불필요할 만큼 기다란 손가락의 끝 부분으로만 집어 드는 모습은 마치 위채로운 균형 게임을 하는 듯 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마키는 아슬아슬한 기분을 맛보았지만 L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능숙하게 생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키 씨는 초등학교에는 안 다니나요?"

"응. 아버지랑 같이 세계를 돌아다녔으니까…. 하지만 이래봬도 중학교 2학년까지의 공부는 다 마쳤다고."

마키는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이내 불안하게 표정을 흐리더니 L에게 속삭였다.

"있지, 류자키, 역시 학교는 다니는 편이 좋을까?"

L은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생각한 뒤 마키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혀 위에는 파르페의 체리 꼭지가 매듭진 상태로 얹혀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학교에는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L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마키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불안해졌어."

"마키 씨는 저를 낙담하게 만드는 데에는 달인 같군요."

"농담이야."

마키는 오사카 사람 답게 L의 말을 얼른 되받아 쳤지만 L은 진지한 표정을 허물지 않았다.

"저는 농담은 잘 못합니다."

파르페를 다 먹은 L은 봉투 안에서 발신기를 꺼내어 모두 일정한 주파수로 조정한 뒤 거기에 접착 테이프를 붙였다.

"자, 이걸로 준비가 다 됐습니다. 밖으로 나갈까요. 좀 도와 주세요."

큰 길로 나선 두 사람은 신호로 정차 중이던 차의 뒤쪽 범퍼 안쪽에 차례로 하나 하나 발신기를 붙였다.

 

 

ℒ 12-2

탈환

  

"스루가 씨, 기분은 어떠신지?"

"아, 최고야."

창고에 감금된 지 이틀 째인 스루가는 상태를 살피러 온 쿠조에게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볼 일이라도 있어? 이미 나한테는 인질 이상의 이용 가치는 없을 텐데. 그것도 류자키가 배신한 나를 구해 줄 마음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겠지만."

쿠조는 빼앗아 두었던 스루가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FBI 본부에서 당신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요. 연락이 끊겨서 당신을 수색하기 시작해도 곤란하니까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들에게 잡혔다는 일도, 노트를 빼앗겼다는 일도 잘 얼버무려 주세요.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는 말은 도저히 솔직하게 보고할 수 없을 테지만요. 자, 연락용 번호를 알려 주세요."

잠입 수사를 할 때에 가지고 들어가는 휴대 전화는 언제 빼앗겨서 악용될지 모르기 때문에 연락처를 메모리에 등록시켜 두지 않고 기록도 모두 지워 두었다. 그런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쿠조는 전화의 통화 음량을 최대로 해 두고 스루가가 연락처 번호를 말하길 기다렸다. 아무 번호나 걸어서 대화하는 척할 수도 없다는 뜻인가 하고 체념한 스루가는 번호를 불렀다.

"Y286으로부터, 보고입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처음부터 불쾌하다는 목소리였다.

"늦었군,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죄송합니다. 좀처럼 혼자 있을 때가 없어서요."

"또 그 말인가. 어젯밤에는 타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을 텐데?"

"그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변명은 이미 지겹게 들었네. 원래 자네를 파견한 이유는 레이랑 나오미와 개인적인 친교가 있어서 L에게 접근할 이유를 붙이기 쉬웠기 때문이야, 자네의 잠입 수사에서 진전이 보이지 않으면 다음 작전으로 옮겨 가도록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본부에선 커지고 있어.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L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괴롭게 변명을 하는 듯한 스루가의 모습을 쿠조는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네. 자네의 보고는 진짜 데스 노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다음 작전으로 들어갈 테니 자네는 L에게서 벗어나 다시 본부로 돌아오도록."

"아… 아니, 하지만!" 스루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는 끊어졌다.

"L도 큰 일이군요. 바이러스 보균자인 마키를 데리고서 우리들과 FBI 양 쪽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스루가는 뻔뻔스럽게 동정하는 쿠조를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 보았다.

"그러나 L이 잡히면 자동적으로 그 애는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될 거야. 너희들도 손 쓸 수 없겠지. 유감이로군."

스루가는 한껏 허세를 부렸지만 쿠조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우리들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줄 아나 보죠? "

 

쿠조가 방으로 돌아오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코니시가 의아하다는 소리를 내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어, 고장…인가?"

화면이 헐레이션을 잃으킨 것처럼 새하얘지더니 이윽고 장식적으로 꾸며진 문자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봐, 이 쪽 컴퓨터로! 이거 설마…."

실내에 있던 컴퓨터 네 대 모두에 그 문자, 알파벳 'L'이 나타났다.

"블루십 여러분, 간밤에는 훌륭히 환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계 변환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L! 대체 어떻게 이 장소를?"

쿠조가 새파래진 얼굴로 멈춰 섰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건 제가 L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는 듯 L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그 외에도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과 얼굴입니다. 마토바 다이스케 씨, 요시자와 타모츠 씨, 미사와 하츠네 씨. 해외에서도 활약하시는 모양이더군요."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그게 뭐? 데스 노트는 우리 손에 있어."

요시자와가 협박하는 듯한 말투로 컴퓨터를 향해 위협했다.

"제 손에는 데스 노트가 한 권 더 있습니다."

블루십 멤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 권 더 있다고?"

"여러분 모두 사쿠라 TV의 '두 번째 키라'를 아시겠지요. 키라는 두 사람 있었습니다. 즉 데스 노트도 두 권 있었다는 뜻입니다. 제 손에는 노트가 한 권 더 있습니다."

말 없이 듣고 있던 마토바가 입을 열었다.

"요구는 뭔가, 류자키 군, 아니, L?"

"스루가 씨를 풀어 주십시오."

논외라는 듯이 마토바는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인질을 우리가 놓아 줄 거라고 생각하나?"

"마토바 씨, 저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는 당신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제 이름을 모릅니다. 선택은 하나, 아닙니까?"

바로 전 날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듣게 된 마토바는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L, 스루가 군은 자네를 배신했어. 그런 녀석을 구하려는 건가?"

"저는 스루가 씨를 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 말에는 모순이 있어. 스루가를 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스루가를 놓아 달라. 이 무슨 말인가."

"제가 스루가 씨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배신한 스루가 씨에게 제 손으로 제재를 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10분 이내에 석방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는 마토바 씨, 당신부터 죽이겠습니다."

 

"류자키, 미안…."

풀려 나온 스루가는 마중하러 온 크레페 판매 차에 올라 타고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가 말입니까?"

L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핸들을 잡고 미행을 확인하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목적을 숨기고 네게 접근했던 일이나, 쿠조에게 속아 넘어간 일이나…."

"아뇨, 고맙습니다." "뭐?"

L은 꼬치에 꿴 붕어빵을 스루가에게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스루가 씨와 쿠조 씨가 움직여 준 덕분에 스루가 씨의 목적, 쿠조 씨의 참모습, 쿠조 씨가 속한 조직 등을 모두 알게 됐습니다. 마키 씨도 납득할 만한 형태로."

당장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짚이는 구석도 있다. L이 노골적으로 스루가와 쿠조의 감시 태세에 차별을 두었던 점, 기계 제어실만은 감시 카메라가 없었던 점…. 지금 생각하면 쿠조와 스루가가 손을 잡기 위한 조건이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는 소리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그 녀석들의 아지트를 알아 냈지? 내 신발에 붙어 있던 발신기는 못 쓰게 되어 버렸는데."

"그 발신기는 덫입니다. 진짜는 여기에 있습니다."

L이 가리킨 곳은 스루가의 배였다.

"뭐야, 그게? 내 배라니…, 앗! 설마?"

YB 창고로 향하기 전에 달달한 커피를 너무 마셔서 위장이 부대낀다고 말한 스루가에게 L이 '위장약'이라며 먹인 캡슐이 있었다.

"불용성 캡슐 안에 발신기를 넣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토하세요."

달달한 커피를 먹인 것도 모두 예정대로였다는 뜻인가…하고 생각하던 스루가는 새삼스럽게 이물감이 느껴져 배를 문질렀다.

"그들의 아지트를 파악한 뒤 도청기를 설치하고 가까운 호텔의 고층 방에서 감시하면서 구성원들의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범죄자 데이터를 조합하기 위해 스루가 씨의 ID로 FBI 정보망에 접속했습니다."

스루가는 흘려 들을 뻔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하지만 내 ID는…."

"물론 스루가 씨의 본명, 스기타 히데아키의 ID와 패스워드입니다."

스루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L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그럼 YB 창고에 준비해 두었던 그 스트로보 탄은? 그 녀석들이 습격한 뒤에는 계속 나랑 같이 있었잖아. 언제 그런 걸 준비해 둘 시간이 있었어?"

L은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곁눈질로 스루가를 바라보았다.

"뭐야, 추리하라는 소리냐? 잠깐 있어 봐."

스루가는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습격 뒤에 준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습격 전에 그 장소를 알 수 있었다면….

"혹시… 기계 제어실에서 나와 쿠조가 나눈 대화를 도청했나? 하지만 그 방에는 감시 카메라도, 도청기도 없었는데."

"아니, 대화는 들었지만 도청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야?"

"사실은 휴대 전화 한 개를 기계 제어실에 깜빡 잊어버리고 와서 그 휴대 전화에 전화를 걸었더니 우연히 스루가 씨의 대화가 들려 왔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도청은 아닙니다."

즉, 그대로 고스란히 갚아 주었다는 소리로군…, 스루가는 무심결에 손톱을 물어 뜯으려다가 L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황급히 손을 내렸다.

"화약 제조 회사, 운송 회사, 그리고 항만 관리국의 시스템에 침입해서 거래 일시까지 컨테이너를 실어 두었던 겁니다."

거침 없는 설명에 스루가는 놀라움을 넘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두 손 들었어. 처음부터 모두 꿰뚫어 봤던 거군."

"저는 L이니까요."

L의 말은 간결했다. 물론 그것은 '세계 제일의 명탐정'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말이었지만, 자랑스러운 듯이 들리지는 않고 오히려 쓸쓸함마저 느껴졌다. 스루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L이 혼자서 체스를 두던 모습이 떠올랐다. 적과 아군 사이를 오가고 있던 말…, 그건 나 자신이었던 셈인가 하고 이제 와서야 깨달았다.

"키라 사건이 종료된 뒤 보고서를 FBI에 제출하자마자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경계하지 않는 편이 이상하겠지요? 당신이 데스 노트의 조사 및 탈취를 위해 제게 접근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데스 노트에 대응하기 위해 가명을 쓰리라는 사실도."

도중에 L은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 있는 마키의 상태를 살피려고 돌아 보았다. 마키는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그 입에서 조그맣게 "아빠…" 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L은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마키에게 모포를 덮어 주었다. 예전에 아버지를 떠올리게끔 하는 사람이 L에게 그렇게 해 주었던 기억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예상치 못했던 일은 상대가 마키 씨에게 바이러스 주사를 놓아 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들은 항 바이러스 데이터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마키 씨가 증세를 보이기 전에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행동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는 뜻이지요."

"반대로 적이 선택할 여지는 늘어났다는 뜻이군. 지금까지처럼 항 바이러스 약의 데이터를 빼앗아도 되고, 우리들이 항 바이러스 약을 만들기를 기다려 빼앗아도 되니까."

그래, 나 때문에… 하고 스루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원래 그들은 살인 바이러스를 갖춤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저에게 어떠한 요구라도 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데스 노트를 가지고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루가 씨가 잡혀 준 덕분입니다."

"전화위복…인 셈인가. 하지만 쿠조는 아직 뭔가 손 쓸 여지가 있다는 듯이 말했으니까 방심할 수는 없겠어."

"스루가 씨,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스루가 씨가 있어 준다면 마음이 든든하니까요."

마음이 든든해? 농담이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스루가는 이미 자신이 취할 행동을 정하고 있었다.

"아아, 그럴 작정이야. 마키가 바이러스 주사를 맞게 된 것은 내가 쿠조에게 속아 넘어간 탓이니까. 게다가 어차피 나도 잠입 수사 임무에서 떨려난 참이거든."

L을 대신해 핸들을 쥔 스루가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나를 일단 적의 손에 넘겨 주었던 것도 L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일부러 빚을 만들어서 나를 장기 말로 움직이기 위한….

 

"생각 탓인가, 뭔가 위화감이 들어. 저 녀석들이 먼저 선수를 쳤나?"

스루가가 운전석에서 몸을 내밀었다. 블루십과 전면 대결을 앞두고 필요한 도구를 갖추기 위해 키라 대책실 근처로 돌아왔을 때였다. 잔업을 마친 회사원이 피곤한 표정으로 보도를 걷고 그 옆으로 택시가 오가는, 변함 없는 도시의 밤 풍경이었다. 그러나 스루가는 거기에서 평소와 다른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고 주위로 눈길을 주었다. 마키를 남겨 두고서 스루가와 L은 키라 대책실로 다가갔다.

갑자기 그늘진 곳에서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이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웅크려 앉은 스루가는 지면을 짚으면서 오른발로 상대의 어깨를 걷어차 가로막고, 그대로 상체를 틀어 얼굴에 날카로운 발길질을 먹였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은 처리했다. 다른 한 사람은 L과 대치하고 있었다. 곤봉을 치켜 들고서 달려드는 상대의 앞에서 L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뒤집힌 개구리처럼 지면에 벌렁 드러누웠다. '프로'가 상대인 경우에는 예상 밖의 행동으로 나가야 한다. 어지간히 실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한, 정형화된 공격과 방어에서 벗어난 움직임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주저하게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L은 길가에 떨어져 있던 우산을 붙잡아 둥글게 휜 손잡이 부분을 상대의 왼발에 걸었다. 넘어뜨리기에는 부족했지만 한 순간이라도 움직임을 흐트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첫 번째 사람을 쓰러뜨린 스루가가 그 기세 그대로 달려들어서 쓰러뜨렸다. 스루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상대에게서 헬멧을 벗겨 냈다.

"너는 FBI의?"

얼굴을 들키자 상대는 극도로 당황해 "히익!" 하고 프로답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는 기척이 나자 스루가와 L은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제길! 내 잠입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더니, 다음 작전으로 들어가 버렸어. 같은 FBI끼리 습격을 하다니."

"데스 노트 회수 부대겠지요. 헬멧을 쓰고 있는 이유는 만의 하나 '사신의 눈'을 피하기 위한 대책이겠지요."

"나는 명령을 위반하고 L과 손을 잡은 박쥐라는 뜻인가. FBI와 블루십…양 쪽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거냐!"

스루가는 그렇게 말하며 과장스럽게 한탄하더니 차를 발진시켰다.

"류자키, 너 경시청과 합동 수사를 했었지. 그 녀석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하고 협력을 요청하면 어때?"

조수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던 L이 이윽고 딱 잘라 선언했다.

"아뇨, 이번 임무에는 어떤 조직의 힘도 빌리지 않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심산이야? L이라고 하면 전 세계의 경찰과 첩보 기관을 움직이고, 언제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를 표면에 내세우는 게 철칙 아니었나?"

로스앤젤레스 BB 연쇄 살인 사건에서 나오미를 장기 말로 썼던 것처럼, 과거에 L이 해결했다고 하는 방대한 사건 파일 중에서 L이 진두에 서서 지휘한 안건은 '공식적으로는' 한 건도 없었다(실제로는 '류자키' 외에도 수백은 될 듯한 L의 '탐정 코드'를 써서 오히려 일반 사립 탐정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L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몸을 지키는 일, 즉 '세계 평화'에 직결되어 있는 이상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L의 수사 자세를 두고 각 국의 수사 기관, 첩보 기관이 너무나도 비밀주의적이고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 제멋대로인 행동이라고 여기며 불신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L은 잠시 동안 오른팔의 망가진 시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표정이 거의 없는 그 얼굴은 쓸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제 유일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저는 현실적인 세상을 모른다고…. 그러니까 저는 이 마지막 임무를 어떤 조직의 힘도 빌리지 않고 제 손으로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개인적인 바람이지요. 스루가 씨, 손을 떼려면 지금 밖에 없습니다."

스루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대를 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뒷자리에서 웅크리고 꼼짝도 않는 마키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셋이서 쫓기는 입장이 된 것 같군. 레이와 나오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화려하게 가 볼까."

등 뒤에 FBI의 추격 차량이 나타났다.

─이 앞에서 왼쪽입니다─.

크레페 차의 추천 루트는 일방 통행의 좁은 길목을 역주행하라는 지시였다.

"이번 추적자는 FBI입니다. 도주 패턴의 난이도를 높이겠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L이 말했다. 스루가는 거의 직각으로 굽어질 기세로 골목에 들어섰다. 반대 방향에서 차가 눈 앞에 닥쳐 왔다.

"큭!"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는 스루가의 옆에서 L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스루가 씨가 조금 전에 썼던 다리 기술은?"

"아, 그거? 그건 카포에라야. 남미 출신인 녀석에게서 약간 배운 정도지만 실전에 쓰기 좋은 무술이지."

"재미있는 동작이었습니다. 나중에 제게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주저 없이 일방 통행의 역주행을 쫓아 온 차가 등 뒤로 다가왔다. 스루가는 보도에 올라가 오픈 테라스의 카페 의자를 들이 받으면서 대답했다.

"이 녀석들을! 따돌리고 나면!"

 

스루가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던 블루십 아지트에서는 멤버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역시 세계 제일의 명탐정 따위를 상대하는 게 아냐. 이대로는 언제 전원의 이름이 알려져 노트에 적힐지…."

한 남자가 겁을 먹은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래서야 우리들이 아무리 살인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해도 비장의 카드로 쓸 수는 없어. 바이러스를 쓰자마자 마토바 대표님과 요시자와 씨의 이름이 적힐 테니까."

쿠조는 노트가 두 권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후회하면서 다음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의 탈취였지만 지금은 데스 노트 대책을 최우선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다행히 니카이도의 휴대 전화는 아직 우리들의 손에 있습니다. 딸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L이 있을 거예요. 이름을 적을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덮치면 노트는 무력화시킬 수 있어요."

쿠조의 발언에 블루십 멤버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조 씨. 그, 여자애의 휴대 전화 GPS 말인데요…."

코니시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죠?" "이걸 보십시오."

화면에 표시된 GPS 화상 위에서 마키의 휴대 전화 주파수를 가리키는 빨간 점이 50군데도 넘게 반짝이며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요?"

멤버들도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아마도 여자애의 휴대 전화 주파수에 맞춘 발신기를 여러 개 준비해서 상관 없는 차에 몰래 붙여 놓은 게 아닐까 하고…."

또 다시 L이 한 발 앞서 갔다는 사실 앞에서 전원이 침묵에 잠겼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을 상대한다는 현실을 냉혹할 정도로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쿠조는 결연히 고개를 들어 마토바를 보았다.

"마토바 대표님, 예의 계획을 실행에 옮겨도 괜찮을까요?"

비오톱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듣고 있던 마토바가 느릿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의 시선이 구원을 바라듯이 쿠조에게 모였다.

"쿠조 씨, 예의 계획이라니…."

"더 이상 우리들 '탐정 놀이'의 초보자가 뒤쫓는 건 그만 두겠습니다. 그들을 뒤쫓는 건 전문가에게 맡겨 두면 돼요. 바이러스 보균자가 된 여자애를 데리고 있다는 점을 노려서 말이죠."

"하지만 자칫하면 노트에 이름을 적히게 되는데…."

젊은 멤버는 불안한 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점도 괜찮아요. 우리들의 이름 따위는 생각해 낼 틈도 없을 만한 상황에 그들을 몰아 넣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