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 ~L; Change the World~(새로운 시작) -제２장- 작전

ℒ 17-1

침입

  

시스템 강제 개입 경고

…7월 13일 02시 32분 53초…

…경유 서버 개수 5…

…방화벽 돌파 3/5…

…개찬 로그 수복⇒추적 OK…

…개입자 확인

 

보안 체크를 하고 있던 니카이도 교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개인적인 친교도 있는 와타리에게서 제공 받은, 와미즈 하우스의 알파벳 'Q'가 만들어 낸 해킹 방어 시스템이 해외를 경유하여 교묘한 해킹을 시도한 상대를 지정하고 있었다.

"연구소 내에서 접속…."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 없이 몇 번이나 체크를 거듭한다. 변함 없는 결과에 니카이도는 모니터의 표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밤 11시가 넘어 연구소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니카이도는 뭔가를 찾고 있기라도 하듯 시선을 정처 없이 돌렸다.

─광학 현미경을 쓰지 않으면 바이러스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셈인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쿠조가 끓여 주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식어 버린 찻잔을 손에 든 채 마시지도 않고 바라본다. 갑자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감시 영상에는 라이플을 손에 든 복면 집단이 연구소에 침입하려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화면을 전환하자 경비원은 경비실에서 깊이 잠든 듯 쓰려져 있다. 아무래도 약품으로 재운 모양이었다. 니카이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용법에 따라서는 핵 병기보다 더 강력한 병기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을 다루는 이상 이런 사태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었다. 니카이도는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한 건의 메일을 보낸 뒤 Q가 설치해 둔 긴급 사태용 시스템으로 컴퓨터에 남은 모든 데이터를 소거했다. 간발의 차로 침입자가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니카이도 교수님, 바쁘실 테지만 잠시 시간 좀 내 주실까요."

선두에 선 리더 격인 남자가 흉흉한 모습과는 달리 정중한 태도로 방문을 알렸다.

"면회 약속은 하지 않았었는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목적을 마치고 나면 곧 돌아갈 겁니다."

"목적…, 이라고 하면?"

리더 격인 남자는 손님용 소파에 앉았고, 그 대신 라이플을 들고 등 뒤에 선 남자가 대답했다.

"눈치 있게 움직여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목숨이 아까우면…이라는 뜻인가. 이런 연구를 하고 있으니 언제든 각오는 되어 있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오늘 밤에는 손님을 한 분 초대했지요!"

미니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한 걸음 나서더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모습으로 밖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설마?!" 니카이도는 낯빛을 바꾸며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싫어, 잠깐! 놔…, 놓으라니까!"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져서 찾으러 왔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요!"

붙잡힌 마키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면서 남자의 앞으로 끌려 나왔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폭한 짓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군요. 얌전히 따라 주시죠. 어쨌거나…."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리며 등 뒤를 돌아 보았다.

"이 쪽에는 혈기왕성한 사람이 있어서요."

등 뒤에 선 젊은 멤버가 은근한 웃음을 흘렸다. 니카이도는 소파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목적은 바이러스인가. 이런 방식이 아니고선 일을 실현시키지도 못하는 놈들의 손에 넘겨 주면 어떤 터무니 없는 짓을 벌일지 상상이 가는군."

"터무니 없다…고요?"

남자는 니카이도의 말을 되풀이하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복면 너머로 보이는 입가에 웃음을 담은 채 니카이도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명치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니카이도는 휘청거리며 의자에 쓰러졌다.

"정부나 미국에게 마음대로 휘둘릴 걸 알면서도 이런 '병기'를 만들어 낸 당신 정도는 아닌걸요."

"아니야! 아빠는 병기 따윈 만들지 않아. 거짓말쟁이! 이것 놔!"

꼼짝 못하도록 등 뒤로 손을 붙들린 마키가 아버지에게 가려고 몸을 틀었다.

"아이, 정말. 조용히 좀 해 줄래. 난 어린 애 목소리는 아주 싫어한다구. 왠지 초조해진단 말야."

젊은 여자가 초조한 듯이 허리에 찬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길이 잘 든 칼날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니카이도는 머리를 흐드러뜨린 채 입술을 깨물고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러스와 항 바이러스 약은 각각 다른 보관고의 초저온 조에 보관해 두었다. 열기 위해서는 내 패스워드와 생체 인증이 필요해."

"그러면 안내해 주실까요."

"아빠, 넘겨 줘선 안 돼!"

마키의 목소리가 허무하게 울렸다. 라이플을 등 뒤에 달고 보관고를 향해 걸어가면서 니카이도는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항 바이러스 약이 완성된 것은 어젯밤이다. 아직 어디에도 보고하지 않았어. 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흘러나간 거지."

"이런, 바이러스학의 권위자인 교수님도 감염원을 알아 내기는 곤란하다는 겁니까?"

남자는 유쾌한 듯이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보관고에 다다른 니카이도는 복면을 한 남자에게 하는 수 없이 바이러스 앰플을 건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관고. 니카이도는 항 바이러스 약의 앰플을 들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걸 쓰게 되면 세계는 끝난다….

니카이도는 건네기를 망설이며 물었다. "어디에 쓸 작정이지?"

"걱정 마시길. 세계 평화를 위해 사용할 테니까요."

리더 격인 남자가 시치미를 뗀다. 니카이도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세계 평화란, 너희들이 말하기에 허울 좋은 세계 평화겠지. 법을 무시하고 범죄자를 죽였던 키라라는 녀석과 다를 바 없어."

복면을 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라와 다를 바 없다…, 그 말은 우리들에게 칭찬이나 마찬가지군요. 이상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에선 키라에게 뒤지지 않지요."

그 말을 들은 니카이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조용한 결의가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키가 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선 안 되지. 최후의 순간까지…."

니카이도는 자신의 각오를 확인하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손에 든 항 바이러스 약 앰플을 바닥에 내던지며 라이플을 든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뜻밖의 행동에 상대의 손가락이 엉겁결에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메마른 총성이 밀폐된 보관고 안에 울리면서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쏘…, 쏘아 버렸어. 내, 내 탓이 아냐. 다, 당신이 달려 드는 바람에."

남자는 사람을 쏜 것은 처음이었던 듯 당황해서 라이플을 떨어뜨렸다. 총탄은 니카이도의 가슴을 관통했다. 숨이 끊어질 듯한 상태에서 니카이도는 마지막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항 바이러스 약의… 데이터는… 모두 파기되었다. …내가 죽으면…, 만들 수… 없어."

니카이도의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며 천천히 쓰러졌다.

"아빠!"

아버지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어쩔 수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마키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을 깨닫고는 얼른 뿌리치고 달려갔다.

"이봐! 거기 서!"

마키는 붙잡으려는 손을 피해 몸을 웅크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습격자들이 라이플을 들고 있어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마키는 보관고의 문을 닫고 옆에 있던 빗자루를 문고리에 끼워 넣어 출구를 막았다.

"문을 부숴 버려!"

남자들이 몸을 부딪쳐 문을 열자 이미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이다! 위로 올라갔어."

"출구에는 감시를 붙여 놨어. 놓치지 마라!"

뒤를 쫓던 남자들이 계단으로 발을 내민 순간 시야가 강렬하게 가로막혔다. 마키가 계단 위 바로 가까운 거리에서 소화기를 분사했던 것이다. 피어 오른 연기로 시야가 막힌 가운데 남자들이 더듬거리며 올라가려 하자 이번에는 소화기 자체가 나뒹굴며 그들을 덮쳤다.

"우왁!"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튀어 오른 세 대의 소화기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간신히 진정되었을 무렵에는 또 다시 딸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방 안을 샅샅이 뒤져 봐!" "알겠습니다."

남자들은 점차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하나씩 걷어차 열어 보았다.

"이 안에서 소리가 났어!" "열어!"

그 곳이 동물 사육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세 좋게 뛰어 든 남자들은 갑자기 누군가가 날아들자 흠칫 물러섰다.

"우왁, 원숭이다!"

우리의 문에서 열려 풀려 나온 원숭이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제길, 더는 못 참는다!"

실컷 원숭이에게 쥐어 뜯긴 남자가 복면을 벗어 던지고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무렵 마키는 아버지의 연구실로 숨어 들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가운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겹치면서 억누르고 있던 오열이 솟구쳤다. 마키는 가운을 가만히 매만지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연구가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빼앗을 수 있는 바이러스를 다루는 이상은 아버지도, 마키도 목숨의 위협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말을. 그리고 그럴 때에는 마키 스스로 자신의 목숨과 세계를 지켜야만 한다는 말을.

"마키, 혹시 만의 하나의 일이 벌어지면 금고 속에 있는 걸 꺼내서 도망쳐라. 네가 세계를 구해야 해."

아버지의 말을 가슴 속으로 되새기면서 마키는 금고를 열었다.

"아빠…, 이건 또 뭐야?"

오사카 출신 답게 마키가 불쑥 내뱉은 말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곰 인형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일순 멍하니 걸음을 멈추고 말았지만 추적자의 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굳게 마음을 먹고 홀로 고개를 끄덕인 마키는 금고로 뛰어 들어 안쪽에서 문을 닫았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따라 잡은 남자들이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역시 어린 애가 생각하는 거라곤. 금고로 도망쳐서 어쩔 작정이냐."

마지막으로 유유히 나타난 리더 격의 남자가 지시를 내렸다.

"독 안에 든 쥐로군요. 금고 번호는 조사하면 금방 알 수 있겠지요. 요시자와, 어서 붙잡으세요."

"알겠습니다." 요시자와라고 불린 남자가 다시 금고를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자, 나와라. 듬뿍 벌을 줄 테니까."

실컷 골탕을 먹었던 요시자와는 경계하면서 한 걸음씩 금고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이내 얼빠진 얼굴로 돌아왔다.

"마토바 대표님, 안에… 빠져나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마토바는 과장스럽게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당했군요. 딸은 지하 미궁으로 도망쳐 버린 건가요."

"뒤쫓을까요? 마토바 대표님." "뭐, 됐습니다."

마토바는 복면을 벗으며 소파에 앉았다.

"코니시 군, 니카이도 교수가 항 바이러스 약의 데이터는 모두 파기했다고 했지요?"

"아, 예…."

교수의 컴퓨터 데이터를 체크하고 있던 코니시가 안경 안쪽의 심약해 보이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소거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데이터 수복은 불가능하겠어요."

마토바는 그리 당황한 빛도 없이 중얼거렸다.

"바이러스가 테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연구 성과를 완전히 없애 버렸을 리는 없습니다. 틀림 없이 데이터는 다른 곳에 있을 텐데, 맡길 만한 곳이라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존재, 딸…일까요…?"

요시자와의 말에 마토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탈출구를 만들어 두었을 정도이니, 딸이 도망친 곳에 어떤 협력자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중, 삼중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겠어요. 우선은 딸이 도망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속으로는 부하의 한심스런 실수에 혀를 차면서도 마토바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마토바 대표님, 바이러스는 손에 넣었습니다. 이게 있으면 이제 계획을 실행해도 되지 않을까요?"

요시자와가 태평한 소리로 말하자 마토바는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짓을 하면 당신들이나 새로운 세계에 필요한 인재까지 희생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까지 계획에 따라 준 당신들을 바이러스의 위험 앞에 내세울 수는 없어요!"

"마토바 대표님…."

"요시자와, 우리들이 하려는 일을 단순한 테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고매한 이상 아래 진행되고 있는 계획을 더럽힐 만한 행위는 이 내가 용서치 않아요."

거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마토바인 만큼, 부하를 아끼는 그 태도는 효과적으로 부하의 사기를 북돋우는 결과를 낳았다. 마토바에게 있어 조직의 인간은 어차피 이용 가치가 있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효한 수단으로서 부려 먹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진정한 이유를 알려 줄 수는 없었다.

"마토바 씨, 저 시체는 어쩔까요? 내일이 되면 다른 연구원도 올 텐데요."

복면을 쓴 하츠네가 단검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따분한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없어서 불만인 모양이었다.

"이 곳은 다행히 '레벨 4'의 실험 시설입니다."

마토바는 니카이도의 의자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실험 동물과 같이 소각 처분해 버리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니카이도 씨는 한동안 여행이라도 간 것으로 하지요."

 

  

ℒ 17-2

일

  

L의 눈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두 개의 산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경단이며 양갱, 만쥬와 사탕을 L의 독자적인 미 의식에 따라 쌓아 올린 스위트 타워. 타워 꼭대기에는 '판다의 행진'의 판다가 마치 행진이라도 하듯이 한 줄로 서 있다. 또 하나는 휴대 전화의 산이었다. 각각 뒤에는 각국 수뇌, 첩보 기관의 대표를 비롯해 종교 지도자와 세계적 기업의 최고 경영 책임자, 마피아 보스 등 실질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여러 이름이 무작위로 적혀 있었다. L 전용 핫라인이다.

"지금 교회에서 나온 남자를 주목해 주세요. 그 남자가 수배 중인 성직자 연쇄 살인범입니다. …예, 확률은 86퍼센트입니다만 그는 살인 기념품인 유해의 일부를 저 교회의 지하 납골당에 숨겨 두고 있습니다."

"DSGE(대외 치안 총국)에서 의뢰 받았던 조안 왕비 사고사에 관한 조사 말입니다만, 저 L은 그녀의 요트 전복 사고는 역시 암살이라는 증거를 잡았습니다."

"케이만 제도의 비밀 계좌는 알고 있습니다. 그 쪽에서 계좌의 입금 기록과 몸 값의 지불 금액을 맞춰 봐 주십시오. 날짜, 시간, 금액 모든 것이 일치할 겁니다. 계좌의 명의자는…."

왼손으로 휴대 전화를 들고 상대에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로 나누어 말하며 와타리에게 집중된 '미처리' 안건을 차례로 처리해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L의 오른손은 끊임 없이 스위트 타워로 뻗었고, 판다들은 웃는 얼굴로 마지막 행진을 하며 연달아 L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안건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L은 '처리 완료'라고 적힌 쓰레기통에 파일과 함께 휴대 전화를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냥 버리면 되나?"

완전히 심부름꾼이 된 스루가는 앞치마를 두르고 작전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예. 이제 저에게는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머지는 다른 L이 맡아 줄 겁니다."

스루가는 조사원의 표정으로 돌아가 L의 구부정한 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키라 대책실에 잠입한 지 이틀, 달리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래도 눈 앞의 이 기묘한 남자가 'L'인 것 같았지만, 때때로 말 끝에 붙는 '다른 L'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외부와 연락을 하는 기색도 없다. 거짓말인가? 아니면…. 스루가는 참 뜻을 알 수 없어 팔짱을 끼고서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서 과자들의 산, 휴대전화의 산이 모두 사라졌다. L은 '미국 대통령'이라고 적힌 휴대 전화만은 쓰레기통에 던지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

L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고고한 지고의 명탐정＝L'로 세계에 인식된 뒤로 처음으로 맞게 된 '아무 것도 할 일 없는 시간'이라는 것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르는 듯 했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아이처럼 L은 불안한 듯 엄지를 입으로 가져가고는 괜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문자반의 유리에 금이 가 7시 5분에서 멈춰 버린 그 시계를. 메일 착신을 알리는 전자 음이 울렸다. 와타리 앞으로 온 메일이었다. L은 'W'라는 장식 문자가 표시된 컴퓨터를 조작해 메일을 열었다. 메일은 니카이도 교수에게서 온 것이었다.

─와타리, 딸을 부탁하네─

엄지를 입에 대고서 잠시 그 짧은 문장을 바라보고 있던 L은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와타리의 사진을 보고 중얼거렸다.

'와타리, 이것이 내 마지막 일인가?'

L은 옛날 호러 영화의 좀비처럼 손가락을 축 늘어뜨린 채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만을 맹렬한 기세로 움직여 여러 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조작한다. 니카이도 교수의 과거 업적, 최근 수 년에 걸친 활동 기록, 학회 발표 논문─. 좌르륵 내려가는 화면에는 폭풍우처럼 문자가 흘러갔지만 L의 눈은 정확하게 그 글들을 읽어 냈다. 이윽고 각 기관의 내부 정보로 접속했다. 여러 서버를 '발판' 삼아 경유하여 취약한 시스템으로 파고 든 뒤, 가공 패스워드를 넣고 해커 트랩에 미러 트랩으로 대항하여 해킹 발신원을 속이는 동시에 흔적을 하나 하나 지웠다. L은 손톱을 깨물며 'TOP SECRET'이나 '극비' 표시가 빨갛게 깜박이는 화면을 한꺼번에 읽어 나갔다.

"콩고 분지의 신형 에볼라형 출혈열 바이러스…, 항 바이러스 약의 개발…, 일본 국내 레벨 4 연구 시설…."

여러 정보를 가지고 니카이도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 적대하는 세력, 사건에 말려 들 가능성을 판단하고 종합적인 위험도를 이끌어 내었다.

"83퍼센트의 확률…."

손톱을 깨무는 소리가 한층 높아지며 작전실 안에 울려 퍼졌다. 스루가조차 움찔하며 돌아 보았지만 L은 신경도 쓰지 않고 빨갛게 깜박거리는 빛에 창백한 얼굴을 물들이며 손톱을 잘근거렸다. 마치 그 진동이 뇌에 전해져 사고가 활성화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경고 음이 울리며 현관 모니터에 사람이 비쳤다. 곰 인형을 끌어 안은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니카이도 마키, 10세. 국적 일본, 성별 여성, 와미즈 하우스 특별 교수 니카이도 키미히코의 딸─

얼굴 인증 시스템에 의해 정보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소녀였다. 이후 와타리가 조사해서 시스템에 정보를 넣어 두었던 모양이다. 보안을 풀고 마키를 안으로 들였다.

"와타리는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L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정체를 묻지도 않고 이야기의 핵심을 찔렀다. 마키는 흠칫한 듯이 L을 바라보더니 선 채로 울기 시작했다.

"이, 이봐, 왜 그래?" 사정을 모르는 스루가가 황급히 마키에게 달려갔다.

"힘들었겠죠. 많이 애썼습니다."

L은 '83퍼센트의 확률'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신한 듯했다. 그는 마키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만쥬 다섯 개를 꿰어 놓은 특제 '경단'을 내밀었다.

"달콤한 음식은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요."

마키는 곰 인형을 꼭 끌어 안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잠시 뒤 마키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금고에 탈출구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테니까요. 니카이도 교수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에 있는 물건을 들고 도망가라고 했던 거군요. 그래서 뭘 들고 나왔습니까?"

마키는 경계하듯이 유일한 소지품인 곰 인형을 등 뒤로 감추었다.

"아버지는 와타리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했어. 당신이 와타리 씨가 아니라면 아직 100퍼센트 신용할 수 없어."

마키가 노려보자 L은 화 내기는 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른 대응입니다. 지켜야 하는 물건은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넘겨선 안 되지요. 아버지가 마키 씨에게 맡긴 것처럼."

"그래서, 와타리 씨는 어디 있어?"

"와타리는… 여기에는 없습니다."

"언제 돌아오는데?"

"이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L의 대답은 갑자기 횡설수설했다. 마키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도움을 청하듯이 스루가를 보았다. 스루가는 L이 그 '사실'을 스스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대신 대답했다.

"마키, 와타리 씨는 네 아버지처럼 나쁜 놈들에게 죽었어."

"어…?"

마키는 저도 모르게 L을 바라보았다. L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소파에 뛰어올라 등을 돌리고는 손톱을 잘근거리며 깨물었다.

"와타리를 죽인 건 접니다. 제가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와타리는…."

구부정한 등을 더욱 더 구부리고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 안은 L은 불필요하게 길게 뻗은 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슬퍼 보였다. 마키가 보기에 그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척 무거운 뭔가를 짊어진 듯이 보였다.

 

 

---

 

  

ℒ 16

쿠조

  

다음 날 오후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며 모니터에 자그마한 여자가 비쳤다.

"아, 쿠조 씨다!" 마키가 모니터로 달려갔다.

"누구죠?"

스루가가 사 온 아사쿠사 '우메무라'의 단팥에 꿀을 넘칠 듯이 붓고 있던 L은 모니터에 비친 여자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아빠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내 공부도 봐 주고. 안으로 들여 줘."

"뭐야? 엄청난 미인인데. 아니, 미인이라기보다는 귀엽네…."

모니터에 비친 쿠조의 모습을 보자 스루가가 호기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몸을 내밀었다.

"앗, 손 대면 안 돼! 쿠조 씨는 얌전한 사람이라 당황할 거야. 게다가 스루가 씨보다 더 나이가 많을걸."

"뭐? 그럼 저 얼굴로 서른이 넘었다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L은 엄중한 경비에 당황한 듯한 쿠조를 잠시 동안 관찰하듯이 바라본 뒤 마이크를 켰다.

"쿠조 씨,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음성 안내를 드릴 테니 지시에 따라 지문 인증, 망막 조합, 금속 탐지를 받아 주세요. 소지품은 모두 X선으로 검사하겠습니다."

화면 속에서 쿠조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왔을 때랑은 엄청 다른데….

스루가는 자신이 왔을 때와는 크게 차이가 나는 L의 엄중한 보안 대응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그만큼 자신의 '잠입'이 훌륭했던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방까지 찾아온 쿠조에게 마키가 다려갔다.

"쿠조 씨!" "마키. 다행이야, 무사해서."

쿠조와 만나자 긴장의 실이 풀린 마키는 쿠조의 품 속에서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마키의 얼굴을 쿠조는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쿠조는 새삼스럽게 L과 스루가에게 인사를 했다.

"저어…, 마키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니카이도 교수님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쿠조라고 합니다. 교수님과 마키와는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쿠조 씨. 류자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장소를 아신 겁니까?"

정중한 인사를 무시하듯 L은 성의 없이 이름을 밝히고는 쿠조에게 물었다. 심문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에 쿠조는 표정을 흐렸다.

"아…, 연구소에 니카이도 교수님의 휴대 전화가 남아 있었어요. 교수님의 휴대 전화에는 마키의 휴대 전화 위치 인식이 설정되어 있어서…."

"유괴 대책용 서비스로군. 위험한 바이러스를 다루는 연구이니 언제 가족이 위험에 맞닥뜨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대화에 끼어 든 스루가가 쿠조의 앞으로 나서 손을 내밀었다.

"FBI 로스앤젤레스 지국의 스루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예, 처음 뵙겠어요."

쿠조의 가느다란 손은 스루가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 버렸다. 쿠조는 계속해서 손을 놓지 않으려 드는 스루가에게 당황하면서도 머뭇머뭇 물었다.

"저…, 죄송합니다, 스루가 씨. FBI라는 게…?"

"예? 아, FBI…, 모르시는…. 그렇…, 군요…."

멋들어지게 자기 소개를 하려 했지만 상대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루가는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쿠조 씨, FBI 쯤은 나도 안다고. 미국의 스파이 영화 같은 데서 곧잘 나오잖아."

마키가 질린 듯이 웃자 쿠조는 얼굴을 붉히며 스루가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요."

 

"마키, 니카이도 교수님은 어디에 계셔?"

그들이 권한 대로 소파에 앉은 쿠조가 생각난 듯이 방을 둘러 보았다. 쾌활한 모습에 그림자가 어리더니 마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대신 L은 니카이도 교수가 마키의 눈 앞에서 누군가에게 살해 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마키가 필사적으로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럴 수가…, 정말이야?"

쿠조는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마키를 꼭 끌어안았다.

"마키, 괴로웠지. 잘 참았어."

마키의 등을 쓰다듬는 쿠조의 뺨에 눈물이 반짝였다. 감정 이입을 하고 만 스루가는 서둘러 등을 돌리고는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나 L은 그런 감정과는 상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모습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스루가는 머쓱해졌다. 과연 열 명이 넘는 시체가 생기지 않으면 출동하지 않는다는 엽기 살인 취향의 변태 명탐정 답군, 그는 L에 대한 FBI의 인물평을 떠올리고는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고 말았다. 눈물을 닦은 쿠조는 L을 돌아 보았다.

"류자키 씨, 대단히 무례한 부탁입니다만, 마키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저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요? 교수님이 안 계신 지금은 제가 마키를 지켜야 해요."

얌전한 인상이었지만 쿠조의 눈에는 지켜야 할 뭔가를 가진 사람만이 지닌 강한 빛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건물엔 20명 이상이 숙박할 수 있는 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방을 쓰도록 하세요. 다만 마키 씨를 노리는 조직을 알 수 없는 이상, 마키 씨는 이 건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쿠조 씨도 최대한 외출은 삼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쿠조 씨, 내 옆 방에 묵어. 안내해 줄게."

마키에게 이끌려 쿠조가 방에서 모습을 감추자 스루가는 L의 귀에 속삭였다.

"이봐, 류자키. 약간 물정을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미인이니까, 여기 생활도 즐거워질 것 같지 않아?"

동의를 바라며 물어보자 L은 난해한 추상화에 대한 감상을 요청받기라도 한 듯 까다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인…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녁 식사를 마친 마키는 쿠조의 방에서 어제부터 있었던 일을 이것 저것 이야기했다. L은 여전히 소파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고, 혼자 남은 스루가는 따분한 나머지 L에게 다가갔다.

"류자키, 혼자서 체스를 두면 재미있나? 괜찮다면 내가 상대하지. 이래봬도 제법…."

말을 하던 스루가는 입을 다물었다. L의 체스 말이 움직이는 규칙은 평범한 게임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봐, 류자키, 일본이라고 해서 장기와 착각하는 것 아냐? 체스에서는 상대에게 빼앗은 말은 못 쓴다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L이 잡은 나이트는 적진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소파 뒤에서 들여다 보던 스루가는 L이 체스 판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 끝을 보자 발치에 숨겨 둔 듯이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비치는 것은 쿠조가 묵는 방의 감시 영상이었다. L은 쿠조가 마키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료고쿠 명물인 리키시(力士) 모나카를 입에 반쯤 물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너, 쿠조한테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몰래 감시 영상으로 체크하고 있었잖아. 이 변태…."

"저는 쿠조 씨가 마키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L은 무거운 말투로 스루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설마, 쿠조가 마키랑 니카이도 교수를 덮친 조직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스루가는 어수룩하던 쿠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이 곳으로 찾아왔을 때 익숙지 않은 듯이 행동하면서도 빈 틈 없이 모든 보안을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그녀를 24시간 감시하겠습니다. 이 일은 쿠조 씨나 마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66초, 2층에 도착. 6초 만에 복도 북단까지 이동. 75초, 연료 창고로 일단 후퇴. 81초, 다시 복도로. 87초, 키 해제. 90초, 도착…이라."

스톱 워치 기능으로 변환한 시계의 디지털 표시를 노려보면서 스루가는 혼자서 춤을 추듯 왔다 갔다를 거듭하며 기계 제어실로 들어갔다. 키라 대책실에서는 건물 내의 모든 장소에 빈 틈 없이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를 볼 수 있다. L은 현재 90군데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30군데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한 군데에 3초, 총 90초 만에 넘기면서 세 대의 모니터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 패턴을 파악해 감시 카메라에 비치지 않게 기계 제어실로 들어가는 것이 스루가에게는 한밤중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이 방만은 감시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냉방이 세군, 이 방은. 뭐, 이 곳의 주역은 기계님이니까."

기계 제어실에는 키라 대책실을 제어하는 서버가 들어 찬 채 '키라 대책'이라는 주 목적을 잃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조용한 기계음을 나지막이 퍼뜨리고 있었다. 잠입 요원으로서 정기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 전화를 손에 든 스루가는 그제야 먼저 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스루가 씨."

별로 놀란 빛도 없이, 그리고 이런 장소에서 비밀스런 행동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꺼림칙해 하는 빛도 없이 쿠조는 스루가에게 미소를 짓곤 다시 컴퓨터를 향했다.

"뭘… 하는 거지? 쿠조."

"시스템에 강제 개입을 하려는데, 아무래도 방어가 견고해서 이런 노트북으로는 어려워 보이네요. 밖에서 해킹하기 무리라면 내부에선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는데."

침착한 말투와 얌전한 미소는 변함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그녀의 변모는 눈에 띄었다.

"역시 그 애를 보호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군."

상대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스루가는 쿠조에게 다가갔다.

"스루가 씨야말로, 감시 카메라가 없는 방에 무슨 볼 일이 있나요?"

속셈이 있는 건 서로 마찬가지잖아요? 라는 듯한 쿠조의 말에 스루가는 그야 그렇군 하고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류자키는 널 의심하고 있어. 방의 감시 영상을 체크하고 있다고."

"그렇겠죠. 세계 제일의 명탐정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무방비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그 말에 스루가는 확신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류자키'의 정체, 그리고 이 건물이 무슨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를. 쿠조의 침착한 눈빛 안쪽에서 도전적인 빛이 엿보였다.

"정체가 뭐야, 너는? 마키를 노리는 조직의 인간인가?"

쿠조의 손가락이 키보드에서 떨어지더니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마키에게도 비밀로 해 뒀던 일이지만…."

쿠조가 앉은 의자가 천천히 회전해 스루가를 향했다.

"저는 경시청 공안부 외사 제３과에 소속된 잠입 수사원입니다."

"외사 제３과…라면, 테러 대책과인가?"

쿠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루가는 새삼스럽게 쿠조를 훑어 보았다. 눈 앞의 가냘픈 여성과 '테러 대책'이라는 위험스런 말은 좀체 연결이 되지 않았다. 쿠조는 청초한 입가에 요염한 웃음을 희미하게 띠고서 스루가의 이해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재고 있었다. 역시 여자는 무서워… 라고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나오미의 얼굴을 떠올린 스루가는, 딱 보기에도 여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L이 사실은 더 정확하게 상대를 파악했다는 사실에 다소 분노를 느꼈다.

"그럼 FBI가 뭔지 몰랐다는 것도 연기였다는 말이군."

쿠조의 장난스런 웃음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경시청의 인간이 FBI를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목적은 뭐지?"

"저는 니카이도 교수가 비밀리에 살인 바이러스를 일본에 들여 왔다는 정보에 따라 연구소에 조수로 잠입해 있었어요."

쿠조의 설명은 정확하고 거침 없었다.

"니카이도 연구소의 바이러스를 노리고 여러 테러 조직이 암약하고 있어요. 이번의 교수 살해는 그 중 한 조직에 의한 것이겠지요. 살인 바이러스의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가 사라졌으니 아마도 마키가 교수에게서 뭔가를 맡아 두지 않았을까 싶었죠. 아시는 대로 바이러스 병기는 저렴한 배양 설비로 간단하게 대량 생산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주머니에 넣어서 옮겨 다닐 수 있는, 그야말로 테러 조직에 안성맞춤인 살인 병기예요. 바이러스 테러의 유일한 결점을 들자면 부메랑 효과라고나 할까요…. 즉 어느 지역을 바이러스로 공격하면 그것이 돌고 돌아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미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지요."

"효과적인 항 바이러스 약이 있으면 그 유일한 결점조차 없어지지. 즉 최강의 병기가 탄생한다…는 말이로군."

"그래요, 살인 바이러스와 항 바이러스 약이 세트로 테러 조직에 넘어가면 세계는 끝장나는 거죠."

"그러면 목적은, 마키가 니카이도 교수에게서 받은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의 보존… 이라는 거군."

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마키는 저를 신뢰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경찰 쪽 사람이고 연구소에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애는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요. 게다가 여기에 와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죠."

"새로운 문제?"

쿠조는 알잖아요? 라는 투로 스루가를 바라보았다. 그런 뜻이군 하고 스루가는 생각했다. 경시청도 FBI와 같은 생각으로 잠입 요원을 들여 보냈다는 뜻이었다.

"L…인가."

"그래요. 물론 테러 조직의 손에 항 바이러스 약의 데이터가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야만 해요. 하지만 우리들은 L과 데이터가 연관되지는 않을까 그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지요. 현재 데이터가 아직 마키의 손에 있는지, 아니면 이미 L의 손에 넘어갔는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요. 마키와 저의 대화는 모두 l에게 도청되고 있고…. 적어도 L이 제가 만든 식사라도 먹어 준다면 수면제를 넣어서 조사할 수도 있을 텐데 저녁 식사에는 전혀 입을 대지 않더군요."

쿠조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은 채 조그맣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그늘진 표정과 어린 티가 느껴지는 행동이 불균형적인 매력을 자아내면서 스루가의 눈길을 빼앗는다. 그 시선을 깨달은 쿠조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일어섰다.

"자,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저는 지금 목욕을 하고 있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요."

노트북을 옆구리에 낀 쿠조는 스루가와 마찬가지로 시계를 스톱 워치 기능으로 바꾸어 돌아가는 길의 감시 카메라 대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던 쿠조가 문득 생각난 듯이 멈춰 섰다.

"그런데 스루가 씨가 잠입한 목적은?"

"키라가 사용했던 살인 도구. 궁극의 살인 병기를 L 개인의 소유물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스루가 씨, 괜찮다면 협력하지 않겠어요?"

"협력? 무슨 뜻이지?"

조용한 미소가 수수께끼처럼 스루가에게 다가왔다. 쿠조의 고운 손가락이 가만히 스루가의 팔에 닿는다.

"스루가 씨는 키라의 살인 도구, 저는 항 바이러스 약 데이터. 입장도, 원하는 것도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예요. 서로 협력하는 편이 이득일 것 같지 않아요?"

 

 

---

   

  

ℒ 15

밀약

  

아침부터 스루가와 쿠조 사이에는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스루가가 말을 걸어도 쿠조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덮밥이 연상되는 거대한 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달착지근한 아침 커피를 마시고 있던 L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소파에서 지그시 관찰하고 있었다.

"스루가 씨는 쿠조 씨에게 미움을 샀나 보군요."

L은 쿠조가 빨래를 하러 부엌으로 사라지자마자 스루가에게 물었다.

"아아…, 그냥 뭐, 좀… 이래저래."

스루가는 얼버무리듯이 말을 흐렸다.

"뭐어? 설마 스루가 씨, 쿠조 씨한테 손 댄 건 아니겠지?"

일찌감치 눈치 챈 마키가 캐어 묻자 스루가는 점점 더 기가 죽어서 커다란 몸을 움츠렸다.

"미국에서의 버릇대로 꼬드기려고 했더니 당장 거절하던데."

"정말! 그러니까 안 된다고 했잖아!"

마키는 어이구 하는 표정을 짓고는 쿠조를 살펴 보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남겨진 스루가는 더더욱 어색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역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의 방을 찾아가는 건 비상식적이지요."

"역시 류자키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아니, 잠깐! 너 설마?"

소파에 달려든 스루가는 L을 밀어내고 발치에 숨겨진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예상대로 쿠조가 부엌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설마 너, 내가 쿠조의 방에 있었을 때에도 감시하고 있었나?"

"물론입니다."

"제길! 그럴 줄 알았어, 이 변태!"

"쑥스러워할 것 없습니다, 스루가 씨."

"아니, 나는 쑥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뭘 심각하게 대답하고 그럽니까, 스루가 씨."

L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통에 스루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을 붉히며 후퇴했다. 보고 있었다니 연기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L은 두 사람의 그런 관계를 보고 있어야 했으니까.

 

"L이 있는 작전실에 도청기를 설치해 둘 수 있으려나. 우리들이 없을 때에 L과 마키가 나누는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스루가 씨라면 도청기를 갖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작전실에 도청기를 설치하면 들키고 말겠죠. 그 방에는 당연히 도청 전파에 작동하는 경보가 있을 테니까요."

쿠조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쿠조는 여름다운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기계 제어실은 다른 방보다 냉방이 낮게 설정되어 있어서 쿠조는 추운 듯이 가끔 어깨를 끌어안곤 했다. 스루가는 어깨까지 드러난 쿠조의 하얀 팔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아니… 추울 것 같아서."

스루가는 웃옷을 벗어 쿠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쿠조는 약간 망설였지만 "고맙습니다" 라며 수줍게 웃었다. 스루가는 같이 잠입 수사를 하고 있는 동지라는 감정 이상의 느낌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피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스루가 씨, 휴대 전화를 여러 대 갖고 있나요?"

"응, 그런데."

수사관이라는 성질 상, 스루가는 두 대의 휴대 전화를 가지고 상황에 따라 나누어 쓰고 있었다.

"그럼 그걸로 도청할 수 있겠군요."

 

그 날 밤, 스루가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척하며 일찌감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감시 받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약을 위해 침대에 파고들어 이불을 뒤집어 쓴 뒤, 휴대 전화를 꺼내어 '또 한 대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한 대의 휴대 전화는 조금 전에 L이 앉은 소파 근처에 일부러 잊어버린 채 두고 왔다. 설정을 '자동 착신'으로 해 두었기 때문에 이 쪽에서 전화를 걸면 착신음이 울리지 않고 그대로 통화가 가능해진다. 즉, 소파 주변의 대화라면 엿들을 수 있다. 간이 도청기로 써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귀를 기울이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마키 씨는 오사카에서 아마네 미사 씨네 집 근처에 살았던 거군요?"

"응. 미사 언니는 근처에서도 유명한 미인이었어. 가족끼리 사이가 좋아서 같이 여행도 갔었어."

"데뷔 전의 아마네 미사를 알고 있다니 부럽군요."

 

감정이 깃들지 않은 평소의 말투와는 달리 진심으로 부러운 듯한 목소리였다.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마키와 기묘하게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 L의 촌스러운 만담 콤비 같은 기이한 대화가 이어졌다. 30분쯤 듣고 있자 그제야 L은 스루가가 바라던 화제를 꺼냈다.

 

"마키 씨, 그러면 아무리 부탁해도 데이터는 넘겨 주지 않겠다는 거군요."

"안 돼. 소중한 데이터니까 아무한테도 넘겨 줄 수 없어."

"그러면 제 소중한 노트와 교환하면 어떨까요?"

"소중한 노트?"

"예,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노트입니다. 그것과 교환하면 어떨까요?"

"뭐…, 좋아.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교환해 주지."

"고맙습니다. 그러면 노트를 드리겠습니다."

"노트라니, 류자키, 이거 포테이토 칩이잖아?"

"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포테이토 칩 봉지 안에 소중한 것이 들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너밖에 없다고, 소중한 걸 그런 데다 숨기려 드는 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평범한 도청과 달리 이 쪽의 목소리도 저 쪽에 들리기 때문에 스루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렇지만…." 마키는 아직 미심쩍은 듯 했다.

"마키 씨에게서 받은 데이터도 다른 포테이토 칩 봉지에 넣어서 과자 저장고에 넣어 두겠습니다. 어지간한 금고에 넣어 두는 것보다 안전합니다." 

"하지만 류자키, 실수로 먹어 치우는 건 아니겠지?"

마키의 물음에 L은 묘하게 자신만만한 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콘소메 맛은 먹지 않으니까요."

 

 

---

 

  

ℒ 14

작전

 

잠입 수사가 특기인 스루가에게는 L과 마키, 감시 카메라의 눈을 피해 두 개의 포테이토 칩 봉지를 손에 넣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작전 회의를 열어 볼까."

"오늘 밤은 근사한 디저트도 있네요."

기계 제어실에서 포테이토 칩 봉지를 끌어안고 너스레를 떠는 스루가에게 쿠조는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아직 안 얼여 봤어요?" "즐거운 일은 같이 해야지."

스루가는 먼저 '데이터'가 들어 있는 L의 포테이토 칩 봉지를 뜯었다. 포테이토 칩에 섞여 캡슐이 담긴 마이크로 칩이 안에서 굴러 나왔다.

"빙고!" 받아 든 쿠조가 재빨리 컴퓨터로 데이터를 열었다. 그러나 곧 마우스를 클릭하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이건… 화상 데이터?" "뭐야, 그게?"

"마키의 가족 사진 같네요. 마키가 아직 작은 걸 보니 몇 년 전의 사진 같아요."

그것은 니카이도 일가가 오사카에 살고 있었던 무룝, 가족들끼리 친하게 지냈던 아마네 일가와 함께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즉 아마네 미사가 데뷔하기 전이라 분명히 L에게는 '귀중한 영상'이었지만 스루가와 쿠조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스루가와 쿠조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럼 소중한 노트란 건?"

쿠조가 다른 포테이토 칩 봉지를 뜯었다. 그 안에서는 캠퍼스 노트 같은 까만 노트가 비닐에 싸여 나왔다.

"이게 키라가 사용했던 살인 도구인가요?"

"그래, 데스 노트다. L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노트는 이름을 적기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신의 노트라고 해."

궁극의 살인 병기를 앞두고 두 사람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스루가가 천천히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후나와의 고구마 양갱…, 시바마타의 쑥 경단, 료고쿠의 리키시 모나카, 아사쿠사의 안미츠에 무코지마의 경단, 토라야의 양갱…이라니, 이게 뭐야?"

"도쿄 명물인 달달한 먹을거리 뿐이네요…."

예상치도 못했던 내용이라 두 사람 모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에 온 뒤로 L이 제패한 '달달한 음식 리스트'였다. 거기에는 L 특유의 편집적이고 독선적인 문장으로 달달한 음식의 순번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 역시 분명히 L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노트'일지도 몰랐지만, 스루가와 쿠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L은 이미 다 내다 보고 있었다는 건가?"

스루가는 노트를 팽개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쿠조는 생각에 잠겼을 때의 버릇인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뭐, 이 정도로 L이 진짜를 내어 줄 가능성은 3퍼센트 쯤이라고 생각했지만요."

스루가는 쿠조의 말투가 어쩐지 L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쿠조가 크게 낙담하지 않은 듯한 건 의외였다.

"뭔가 아직 좋은 수가 있나?"

"네, 꽤 복잡한 방법이 있어요. 스루가 씨에게도 위험이 미칠 가능성은 있지만, 그 정도 쯤 하지 않으면 L은 진짜 노트도, 항 바이러스 약의 데이터도 내보이지 않겠죠."

스루가는 다박수염을 버석버석 문지르면서 머리를 굴렸다. 어쨌든 지금 이대로 잠입을 계속해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본부도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어쩔 작정이지?"

"다행히 마키는 저를 신용하고 있고, L도 그 애가 하는 말은 잘 들어요. 그 점을 이용해서 덫을 설치하죠."

세계 제일의 명탐정에게 도전할 각오를 단단히 한 쿠조의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반짝였다.

"데스 노트에 제 이름을 적도록 만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