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 ~L; Change the World~(새로운 시작) -제１장- L.A. (L's Affair)

ℒ 272

L.A. (L's Affair)

 

"어때, 페어맨. 나오미의 후임도 쉽지 않지? 여러 가지로."

FBI 수사관 스기타와 페어맨이 탄 차는 시원하게 길이 트인 로스앤젤레스 바인스트리트를 달려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기타는 처음으로 한 조가 된 페어맨과 허물 없이 이야기를 터놓으려는 생각으로 결혼을 앞두고 지난 주에 퇴직한 미소라 나오미의 화제를 꺼내었다. '여러 가지로'라고 덧붙인 부분은 물론 '바로 그 학살 미소라의 후임'이라는 의미와 함께 '바로 그 L의 눈에 띈 수사관의 후임'이라는 의미 및 그 외에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 여러 가지로 말이지…."

조수석에 앉은 페어맨은 원래 말수가 적은 성격인지 짧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조용한 이송 임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스기타는 다박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페어맨의 무릎 위에 놓은 서류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나저나 국무장관은 뭣 때문에 20년도 넘게 먼지를 뒤집어썼을 법한 극비 자료를 찾는 걸까?"

페어맨은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 높으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 말단들이야 알 수도 없고 또 모르는 편이 나은 경우가 많으니까."

핸들을 쥔 스기타는 뭔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게 뭔지는 판단하지 못한 채 백미러를 보았다.

"왜 그래, 스기타?" 조수석의 페어맨이 스기타의 그런 상태를 알아 차렸다.

"아니, 생각 탓…인가 봐."

스기타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핸들을 바로 쥐었다.

"스기타, 미안한데 담배 좀 사 올게."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페어맨이 갑자기 서류 가방을 든 채로 차에서 내렸다.

"이봐, 가방은…."

스기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페어맨은 담배 가게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향은 가게가 있는 보도 쪽이 아니라 차가 오가는 도로 쪽이었다. 스기타의 안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화면이 떴기에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기타 씨, 부티크에 손님은 없습니다."

들려 온 소리는 기계로 변환된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는 끊겼다.

"뭐야, 이거. 잘못 걸린 전화인가?"

어리둥절해서 시선을 밖으로 돌린 순간 페어맨이 총을 발포했다. 교차로 옆 쪽에서 뛰쳐 나온 트레일러가 옆으로 쓰러지며 불을 뿜는다. 트레일러는 불꽃을 튀기며 세차게 스기타의 차를 향해 미끄러져 왔다. 어느 새 뒤 차가 트레일러와 앞뒤로 막아 서듯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역시 뒤를 밟고 있었나?!"

혀를 차며 핸들을 꺾어 옆의 보도로 피하려 했지만 추적하던 차에 가로막혀 물러설 수가 없다. 엷은 웃음을 띤 페어맨의 모습이 일순 시야에 들어왔다. 퇴로가 막힌 스기타는 활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 보았다.

"혹시 저건가?!"

스기타는 무모하게도 불을 뿜는 트레일러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고는 격돌 직전에 핸들을 꺾었다. 차는 소화전에 부딪치면서 보도로 올라 서더니 그 기세 그대로 길가의 부티크 쇼윈도를 향해 돌진했다. "정말로 손님 없는 것 맞지?!" 라는 스기타의 고함과 함께. 표적을 잃은 트레일러는 추적하던 차량과 충돌해 크게 폭발했다. 추적 차량이 단숨에 불꽃에 휩싸이자 타고 있던 남자들이 불길을 일으키며 차에서 나와 나뒹굴었다.

"페어맨, 어쩔 작정이야?"

드레스를 휘감고 뛰쳐 나온 스기타가 권총을 들고 페어맨에게 달려들었다. 페어맨은 스기타에게 권총을 들이댄 채, 크게 화상을 입고 나뒹구는 추적자들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파일과 함께 불에 타 죽은 걸로 꾸밀 예정이었는데…."

천천히 뒷걸음질치던 페어맨이 갑자기 달렸다. 스기타가 뒤를 쫓았지만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어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젠장! 나오미가 그만 두자마자 이 꼴이라니!"

모퉁이를 돌아 서던 페어맨이 불현듯 나타난 사람과 부딪혔다. '베어스 크레페'라고 적힌 크레페 판매 차 앞에서 곰 인형 옷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빈 사이다 병을 길에 요란하게 쏟아 버렸고, 페어맨은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페어맨은 금세 도로 일어나서 나뒹굴던 서류 가방을 들고 다시 달렸다. 스기타도 크레페 판매 차 앞을 스쳐 갔다.

"거기 형씨, 크레페 하나 어때요?"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인형 옷을 입은 남자가 어처구니 없을 만큼 태평하게 말을 걸었지만 스기타는 흘끔 쳐다보기만 하고 계속 달렸다.

"달고 맛있는데."

남자는 인형 옷을 입었어도 알 수 있을 만큼 극심하게 구부정한 자세로 스기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주하던 페어맨은 나뒹군 탓에 속도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과 부딪혀 다시 넘어졌다.

"꼼짝 마!" 스기타가 권총을 겨누며 외쳤다. 동시에 페어맨이 노인을 방패로 권총을 들이댔다. 주위의 통행인들이 얼어 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길가에 엎드렸다. 인형 옷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이 모여 든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바깥에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인형 옷 안에는 수신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와타리, 예상치 못한 사태다. 사격 목표를 서류 가방에서 도주자로 변경." "알겠습니다."

멀리 떨어진 빌딩 옥상에서 라이플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던 와타리는 스코프를 들여다 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애는…?"

길가 상점에서 콜라를 손에 들고 있던 초등학생 쯤 되는 여자 아이가 가판대에 놓인 멘토스를 가만히 집어, 병에 던져 넣고 페어맨에게 내밀었다. 콜라가 마치 분수처럼 튀어올라 페어맨을 직격했다. 시야가 막힌 페어맨의 총구가 노인의 목에서 비껴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스기타의 총탄이 페어맨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거의 동시에 와타리는 다시 서류 가방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가방이 타오르고 극비 자료의 재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스기타는 그저 주위를 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을 공경할 줄 알아야지!"

콜라 병을 든 여자 아이는 달려든 경관에게 짓눌린 페어맨에게 일본어, 심지어 오사카 사투리로 야단을 치고는 만족스럽게 사라졌다.

 

잿더미가 된 서류를 긁어 모으고서 우두커니 서 있던 스기타의 가슴께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본부에서 온 연락이다.

"Y286에게 긴급 연락! 국무 장관에게 온 의뢰서는 위조였어. 이송 중에 습격 받을 가능성이 높아."

"그 목소리는 레이…로군. 귀중한 정보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간결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이번에는 미소라 나오미였따.

"부부가 나란히 죽이 잘 맞는군."

"뭐야, 화났어? 후임인 페어맨에게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몰라? 인수인계를 하다가 잊어버린 게 있는데."

페어맨을 태운 경찰 차량을 바라보며 스기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오미의 임무는 아무래도 내가 맡게 될 것 같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사정을 모르는 나오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기타는 반쯤 자포자기한 듯이 말했다.

"전부 내가 맡게 됐다고. 짜증나는 상사와 싸우는 것도, 명탐정 L의 심부름꾼 역할도 모두. 결혼 축하해, 나오미."

 

크레페 판매 차 앞을 지나가던 여자 아이는 인형 옷을 입은 구부정한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뭐야, 괴상한 크레페 장사네." "쓸 데 없는 참견이군요."

아르바이트생이 울컥한 듯 일본어로 대꾸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난데없이 일본어를 들었는데도 여자 아이는 놀라지 않았다.

"뭐야, 일본어를 할 수 있잖아? 그럼 마침 잘 됐네. 초코 크레페. 초코는 서비스로 줘!"

그 기세에 졌다는 듯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자는 인형 옷을 입은 채 서투른 손놀림으로 크레페를 만들었다. 초콜릿 소스가 흘러 넘칠 듯한 크레페를 받아 든 여자 아이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정말 서비스 좋네. 하지만 당신, 좀 더 잘 만들 수 있게 연습 좀 해야겠어. 그럼 이만!"

여자 아이는 손을 흔들며 기분 좋게 걸어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자는 인형 옷의 지퍼를 내려 상반신을 내밀고는 한숨을 쉬었다. 팬더처럼 커다랗게 그늘진 눈으로 여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톱을 잘근거린다. 

"여자애는 거북하다니까요…."

"천하의 L도 발랄한 여자애를 다루는 데에는 익숙지 않은 모양이군요."

집사 분위기의 노신사가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는 라이플을 들고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다가왔다.

"와타리, 수고했어."

L이라 불린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자의 발치에는 페어맨이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다.

"FBI의 극비 파일… 좋은 걸 손에 넣었군. FBI에는 스파이의 존재를 파악할 계기를 만들어 줬으니 이 정도는 보수로 받아도 괜찮겠지."

발화물과 연소하기 쉬운 문서를 넣어 둔 서류 가방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페어맨이 나뒹굴 때 진짜와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기타가 페어맨을 쏘는 것과 동시에 와타리가 가방을 쏘아 불태워서 증거를 인멸한다…. 언제나 같은 명탐정 L의 '정보 수집' 방법이었다.

"내용은 예상대로입니까?"

와타리는 L이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보고서를 꺼내자마자 물어보았다. 옆에서 보기에는 무척 조급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치 발작을 일으킨 어린 애처럼 구깃구깃 보고서를 거칠게 넘겨 본 L은 순식간에 끝까지 다 넘긴 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1980년에 감염증 연구소에서 벌어졌던 수수께끼 폭발 사건의 진상이야. 역시나 생물 병기 개발에 관련된 바이오 해저드를 은폐하기 위한 파괴 공작이었던가 보군."

크레페 판매 차 앞에 리무진이 섰다. 와타리는 트렁크에 라이플을 넣고 그 대신 거대한 덮개가 달린 은색 쟁반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장 폴 에반의 마카롱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합중국은 바이러스 병기는 개발하지 않았을 텐데요…."

와타리가 쟁반을 내밀며 의문을 표했다. 왼손의 다섯 손가락 사이 사이에 도합 네 개의 마카롱을 집어 든 L은 손가락 째로 먹을 기세로 그 중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분명히 69년의 닉슨 성명 이후로 합중국은 공격용 생물 병기 개발을 전면적으로 중지하고 방어용 생물 병기만을 연구하고 있다고 내세웠지."

단 맛이 부족했는지 L은 마카롱을 반으로 쪼개 그 안에 초콜릿 소스를 듬뿍 부었다.

"하지만 핵 병기조차 현실적으로는 '공격력'이 아닌 '억제력'으로밖에 효과가 없어.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으로 보면, 타국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기 위한 '억제력으로 사용되는 생물 병기 개발'이라는 명목은 충분히 성립되지. 실제로 구 소련에서는 72년 생물 병기 금지 조약을 조인한 뒤에도 비밀리에 생물 병기 개발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L은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 소스를 핥으면서 길 건너편 공원으로 시선을 주었다.

"재미있는 아이였어."

공원에서는 조금 전의 그 여자 아이가, 개를 데려온 노파와 친해진 듯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개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니카이도 마키 양이로군요." 와타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저 소녀를 알고 있나, 와타리?"

"저 애의 아버지라면 잘 알고 있지요. 세계적인 면역학 권위자인 니카이도 교수입니다."

"와미즈의 특별 교수로 등록되어 있는 분 말이지?"

와타리, 즉 퀼시 와미는 막대한 발명 특허료를 기반으로 퀼시 와미 재단을 창립하고 전 세계에 양호 시설을 창설했다. 그 중에서도 전 세계에서 국적, 인종, 성별을 가리지 않고 우수한 아이들을 모아 전문적인 교육을 하는 시설, 그것이 '와미즈 하우스'였다. 와미즈에는 특별한 '학교' 같은 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속된 아이들의 능력과 특성에 맞추어 전 세계에서 '권위자'로 통하는 대학 교수, 연구가, 전문가를 초빙해 맨투맨으로 가르치는 시스템이 있다.

"국제 회의장에서 감염증 학회가 개최되고 있으니 아버지를 따라왔나 보군요."

L은 손톱을 잘근거리며 개와 놀고 있는 여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또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저 애와는."

"그런 쪽으로 L의 예감은 곧잘 맞으니까요."

"그리고 저 수사관을 후보자 리스트에 넣어 두도록 해. 트레일러 회피 방법, 소화전을 파괴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배려까지 포함해서 제법 괜찮게 움직이더군."

"FBI의 스기타 수사관 말이군요. 나오미 미소라 수사관이 FBI에서 은퇴했으니까요."

감개무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타리 옆에서 L은 꾸물꾸물 인형 옷을 벗었다.

"일은 끝났어, 와타리. 지금부터 바로 다음 임무로 들어가지."

"L의 흥미를 끌 만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던가요?"

"아직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찰이나 수사 기관은 아무 데도 없지만, 흉악 범죄자가 연이어 심장 마비로 사망하고 있어. 그 중에는 본인 외엔 있는 곳을 알아 낼 수 없는 범죄자도 포함되어 있지. 이것이 혹시 어떠한 사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까지의 범죄에 대한 접근법은 통용되지 않아. 진지하게 수사할 필요가 있어."

"그러면 가장 가까운 애리조나의 L 전용 극비 작전실로 가지요. 곧 헬리콥터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는 어떻게 할까요?"

기껏 FBI에서 빼앗은 극비 파일이었지만 이미 L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여전히 하우스에서 하얀 직소 퍼즐을…. 요전에 맡겼던 마드리드 연쇄 살인 사건의 해결은 너무 간단해서 따분했다고 불평을 하더군요."

"그러면 그에게 넘겨 주도록 해. 이 극비 파일 유출 건은 페어맨의 배후에 있는 존재, 연구소의 바이오 해저드 실태와 이어져 있을 거야. 80년의 대통령 선거에도 암암리에 영향을 미쳤겠지. 모든 것을 풀어 낼 열쇠를 찾아 내는 게 그에게는 절호의 퍼즐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와타리가 리무진 문을 열며 L을 재촉했다.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어슬렁 어슬렁 걸어오던 L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구부정한 등을 약간 펴며 뭔가를 예감하듯이 중얼거렸다.

"이게 혹시 살인 사건이라면 커다란 전쟁이 될 것 같아."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나, 마키?"

연구 성과 발표를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온 니카이도 교수가 딸에게 물었다.

"아니, 딱히 별로."

마키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고 고개를 저었다. 니카이도는 가만히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키, 아빠는 지금 바로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단다."

"아프리카? 뭐 하러 가는데?"

"응, 면역학자 친구가 콩고 지역에서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에 따른 피해가 확대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어. 에볼라 같은 출혈열 바이러스인데 두 마을이 괴멸했다더구나. 학회가 끝나면 본 고장의 디즈니랜드에 데려가 주겠다고 마키랑 약속했었는데…."

니카이도가 미안한 듯이 말꼬리를 흐리자 마키는 짐짓 타이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 바이러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아빠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딸에게 야단을 맞은 니카이도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마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선 안 되지. 언제나 아빠가 마키에게 했던 말이구나."

"아빠, 아프리카에는 나도 따라가겠어."

마키는 딱 잘라 말하듯이 선언했다.

"안 돼, 마키. 바이러스 때문에 위험한 장소에 가는 거니까 너는 일본으로 돌아가 있어."

니카이도가 황급히 말리려 하자 마키는 허리에 손을 짚으며 어른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죽은 엄마랑 약속했다고 했잖아? 내가 아빠의 아내를 대신해서 돌봐 주겠다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ℒ 23

운명

 

"룸 서비스입니다, 류자키. 오늘 밤은 무코지마의 명물 경단을…."

호텔 보이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화과자를 가득 담은 왜건을 밀고 들어온 와타리는 이변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한 시도 쉬지 않고 손을 뻗은 L에게 평정되었어야 할 테이블 위의 과자가 전혀 줄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류자키."

꼼짝도 하지 않는 L의 앞에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데스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키라와 결말을 짓겠어.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

L은 노트 끝을 집듯이 들어올려 펼쳐진 페이지를 와타리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데스 노트에 적힌 마지막 이름이야."

─엘 로우라이트 23일 뒤, 잠들 듯이 심부전으로 사망─

틀림없는 L 자신의 필적으로 L과 와타리밖에 모르는 L의 본명이 적혀 있었다. 와타리는 놀라서 입이 벌어질 뻔했지만 겨우 억누르고 자신의 마음을 봉인하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L의 결정은 모두 받아들이고 전력으로 지원한다. 이것이 L과 처음 만난 사건…, 8세로 추정되는 소년이 제３차 세계 대전을 막아 낸 '윈체스터 폭탄마 사건'에서 와타리가 마음 속으로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와타리는 알고 있었다. 어떤 때라도 L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야 할 일'을 자기 스스로 결정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할지라도 사건 해결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주저 없이 뛰어든다. 동시에 L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있다(는 표현을 거창하게 여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L이 결정한 '선택'이었다. 어떻게 와타리가 다른 뜻을 표할 수 있을까. 게다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데스 노트'에 적힌 '운명'은 돌이킬 수 없었다. 와타리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23일이군요."

"앞으로 23일이야. 와타리, 이제부터는 L 이외의 알파벳과 함께 세계를 지원해 줘."

와타리에게 이 말을 하고서야 겨우 짐을 벗었다는 듯 L은 과자로 손을 뻗었다.

"L,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와타리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L'…, 그것은 와미즈 하우스에서는 '12번째 알파벳'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뒤 이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고고한 'LAST'이며, 전지전능하신 분이 하늘에서 내려 준 존재인 'LOST'였다. 고작해야 8세 쯤 된 소년이 지고하며 고고한 명탐정 'L'로서 전 세계의 경찰과 첩보 기관을 장악할 수 있는 존재가 된 뒤로, 와미즈 하우스의 존재 의의는 'L을 계승할 사람'이자 'L에 필적하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 되었다.

"와미즈도 체제를 바꾸어야만 하겠군요."

와타리는 경단을 입으로 가져가는 L의 구부정한 등을 지켜 보면서 조용히 'L이 없는 세계'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L이 와타리의 눈 앞에서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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ℒ 19

소실

 

테이블에 놓인 거대한 유리 그릇에는 하얀 각설탕이 가득 담겨 있었다. L은 왼손으로 각설탕을 하나씩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소파 앞에는 대략 50개가 넘는 모니터가 있었다. 어제까지 세계 각국의 뉴스며 감시 영상이 모든 모니터에 비치고 있었지만, 역할을 마친 지금은 하나를 뺀 나머지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니터에는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이 비치고 있었다. 한낮의 와이드 쇼가 연예인의 이혼 소동을 대박 특종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L이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스튜디오가 떠들썩한 기색을 보이더니 화면이 바뀌었다. 경시청의 긴급 기자 회견이었다. 경시총감의 인사에 이어 설명을 위해 등장한 사람은 야가미 소이치로였다.

"키라에 의한 범죄자 무차별 살인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두 번 다시 키라가 범죄를 일으킬 일은 없습니다."

그 발표에 장내가 술렁거리더니 일제히 질문이 날아 들었다.

"그 말씀은 키라를 체포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키라는 죽었습니까?"

"키라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보도진이 몰려드는 가운데 야가미 소이치로는 회견을 끝내고 자리를 떴다. 회견장은 소란스러워졌다.

L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라…, 아니, 라이토는 죽어 버렸군."

아무도 없었던 방 안에서 불현듯 목소리가 났다. 그러나 L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비치는 빛으로 바닥 위에 인간 같지 않은 기묘한 실루엣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안 시스템을 전혀 작동시키지 않고 이 방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벽을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는 존재…, 사신 밖에 없다.

"사신인 당신이 이 세계에 가져온 데스 노트…."

L의 옆에는 두 권의 데스 노트가 놓여 있었다. L은 천천히 그 중 한 권을 손에 들고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사신 류크는 약간 불만스런 표정을 띠었지만 말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뭐야, 너도 재미있게 써 먹을 줄 알았는데. 기껏 규칙도 모두 가르쳐 줬는데 말이야."

"재미있게 써 먹는다고요?"

L이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시선으로 류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스윽 들이댄 류크의 홉뜬 눈에 L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내가 그 노트를 인간계에 떨어뜨린 이유는 사신계가 따분했기 때문이야. 라이토 덕분에 즐거웠으니 너도 재미있게 써 먹어서 날 즐겁게 해 줄 줄 알았거든."

"사람을 죽이는 게 재미있을 리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이미 이 노트를 써 버렸습니다."

L은 노트를 펼친 다음 손가락으로만 집어 올려 류크에게 내밀었다.

"저는 데스 노트에 저 자신의 이름을 썼습니다. 제가 이 노트를 쓰는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류크는 불필요할 정도로 노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거기에 적혀 있는 L의 본명을 바라보았다.

"라이토가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네 본명, 그걸 설마 데스 노트에 스스로 적을 줄이야."

귀까지 찢어진 입 끝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서 크크크 웃는다. L은 사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이 노트를 손에 든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크는 이윽고 고개를 삐걱삐걱 저으며 부자연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너는 안 쓸 거냐. 재미 없군."

라이토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얼거린 류크는 바람을 일으키지도 않고 날개를 치며 떠올라 그대로 천장을 꿰뚫고 사라져 버렸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L은 노트를 바라보며 손톱을 잘근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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ℒ 18-1

스루가

 

"이렇게 무방비해도 되나?"

감시 카메라에 얼굴을 보이기만 했는데도 문이 열리자 스루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키라 대책실로 들어섰다. 얼핏 보기만 해도 지문 인증, 망막 조합이나 금속 탐지를 비롯한 몇 겹의 보안 기능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작동하지 않았고, FBI 신분증조차 보일 필요가 없었다. 벽면의 안내 등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고 지하 4층에 내렸다. 육중한 문이 열리자 그 곳은 바로 키라 대책실의 중추인 작전실이었다. 넓은 실내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중앙에 놓인 무수한 모니터도 지금은 모두 전원이 꺼져 있었다.

"FBI 수사관인데, 아무도 없소?"

사람이 없는 실내에 스루가의 목소리만이 메아리 친 뒤 다시 정적이 찾아 들었다. 최악이자 최강의 살인마였던 키라와의 거듭되었던 공방 따위는 모른다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돌리던 스루가의 눈 앞에 그 남자가 있었다.

"우왁!"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난 인물과 예상 외로 간격이 가깝자 스루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남자는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서 스루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버석버석하게 엉긴 머리카락에 밋밋한 흰색 긴 소매 셔츠와 빛 바랜 청바지 차림. 몸을 구부려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보다는 사실 극단적으로 자세가 구부정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부분들'의 조합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극도의 불면증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시커멓게 그늘진 눈이었다.

"너는…?" 스루가는 경계를 풀지 않고 거리를 두며 물었다.

"류자키라고 불러 주십시오."

무뚝뚝하게 말한 남자는 소파에 뛰어 올랐다.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 안은 듯한 자세로, 거대한 어항과 비슷한 유리 항아리 바닥에 얼마 남지 않은 각설탕으로 손을 뻗었다.

─이 녀석은…, 진짜인가?

키라 대책실에서 L이 '류자키'라는 이름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스루가는 등을 돌리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약간 울컥했지만, 구부정하니 자세가 나쁜 뒷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L이 본명과 본모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로스앤젤레스 BB 연쇄 살인 사건에서 L과 함께 움직이며 사건을 해결한 미소라 나오미 앞에조차 L로서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스루가는 상대가 어떻게 대답하든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그러나 눈 앞의 남자는 '세계 제일의 명탐정'이라는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아…, 미안. 직접적으로 묻겠는데, 너는 'L'인가?" "예, 저도 L입니다."

류자키라고 말한 남자의 대답은 얼버무리기라도 하듯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 때문에 스루가의 마음 속에서는 오히려 부분적으로 신빙성이 높아졌다. 달리 사람이 있는 기척이 없는 이상, 일단은 눈 앞의 남자를 파고들어야 한다. 이 쪽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스루가는 헛기침을 하며 남자가 앉은 소파에 다가갔다.

"나는 FBI의 스루가 히데아키. 레이와는 같이 훈련을 받은 동기 사이지. 지금은 나오미의 임무를 물려 받았어. 두 사람의 결혼 피로연에서 사회도 부탁 받았는데…."

무심결에 낮아진 말투로 중얼거리자 소파에 앉은 남자는 그제야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돌아보았다'기보다는 몸은 앞으로 향한 채 목 위만 말 그대로 '꺾어서 돌린' 것 같아, 부자연스럽게 실로 조종한 마리오네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FBI의 스루가 씨…라고요?"

남자는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들여다 보듯이 스루가의 이마 언저리에 초점을 모았다. 잠입 수사의 기본대로 스루가는 표정에 털끝만치도 감정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신분증은 FBI가 작성한 '정식으로 위조한 신분증'이었고, 당연히 L이 해킹해서 조사해 볼 경력도 모두 '스루가'로 고쳐 놓았으니 빈 틈은 없었다.

─혹여 이 녀석에게 내 본명이 보인다면….

그 생각을 억누르며 스루가는 말을 이었다.

"L…, 아니, 류자키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 왔어. 키라를 쓰러뜨려서 레이와 나오미의 원수를 갚아 줬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말해 줘."

스루가를 그대로 바라보면서 L이라는 남자는 테이블의 '어항'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넣었다. 이미 각설탕은 하나도 남지 않은 유리 항아리 안에서 허무하게 팔을 휘저은 L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갑자기 소파에서 뛰어 내렸다. 바닥에 엎드려 소파 아래를 들여다 보고 테이블 밑으로도 파고들며 뭔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모니터에서 뻗어 나온 배선 다발 위를 넘어서 긴 팔다리로 어색하게 기어 다녔다.

─뭐…, 뭐야, 이 녀석…?

그 기묘한 움직임에 스루가가 말도 걸지 못하고 있는 동안, L은 부스럭 부스럭 여기저기에 부딪히면서 벽에 다다르더니 일어섰다. 구부정하지만 재빠른 움직임으로 목표물이 없는 벽을 뭔가 규칙성이 있는 듯 밀었다. 그러자 이음새가 없는 통벽으로 보였던 장소가 차례로 열렸다. 아무래도 거기는 L 전용 비밀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에는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하얀 긴 소매 셔츠와 빛 바랜 청바지가 무수히 걸려 있었다. 두 번째에는 무수한 휴대 전화가, 그 다음에는 아마네 미사의 상품 컬렉션이 각각 깔끔하게 정리된 채 수납되어 있었다. 그리고 L이 마지막으로 열어 본 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긴급 사태입니다!" "왜 그래, 새로운 사건인가?"

워낙 긴박한 모습이라 스루가가 저도 모르게 몸을 내밀었다. L은 엄중한 표정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스루가에게 말했다.

"후나와의 고구마 양갱을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ℒ 18-2

고뇌

 

그 날 밤, 도쿄 교외의 야트막한 구릉 위에 위치한 '니카이도 연구소'에는 소장이기도 한 니카이도 교수와 조수 쿠조만이 남아 있었다.

"교수님, 드디어 항 바이러스 약이 완성되었군요."

"그래, 완성했어. 내일이라도 사실을 보고하고 후생 노동성에 넘겨 줘야지. 이 바이러스와 항 바이러스 약을 동시에 테러 조직에라도 빼앗기면 이 세계는 끝나 버릴 거야. 허무하게 말이지."

쿠조는 마음이 무거운 듯한 얼굴로 니카이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만의 하나를 생각해서, 바이러스와 항 바이러스 약은 각각 다른 보관고 안의 초저온 조에 넣어 두도록 하지. 양쪽 다 내 패스워드와 생체 인증이 없으면 열 수 없어."

"수고하셨습니다, 박사님." "그래."

쿠조의 말에 니카이도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은 하나의 결실을 맺은 과학자로서의 충실한 감정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쿠조는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 차렸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아무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나는 금지되어 있는 '레벨 4'의 바이러스를 연구소에 들여 왔어. 주변 주민의 반발이나 후생 노동성의 규탄이 훤히 보이는군.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니카이도 연구소는 사적 연구 기관으로서는 최첨단 설비를 자랑하고 있어, 위험도가 비상히 높은 '레벨 4'의 바이러스를 다룰 수 있는 국내 유수의 감염증 연구소였다. '레벨 4' 바이러스란 에볼라 바이러스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등, 감염력 및 감염자의 치사율이 대단히 높은 바이러스를 가리킨다. '레벨 4'의 연구 시설이란 그런 바이러스를 다룰 수 있을 만한 안전 설비를 갖춘(달리 말하자면 만의 하나의 경우에도 그런 바이러스를 실험실 안에 가둬 둘 수 있는) 시설이다. '다룰 수 있다'는 전제가 붙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국내에는 이 곳 외에도 '레벨 4' 시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주변 주민의 반대 때문에 여태껏 한 번도 '레벨 4' 시설로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시설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자기 집 근처에 에볼라 같은 흉악한 바이러스가 들어온다면 주민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다. 니카이도 연구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구소 설립 때부터 주변 주민과 약속한 대로 이 곳에 들여 올 수 있는 바이러스는 '레벨 3'까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사리사욕이나 명예를 위해 연구를 하신 게 아니니까요."

"그래. 나는 바이러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대부분이 개발 도상국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시장이 없다는 이유로 백신이나 항 바이러스 약의 개발이 늦어지고 있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니카이도는 눈 앞에 놓인 두 개의 앰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자네에게 가르칠 필요도 없겠지만, 현재의 바이러스 대책은 대처 요법이 대부분이지. 이번 같은 살인 바이러스에 이렇게까지 완벽한 항 바이러스 약이 완성되었던 예는 없네. 게다가 이 바이러스는 숙주에 전혀 자각 증상을 주지 않고 2주 간의 잠복 기간을 거쳐 폭발적으로 체내 증식을 하는 시한폭탄형이야. 사용 방법에 따라서는 궁극의 살인 병기가 될 수도 있어."

두 개의 앰플에 담겨 있는 액체는 '궁극의 살인 병기'라는 말을 거부하듯이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최근 들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키라'라는 인물은 특정한 인간을 죽일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 바이러스와 항 바이러스 약을 가진 자는 반대로 특정한 인간 외의 모두를 죽일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이 바이러스가 위험한 사상과 이어지면 '키라'보다도 질이 나빠질 거야."

깊은 한숨을 내쉰 니카이도는 책상 위의 액자에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아직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기 전, 세 가족의 행복한 나날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를 일본 내에 놔 둘 수는 없어. 아마도 후생 노동성은 미국 질병 관리 센터에 보낸다는 결정을 내릴 테지. 결국 내가 한 일은 바이러스 병기 개발의 선봉장을 맡은 것과 마찬가지야. 아내가 살아 있었더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니카이도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교수님, 합중국은 바이러스 병기에 대해서는 방어 연구에만 그치고 병기로는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요…."

쿠조의 말에도 니카이도의 얼굴에서는 어두운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빠, 밥 다 됐어!"

앞치마를 두른 마키가 연구실에 들어왔다. 니카이도와 마키는 연구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맨션에 살고 있었다.

"마키, 또 마음대로 들어왔구나. 경비원에게 단단히 말을 해 둬야겠는걸."

타이르는 말투였지만 니카이도의 입매는 느슨해져 있었다.

"예, 예. 알았으니까 식기 전에 밥 먹으러 와. 그리고 그 가운 며칠이나 입고 있는 거야? 그만 좀 갈아 입어!"

마키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니카이도의 가운을 벗기려 들었다. 쿠조는 웃음을 참으며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쿠조 씨, 다음엔 언제쯤 공부를 봐 줄 거야?"

"내일 밤이라면 괜찮아."

"알았어. 그럼 동물한테 먹이 좀 주고 올게."

니카이도는 딸의 모습을 배웅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제 엄마를 닮는군. 아직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나이일 텐데 잘 자라 줬어."

"완전히 사모님을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면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교수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다니 대단한 아이예요."

 

쿠조가 동물 사육실을 들여다 보자 마키가 실험 동물인 침팬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많이 먹어."

목소리는 밝았지만 마키의 뺨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내일 실험에서 실험체가 될 동물들이었다. 쿠조의 모습을 본 마키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정을 주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우리 안의 침팬지는 실험 동물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듯 마키를 잘 따랐다. 쿠조가 마키의 옆에 웅크리고 앉자 침팬지는 위협하듯이 이빨을 드러낸다.

"매 년 이렇게 몇 만, 몇 십만이나 되는 동물들이 희생해 주는 덕분에 우리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인간은 서로 죽이고, 미워하고 참 제멋대로지. 인간은 이 지구의 자연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

쿠조가 마키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마키, 지금 이 세상의 인간들이 이 아이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 같니?"

마키는 동물들을 보며 조금 생각하는 눈치였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 애들을 희생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상 우리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마키는 흔들림 없는 맑은 눈으로 쿠조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데?"

쿠조는 슬픈 듯한 웃음을 띠며 마키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마키처럼 생각해 준다면 세상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지도 모르겠구나."

마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표정은 고뇌하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ℒ 18-3

계획

 

빌딩 창문으로 한 노인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에는 수도 고속도로가 뻗어 있다. 끊임 없이 이어지는 차들의 뒤 쪽으로는 냉랭한 고층 빌딩들, 그리고 그 뒤에는 스모그로 어렴풋이 흐려진 하늘이, 빌딩에 그 대부분이 가로막힌 채 조그맣게 펼쳐져 있었다. 백발 노인인 카가미 박사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중얼거렸다.

"이걸 과연 인류의 진화라고 해야 할까. 석유 연료의 고갈이 가까워지고,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이나 식량 위기의 도래에 따른 어두운 미래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단의 날을 미루고 있으니…. 이런 건 진화도, 번영도 아니야. 인류는 퇴화하고 있어."

카가미는 분노가 서린 깊은 한숨과 함께 실내를 돌아 보았다.

"인간도 지구 환경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류는 잊어버리고 있어. 완벽한 자연의 사이클은 이제 이런 상자 정원 안에만 남아 있을 뿐이야."

그는 '상자 정원'이라고 부르는 유리로 가로막힌 공간으로 사랑스러운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실내 중앙에 놓인 거대한 비오톱(biotope)이었다. NPO 법인 '블루십' 실내에서는, 거의 반쯤 자리를 차지한 비오톱에 맞추어 배치된 사무 책상에서 10명 쯤 되는 멤버가 회원제 환경 보호 계발 전단지 발송 작업을 하고 있었다. 초로의 남자 한 명이 개인 사무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카가미 박사님, 연락이 왔습니다. 완성되었다고요."

카가미는 그 말에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오오, 그렇습니까. 마토바 군, 그러면 이제 슬슬…?"

마토바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에는 조용한 웃음이 머무르고 있었다.

"예, 내일 밤 계획을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멤버들이 대외적인 활동을 하던 손놀림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여러분." 마토바가 멤버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여전히 온화한 미소. 그것은 온화하기는 하나 결코 다정해 보이지는 않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보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어떤 일에도 파도치지 않는 고요한 눈동자와 뺨에 남은 커다란 화상 흉터였다.

"카가미 박사의 명저 <절멸위구종(絶滅危構種)·인간>의 사상에 찬동해서 모인 여러분이 원하는 사회, 이상적인 지구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계획에 드디어 첫 족적을 남길 때가 왔습니다. 이상을 위해 집결한 여러분께는 괴로운 결단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의 분기점에서는 이렇게 '앞서 가는 이'가 사람들을 이끌 필요성이 있고, 어느 정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각오를 다지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상을 위해 '선택된' 멤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계를 바꾸는' 겁니다."

2년 전, 마토바가 블루십에 들어온 뒤로 몇 번이나 입에 담았던 말이었다. 결코 강요 받은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는 사실을 새겨 두는 것, 그리고 그것이 '깨달은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고매한 이상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 대단히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의식 작업이었지만 멤버들은 열에 들뜬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자 정원 안의 조화로운 세계를 이 지구상에 되살릴 날이 가까웠군요."

카가미는 상자 정원 안에서 다가올 미래가 보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비오톱은 그 거대함이 알려 주듯, 그들이 하는 활동의 상징이자 이상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모든 생물이 조화로운 공간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고 세계를 구축하는 한 부분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개인 사무실로 돌아온 마토바는 방문을 잠그고 수화기를 들었다. 회선이 연결되자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한다. 때때로 웃음을 섞어 가며 상담을 진행했다.

"이런, 잘 생각해 보셔야죠. 핵 병기를 대신할 새롭고도 획기적인 억제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겁니다. 40억 달러라면 싼 값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마토바의 웃음은 혼자 남게 되자 교활하게 바뀌었다. 뺨에 있는 화상 흉터가 그 웃음을 한층 더 일그러뜨렸지만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군도 참, 거래에는 도가 트셨습니다. 군인이 아니라 장사꾼이 됐으면 더 성공하셨을지도 모르겠는걸요."

모든 것이 정연하게 정리된 집무 책상 위에서, 마토바의 손가락이 마치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놓인 지구의를 천천히 돌렸다.

"과연. 먼저 효과를 보고 싶다, 그 말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