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어머니의 기도 (Stella Dallas) -9- 어머니의 편지

"엄마는 변덕쟁이……."

 

보스턴으로 돌아간 로렐이 어머니의 무릎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엄마 곁에서 떠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저도 모르게 저를 다른 집으로 보내려고 하셨어요? 너무하세요."

"하지만 로렐……."

 

어머니는 허둥거렸습니다.

 

"난 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다. 뉴욕에 가면, 너는 댈러스 집안의 아가씨로서 어딜 가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도 훌륭한 분이시고, 모리슨 아주머니도 네 어머니로서 자랑할 만한 분이니까."

"아냐, 아냐. 그런 말씀 마세요. 그야, 전 모리슨 아주머니를 좋아해요. 아빠도……. 그런데 전 이제까지 아빠하고는 그저 즐겁게 놀았을 뿐이에요. 엄마하곤 달라요. 저와 엄마는 여러 가지 싫은 일과 괴로운 일을 함께 겪어 왔어요. 괴로움을 함께 겪어 온 엄마를 버리고 저만 가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어머니는 로렐의 말이, 마음에 사무치도록 기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렐을 귀엽게 생각할수록, 더욱 로렐의 앞길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얘야, 로렐. 부탁이다. 일 년도 좋고 반 년도 좋으니, 뉴욕에 가 있거라."

"싫어요. 무슨 말씀을 해도 싫어요."

 

로렐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이런 초라한 아파트에서 살며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거냐? 대학에 갈 수도 없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 엄마하고 단 둘이서 무엇을 즐거움으로 삼고 살자는 거냐?"

"아, 그거요?"

 

로렐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살하가는 일이라면 좋은 생각이 있어요. 전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직업을 가지고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도 일할 생각이에요."

"뭐라고? 일을 한다고……?"

"그래요. 전 타이피스트가 되고 싶어요. 타이프라이퍼를 배우겠어요. 그래서 당당한 타이피스트가 되어 회사에서 일하겠어요."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얘, 로렐. 일을 하다니,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왜요? 일한다는 게 뭐가 부끄러워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있어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운 거예요."

 

로렐은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아."

 

그러나 어머니도 잠자코 있지 않았습니다.

 

"당치도 않다. 네가 타이피스트가 될 정도라면, 난 죽어 버리겠다. 정말, 정말이지 죽어 버리는 게 낫다."

 

어머니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낡은 어머니로서는, 여자가 일한다는 건 더없이 부끄럽고 싫었습니다.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은, 상류 사람들이 모이는 화려한 곳에 출입하고, 집안 좋은 신사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렐이 그 행복을 잡으려고만 하면 당장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뉴욕에 가기만 한다면, 댈러스 집안의 아가씨가 되기만 한다면…….

 

 

 

'로렐을 뉴욕에 보낼 방법이 없을까?'

 

그 날 밤, 로렐이 잠든 뒤에도 어머니는 자지 않고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대로 있으면, 로렐은 나와 헤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된다!'

 

드디어, 어머니는 거기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죽을까?'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저 콘크리트 길로 단숨에 뛰어내린다면……?'

 

어머니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권총? 그렇다. 권총이라면 쉽게 죽을 수 있다.'

 

그런데 권총을 생각하자, 어머니의 머리에 스티븐의 아버지 일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스티븐의 아버지, 즉 로렐의 할아버지도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기가 자살하면, 로렐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을까?

 

"저 여자의 어머닌 자살했대."

"저 여자의 할아버지도 자살했다는데."

 

자살자의 손녀, 자살자의 딸이라는 말을 들으면 행복해지기는커녕 로렐의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아, 그렇다면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죽는 것도 단념해야 하는 어머니는 깊이 생각한 끝에,

'그렇다. 에피한테 가서 의논해 보자.'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겨우 안정을 되찾고 서류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에피한테서 이사했다는 편지가 왔었는데, 그 편지를 찾아 주소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짓이라면 아무것도 아냐. 로렐한테 정떨어질 짓을 계속 하면 돼."

 

로렐의 어머니 스텔라가 도움을 청하자, 에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로렐한테 정떨어질 짓이라니, 이를테면 어떤 것 말야?"

"예를 든다면 술을 마시는 것이 있지. 로렐은 네가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겠지?"

"물론이지."

"그럼 술을 마셔. 그리고 되도록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거야. 고상한 체하지 말고……."

"어머,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그럴 용기가 없어? 그렇다면 나한테 물을 것도 없어. 하겠다면 너를 도와주지. ……어때? 분명하게 말해."

 

로렐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죽으려고까지 했으니,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스텔라는 자신있게 다짐했었습니다.

 

"좋아, 하겠어!"

"훌륭해. 그럼 당장 축배를 들자."

 

에피는 스텔라의 어깨를 툭 치더니, 술병과 술잔을 꺼내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넘실넘실하게 따랐습니다.

 

"로렐의 행복을 위해, 축배!"

 

에피가 활달하게, 스텔라의 술잔에 자기의 술잔을 부딪쳤습니다. 스텔라는 눈을 감고 꿀꺽, 술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스텔라가 아파트로 돌아오자, 로렐이 저녁 식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딜 다녀오세요, 엄마?"

"나 말이냐? 좋은 곳."

"좋은 곳이라고요?"

"친구한테……. 에피 아주머니……. 로렐이 알던가?"

"글쎄요, 전……."

"그래? 그럼 요담에 만나게 해 주지. 아주, 아주 좋은 아주머니란다."

 

스텔라는 남자처럼 말했습니다.

 

"그런데 로렐, 너 타이프라이터를 배우겠다고 했지."

"네. 타이피스트가 되고 싶어요."

"무엇이든 되면 좋지. 되고 싶다면……무엇이든……."

 

어머니는 말하다가 식탁 위에 엎드려 버렸습니다.

 

"왜 그러세요, 엄마?"

 

로렐은 깜짝 놀라서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술 냄새가 확 끼쳤습니다.

 

"어머, 술! 술 마시셨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떡해, 엄마?"

 

로렐은 울상이 되어서 어머니를 안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갔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로렐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 보니, 어머니 못지않게 야한 몸차림을 한 아주머니가 어머니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출입문에 우뚝 선 로렐을 보고,

 

"오, 로렐. 돌아왔구나. 이분이 바로 에피 아주머니시다."

 

하고, 비틀거리면서 다가와 그 아주머니를 로렐에게 소개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취해서 거슴츠레한 눈으로 로렐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안녕, 로렐. 많이 컸구나.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의 엄마 친구야. 네가 아기였을 때는 자주 왔었지. 그런데 그 별난 너의 아빠가 나를 무척 싫어했었지. 그래서 출입을 못 했지. 너의 아빠는,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괴팍스런 사람이었어. 고상한 체하면서 말이야."

"그만하세요!"

 

로렐이 소리쳤습니다.

 

"아빠를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런, 이거 실례했구나. 잘못했다. 이제 그런 말 하지 않으마. 자, 친하게 지내자. 화해하자는 뜻에서 너도 한 잔, 어떠냐?"

 

곤드레가 된 에피의 말을, 로렐은 끝까지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렐은 고개를 홱 돌려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으로 나갔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두워진 동네를 그저 이리저리 쏘다녔습니다.

걷다가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 보니, 에피는 벌써 가고 어머니만 코를 요란하게 골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뒤, 날마다 에피가 찾아왔습니다. 때로는 저속한 눈매의 남자도 데리고 와서, 술을 마시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되었을 때, 로렐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에피라는 사람하고 이제 그만 사귀세요. 그리고 술도 그만 드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로렐이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는 무서운 눈으로 로렐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잔소린 그만두어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거다. 그걸 그만두게 할 권리가 너한테는 없다."

 

어머니를 그토록 바꾸어 놓은 게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로렐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로렐은 홀쭉하게 야위었습니다. 볼이 파랗게 되고, 입술에서도 핏기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로렐은 보기에도 우울한 아가씨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로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로렐

　너는 엄마의 이 편지를 읽고도 놀라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번에 엄마는 에피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너한테 의논하려고 생각했지만, 반대할 게 분명해서 그만두었다.

　아무쪼록 엄마의 행복을 방해하지 말아 다오.

　방해하지 않으려면, 네가 뉴욕의 아빠한테 가는 것이 제일 좋겠다.

　싫어도 가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너와 함께 있어서는, 엄마는 행복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결혼하면, 곧 그 분과 함께 남아메리카로 간다.

　그럼 뉴욕의 아빠와 모리슨 아주머니ㅡ아니, 너의 새엄마께 부디 잘 해라.

　난 오늘 이후에는 너의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