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메리 웨스트매콧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출간 직후 애거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등에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실종 사건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 때의 사유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 1956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필명을 쓴 것은 추리소설 독자들을 혼동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였고, 이는 애거사의 뜻에 따라 오십 년 가까이 비밀에 부쳐졌다. 여성의 고독, 사랑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대한 특유의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이 장편들 가운데서도 중년의 여인이 자기 기만적인 삶을 깨닫고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린 <봄에 나는 없었다(Absent in the spring)>는 애거사의 숨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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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 <봄에 나는 없었다(Absent in the spring)> 中

 

 

 

처음 이 소설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그녀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름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여성의 삶과 사랑 등을 다룬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여섯 편의 작품은 모두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천착한 이른바 서정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독특했다. 독자들이 애거사 크리스티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때문에 필명으로 출판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는 다른 얼굴로 독자들과 마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튼 획기적이었고 신선했고 기대가 됐다. 나도 어릴 적부터 알았던, 특히 책보다 미스 마플과 푸아로 탐정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니 영화들을 통해 접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를 떨치고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대하는 마음으로 <봄에 나는 없었다>에 접근했다.

번역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애거사와 이 작품에 놀랐다. (중략) <봄에 나는 없었다>를 번역하면서, 나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인간에 대해 정말 잘 아는 작가라고 느꼈다. 기발한 사건을 만들고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감추거나 드러내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중년 여자의 자기고백과 자기혐오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정말 대단했다. 나는 어릴 적 이후 다시 한 번 애거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영국 런던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타운. 조앤은 지역 변호사의 아내이자 삼남매의 어머니로 정원을 가꾸고 지역 단체에서 활동하며 활기차고 우아한 삶을 꾸려 간다고 자부한다. 자상한 남편과 잘 자란 자녀들이 그녀의 자랑이자 전부이다. 바그다드에 사는 막내딸의 중병 소식에 병문안을 갔던 조앤은,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우로 인한 기차 지연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숙소에서 며칠간 발이 묶인다. 그녀는 이 시간을 자신을 돌아보고 평화롭게 휴식하는 기회로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 들은 이야기가 조앤의 평화로웠던 마음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인적 없는 사막,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조앤은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낯설고 아픈 경험을 한다. 내가 알았던 것이 진짜 아는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 남들 눈에는 자신이 멋지게 비칠 거라고 우쭐댔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는 엄연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고, 조앤은 이를 끝까지 부인하려 하지만 결국 무너지듯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편과 자녀들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깨달으며 황망함과 커다란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녀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자기만족에 빠졌던 그녀는 사막이란 낯선 곳에서 진실을 마주하고 변화를 다짐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과 마주한 순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소설의 반전이자 애거사가 인간의 핵심을 꿰뚫는 대목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진실을 알면서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나는 그 대목에서 아찔했다. 등골이 오싹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조앤이 유난히 어리석은 여인이라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조앤처럼 살아간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변명해 보지만, 글쎄. 나는 소설이 끝난 순간, 완전히 몰입했던 연극 무대의 불이 한순간에 꺼진 듯한 느낌을 맛보았고, '나'를 보았다.

 

- 역자 공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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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라니! 얼어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 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보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 너는 충분히 넉넉하지가 않았어.

 

옳은 말을 엉뚱한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더한 시간 낭비는 없지.

 

내가 봐 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고결한 인간인지 자기가 한 일에 무슨 도덕적 이유가 있는지 떠들어 대는 일,

또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계속해서 후회하는 일이야.

양쪽 말 다 사실이겠지, 자기 행동의 진실을 깨닫는 거라는 점에서는.

하지만 그랬으면 넘어가야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 계속 살아가야지.

 

- 데임 로라, <딸은 딸이다(A Daughter's a Daughter)> 中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는 팔십여 편의 추리소설을 통해 꾸준히 인간을 그렸지만, 그것만을는 말하고 싶던 인간의 이야기를 다 풀어내지 못한 듯하다. 그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여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이 시리즈는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심리에 집중한다. 그 시리즈 중 하나인 <딸은 딸이다>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오롯이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주인공 앤과 세라를 어머니/딸, 여자, 인간으로 조명한다. 한 사람이 어머니/딸, 여자, 인간의 입장에서 각각 다른 행동, 다른 심리를 가질 수 있고, 그 입장에 따라 둘의 관계도 미묘하게 달라지고 꼬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시각이다.

 

앤은 일찍 남편을 잃고 열아홉 살인 딸 세라와 런던에서 평화롭게 산다. 품위 있는 앤과 발랄한 세라는 서로 의지하고 보살펴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듯하다. 그러던 중 앤의 재혼을 세라가 반대하고, 세라가 사랑하는 남자를 앤이 못마땅해하면서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앤은 어머니로서 딸을 택할지, 여자로서 사랑하는 남자를 잡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하게 만든 세라 또한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고 방황한다. 어머니와 딸의 자리를 지키느라 여자로서의 사랑을 희생했다고 믿는 두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 희생이 정말 서로에 대한 사랑과 결속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은 사랑을 잃은 후에 서서히 망가지고, 자신의 불행을 상대의 탓으로 돌린다. 그렇다, 어머니도 딸도 본능을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봐야만 앤과 세라는 화해할 수 있다. 또 그 화해가 이루어져야 황폐해진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다.

"딸은 딸이다"라는 말은 성인이 되고 아내를 얻으면 어머니에게서 거의 완전히 독립하는 아들과 달리 딸은 어머니에게 언제까지나 딸로 남는다는 의미다. 딸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모녀는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든 죽을 때까지 감정적으로 깊이 이어진 관계이고,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아무리 틀어지고 멀어져도 이해와 공감의 실마리를 늘 붙잡고 살아간다. 앤과 세라가 겪는 사랑과 증오와 화해 속에서 세상 모든 어머니와 딸의 심리를 읽어 낸 작가의 힘, 놀랍다.

 

- 역자 공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