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권택영 번역

서문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필자가 받은 좀 이상한 원고에 붙은 두 개의 제목이었다. 필자의 이 글이 서문이 된 그 이상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1952년 11월 16일 구속된 상태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었다. 그의 재판이 시작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험버트의 변호사이자 나의 친한 친구요 친척이기도 한 클래런스 코에이트 클라크 씨가 내게 이 원고를 편집해 달라고 부탁했다. 클라크 씨는 현재 워싱턴 D.C.변호사 협회에 속해 있는데 험버트가 「롤리타」의 출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나의 저명한 사촌에게 위임한다는 유언장의 한 조항을 조건으로 원고를 받았다. 그의 결정은 아마 자신이 선정한 편집자가 방금 폴링 상을 탄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수상작은 『감각들이 의미를 만드는가?』라는 수수한 책이었는데 괴상한 정신 상태와 성 도착을 논의한 것이다.

나의 작업은 우리 두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간단했다. 분명하게 문법이 틀린 것을 고친다거나, 험버트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비석이나 이정표(취향 상으로나 동정심으로 사람들이 감추려 했을 인명이나 지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로 줄기차게 나타나는 몇몇 고집스런 내용들을 조심스레 억누르는 것 외에 이 굉장한 수기는 여기 그대로 선보인다. 험버트라는 기묘한 이름은 저자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고 물론 이 가면─최면에 걸린 두 눈이 빛나는 가면─도 그가 원하는 한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헤이즈>만 여주인공의 진짜 성에 운을 맞추어 지었는데 그 이름은 작품의 숨결과 너무나 얽혀 있어서 도저히 바꾸어 볼 수가 없었다. 독자 스스로가 느끼게 될 테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실질적인 필요도 없었다. 험버트의 범죄는 1952년 9월에서 10월 사이 일간지를 보면 잘 나와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수기를 읽어 가는 동안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범죄의 동기와 목적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는지도 모른다. 이 <진실된> 이야기 속에서 제시된 것 너머에 있는 <실제> 사람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하는 구식 독자들을 돕기 위하여 <램즈데일>의 <윈드 밀러> 씨로부터 받은 몇몇 자료들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 분은 자랑스러운 자기 동네에 <이 유감스럽고 불미스런 얘기의 긴 그림자>가 드리울까 봐 신분을 감추고 싶어했다. 그의 딸인 <루이스>는 지금 대학 2학년생이다. <모나 달>은 학생으로 파리에 있다. <리타>는 최근에 플로리다의 어느 호텔 주인과 결혼했다. <리처드 실러>* 부인은 1952년 크리스마스 날에 그레이 스타라는 북서부의 어느 먼 개척지에서 사산한 딸을 낳다가 죽었다.

*킬러 거리에 사는 스킬러라고 발음할 수도 있다.

 

<비비안 다크블룸>*은 『나의 신호(My cue)』라는 전기를 곧 출간할 예정인데 원고를 탐독해 본 비평가들은 그것이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된 여러 묘지 관리인들은, 그 어떤 유령도 출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철자를 재조합하면 저자의 이름이 된다. 많은 언어 유희 가운데 한 예.

 

단순히 한 권의 소설로 보자면 『롤리타』는, 만일 진부한 회피의 방법으로 표현이 흐려졌더라면 독자의 분통을 터지게 할 만큼 모호할 수도 있는 상황과 감정들을 다루고 있다. 정말이지 책 전체를 통해서 외설스런 단어는 단 한 마디도 없다. 사실, 천박한 소설 속에서 외설스런 단어가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 관습에 길이 든 뻔뻔스런 속물들은 이 책에 그런 게 하나도 나오지 않는 데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고상한 체 하는 모순투성이 숙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편집자가 누군가 <최음적>(1933년 12월 6일 훨씬 더 물의를 일으킨 또 다른 책에 대해 존 M.울시 판사가 내린 이 방면에 대한 기념비적 결정을 보라)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들을 빼거나 희석시켜야 한다면 『롤리타』의 출간은 당장 그만 둬야 할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치게 감각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는 장면들은 바로 도덕의 극치에 다름아닌 어느 비극적인 이야기의 발전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상업적인 포르노그래피도 그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학자들은 <험버트>의 열정적인 고백은 시험관 속의 폭풍*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적어도 미국 성인 남자의 12%─블랑슈 슈와츠만 박사(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따른 <보수적인> 통계이다─는 험버트가 절망적으로 묘사한 그 특별한 경험을 이런저런 식으로 매년 즐긴다는 것이다. 또 그 미친 수기 작가가 운명적인 1947년 여름에 능력 있는 정신병리학자를 찾아 내기만 했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이런 책이 나올 수도 없었으리라.

*하찮은 일.

 

이 주석자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가 책과 강의에서 강조했던 것을 반복할까 한다. 즉, <불쾌한>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독특한>이란 말과 동의어이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늘 독창적인데 작품이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성격 때문에 다소 충격적인 놀라움을 수반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험버트>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끔찍하고 비열하다. 그는 도덕적인 타락자의 분명한 예이다. 잔인함과 익살이 합쳐져서 최고의 비참함을 드러낼망정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그는 매우 변덕스럽다. 이 나라 사람과 풍경에 대한 그의 무심결에 비친 견해들은 대부분 우스꽝스럽다. 그의 고백을 통해 풍기는 필사적인 정직성도 그의 악마적인 교활함이 지은 죄를 사하여 주지는 못한다. 그는 비정상이다. 그는 신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하는 바이올린은 얼마나 마술적으로 롤리타를 향한 동정과 애정을 불러 내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작가를 혐오하면서도 이 책 속으로 빠져 든다!

 

사례 연구로서 『롤리타』는 틀림 없이 심리학 분야에서 하나의 고전이 될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서 그것은 속죄서의 측면을 뛰어 넘는다. 그리고 과학적인 중요성이나 문학적인 가치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진지한 독자에게 끼칠 윤리적 영향력이다. 이 통렬한 개인의 연구 속에는 일반적인 교훈이 하나 숨어 있다. 방종한 어린이, 자기 중심적인 엄마, 그리고 헐떡이는 광인─이들은 한 독특한 소설의 살아 있는 인물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위험스런 성향들을 경고한다. 그들은 잠재적인 악을 짚어 준다. 『롤리타』는 우리 모두─부모, 사회 사업가, 교육가들─가 한층 조심스럽게 더 큰 비전으로 더 나은 세대를 더 안전한 세상에서 키워 내도록 경종을 울릴 것이다.

 

1955년 8월 5일

메사추세츠 주, 위드위스에서

존 레이 주니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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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루 위에 펠트 슬리퍼를 신은 한 발을 내려놓고 쿠션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나무로 된 바닥은 경사가 져서 작은 쇠공이 부엌으로 굴러갔다. 나는 알아야 될 것을 모두 알았다. 나의 연인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빌의 오두막 너머 어디에선가 일을 끝내고 듣는 라디오 소리가 어리석은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그리고 거기, 허물어진 모습으로, 정맥이 밧줄 모양 불거진 어른 같은 손과 소름 돋은 흰 팔, 얇은 귀, 지저분한 겨드랑이의 롤리타가 가망 없이 지친 17세로, 임신을 한 채 있었다. 한때는 대스타가 되어 2020년 쯤에서 은퇴하는 꿈을 꾸었던 나의 여자. 나는 그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그렇게 분명히 나는 그녀를 내가 본 어느 것보다 사랑했고, 지구 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느 것보다 더 사랑했으며, 다른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희망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단 하나의 희미한 바이올렛 향기였고, 과거에 내가 그렇게 울며 찾아 헤매던 님펫의 죽은 메아리였다. 그녀는 하얀 하늘 아래 먼 숲, 황갈색 계곡 가장자리에 사는 메아리이고 시냇물을 막는 갈잎이며 바삭거리는 잡초 속의 한 마리 마지막 귀뚜라미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숭배한 것은 메아리만은 아니었다. 내 가슴의 엉킨 핏줄 속에 내가 실컷 불어넣었던 것, 나의 엄청나고 찬란한 죄는 정수만 남았다. 척박하고 이기적인 악덕을 나는 모두 취소하고 저주했다. 여러분은 나를 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지 말라고 야단을 하실 테지만 재갈을 물리고 반쯤 죽는다 해도, 나는 내 가난한 진실을 외쳐댈 것이다. 내가 얼마나 롤리타를 사랑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롤리타, 창백하고 더럽혀지고 다른 사내의 아이로 배가 부른 여자, 하지만 여전히 잿빛 눈에 검은 속눈썹, 여전히 붉은 갈색에 아몬드빛, 아직도 칼멘시타, 여전히 나의 것. 인생을 바꾸자, 나의 카르멘이여, 어느 곳이든지 결코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곳에 가서 살자꾸나. 오하이오? 메사추세츠의 황야? 그녀의 두 눈이 근시안의 물고기로 퇴색해도, 그녀의 젖꼭지가 부풀어 오르고 갈라져도,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젊은 삼각주가 찢기고 더럽혀진다 해도,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사랑스런 창백한 얼굴이, 목쉰 젊은 음성이 그저 스치기만 해도, 사랑으로 가득 차 올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의 롤리타.

 

「롤리타」 나는 말했다. 「이건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 모르지만 꼭 말해야 해. 인생은 아주 짧은 것, 여기서부터 저 낡은 차까지는 한 스물 내기 스물 다섯 발자국의 거리야. 아주 조금만 걸으면 되지. 자, 스물 다섯 자국만 걸어 봐. 지금, 바로 지금. 지금 그대로 같이 가자. 그리고 우린 이제부터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야」

카르멘,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무슨 뜻인지」 그녀는 눈을 뜨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뱀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 「아빠 얘긴 제가 모텔까지 따라가면 그 돈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뜻인가요?」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지. 난 네가 오다가다 만난 딕을 떠나서, 이 끔찍한 오막살이를 떠나서 나랑 같이 살고, 나랑 같이 죽고, 모든 걸 같이 하자는 거지.」(그런 뜻으로 말했다.)

「정신 나가셨어요?」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는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롤리타. 다른 조건은 없어. 다만 한 가지─ 음, 그것도 문제가 아니지(잠깐 유보.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어쨌든 네가 내 청을 거절해도 돈은 줄 거야」

「정말이에요?」 돌리는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현찰로 사백 달러, 그리고 수표로 삼천 육백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 주었다. 조심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는 아름답게 꽃피었다. 「정말」 그녀는 고통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사천 달러를 주시는 거예요?」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고 지금가지 흘렸던 어떤 눈물보다 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 턱으로 흘러내렸고 몸은 불덩이가 되었으며 코가 막혀 왔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날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넌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같이 갈 희망이 전혀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네」 그녀는 말했다. 「네, 여보, 전혀 없어요」 그녀는 전에 한 번도 나를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해요. 큐에게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나아요. 내 말은─」

그녀는 이 상황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다. 내가 마음 속으로 그 말들을 대신해 준다(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

 

「제 생각엔」 그녀는 말을 잇는다─「아이쿠」─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주워 올린다.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 돈만 있으면 우린 다음주 쯤, 떠날 수 있어요. 제발 울지 마세요. 이해해 주세요, 아빠. 맥주를 더 갖다 드릴게요. 아, 제발 울지 마세요. 그 동안 너무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게 삶인가 봐요」

나는 내 얼굴과 손가락을 씻었다. 그녀는 선물을 보고 웃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딕을 부르려고 했다. 나는 곧 갈 테니 그를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에 궁색해진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계속 지켜본다─내 축축한 망막에서 그것은 떨면서 부드럽게 타오른다─문지방 위에 앉아서 빈 깡통에 자갈을 쨍그렁 던져 넣는 열두 살 된, 피어오른 아이. 나는 간신히 말을 꺼낸다. 「나는 가끔 귀여운 맥쿠 소녀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 좀 나아졌을까?」─하지만 그녀가 다시 끼여들지 않도록 나는 말을 멈춘다. 「나는 가끔 귀여운 헤이즈 소녀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 마침내 나는 돈 문제로 화제를 옮긴다. 그 돈은 너의 엄마 집을 세놓아 받은 돈을 모은 것이다. 그녀는 물었다. 「그 집은 몇 년 전에 팔지 않았어요?」 「아니(나는 램즈데일과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려고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 것을 인정한다). 변호사가 후에 재정적인 상황을 자세히 밝히는 서류를 네게 보낼 것이다. 참 다행이지. 엄마가 소유했던 얼마 안 되는 증권이 오르고 올랐어. 그래, 자, 이제 난 정말 떠나야 할 것 같구나. 나는 가야만 한다. 그를 찾아서 없애 버려야 하니까」

 

그녀의 입술이 닿는 걸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그녀와 그녀의 배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그녀와 개가 나를 전송했다. 나는 놀랐다(이건 수사적으로 이렇게 쓴 것 뿐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그리고 님펫이었을 때 탔던 오래 된 차를 보고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차의 아가미가 자줏빛이 되는군요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건 네 차야, 나는 말했다. 나는 버스로 가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린 비행기로 주피터에 가서, 거기서 새 차를 살 거예요. 그럼 이 차를 너한테 오백 달러 주고 사지.

「그런 식으로 가면 우린 다음에 백만장자가 되겠네요」 그녀는 기뻐 날뛰는 개를 보고 말했다.

칼멘시타, 그녀에게 나는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나는 끔찍스럽게 조심스러운 영어로, 「넌 정말, 정말이지, 물론 내일은 아니고, 모레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 어느 날, 어느 때든지, 나와 함께 살지 않겠니? 만일 네가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주기만 한다면 나는 새로운 신을 창조하여 가슴으로 울며 감사할 거야」(그런 뜻으로 말했던 것 같다.)

「안 돼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순 없어요」

「그렇다면 문제가 아주 달라지지」 험버트 험버트가 말했다.

그러자 나는 권총을 꺼냈다─내가 이렇게 하리라고 독자들이 상상할 수도 있는데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생각은 손톱만치도 떠오른 적이 없다.

「안녕!」 그녀는 노래했다, 나의 달콤한, 불멸의, 죽은, 아메리카의 연인이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쯤 그녀는 죽었고 불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국과 합의를 본 문구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차를 몰고 나가자, 딕을 부르는 그녀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개는 내 차 옆에서 살찐 돌고래처럼 펄떡펄떡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무겁고 늙어서 곧 포기하고 만다.

이윽고 나는 저무는 날의 가랑비 속을 뚫고 달렸다. 와이퍼가 빗물을 힘껏 닦아 냈으나 흐르는 내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 2부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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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첫 번째 여행 동안─우리들의 낙원이 열리던 날─평화롭게 나의 환상을 즐기려고 나는 내가 직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기로 단단히 맘먹던 날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도 아니고, 매력 있는 사내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아니 하나의 인간조차 되지 못하고, 그저 두 개의 눈과 다리 하나를 가진 게걸스런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그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표현했을 때에도. 그녀에게 전날 밤에 약속한 것을 철회하고 난 후(재미를 추구하는 그녀의 어린 가슴이 원하던 것은 무엇이든─바닥이 아주 특이한 롤러 스케이트장이나 혼자 가기를 원하던 주간 공연 영화 등), 나는 우연히 조금 문이 열린 욕실의 비스듬한 거울에서 그녀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그건 정확히 설명하기거 어려운… 너무나 가망이 없어 그저 이것이 불의와 좌절의 한계이기에 오히려 편안히 공허 속으로 침잠해 가는 그런 표정이랄까─그리고 모든 한계는 그 너머의 것을 상징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것이 한 아이의 치켜진 눈썹이고 열린 입술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때, 당신은 다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육욕의 깊이란 얼마나 깊으며, 그에 따른 절망은 또 어떠한가,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랑스런 발 밑에 꿇어앉아 인간적인 눈물을 흘릴 수 없었고, 그녀에게 그리도 절실한 바깥 세상에서 그녀가 더럽고 위험한 아이들과 어울리며 즐기는 것을 내 질투는 허락할 수가 없었다.

 

깊이 묻어 두었던, 하지만 이제는 팔다리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 기억들이 있다. 언젠가 해가 지는 비어즐리 거리에서 그녀는 어린 이바 로즌(나는 두 님펫을 음악회에 데리고 갔는데 뒤에 어찌나 바싹 따라갔는지 거의 살이 닿을 지경이었다)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아주 침착하고 진지하게 친구가 한 말에 대답을 했다. 밀턴 핀스키란 남자애가 음악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러자 롤리타는 말했다.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 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 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기 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 나는 가끔 느끼고 있었다, 우리─그녀와 나─가 전적으로 사악한 세계에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나이 든 친구, 그녀와 부모, 그녀와 정말 건강한 애인, 나와 애너벨, 롤리타와 숭고하고 순수하고 신성한 해럴드 헤이즈 사이에서 상의될 문제들을 내가 상의하려면 이상스럽게 당황스러웠다. 추상적인 사상이나, 회화, 점묘된 홉킨스나 머리카락이 빠진 보들레르, 신, 셰익스피어 등, 진실한 종류면 어떤 것이든지 그랬다. 선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질적인 성급함과 지루함으로 감추었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인위적인 음성을 사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초연한 듯 얘기했기 때문에 듣고 있던 롤리타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무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불쌍하고 상처받은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발이 다섯 개 달린 괴물이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비열하고, 야비했고, 거칠고, 그 이상 모두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했다!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 챌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지옥이었다, 내 귀여운 연인. 소녀 롤리타, 용감한 돌리 실러.

 

나는 어떤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것을 낙원에서의 빙산들이라고 부르자. 내가 그녀에게 정욕을 채우고 나서─환상적이고 거의 제정신이 아니어서 끝난 후엔 흐물거리고 하늘이 막히는 듯 했다─나는 팔 안에 그녀를 안고 인간적인 부드러움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그녀의 피부는 포장된 도로로부터 블라인드의 틈새로 새어드는 네온 불빛으로 번들거렸고 검은 속눈썹은 엉클어져 있었고, 말없는 잿빛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텅 비어 있었다─어린 환자가 큰 수술 후 아직도 마취가 안 풀려서 멍한 것처럼)─그러면 내 사랑은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깊어지곤 했다. 그리고 내 대리석 같은 팔 안에 외롭게 빛나는 롤리타를 안고 달래고 쓰다듬었고, 그녀의 따스한 머리칼에 파묻혀 신음하고 여기저기 애무하며 말없이 그녀의 축복을 빌었다. 그리고 이 이타적이며 고통스런 사랑의 절정에서(내 영혼은 실제로 그녀의 벗은 몸 주위를 서성이며 참회하려 한다), 갑자기 모순되고 끔찍스럽게 정욕이 다시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그러면 「아, 제발, 싫어요」 롤리타는 하늘에 기원을 하듯 말했고, 다음 순간 나의 부드러움과 하늘빛 동경은 산산이 부서진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십 세기 중반의 사상은 정신분석학이 일으킨 소동의 현학적인 절차와 표준화된 상징들에 의해 상당히 오염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 편견 없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아비스의 아버지가 밖에서 경적을 울리며, 파파가 귀염둥이를 집으로 데려가겠소 하면, 나는 그를 응접실로 초청할 의무를 느낀다. 그리고 그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겁고, 매력 없지만, 사랑에 넘치는 아이인 아비스는 파파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앉는다. 롤리타가 낯선 사람들에게 굉장히 매혹적인 미소를 던진다는 것을 내가 얘기했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부드럽게 내리깔고 옆으로 보며, 얼굴 표정 전체가 꿈처럼 달콤하게, 환히 피어 오른다. 물론 이런 표정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롤리타의 표정은 너무 아름답고 귀여워 단순히 그녀의 얼굴을 자동적으로 환히 밝히는 신비한 유전인자로, 다시 말해 고대 환영 의식이 격세유전된 증거로 돌려 버릴 수가 없다. 거친 독자는 매춘부의 환대라고 돌려 버릴지도 모르지만. 버어드 씨가 모자를 빙빙 돌리며 말하는 동안 그녀는 거기 서 있었다─그래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롤리타의 그 유명한 미소가 지닌 독특한 특징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부드럽고, 달콤하고, 보조개가 패이면서 밝게 빛나지만, 그건 결코 방 안에 있는 이방인을 향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미소는 먼 곳에 꽃핀 공허 혹은 우연한 대상들을 향한 방황하는 부드러움을 머금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런 미소가 지금 나타났다. 뚱뚱한 아비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다가설 때, 롤리타는 부드럽게 식탁 위에서 만지작거리던 과일 칼을 보고 미소짓는다. 그녀가 기대고 선 식탁은 내게서 멀리 있었다. 갑자기 아비스가 아버지의 목과 귀를 바싹 끌어당겼고 그녀의 아버지는 무심코 뚱뚱하고 커다란 딸을 감싸 안았다. 롤리타의 미소가 빛을 잃고 얼어붙은 작은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자 과일 칼이 탁자로부터 미끄러지고 은빛 손잡이가 갑작스레 그녀의 발목을 쳤다. 그녀는 숨이 콱 막힌 듯 고개를 앞으로 움츠리고 한 발로 뛰었다. 그녀는 곧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곧 아비스가 뒤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그녀를 달랜다. 아비스에게는 뚱뚱하고 멋진 분홍빛 아빠에, 작고 작달막한 오빠, 새로 태어난 여동생, 그리고 가정, 히죽 웃는 개 두 마리가 있다. 롤리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작은 장면을 가리울 산뜻한 막을 가졌을 뿐이다─그것도 역시 비어즐리 배경에서.

 

롤리타는 불가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다가 팔을 괴고 내게 불만스레 묻는다. 「그녀는 어디에 묻혔어요?」 「누구?」 「잘 알면서. 살해 당한 내 엄마 말이에요」 「넌 엄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잖아」 나는 자신을 잘 억제하면서 묘지 이름을 얘기했다─램즈데일 교외, 철길과 레이크비유 힐 사이에 있었다. 「게다가」 나는 덧붙였다, 「그런 사고의 비극은 그것에 알맞은 묘비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의해서 어딘지 값싸게 되지. 네가 정말로 마음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극복하려 한다면─」 「레이」 만세를 부르듯 로가 말한다. 그리고 나른하게 방을 나간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는 쓰린 시선으로 불을 응시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보던 책을 집어들었다. 젊은 애들을 위한 싸구려 책이었다. 마리온이라는 우울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계모는 뜻밖에도 젊고, 명랑하고, 이해심 많은 붉은 머리 여자로, 마리온에게 죽은 엄마가 정말로 영웅적인 여자였다고 말해 준다. 엄마는 일부러 마리온에게 냉정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었기에 훗날 딸이 자신을 그리워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치며 그녀의 방으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신 건강법을 더 따랐다. 이제, 이런 기억으로 몸부림치고 놓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나는 이것과, 또 비슷한 경우들에 나 자신의 비열한 자아는 위로하면서도 올리타의 마음 상태를 무시하는 게 내 방법이고 습관이었음을 깨닫는다. 젖은 납빛 옷을 입은 나의 어머니가 밀려드는 안개 속에서(나는 그녀를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모우리네 위 산등성이를 무언가에 도취된 듯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다가 거기서 천둥번개를 맞아 쓰러졌을 때 나는 겨우 아기였다. 그리고 되돌아 보면, 아무리 야만스럽게 심리 치료자가 훗날 내 우울증을 치료했다 해도 나는 젊은 시절 그 어떤 순간에도 누구든 인정할 만한 동경이나 열망 같은 것을 접목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나 정도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보편적인 감흥을 개인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나는 샬로트와 그녀의 딸 사이가 비정상적으로 냉정했다는 사실에 너무 의지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끔찍스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특이하고 짐승 같은 동거 기간에, 결코 남과 다를 바가 없는 롤리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가족과의 삶이 내가 이 고아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삶, 이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삶보다는 더 나았으리라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 2부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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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조금 단조롭고 퇴색한 얘기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파킹턴의 반대쪽으로 느리게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옷은 내실에다 두고 왔고 권총은 욕실에 놓고 왔다. 아니다, 그 집은 내가 살고 싶은 곳이 아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떤 천재 수술의가 조각조각 이은 퀼티, 이름 없는 클레어를 되살려 놓아 그의 진로를 바꾸고, 나아가 인류의 운명 전체를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건 다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그 법석을 몽땅 잊고 싶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느낀 단 하나의 만족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회복기,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귀찮은 수술과 재발로 방해받는 긴 회복기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그리고 그가 나를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구태여 그것이 유령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할 어려움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도 토마스는 일리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흔히 시각보다 훨씬 덜 중요한 걸로 알려져 있는 촉각이 위기의 순간에는 현실을 다루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도 상당히 주요 수단이 된다. 나는 전신이 퀼티로 뒤덮여 있다. 피 흘리기 전에 둘이 뒹굴던 그 촉각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상처를 만져 본 후에야 부활을 믿으려 했다.

  

길은 이제 열린 들판을 가로질러 쭉 뻗어 있었다. 그리고 항의가 아니고, 상징으로서가 아니고, 아니 전혀 그런 류가 아니고, 그저 단순히 새로운 경험으로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법을 어긴 마당에 교통법을 어기는 게 무슨 대수인가. 그래서 나는 고속도로의 왼쪽으로 건너가서 기분이 어떤가 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횡경막이 녹는 듯 즐거웠고, 온 몸에 퍼진 더러운 촉감이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일부러 길의 반대편을 달리는 것 그 이상으로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을 어기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한층 더 고조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정신적인 열망이었다. 부드럽게, 꿈 속에서처럼, 시속 이십 마일을 넘지 않으면서 나는 기묘하게 거울 속에서처럼 차들을 마주보았다. 교통량은 많지 않았다. 차들은 이따금씩 내가 그들에게 넘겨 준 길을 달리며 미친 듯이 내게 경적을 울렸다. 마주 오는 차들은 비틀거리며 방향을 틀고 공포로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차가 많이 다니는 곳으로 나왔다. 붉은 신호등을 그냥 지나가는 것은 마치 어린 시절 금지된 버건디 산 포도주를 홀짝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이에 일이 복잡해졌다. 뒤에서 누가 따라오고 또 누군가가 나를 호위하고 있다. 그러고 나자 앞에 가던 차 두 대가 나를 완전히 막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우아하게 길을 벗어나 두세 번 크게 껑충 튀어오른 후, 나는 놀라는 젖소들 사이를 비집고 비탈진 풀밭 길을 올라간다. 그러고는 차를 부드럽게 멈추었다. 죽은 두 여자를 연결하는 사려 깊은 헤겔식 종합이랄까.

나는 곧 차에서 끌려 나오게 될 테지.(안녕, 멜모스, 대단히 고마워, 옛 친구여)─그리고 정말로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인도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구태여 협조는 하지 않아도 그들이 나를 끌고 가는 동안 차분하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마치 환자처럼 자신을 넘긴다. 그리고 경찰과 엠뷸런스의 사람들이 내게 주는 절대적인 신뢰와, 나의 상냥함으로부터 이상한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높은 비탈로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신기하고 절망적인 마지막 신기루를 떠올렸다.

 

어느 날 그녀가 사라지고 난 직후 끔찍스런 구토가 찾아와 나는 유령처럼 떠오르는 옛 산길에 차를 멈추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나 있는 산길에는 늦여름의 연한 푸른 빛 오후, 초연한 온기를 담뿍 받은 쑥이 무성했다. 속이 뒤집힐 정도로 기침을 하고 난 후 나는 둥근 돌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그러고는 달콤한 공기를 쐬면 좀 나을까 싶어 고속도로의 낭떠러지 쪽 낮은 돌난간을 향해 조금 걸었다. 작은 메뚜기들이 길가 시든 잡초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아주 가벼운 구름이 팔을 벌리고 좀 더 큰 것을 향해 간다, 큰 것은 더 느리게 하늘을 나르는 또 다른 운행일지에 종속된다. 내가 친근한 나락으로 다가서자,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노랫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골짜기 자락, 내 발 아래에 있는 작은 광산촌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붉은 지붕과 회색 지붕들로 이루어진 구획들 사이로 기하학적으로 뻗어나간 길들, 초록빛이 터질 듯한 나무들, 뱀 같은 시냇물, 광석처럼 번쩍이는 도시의 쓰레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마을 너머로 길들이 거무스름한 들판으로 여기저기 뻗어 있고, 그 들판 너머로 수목으로 가득한 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색채들보다 더 밝은 것─서로 잘 어울릴 때 더욱 아름다워지는 색채와 명암들이 있는 법이기에─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기에 더 밝고 꿈 같은 것은 잠시 동안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집합된 소리들의 아련한 떨림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더러운 입가를 문지르며 서 있는 화강암의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곧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소리는 바로 그 소리, 여인들은 집을 지키고, 남정네는 밖에 나간 투명한 어느 마을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독자들이여! 내가 들은 것은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였다. 대기가 너무도 맑아서 이 뒤섞인 소리들의 화음 안에서, 장엄하고 미세하고, 아득하면서도 요술처럼 가깝고, 솔직하면서도 신성하게 신비스런 아련한 소리들 속에서 때때로 까르르 터지는 선명한 웃음, 탁 치는 방망이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그럭대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 왔다, 그러나 환히 떠오르는 골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높은 비탈길에서, 나는 아련한 음악에, 조용한 웅얼거림 속에서 튕겨 나오는 어떤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알았다, 가망 없이 가슴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이것을 다시 읽었다. 그 속에는 뭔가 끈끈한 골수가 있고, 피가 있어서 아름답고 밝은 초록빛의 파리들이 모여 든다. 이리저리 비틀고, 내가 시도하려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어두운 물 속으로 미끄러지면서, 나는 미끄러운 자아가 나를 피해 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 봐 될 수 있는 한 신분을 감추었다. 또 내 이름도 그럴 듯한 것이 나타날 때까지 여러 가명을 사용해 보았다. 내 노트 속에는 <오토 오토>, <메스머 메스머>, <램버 램버> 등이 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내가 선택한 것이 추한 임물에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쉰 엿새 전에, 처음에는 감시자가 있는 정신병동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비록 무덤 같지만 난방이 잘 된 감방에서 「롤리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기록들을 재판에서 모조리 사용할까 생각도 했었다. 물론 내 목숨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나 중간 쯤 쓰고 난 뒤, 나는 살아 있는 롤리타를 대중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회고록의 어떤 부분들은 공개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사용될 수 있지만, 출판은 미루어져야 한다.

실제보다 좀 더 분명한 이유에서 나는 사형 제도에 반대한다. 이런 입장은 내 생각에 언도를 내리는 판사들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선고한다면 나는 험버트에게 강간에 대해서는 삼십 오 년, 그리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죄를 내리겠다. 그렇게 할지라도 돌리 실러는 아마 나보다는 훨씬 오랫동안 살아 남을 것이다. 서명한 유언장이 갖는 법적 효력과 지지 아래 나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나는 이 회고록이 롤리타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출판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쯤이면 우리는 둘 다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 쓰는 내 손에서 아직도 피가 뛰는 동안 너는 나만큼 축복받은 이 자료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곳에서부터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너에게 얘기할 수 있다. 너의 남편, 딕에게 진실해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만지지 못하게 해라.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마라. 네 아기를 사랑하기를 빈다. 그 아기가 사내였으면 좋겠다. 너의 남편이 늘 네게 잘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검은 연기처럼, 미친 거인처럼, 나의 유령이 그에게 나타나 신경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 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 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 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 2부 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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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서문을 쓴 부드러운 인물, 존 레이의 형상화를 끝낸 후 내가 어떤 말을 하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책에 대해 얘기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형상화라는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내가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사항이 논의되어야 한다. 어쩌면 자서전적 장치가 모델과 모방자를 섞어 놓을 수도 있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흔히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니면 좀 덜 점잖은 표현으로 <그 친구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 하는 질문을 떠올리기가 쉽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 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어떻게 그걸 쓰게 되었느냐,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감과 배합의 상호작용이라는 낡은 용어들에 의지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내가 한 가지 요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요술을 부리는 마술사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롤리타』라는 이 책이 맨 처음 작은 태동으로 나를 흔든 것은 1939년 말, 아니면 1940년 초, 파리에서 내가 심한 늑골 신경통으로 몸져 누워 있을 때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영감이 내 몸을 흔든 것은 식물원에 있던 어느 원숭이에 관한 신문 기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원숭이는 어느 과학자가 몇 달을 구스르자 동물로서는 맨 처음으로 숯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불쌍한 동물이 갇힌 우리의 창살이었다. 나는 신문 기사를 보고 느꼈던 충동을 글로 적어 놓았는데, 그것은 그 뒤로 계속되었던 일련의 사고들과 텍스트적으로 연관성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기사를 읽은 뒤 떠올랐던 일련의 생각들이 약 삼십 쪽 되는 단편을 낳아, 지금 소설의 원형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1924년 이래 내가 창작에 써 왔던 러시아어로 썼다(이 가운데 최고의 것은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러시아에서는 모두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었다). 주인공 남자는 중부유럽인이었고, 익명의 님펫은 프랑스인, 장소는 파리와 프로방스였다. 그는 어린 소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병을 앓고 있던 그 엄마는 곧 죽게 되고 아서(주인공의 이름)는 어느 호텔 방에서 고아 소녀를 유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트럭 밑에 몸을 던진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시에 창문을 가린 어느 밤에 친구들에게 읽어 주었다. 마크 알다노프, 사회 혁명가 둘, 그리고 여의사 한 명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어느 날 없애 버렸다.

1949년 경, 뉴욕 북쪽의 이타카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그 고동 소리가 다시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신선한 열정에 영감을 가미하여 한 번 영어로 다루어 볼 마음이 생겼다. 영어는 1903년 쯤 성 피터즈버그에서 나의 첫 번재 가정교사였던 레이첼 홈 양이 쓰던 언어였다. 아일랜드 혈통인 님펫은 첫 작품에서와 비슷한 소녀였고 주인공이 그 애의 엄마와 결혼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작품은 거의 새 것이었고, 발톱과 날개가 은밀하게 자라 한 권의 소설이 되었다.

쓰기를 여러 번 멈추기도 했고 이런저런 여담도 끼워넣었기 때문에 책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러시아와 서유럽을 꾸며 내는 데 40년이 걸린 나는 이제 미국을 꾸며 내는 일에 부딪히고 있었다. 인용 부호 없이는 별 의미가 없는 <실재>라는 단어, 그 평균적인 실재를 개인의 환상 속에 한 방울 떨어뜨리기 위해, 지역에 관한 자료들을 얻는 것이 나이 오십이 된 나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자동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던 유럽에서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써야 했다. 가끔 덜 끝낸 원고를 태워 버리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순진한 잔디 위의 비스듬한 소각로 그림자처럼 멀리, 내 원고를 두고 다녔다. 태워 버린 책의 영혼이 평생 동안 내 서류철을 쫓아다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태운다는 생각은 접어 버렸다.

 

여름이면 아내와 나는 나비를 잡으러 다녔다. 표본은 코넬 대학의 수집실이나 하버드 대학의 비교 동물학 박물관 같은 과학 기관에 기증했다. 그 나비들 밑에 핀으로 고정시킨 지역 명칭들은 난해한 전기에 취미를 가진 21세기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저녁이나 구름 낀 날, 열정적으로 『롤리타』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콜로라도 주의 텔루라이드, 와이오밍 주의 에프턴, 애리조나 주의 포탈, 오리건 주의 애쉬랜드 같은 우리들의 본부에서였다. 1954년 봄, 나는 천천히 그걸 다 옮겨 쓰고 나서 곧 출판사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신중한 옛 친구의 충고로 기가 죽어서 익명으로 출판한다는 조건 아래 출판사를 물색했다. 그러나 곧 마스크가 벗겨져 내 모습이 드러나리란 걸 깨닫고 내내 후회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롤리타』에 서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네 출판사, W, X, Y, Z는 차례로 내 원고를 받아 편집자들에게 읽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신중한 친구 F.P.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정도로 내 작품에 충격을 받았다.

 

고대 유럽에서, 그리고 18세기에조차도(분명한 예들이 프랑스에 있다),, 의도적인 방탕함이란 번뜩이는 희극이나 열정적인 풍자, 혹은 훌륭한 시인이 방자한 기분으로 드러내는 정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현대에도 <포르노그래피>란 용어는 평범함, 상업주의, 그리고 서술의 어떤 엄격한 규칙들을 암시한다. 외설이란 분명히 평범함과 짝이다. 미적 즐거움이란 어느 것이나 소박한 성적 자극으로 완벽하게 대치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성적 자극은 환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인 말이어야 한다. 환자의 아늑한 만족을 위해서 낡고 엄한 규칙에는 호색적인 것들이 뒤따른다. 예를 들면 추리 소설의 팬들이 느끼듯이, 조심하지 않으면 진짜 살인범은 실망스럽게도 예술적 독창성의 징표가 되는 그런 스토리 말이다(예를 들어 대화 한 마디 들어 있지 않은 추리 소설을 어느 누가 원하겠는가?). 그래서 포르노 소설에서는, 행동은 진부한 말들의 접합점에서 멈춘다. 스타일, 구조, 이미지는 독자를 미지근한 정욕 속에 계속 놓아 두어야 한다. 소설에서 성적인 장면은 교대로 엮어져야 한다. 그 사이의 문구들은 감각들을 서로 이어 주고 가장 단순한 고안을 이치에 맞게 연결하거나 간단한 해설이나 설명들에서 그쳐야 한다. 그래서 독자는 그런 문구들을 건너뛰면서도, 그게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므로 속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어린 시절 <실화라고 하는> 동화들을 늘 들은 데서 오는 정신적 경향이다). 게다가 성적인 장면들은 점점 커지는 초생달처럼 늘 새로운 얘기, 새로운 조합, 새로운 섹스로 점철되고 참가자도 계속 늘어나야 한다(사드의 연극에서 그들은 정원사를 불러 들인다). 그래서 책의 말미는 첫머리보다 훨씬 질탕하게 끝이 나야 한다.

『롤리타』를 시작할 때 어떤 기법들(예를 들어 험버트의 일기 같은 것)은 이 소설이 포르노가 아닐까 하는 잘못된 추측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독자는 점점 음탕한 색채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재미없고 지루해하며 읽기를 멈춘다. 이것이 네 출판사가 내 원고를 끝까지 읽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그들이 이걸 포르노로 읽었느냐 아니냐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내 책을 거절한 것은 내가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느냐가 아니라 주제 자체에 있었다. 미국의 출판사들이 금기로 삼는 적어도 세 가지 주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다음과 같다. 흑백 인종 간의 결혼이 완벽하고 지독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많은 자녀와 손자들까지 낳게 되는 것, 그리고 완벽한 무신론자가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다가 106세에 자다가 죽는 것.

어떤 반응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한 편집자는 롤리타를 열두 살짜리 소년으로 바꾸고 농부인 험버트가 으스스하고 황량한 분위기의 헛간에서 그 애를 유혹하는 것으로 하면 출판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모든 묘사는 짧고, 강하고, <리얼리스틱>한 문장이어야 한다(<그는 미친 듯이 행동한다. 내 추측에, 우리 모두는 미친 듯이 행동한다. 신은 미친 듯이 행동한다고 나는 추측한다> 등). 내가 상징과 알레고리를 싫어한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부분적으로는 신화주의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고안해 낸 갖가지 일반론들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지적인 독자는 『롤리타』의 앞부분을 들추어 보고, <어린 미국을 타락시키는 늙은 유럽이군> 하고 말했고 또 다른 독자는 <어린 미국이 늙은 유럽을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X출판사는 자문가들이 험버트에게 지루하게 느껴서 188쪽 이상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며, 내게 제2부가 너무 길다고 순진하게도 써 보냈다. Y출판사는 소설 속에 좋은 사람이 안 나와 섭섭해 했다. Z출판사는 만일 자기가 『롤리타』를 출판하면 그와 나는 함께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로운 나라의 작가치고 미적인 것과 호색적인 것을 분명히 구별하느라 시달리는 경우는 없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잡지에 젊고 잘 생긴 포유 동물을 사진 찍어 내놓는 사람들의 판단에 그저 감탄할 뿐 그 정확성을 판단하지는 못한다. 거기 나오는 사진은 대체로 과거의 주인이 껄껄 웃을 정도로 목선이 낮게 파이고, 미래의 주인이 찡그리지 않을 정도로 목선이 올라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가망 없이 진부하고 거대한 소설들 속에 나열되는 벽에 쓴 단어들을 보고 간지럼을 타는 독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소설들은 진부한 자들의 팽팽한 엄지 손가락들이 쳐 대고, 잘난 체하는 비평가들이 <강력하다>는 둥, <완벽하다>는 둥으로 토막 낸 작품들이다. 한편, 『롤리타』에서는 배울 게 하나도 없어 의미 없다고 말하는 양반 독자들도 있었다. 나는 교훈적인 픽션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존 레이가 주장했다 해도, 『롤리타』 속에는 어떤 도덕적 이끌림이란 게 없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예술(호기심, 부드러움, 친절, 황홀함)이 기준이 되는 다른 상태들과 어떻게든, 어디서든 연결된다. 그런 책들은 흔치 않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일회적 쓰레기거나 소위 사상을 담은 문학이다. 그런 것은 거대한 회반죽으로 나오는 화제성 쓰레기들로 누군가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 발자크나 고리키, 토마스 만에 금을 낼 때까지 조심스레 대대로 전해 내려 온다.

어떤 독자들은 『롤리타』를 반미 소설이라고 비난했다. 이건 내 소설에 도덕성이 없다는 바보 같은 비난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이었다. 깊이에서나 전망(교외의 잔디, 산 속의 목초 등) 묘사에서 나는 사려깊게 북미의 배경들을 다루었다. 나는 좀 활기찬 배경이 필요했다. 세속적 천박함보다 더 활기찬 게 어디 있으랴. 하지만 세속적 천박함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매너와 북아메리카의 매너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시카고에서 온 어느 프롤레타리아도 공작처럼(플로베르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스위스식 호텔이나 영국식 여관보다 미국식 모텔을 골랐다. 오직 미국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 다른 미국 작가들이 누리는 똑같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내 주인공 험버트는 외국인이고 무신론자다. 그리고 님펫에 관한 것 말고도 내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많다. 그리고 내 모든 러시아 독자들은 나의 옛 세계들─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이 나의 신세계만큼이나 환상적이고 은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불만이나 털어놓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롤리타』의 원고나 올림피아 출판본을 읽고 <무엇하러 이런 걸 썼을까?>라든가 <미친 놈의 얘기를 내가 왜 읽어야 하지?>라고 느낀 순진한 독자들 외의 경우들을 황급히 덧붙여야겠다. 내가 여기서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내 책을 이해해 준 현명하고, 감수성 있고, 성실한 독자들이 많이 있다.

감히 말하건대 진지한 작가라면 누구나 출판된 자신의 책에서 끊임없이 위안을 받는다. 그 선도적인 빛은 늘 지하실의 어느 곳에서 타오르거나 내밀한 자동 온도 장치에 그저 닿기만 해도 친근한 온기를 조용히 내뿜는다. 이 존재, 언제든 닿을 수 있는 먼 곳에서 발산하는 책의 빛은 가장 다정한 감흥이다. 그리고 책이 예상된 윤곽과 색깔에 일치하면 할수록 빛은 더 풍요롭고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책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더 간절히 떠올리고 더 다정하게 즐기는 어떤 지점, 샛길, 끌리는 골짜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1955년 봄 교정을 본 이래, 『롤리타』를 다시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기쁜 존재가 엷은 안개 뒤에서 빛이 보이는 어느 여름날처럼 집 주위에 조용히 걸려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롤리타』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특별한 기쁨에 젖어 택소비치 씨라든가, 램즈데일의 학교 반 아이들 이름, 샬로트가 <방수>라고 말하던 것, 롤리타가 험버트의 선물을 보고 천천히 다가서는 모습, 게스톤 고딘의 멋부린 다락방에 장식된 그림들, (내가 한 달 간이나 일을 하게 만든) 캐스빔 이발사, 테니스를 치던 롤리타, 엘핀스톤의 병원, 창백하고 사랑스럽고 돌이킬 수 없었던 임신한 돌리 실러가 그레이스타(이 책의 수도)에서 죽어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산자락에 들어앉은 골짜기 마을 멀리서 들리던 아이들 노는 소리(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려진 리케이데스 서블리벤스 나보코프*의 여자를 포착한다).

 

*나보코프가 콜로라도에서 발견한 나비의 학명

 

이런 것들이 이 책의 신경줄이고 비밀스런 요점, 책이 엮어지는 잠재적인 연결 고리이다─이 책을 『쾌락을 추구하는 어느 여자의 회고록』이라든가 『밀로르 그로스비의 사랑』 정도로 생각하는 독자들은 이런 부분들과 다른 장면들을 간과하고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 속에, 어느 성도착자의 생리적인 충동에 관한 암시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고, 또 무식한 청소년 범죄자도 아니고, 하룻밤 동성애를 즐기고 난 뒤 역설적이게도 추잡한 부분들이 모두 삭제된 고전물을 읽어야 하는 영국의 공립학교 소년도 아니다.

어느 나라나, 사회 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그런데도 『롤리타』를 읽고 나서 내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진지하게 걱정을 해 주었다, 내(바로 나!)가 어찌 <그런 음울한 사람들 속에서 사느냐고>. 내가 정말로 불편함을 겪는 때는 버려진 팔다리와 빚다 만 상반신들에 둘러싸인, 그런 일터에서 살아야 하는 때 뿐이다.

파리의 올림피아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 후, 미국의 한 비평가는 『롤리타』가 낭만적 소설과 나 사이의 연애 얘기라고 암시했다. <낭만적 소설>이라는 말 대신 <영어로 쓰인 소설>이라고 했더라면 이 우아한 표현이 더 정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 음성이 아주 거칠게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내 미국 친구들 가운데 러시아어로 쓰인 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영어로 쓴 내 책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 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 하는 내 설움에 있다. 그런 장치들이 결핍된 채 나는 흐린 거울, 배경을 가린 검은 벨벳 휘장, 어렴풋한 연상과 전통들 앞에 서 있다. 본국의 소설가라면 의기양양하게, 자기 방식으로 유산을 뛰어 넘기 위해, 요술을 부리듯 그것들을 주물렀을 텐데.

 

1956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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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저자의 죽음

 

어떤 작가의 작품이 그 나라에서 출판을 거부당하고, 다른 나라의 삼류 출판사에서 겨우 빛을 보았다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와 베스트셀러가 되고 문학사의 주요 작품이 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똑같은 작품인데도 처음에는 어찌 그런 혹평을 받을 정도로 통속물이고 후에는 그 작가의 전설적인 대표작이 되는가. 여기에서 물론 시대적 변천이나 어느 유명 비평가의 우연한 발언 등이 발굴의 계기가 되는 수도 있겠으나,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위와 같은 이유보다도 작품 자체가 지니는 독특한 특성에 더 기인하는 것 같다. 싸고 또 싸 놓은 보물을 펼치고 또 펼쳐서 발견할 때의 기쁨은 펼치는 노력의 강도에 비례하듯이, 난해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도 이해의 기쁨은 분석에 힘이 들 수록 더 크다. 조이스나 포크너 등 소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이 대부분 이런 부류들이겠는데,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난해한 형식 면에서는 이런 계열에 속하면서도 이것들과는 또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롤리타』는 처음 읽으면 내용이 전통적인 도덕 관념을 상당히 벗어나 읽는 이에게 거부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40대 남자가 열두 살의 어린이와, 그것도 법률 상의 아버지로서 딸과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부도덕한 소설이라니! 그러나 읽을수록 이 괴물 같은 주인공의 눈물은 우스꽝스런 느낌에서 동정으로 바뀌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어느 순간엔가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친다. 포르노 소설, 또는 도덕적 금기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출판의 거부라는 시련을 겪고 하마터면 재로 변해 버릴 뻔한 소설이 이제는 현대 주요 작가의 대표작이 된 걸 보면 소설 어딘가에 감동의 근원이 숨겨져 있으리라. 작가가 그것을 보물찾기라도 하라는 듯 교묘하게 숨겨 놓았으니 비평적 반응이 다른 소설의 경우보다 더 구구한 것은 당연한 듯 싶다.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나보코프 소설의 난해함에 입을 모은다(<We will never get to the bottom of Nabokov>). <퍼즐> <게임> <변장> <속임수를 쓰는> 등의 표현은 그의 작품을 평하는 데 자주 쓰이는 어휘들로서 이러한 난해함은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이나 신화적 구조 사용, 헤밍웨이의 압축법, 포크너의 같은 사건을 여러 인물의 의식을 통해 표현하는 난해성 등과는 또 다르다. 설명을 거부하고 생략법, 암시적 수법 등을 쓰는 것은 이들과 비슷하지만, 게임이나 퍼즐과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어 독자가 참여하여 작가와 함께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하는 독자 참여 소설이라는 독특한 성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거부하는 나보코프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에 가정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운 나보코프에게 영어는(비록 그가 러시아어보다 먼저 배운 언어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모국어가 아니었다. 스무 살 때 러시아 혁명으로 그의 가족이 재산과 추억을 남기고 유럽으로 망명할 때까지 그는 조국의 말로 시와 창작을 연습했다. 영국으로 건너 온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때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우익 러시아인에게 암살당했고, 후에 형은 나치 캠프에서 굶어 죽는 등 화려하고 부유했던 전통적 러시아 귀족 집안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정치적 활동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불행한 최후, 집회와 혁명에 희생되는 인간성을 보아 온 나보코프가 어떠한 모임이나 정치적 토론에도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러시아를 떠난 이래 그에게 정치적 인물이란 우표 속의 얼굴 크기만큼을 넘어서지 않았고 어떠한 사회·경제 문제도 그의 관심 밖이었다.*

*L.L.Lee, Vladimir Nabokov (Boston: Twayne Publishers, 1976), 21쪽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에서 생활하다가, 2차 대전으로 독일군의 침공을 받자, 41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나보코프는 그 때까지 러시아 신문에 글도 쓰고 번역도 하고 테니스 코치도 하는 등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가야 했다. 40세가 되어서야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미국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는 평생 조국을 등지고 외로운 방랑자로서 타국을 전전해야 했다(1960년 후에는 스위스에 거주하다가 1977년 사망했다). 그의 이런 비극적 운명이 주로 정치와 사회 제도에서 기인했기에 그가 나비를 연구하는 데 최고의 기쁨을 느끼며, 사회 참여를 거부하고 나아가 예술의 사회성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망명자로서 그는 스스로가 어느 새 아웃사이더의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미국에서 쓴 그의 초기 소설들에 대해 조언과 도움을 주었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의 아쉬움은 항상 그의 작품에 사회성이 빈약하거나 정치적 문제가 잘 다루어지지 못했고 게다가 <현실감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흥미를 그토록 거부하면서 어떻게 나비는 서식처와 관련지어 연구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던 윌슨은 나보코프가 사회 속의 인간을 그리는 전통적 리얼리즘 수법에 접근하여 현실감 있고 진지하고 도덕성 있는 소설을 써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미 소설의 걸작들을 읽으라고 계속 권유했으나 이에 대한 나보코프의 반응은 자못 흥미롭다.

*Vladimir Nabokov & Edmund Wilson, The Nabokov - Willson Letters, ed. Simon Karlinsky(New York: Harper＆Row, 1979), 183쪽

  

나보코프는 윌슨이 권유한 포크너의 『8월의 빛(Light in August)』을 순수와 과장으로 점철된 케케묵은 낭만주의라고 비난하고 이런 것은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감동을 주지만 문학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어서 성적 묘사가 삭제된 듯한 소설을 쓰는 헨리 제임스를 성적인 무능으로, 종교적 귀의를 인간 구원의 길로 제시하는 T.S.엘리엇을 목사라고 혐오했다.*

*같은 책, 213쪽 "The Book's pseudo-religious rhythem I simply cannot stand - a phoney gloom which also spoils Mauriac's work. Has la grace  descended upon Faulkner too? May be you are just pulling my leg when you advice me to read him, or impotent Henry james, or the Rev.Eliot?"

 

제인 오스틴보다 『보물섬』의 저자, 스티븐슨을 더 좋아하는 나보코프를 전통적인 도덕가인 윌슨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란 것은 짐작이 간다. 나보코프는 예술 작품이 도덕절 설교나 교훈이나 사회 개혁이나 기타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픽션의 존재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픽션이란 퉁명스레 일컬어 소위 미학적인 지복이라는 것을 나에게 부여하는 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어떻게든, 어느 곳으로든, 예술(호기심, 부드러움, 친절, 황홀)이 평가 기준인 다른 존재와 관련을 맺고 있다.*

*Vladimir Nabokov, Lolita (New York: A Berkley Medallion Book, 1955, rpt., 1966), 286쪽. 이로부터 이 책에서의 인용은 본문에 쪽수로만 표시

 

나보코프에게 예술 작품은 호기심, 부드러움, 친절, 황홀 등이 평가 기준이 되는 미학적 지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기에 작가는 한 가지 요술을 다른 요술을 통해 보여주는 마술사이며 책은 <영감과 조합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책이 주는 놀라움과 경이의 기쁨을 위해 작가는 자료를 교묘히 배합하고, 변장과 요술을 통해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퍼즐을 제공하여 미학의 지복을 맛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사회 계층, 또는 저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작품을 읽는 것은 유치하다고 그는 말한다.

최근의 논문 「참 인생과 허구」에서 나보코프는 소설 속에 무슨 <참 인생>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현실이란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감정으로 구성되고 선전된 대중이며 상징적인 세계인 데 비해, 걸작은 <창조적>이며 독특하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보코프의 실체(reality)는 오직 작품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현실은 그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마치 『창백한 불꽃(Pale Fire)』의 존 셰이드가 말하듯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오직 배합의 기쁨인 예술을 통해서만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나보코프의 작품에서 어떤 도덕적 메시지를 찾으려 하는 것은 의미없는 시도이다.

*Vladimir Nabokov, "Real Life' and Fiction", Partisan Review 50 (Spring, 1983), 29~39쪽

 

1954년 6월, 그 때까지 자신이 영어로 쓴 가장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 『롤리타』가 몇몇 출판사들에 의해 포르노 소설이라고 거부당하자 나보코프는 윌슨에게 비평을 요구했다. 비록 주제와 상황은 굉장히 감각적이지만 기교는 순수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작가 자신이 밝혔는데도 윌슨은 읽은 것 중 가장 싫은 소설이라는 혹평과 함께 주제는 사악하고 등장 인물이나 상황은 <현실감이 없고>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끔찍스럽거나 비극적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기에는 기분이 안 좋다>*라는 주목할 만한 평을 내렸다.

그런데 윌슨의 이와 같은 평은 『롤리타』를 처음 읽으면(특히 서둘러 앞부분만을 읽으면) 대부분이 갖게 되는 느낌이다. 메리 맥카시도 이 소설의 몽롱한 점을 지적했다(이 때 윌슨이 동봉한 엘리너의 편지는 이 작품이 잿더미로 변하지 않게 한 동기였다. 그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출판한 후 미국에서 읽히게 하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Vladimir Nabokov & Edmund Wilson, 앞의 책, 288쪽 참조

 

그러면 『롤리타』는 왜 이렇게 처음 읽은 이에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느낌을 주었던 것인가. 여러 방향으로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한 이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구구하다.

작품의 프로이트적 심리 분석이나 알레고리, 신화적인 분석 등을 나보코프 자신이 거부하는 탓인지 『롤리타』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은 주인공 험버트의 도덕성을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이것을 페트라칸 시인들의 로라에 견줄 만한 순수한 사랑 이야기로 보며, 더글러스 파울러는 험버트의 도덕성을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험버트는 샬로트를 죽이지 않았으며, 변함없이 롤리타를 사랑한다. 험버트를 먼저 유혹한 롤리타는 이미 성적으로 더럽혀졌으며, 퀼티는 험버트의 왜곡된 악덕을 상징하는 바 그를 죽임으로써 험버트는 도덕적으로 정화되었다 등의 해석이다. 

리이(L.L.Lee)는 작품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험버트는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롤리타를 가두어 둔 것은 죄악이지만 행복하게 해 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은 충분히 동정적이다. 부드러움과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험버트에 비해, 퀼티는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험버트를 둘러싼 사회와 퀼티가 죄인인 험버트보다 더 부패했다는 식의 분석이다. 레바인도 소설의 끝에서 험버트는 죄를 깨닫고 참회하며, 자신의 악덕을 순화하기 위해 퀼티를 죽인다고 험버트에게 동정을 표시한다.*

*Douglas Flower, Reading Nabokov (Ithaca: Cornell Univ.Press, 1974), 147~175쪽

L.L.Lee, Vladimir Nabokov, 115~131쪽

Robert T.Levine, "My Ultraviolet Darling: The Loss of Lolita's Childhood," Modern Fiction Studies 25 (Autunm, 1979), 147~149쪽 참조

 

당시의 몇몇 비평가들이 롤리타는 망명자 나보코프가 본 아메리카라는 상징적 해석을 내렸던 것에 비해, 최근의 해석은 이와 같이 험버트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쪽이다. 그가 일견 괴물처럼 보이는 부도덕한 인간이지만, 그의 변함 없는 사랑과 참회는 동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퀼티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롤리타』에는 험버트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 이상의 아픔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이제 결코 쉽거나 단순한 해결을 허락지 않는 이 소설의 헝클어진 짜임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파리 출생으로 아버지는 여러 나라의 피가 섞인 부유한 유한 계급이고, 어머니는 세 살 때 세상을 떠나 엄격한 이모 밑에서 자랐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여러 여자들과 사귀던 아버지는 그에게 성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었고, 그는 애너벨이라는 몇 달 연상의 소녀와 첫사랑에 빠진다. 그녀와의 사랑이 어른들에 의해 좌절되고 그녀가 몇 달 후 병으로 죽자, 이 좌절은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인생의 틈을 벌려 놓은 이 슬픈 기억은 그를 아홉 살이나 열네 살 사이의 어린 소녀를 탐하게 되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든다.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천박한 미를 지닌 님펫이라고 불리는 이 소녀들은 30년 쯤 연상인 남자에게 인간이 아니라 마술적 힘을 가진 악마로서 작용한다.

험버트는 어린 소녀에 대한 내밀한 욕망을 억제하고 정상인처럼 행동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환상 속에 묻혀 은밀한 만족의 기쁨을 맛보는 광인이 되고 만다. 그들의 발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조그만 짝사랑을 수없이 했고 환상 속에서만 그들을 소유하고 광희를 맛보는 <환상적 궁지>에 빠지는 것이다.

영문학과 불문학을 공부한 그는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폴란드 의사의 딸 발레리아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20대 후반이었지만 천성적으로 어린애다운 점을 지녔고 바로 그 점에 험버트는 끌린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의 이모부가 사업을 물려주게 되어 출국 수속을 하려는 때, 발레리아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고백하며 그를 떠난다(그녀는 롤리타가 그렇게 되듯이 나중에 애를 낳다 죽음으로써 배신의 대가를 치른다). 분노와 외로움 때문에 정신 이상이 된 험버트는 요양원에서 1년 이상 머무르게 되는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욕을 감추고 교묘하게 의사들로 하여금 잠재성 호모 섹슈얼이라든가 <완전 무능>이라고 진단하게 만든다.

미국에 온 서른 일곱 살의 험버트는 뉴저지의 램즈데일에 방을 얻게 되는데, 여주인 샬로트의 열두 살 난 딸, 롤리타에게 광적인 사랑을 느낀다. 바로 애너벨의 화신인 롤리타의 매력은 험버트를 거의 정신분열증으로 몰아넣을 정도였다. 그 때 샬로트의 구애를 받은 험버트는 롤리타의 곁에 있기 위해서 그녀와 결혼을 한다. 전형적인 미국 중부의 도덕률과 여인으로서의 질투를 소유한 샬로트는 어느 날, 롤리타에 대한 광적인 사랑을 기록한 험버트의 일기를 보게 되고, 충격 속에서 그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가지고 달려 나가다 교통 사고로 죽는다. 이제 명실공히 롤리타의 보호자가 된 험버트는 캠핑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를 거짓 핑계로 불러 내어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호텔에 묵는다. 그 곳에서 험버트의 자제된 정욕은 롤리타의 유혹으로 허물어지고, 그들은 값비싼 호텔을 전전하다가 드디어 비어즐리에 정착하고 롤리타는 다시 학교에 들어간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남자 친구들로부터 격리시키는 등,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그러나 험버트가 붙잡으려 할 수록 그녀는 더욱 포악해지며 비정상이 되어 간다.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롤리타는 연극에 출연하게 되고 드디어는 또 다시 두 번째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 여행은 계속 낯선 중년 남자의 추적을 받더니 드디어 어느 병원에서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3년을 미친 듯이 샅샅이 찾던 험버트는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고, 이 때 리타가 그를 구출한다. 롤리타 찾기를 단념하고 리타와 살던 어느 날, 험버트는 때 아닌 롤리타의 편지를 받는다.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롤리타를 찾은 험버트는 그녀에게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납치하여 이용하고 끝내 버린 자가 램즈데일의 극작가 퀼티임을 알아내고는 그를 찾아가 죽이고 마침내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상과 같은 소설의 줄거리에는 사회에 대한 얘기, 현실적 문제, 정치 이야기나 작가의 도덕적 주장 등은 전혀 실려 있지 않다. 마치 동화 같다고 할까. 예를 들면 샬로트가 죽는 장면이나 퀼티가 죽는 장면에는 전혀 현실감도 긴박감도 없다. 오직 리얼한 것은 롤리타라는 인물 묘사와 험버트의 감정이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에서 리얼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이것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운명적이고 격정적이고 마술적인 것, 극도의 자제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광적인 것. 롤리타 급우들의 이름을 시처럼 읊던 험버트, 그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던 험버트, 그녀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감시하면 할 수록 그녀가 더 포악해지는 사랑의 역효과를 깨닫지도 못할 만큼 험버트는 롤리타의 노예였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그의 노력과 이를 이용하는 롤리타의 잔인함은 찰스 디킨즈의 어린이 학대 소설의 패러디 같고, 사랑에 빠진 불쌍한 괴물과 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순결하지 못한 소녀의 관계는 『미녀와 야수』라는 동화의 패러디 같기도 하다. 잃어버린 롤리타를 다시 찾은 험버트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임신한 17세의 롤리타에게 다시 돌아와 줄 것을 눈물로 간청하는 장면은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It was love at first, at last sight, at ever and ever sight). 트릴링의 표현처럼 『롤리타』는 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얘기인 것 같다.

핸섬하지만 우울하고 소심한 험버트는 어린 시절에 좌절된 사랑의 노예요, 그 기억의 우리에 갇혀 사는 괴물이다. 열두 살 소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내밀한 환상 속에서 사랑 행위를 벌이던 험버트는 도덕적인가 도덕적이 아닌가? 그토록 롤리타에게 배반을 당하고도 끝까지 그녀에게 사랑을 바치는 험버트의 눈물은 얼마만큼 도덕적 타당성을 지니는가? 더구나 그가 롤리타에게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은 얼마만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만일 그가 구제하지 못할 괴물이라면 롤리타는 어떤가? 그녀가 여아로 변장한 악마라고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험버트가 지켜 주려 한 순결을 롤리타는 캠프큐에서 우습게 버린다. 험버트가 심각하게 자제한 성욕을 롤리타는 가볍게 허물어뜨린다.

험버트에게 숙명적인 사랑이 롤리타에게는 그저 게임에 불과했다. 속이고 이용하고 그리고 끝내는 도망간다. 그러나 그런 롤리타를 부도덕하다고 나무랄 수 있는가? 어린이를 가두어 그 젊음을 희생시킨 험버트보다 롤리타가 더 나쁘다면 얼마만큼 더 나쁜가?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적 토론이 이 소설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동정의 문제이지 선과 악이라는 이중적 도덕론은 더 이상 이 작품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읽는 이에게 모호성을 주는 이유가 되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롤리타』가 지닌 현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끔찍스럽거나 비극적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기에는 기분이 안 좋다>라는 윌슨의 말은 바로 『롤리타』의 매력이고, 모더니즘의 도덕적 진지함에서 코믹한 탈출을 시도한 현대적 감각이다. 그런데 『롤리타』에 사랑 이야기 그 이상이 숨겨져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아픔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퀼티를 살해하고 경관의 추적을 받으면서 먼 추억을 회상하듯 희미한 눈동자로 서 있는 험버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더러운 입술을 문지르며 경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진창에 서 있는 그의 귀에 멀리서 아지랑이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저 아래 광산촌 쯤에서 들리는 어린이들의 노는 소리였다. 웃음소리가 섞인 아득한 함성소리를 들으며 그의 가슴이 아픈 것은 바로 롤리타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뒤섞인 소리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않는다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롤리타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았고, 험버트가 사랑한 것은 롤리타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험버트가 추적했던 것은 롤리타의 실체가 아닌 환상이었고, 그를 사로잡은 마술적인 힘은 바로 그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여러 나라의 피가 섞여 진정한 고향이 없는 험버트, 그는 곧 조국을 등지고 방랑자로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작가 나보코프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리고 참회의 눈물로 가슴이 아픈 험버트의 가망 없는 꿈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독자의 가슴을 치는 감동의 근원이 아닌가 싶다. 나보코프는 소설 식으로 쓴 자서전 『말하라, 추억이여』에서 조국 러시아에 두고 온 고향과 잃어버린 시절의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소련 독재자와 나 사이의 해묵은 싸움은 재산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수년 간 내가 간직해 온 향수는 잃어버린 수표에 대한 슬픔이 아니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지나치게 비대해진 그리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어느 사회 생태학적 장소 한 곳을 나 자신을 위해 동경할 권리를 지닐 것이다.

(…)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하늘 아래서

러시아의 어느 한 곳을 위해

한 숨 지을 권리를.*

 

Vladimir Nabokov, Speak, Memory: An Autobiography Revisited (New York: G.P.Putnam's, 1966), 73쪽

 

아메리카의 하늘 아래서 조국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나보코프의 한숨, 그에게 망명자의 설움은 정치적 원한도 재산을 빼앗긴 분노도 아니었고 오직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그리움 때문이었다.

외로운 망명자의 휴식처, 그것은 바로 예술이었을 것이다.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때 그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차라리 미의 세계로 도피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그 자신의 리얼리티를 창조한다.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돌아와 줄 것을 마지막으로 간청하나 거절당한 후,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죄(그녀의 어린 시절을 박탈한 죄)가 얼마나 컸는가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치료할 길은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 나는 나의 비참함을 치료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분절적인 예술이라는 우울하고 아주 지엽적인 고통 완화제를 얻는 길 외에는. 옛 시인의 말을 이용하면,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이다.

 

시간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제한된 현실에 긴 장막을 드리우고 험버트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술의 세계로 도피한다. 그러고는 마치 나보코프 자신이 진귀한 나비 속에서 제한된 현실의 비극을 극복하듯, 험버트는 기억과 상상력으로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같은 책, 139쪽. L.L.Lee, 앞의 책, 29쪽 참조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수기가 롤리타 사후에 출판되기를 원하며 오직 예술로 도피하여서만이 그녀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비평가 앨버트 게라드는 그의 논문 「반사실주의 픽션의 수사학에 관한 소고」에서 현대 작가들을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 두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나보코프를 후자의 범주에 넣고 있다.*

*Albert J.Guerard, "Notes on the Rhetoric of Antirealist Fiction," Triquarterly 30 (Spring, 1974), 3~50쪽

 

나보코프는 현실을 부정하고 예술 작품만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예술 지상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현실은 비극이므로 그는 의도적으로 현실에 장막을 드리우고 리얼하다는 정의를 바꾼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 비극적 현실은 하나의 환영이고 리얼한 것은 그의 상상력과 이의 산물인 예술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롤리타』는 험버트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얘기가 된다. 남의 입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하는 이 기법은 『창백한 불꽃』에서도 쓰인다. 언어의 자의성, 픽션의 자의성이다. 『롤리타』에 현실감이 없는 이유는 바로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작품의 개연성을 와해시킨 탓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는 죽고 이제 픽션 속에 들어와 있는 작가가 등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현상을 암시한다.

*Harvard Guide to Contemporary American Writing, ed.Daniel Hoffman (Cambridge: The Belknap Press, 1979), 266~269쪽

 

독자 참여 소설로서의 『롤리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롤리타의 어린 시절을 빼앗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참회하며 험버트는 그가 가진 게 오직 늘어놓거나 짝을 맞추는 언어 뿐이라고 말한다. 험버트가 언어의 배열에서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작가 나보코프도 언어의 게임에서 기쁨을 찾았으리라. 그는 실제로 1925년 베를린에서 결혼한 후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신문의 퍼즐이나 체스 게임을 즐겼다. 수수께끼 같은 배열로 게임을 하는 듯한 난해함을 주는 것은 나보코프 작품의 특성이다. 로버트 디트웨이러는 최근의 논문, 「현대 미국 픽션에 나타난 게임과 놀이」에서 1965년 이래 출판된 약 60권의 소설과 단편집들을 조사한 결과, 이 작품들이 게임이나 놀이와 상당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브러티건이나 바셀미의 몇 작품들처럼 변덕스럽거나 놀이와 같은 픽션, 쿠버의 『우주 야구 연합회』(1968)처럼 특정한 게임이 연출되는 픽션, 그리고 나보코프의 작품처럼 작가가 독자와 게임을 하는 듯한 픽션들이라는 것이다. 나보코프는 험버트의 입을 통하여 왜 가지고 놀 언어밖에 남은 게 없다고 말하는가.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수없이 모양을 바꾸는 롤리타, 결코 험버트가 잡을 수 없는 그녀, 롤리타는 다름아닌 작가 나보코프가 잡으려 애쓴 실체(reality)였다. 실체가 잡히지 않으니 이제 작가에게 남은 것은 언어의 게임 뿐이다.

*Robert Detweiler, "Games and Play in Modern American Fiction," Contemporary Literrature 17 (Winter, 1976), 44~62쪽

 

나보코프의 작품이 지닌 위장과 속임수를 쓰는 퍼즐과 같은 특성 때문에 『롤리타』를 맨 처음 읽으면 굉장히 부도덕한 소설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롤리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코넬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나보코프는 학부모의 다음과 같은 항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애들이 노브코프(나보코프)가 가르치는 과목에는 절대 등록해선 안 된다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애들이 사적인 대담에서 그와 얘기를 하거나 어두워진 뒤 교정에서 부딪히거나 할까 봐 걱정이랍니다!"*

*Andrew Field, Nobokov: His Life in Part (New York: Viking Press, 1977), 277쪽

 

그러나 읽을 수록 독자는 작품 속에서 그 이상의 것이 묻혀 있음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풀기 위해 점차 몰두하게 된다. 즉 『롤리타』는 그 이전의 어느 소설보다 독자 참여를 요구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몰두할 수록 그는 점차 이것이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 게임인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딸을 얻기 위해 어머니와 결혼한다든가, 롤리타가 먼저 유혹한다든가, 더 이상 님펫이 아닌, 임신한 롤리타에게 변함 없이 사랑을 바친다든가 등등, 저자는 독자에게 어떤 예상을 하게 하고는 계속 그것을 뒤엎는다. 게다가 진지함이 장난기를 띠고 슬픔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웃을 수 있기에는 슬프고, 진지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예를 들어 험버트가 롤리타 곁에 있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했는데 그것을 모르는 샬로트는 험버트를 위해 롤리타를 자꾸만 떼어 놓으려 한다든지, 롤리타와의 첫 날 밤, 험버트의 진지하고 초조한 모습과 그 결과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읽는 이의 실소를 자아낸다. 그리고 전편을 통해 험버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많은데 꼭 어린애가 엉엉 우는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준다. 분명히 어린애가 떼 쓰는 것 같은 인상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폴 브러스는 이러한 특성을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창조권을 넘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정말 완벽한 예술가 퀼티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인 험버트에게 죽고, 이제 미숙한 예술가 험버트가 창작이랍시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허술하고 괴상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실과 환상의 경계선이 흐려진 결과, 작가들이 더 이상 시작과 끝이 완전무결한 작품을 쓰는 화자가 될 수 없다는 작가의 기능 축소를 나타내는 일면이다. 대략 1960년대 이후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데 『롤리타』는 1950년대에 씌어진 것으로 이미 종래의 진지한 서술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다. 브러스는 이와 같이 게임과 퍼즐로 독자의 참여와 역할이 강조되는 개방된 독자 참여 소설 형태를 <텍스투어(texture)>라 하여 종래의 완벽한 사실주의 모드인 <텍스트(text)>와 구별하고 있다.*

<텍스트>를 완본이나 완성된 형태의 작품으로, <텍스추어>를 짜임새, 고성 등의 의미로 생각하고 저자가 독자와 함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천을 짜여 비로소 작품이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할 때, <텍스추어>에서 독자의 역할은 훨씬 더 강조된다고 보인다.

*Paul Brus, Victims: Texual Strategies in Recent American Fiction (New Jersey: Associted Univ.Press, 1981), 65쪽

*같은 책, 30쪽 

 

『롤리타』에서 독자가 뛰어들어 풀어야 할 문제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극작가 퀼티의 존재이다. 다른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러스는 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고 <이것이 퀼티가 나를 위해 연출한 정교한 연극의 끝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This, I said to myself, was the end of the ingenious play staged for me by Quilty)>(제2부 219쪽)라는 말을 험버트는 퀼티가 연출한 연극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으로 풀이한다. 퀼티가 어떤 연극을 연출했고 험버트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상당히 미지수다. 그런데 짐짓 어수룩한 구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험버트가 롤리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종내 험버트의 운명까지도 변장한 퀼티가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퀼티가 맨 처음 언급된 것은 14장이다. 그 다음은 잡지 광고란의 명성을 누리는 극작가로서 언급되고(27장), 그리고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호텔에서 처음으로 등장, 험버트에게 롤리타에 관해 몇 마디 말을 건다(28장). 그 다음 호텔을 떠날 때 험버트는 짐을 꾸리느라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고 이 때 먼저 내보낸 롤리타가 그 낯선 중년 신사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짙다(32장).

제2부에서 롤리타가 학교 연극에 출연하는데 그것이 바로 퀼티가 쓴 『도취된 사냥꾼들』이었고 이 극의 일곱 번째 사냥꾼은 시인인데 그가 이 극을 모두 고안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롤리타가 험버트의 감시를 견디다 못해 도망칠 때 그녀가 전화 부스에서 통화한 상대방은 누구였던가. 그녀가 왜 두 번째 여행을 제안했고 자신이 코스를 정하겠다고 했는가. 두 번째 여행길에서 줄곧 그들 뒤를 쫓던 중년 신사 트랩은 누구였는가. 롤리타는 왜 험버트에게 퀼티를 여자라고 얼버무렸는가. 그리고 끝내 롤리타는 퀼티에게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니 두 번째 여행이야말로 그대로 퀼티의 각본이었다.

3년 후, 롤리타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찾아갔을 때까지도 험버트는 퀼티가 롤리타의 납치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독자도 이것을 모르고 있어야만 험버트가 실러를 납치자로 오해하고 죽이려 했을 때 긴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퀼티를 변장시켜 살짝살짝 내보이는 속임수를 쓴 것이다. 따라서 처음 한두 번 읽으면 퀼티의 존재가 맨 끝의 살인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다시 자세히 읽으면 이미 책의 앞부분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시 퀼티는 험버트를 조종하는 작가는 아닐까.

 

두 번째 퍼즐은 왜 험버트는 퀼티를 죽였는가, 그리고 죽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서로 뒹굴었다>는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퀼티는 험버트의 부도덕한 면을 상징하므로 그를 죽이는 것은 죄를 정화하는 의미라고 도덕적인 해석을 내리는 비평가들이 많다. 아마 <우리>라는 단어가 한 덩어리의 복수 개념을 뜻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석연치 않다. 퀼티를 단순히 험버트의 부도덕한 면으로 취급하지 않는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중년으로 각기 롤리타의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험버트는 롤리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약자요, 퀼티는 그녀의 사랑을 받는 강자이다(롤리타는 버림을 받고도 다시 퀼티에게 돌아가겠다고 험버트에게 말한다). 퀼티는 험버트의 그런 약점을 이용했다. 그리고 험버트가 롤리타를 그토록 사랑하고 보살폈지만 퀼티는 자신의 고백대로 성적인 무능자로 롤리타를 데려다 포르노 영화 제작에 이용하고는 버린다. 그러니 험버트는 희생자요 퀼티는 승자이다. 그리고 엉성한 소설밖에 못 쓰는 험버트는 밖에서 조종하는 전통적인 작가 퀼티를 죽이게 되어 있다. 험버트에게는 잡히지 않는 롤리타가 퀼티에게는 잡히기 때문이다.

 

『롤리타』는 머리말에서 존 레이라는 작가가 어느 범죄인의 수기를 스스로 편집했노라고 밝힌다. 즉 1952년 가을, 신문에 한 살인 사건이 보도되었는데 아무도 그 목적이나 원인을 모른 채 베일에 가려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감옥에서 공판을 기다리던 그 죄수가 쓴 후기를 자신이 편집했고 그 죄수는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수기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밝힌다. 그 가운데 롤리타가 애를 낳다 죽은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독자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으며 책의 후기는 존 레이가 아니고 나보코프가 직접 『롤리타』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니 존 레이도 등장 인물에 불과하고 허구는 이미 머리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머리말과 후기를 뺀 나머지는 죄수, 험버트가 배심원 앞으로 쓴 사연의 고백이다. 그러니 얼핏 괴이하게 슬픈 이 이야기에 얼마만큼 객관성이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사실 험버트는 바보 같으면서도 상당히 교활한 데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열세 살 때 유명한 스파이가 되겠다고 했고 그 후 정신병원에서 의사를 교묘하게 속인 적도 있으며, 수기 가운데도 배심원의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는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나보코프 자신도 험버트를 교활한 변덕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풀어가다 보면 나보코프의 말대로 『롤리타』는 <조크>에 불과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작가 스스로 밝힌 소설의 동기다. 1939년 경 파리에서 읽은 신문 기사가 그로 하여금 『롤리타』를 쓰게 한 동기라고 한다. 이 기사는 어느 과학자가 동물을 몇 달이나 훈련시켜서 처음으로 동물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바로 자기가 갇힌 우리의 창살이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달래서 불쌍한 동물이 그려 낸 <우리의 칸막이>는 험버트가 갇혀 산 의식의 세계, 아니, 작가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향수라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롤리타』는 단순히 왜곡된 성도착의 얘기가 아니라 나보코프가 갇혀 사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호기심, 부드러움, 친절, 황홀>이라는 예술의 기준에 맞추어 그린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험버트는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지만 그는 결코 완벽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실체를 포착할 수 없기에 짝을 맞추는 언어 놀음으로 후퇴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망명자 나보코프가 마흔 살에 미국의 작가로 출발할 때 그는 <유창하고 풍요하고 끝없이 자유자재로 구상할 수 있던 러시아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인 영어를 택해야만 했다. 작가가 완벽한 화자로서 자신을 잃었을 때 그는 글자 맞추기, 퍼즐, 교묘한 배합 등의 말놀음으로 후퇴하면서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독자는 저자가 짐짓 펼쳐 놓은 엉성한 구성 속으로 뛰어들어 저자와 함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롤리타』는 전통적인 저자는 사라지고 독자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독자 참여 소설, 혹은 열린 소설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대 비평에서 주목을 받는 독자 반응 비평 혹은 수용이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퀼티의 죽음은 곧 저자의 죽음이요, 소설 『롤리타』는 더 이상 견고한 현실을 반영하는 사실주의 소설을 쓸 수 없다는 반사실주의 작가 나보코프의 변명서이다.

 

- 1999년 6월, 역자 권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