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3권 한여름의 1페이지 -2- 방심 못 할 남자

- 방심못할 남자 -

 

 

1.

 

다음날.
하타모토 저택(旗本屋敷 : 에도시대 쇼군가 직속무사들의 거주지)이나 키타마치 봉행소(北町奉行所 : 에도시대의 지방관청)가 아닌가 싶을만큼 커다란 목조건물 문앞에 서서, 후쿠자와 남매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 이상으로 크구나"
"....응"
"사치코님 집정도는 아니라 해도, 개인집으로서는 반칙이야. 이건"
"그러게"
물론 이곳 사모님이 원래 천하의 오가사와라 가문 아가씨였으니, 시집갈만한 곳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상당한 가문일 것임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걸 각오했는데도, 저 부지를 보는 순간 그저 웃음밖에 안나올 정도로 광활했으니. 유미는 이 정원에 우리집이 몇 채 들어갈까, 하고 진지하게 계산해볼 생각까지 했다.
아무튼 여긴 카시와기 스구루씨가 살고 있는 집. 산백합회의 비밀회의 다음날, 레이님께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버스, 전차,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거기서 10분 더 걸어, 미지의 토지까지 겨우 당도한 것이다.
유키한테는 당연히 동행하라고 했다. 애초에 유키가 들고온 제안이 일의 발단이었는데다가, 하나데라 학원고교의 전 졸업생인 카시와기씨를 방문하기에는, 그 후배인 현역 하나데라 학생이라는 입장은 대단히 설득력있어 좋았다.
"나, 돌아가고 싶어졌어"
"나도"
덥다.
양산을 쓰고 있는데도 여름드레스에서 노출된 어깨랑 팔이 따끔따끔하다.
오후 2시. 가장 더울 시간대다.
이 문을 올려다본 지 한 5분정도 흘렀을까. 방문약속은 잡아놨지만, 굳이 카시와기씨를 만나지 않아도 임무는 완료한거나 마찬가지였다. 얘기나눌 것까지도 없이, 이 집을 보면 작전변경은 당연.
"유키"
"응"
어디 가까운 곳에 공중전화를 찾아서 작전변경 취지의 전화를 하면 된다. 유키와 유미는 얼굴을 마주보고는 이심전심 빙그르르 우향우.
그와 동시에
"그럼 안되지. 후쿠자와 남매"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들리지도 않고 그냥 가려고?"
뒤돌아볼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얼핏 상쾌하게 들리는 이 목소리. 플러스, 호스트같은 섹시함. 플러스, 속마음이 보일듯 말듯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독기. 틀림없이 은행나라 왕자, 카시와기 스구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상자는 메이블파라의 후르츠젤리 셀렉션. 내가 좋아하는 거로군. 양주가 들어있어 맛있지. 아아, 먹고 싶어라. 누가 그걸 선물로 스리슬쩍 우리집에 갖다주지 않으려나"
그런 말 듣고서도 오히려 달아나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후쿠자와 남매는 비디오 테이프를 감아돌리듯 뱅글뱅글 좌향좌하고선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펴,평안하세요 카시와기씨"
"안녕하세요 카시와기 선배. 오늘 갑자기 들러 죄송합니다"
억지로 미소지으며, 염치없이 요구받은 메이플파라 상자를 내밀었다. 카시와기씨는 그걸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받아들고 말했다.
"아아, 착한 애들이네. 솔직해서 좋아"
그러고선 두사람 머리를 쓰다듬으니 더이상 반발한 기운도 안생긴다. 정말이지, 언제부터 문앞에서 대기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카시와기씨에게 행동을 읽히고 있던 후쿠자와 남매의 완패였다.
"자, 둘 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
물론, 후르츠젤리를 바쳤다고 해서 그대로 눈감아줄 카시와기씨가 아니다. 유키의 팔을 잡고서 순식간에 부지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동생의 신변이 걱정되어서 유미도 뒤따라오리라는 것까지 계산했을테니, 정말 열받는다.

문에서 한발짝 들어서자, 작은 대나무와 소나무 등의 정원수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탓인지 길거리보다 훨씬 시원하게 느껴졌다. 문에서 똑바로 뻗은 돌길의 끝에는 현관이 있었다. 현관은 정면의 폭이 넓고, 입구가 높았으며, 바닥에는 계단같은 커다란 돌이 놓여있었다. 정면의 낮은 칸막이가 단순한 눈가리개가 되어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관이나 요정같은 분위기였다.
"자, 유미짱도 들어와"
"실례합니다"
"아, 신발정리안하고 그냥 들어와도 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최저한의 예의로서.
유미는 벗은 샌달의 방향을 바꿔놓으려고 등을 돌렸다. 몸을 숙인 순간, 갑자기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어서 오십시오"
"히익"
무심코 현관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놀라 뒤돌아보니 그곳엔 어느샌가 초로의 여성의 모습이.
" ─ ! "
이번에는 간신히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유미는 또다시 덜컹하고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약간 어두운 일본가옥에 하얀 기모노를 입고 정좌한 여성이 붕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이성적 논리 같은 걸 떠나, 상당히 무서웠다.
"고등학교 후배 후쿠자와군과 그 누나. 유미양은 삿짱의 후배야"
카시와기씨가 상큼하게 두사람을 소개하는 데에 맞춰,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다. 한순간 "카시와기씨의 어머님?!" 이라 생각하고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는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다.
"그다지 신경안써도 돼 토미. 내가 접대할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은 유령도 어머님도 아닌, 이 집의 가정부인 듯하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건 지금 유미에게는 다 마찬가지.
(아앙, '히익'해버렸어. 히익해버렸다구. 어쩌지)
복도를 걸으며 점점 풀이 죽어간다. 카시와기씨도 카시와기씨다. 마음 속에서 쓸데없이 화풀이해본다. 사치코님의 후배라고 소개받으면 사치코님한테도 폐를 끼치는 셈이잖아, 라고. 그러나 정작 카시와기씨 본인은.
"왜 그래 유미짱? 얼굴 빨간데, 여기 더워?"
하고 말을 걸어온다. 아까의 "히익"은 못들었나보다.
"아뇨. 시원해요"
실제로 이 집안은 서늘한게 기분좋았다. 오래된 일본가옥의 모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새롭게도 보인다.
여관을 연상케하는 현관과 마찬가지로, 내부도 여관처럼 그저 넓기만 하다. 덧붙여 복도가 긴데다 도중 구부러지고 꺾이고 해서 마치 미로같은 저택이었다. 여기서 길을 잃었다간 자기 힘으로 현관까지 돌아오지 못할 듯 싶다. 무심코 유미는 유키의 셔츠 옷자락을 잡았다. 방향감각은 유키쪽이 우수했으니까.
"내 방도 별로 상관없겠지만, 침실도 겸하고 있으니까 젊은 여성을 초대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말야"
그렇게 말하면서 카시와기씨가 안내해준 방은, 떨어져있는 조그만 화실(일본식 방)이었다.
"젊은 남성이라면 어울리나요?"
듣고 흘리 수 없는 말이 귀에 들려와, 무심코 유미는 태클을 걸어버렸다.
"으음. 그러게. 유키 혼자였다면 내 방에 데리고 갔으려나"
카시와기씨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혼자면 안 왔죠"
유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소리말고, 언제 한번 와라. 최대한 정성껏 손님대접할테니까"
그냥 해본 소리란 걸 알면서도 괜히 두근거린다. 카시와기씨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으니까.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걸까.
"여기. 다실 (茶室 : 차를 접대하는 방)인가요"
주위를 바라보며 유미가 질문했다.
"응. 아아, 그렇지 참. 괜찮다면 차대접할까? 하지만 후르츠젤리에는 안맞으려나"
"아뇨 괜찮아요"
유미와 유키는 동시에 사양했지만, 카시와기씨는 이미 차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귀찮으니까 포트로 물데울게. 흉내내면 안돼"
흉내, 라고 말해봤자. 후쿠자와 남매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차를 타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은 없으니까.
"자, 서있지만 말고, 적당히 앉아"
카시와기씨가 재촉해서 정말로 적당한 위치에 정좌했다. 다실에서의 상좌랑 하좌의 규칙은 잘 모르겠다.

사락사락사락사락

다선(茶? : 차를 섞을 때 쓰는 부채모양 도구)이 내는 소리가 기분좋았다. 
다도란 것도 괜찮네, 이런 생각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카시와기씨는 손을 멈추고 일어서서 토코노마(床の間 : 화실 상좌에서 바닥을 한 층 높게 만든 곳) 옆 작은 찬장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은 냉장고로 되어 있었다. 카시와기씨는 얼음이랑 물을 꺼내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닫았다.
"내놓으면 풍류가 없어보이잖아. 하지만 없으면 불편하고"
그렇다는 건, 에어컨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걸까. 방문이 닫혀있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시원한걸까 하고 아까부터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던 참이었으니까. 카시와기씨는 좀전의 거품인 차를 얼음이 든 유리잔에 타고 물을 부었다.
"자, 마셔"
아이스녹차는 의외로 맛있었지만, 제작과정은 안봤더라면 하는게 솔직한 감상이다.
"그럼 어디"
일단 "접대"란 의무를 다한 카시와기씨는 그 즉시 젤리가 든 상자를 열며 시원스레 말했다.
"내가 뭘해줬으면 하는거지?"
마치 흰복숭아와 파인애플, 뭐가 좋아? 라도 묻듯이.
(─ 아아, 정말로)
방심못할 남자다. 카시와기씨는.

 

 

2.

 

"흐음. 삿짱의 남성혐오증이 그렇게 심각해?"
일의 전말을 대강 듣고선, 카시와기씨가 말했다. 왕포도젤리를 깨끗이 먹어치운 후였다.
"하아"
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는 자각은 제로인가. 곤란한 사람이다.
"그러면 아이를 못만드는데. 으음, 오가사와라 가문은 어쩌지?"
"에엑"
그쪽 걱정이냣. 무심코 속으로 태클을 넣었다. 그런 것보다, 어째서 사치코님의 마음을 염려해주지 않는걸까. 얘기로 들어와서 그렇게 놀라진 않지만, 역시 "이런 사람이었어" 하고 정말이지 질려버린 유미였다.
"오가사와라 할아버님의 손자, 손녀라면 나와 삿짱밖에 없어. 아, 혹시 나만 모르고 있는, 다른 데 숨겨논 애가 있으려나. 그렇게 되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으음,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말썽의 소지가 있을까.."
어이어이, 그런 심각한 얘기를 어물쩍 웃으며 고민하지 마. 그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유키가 입을 열었다.
"선배말야, 사치코씨와 진심으로 결혼할 생각이 있긴 있어?"
"어라, 유키치. 질투하는거야?"
아양떠는 표정을 짓는 카시와기씨. 유키는 어떻냐 하면, 물론 노골적으로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 머릿속은 정말이지 언제나 축제기분이군 그래. 난 사치코씨를 걱정하고 있단 말이야"
"삿짱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약혼 파기하고 자유롭게 해줘. 불쌍하잖아?"
오오, 용케도 말해주었구나 동생이여. 유미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줬다.
"흐음.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그럼 그 말의 책임을 지고 네가 행복하게 해주면 어때? 난 별로 상관없으니까. 귀여운 유키치가 머리를 숙이고 부탁하러 온 거라면 소중한 삿짱이지만 양보해줄 수밖에 없지 않겠어?"
"어,어째서, 그따위 발상이 나오는거야?"
사치코님을 감쌌을 뿐인데, 억지로 커플이 될 위기에 처한 유키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흥분했다. 물론 유미도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언니는 정말 좋아하고, 동생은 귀여워. 하지만 두 사람이 연인같은 게 되는 건 좀 참아줬으면 한다. 지금은 이 기분을 자기분석해 보라면 제대로 못하겠지만. 그러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싫은 건 싫으니까란 대답밖에 못하지 싶어.
"삿짱이 괜찮은 젊은 남자라고 하면, 지금으로선 유키치와 나정도뿐이잖아. 할아버지나 학교도 안들어간 소년 정도로 나이차가 벌어지면 의외로 괜찮아 보이긴 해도"
카시와기씨의 그 예는 논점을 벗어간 게 아닌가, 하고 듣고 있던 유미는 생각했다. 괜찮은 남자라고 하는 건 오히려 대상제외란 의미가 아닐까. 따지고보면 유키가 괜찮은 건 아마 누나의 친동생이라는 안도감에서 오는 부분이 크니까. 카시와기씨의 경우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라고 할까, 한번 환멸감을 느껴버렸기 때문에 동경하던 사람에서 평범한 친척으로 격하됐을 뿐이다. 물론, 노인과 유아는 애시당초 남성혐오증의 "남성"에 넣지도 않았지만.
"유키치와 삿짱의 아이라면, 내가 아주 귀여워해 주도록 하지. 아, 유키치. 오가사와라 그룹은 내가 확실히 인수할테니까 걱정안해도 돼. 그러니까 아이만 나한테 줄 수 없겠어?"
아직도 그 말이다 이 사람은. 카시와기씨는 가끔씩 무진장 바보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나데라 대학에 우선입학할 정도니까 머리는 아주 좋을텐데.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까.
"그러니까, 뭐랬지? 내가 하나데라고교 학생회 임원들을 데리고 오가사와라 집에 쳐들어가면 된다 이 말이야?"
"...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됐어요"
카시와기씨는 의욕충만이었지만, 유미는 정중히 거절했다.
"어라, 왜?"
"카시와기씨한테는, '후배에게 넓은 장소를 제공한다'라는 대의명분이 필요했지만 이렇게 커다란 집에 살고 있는데 구태여 오가사와라 집을 빌릴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사촌인 사치코님이 카시와기씨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어째서 카시와기씨가 자기 집은 내버려두고, 라며 질문을 던졌을 때, 제대로 변명할 수 없다면 곤란한 것이다.
"흐음. 시시하네"
카시와기씨는 정말로 시시하다는 듯, 아이스녹차 얼음을 와삭와삭 입안에서 깨먹고 있다. 그 뒤에서 갑자기 소리도 없이 스윽하고 미닫이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우왓"
얼빠진 소리를 낸건 유키가 먼저였다. 무리도 아니지. 이 다실은 꽤 떨어져 있는데도, 복도를 지나 걸어오는 발소리도, 인기척도, 문이 열릴 때까지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정중히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는 그 얼굴을 보고, 이번에는 유미가 "앗"하고 소리를 쳤다. 이, 강인한 용수철같은 세로롤머리는....
"... 토오코짱"
"평안하세요. 역시 유미님이셨네요. 사치코언니 후배라고 듣고 혹시나 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토오코짱은 방안에 스르르 몸을 미끄러지듯 들이면서 미닫이문을 닫고 접시를 방 한가운데에 놓았다. 접시에는 보리차인지, 유리잔이 하나, 둘, 셋, 넷... 당연하다는 듯이 토오코짱은 자신도 숫자에 넣었나 보다.
"저기... 이 분은?"
토오코짱은 조심스런 태도로 유키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 동생 유키야. 하나데라 고교 2학년"
동생을 소개한다는 건, 창피하다고나 할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유미 마음 속에 일어난 조그만 바람과 같은 것일뿐, 토오코짱은 평소의 "착한 후배" 모드로 유키에게 방긋 웃음을 보였다.
"어서오세요. 전 리리안여학원 고등부 1학년에 재학중인 마츠다이라 토오코라고 합니다. 유미님께는 언제나 자상한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누나가 언제나 신세지고 있습니다"
상큼하구나. 지나치게 상큼해. Boy meets Girl. 청춘영화의 한 페이지같아.

"토오코짱은 카시와기씨 사촌.. 이었지?"
"그런데요"
토오코짱이 끄덕였다. 새삼스레 확인한 적이 없어 자신은 못했지만, 틀린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치코님과 토오코짱의 관계에 대해선 아직까지 완전히 이해못하고 있지만, 결국 두사람 다 카시와기씨의 사촌인 셈이다.
"어머님의 실가가 카시와기 가문이라서 이렇게 자주 놀러오곤 해요"
그러셨군요. 뭐어 특별히 토오코짱과 카시와기씨가 함께 살고 있다고는 생각안했지만서도.
"토오코. 무슨 일로 왔어? 토미한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일러뒀는데"
카시와기씨가 말했다. 토오코짱의 등장은 카시와기씨한테도 예상외였나보다.
"그야 큰어머님께서 한번 보고 와보라고 하시는걸요. 그 '아무도 들이지 마' 가 도리어 신경쓰이신 게 아닐까요?"
"나이도 차지않은 남녀를 외딴 곳에 데려다 놓고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거야?"
"그래요. 신용없네요 오라버니"
토오코짱은 놀리며 웃었다. 웃다가 생각난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세 분은 무슨 밀담중이셨는데요?"
"미,밀담?"
무슨 남듣기 민망한. 유미는 당황하면 손과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어머, 아닌가요? 하지만 유미님이 일부러 스구루 오라버님을 찾아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토오코짱. 저기 있지, 그러니까 동생이 카시와기씨한테 용건이 있어서, 그래서.... 저기, 난 덤으로 따라온거야"
허둥지둥. 하지만 유미의 얼렁뚱땅 변명따위, 토오코짱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 사치코언니 일인가 보죠?"
"토오코짱!"
느닷없이 정답. 아아, 어쩌나. 사치코님께 일러받쳤다가는 인생종말이다. 유미, 절대절명의 대핀치. 바로 그때.
"후, 하하하하"
카시와기씨가 입을 크게 벌리곤 웃었다.
"하하, 멋져, 멋지다구 유미짱"
"뭐가 멋지단말예욧?"
찌릿하고 째려봤다. 남은 지금 완전히 절대절명, 고비의 기로에 서있는 판국인데. 대폭소라니 이 무슨 태도야.
"그 얼굴말야"
"얼굴"
"생각하고 있는게 손에 잡히듯 알 수 있는 그 표정. 정말 최고다"
눈물을 닦고 있지만, 카시와기씨. 아무리 그래도 여성의 얼굴을 갖고 웃다니, 실례잖아요.
"유키치도 재밌지만, 역시 유미짱한테는 독특한 맛이 있다니까"
...라니, 아 그래요. 인간, 어느 정도까지 말을 듣고나면 항의할 기력이 사라지고 마나보다.
"이제 됐어요"
토오코짱도 카시와기씨가 웃고 구르는 데에 질린듯 목을 움츠렸다.
"저도 있는 일 없는 일 떠벌리고 다닐만큼 한가하진 않아서요. 여기서 유미님과 마주친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테니 안심하세요"
".... 고마워"
영문모를 반응이네 하고 유미 자신도 생각했지만, 일단 이 자리를 모면했다는 점에서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3.

 

"또 놀러와라. 유키치"
미로같은 복도를 똑바로 길안내해주고 어엿한 문까지 배웅해준 카시와기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시는 안올것 같은데요"
유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지. 다음은 "내 방" 이란 곳으로 안내될 거란 말을 들었으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피하려드는 게 당연하다.
"섭섭하구만"
따위 말을 하고선 카시와기씨는 질리지도 않고 이번에는 유미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럼 유미짱만이라도 와주지 않겠어?"
장수를 떨어뜨리려면 먼저 말을 쏴라, 인가요.
"저도 사양할게요"
뭐가 슬퍼서 동생이 탄 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거야.
"흐음. 하지만 너희들은 언젠가 또 여기에 올거야"
"대체 무슨 근거로요?"
"별거 아냐. 그냥 예감이지"
"저주하시는건가요?"
"하하하. 응. 그럴지도 모르지"
불길한 예언을 입에 올리고서 아무튼 만족스러웠는지, 카시와기씨는 "조심해서 가라" 하면서 손으로 바이바이했다. 이래저래 카시와기씨의 집에는 3시간정도 머무른 셈이다. 시간 지나가는게 정말 빠르다.
결국 토오코짱이 그 후 계속 같이 있는 바람에, 하나데라와 리리안 학생회의 미팅, 별명 "남성혐오증을 극복하자 대작전" 줄여서 "OK대작전(가칭)" 의 상담은 못이루어졌다. 사치코님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자는 아이디어를 쓸 수 없는 이상, 이미 카시와기씨와 말을 맞출 필요도 없어진 셈이지만.
그 방해꾼 토오코짱 말인데, 유미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또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대체 걔는 뭐하러 온걸까?

버스정류소까지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갑자기 피곤해졌다. 헛고생한 피로도 같이. 자신들은 대체 뭘하러 카시와기씨를 만나러 갔던걸까. 그리고 이제부터 계획을 어떻게 다시 짜야 좋을까.
"그 애지? 사치코씨랑 싸움하게 된 원흉이"
도중, 툭하고 유키가 질문을 던져왔다.
"나, 유키한테 그런 말 했었어?"
장마철, 유미는 사치코님과의 엇갈림이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 일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같이 살다보면 어쩐지 알게 되는 것도 있으니까"
"엣, 난 몰라. 유키가 학교에서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같은 거 전혀 안보여"
유미가 소란떨자 유키가 쓴웃음지었다.
"어떤 꼴을 당하고 있다니, 너무한데"
"그치만"
걱정되는걸.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역시 유키한테는 통하고 마나보다. "난 괜찮다니까" 라고 대답하는걸 보니.
버스정류소에 도착하자, 유키는 운행표와 시계를 보고 버스가 막 떠난 모양이라고 일러줬다. 그걸 증명이나 하듯 주위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류소 앞으로 스쳐지나가는 버스 이외의 차를 유키와 둘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는 아직 밝은데도, 공기만이 앞서 석양 무렵을 고하고 있었다. 귀가길을 서두르는 운전자들의 조급한 마음이 제한속도 아슬아슬하게 어지러이 날리고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문득 유미는 속삭였다.
"토오코짱, 사치코님한테 진짜로 말안할까?"
거기에 답하듯 유키가 말했다.
"말안해"
"어떻게 알아?"
"그냥. 말안하겠다고 한 그 애의 말, 믿음이 갔으니까"
"그렇구나. 토오코짱은 말안하겠네"
유미는 끄덕였다. 토오코짱을 믿는다기보다, 토오코짱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유키의 말에 믿음이 갔다. 그러자.
"그 애, 귀엽더라"
선뜻 유키가 말했다.
"귀여워?!"
저런 게 타입이란 말야? 유미는 놀람과 약간의 항의를 담은 목소리를 올리며 동생을 봤다.
"말해두겠는데, 얼굴 말하는게 아냐"
유키는 냉정하게 말을 고쳤다. 카시와기씨가 사치코님의 일로 놀렸을 때와는 명백히 반응이 틀렸다.
"그럼 어디가?"
"글쎄.."
약간 비스듬이 위를 바라보면서, 유키는 설명했다.
"유치원 아이를 보고서 '귀엽네'하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런 느낌에 가까우려나"
"그게 뭔말이래?"
"이해안되나보네"
"간단히 말해서, 토오코짱이 유키보다 연하라 그런 것뿐이란 말이야?"
"그런 것도 없지는 않지만... 별로 이해안해줘도 돼. 나 자신도 확실히 설명할 수 있을만큼 잘 알고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흐응"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하지만 됐단다. 몰라도 된다고 유키도 말하고 있으니까.
"있지, 유키는 어떤 타입에 어떤 애가 좋아?"
충동적으로 유미는 물어보고 싶어졌다.
"타입이라니.. 여자 취향말야?"
"당연하지"
확인하지마 확인을. 오랫동안 남학교에 다니고 있다보니 나참 이상한 버릇이 붙어서 안돼겠어.
"으음. 친누나가 새삼스레 그런 걸 묻는 것도 좀 창피하지 않아?"
"그래?"
"그래"
나참 델리케이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니까는. 부끄러워하며 딴데 쳐다보는 동생에게 유미는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댔다.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외모가 좋다던가 그런 거 있어?"
"별로 없는데. 얼굴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보다 성격이겠지.... 상냥한 여자가 좋아"
"헤에"
그럼 요시노양이나 토오코짱은 좀 이미지가 다르려나. 산백합회 멤버로 말하자면, 시마코양이 가장 가까울지도.
"밝고 활기차고, 그런 면도 중요포인트이고"
활기차고.. 활기차단 말이지. 그렇다면 레이님같은 사람이 좋은걸까. 하지만 유키와 레이님은 페어짜기가 영 부자연스러워. 상상하는데 전혀 거부감이 안들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두사람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유미는?"
이번에는 유키가 반격에 나섰다.
"나?"
아차. 이상의 남성타입같은 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기가 꺼내든 화제에 동생얘기만 듣고서 자신은 자백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유미는 초특급으로 자기가 좋아할만한 타입을 간신히 짜냈다.
"저기 있지, 예쁘고, 머리좋고, 얼핏 성격이 비뚤어진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은 따뜻하고 결벽증에.... "
그러자
"그만 됐어 유미"
손가락 꼽아가며 세고 있는 도중에 유키가 말을 막았다.
"그거 완전히 사치코씨 얘기잖아"
나참, 여학교에 오랫동안 다니다보니 이렇다니까. 나란히 서있는 동생의 입에서 질렸다는 듯이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