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친구

어느 군주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결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딸아, 이제 결혼을 하도록 하여라."
그러자 공주는 까다로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만일 남편을 얻어야 한다면, 난 내 남편이 아주 힘 센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를 나와 함께 방에 가두세요. 그리고 열닷새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해 보세요! 그 시련이 다 끝날 때까지 그가 단 한 순간도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내 삶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요. 하지만 만일 때가 되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쓰러진다면, 혹은 속이려 들거나 신음한다면, 내 칼이 그의 머리를 두 동강 내게 될 거예요!"
"과연 넌 내 딸이라 할 만 하구나." 하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는 전령을 보내 나라 안팎 방방곡곡에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누가 살고 싶소? 그리고 누가 죽고 싶소? 누가 폐하의 딸을 원하오? 누가 영웅스런 인간이 되겠소?"
그리하여 일곱 왕자들이 7주만에 모여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배겨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어느 왕에게 아들이 있었다. 그는 독수리처럼 날렵한, 젊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그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사냥도 함께 갔으며, 같은 강물에 몸을 씻었고, 같은 그릇에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저녁,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덤불 숲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때, 왕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내일 남자들의 목을 베는 그 공주에게로 가서 내 운을 시험해 볼 테야."
"이보게, 친구! 내겐 자네 목숨이 아주 소중해. 제발 포기하게."
"형제여, 무슨 값을 치르더라도 난 꼭 가겠네."
그들은 자정녘까지 숙고하며 불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농군의 아들이 말했다.
"내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자네가 묵을 그 방에서 가능한 한 잠자리를 창문 옆에 아주 가까이 대 놓도록 해. 그리고 공주의 잠자리에서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하게. 하녀는 등불을 들고 문 가까이에 서 있도록 하고. 나는 매일 밤 그리로 가서 창문 밑에 서 있을게. 나는 벽에다 구멍을 뚫고 대나무 대롱을 통해 자네에게 우유를 흘려 보내 주겠어. 그렇게 하면 열닷새가 마치 오후의 한때처럼 조용히 지나갈 거야."
언약을 굳게 맺기 위해 둘은 불 위에서 흥겹게 서로의 손바닥을 쳤다.
 
다음 날 아침, 왕의 아들은 아내로 삼고자 하는 그 아름답고 고결한 공주에게로 갔다. 사람들이 말했다.
"저리로 들어가시오!"
왕의 아들은 웃옷을 벗고 좁다란 창문 밑에 짐을 내려놓았다. 공주는 방 한가운데 있는 침대 위에 앉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공주는 미소를 지었으나 그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왕의 아들은 누웠고, 기다렸다. 자정 무렵 어깨 뒤에서 뭔가 갉작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곧 벽 밑의 가느다란 구멍으로 갈대 대롱이 빠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끝을 잡고 안에서 흘러 나오는 우유를 마셨다. 그러자 갈대는 다시 밖으로 뽑혀져 나갔다. 공주는 등을 돌리고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하녀도 등불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나흘이 그렇게 무사히 지나갔다. 드디어 열닷새째 밤이 왔다.
"오늘 밤은 제 하녀가 당신이 자던 곳에서 잘 겁니다." 하고 사람의 목을 베는 공주가 말했다.
왕의 아늘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루를 쥐고 문간 옆으로 가서 앉았다. 하녀는 자정이 되어 벽 바깥에서 갈대 대롱이 벽을 뚫고 자기 팔꿈치 가까이로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끝에서는 우유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녀는 밑에다 그릇을 받쳐 놓았다. 바깥 창문 아래에 있던 충실한 친구는 안에서 흘러 나오는 날카로운 웃음 소리를 들었다. 친구는 생각했다.
'아아 이런, 들켜 버렸구나!'
친구는 달빛 아래로 도망을 쳤고, 사방을 절뚝거리고 다니다가 덤불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수풀 사이로 쓰러지며 죽음을 불렀다.
"아아!" 그는 주위의 수풀들에게 말했다.
"내 친구는 이제 날이 밝자마자 처형을 당하겠구나. 내 어찌 그런 불행을 당하고도 계속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바람결에 섞여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냐?"
충직한 친구는 고개를 들었다. 한 여인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안개로 된 것 같은 여인의 몸은 온통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바람결에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오, 아름다움이여!"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도호과란다. 고통을 잠재우는 신이지. 네 고통은 무어냐?"
여신은 그가 울며 말하는 모든 것을 들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여신이 말했다.
"난 네 형제를 구할 수가 있단다. 하지만 너는 그 대신 아주 어려운 희생을 치러야 한다. 만일 네가 원한다면, 내일 너의 친구는 공주와 결혼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장님이 될 것이다."
"여신이여, 제 눈을 가져가세요. 제 친구가 살 수 있다면, 저는 일생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위대한 여신은 그의 눈꺼풀 위로 손을 가져가더니, 빛을 잡아 가지고는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하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창 밑에 놓인 그릇을 흰 천에 덮어 공주에게로 가지고 갔다.
"이 왕자는 사기꾼이었어요."
"그렇듯 잘 생기신 젊은 분이 그럴 리가." 공주가 대답했다.
"그토록 담대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사기꾼이란 말이냐? 난 믿을 수가 없구나. 얘야, 네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
"아니에요. 누군가가 매일 밤 그에게 우유를 흘려 넣어 주었어요. 여기 그 증거가 있어요."
하녀는 그릇 위의 흰 천을 벗겼다. 그녀의 두 눈은 갑자기 휘둥그레졌고, 입술은 감탄을 연발했다. 우유가 금빛 나는 돌들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공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얘야, 넌 참 거짓말쟁이로구나! 그 왕의 아드님은 세상 남자들 중 가장 뛰어난 분이셔. 그의 마음은 태양과도 같아. 그이가 나타나는 걸 보자마자 난 그걸 알았지!"
그 날 아침 당장 그들은 결혼했다. 왕자는 초되된 손님 가운데 자기 친구가 보이지 않자 몹시 놀랐다. 하지만 곧 그에 대해 잊어버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먼지 구덕 속의 지팡이처럼 가난하게 된 눈 먼 친구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을 뻗치면서 1년 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어깨를 기대고 의지할 만한 친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시련의 기간이 지나자, 그는 옛 친구인 왕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왕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 이 어인 축복인가! 난 그의 집 뒤에 숨어 아이가 웃고 장난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내 머릿속에 그 아이의 숨소리를 간직하고 죽을 수 있겠지.'
그는 벽에 의지하면서 길가로 나갔고, 마침내 지난 시절 열나흘 동안 갈대 대롱으로 우유를 흘려 보냈던 그 방의 창문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하인 하나가 그를 알아 보았다. 하인은 주인을 부르며 안으로 뛰어 들었다.
"당신의 영원한 친구분이 저기 문 앞에 계십니다." 하고 하인이 외쳤다.
"주인님, 그 사람은 너무나 불쌍합니다! 거지가 돼서 돌아왔는데, 앞도 못 보는 것 같습니다."
"들어오게 하라!" 하고 왕이 명했다. 맹인은 문지방을 넘어 더듬거리며 들어왔다.
"가까이 오라. 더 가까이." 그가 두 발짝 앞으로 나오자 왕은 다시 말했다.
"이제 앉으라."
왕은 자기 아이를 안았다. 왕비는 옆에서 침묵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맹인은 돛자리 위에 꿇어 엎드렸다. 왕은 갓 태어난 아기를 맹인 앞에 내려 놓은 다음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칼을 짧게 한 번 내리쳐서 아이의 가슴을 갈랐고, 그 속에서 심장을 꺼내 그것으로 친구의 두 눈을 문질렀다. 그러자 곧 친구의 죽은 눈에 빛이 찾아 들었다. 눈을 뜬 가난한 친구는, 아이의 심장을 쥐고 상처 난 곳의 네 귀퉁이를 잡아 벌려서는 아이의 가슴 속에 다시 집어 넣었다. 그런 다음 살가죽을 바짝 죄고 그 위에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은 다시 부드럽게 되었고, 달콤한 젖내를 풍겼다.
왕비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를 두 팔에 감싸 안고 젖을 물렸다. 아이는 따뜻한 젖을 열심히 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