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발자국

어떤 늙은이가 거의 100년 동안이나 걷고 있었다. 유년과 청춘의 길목도 지나 왔고, 숱한 기쁨과 고통,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도 거쳐 왔다. 그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 희한한 나라들과 강렬한 태양이 맴돌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것들은 이제 그가 가는 길 저 뒤편에서 지워질 듯 희미한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 누구도 지금 그가 와 있는 세상의 끝에까지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는 끝없는 태양을 마주한 채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바닷가에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안개 속에 스러져 가는 모래사장 위에 찍힌 자기 발자국들이 보였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그의 긴 일생 중의 어느 날이었으리라. 그는 한 눈에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비틀거린 발걸음이나 힘겨웠던 길들, 멀찍이 돌아간 길이나 행복에 겨웠던 발걸음들, 그리고 고통에 짓눌렸을 때 무거웠던 그 걸음걸이들을 그는 모두 찬찬히 살펴 보았다. 어느 것 하나 빠진 발자국이 없었다. 그는 모든 걸 기억했고, 이제 자기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미소 짓고 있었다.
 
신발을 적시던 그 어두운 물 속에 몸을 담그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발자국이 찍혀 있던 곳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돌아서서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발자국들은 그가 혼자 걷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곁에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따라 나 있었다. 그는 놀랐다. 그도 글러 것이, 그토록 가까이서 충실히 자기 행로를 따르던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나와 동행했는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이니라."
 
그 순간 그는 자기에게 처음 생명을 주었던 아버지 중의 아버지,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던 그 태초의 조상을 알아 보았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 아비 중의 아비가 앞으로 그를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했던 약속도 기억할 수 있었다.그의 마음 속에서는 오래 된, 그러면서도 새로운 어떤 활력이 샘솟아났다. 어릴 때 이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기쁨이었다. 그는 다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온 발자국들이 저 멀리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 어디인 과거의 어느 나날들에 이르자 오로지 하나의 발자국만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 때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그가 날 잊어버리셨는가? 그 때야말로 그의 일생 중 가장 참담하고 어두운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늘도 땅도 다 무심할 뿐이라 여겼던 그 비참한 나날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는 갑자기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저 불행했던 시절을 좀 보십시오. 저는 혼자 걷고 있었군요. 당신이 제 곁에 없어 울고 있었던 그 때, 당신은 대체 어디 계셨던가요?"
 
목소리는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 고독한 흔적은 네 것이 아닌 내 발자국이니라. 네가 모두에게서 버림 받아 홀로 어두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 때, 나는 바로 네가 가는 그 길 위에 있었다. 너는 내 위에서 울고 있었고, 나는 그런 너를 업고 걸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