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을 믿지 말라 - Part.2 스펠만 가족 전쟁사 <下>

조사실 #.4

조서를 슬쩍 보니 스톤 경위가 나의 창문 넘나들기 습관에 대해 몇 자를 적어 놓았다. 글씨를 너무 휘갈겨 써서 거의 알아 볼 수가 없다. 뒤집어 읽기가 그만큼 어렵다. 난 원래 위 아래가 바뀐 이런 뒤집어 읽기를 잘 하는 편인데, 이번엔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이자벨 양, 그만 훔쳐 보시죠?"
"제가 언제요?"
"계속 훔쳐 보지 않았습니까?"
"안 그랬는데요."
스톤 경위가 펜을 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몇 살입니까?"
"다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 조서에도 다 나와 있을 텐데."
"질문에 대답이나 하십시오."
"스물 여덟인데요."
"스물 여덟이면 다 큰 성인입니다. 합법적으로 운전도 할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선거도 치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고소도 할 수 있고 감옥에도 갈 수 있어요."
"요점이 뭔가요?"
"나이에 맞는 행동을 좀 하시란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이냐면 이제 좀 클 때가 됐단 말입니다, 이자벨 양."
그의 훈계는 내게 예상보다 훨씬 큰 충격을 안겨 준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오랜 시간에 걸친 부모님의 세뇌 공작의 결과물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나는 안다. 스톤 경위는 온전히 본인 스스로 나에 대한 평가를 했다.
나는 테이블에 남아 있는 생채기들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조사를 받는 동안 내가 남긴 흔적들이다. 나는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스톤 경위가 이미 나의 가족 모두를 조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의 모든 멤버.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스톤 경위가 다시 나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Part.2 스펠만 가족 전쟁사 <下>


미행 전쟁 #.2

나는 그 날 밤 나의 옷 차림과 관련된 두 번째 마찰이 있을 거라 예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흥미롭긴 하겠지만 그다지 해가 될 것까지야 없는 나의 옷 차림에 대한 관심은 그보다 위기감이 더한 갈등에 밀리고 말았다. 나는 복도에 홀로 서 있는 레이를 발견했다. 레이는 두더지처럼 실눈을 뜨고 자기 방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
내 목소리에 정신이 든 레이가 뒤를 돌아 보았다.
"내 방에 들어갔었어?"
"아니, 왜?"
"누가 들어갔었던 게 분명해."
레이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집게 손가락으로 문을 톡톡 쳤다. 문이 끼익 열리자 레이가 이것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레이,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마."
아무 소용 없는 말이었다. 레이는 2년 전 데드 볼트 설치법을 배웠고 자기 방에 데드 볼트를 달았다. 예외적으로 2년 동안 내 방에서 데드 볼트가 금지된 적이 있긴 했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방에 데드 볼트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우리 가족은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 모두들 민감하다.
나는 내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잠시 후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45킬로그램 짜리 누군가의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권리로 내 물건을 훔쳐가요!"
레이가 거실로 들어서며 외쳤다. 레이 삼촌은 텔레비전에서 눈도 떼지 않은 상태로 대답한다.
"꼬마야, 일이 있었는데 내 카메라 배터리가 나갔지 뭐냐. 그래서 네 디지털 카메라를 좀 빌렸다. 상황이 그래서 그런 것 뿐인데 뭘 그렇게 난리야?"
"'들어가지 말 것'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방에, 자물쇠 세 개를 따고 들어와서, 침대 아래 숨겨 둔 카메라 상자를 찾은 다음 자물쇠를 따고 카메라를 가져갔잖아요. 삼촌네 나라에선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그걸 '도둑질'이라고 해요!"
레이는 내 곁을 스쳐 지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거친 숨 소리로 "이제 전쟁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레이가 그 날 밤 몰래 빠져나간 것은 '열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 방에서 데이비드 오빠가 틀린 철자 다섯 군데를 수정해 오기 전까진 받지 않겠다고 말한 미행 보고서를 다시 읽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오빠는 그렇게 해서라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 때 익숙한 비상 사다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 보니 사다리 마지막 칸을 잡고 매달린 레이가 1미터 아래 있는 바닥으로 뛰어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반이었다. 레이가 통행 금지 시간을 어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누군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관 문을 통해 몰래 집을 빠져나가 레이를 쫓아간다. 그리고 여유를 갖고 폴크 스트리트까지 따라간다. 같은 노선을 좋아하지 않는 레이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몇 가지 습관이 있다. 폴크 스트리트는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 데다 목표물을 고른 후 연습하기 위해선 공공 장소가 필요했다.
레이는 카페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브라우니처럼 보이는 걸 먹으면서 밖으로 나온다. 벌써 성과가 있다. 주 중에 단 것을 먹었으니 벌써 금지령을 하나 어긴 셈이다. 레이는 거리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다. 벌써 목표물을 찜한 것 같다. 나는 우리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레이는 아직 내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레이는 20대 중반의 남성을 미행하고 있다. 안면에 털이 창조적인 스타일로 덮여 있고 문신도 구색 갖추어 새긴 이 남자는 폴크 스트리스 서점으로 들어간다. 레이는 14살이지만 13살처럼 보인다. 그리고 주말도 아닌데 혼자 밤 늦은 시각에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본인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처지가 아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레이의 재미를 망치는 대신, 모습을 드러낼 적당한 기회를 엿보며 밖에서 기다린다.
문신을 한 남자가 서점 밖으로 나온다. 책은 사지 않았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나는 출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이가 따라 나오기를 기다린다. 레이는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남자를 따라 텐더로인 쪽으로 향한다. 나 역시 그들의 뒤를 따른다. 레이는 아직도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레이의 목표물은 에디 스트리트 쪽으로 좌회전을 한다. 레이도 좌회전을 한다. 이 쯤 되니 화가 나기 시작한다. 모퉁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얼마나 큰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렇게 이야기를 해 줬는데 그 모든 게 다 헛수고였다. 바로 눈 앞에서 레이가 모퉁이를 도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다. 문신한 남자는 블록 끝에서 다시 한 번 좌회전을 한다. 레이는 목표물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모퉁이로 뛰어간다. 레이가 뛰니 나도 뛸 수밖에 없다. 문신한 남자는 무슨 고리라도 완성시키려는지 다시 한 번 좌회전을 한다. 나는 레이를 향해 "너 바보야?"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뭔가 배우게 되리란 생각이 든다. 나는 조용히 모퉁이를 향해 뛰어간다.
모퉁이 옆에 기대어 힐끗 엿보니 공사 중 건물 어둠 속으로 레이와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붉은 색 벽돌에 기대 선 남자의 양 팔에 레이가 갇혀 있다.
"귀여운 친구,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남자가 능글맞게 속삭인다.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냥 산책하는 중이었어요."
"이 밤중에?"
"답답해서요."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제가 어떻게 알아요?"
"난 네가 내 뒤를 따라왔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랬어요."
"나이 많은 남자들을 좋아하지, 안 그래?"
"아니에요, 절대로 절대로 아니에요!"
"내가 몇 가지를 가르쳐 줄 수도 있어."
"언니! 제발 도와 줘!" 레이가 외쳤다.
나는 나이프를 꺼내 날을 핑, 세웠다. 문신 가이가 그 소리를 알아 듣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모퉁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 동생에게서 당장 손 떼도록 해."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서부 영화에 나오는 리 밴 클리프 같은 분위기를 풍기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살살 하는 게 좋을 걸, 아가씨들? 여긴 내 구역이라고."
나는 전화기를 꺼내 911 다이얼을 누른다.
"감옥에 가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고."
문신 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더 이상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레이에게 슬쩍 윙크하며 말한다.
"또 보자고, 꼬마 아가씨."
나는 문신 가이가 저만치 아래로 걸어가 작은 골목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 본다. 그리고 레이를 벽 쪽에 세우고 우리가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줄이겠다고는 했지만 하지 않겠다고는 안 했잖아."
"야간 통행 금지 시간에 위험 지역을 돌아다녔어. 네가 14살이라는 걸 내가 다시 말해 줘야 해?"
"가족 중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 시간에도 밖에 나다닐 수 있어. 언니가 함께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언제부터 눈치 챘는데?"
"서점에서. 언니 있는 걸 몰랐으면 절대 이 남자 따라오지 않았을 거야."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나는 레이의 팔을 잡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는 침묵 속에 폴크 스트리트를 걸어 올라갔다. 늘 그렇듯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이였다.
"그 사람 윙크하는 거 봤어?"
"그래."
"사람들 윙크할 때 정말 싫어."
"나도 알아. 이제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 말 알아 듣지?"
"협상할까?"
"미안하지만 이건 협상 불가 건이야."

그 날 밤 조사실에서 밤 늦도록 높은 언성이 들려 왔다. 2인조 훈계 팀은 레이를 두 시간 동안 놔 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들이다. 만약 레이가 위험하다는 게 뭔지에 대해 알았다면, 바로 그 날 밤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치과 의사 남자친구 전쟁

아버지는 결국 나의 착복 성향의 유턴 현상 파헤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처음엔 "왜 그래, 이렇게 말 안 하고 엄마 성질 돋우려는 거야?", "엄마를 바보로 알면 곤란하다. 결국엔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는 걸 몰라?", "병원에 갔다 온 게 언제야?" 식의 질문을 마구잡이로 퍼붓더니 나중에는 접근 방식을 바꾸었다. 어머니는 나의 과거 착복 상례에 대한 험담을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데님, 가죽, 데님, 가죽, 데님, 가죽의 행진이었어. 남성미 팍팍 넘치는 영화 <지옥의 천사들>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와 사는 줄 알았단 말이다. 걸걸한 그 입하고 어찌나 어울리던지."
"한 번도 그런 얘긴 안 하셨잖아요."
"조신한 옷 한 번 입히려고 내가 얼마나 빌었니? 메리 숙모의 장례식 기억하겠지? 그런데 지금은 스커트, 정장 바지, 스커트, 정장 바지야. 이유를 알아야겠다."
"아무 이유 없어요, 엄마. 그냥 분위기를 한 번 바꿔 보는 거라고요."
"그 녀석 이름이 뭐야?" 어머니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듣게 되는 대답은 매 번 똑같았다.
"존 스미스요."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웬만한 전투로는 나의 입을 열기가 힘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렇게 얼마나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시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 없는 질문이 어디 있으랴, 석 달이 그 대답이었다.
내가 열심히 다니엘과 부모님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동안 어디선가 '나도 비밀이 있지' 라인에 합류하려는 노력을 하는 이가 있었으니. 스스로를 '비밀 만들기'의 달인이라고 믿고 있던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하여, 혹은 나를 속이기 위하여 손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데이비드 오빠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오빠가 그러지 말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땐 어쩔 수가 없었다. 근처에서 타이어가 푹 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빠 집 차도에 차를 세우고 벨을 눌렀다. 토요일 저녁 7시였기 때문에 집에 있을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을 세 번 누르고 나니까 오빠가 문을 연다. 나를 보자 얼굴이 확 굳어진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왔을 거라고 예상하며 활짝 웃고 있었는데 현실이 예상한 것과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표정이 확 죽은 듯 하다.
"이자벨이구나."
"안녕? 나 기억하는구나?"
"이러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모든 규칙엔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내가 그런 '예외'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아니. 그렇지만 타이어가 나갔어. 근처에서.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어."
"정말 타이어가 나간 거야?"
"차 바로 앞에 세웠어. 확인해 보고 싶어?"
"필요 없어.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전화도 사용하고 견인 차가 올 때까지 고급 주택에서 좀 쉬어 보자는 거지."
"휴대폰 없어?"
"집에 놓고 왔어. 급한 일로 나온 길이거든."
오빠는 현관문을 살짝만 열어 놓은 채 안으로 들어간다. 안 된다는 말도 없지만 그러나 내키지 않는다는 생색을 실컷 내는 중이다.
"빨리 해. 저녁에 약속 있어."
"무슨 약속?"
"질문 받고 싶은 기분 아니야."
"언젠 받고 싶은 적은 있었나?"
"전화기까지 가는 지도라도 그려 줘야 해?"
오빠가 평소보다 훨씬 퉁명스럽게 말한다. 퉁명 저울로 치면 10의 강도다. 부엌에 있는 무선 전화기를 막 집으려고 하는데 전화 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오빠가 달려 와 냉큼 빼앗는다.
"여보세요?" 숨을 죽인 목소리.
"그래, 나도 알아. 여동생이 와 있어. 견인 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한 30분 쯤 후가 어떨까? 오케이, 한 시간 후로 하자. 그 때 봐, 그럼."
오빠가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나에게 내민다. 나는 주의 깊게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빠가 초조하게 거울 앞에서 치장을 하는 동안 나는 전화를 건다. 욕실을 좀 사용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한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약 선반을 뒤진다. 대개는 '젊음을 유지하고 싶으신가요?' 광고에 등장하는 최신 제품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나는 가차 없이 오빠의 허영심을 비웃어 주곤 한다. 가끔 내 오빠만 아니면 무척 싫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발견한 것은 탐폰 박스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데이비드 오빠에게 심각하게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추론은 역사에 기반한 것이다. 나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다니, 벌써 화가 끓어오른다. 나는 욕실 밖으로 나온다.
"오늘 뭐 할 거야?"
"저녁 약속이야."
"여자랑?"
"친구야."
"그 여자 이름이 뭔데?"
"알 거 없잖아."
"그게 이름이야?"
"그만 하자, 이자벨."
나는 탐폰 박스를 내민다. "딱 걸렸어."


미행 전쟁 #.3

몇 주 후 레이가 대수학 시험에서 C+를 받아 왔다. 벌로 레이는 미행 일을 뺏겼다. 레이는 또 다시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제복을 입은 두 명의 경찰관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연 아버지는 안에 있는 줄 알았던 레이가 밖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순경 하나가 아버지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이 학생이 따님이 맞습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죠. 이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익명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따님과 인상착의가 흡사한 젊은 여성이 폴크 스트리트 인근 지역에서 무작위로 사람들 뒤를 쫓는다고요. 잠시 후에 노브 힐에서 에밀리가 어떤 노부부의 뒤를 밟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게 무슨 범죄는 아닙니다만, 이 시각에 어린 숙녀가 하기에 적당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녀석아." 아버지가 말했다.
"경찰관 아저씨한테 가짜 이름을 대면 안 되는 거야. 제 딸, 레이 스펠만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연행하실 건가요?"
"아뇨,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레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뒤 쪽에서 문을 쾅 닫았다.
"도대체 이 얘기를 몇 번을 더 해야 하는 거냐?"
또 수사학적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레이가 대답했다.
"숫자를 말해요?"
"밖에는 위험한 일이 아주 많아. 너도 알잖아."
"그래서 나이 많은 노부부를 따라갔단 말예요!"
다행히 아버지는 굴하지 않고 아주 조용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그리고 레이를 방으로 올려 보냈다.
삼촌 방의 문은 닫혀 있었다. 레이는 그 앞을 지나갔다. 레이는 알고 있었다. 삼촌이 아랫층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과 경찰에 제보를 한 것이 삼촌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비록 어쩔 수 없이 처벌은 받아들이겠지만 반드시 삼촌에게 복수하고 말리라 결심했다.


'철학자 카페' 전쟁

합산 연령이 대략 백 예순 살인 노부부의 뒤를 밟은 대가로 레이가 받은 처벌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전례에 비하면 그랬다. 레이에게는 석 달 동안 외출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이것만으로도 유례가 없는 벌이었는데, 더욱 더 레이의 가슴을 찢어 놓은 것은 그 기간 동안 어떠한 미행에도 참여시키지 않는다는 금지 조치였다. 외출 금지 명령을 받은 어린 영혼 레이는 지루한 삶으로 떨어지기 전 자신의 서러움을 한 잔의 진저 에일로 달래 보리라 결심했다. 밀로가 레이를 제 발로 집에 돌려 보내기 위해 헛된 노력을 항는 동안, 다니엘은 날르 위해 레시피의 억압을 훌훌 던져 버린 또 다른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원래는 부추였어야 했을) 생강과 양파를 잘게 썰면서 다니엘이 말했다.
"파티를 한 번 할까 생각 중입니다."
"좋은 생각일까요?"
"그럼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누굴 초대할 생각인데요?"
"친구들 몇 명? 어쩌면 어머니도 부르고."
이런 이런.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니엘이 우리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는 이상, 무슨 걱정이 있으랴. 그래서 나는 주어진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되 좀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보려는 자그마한 노력을 시도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엔칠라다를 만들지 그래요?"
"아뇨. 좀 더 특별한 요리를 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엔 엔칠라다도 굉장한 특선 요린데."
나는 다니엘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말했다. 그 때 내 전화 벨이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받지 않았을 텐데, 액정에 뜬 번호가 굉장히 낯이 익었다. 식구들 번호는 아니고.
"이자벨, 밀로야. 여동생이 여기 와 있어."
"바에요? 외출 금지 중인데?"
"알아. 나도 이제 다 안다고. 와서 데려가야겠어."
"알겠어요. 지금 출발할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니엘이 누가 외출 금지를 당했냐고 물었다. 거짓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나는 여동생 레이가 (혹시 '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를 대비해) 발레 연습을 하느라 (있지도 않은) 스쿨 버스를 놓쳤는데, 오후 7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외출 금지를 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니엘이 여동생을 만나 보고 싶다면서 같이 가겠다고 했다. 나는 소스를 완성해야 되지 않겠냐고 그를 설득했다. 순순히 넘어갔다.

레이는 밀로와 한창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선량한 바텐더 밀로는 기꺼이 레이의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완전 노인네들이었다고요, 노인네들. 게다가 노브 힐이었다고요. 거긴 위험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네 말이 옳다, 꼬마야."
"협상을 하자고 했어요. 엄마가 협상 불가라고 하데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협상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내가 누굴 해치기라도 했어요?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네?"
"다른 사람이 널 해칠까 봐 그런 거지."
"60퍼센트까지 양보하겠다고 했어요. 안 된대요. 그럼 80퍼센트. 세상에 80퍼센트나 제시했는데! 아빠가 안 된대요. 하나도 안 된대요. 이제 일도 안 준대요. 이럴 수는 없어요. 이젠 모든 게 끝장이에요."
레이는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채고 나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듣고 들은 얘기였다. 나는 레이 옆에 앉아 예전처럼 다시 진저 에일 잔을 비웠다.
"넌 외출 금지야, 레이."
"알아."
"알면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성인의 관리 감독 없이 방과 후 집을 나가선 안 된다.' 이것이 벌칙의 내용이야."
"그래서?"
"밀로 아저씬 성인이야."
나는 레이를 의자에서 끄집어 내 차로 끌고 갔다. 차 속에서 벌칙 조항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그리고 이후로 착실하게 벌칙을 수행하겠다는 조건 하에 '철학자 카페' 사건은 비밀에 붙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날 밤 나는 다니엘이 나의 여동생 문제 얘기를 꺼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겟 스마트>를 이용했다. 우리는 에피소드 네 개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카오스 측에서 상상력 고갈 로봇* 하이미**를 컨트롤 본부에 침투시켜 맥스가 지키고 있는 중요한 과학자 쇼트와이어 박사를 납치하려고 하는 1966년 편이 최고였다. 결국 맥스의 친절함이 민감한 로봇의 마음을 교화시키고 하이미***는 맥스와 요원99, 그리고 쇼트와이어 박사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한 창조자에게 총을 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본부의 캡틴이 하이미에게 컨트롤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묻지만 하이미는 똑똑한 기계들을 만나기 위해 IMB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원래 하이미는 이 에피소드에만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반응이 좋다 보니 그 이후에도 몇 번 다시 등장했다.
"난 하이미가 좋습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안 그럴 수가 있어야 말이죠."
내 여동생과 내 가족에 관한 주제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구나 생각하며,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다니엘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더니 말했다.
"사는 곳을 보고 싶습니다."
요구가 이어졌고, 요구에 따른 협상이 이루어졌고, 이 협상에 따라 다니엘과 나는 새벽 2시 30분에 비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 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고등학생들이나 할 것 같은 유치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는 신선함에 사로잡힌 다니엘은 그런 행동을 하는 자기 여자친구가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밤새도록, 그러니까 4시간 동안 내 방에 있다가 내가 깨우자 일어나 다시 비상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다니엘만큼이나 어머니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굳세게 둘을 방어했다. 선생 짓은 계속 하기 힘들었지만, 차츰 내가 다니엘에게 보여 주는 그 가공의 인물 속으로 내 평소의 의상 취향과 내 일상의 언어 습관들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래의 내 모습 그대로 그와 함께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내 가족이나 직업에 대한 문제는 아직 미지에 가려져 있었지만.

*예를 들어 하이미에게 "손 좀 빌려 줘야겠어" 라고 말하면 하이미는 전동 드라이버처럼 생긴 손을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이 로봇을 탄생시킨 악의 과학자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하이미는 인간처럼 보인다.

세상과 단절된 채 감금되어 있는 동안 레이는 자신의 충만한 에너지를 방출시킬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로 조용히 분노를 삭이며 집 안을 어슬렁거렸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결국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현재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벌칙의 내용을 되풀이했다. 레이는 자전거를 타고 밀로의 바로 갔다. 밀로는 이번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상호 논의 끝에 그 분들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주의 : 본인은 아래 사건의 직접 목격자가 아니긴 하되, 관련된 이들을 모두 조사하여 사건을 재현하였으니, 이 재현 사건은 거의 진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부모님이 레이를 데리고 '철학자 카페'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비가 심하게 내리붓고 있었다. 레이는 어머니 차 트렁크에 자전거를 싣고 뒷과석에 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즉각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하시면 어떡해요?"
"오버하지 마."
"정말이에요, 솔직히 제가 이 일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가 끊으라고 하면 끊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비현실적인 바람이세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할까요' 식의 눈짓을 보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일을 줄게, 레이. 한동안 꽤 바쁠 테니 다른 문제 일으킬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이건 정식 미행 일이야. 만약 다시 한 번 프리랜서 미행을 하면 18살이 될 때까지 이 일에서 손 떼게 할 거야, 알아 들었어?"
"네. 그런데 어떤 일이에요?"
"언니 뒤를 밟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언니가 만나는 남자에 대한 신상 정보가 필요해." 어머니가 말했다.
레이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일을 한답시고 학교 생활을 게을리 해서는 절대 안 돼. 그리고 통행 금지 시간도 아직 그대로 유효하다는 걸 명심해. 이자벨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넌 반드시 8시까지 집에 돌아와야 해."
"하지만 제 귀가 시간은 9시잖아요."
"바뀌었어." 어머니가 말했다.
"할 거야?"
"돈 얘기를 해 보죠."
대상이 나라는 점, 초과 근무, 추가 비용 등의 사정을 고려해 시간 당 1달러의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합의 끝에 그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알아 차리기 전까지 레이는 사흘 연속 나를 미행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레이가 찍은 사진과 레이의 말을 듣고 받은 어머니의 충격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와 다니엘이 같이 있는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다니엘이 잘 생기고 단정한 청년 같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엄마, 침착하세요." 레이가 마지막 사진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레이의 손에서 마지막 사진을 빼앗아 들었다. 그것은 '다니엘 카스틸로 치과' 라는 상호가 나온 사진이었다.
"치과 의사야?" 어머니가 물었다.
"네." 레이가 말했다.
"그런데 굉장히 좋은 사람 같아요."

정상 데이트가 시작되고 정확히 석 달이 지나자 다니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협상의 여지가 없는 최후 통첩을 했다.
"당신 가족을 만나고 싶습니다."
"왜요? 재미 없을 거예요."
"가족을 만나게 해 줘요."
"안 그러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 그러면이라니?"
"보통 누가 뭔가를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마련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 일어나게 될 결과가 뭐냐고요?"
내가 이렇게 물은 까닭은 "안 그러면 다시는 요리를 안 해 줄 거예요" 같은 대답을 듣게 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안에 당신 가족을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끝입니다."
"우리 가족을 만나면 우리 관계가 끝날 거라고 했잖아요."
다니엘은 눈을 굴리며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을 교육에 바치신 분들이에요. 상황이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습니까?"
"선생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이자벨, 이건 최후 통첩입니다. 당신 가족을 만나게 해 줘요. 안 그러면 우린 끝입니다."
최후 통첩이 유행이었던지 다음 날 어머니가 본인의 최후 통첩을 전해 왔다.
"이자벨, 일주일 안에 네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내 방식대로 만나 볼 거야, 알겠니?"

다음 날 아침 스펠만 가의 부엌으로 내려갔을 때 레이가 토요일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초콜릿 칩을 가득 가득 넣은 초콜릿 칩 팬 케이크. 사실 아버지가 레이의 손에서 초콜릿 칩 상자를 떼어 놓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어머니가 아버지 손에서 그 상자를 떼어 놓았어야 했다. 레이가 처음 구워 낸 팬 케이크를 하나 건넸다. 나는 돈은 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뭘 손에 들려 줘 놓고 돈을 받아 내는 게 레이의 평소 술책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는 "이번엔 공짜로 줄게" 라고 말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전 날의 최후 통첩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며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는 답변을 주었다.
"알았어요, 만나게 해 드릴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
"그 사람은 내가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왜?" 아버지가 물었다.
"제가 그렇다고 했거든요."
"참 그럴 듯한 거짓말이다."
"혹시 알아요, 내가 선생이 될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어떻게 아세요?"
"자자, 그만 하고 하던 얘기나 계속 하자."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을 분명히 전달했다.
"전 아직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아니?"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그리고 계속 모르게 했으면 좋겠어요."
레이 삼촌이 청바지와 스티커 차림으로 가슴팍을 드러낸 채 부엌으로 들어왔다.
"누가 내 셔츠 못 봤니?"
아니오, 소리가 세 번 이어진 후 어머니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보셨는데요?"
"어젯밤에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제 다녔던 데로 걸어다녀 보세요."
"내가 지금 두 시간 째 그 짓을 하고 있다니깐."
마치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고 레이 삼촌은 부엌을 나갔다. 어머니는 다시 중요한 대화를 이어 갔다.
"언제 보게 되니?"
"금요일 저녁이요."
"우리 역할은 뭐냐?" 아버지가 꺼림칙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닌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에요. 아버진 앨러메더 학군에서 은퇴한 교장 선생님이고요."
"나도 선생님이야?" 레이가 물었다.
"아니야."
"왜?"
"넌 중3이잖아."
"그럼 내 역할은 뭔데?"
"넌 중3이라고 했지!"
어머니가 커피 잔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부끄럽니?"

그 날 밤 늦게 레이가 방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레이가 말했다.
"어두운 과거가 필요해."
"뭐라고?"
"금요일 말이야, 치과 의사 만나는 날. 중3이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가 않아. 마약했다고 하는 건 어떨까? 6개월 전에 딱 끊어서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다고 항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쓸 데 없는 소리 좀 그만 해!"
"아니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하루 하루 견뎌 나가고 있어요'."
나는 레이의 목덜미를 잡고 문으로 밀어 붙였다. 싹을 잘라 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또박 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아빠는 은퇴한 교장 선생님. 엄마는 수학 선생님. 언니는 임시 교사. 끝. 잘 알아 들었지."
"그건 알아 들었다니까." 레이가 마지막으로 기를 쓰며 저항했다.
나는 레이를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내 보복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레이가 자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다가올 재난의 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얼마만한 재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페트라를 만나 한 잔 했다. 내 맘을 좀 알아 주라 하는 기분으로 그 간의 근황을 설명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치과 의사한테 다 털어 놔."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니까."
"어느 세월에?"
"그러지 좀 마."
"그 사람 떄문에 사서 고생이잖아."
"좋아하니까 그렇지."
"도대체 뭐가 좋은 거야? 잘 생긴 의사, 원래 네 취향 아니잖아?"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람한테는 내게 없는 모든 게 있어."
"의학 박사 학위가 있는 과테말라 남자라는 거? 그거야 그렇긴 하지."
"공부도 많이 하고 두 나라 말을 하고 태닝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둘 사이에 공통점은 있어?"
"사실 아주 많아."
"예를 들어서?"
"<겟 스마트>. 그 사람도 팬이야. 에피소드 전체를 적어도 세 번 씩은 다 봤대."
"35년 전 시트콤이 관계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기에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우리도 그걸로 맺어진 거잖아."
"다른 걸 말해 봐."
"DVD로 다 있어. 정본은 아니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다 해서 138개야, 에피소드가."
"질문 다시 반복하겠어. 둘 사이에 다른 공통점이 있어?"
"우리 둘 다 지붕 위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해."
"그걸 누가 안 좋아해? 그 사람은 치과 의사야.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그러면서도 계속 만나겠다는 건, 그러니까 뭐랄까 10대의 반항이랄까, 뭐 그런 냄새가 난단 말이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아니."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알아 들었다.
페트라는 그만 두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그리고 당구를 치기 위해 재킷을 벗었다. 한 쪽 어깨 위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왜 이랬어?"
"아무 것도 아니야. 문신 지웠거든."
"설마, 퍼프를?"
페트라가 매직 드래곤 퍼프를 그려 넣은 것은 두 시간 만에 위스키 아홉 잔을 마신 어느 안개 낀 밤이었다. 본인 말로는 불을 내뿜는 아주 사악한 용을 그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페트라를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고 있는, 위 아래가 뒤집힌 작은 용 한 마리였다. 다음 날 시술실로 찾아간 페트라는, 어젯밤 술 기운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어깨 위에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인지 설명을 요구했다. 주인은 페트라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주된 이유를 말하자면 페트라가 그에게 세 번이나 프렌치 프라이를 주문하려고 한 데다, 페트라 자신이 자기 어깨 위에 그려 달라며 직접 작품의 모형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그는 페트라에게 퍼프의 그림과 그 옆에 페트라의 이니셜이 적힌 바 냅킨을 내밀었다. 자신의 음주 행각에 혼란을 느낀 페트라는 전 날 밤의 과오를 인정했고 군 말 없이 그 곳을 나왔다. 그리하여 퍼프는 페트라의 어깨 위에서 살게 되었고, 먼 사촌이나 오래 전에 세상을 뜬 애완 동물처럼 친근감 있는 존재가 되었다.
"퍼프가 보고 싶을 거 같아." 내가 말했다.
"생애 최악으로 퍼 마셨던 날을 날마다 기억하는 일이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냐."
"예전에 지울 생각 없냐고 물었을 때는 없다고 했잖아."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도 있잖아."
"넌 안 그러잖아."
페트라의 공이 흩어졌다. 하나도 포켓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스트립 공 두 개를 처리한 다음, 페트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목소리가 왠지 이상했다.
"정말이야?"
"이자벨, 당구 칠 거야, 말 거야?"


상견례 전쟁

나는 우리 집 차로에서 걸어 오는 다니엘을 맞는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랑 헤어지면 안 돼요."
"설마 당신 가족이 그 정도일 리가 있겠어요?"
"약속해요."
다니엘은 나에게 키스를 하고 오늘 밤에는 나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 유예 기간은 24시간이 지나면 해제될 것이라고 다정한 소리로 못 박는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거다. 나는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부모님이 내려오셔서 우리를 맞는다. 나는 간단하게 소개 인사를 한 뒤 다니엘에게 마실 것을 갖다 주기 위해 자리를 뜬다. 분명 목이 마를 것이다. 어머니가 그를 거실로 안내하는 동안 나는 두 개의 잔에 위스키를 따른다. 그러다 문득, 만약 이 만남이 그 잠재적인 가능성을 빗나가지 않고 예정된 비극으로 치달을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무실로 달려가 소형 녹음기를 찾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거실로 향한다.

그 날 밤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녹음기를 틀 필요는 없다. 어젯밤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까.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다니엘에게 잔을 건넸다. "필요할 거예요."
어머니는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급하게 말했다.
"결국 이렇게 만나네요.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다니엘. 아니, '닥터'라고 불러야 하나?"
"아닙니다, 다니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스펠만 부인." 다니엘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냥 리비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전 안 그러는데요." 내가 말했다.
"얌전히 굴어요, 이자벨." 다니엘이 나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다니엘." 어머니 얼굴이 환해진다.
"자, 그건 그렇고, 다니엘. 캘리포니아 태생인가요?"
"아닙니다. 과테말라 출신입니다. 아홉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모님은 어디 사시는데요?"
"산호세에 계십니다."
"그 분들 성도 카스틸로인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시작이다.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말아요."
내가 마치 국선 변호사라도 되는 것처럼 끼어든다. 하지만 다니엘은 내 말을 무시한다.
"네, 그렇습니다."
"철자도 같고?" 아버지가 묻는다.
"물론입니다." 다니엘이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다행이군." 아버지가 말했다.
레이가 거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반갑기까지 하다. 내가 참으로 비참한 심경이었던 거다. 레이가 다니엘에게 걸어가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이라고 해요. 이자벨 언니의 동생이에요. 카스틸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만나서 반갑다, 레이. 그냥 다니엘 오빠라고 부르렴."
다니엘이 아무런 의심 없이 미소 짓는 걸 보니 레이의 착한 여학생 연기가 먹히는 것 같다.
다음은 레이 삼촌이다. 삼촌이 아래 층으로 내려오며 외친다. "꼬마야, 네 편지를 받았다!"
이런 일이 있을 거란 예상은 못 한 건 아니지만 하루만 더 기다려 주면 좋았을 것을. 삼촌이 아버지에게 회색 종이 쪽지를 내민다.
"이걸 좀 봐." 그러더니 레이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내가 이런 수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게 착각한 거야."
나는 쪽지를 펴 보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웃고 싶어 죽겠는 걸 참느라 초인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레이가 인상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삼촌에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전 하나도 모르겠네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명심하는 게 좋아."
레이 삼촌이 전에 없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니의 노골적인 질문보다도 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랑곳 없이 질문을 계속했다.
"다니엘, 나이가?"
"어머니가 상관할 필요 없잖아요." 내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괜찮아요, 이자벨. 올해 서른 일곱입니다."
한숨이 나온다.
"그렇군. 좋은 나이네요. 그럼 70년생이 되는 건가?"
"어머니."
"생일은 언제예요?"
"대답하지 말아요."
"2월 15일입니다."
다니엘은 어머니와 나 중 누가 더 당황하는지 보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다.
"대답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진정해요, 이자벨."
어머니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수첩에 적는다.
"1970년 2월 15일 생. 내가 워낙에 생일 잊어먹는 걸 싫어해서 말예요."
한편 아버지는 한 쪽에서 분쟁을 조정 중이다.
"레이, 삼촌에게 셔츠 돌려 주도록 해."
아버지가 나에게 쪽지를 건네며 말한다.
"왜 저한테 그 셔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 협박 편지 때문이야."
나는 쪽지를 편다. 다니엘이 어깨 너머로 보고 있다. 쪽지에는 뉴스와 신문에서 자른 알파벳들이 붙어 있다.

[내가 당신의 셔츠를 보관하고 있다. 다시 이 셔츠를 보고 싶다면 나의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레이는 여전히 "이런 편지는 누구나 쓸 수 있어요" 라며 완강하게 버틴다.
"레이, 얼른 셔츠 돌려 드리지 못해!"
나는 딴에는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원하시면 지문 검사라도 해 보시죠."
레이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최종 항변을 위해 다니엘에게 걸어간다.
"이렇게 다짜고짜 저를 의심하는 이유는 제게 한때 마약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손 뗀 지 6달이나 지났는데 아직 신뢰를 회복하기가 힘드네요."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사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는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레이 삼촌이 다니엘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며 말한다.
"방해해서 미안하네. 난 레이라고 이자벨의 삼촌이야."
"레이가 두 명이네요. 헷갈리겠어요."
"내 이름을 따서 저 애 이름을 지었어. 올리비아가 임신했을 때 난 암에 걸렸었거든. 내가 죽을 거 같으니까 내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짓기로 한 거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죽지 않았어요."
레이가 마치 추리 소설의 놀라운 끝 부분을 밝히듯 말했다.
"레이, 여기서 나가 주면 5달러 줄게." 내가 제안한다.
"10달러를 주면 협상을 받아들일게."
내 손에서 레이의 손으로 돈이 넘어간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여길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니엘 오빠. 제 예상과 다르시네요."
레이가 거실을 나간다. 레이 삼촌이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우리 문젠 아직 안 끝났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다.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어머니가 다시 끼어 든다. "전쟁 중이거든요."
어머니의 미소가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래 치과 의사라던가?" 아버지가 목소리의 날을 감추며 묻는다.
"네." 다니엘이 경쾌하게 대답한다.
"그래 그 쪽 일은 어떠신가?" 아버지가 묻는다.
"전 제 직업을 좋아합니다. 아버지도 치과 의사였고 할아버지도 그러셨지요. 가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머, 정말 대단도 하네요." 어머니가 자기가 한 말의 내용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교직에 얼마나 계셨나요?" 이번에는 다니엘이 묻는다.
"한 20년 됐나?" 어머니가 받아친다.
"교육계에 헌신하신 셈이군요."
"뭐 딱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딱히 우리 소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 아버지가 연기를 계속 한다.
"솔직히 우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거든." 마치 그 동안 감춰 온 비밀이라도 털어 놓는 듯하다.
"이제 그만 가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의견이 정확히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마약 안 하기가 힘든가?" 어머니가 가식적인 미소를 딱 지우며 묻는다.
"네?" 다니엘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진다.
"그 쪽 같은 사람들에겐 마약 문제가 많아 보이던데."
나는 다니엘의 팔을 잡아 끌지만 다니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한 번도 그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말은 그러니까…."
"그것 참 다행이네요." 어머니가 말한다.
"좀 너무하시는군요." 다니엘이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늦었다니까요" 가 나의 유일한 대답이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니엘."
여전히 '우리 가족은 지극히 평범하지' 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버지가 말한다.
"다시 와요." 어머니가 말한다. 마치 '지옥에서 만나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다니엘이 걸어 나간다. 나는 부모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이러시지 않기로 했잖아요."
다니엘을 따라 뛰어가는 나의 뒤에다 대고 아버지가 외친다. "즐거운 저녁 보내라, 이자벨!"
"이상한 분들이라고 말했잖아요."
나는 동정 어린 대답을 기다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난 그 분들과 평생을 같이 살았다. 다니엘은 고작 해야 10분 대화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다음으로 미루죠."
다니엘이 차를 타고 시동을 건다. 그냥 보내 줄 생각이다.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 들이기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하룻밤 쯤 그에게 주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우랴. 그러다 순간 마음이 바뀐다. 나는 나의 뷰익으로 뛰어 든다. 다니엘의 BMW가 밴 니스 스트리트로 향하고 있다. 나는 두 블록 쯤 뒤에 따라가고 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린다.
"이자벨, 내 뒤를 쫓아 오는 게 당신입니까?" 다니엘이 속력을 높이고 있다.
"다니엘, 제발 멈춰요. 당신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페달을 밟고 싶은 거예요."
"나도 운전하는 법 압니다, 이자벨."
"설명할 시간이 필요해요. 5분이면 돼요. 아니, 사실은 15분은 걸릴 거예요. 아니면 20분 정도. 그거면 돼요."
다니엘이 캘리포니아 스트리트에서 급하게 우회전을 한다.
"경고하는데, 나를 따돌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차가 당신 차보다 빠릅니다."
"내 말을 믿어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다니엘이 전화를 끊더니 노란 불에서 속력을 높인다. 나 역시 빨간 불을 무시한 채 속력을 낸다. 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우리는 하나 마나 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다니엘은 책임감 있는 시민이다. 그는 사회의 규율과 교통 법규를 지키는 사람이다. 나는 아니다. 그러니 자동차 추격전에서 내가 질 리가 없다.

다니엘은 특별한 계획도 방향도 없이 시속 약 70킬로미터의 속도로 도시의 미로 망을 헤쳐 달리고 있다. 나는 내가 아직 뒤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킬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하지만 겁을 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나의 머릿속에는 절대로 그를 잃을 수 없다는 생각 뿐이다.
다니엘은 고프 스트리트를 타고 베이까지 내려가더니 좌회전을 한다. 그리고 필모어까지 직진하여 급우회전을 시도한다. 약간 속력을 높였지만 여전히 교통의 흐름을 타는 범위 내에서 골든게이트 브릿지로 향하는 중이다. 백미러로 뒤를 보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방향 지시등이 켜진다. 다리 끝에서 차를 세울 장소를 찾으며 속력을 줄인다. 추격전은 곧 끝날 태세이다.
다니엘은 다리 건너 첫 번째 유턴 지점에서 차를 세운다. 밖으로 나와 내가 주차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날 죽이려는 겁니까?" 그가 내 차 쪽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차 추격전을 둘러싼 그의 과장된 반응을 무시한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고요? 당신은 그저 부모님에게 반항하기 위해 나와 데이트를 하는 겁니다. 나 같은 스페인계하고!"
"그게 아니에요."
"나한테 하는 소리 못 들었어요? '그 쪽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치과 의사들을 말하는 거예요. 어머닌 치과 의사들을 싫어해요."
"치과 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과 의사들을 싫어하지는 않지요."
"다니엘, 사연이 아주 복잡해요. 어쨌든 고의로 그러신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 주세요."
"당신 부모님은 맞습니까?"
"네."
"안 됐군요."
"내 직업은 교사가 아니에요. 내 부모님도 아니고요."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 분들은 사립 수사관이에요. 저도 그렇고요. 가업이죠. 당신을 만난 그 날 전 당신의 테니스 파트너였던 잭 피터스를 미행하던 중이었어요. 그 부인이 남편이 게이가 아닐까 당신이 그의 연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저도 알아요. 당신이 두 번째 게임 하는 걸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바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거예요. 그 때 당신에게 진실을 말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고객 정보를 노출시키면 안 되니까요."
"선생이라고 했잖습니까."
"맞아요."
"왜 그랬습니까?"
"사립 수사관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정상적인 직업처럼 들리잖아요. 오래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러다 사실을 밝힐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만 거예요. 물론 내 부모님을 만나기 전에 말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다니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부모님도 웬만한 배신감 아니고서야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었다. 아주 다른 사람들인데 감정이 같다고 표정도 똑같을 수 있다니,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조용히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겠죠?"
"네."
나는 조용히 말하고 그를 보내 준다. 차를 타고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나는 결심한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되찾고 말겠다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결을 봐야 할 일이 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계단을 내려가 부모님의 부엌으로 들어간다. 커피 잔에 커피를 따른 후 현관 앞을 지나 스펠만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만 두겠어요."
"뭘 그만 두겠다는 건데?" 어머니가 묻는다.
"이 일을 그만 두겠다고요."
"그렇게는 안 돼." 아버지가 말한다.
"그만 두겠어요."
"안 된다니까. 어머니에게 물어 봐라."
"아버지 말이 옳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그냥 일 하는 걸 안 하면 돼요."
"그럼 우리도 돈 주는 걸 안 하면 되겠구나." 아버지가 말한다.
"그러세요."
"알았다."
"좋아, 그럼." 어머니가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사건을 더 처리해야 한다. 일이라곤 이 분야 일 밖에 안 해 봤으니까 추천장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안 그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 무슨 얘기야?" 아버지가 묻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처리하고 그만 두라고. 그럼 추천장이건 뭐건 써 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면 되는 거죠?"
"그래, 그럼 자유야."
자유. 어감부터가 뭔가 달랐다. 가업을 위해 일한 것이 벌써 12년이나 됐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삶에 대해 배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