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을 믿지 말라 - Part.3 스펠만 가족의 평화 협상 <中>

조사실 #.5

지금껏 일부러 담담한 척 하고 있던 스톤의 얼굴에 조소가 번진다. 조서를 바라보는 그가 이를 악문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네요."
스톤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과연 그럴까요?"
사실이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기운이 빠진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결혼하셨나요, 경위님?"
"아니요."
"이혼하셨나요?"
"지금 조사 받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아내 되시는 분께선 왜 경위님 곁을 떠나셨나요?"
"나이에 비해 참 구식 트릭을 쓰시는군요."
"떠나신 게 아닌가요?"
"이자벨 양, 그만 하세요."
스톤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만 둔다. 하지만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던 질문을 꺼낸다.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게 중요합니까?"
"네. 아주 중요해요."
스톤은 조서를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야간 탈출 때마다 차를 몰고 다니며 거리에 쓰레기통을 날리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마약에 대해서도 들었고 알코올 습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툭 하면 남자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얘기도 들었고 본인을 위해서 동네 자경단이 조직된 얘기도 들었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이자벨 양이 학생이었을 때 일어난 많은 범죄 행위들의 용의자라는 얘기도 하더군요."
"좋은 얘긴 못 들으셨나요?"
"지금은 대단히 나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아직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조차 모르는데요."


Part.3 스펠만 가족의 평화 협상 <中>


계속되는 앤드류 실종 사건 #.6

사실 제롬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앤드류의 졸업 앨범에 '작별의 말'을 적어 놓은 세 명 가운데 한 명인 오드리 게일에 의하면, 그는 마린 고등학교 학생들의 주요 마약 공급 루트였다. 진짜 제롬 프랭클린의 범죄 인생은 고등학교에서 끝이 났다. 그는 현재 샌디에고에 살면서 재정 고문 일을 하고 있다. 일단 전화를 걸어 나의 목적을 설명하고 그의 젊은 시절 과오를 파헤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설명하자, 그는 협조적으로 나왔다. 그는 앤드류가 대마초 피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그게 제롬이 앤드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다였다. 요는 앤드류 스노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는 거다.
스노 가족들이나 라슨으로부터 실마리를 얻지 못한 나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특별한 인물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이제 라슨의 삼촌이자 앤드류가 실종되던 날 라슨의 유일한 알리바이인 파버 씨를 방문할 차례였다. 나는 파버 씨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로 약속을 잡았다.

시내를 반 정도 빠져나올 때까지 어머니가 내 뒤를 따라 붙었다. 나는 불법 유턴을 해서 그녀를 따돌렸다. 어머니가 나를 따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정확히 아침 10시 45분에 텐더로인에 있는 낡은 아파트 4C호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사람은 약간 취한,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에 나오는 할아버지 타입의 남자였다. 경마장이나 스트립 댄스 클럽에서 보게 되는, 시가를 쉬지 않고 피워 대는 할아버지. 파버 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며 말했다.
"들이긴 하겠지만 우리가 무슨 할 얘기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 지저분한 집 주인은 나를 30년 된 모직 소파로 안내해 앉으라고 했다. 어찌나 거칠거칠한지 입은 옷을 뚫고 들어와 살갗을 벗겨 놓을 것만 같은 소파였다. 그는 나의 맞은 편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고 기대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실종된 남학생에 관련한 인터뷰가 미스 아메리카 콘테스트의 질의 응답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파버 씨…."
"행크라고 부르시게." 그가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1995년 7월 18일 주말을 기억하십니까?"
"아주 오래 전 일이군."
"네, 그렇습니다. 그 때 주말을 기억하시나요?"
"다른 힌트 같은 걸 좀 주지?"
"그러지요. 앤드류 스노가 실종된 주말입니다."
"아, 그렇군. 기억이 나. 아주 슬픈 일이었지."
"그 주말에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내 조카인 그렉이 왔던 것 같은데. 아마 17살 쯤 되었었지?"
"그 때 뭐 특이한 점 같은 게 있었나요?"
"아니, 그렉은 콘서트에 갔었어."
"무슨 콘서트였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아니, 요새 애들이 듣는 음악에는 관심이 없어."
"그렉이 몇 시 쯤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한 11시 쯤."
"그렉이 콘서트에는 어떻게 갔나요?"
"자동차를 타고 간 것 같은데."
"누구 차 말입니까? 삼촌 차를 빌린 건가요? 아니면 본인 차가 있었나요?"
"내 차였어. 그런데 그 때 나한테서 차를 샀지."
"언제요?"
"그 때 쯤."
"앤드류 스노가 실종되던 주말에 그렉이 삼촌 차를 샀단 말입니까?"
"그 주말은 아니었고, 한 몇 주 쯤 뒤였어. 그 녀석이 차를 몰았지. 뭐 어쨌든 나는 그랬다고 생각해."
"차종이 뭐였나요?"
"도요타 캠리."
"색깔과 연식을 기억하세요?"
"하얀 색이었고 1988년."
나는 자욱한 연기 가운데 파버 씨를 남겨 놓고 바로 스노 부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무척 실망한 기색이었다.
"스펠만 양, 오늘은 또 무슨 일이신가요?"
"절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죠?"
에비게일이 고통스러울 만치 예의 바른 어조로 물었다.
"그게, 저한테 전화를 하셔서 아드님 사건을 더 이상 파헤치지 말라고 아주 강력하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
"전 스펠만 양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는데요."
"네? 전화를 안 주셨다고요?"
"네, 틀림 없이 제가 맞나요? 아마 다른 고객이었을 테죠."
'만약 스노 부인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건 누구였지? 만약 전화를 해 놓고서도 지금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왜? 이 여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부인이 내 부츠를 바라보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먼지를 집 안으로 들여놓게 될 것인지 계산하는 것 같았다.
"신발은 벗을게요."
"코트도 벗어 주셔야겠어요. 좀 더러워 보이네요."
나는 신발을 벗고 코트는 현관 앞에 있는 그네에 걸어 두었다. 부인은 그래도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들였다.
"전화를 좀 써도 될까요?"
나는 내 휴대폰을 진동 모드로 바꾸면서 물었다. 부인이 전화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세요."
나는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스노 부인으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액정 화면에는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이라고 떴다. 이번에는 전화번호가 그대로 떴다. 일단 머릿속에는 내가 이 사건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기 위해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휴대폰이 있으신가요?"
"물론 없어요." 부인은 수건으로 전화기를 닦으며 대답했다.
질문만 몇 개 하고 나면 이 집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포프리 냄새 때문에 또 다시 머리가 아파 오고 있었다.
"이상한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렉 라슨이 어떤 차를 몰았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네, 빨간 색 캐머로였어요. 70년대 후반 모델이었고."
"캠리가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네, 확신해요."
"분명히 빨간 색이었다고요, 하얀 색이 아니고?"
"이봐요, 아가씨. 내가 빨간 색 하얀 색 구별도 못 할 줄 알아요?"
"물론 그러시겠죠." 나는 재빨리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렉이 하얀 색 캠리를 몬 기억은 없단 말씀이시죠?"
"네."
"서류를 보니까 마틴과 앤드류는 88연식 파란색 댓선 해치백을 몰았다던데, 맞습니까?"
"네."
"다른 차는 없었나요?"
"네."
"감사합니다. 도움이 아주 많이 됐어요."
그 집을 빠져나온 후 나는 이웃집 문을 몇 군데 두드렸다. 집에 있던 4명 중 12년 전에도 같은 집에 산 사람은 2명이었다. 둘 다 그렉 라슨과 그의 빨간 색 캐머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그가 하얀 색 캠리를 모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차도에 어머니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내 뒤를 따라오는지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헤드라이트를 부셔 놓았다. 원래대로라면 가짜 전화를 건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좀 더 정교한 계획을 짰겠지만, 가족 간 갈등 구조가 너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던 터라 나는 단순한 액션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사무실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다.
"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말했다.
"확신하는 것보다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결혼 생활만 벌써 33년 째다."
"그게 뭐요?"
"이자벨, 그 전화를 한 건 네 어머니가 아니야. 그리고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해 두는데 그 사건은 이미 네 손을 떠났어. 우린 소송을 당하고 싶지 않단다."
안 그랬으면 아버지와의 대화가 계속 되었을 텐데, 레이 삼촌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나 좀 도와 줘!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어!"


휴전 협정

은밀한 미행, 방 안의 도청 장치, 계속 되는 탐문 수사 얘기만 하다 보니 레이와 레이 삼촌 간에 형성된 평화 무드에 대한 언급을 잊고 있었다. 둘이 친구가 된 이상 레이는 삼촌의 모든 악덕 하나 하나를 자신이 나서서 직접 교화시키리라 결심했다. 레이는 삼촌이 자고 있는 방문 틈으로 병 든 간을 찍은 사진과 함께 '삼촌을 사랑하는 레이가' 라고 적힌 카드를 들이밀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레이는 알코올 소비의 패악에 관한 근거 없는 사실들을 남발했으며 가끔은 식사 습관에 대한 조언까지 했다(이 부분은 레이 자신의 단 음식 소비량과 비추어 볼 때 가히 가식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 애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관한 심층 조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약초상을 통해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레이는 레이 삼촌의 음식에, 그리고 때로는 맥주에 그 영약을 섞기 시작했다. 도박 중독자 모임에 끼려는 시도가 문간에서 저지 당한 후에는 대신 알코올 중독자 구제 모임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방탕을 향해 내달렸던 레이 삼촌의 사생활을 공유했다. 얘기를 한 번 할 때마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새로운 요소들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결국 레이 삼촌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그 쪽 계의 전설이 되어 버렸다.
부모님은 일차적으로는 레이의 새로운 취미 생활을 눈 감아 주는 쪽이었다. 최소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 기능에 대한 각종 조사와 보고 활동에 여념이 없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미행하고 다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집안에선 이런 종류의 변화를 발전 및 진보로 여겼다. 그러나 물론 레이의 이런 노력이 레이 삼촌의 갱생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눈곱 만큼도 하지 않았다. 우리도 수많은 세월 동안 노력을 안 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평판이란 마치 자기로 만든 인형과도 같아서, 한 번 떨어지고 나면 아무리 많은 풀로 재보수를 한다 해도 이전의 영광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레이 삼촌은 회전 의자에 몸을 날리더니 책상 위에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내 여동생이 그 뒤를 따라왔다. 손에는 <간 기능과 기능 장애>라는 제목의 의학 서적이 들려 있었다.
"기다리세요. 10년 된 간경변증 환자의 간은 아직 안 보셨잖아요."
레이 삼촌이 도움을 요청하며 아버지 쪽을 빠끔히 바라보았다.
"레이, 책 이리 내거라." 아버지가 말했다. 레이가 아버지에게 의학 서적을 내밀었다.
"도서관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래, 부엌에서 얘기 좀 할까?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레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아버지가 자기 막내 딸 뒤를 따라 가면서 삼촌에게 말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 볼게요."
나는 책상에 기대 서서 나의 다음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 삼촌이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맥주 좀 마시고 땅콩 좀 먹겠다는 게 그렇게 심한 요구냐?"

방 안에서 도청 장치를 발견한 이후 나는 부모님의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가짜 마약 사건과 앤드류 실종 사건에 신경을 쏟느라 새로운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적당한 장소가 떠올랐다.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이가 방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레이를 들어오게 했다. 안으로 들어온 레이는 안 그러는 척 하면서 내가 싼 짐을 다시 풀어 놓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레이를 집어 올려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문을 자물쇠로 꼭꼭 채웠다.
짐 싸는 게 슬슬 지겨워진 나는 우선 내가 머물 새 장소의 열쇠를 회수하기로 결심했다. 방문 밖을 나서자 어머니가 가운에 슬리퍼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니?"
"아무 데도 안 가요."
"사랑한다."
어머니가 어색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내가 그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듣고 다시 기억이라도 해 내라는 투였다. 하지만 난 단 한 순간도 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서로를 깨무는지라 그 모든 잇자국을 무시하기가 마냥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니가 차 속에 조용히 앉아 내가 다음 단계의 움직임을 취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미행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데이비드 오빠의 차도에 차를 댔다. 어머니는 도로 한가운데 이중 주차를 한 상태였다. 문을 두드리자 오빠가 나왔다.
"이자벨, 웬 일이야?"
"'어서 와, 잘 지냈어?' 라고 하라니까 몇 번을 말해."
"그래, 미안. 무슨 일이냐고?"
"진실을 말해, 오빠. 보톡스 주사 맞았지?"
"아니."
"페트라 여기 있어?"
"그건 왜 물어?"
"얼굴이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안에 있어. 페트라 찾는 거야?"
"아니, 사실은 페트라 아파트 열쇠를 찾는 중이야. 페트라 여기 사는 거 맞지?"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않아."
"얼마나 됐어?"
"한 석 달."
"시작은?"
"체육관에서 만났어."
"페트라가 운동하러 체육관엘 갔었다고?"
"그래, 그런 사람들 많거든?"
"그래서, 체육관에서 만나서 그 다음은?"
"이자벨, 우리 이런 식의 취조 말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때?"
"그러지 뭐. 하지만 그 전에 레이에게 입막음 돈 주는 거 그만 둬야 할걸?"
"접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내가 머리를 좀 잘라야겠다고 말했어."
페트라가 현관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이틀 후에 오빠가 전화를 했고."
"오빠, 지붕 위에서 맥주 마시는 거 좋아해?"
"그다지."
"들었지?" 내가 페트라에게 말했다.
"더 알고 싶은 거 있어?" 페트라가 물었다.
"체육관에 언제부터 다닌 거야?"
오빠가 나를 옆 쪽으로 밀더니 내 뒤 쪽을 보면서 말했다.
"저기 주차한 건 어머니 아니야?"
"맞아. 24시간 미행 당하고 있어."
"왜?"
"내가 마약을 했거든."
"뭐?"
"그럴 거 없어. 진짜 아니니까."
나는 페트라에게 다시 말했다. "네 아파트에 들어가 있어도 돼?"
페트라가 나에게 열쇠를 주면서 집에는 침대 하나와 물 한 통 밖에는 없다고 했다.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페트라는 또 계약 기간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후에는 집을 비워 줘야 한다고 했다.
"오빠, 내가 빠져나갈 동안 어머니 좀 잡고 있어 줘."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하자면 너무 길어."
나는 어머니의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진실을 말하세요, 어머니. 에비게일 스노인 척 하고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아니."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범인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범인을 밝혀 내기 전까진 절대로 이 사건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장 페트라네 집으로 가지 않고 대니엘의 집에 들러 보기로 했다. 내가 꾸민 마약 거래극의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궁금했다. 나는 그의 아파트 벨을 눌렀다. 다니엘은 창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근처에 볼 일이 있었어요." 다니엘의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내가 말했다.
"무슨 볼 일이요?"
"드라이브."
"이 근처에서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어머니를 따돌리느라 차를 타고 여기 저기 다 돌았어요."
"어머님을 따돌리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를 미행하고 있거든요."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미행한다, 그 말입니까?"
"네, 불 좀 꺼도 될까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불을 꺼 버리고 창문가로 갔다. 블라인드 너머로 보니 독서등을 키고 차 안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다니엘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얼마 동안 저러고 계실까요?"
"1시간 정도. 방광이 작으시니까 오래 버티진 못할 거예요. 커피 있어요? 그럼 좀 더 빨라질 텐데."
"이건 정상이 아니에요, 이자벨."
"나도 알아요."
내가 어머니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동안 다니엘은 마실 것을 한 잔 따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이자벨, 이런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힘든 하루였고 나는 다니엘이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대화에 참여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대화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그의 아파트를 나가야 했다. 나는 일부러 다시 한 번 창문 밖을 쳐다보는 척 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졸고 있어요. 지금 나가야 해요."
나는 다니엘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아파트를 서둘러 나왔다. 어머니는 물론 말짱한 정신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차 쪽으로 걸어가 차 문을 두드렸다.
"집으로 가세요, 어머니. 오늘 밤은 별 흥미로운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니엘에게 그 얘길 한 건 아니지?"
어머니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페트라의 집까지 내 뒤를 쫓아왔다. 그리고 긴 파티의 밤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인 제이크 핸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시간 당 15달러를 벌면서 술을 깨는 일을 해 보겠냐고 했고, 어머니를 대놓고 흠모하는 제이크는 그러겠다고 했다. 택시를 잡아 타고 달려 온 제이크에게 어머니는 차 열쇠를 주면서 아침이 될 때까지는 절대 운전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페트라의 아파트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마틴 스노에게 전화를 했다. 어김없이 자동 응답기가 돌아갔다. 나는 제발 전화를 해 달라고 간청을 한 후에, 점잖게 그렇게 해야 나를 떼 버릴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이상한 전화 얘기나 그렉 라슨이 삼촌에게 사서 몰았다는 자동차 얘기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카드였다.
어머니는 제이크에게 헛돈을 들였다. 제이크 핸드가 페트라의 아파트 침실 창문으로 들여다 본 것은 내가 침대에 앉아 사건 파일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모습 뿐이었다. 새벽 3시에 나는 창문을 내다 보았다. 제이크가 차 앞 좌석에서 스르르 잠이 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심 갈 데가 있었으면 했다. 지금 당장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될 무슨 단서라도 손에 쥐고 있었으면 했다. 제이크를 따돌리기에 딱 안성맞춤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잤다. 제이크는 한참 날이 밝았는데도 거리 한가운데서 줄곧 자고 있었다. 내가 나가는 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완벽한 도주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짐을 마저 싸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동을 하는 사이 제이크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끝내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 제이크. 이자벨은 여기 있어. 커피라도 마시도록 해."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내가 어젯밤에 싸 둔 짐 상자들이 모두 풀어 헤쳐져 있었고 내 물건들이 모두 잘못된 장소에 다시 놓여져 있었다. 내 부모님의 짓이라고 보기엔 너무 노골적인 방법이었다. 레이가 뒤에 있었다. 아마추어가 분명한 문 따는 솜씨 하며,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 그리고 이것 저것 마구잡이로 물건들에 풀칠을 해 놓은 것 하며가 모두 한 사람을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레이가 풀어 놓은 짐을 싸고 레이가 풀로 붙여 놓은 물건들을 떼어 내느라 낮 시간을 다 보냈다. 오후가 되어 지난 밤의 짐 상태를 회복하고 나자 복수심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 앞으로 갔다. 레이는 처음에는 내 차를 보고 그 다음에는 내 뒤를 따라 붙은 아버지 차를 보더니 어떤 차가 자기를 데리러 온 차인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나는 차 창을 내리고 허튼 짓 하지 말라고 했다. 레이가 차에 오르자 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레이를 내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밤 새도록 짐 싸는 것을 돕게 했다. 내 계획을 방해한 대가로 레이는 협박과 무시를 당해야 했다. 레이의 존재는 짐 싸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레이 삼촌에게 자유로운 하룻밤을 선사해 줄 수 있었고, 남의 방을 따고 들어와 남의 물건들에 풀칠을 해 놓는 행위에는 처벌이 따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수 있었다. 마침내 내가 "네 방으로 돌아가도 좋아" 라고 하자, 레이가 말했다.
"돌아올 거야.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어."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 마침 협박처럼 들렸다.


잃어버린 주말 #.25

닷새 후 드디어 페트라네 아파트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나는 동네 카페로 가서 커다란 커피를 주문했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나타나 카운터에 돈을 건넸다.
"내가 살게."
나는 커피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심 아버지의 마법 같은 행동이 놀라웠다. 아버지가 곧 뒤를 쫓아 오더니 내 보폭에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뭐 하나?"
"설마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내 말은 오늘 시간 좀 있을까? 레이 삼촌이 다시 사라져서 말이야. 너만 좋으면 도움을 좀 받고 싶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잃어버린 주말을 보내게 되어 기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럴게요. 집에서 뵙죠" 라고만 했다.

레이 삼촌이 없어진 지 겨우 14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레이가 벌써 수색조를 조직하고 있었다. 삼촌의 외박이 있은 다음 날 레이는 삼촌의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가족 중에 누가 상을 당했으니 혹시 삼촌과 연락이 닿는다면 즉시 집으로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레이 삼촌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수많은 위로 전화를 받았다. 둘째 날 레이는 학교가 끝난 뒤 버스를 타고 삼촌이 행방 불명 된 첫째 날 포커 친 장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수소문과 '버드와이저 추적'을 통해 둘째 날 밤에는 사우스 베이에 있는 모텔6에서 또 다시 불법 포커를 쳤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원래 아버지는 경찰이 실종된 사람을 찾을 때 그러는 것처럼 48시간이 지나야 삼촌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가족은 레이 삼촌의 홀연한 사라짐과 지칠 줄 모르는 방탕 생활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여동생은 달랐다. 그 애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레이와 대치될 때 나는 어느 쪽이 내게 이로운지를 늘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 삼촌에 관한 한 나는 레이에게 져 줬다.

레이를 도와 삼촌을 찾는 동안 우리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레이를 태우고 반경 70킬로 안에 있는 낡은 모텔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불법 포커 게임에는 종종 불법 물건들, 여자, 그리고 엄청난 양의 담배 연기가 포함되어 있게 마련이다. 레이 삼촌과 그의 친구들은 그런 것들을 눈 감아 주는 가장 편한 장소가 개인이 운영하는 값 싼 모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일단 공동 투자를 하고 영수증에다 '청소 비용'으로 200달러를 추가 지불했다. 그러면 나중에 아무 때나 다시 찾아와도 언제나 환영이었다.
수색조에서 나의 역할은 레이의 운전수였다. 레이는 학교 수업 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으로 모텔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베이 에어리어에 있는 12개의 모텔들을 점으로 연결하여 세 시간 소요 예정 이동 계획을 수립했다. 레이 삼촌의 포커 친구들은 대개 마린 카운티와 산 마테오에 사이에 머물면서 1번이나 280번 고속도로 근처의 모텔을 이용했다. 내가 주차장에 차를 대면 레이가 얼른 자리를 박차고 나가 프론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20달러 짜리를 보여 주면서 레이 삼촌의 사진을 내밀며 최근에 그를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모텔 점묘도 상의 다섯 번째 모텔까지 헛수고였다. 그런데 여섯 번째 모텔의 직워 하나가 레이 삼촌이 방금 전 체크아웃을 했다고 말했다.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데,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둘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 날 오후 내내 근처 모텔을 아무런 성과 없이 쑤시고 다녔다. 그 날 밤 수학 숙제를 하는 대신 나의 여동생은 삼촌의 도박 친구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마지막 포커 게임 장소에 여자들이 있었냐고 물었다. 예순이 넘은 남자들에게 손녀 뻘인 14살 짜리 여자애가 그런 질문을 할 때는 솔직한 대답을 듣기가 당연히 쉽지 않다.
"얘야, 네 삼촌은 성인 된 지가 한참 지났단다. 무슨 짓을 하든 누구와 있든 신경 쓰지 말도록 해, 알겠니?" 표준 대답이었다.
전화 인터뷰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레이는 다시 다음 날 탐방할 모텔 목록 작성에 열중했다. '인간 사냥'을 위해 학교를 쉬게 해 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해 봤지만 다행히도 거절을 당했다. 25번째가 있기 전 벌써 24번의 전적이 있었다. 한 차례 더해질 때마다 사건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게 마련이다.

사흘 동안 오후 시간을 다 바쳐 가며 레이 삼촌의 이동 반경 내에 있는 모텔들의 80%를 다 뒤지고 나서,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데이즈 여관 3B호실에 마리아라는 이름의 빨간 머리 여자와 함께 묵고 있는 삼촌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레이 삼촌은 내게서 50달러를 꾸더니 그것을 새 친구에게 주었다. 그리고 레드우드 시티에서 50킬로 떨어진 그녀의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다. 레이 삼촌은 현관 앞까지 마리아를 바래다 주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여동생은 레이 삼촌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그 여자와 관계를 할 때 조심할 건 조시했느냐고 물었다. 레이 삼촌은 네 일이나 신경 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는 귀갓길 '독서 자료'로 갱생 클리닉 팸플릿을 한 뭉치 내밀었다. 레이가 삼촌에게 갱생이라는 주제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땐 적들도 단결을 한다. 그러나 그 목표가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다시 적이 된다. 레이 삼촌을 찾느라 형성되었던 우리 가족 간의 일시적인 평화는 그의 귀환으로 단박에 깨지고 말았다.

레이 삼촌은 나를 도와 내 마지막 짐들을 차에 실어 주면서 어디서 묵을 거냐고 물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아마도 모텔에서 지내게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삼촌은 모텔은 기분을 처지게 하는 곳이라면서(모텔을 제2의 집으로 여기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다니), 리치몬드 디스트릭트에 있는 오랜 친구의 집 열쇠를 건넸다. 그 친구는 '총회'가 있어 2주 동안 집에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날 오후 은퇴한 경찰 부서장 버니 피터슨 씨의 방 두 칸 짜리 아파트로 들어갔다. 딱 보니까 삼촌 친구는 무엇보다 골프를, 그리고 두 번째로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잘 나가는 독신남 티가 나는, 좀 심하게 깔끔한 아파트였다. 정기적으로 누가 청소를 하러 오는 듯 했다. 실내 장식에는 취향이라곤 없고 돈 들인 티만 났다. 편안함이나 디자인 같은 것을 고려한 구매가 아니라 그저 남에게 비싼 물건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마치 범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갓 받은 듯한 아마추어 골프 트로피와 비싼 돈을 들여 액자로 만든 육감적인 여배우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레이 삼촌이 집 안 구경을 시켜 줬다. 다시 말해 삼촌 친구가 어디에 마실 것과 간식거리를 보관하는지 알려 주었다. 어린 질녀의 감시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회를 만끽하려는 듯, 레이 삼촌이 땅콩 단지를 열고 맥주를 딴 후 소파에 앉았다.
"그 골칫거리 사건은 어떻게 돼 가는 중이냐?"
"진전이 없어요."
"지금까지 소득은 뭔데?"
"에비게일 스노, 실종된 남학생의 어머니예요. 자기 남편이 사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딴 여자와 10년 째 살고 있는데, 제가 물었을 때 골프를 치러 갔다고 하더라고요. 집 안에 먼지 하나 없는 게 거의 결벽증 수준이고요. 포프리 냄새가 아주 숨이 막히게 할 지경이에요."
"재밌네."
"실종된 앤드류의 형인 마틴 스노는 부모를 속이고 적어도 10만 달러를 받아 썼어요. 게다가 내가 동생 사건 때문에 이러고 다니는 걸 싫어하고요. 좀 의심이 가지 않아요?"
"그러네."
"그 형제의 친구인 그렉 라슨, 거의 매 번 마틴 앤드류 형제랑 캠프를 갔었대요. 그런데 유독 그 날에만 다른 곳에 콘서트를 보러 갔어요. 그리고 앤드류가 실종된 시기 쯤 해서 자기 삼촌에게서 차를 샀는데, 아무도 이 친구가 그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딴 사람 주려고 샀나 보구나. 고쳐서 다시 팔려고 차고에 넣어 뒀을 수도 있고."
"도요타 캠리라고요, 삼촌. 그런 계획을 세울 만한 차종이 아니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에비게일 스노라고 사칭하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나 보고 사건에서 손 떼라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스노 부인은 나한테 그런 전화를 하지 않았어요."
"혹시 네 엄마냐?"
"안 그런 것 같아요. 물어 봤는데 아니라고 했어요."
레이 삼촌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파버 씨를 다시 만나 봐야겠어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코트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레이 삼촌도 일어나 코트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냐?" 삼촌이 물었다.
"우리라뇨?"
"우리, 너하고 나." 삼촌이 단호한 태도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얼마 받으시는 건데요?"
"초과 근무 수당 두 배."
"삼촌은 배신자예요."
"미안하다. 현금이 필요해서 말이야."
'어떻게 하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와 삼촌 사이의 간격을 벌릴 수 있는 기회는 계단까지 내려가는 동안 뿐이었다. 일단 길에 들어서면 삼촌을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뛰었다. 삼촌이 깜짝 놀라 부리나케 뒤따라 오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삼촌은 여유롭게 문을 닫은 후 자물쇠를 잠그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재빨리 층계참 두 개를 지나 문 밖으로 나왔다. 내가 차에 도착했을 때에도 삼촌은 여전히 첫 번째 층계참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차 문을 열기 위해 아래 쪽을 내려다 본 순간 열쇠 구멍에 껌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끈적끈적한 껌을 떼어 내고 있는 동안 레이 삼촌은 계단을 다 내려오더니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켰다.
"비겁해요, 삼촌!"
레이 삼촌이 차 문을 내리고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넌 빠르잖아."


계속되는 앤드류 실종 사건 #.7

자동차 사고를 내는 모험을 한다거나 삼촌의 실력을 테스트한다거나 하는 시간 낭비 없이 나는 제한 속도 범위 내에서 나만의 교통 신호 규칙을 적용하지도 않고 안전하게 행크 파버의 집으로 향했다. 그 집 앞에 차를 대고 삼촌을 기다렸다가 차 문을 두드렸다.
"이 사람을 털어 볼 생각이에요. 거짓말하고 있는지 알아 내야 해요. 도와 주시겠어요?"
"물론이지."
우리는 텐더로인의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간 간격으로 추정해 볼 때 건물 전체가 똑같이 작은 원룸 형태로 지어진 아파트였다. 복도에 깔린 카펫은 20년 동안 떨어진 인간의 비듬과 커피 얼룩을 모아 두고 있었다. 파버 씨가 창문을 조금 열어 뒀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는 집 안에 담배 연기와 자기의 체취가 충분히 배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 듯 했다.
레이 삼촌과 내가 파버 씨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텅 빈 부엌 조리대와 행크의 느릿느릿한 말투를 보고 삼촌이 짐작한 바에 따르면 파버 씨는 아마 맥주를 세 병 마신 듯 했다. 친절한 주인처럼 그가 음료를 권했고 삼촌은 감사히 받아 들였다. 그들은 일요일에 있을 마흔 아홉 번째 경기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음으로는 야구의 미래를 주제로 삼았다. 레이 삼촌은 파버 씨에게 스낵이 좀 있냐고 물었다. 행크는 감자 칩 봉지를 건넸고, 샌드위치 쿠키를 준비했다.
나는 파버 씨에게 다시 한 번 앤드류가 사라진 그 주말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1분도 안 되어 그는 우리의 첫 번째 만남에서 말한 내용을 거의 반복하듯 되풀이했다. 조카인 그렉이 왔었고, 그는 시끄러운 록 밴드 콘서트에 갔고, 11시 쯤 돌아왔다고.
레이 삼촌이 두 번째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우리는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숨 막히는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현관으로 실어 날랐다. 레이 삼촌이 말했다.
"일찍 시작해."
"네? 뭐요, 술 마시는 거요?"
"그래, 일찍 시작한다고."
삼촌이 생각에 잠긴 채 되풀이해서 말했다.
"무슨 생각 하시는 거예요?"
"저런 식으로 마시면 아마 밤 11시 쯤에는 자고 있었을 거야."
"오래 전이에요, 삼촌. 그 때는 안 저랬을 수도 있죠."
"저런 지 한참 됐어."
"누가 시킨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날을 특별히 기억하는 게 이상하잖아. 자기 조카가 집에 들어온 정확한 시간까지 기억하는 것도 그렇고. 12년이나 지났는데, 말이 안 돼."

나는 뒤를 따라오는 레이 삼촌과 함께 부모님의 집으로 갔다. 차도가 비어 있는 걸 보니 부모님은 집에 없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몇 가지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자물쇠가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레이 삼촌이 따라 들어와서는 내 어깨 너머로 내가 행크 파버의 전과 기록, 신용 조회 등등을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곁눈으로 보니 레이 삼촌이 종이 한 장에다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보고서에 적어야지."
"무슨 보고서요?"
"미행 보고서."
"저요?"
"보고서가 없으면 지불이 안 되거든."
내가 아직 고용되어 있는 상태이거나 혹은 고용 가능한 상태였다면, 삼촌에게 저 쪽에서 제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제공함으로써 이 일을 그만 두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촌과 돈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삼촌과 맥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법. 산이 아무리 험난하고 험난하여도 못 넘을 만큼 높은 산은 없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폭력 범죄 전과는 아니었지만 공공 장소에서 술에 취해 경찰에 연행되기가 일쑤였고 음주 운전 경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운전 면허가 취소된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앤드류 스노가 사라지기 두 달 전에 그랬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삼촌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삼촌에게 조사 결과를 보여 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데?"
"파버 씨가 차를 몰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렉은 언제라도 그 차를 이용할 수 있었을 거예요. 돈이야 몇 주 후에 줬을 수도 있겠죠. 계속 그렇게 취해 있는 사람 속이는 거야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페이스 조절을 못 해. 그게 그 친구 문제지."
"잘 아시네요. 그게 그 사람 문제죠." 나는 삼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마린 카운티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라슨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레이 삼촌은 그것도 적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촌이 뒤를 따라왔다.
"그만 하세요, 삼촌."
"미안하다. 하지만 난 내게 맡겨진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어딜 가나 따라오시잖아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세요?"
"잘 알고 말고. 암 판정을 받기 몇 년 전이었는데 마약 조사반에서 마약 단속 수사 중에 잃어버린 헤로인 문제 때문에 나를 조사하고 있었거든. 어딜 가나 코트 입은 남자 하나가 나를 따라 붙었지. 정말 힘들었다."
레이 삼촌과 내가 실력 없는 마임 배우처럼 거울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부모님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삼촌이 손을 번쩍 들더니 "오늘 일은 끝났다" 라고 말하고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삼촌은 훈제 쇠고기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들보다 더 빠르겠지만, 만약 레이 삼촌처럼 미리 술수를 써 놨으면 소용 없는 짓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조금씩 문을 향해 접근했다. 깨끗하게 현장에서 달아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어머니가 발로 문을 쾅 닫았다.
"얘기 좀 하자." 어머니는 일을 할 때 사용하는 협박조로 말했다.
그 때 창문이 열린 게 보였다. 스펠만 사무실은 1층에 있었다. 창문은 바닥에서 2미터도 안 됐고 집 옆 쪽의 시멘트 길은 내 차가 (내 생각엔) 아무런 문제 없이 주차되어 있는 차도로 바로 이어졌다. 차양은 걷어 차 버리면 될 것이다. 성인인 나의 부모님은 창문으로 뛰어 내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문을 세 개나 통과하고 계단도 내려가야 할 것이다. 나는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탈출할 수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를 향해 달려라.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데요?" 나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으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도록 해." 어머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세요?"
"앤드류 실종 사건 그만 두라고."
"하지만 그건 우리 계약 조건이었어요. 마지막 일, 기억하세요?"
"해고 당했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를 고소하겠다고 난리야." 어머니가 말했다.
"마틴 스노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말 뿐이라니까요."
"그 말을 어떻게 믿니, 이자벨. 이제 그만 두어야 해. 진심이야. 그만 둬."
만약 이것이 평범한 해결 불가능 사건이었다면 나는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파일을 들여다 보면 볼 수록 질문과 의심이 늘어 갔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셋이나 됐다. 차 한 대가 사라졌고 10만 달러가 사건 속에 묻혀 있다. 이것은 정말 미스테리였다. 우리 일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나는 집을 나와야 했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차양을 걷어 찬 후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차를 향해 달려가 차 문을 닫았다. 다행히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아버지의 외침 소리가 들려 왔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거친 숨 소리를 들으며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현관 문에 서 있었다. 나는 차 보닛을 열고 엔진을 체크했다. 간단했다. 와이어가 쓸모 없이 흔들거리고 있었고 배터리가 없는 텅 빈 공간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터리는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다. 마지막으로 어디 있는 걸 봤는데?"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차 안에 앉아 계획을 짰다. 배터리도 찾고 들키지 않고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획.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부모님께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과에 대해 이유에 대해 정당함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췄다. 나는 이기고 싶었다. 이번 만큼은 이기고 싶었다. 나는 마틴 스노에게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남겼다.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했다. 아무리 위협해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눠야 할 때가 온 것 같지 않느냐고 했다.
레이가 차 문을 열더니 어디로 갈 거냐고,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같이 가도 되지" 라고 대답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집 안을 뒤지고 다녔다. 사무실을 지나 부엌을 거쳐 거실도 살폈다. 레이가 줄곧 내 뒤를 따라 다녔다. 나는 홱 돌아 레이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50달러 벌고 싶어?"
"수사학적인 질문이야?"
"이 집 어딘가에 자동차 배터리가 숨겨져 있어. 그걸 찾아!"
레이에게 배터리를 찾도록 맡겨 두고 나는 부모님을 찾아 집 안을 돌아다녔다. 사무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들과 맞닥뜨렸다.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은 평생 쌍안경으로 저를 관찰하고 싶지 않으시면 그만 두세요. 미행도 그만 하고 도청도 그만 하고 거짓말도 그만 하고 협박도 그만 하세요. 그냥 보내 달란 말이에요!"
뒤를 돌았더니 레이가 배터리를 들고 서 있었다. 손과 셔츠에 자동차 기름이 묻어 있었다. 배터리를 향해 손을 내밀자 레이가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어디 갈 거야?"
"몰라."
"돌아올 거야?"
나는 뒤로 돌아 부모님을 바라 본 후, 다시 레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엔 그런 일 없을 거야."
레이가 다시 뒤로 물러서며 작은 손가락으로 배터리를 꽉 움켜 쥐었다. 싸울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아냐."
"널 위해서 이러는 거라니까. 네가 어느 날 일어났는데 정상적인 인간으로 행동하는 법을 모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니까."
"레이, 언니한테 배터리 주거라." 어머니가 말했다.
"싫어!"
레이 삼촌이 복도로 나와 레이의 기름 묻은 손가락을 펴서 나에게 배터리를 내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15분 먼저 출발하게 해. 우리 모두 숨 좀 쉬자, 응?"

나는 집을 나와 차에 배터리를 장착시키고 미행자 없이 차를 몰았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 삼촌은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을 주었다. 숨 쉴 기회.
다니엘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맥스가 택시 자체를 넘고 넘어 길을 건넌 것이 어떤 에피소드에서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오빠였다. 헤이트에서 만나자고 했다. 당장. 이유를 물었더니 와 보면 안다고 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오빠가 물었다.
"아직도 어머니에게 미행 당하고 있어?"
"아니."
"혼자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오지 마."
그는 이렇게 말하고 뚝 끊었다.

 

퍼프 #.2
20분 후 나는 한 문신 시술실에 오빠와 함께 앉아 바디 아트 포트폴리오를 넘겨 보고 있었다.
"난 문신 지우라고 한 적 없어."
난 오빠의 말을 믿었다. 내가 아직도 믿지 못하겠는 것은 나의 친오빠가 나의 베스트 프렌드와 데이트를 한다는, 아니 같이 산다는 현실이었다. 1000달러 상당의 양복을 입는 깐깐하고 완벽한 변호사 양반과 몸의 반은 피어싱 아니면 문신인 여성과의 만남은 아무래도 뭔가 어색했다. 더군다나 페트라는 중2 이후 줄곧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으니 오빠가 페트라에 대해 아는 세월만 해도 벌써 15년 째였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오빠를 만나면서 세 종류의 문신을 지웠다. 매직 드래곤 퍼프, 지미 핸드릭스의 무덤, 그리고 하트와 화살과 브랜든의 앙상블. 나는 당연히 뒤에 데이비드 오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지우라고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페트라 자신이 그것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었을 거라고. 그런데 오빠가 교묘한 질문들을 통해 찾아 낸 것은 페트라의 몸에 아트를 해 준 시술소였다. 나를 부른 건 제거한 아트들이 어떤 종류였는지 확인해 달라는 이유에서였다. 오빠의 계획은 자신의 팔에 페트라가 없앤 문신들 중 하나를 그려 넣음으로써 페트라가 더 이상 문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퍼프를 선택했다. 오빠는 지미 핸드릭스의 상당한 팬도 아니었고 남자 이름과 하트와 화살을 그려 넣기도 분위기가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클리브가 팔뚝에 알코올을 바르자 오빠는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픈가요?" 오빠가 물었다.
"손님은 괜찮습니다. 고생은 제가 합니다."
시술기의 모터를 키며 클리브가 말했다. 나는 클리브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아주 많이.

오빠는 세 시간 동안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오빠와 함께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 주는 것만 빼고 나는 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했다.
"얼굴이 그런 상태로 굳어 버리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
"설마 울어?"
"정신 차려!"
"한 번만 참으면 평생 갈 거야."
"재밌네. 날 불러 줘서 고마워."
끝날 때 쯤 되자 오빠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는 거의 토할 듯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헤이트에 있는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최근에 죽을 뻔 한 적 있어?"
"뭐?" 오빠가 성마르게 대답했다. 평소 성격이 나오는 걸 보니 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빤 누굴 위해서 희생하는 타입 아니잖아."
"사람들은 누구나 변해."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내가 변하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물론 나로선 오빠의 변신을 환영하는 바야. 하지만 페트라 생각을 하면 마냥 웃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지."
"페트라 사랑해, 이자벨."
"왜?"
"그 애는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오빠 속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데이비드 오빠는 문신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만지며 말했다.
"페트라가 물으면 내가 아주 용감했다고 말해 줘."
"그러지 뭐. 또 무슨 거짓말을 해 줄까?"


계속되는 앤드류 실종 사건 #.8

버니 씨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이자벨 양입니까?"
"네. 누구세요?"
"마틴 스노입니다."
"이제야 전화를 주셨네요."
"원하는 게 뭡니까?"
"그 쪽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시다면 전화를 그만 하십시오."
"만나시죠. 그럼 그 즉시 그렇게 될 테니까요."
"어디서 볼까요?"
"샌프란시스코 공공 도서관이 어떨까요."
"1시간 후에 뵙죠."
나는 당장에 도서관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역사 책이 있는 섹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중에 만날까 해서 다니엘에게 전화를 했지만 집에 없었다. 그래서 30분 동안 다리만 떨고 있었다. 가끔 책을 뽑아 들고 읽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틴 스노가 도착할 때까지 그냥 다리만 떨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도서관에 도착한 마틴이 딱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서관에 오는 거 말인가요? 그러시면 안 되죠. 요새 사람들 책 안 읽는다고 난린데."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마틴이 딱 잘라 말했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 유형이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어서요."
"하시죠."
"어머님인 척하고 내게 전화를 한 게 누군가요?"
"제 어머니가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네."
"전 모릅니다."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다음 질문 하시죠."
"그렉이 삼촌에게서 샀다는 도요타 캠리는 어떻게 됐나요?"
마틴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생각에 잠긴 채 책장을 바라보는 척 했다.
"친구한테 줄 생각으로 샀나 보죠."
"어떤 친구요?"
"모릅니다."
"부모님께서 교육비로 쓰신 줄 알고 있는 10만 달러는 어디에 사용하셨나요?"
"학교만 7년 다녔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으려면 교육비가 굉장히 많이 들거든요?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런 모욕은 오빠한테 수없이 당해서 괜찮았다.
"저를 만나러 오시다니 실수를 하셨네요." 내가 말했다.
"거짓말 분야는 경찰 친구 분께서 훨씬 나으시군요. 그 분은 적어도 뜸을 들이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전 마틴 씨가 동생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뒷조사 하는 걸 원치 않으시면 진실을 말씀해 주시죠."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갈 겁니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삼촌 친구의 아파트로 되돌아 갔다. 제이크 핸드는 오늘도 변함 없이 차 속에서 자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당장 일러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의 근무 태도가 나한테 손해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그만 두었다. 막 자려는데 다니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딥니까?"
"버니 씨 집이에요."
"그게 누군데요?"
"삼촌 친구 분이세요."
"왜 삼촌 친구와 있는 겁니까?"
"혼자예요. 그 분은 당분간 집에 없어요."
"아, 그렇군요. 지금 누가 나한테 전화를 걸었는지 알아요?"
"경찰인가요?"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경찰 아니면 어머니라고 생각했어요."
"농담 아니니까 좀 진지해져 봐요."
"미안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앤드류 실종 사건에서 손 떼게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저 쪽에서 '잠정적 금지 명령' 신청을 할 거라고요. '잠정적 금지 명령'이 뭡니까?"
"법원이 합법성을 인정하고 허락할 때까지 지금 제가 하는 조사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정말입니까?"
"겁 주려는 심산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하고 다니는 게 벌써 불안해요."
"꼭 제 어머니처럼 말씀하시네요. 제 말 잘 들어요, 다니엘. 이 사건만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갈 거예요, 알겠죠?"
"그게 문제예요, 이자벨. 난 당신이 정상적인 게 뭔지 안다는 생각이 안 든단 말입니다."
나 자신 역시 100% 확신이 든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도 정상적인 게 뭔지 안다고 가까스로 다니엘을 설득시켰다. 전화 통화는 다음 날 내가 그의 사무실에 들른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다니엘은 나와는 달리 오랜 시간 같이 앉아 텔레비전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 기분이 아닌 듯 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차 소리와 거리에서 들려 오는 취객들의 외침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마개를 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침대에 들어오는 삼촌 친구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

내 엉덩이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지지 나는 비명을 꽥 질렀다. 내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놀란 상대편이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 쥐었다. 나는 재빨리, 난 레이 스펠만의 질녀이고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해서 이 곳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 그를 눕히고 맥박을 체크했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나는 그에게 차를 한 잔 마시게 했다. 버니 씨는 내가 포커 친구들이 보낸 귀환 환영 선물인 줄 알았다고 했다.
"네가 그런 여자처럼 보이나요?"
나는 청록색 플란넬 파자마를 여미며 말했다.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쓸 만해 보여."
버니 씨는 '남자는 곧 죽어도 남자' 식의 태도에 대해 사과를 하며 나에게 자기 침대에서 자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윙크를 하며 "나는 소파에서 자도록 하지" 라고 덧붙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맥박을 체크한 뒤 내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제이크 핸드는 여전히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들키지 않고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차를 타고 두 블록 정도를 내려가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차 뒷좌석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은 뒤 마린 카운티 경찰서로 향했다. 그렉 라슨은 나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게 했다. 마침내 그의 사무실로 안내되었을 때 라슨은 서류에서 눈을 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삼촌의 도요타 캠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1주일 후에 중고 차 시장에 팔았습니다."
라슨이 눈도 깜짝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즉각 대답을 하다니, 미리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음에 틀림 없었다.
"차를 사 놓고 왜 일주일 만에 파셨는데요?"
"이미 뒷조사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삼촌은 음주 운전 경력이 있습니다. 저로선 삼촌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안 되도록 삼촌 주위에서 차를 없애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주 훌륭한 조카시군요. 서류는 보관하고 계신가요?"
"12년 전입니다. 7년 이상 된 영수증은 보관할 필요가 없지요.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시나?"
"차 번호는 기억하십니까?"
"아뇨. 그런데 이자벨 양,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어머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언제요?"
"오늘 아침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자벨 양이 도착했을 때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하는 그의 태도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말씀하셨나요?"
"물론이죠. 그래서 두 시간 동안이나 이자벨 양을 기다리게 한 거 아닙니까. 어머님께 샤워를 하고 이 곳으로 오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려고요. 꽤 매력적인 분이시더군요."
라슨의 뒤 쪽 창문 너머로 내 차 옆에 주차한 어머니의 차가 보였다.
"이런."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이 사건에 너무 집착을 하시는 터라 절대로 손을 떼지 않을 거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차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내 자동차 왼 쪽 테일라이트를 부셔 놓고는 자기 차로 다시 되돌아갔다. 라슨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보셨어요?"
"뭘 말입니까?" 나는 내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어머니가 제 차 테일라이트를 부셔 놓았어요."
"정말입니까?"
"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렇지 않았어요."
"운이 없으시군요."
"기물 파손 손해 배상 청구를 하겠어요."
"어머니를 상대로 말입니까?"
"네."
"이자벨, 손해 배상 청구를 하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증인이 없으면…."
"제가 증인이에요."
"믿을 만한 증인은 못 되죠."
"라슨 씨가 증인이잖아요."
"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창문 밖을 바라본다. 테일라이트엔 아무 이상도 없다. 다시 한 번 봤더니 부서져 있다. 근처에는 내 어머니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경찰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뭐라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쑤시개 씹는 법이나 가르치시려고요?"
"다른 것도 가르쳐야죠."
이 남자와 실랑이를 벌여 봐야 아무 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제게 분명히 숨기시는 게 있습니다."
약하다. 나도 안다.

나는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와 어머니의 차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문을 접더니 차 시동을 건 후 차 창을 내리며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자벨, 여기서 뭐 하니?"
"대가를 치르게 되실 거예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 차로 돌아왔다.
이제 오늘 할 일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돌리는 것. 나는 페트라의 헤어 살롱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녀의 일터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뒤 뒷문을 통해 살롱으로 들어갔다.
"오빠 문신 보기 싫어 죽겠어. 볼 때마다 악몽 같았던 밤이 생각나잖아."
"네 문신을 볼 때는 그런 생각 안 들었어?"
"같이 있었다면서 말릴 수도 있었잖아. 이제 평생 오빠 어깨에 있는 그 놈의 걸 보고 살아야 하잖아."
"평생이라고 했어?"
"같이 지내는 동안 말이야. 말렸어야지."
"오빠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걸 볼 기회가 흔해야 말이지."
"안 지우겠대."
"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야, 이자벨?"
"아니, 난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복수 안 해. 나는 평범하고 소름 끼치는 옛날 식 복수 방법을 택할 거야. 내가 오빠를 말리지 않은 이유는 첫째, 그걸 보고 어머니가 히스테리를 부릴 것이기 때문이야. 둘째는 그게 오빠가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야. 오빠 팔에 새겨진 퍼프를 보면 너도 오빠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
페트라는 화를 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 문신을 싫어했다. 내가 옳았지만 어쨌든 그 사실에 대해 더 이상의 논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우린 주제를 바꿨다.
"아직도 어머니가 따라다녀?"
"응, 네 차를 빌려야겠어."
"없는데?"
"어디 갔어?"
"오빠가 쓰고 있어."
"왜?"
"네 아버지가 오빠 차를 쓰고 있거든."
"왜?"
"네가 아버지 차 헤드라이트며 테일라이트를 다 부셔 놨다면서."
나는 금방 가발에, 손님들이 잊어버리고 간 물품 보관소에서 발견한 커다란 군용 재킷을 입고 페트라의 살롱 정문으로 나왔다. 내 등에 과녁 판이라도 달렸던 건지 어머니의 화살 같은 시선은 나를 놓치지 않았다. 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는데 어머니가 야유를 퍼부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를 지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어머니가 졸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지 능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 나 자신은 낮잠을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다니엘의 병원에 들르기로 되어 있었고, 그 곳은 우연히도 내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다니엘의 충직한 직원인 산체스 부인은 나를 보고 그리 반가워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환자 대기실에 머물지 않고 빈 진료실로 향하자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내가 금발에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라고 일러 주었지만 나는 너무 피곤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차리지 못했다. 진료실 의자에 앉은 나는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다니엘은 약 2시간 후에 나를 깨웠다. "얘기 좀 합시다."
잠에서 깬 직후라 비몽사몽간이었지만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남자친구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아니 경험적으로 훤히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우리 관계에 대해 사사로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쯤에서 그만 두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안 돼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가야 돼요."
"어디로요."
"아무 데나요."
"이자벨, 얘기 좀 하자니까요."
"얘기하기 싫어요."
"전 해야겠습니다."
"아니에요."
"해야 한다니까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앉으십시오."
"싫어요."
"앉으라니까요."
"절대 안 앉아요."
"우린 얘기를 해야 합니다."
"방금 깼단 말이에요."
"요점이 뭡니까?"
"방금 낮잠에서 깬 사람에게 헤어지잔 말을 할 순 없어요."
"왜 안 됩니까?"
"그럼 평생 낮잠은 이별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요."
사실 난 마약 조작극 이후 이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다니엘은 자기 앞에 얼마나 더 많은 마약 조작극과 그 유사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면 본인에게 못 하란 법이 없었다. 카스틸로 가문에게 사랑이란 신뢰와 존경을 의미했다. 스펠만 가문의 사랑에 대한 정의에는 다소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다니엘은 병원 밖까지 나를 따라 나오며, 내가 언제까지 낮잠 따위의 핑계를 댈 수는 없을 거라는 등 구시렁거렸다.

병원 밖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데이비드 오빠의 반짝 반짝 빛나는 검은 색 메르세데스 차체에 기대 서서, 꽤 멋진 차를 몰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나이를 주저 없이 망각해 버린 어느 중년 남성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적어도 상황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런 자부심이 생겨나게 된 데에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아버지에게는 그런 놀라운 자동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 아들이 있었다는 것, 과년한 딸이 가족 명의로 된 세 대의 운송 수단 중 두 대의 라이트들을 다 부셔 놓은 까닭에 아버지는 막판에 그 아들에게 차를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슬픈 사연은 그 아버지가 생각하기에, 만약 본인이 아들의 비싸고 화려하고 수리하기도 만만치 않은 차를 끌고 나오면 설마 딸이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 아버지의 사연 중 가장 슬픈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는 듯이 친절하게 다니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직 마음 속에 상처가 남아 있는 다니엘은 고개를 숙이며 마지 못해 미소를 지었다. 그 때 다니엘이 내 차 테일라이트가 부서진 것을 눈치 내고 물었습니다.
"이자벨, 테일라이트 부서진 거 압니까?"
"네."
"어쩌다 그랬어요?"
나는 차 트렁크를 열고 용구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 아버지가 무슨 대처를 하기도 전에 오빠 차의 오른쪽 헤드라이트를 박살내 버렸다.
"이렇게요."
나의 태도와 본인의 자만심에 실망한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었고 다니엘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왜 그랬어요, 이자벨?" 다니엘이 물었다.
"아버지가 내 테일라이트를 부쉈으니까요."
"아버님은 왜 그러셨는데요?"
아버지가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밤엔 테일라이트 하나 짜리 미행하는 게 두 개 짜리 미행하는 것보다 쉽거든."
"그럼 이자벨은 왜 그런 겁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네. 첫째는 내가 자기 테일라이트를 부순 것에 대한 복수. 둘째는 그렇게 하면 그들을 따돌렸는지 확인하는 게 더 쉬워지니까."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가게 될까요?" 다니엘이 물었다.
아버지가 오빠 차에 타면서 대답했다. "글쎄, 가 봐야 알겠지."

자동차 추격전 #.2
벌써 도망 갈 계획을 세우느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나는 다니엘의 얼굴에 드리워진 초연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나는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었다. 낮잠을 잤으니 반사 신경이 제대로 살아나 주겠지 하고 기대를 해 보았지만 아버지를 따돌리기가 절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그다지 없었다.
나는 웨스트 포스털 대로의 혼잡한 차선을 지그재그로 달리다 오션 에비뉴를 향해 좌회전을 했다. 아버지는 내내 범퍼 뒤 쪽을 따라 붙고 있었다. 6개월 동안의 경찰 아카데미와 20년 동안의 현장 경험을 통해 단련된 기술이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기술이나 감정적인 측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들을 상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나나 본인의 안전을 거는 행위를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추격전은 진짜 추격전이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웠다. 자동차 추격전을 통해 벌이는 우리의 대화 내용을 감상하시라.
"난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자벨."
"저도 마찬가지예요."
"끝을 어떻게 낼지 말해 봐."
"그만 따라오시면 되겠네요."
"네가 멈추면 되겠네."
"아버지가 먼저 하세요."
"딸 먼저 하세요."
"승부가 안 나겠네요."

나는 지어리 대로 쪽으로 방향을 튼 후 곧이어 리치몬드 디스트릭트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자신을 따돌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자동차 추격전보다는 더 쉬운 방법이 있었다.
나는 지어리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2,3인형 가족을 위한 주택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주차 불가 골목 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주차를 한 곳은 바에서 두 블록 떨어진 합법 주차 공간이었다. 나는 거리 청소 표지판을 확인하고 차 문을 잠근 뒤, 아버지 차를 지나쳐 바로 향했다. 아버지가 차 창을 내리며 물었다.
"어디 가나?"
"피그 앤 휘슬에요."
"뭐 하러?"
"한 잔 하러요."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아버지가 미끼를 물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는 불법으로 주차를 한 후 계기판에 옛날 배지를 남겨 두고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첫 판을 사고 다음 판을 그리고 또 다음 판을 샀다. 나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판을 샀다.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와 나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잠시 잊고 진정한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치과 의사와는 어떻게 돼 가는 거냐?"
"그 사람도 이름 있어요."
"그래서 너와 그 치과 의사 다니엘 카스틸로와는 어떻게 돼 가는 중인데?"
"잘 돼 가고 있어요."
"우린 언제 쯤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저에 관한 정보를 캐 내려고 하지 않으시면요."
"좋아. 지금 당장 시작하지. 삼촌이 갱생 단체에 갈 가망성이 있다."
"가망성이 어느 정도나 되는데요?"
"10% 정도."
"그럼 삼촌이 새 사람이 되실 확률은 1%군요."
"아마도."
이 때 쯤 되자 아버지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레이하고는 얘기가 되셨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애를 다시 임시직으로 고용하려면 그 전에 비용과 편익비 비율에 대해서 얘기가 있어야 할 텐데요."
"이미 끝냈어."
"어쨌든 삼촌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니 놀랍네요."
"네가 마약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제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우선 치과 의사의 연기가 약하고, 좋아하는 시리얼을 앞에 놓고 앉힌 다음에 불면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더니 불더라."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해요?"
"난 고작 시리얼 준 것 뿐이야. 넌 그 애 앞에서 마약을 하는 척 했고."
"내가 그런 건 어머니 아버지가 내 방을 도청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그런 건 네가 그 사건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야. 끝난 사건인데도 말이야."
"그 사건을 맡긴 건 어머니 아버지예요."
"그건 실수였어."
"네?"
"너한테 그 사건 맡긴 건 실수였어."
"실수가 그것만은 아니겠죠."
아버지는 프레첼 바구니를 하나 더 집어 왔다.
"앞마당에 네가 곤드레 만드레 취해 누워 있는 걸 발견했을 땐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아버지, 그건 아주 오래 전 얘기예요. 제가 언제 최근에 그런 적 있어요?"
"옛날의 이자벨이 다시 돌아온 게 아니라고?"
"옛날의 이자벨이 자기 아버지하고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옛날의 이자벨이라면 뭘 하고 있었을 건데?"
"바에서 괜찮은 아일랜드 남자를 하나 고른 다음 돌로레스 공원으로 가서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겠죠."
"이제 우린 어디로 가게 되는 거냐?"
"나는 떠나고 아버진 내 뒤를 따라오지 않게 되겠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제 생각은 다른데요?"
나는 천천히 코트를 걸친 다음 테이블에 팁을 남겼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나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제가 아버지를 따돌릴 수 있게 됐거든요."
요 몇 주 간 통쾌하게 승리를 거둬 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힘차게 문을 열어 젖힌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 쪽에서 들려 왔다. 뒤를 돌아 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그리고 아주 열심히 달렸다. 세 블록 쯤 달린 후에 오른쪽으로 틀어 필모어 스트리트로 접어든 나는 택시를 잡아 탔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뒷좌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를 이상하게 여긴 운전수는 나를 내려 주고 돈을 받게 되자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메리나에 있는 관광객 상대 카페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부유한 중서부 사람들과 휴가를 맞이한 그들의 모피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깼다.

몇 시간 후 걸으면서 술도 깨고 커피도 깨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이자벨 양이신가요?"
"네, 누구신데요?"
"1시간 후 웨스트 오클랜드 역에서 만나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여자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저 바쁜데요."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 우선은 그 쪽이 누군지 알고 싶네요."
"전화로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합당한 이유 없인 다리를 건너지 않을 거예요. 이 시간에 교통이 얼마나 혼잡한지 알아요?"
"앤드류 스노에 관한 질문에 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신데요?"
"이미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만나 보시면 안다고."
"생각해 보겠어요. 그런데 어느 역이라고요?"
"웨스트 오클랜드 역입니다. 사우스 이스트 쪽 출구로 나오세요. 2시간 드리겠습니다."
"3시간 주세요. 아직 술이 덜 깨서요."

나는 내 차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카뷰레터 같은 주요 엔진 부분을 벌써 빼 내 버렸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을 연결해 달라고 산체스 부인을 설득시키는 데 꽤 애를 먹었지만 결국 연결이 됐다.
"차 좀 빌려 주세요."
"누구십니까?"
"이자벨이에요."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긴급 상황이에요."
"이자벨."
"제발요."
우리의 대화는 결국 무언의 협상으로 이어졌다. 나는 다니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차. 다니엘 역시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시끄럽지 않은 이별. 죄의식을 덜기 위해서 다니엘은 나에게 자기 BMW를 빌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폴솜 앤 서드 스트리트 주차 빌딩 밖에서 기다렸다. 가로등이 5분 동안 피식거리더니 꺼졌다. 다니엘은 테니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는 늦었다. 술이 깨면서 점점 초조해졌다. 멀리서 들리는 발 소리에서부터 바람에 날리는 깡통 소리까지 무슨 소리만 들렸다 하면 심장이 덜컹 했다.
다니엘이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익숙한 장면이다. 이런 행동 다음에는 얘기 좀 하자는 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그 불가피한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 보려는 마음 뿐이었다.
"미행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내가 물었다.
"누가 나를 미행하겠습니까?"
"어머니나 아버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열쇠를 건네 주길 바라며 손을 내밀었다.
"잘 안 될 겁니다."
"뭐가요?"
"당신과 나 말입니다."
"왜요?"
"우리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한단 말입니까?"
"아이들이라뇨?"
"만약 우리한테 아이들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입니까?"
"거짓말을 해야죠, 물론."
"이제 끝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더 이상은 열거하지 않겠다. 지루하실 것이다. 이로써 다니엘은 나의 전 남자친구 리스트에 포함되게 되었다.

#아홉 번째 남자친구
이름 : 다니엘 카스틸로
나이 : 38
직업 : 치과 의사
취미 : 테니스
기간 : 석 달
헤어질 때 한 말 : "가짜 마약 조작극 이후 우리 관계는 끝났습니다!"

…포드가 BMW 뒤쪽 3미터 지점에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선다. 나는 엔진을 끄고 몇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태연하게 차 밖으로 나와 포드 세단을 향해 걸어간다. 사이드 윈도우를 톡톡 두드리자 창문이 스르륵 내려간다. 나는 차 보닛에 손을 얹고 차체에 살짝 기대 선다.
"어머니, 아버지, 이제 그만 하죠."
그들이 나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했을 문장을 완성하기 전, 나는 뒷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그들의 왼쪽 앞 타이어를 긋는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건 그들이다. 추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놀라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내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볼 뿐이다. 어머니는 분노를 숨기며 고개를 돌린다. 나는 다시 주머니에 나이프를 집어 넣은 뒤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까지 되진 말았어야 해요" 라고 말한 뒤 내 차로 돌아온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번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나는 미션 스트리트로 접어들어 베이 브릿지를 향하고 있다. 사우스 밴 네스에서 사고가 있어 도로가 혼잡하다. 새로이 쟁취한 자유가 선사해 준 의기양양함도 자동차 경적 소리와 계기판의 시계 소리 때문에 시들해져 가고 있다. 다리를 건너 가 앞으로 남은 20분 이내에 웨스트 오클랜드 역에 닿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서틴스 스트리트 진입로로 접어 드는데 전화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이자벨. 밀로야."
"무슨 일이세요?"
"여동생을 좀 데려가 줘야겠어. 안 그러면 가게 문 닫게 생겼어."
"밀로, 전 지금 바쁘거든요? 레이 삼촌에게 전화해 보셨어요?"
"받지를 않아. 방금 아버지에게도 전화를 했었는데 네가 타이어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더라고. 부탁하는 건 아냐. 내 말은 그냥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 내 바에 14살 짜리 여자 아이가 와 있는데 그 애가 여기서 나가 주길 바란다는 것 뿐이야."
"바꿔 주세요."
레이가 전화를 받았다.
"집 안이 평화로워 봐, 내가 왜 바 출입을 하고 그러겠어?"
"10분 뒤에 갈 테니까 그대로 있어."
전화를 끊었는데 다시 벵리 울렸다.
"여보세요?"
"네."
"늦네요." 정체 불명의 목소리였다.
"심각해지죠. 정말 누구세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요."
"한 시간이 더 필요해요. 여동생이 다시 술을 마시고 있어서요."
"45분 드리겠습니다. 그 때까지도 안 오시면 저는 없습니다."
'철학자 카페'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이자벨, 밀로야. 레이에게 여기 스카프 있다고 전해 줘."
"직접 말하세요."
"이자벨이 데려간 거 아니야?"
"아뇨."
"여기 없는데?"


레이가 사라졌다

나는 끼익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주차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충 차를 세운 나는 서둘러 밀로의 바로 올라갔다. 그리고 단번에 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밀로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이었다. 두려움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그 표정. 극도의 두려움이 심장을 뛰게 하는 등의 생명 유지 활동에 집중되어 있어야 할 모든 피를 빨아 먹어 버린 듯 했다. 밀로는 너무나 창백했다. 나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손님들 웅성대는 소리 때문에 안이 너무 소란스러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내 귀에는 내 숨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 길을 가로막는 손님들을 밀치며 가게 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화장실과 복도 쪽 비상구를 확인했다.
밀로가 가게 앞 쪽에서 손짓을 하더니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레이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계단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 동네를 돌면서 지나 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레이처럼 생긴 여자 아이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반경 5킬로 근방에 있는 모든 골목들을 돌았다. 집에 전화를 3번 해 봤고 레이 휴대폰으로 두 번 걸었다. 우리는 바로 다시 돌아왔다. 그 근처를 다시 수색하면서 레이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그 때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레이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밀로가 쓰레기통 뚜껑을 들어 올렸다. 레이의 휴대폰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올린 후 밀로를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해, 이자벨. 레이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든지 아니면 누가 던져 버렸든지 둘 중의 하나야."

나는 교통 법규에 나와 있는 모든 법규를 다 어기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게 틀림 없었다. 내가 나의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그것이 정녕 마지막이란 말인가.
레이가 사라진 것은 고작 1시간 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로 간에 의사 전달이 잘못되어 빚어진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레이는 혼자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애의 수법이 아니다. 레이는 전화를 한다. 레이는 의사 소통을 한다. 레이는 대중교통보다는 자동차 타는 것을 선호한다. 레이는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다 알린다. 레이는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린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혼자 가 버리지 않는다. 레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손이 떨려 집의 현관 문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몇 분 동안 혹시 열쇠를 바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났다. 문이 열리자 나는 내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레이의 방으로 달려가는 동안 닫혀 있는 모든 방 문을 두드렸다. 손잡이를 돌렸는데 잠겨 있었다. 손이 떨려 자물쇠를 따는 건 역부족이었다. 발길질을 두 번 했는데 꿈쩍도 안 했다. 나는 창고로 내려가 도끼를 하나 들고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나는 자물쇠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데드볼트 주위의 나무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발로 문을 찼더니 문이 쿵 하고 열렸다.
레이 삼촌이 복도 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스페어 키 있는데 왜 그래?"
삼촌은 수화기를 들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레이 방의 고요함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섬뜩함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침대가 헝클어져 있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요?' 라고 말하는 사춘기 소녀 아니랄까 봐 바닥에 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곳은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나는 레이의 책상을 뒤져 주소록을 찾아 냈다. 그리고 그 애의 친구 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레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있을 것 같은지 알지 못했다. 얼른 신고를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레이 삼촌이 경찰서에 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나는 레이의 방을 나와 복도에 서 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스쳐 지났다. 시선을 피한 채로 근처를 좀 찾아 보고 오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냥 돌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개 낀 바깥 공기가 메슥거림을 좀 잠재워 주지 않을까 했는데 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어머니 꽃밭에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처음은 아니다). 그러고 있는데 전화 벨이 다시 울렸다.
"이자벨, 어디 있는 겁니까?" 다시 그 정체 불명의 목소리였다.
"그 애 데리고 있어요?"
숨 쉬기도 힘든 상태라 말이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누구 말이에요?"
"내 여동생. 당신이 데리고 있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애 손 끝 하나 건드렸다간 그 날로 당신 목숨 끝인 줄 알아! 알아 들어? 끝이라고! 우리가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누구 말입니까?"
"내 아버지가 당신을 죽일 거야. 아니면 내 어머니가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둘이 누가 먼저 하나 경쟁을 할지도 몰라. 당신이 데리고 있어?"
"누구 말입니까?"
"만약 데리고 있으면 당장 돌려 보내!"
전화가 툭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