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을 믿지 말라 - Part.1 수상한 가족의 탄생 <上>

조사실 #.1

72시간 후

백열 전구 하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전구에서 나오는 어둠침침한 빛이 창문 없는 방의 궁색한 모양새를 드러낸다. 나는 눈을 감고도 이 곳에 있는 물건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칠이 벗겨진 나무 테이블 하나, 흔들거리는 의자 네 개, 회전식 다이얼 전화기 한 대. 낡은 텔레비전과 비디오 플레이어 한 대. 나는 이 방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아마도 내가 저질렀을 범죄들에 대한 조사에 답하면서. 하지만 지금 나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서, 알지도 못할 뿐더러 생각하기조차도 두려운 범죄에 대한 조사를 받는 중이다.
헨리 스톤 경위는 나와 마주 앉아 있다. 그가 테이블 한가운데에 녹음기를 내려놓고 버튼을 누른다.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아직 완벽하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40대 초반, 짧게 자른 머리,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빳빳한 흰 와이셔츠, 세련된 취향의 타이, 잘 생긴 편. 헌데 냉철한 프로처럼 보이려고 애 쓰는 게 왠지 가면처럼 느껴진다. 일개 공무원이 입기에는 양복도 너무 고급이다. 의심이 간다. 하지만 난 모든 것에 의심을 하는 타입이니까.
"기록을 위해 이름과 주소를 말씀하십시오."
경위가 말한다.
"이자벨 스펠만.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티, 클레이 스트리트 1799번지."
"나이와 생년월일을 말씀하십시오."
"스물 여덟, 1978년 4월 1일 생."
"아버지가 알버트 스펠만, 어머니가 올리비아 스펠만, 맞습니까?"
"네."
"오빠와 여동생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서른 살. 레이, 열네 살. 맞습니까?"
"네."
"직업과 고용주의 이름을 말씀하십시오."
"스펠만 사(社)의 사립 수사관입니다. 부모님 회사고요."
"사립 수사관 일을 시작한 게 언제입니까?"
"16년 전 쯤일텐데요."
스톤이 자료를 살피더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16년 전이면 열두 살이었을 텐데요."
"맞습니다."
"스펠만 양."
스톤이 말한다.
"처음부터 시작해 봅시다."


그 모든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시점을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것이 사흘 전도 아니고 일주일 전도 아니고 한 달 전도 아니고 일 년 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Part.1 수상한 가족의 탄생 <上>


가족의 시작

나의 아버지 알버트 스펠만은 스무 살 중반 무렵,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샌프란시스코 경찰청에 들어갔다. 그리고 5년 후 경위가 되었고 곧이어 경감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아버지는 정보원과 농담을 주고받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이 추락 사건은 아버지를 난데 없이 고통 속에 주저앉게 만드는, 신뢰할 수 없는 척추라는 결과를 안겨 주었다.
조기 은퇴를 종용당한 아버지는 곧장 지미 오말리 사를 찾아갔고, 왕년의 경감은 사립 수사관이 되었다. 1970년의 일이다. 회사 경영자의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말리 사는 상당한 사건 의뢰 건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합류와 더불어 사업은 상승세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에게는 사람을 다루는 비범한 재능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어눌해 보이면서 사근사근한 매력이 있어 쉽게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다. 유머 감각이래야 촌스럽고 한 물 간 활극 수준이지만 사람들은 다들 좋아라 한다. 래퍼토리가 늘 그 밥에 그 나물인데, 이를테면 재채기를 하면서 동유럽식 이름을 대는 식이다. 그나마 자식들이 이제 좀 새로운 걸 시도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고 있긴 하지만….
키 190센티미터, 몸무게 100킬로그램.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의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위협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걸음걸이나 동작이 편안하고 여유가 있어서 늘 그런 인상을 감추어 주었다. 한편 얼굴에 관해 말하자면, 이건 마치 묘사되기를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엉터리 조합이 되어 있는 양상이랄까,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얼굴들의 이모저모를 요리조리 짜맞추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늘 말하길, "충분히 시간을 갖고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 얼굴이 얼마나 멋있어지는데." 그러면 듣고 있던 아버지가 덧붙이길, "그런데 문제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네 엄마 뿐이었다는 사실이지."

1974년, 알버트는 늘 하던 보험 회사 감시를 하다 결국 돌로레스 공원까지 가게 됐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우연히 버스 차도 옆 쪽으로 심어져 있는 관목 뒤에 숨은 조그만 갈색 머리 아가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범상치 않은 행동에 호기심을 느낀 그는 돈 받고 하는 감시 임무를 뒤로 하고 이 신비로운 여인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알버트는 이 별난 갈색 머리 아가씨 역시 누군가를 미행 중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녀는 가방에서 카메라와 어마어마한 망원 렌즈를 꺼내더니 공원 벤치에 서로 떨어질 줄 모르는 채 앉아 있는 젊은 커플의 스냅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메라 다루는 솜씨가 영 형편 없었던 관계로 알버트는 전문가로서 도움을 좀 주어야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빠르게였나? 너무 가까이였나? (자세한 사항은 둘 다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한다) 알버트는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두고두고 하시는 말씀, 고통이 몸에 전율을 뿌리는 순간 사랑에 빠졌노라고.
억세기 그지없는 갈색 머리 아가씨가 또 한 번 강펀치를 날리기 전에, 앨버트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갈색 머리 아가씨는 사과를 하며 자신을 올리비아 몽고메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여자 뒤꽁무니를 쫓는 일은 무례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잠재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주지시켰다. 그런 연후 자신의 초보 수준의 미행 행각에 대해 해명하며 조언을 부탁했다. 연유인즉슨, 여전히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 남자는 몽고메리 양의 형부 될 사람이었고 여자는 그녀의 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알버트는 본인의 맡은 바 임무를 망각하고 남은 오후 시간을, 도널드 핀커인가 뭔가라는 사내를 미행하는 몽고메리 양에게 협조하는 데 바쳤다. 그들의 분투는 돌로레스 공원에서 시작되어 텐더로인에 있는 한 아일랜드 풍 주점에서 마무리됐다. 핀커는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날을 위대한 성공의 날이라고 불렀다. 마티 이모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지만.
버스 토큰 몇 개, 택시 영수증, 필름 두 통으로 올리비아와 알버트는 세 명의 각기 다른 여자 품에 안기는가 하면, 두 명의 각기 다른 마권업자의 주머니 속으로 돈을 밀어 넣는 도널드의 모습을 잡을 수 있었다. 알버트는 올리비아의 총명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 작고 민첩한 스물 한 살의 갈색 머리 아가씨에게 미행 업무를 맡기는 것이 값진 투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데이트를 하자고 해야 할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없었던 알버트는 두 가지 전부를 제안했다.

석 달 후 라스베가스에서 조촐한 식을 올린 후 올리비아 몽고메리는 올리비아 스펠만이 되었다. 마티 이모가 깜짝 놀라며 부케를 받았지만, 그 후로 33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미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운명이었다. 1년 후 아버지는 회사를 샀고 그 때부터 회사 이름은 스펠만 사가 되었다.


장남

데이비드 스펠만의 탄생은 완벽했다. 3.5킬로그램, 소복한 머리카락, 깨끗한 피부. 세상에 나온 직후 (의사에게 자기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우렁찬 울음 소리를 들려 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곧 멈추었다. 두 달이 지나자 중간에 깨는 일 없이 내리 일곱 시간씩을 자 주었다. 가끔은 여덟, 아홉 시간까지도.
알버트와 올리비아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첫 아이를 완벽함의 화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데이비드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내가 비교점을 제시하면서부터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데이비드는 매력을 더해 갔다. 마침내 우리 가족 중 누구와도 닮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매력에 그레고리 펙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덧붙여진 빛나는 외모를 소유하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 질투심에 사로잡힌 친구가 눈을 멍들게 한 적이 있긴 했지만 유달리 힘든 시기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눈에 멍든 것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다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잘 나왔고 우리 집안 족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공부 머리가 있었다. 운동 신경도 타고나서 고등학교에 있는 거의 모든 운동 팀 주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결국은 고사했다. 안 그러면 선수들의 질투 어린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너무하다 싶은 완벽함에는 재수 없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 겸손했다. 한편 나는 오빠가 앉았던 의자란 의자는 하나도 남김 없이 발길질을 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내가 오빠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의 종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오빠가 밀고자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은 별 일 없이 그냥 넘어갔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부모님의 살벌한 감시망을 빠져나가기 힘들 때도 간간이 있었다. 글을 쓸 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재고 목록 표를 작성하는 가게 점원이나 된 것처럼, 나의 범죄 행위들을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리스트를 작성한 뒤 각각의 세부 사항을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1992년 12월 8일, 오빠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지우다' 처럼 대략적인 개요만 적어 놓을 때도 있었지만, 요모조모 상세하게 사건 경위를 기록해 놓을 때도 있었는데 대개 잡힌 경우였다.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으려면 철저한 사건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지하실, 혹은 조사실

이렇게 부르긴 했지만 사실 그 곳은 우리의 지하실이었다. 이 곳에 있는 물품들의 종류를 나열하자면, 백열 전구 하나, 테이블 하나, 의자 네 개, 회전식 다이얼 전화기 한 대, 낡은 텔레비전. 흑백 느와르 영화에서나 봄직한 불빛과 비품들에 매료가 되었으니, 부모님이 우리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이 원시적인 공간에서 어떤 처벌의 드라마를 연출했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우리 집안의 내로라 하는 말썽꾼이었던 나는 이 공간에 장기 투숙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 벌어지는 기본적인 조사 과정의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사건의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자벨, 여덟 살
나는 흔들거리는 의자 중 하나를 골라 옆 쪽으로 삐딱하게 기대 앉는다. 아버지는 앞뒤로 왔다갔다 한다. 그러다 내가 답답해서 옴죽거리기 시작하면 슬쩍 말을 꺼낸다.
"묻겠다, 이자벨. 지난 밤 메 오빠 방으로 들어가 머리카락을 잘랐나?"
"아니요."
이어지는 긴 침묵.
"확실해? 시간이 필요한가? 그래 그렇지, 기억을 잘 더듬어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아버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입장 고수에 들어간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가위 하나를 올려 놓는다.
"이 물건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가위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 가위를 네 방에서 찾아냈다."
"모함이에요."
그로부터 일주일 간 나는 외출 금지였다.

#이자벨, 열두 살
이번에는 어머니가 내 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 왼팔 아래 세탁 바구니를 끼고서. 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는다.
"이자벨, 이 와이셔츠 색깔이 뭐지?"
"불빛이 이래서야 알 수 없죠."
"잘 생각해 봐."
"회백색이요."
"내 생각에 분홍색인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네, 그러네요. 분홍색이에요."
"그러니 이제 네 오빤 분홍색 셔츠가 총 다섯 벌이구나. 학교에 입고 갈 흰 색 셔츠는 없고.(흰 와이셔츠가 복장 규칙이었다)"
"운이 없네요."
"내 생각엔 네가 이 상황에 관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자벨."
"어쩌다 그런 거예요."
"그래?"
"빨간 양말 있잖아요. 그걸 같이 넣는 바람에."
"10분 안에 그 양말을 찾아내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새 와이셔츠 다섯 벌 값을 네가 물어내야 할 테니까."
나는 어머니에게 양말을 보여줄 수 없었다. 원래 있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방에 숨겨 두었던 빨간색 식용 색소를 빼돌려 아무도 모르게 이웃집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수 있었다.
셔츠 값은 물어냈다.

#이자벨, 열네 살
이쯤 되자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조사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러면서 아버지는 옛 시절에 대한 회고에 잠겼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스파링 상대로 삼는 게 신선했던 거다.
15분이 침묵 속에 지난다. 나를 궁지로 몰기 위한 심산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 게임에 관한 한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자벨, 오빠 성적표를 조작했나?"
"아뇨.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이유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네 짓이라는 건 알아."
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성적표를 올려놓더니 내 앞으로 들이민다. (손으로 성적을 기재하는 옛날식 성적표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성적표 하나를 구해서 믿을 만한 위조자의 은혜만 거치면 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다 네 지문이야."
"농담이시겠죠.(난 장갑을 꼈다)"
"필체도 검사했다."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앉았다.
"이봐, 이자벨. 우린 이게 네 짓이라는 것을 알아. 이유를 말하면 벌은 면하게 해 주겠다."
오호, 유죄 답변 교섭이라. 유죄를 시인하는 대가로 형량을 감해서 구형을 해 주시겠다. 이런 건 처음이다. 그래, 가 보자. 일주일 내내 집에 꼼짝 없이 갇혀 있긴 싫으니까. 나는 잠시 시간을 끈다. 너무 쉽게 자백을 한다는 인상을 주면 곤란하다.
"성적표에 C를 받아 온다는 게 어떤 건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난 데이비드 왕의 왕관을 뺏는 일에 싫증이 났다. 내 자신의 길을 닦아 가기 위한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가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진정한 범죄 인생이 시작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페트라 클라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학교에 남아 벌을 받다가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둘 다 (아주 열광적으로) 60년대 코미디 첩보물 시리즈인 <겟 스마트(Get smart)>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계기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을까. 케이블에서 해 주는 재방송을 보고 또 보면서 배가 아플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우린 얼마 안 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당연한 결과이지 않은가. 우리의 우정은 공통 관심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의 첩보 영웅 돈 아담스와 맥주, 그리고 스프레이 프린트.

1993년 여름 (우린 열 다섯 살이었다) 페트라와 나는 샌프란시스코 노브 힐 디스트릭트에서 발생한 일련의 공공 시설물 파괴 행위의 주동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건으로 명예롭게도 인근 지역 자체 순찰대와 여러 차례 미팅을 가졌지만 아무런 증거도 잡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경탄하는 것처럼 우리가 저지른 행각들을 흡족하게 음미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페트라와 나는 마치 경쟁이나 하듯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못된 행동들의 범위를 하나 하나 넓혀 갔다. 그렇다, 인정한다. 우린 유치했다. 하지만 우리의 비행에는 당신의 그것과는 다른, 뭐랄까 창조적인 에너지가 가득했다. 아래에 있는 리스트가 페트라와 내가 만든 최초의 공동 리스트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지만.

【처벌되지 않은 목록 : 1993년 여름】
1. 6월 25일 : 그레고리 씨네 뒷마당 미화 작업*.
2. 7월 7일 : 야간 탈출.
3. 7월 13일 : 미션 고등학교 운동 기구 보관 창고에서 농구 공 다섯 개, 하키 스틱 세 개, 야구 공 네 개, 야구 글러브 두 개 빼냄.
4. 7월 16일 : 챈들러 씨네 애완용 푸들, 코발트 청색으로 염색시킴.
5. 7월 24일 : 야간 탈출.
6. 7월 21일 : 돌로레스 스트리트에서 열린 알코올 중독자 갱생 모임 장소 앞에 맥주 한 상자 가져다 놓음**.
7. 7월 30일 : 야간 탈출.
8. 8월 10일 : 인근 유부남들을 대신하여 야한 잡지 구독 신청서 작성.

*가위(정원용 전지 가위 포함) 가지고 노는 게 취미인 페트라가 가운데 손가락이 유달리 길쭉하게 뻗은 손 모양의 정원을 탄생시켰다.
**노숙자에게 맥주 사 마시라고 돈을 줌.

우리의 주요 활동은 소위 '야간 탈출'이었다. 창조력이 바닥나서 우리의 활동에 잠시 공백기가 찾아오면 우리는 야간 탈출을 시도했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정이 지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 무렵이 되면 우리는 슬그머니 각자의 집을 빠져나왔다. 페트라가 자기 어머니의 (그러니까 말하자면 훔친) 1978년형 닷지 다트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고 우리는 쓰레기통들을 스치면서 거리를 달렸다. 거리에 쓰레기통이 날리는 걸 보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게 즐거웠겠는가. 페트라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잠시 동안의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지금껏 어린 영혼을 품에 안아 주었던 행운의 여신이 나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조사실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진짜 경찰청의 진짜 조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공급자를 밝히길 원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1993년 8월 16일
여섯 시간 전 나는 자정이 지난 시각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히치하이크를 해서 미션 디스트릭트에서 열리는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약을 하고 싶어했다. 코카인이 딱히 내 분야는 아니었지만, 하필 그 남자가 가죽 재킷을 입고 케루악 소설을 들고 있었다. 내가 또 취약점이 독서하는 터프가이들이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내가 딜러를 안다고 했고(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로 후에 알게 될 사람이었다), 전화를 넣어 "한 작대기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공급자의 집으로 가야 한다면서 나는 마치 사복 경찰이라도 된 듯 조심스럽게 가죽 재킷을 파티장 밖으로 끌어냈고, 그 후 슬그머니 집으로 바래다 주겠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나를 바래다 주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집이 아니라 경찰청이었다. 내가 알버트 스펠만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훈장 경력까지 있는 전 경찰, 아버지가 불려 왔다.
잠에 취해 다들 노곤한 분위기.
"이름을 대, 이자벨. 그러고 나서 집으로 가자. 나머지 문젠 집에 가서 해결하고."
"아무 이름이나요?"
"이자벨, 넌 매복 경찰관에게 약을 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했어. 그러고 나서 딜러라는 인간에게 전화를 걸어 한 작대기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잖아?"
"그런 것 같긴 한데요. 하지만 전 아무 잘못 없어요. 죄가 있다면 야간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긴 것 밖에 없다고요."
아버지는 최고로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녀석 이름을 대."

경찰에서 원한 이름은 레너드 윌리엄스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렌이라고 불리는 고등학생. 진실인즉슨,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하고 그에게서 약을 구해 본 적도 없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실은 수 년 간의 귀동냥을 통해 규합된 정보들의 조합일 뿐이었다. 사실 그게 내가 뭔가를 알아 내는 방식이기도 하고. 나는 렌의 어머니가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진통제 중독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렌이 여섯 살 때 쯤 아버지가 주류 판매점 총기 사건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남동생이 둘 있는데 사회 복지 보조금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렌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친구들이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마약을 거래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렌이 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은 범죄 번호 3의 밤이었다. 페트라와 나는 운동 기구 보관 창고에서 물건들을 훔쳐 내기 위해 학교로 잠입했다. (중고 운동 기구 판매 사업이 우리의 자금 유출입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창고의 자물쇠를 딴 후 페트라와 나는 물건들을 그녀의 차로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탐욕심이 발동했는지, 월터 코치가 늘 책상 서랍에 버번 위스키 한 병을 넣어 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페트라를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나는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갔는데, 월터 코치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는 렌과 딱 마주쳤다. 옆에는 웬 축구 선수 하나가 같이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렌은 나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렌이 모르는 게 있었으니 그건 내가 비밀을 지키는 데 능숙하다는 거였다. 내 비밀이 워낙 많으니까 능력이 저절로 배양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밀이 하나 더 늘었다고 호들갑 떨 이유가 내겐 없었다. 나는 다만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밀고자 타입은 아니야."

그 날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은 렌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나도 그럭저럭 잘 지냈다. 상대적으로 문제는 아버지였는데, 딸한테서 유용한 정보를 캐 내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전직 경찰의 모양새가 꽤나 우스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동안 전 동료들의 빈정거림을 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날, 이 바닥 경험을 충분히 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범죄자들끼리 통하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의 침묵을 존중했다는 것을.

범죄 리스트도 없는 셈 치고, 굳이 오빠와 비교되지만 않는다면, 나도 제법 한 인물 축에 속하는 편이다. 낯선 방에 들어가도 몇 분이면 그 곳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머릿속에 저장해 놓을 수 있다. 최고 사격수처럼 정확하게 소매치기를 찾아 낼 수도 있다. 어떤 야간 경비원의 눈도 속일 수 있다. 일단 필이 받았다 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도 있다. 그리고 내가 그다지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남자들에게서 꾸준히 데이트 신청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자질들은 (인정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항으로 점철된 나의 인생 역정에 가리어져 왔다. 오빠가 완벽한 모범적 인간이라는 시장을 구축한 이상, 나는 나 자신만의 불량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가끔은 "잘 했다, 데이비드." "넌 도대체 뭘 한 거야, 이자벨?" 이 두 문장이 우리 집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다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장실 면담, 경찰차 탑승, 공공 기물 파손, 침실 흡연, 해변 음주, 주거 침입, 학사 경고, 외출 금지, 독서, 외출 금지 무시, 숙취, 필름 끊김, 군화, 감지 않은 머리. 이것이 나의 10대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불량 이미지를 맘껏 구축할 수 없었다. 오빠 때문이었다. 내가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기고 몰래 나가면 오빠가 핑계를 대 주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오빠가 협조해 주었다. 내가 도둑질을 하면 오빠가 배상해 주었고, 내가 담배를 피우면 오빠가 꽁초를 숨겨 주었다. 내가 앞마당에 퍼질러져 있으면 오빠가 나를 방으로 옮겨다 주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내 수준에 맞추어서 오빠가 대신 해 주었고, 내가 제때 제출하지 않으면 오빠가 직접 선생님 우편함에 넣어 주었다.
짜증이 나는 건 오빠가 다 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내 반항이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부모님도 가끔은 내가 왜 그러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균형'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오빠와 나, 둘을 합해서 반으로 나누면 딱 그 지점이 균형점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모든 것의 균형이 깨진 것은 레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다.


클레이 스트리트 1799번지

스펠만 저(邸)는 샌프란시스코 시티 노브 힐 디스트릭트, 클레이 스트리트 179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800킬로미터 쯤 걸어가면 동성애자들을 위한 홍등가인 텐더로인이 나오고, 저 북쪽으로는 관광객들을 노리는 롬바르드 스트리트, 피셔맨즈 워프가 자리하고 있다. 머리너까지 가게 되는 경우는 운이 엄청 안 좋은 거라고 보시면 되겠다.
편리하게도 스펠만 사 역시 같은 주소에 위치하고 있다. (아버지는 계단으로 출퇴근한다는 농담을 좋아한다.) 전체적으로는 파란색이고 흰색으로 외부 트림이 된 인상적인 빅토리아 풍 4층 건물인데, 스펠만 가문에 3대 째 내려오는 재산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저택이다. 돈으로 따지자면 거의 2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1년에 적어도 네 차례 쯤은 부모님의 얼굴에서 이걸 팔아 볼까 하는 징후를 읽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유럽식 바캉스, 연금 펀드, 교외 주택 같은 것보다는 고가구, 벗겨진 페인트, 경제적인 불안정을 선호하는 분들이다.

우리 가족의 집이자 회사의 입구에는 4개의 우편함이 있다. 왼쪽에서부터 스펠만 가족, 스펠만 사(규칙적으로 이 두 개를 구분해서 우편물을 넣어 준 우편 배달부는 한 명 밖에 없었다), 마커스 갓프리(아버지의 비밀 이름), 그레이선 엔터프라이즈(다소 자잘한 사건들을 맡을 때 사용하는 유령 회사 이름).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경우엔 베이 에어리어 근처 사서함 두서너 개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선 집 안으로 들어서면 세 개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만나게 된다. 계단 오른쪽에 '스펠만 사'라는 현판이 붙은 문이 있다. 업무 시간 외에는 잠겨져 있다. 계단 왼쪽으로는 거실이 있다. 한때는 빛 바랜 얼룩말 무늬 장식의 낡은 소파가 그 곳의 중심점을 차지했었다. 지금은 갈색 가죽 소파 하나가 겸손하게 놓여 있다. 주위로 마호가니 가구들이 늘어서 있는데, 하나 하나가 고가구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만 그냥 모르고 보면 무시당하기 십상인 정도의 빛을 발한다. 지난 30년 동안 이 방이 경험한 유일한 변화는 (소파를 제외한다면) 80년형 제니스 텔레비전과 27인치 평면 텔레비전의 교체가 다였다. 그런 일이 거의 드문데 어느 날 신기하게도 경마에서 돈을 딴 삼촌의 작품이다.
거실 뒤에는 부엌이 있다. 거실에 있는 것들보다 무시당할 확률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빛을 발하는 고가구들이 있는 다이닝 룸으로 이어진다. 1층은 그 정도다. 그것 말고는 스펠만 사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려야 한다.

사무실은 다른 집이라면 작업실 정도로 불릴 만한 소박한 장소다. 선생님 책상(베이지색 철제 중고 가구) 네 개가 사무실 중앙에서 완벽한 직사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컴퓨터는 한 대 뿐이었다. 아버지 책상에 놓여 있던 IBM 컴퓨터. 지금은 4개의 책상 위에 각자의 컴퓨터가 있고 공동 노트북도 한 대 구비되어 있다. 구색을 맞추어 구입한 (역시 중고) 파일 캐비닛 6개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고 나면 커다란 문서 분쇄기 하나와 먼지 낀 블라인드가 전부다. 파일들은 대개 각자의 책상 위에 6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바닥엔 파지가 굴러다닌다. 먼지와 싸구려 커피 냄새가 뒤섞여 있다. 사무실 안 쪽 끝에 있는 문은 지하실 겸 조사실로 통한다. 거기서 모든 조사가 이루어진다. 데이비드 오빠는 그 곳이 우리 집에서 숙제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었다. 나야 알 바 없는 일이지만.


패밀리 비즈니스

오빠와 내가 스펠만 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각각 열 네 살, 열 두 살 되던 해였다. 이미 말썽꾼의 명성을 떨치고 있던 나였지만, 직원으로서의 활약이 다른 덜 떨어진 자질들을 상당 부분 무마시켜 주었다. 사회 규칙을 어긴다거나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캐 낸다거나 하는 일들에 내가 잘 적응한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시작은 쓰레기였다. 그것이 스펠만 가의 아이들에게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첫 번째 과제였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누가 비번이냐에 따라)가 수사 대상의 집 앞에서 쓰레기를 수거해 집으로 가져왔다. (일단 집 밖으로 내보내져 국가당국의 위생 시설 관리를 기다리는 쓰레기는 공공의 자산인 바 그것을 사용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영역에 속한다.)
나는 설거지용 고무장갑을 끼고 (가끔은 집게로 코도 막았다) 그것들을 뒤져 쓰레기와 보물을 분리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은행 계좌 통지서, 영수증, 편지, 메모는 챙긴다.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나 몸에서 분비되는 액체가 묻은 것들은 버린다. 나는 종종 이런 지침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언급되지 않은' 카테고리 안으로 떨어지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쓰레기 사회학 분야는 데이비드 오빠와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를 하고 나면 심하게 아픈 경우가 다반사였던지라, 열다섯 살 되던 무렵에는 그 분야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내가 열세 살이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베이 에어리어에서 재판 기록 열람하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우리의 주된 업무는 뒷조사였고, 전과 조회가 그 첫 번째 단계였다. 이번에도 역시 지시 내용은 간단했다. 명예 손상 인자를 찾는다. 풀어 말하면 뭔가 구린 걸 찾으라는 뜻이었다. 그런 것을 찾지 못했을 때는 낙담이 컸다. (우리가 이름이나 사회 보장 번호로만 아는) 사람들이 깨끗하면 우리는 실망했다.

뒷조사는 우리의 고된 작업 중 가장 단순한 일이었다. 대개 베이 에어리어의 여러 법원을 다니며 조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들을 비교하는 식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지방 법원이 사라지기 전, 이것은 카운티별로 적어도 4개 법원의 기록 보관소를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급 형사 법원, 상급 민사 법원, 지방 형사 법원, 지방 민사 법원. (그리고 가끔은 소액 재판소도.)
후에 상급 법원과 지방 법원이 통합되고 마이크로 PC를 통해 대부분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자 우리의 조사 기간은 상당히 단축되었다. 지난 5년 간 사실 상 모든 법원 정보가 컴퓨터 데이터화되었고, 10년 이상 지난 사건 기록을 찾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조사는 스펠만 사무실에서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12시간 15시간 걸렸던 일이 책상머리에서 4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되는 일이 된 것이다. 세상 참.
이 컴퓨터 자료들은 뒷조사 말고도 행방이 묘연한 누군가의 소재 파악에도 유용하게 이용된다. 이 경우엔 사회 보장 번호를 입수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른바 사립 수사 세계의 성배라고나 할까. 하지만 사회 보장 번호는 대중에게 열람이 허용된 공공 기록이 아니다. 만약 고객에게서 번호를 받지 못했다면, 풀 네임과 출생일, 혹은 최소한 풀 네임(흔하지 않을 수록 좋다)과 거주하는 도시는 알아야 한다. 다음 단계는 이름과 출생일을 가지고 종합 신용 정보 집중기관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주소지 변경, 파산 경력, 담보 내용 등의 개인 신용 정보를 조회할 수 있다. 전체 정보 열람은 안 되는데, 그건 신용 정보는 공공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이 기관을 통해 종종 사회 보장 번호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데이터 베이스 하나가 번호의 처음 네 자리 숫자를, 다른 데이터 베이스가 마지막 네 자리 숫자를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관찰하면 완전한 번호의 조합에 성공할 수 있다. 데이터 베이스 조사는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에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람들 비밀을 파헤치는 게 좋다. 그러니 비록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남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도, 내 죄는 사해질 것이라 그냥 믿어 버리고 있다.

정리하자면, 스펠만 1세대는 일단 우리의 비위를 테스트했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인내심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관문이 머리였다.
스펠만 2세대들에게 (어쩌면 1세대들 역시) 미행과 감시는 그야말로 우리가 꼭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학교가 파하고 부모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그리 달가웠을 리가 없다. 하지만 늘 스릴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항상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잠도 자야 하고 출근도 해야 하고 사무실에서 네 시간 짜리 회의도 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린 로비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무릎 관절도 뻐근하다.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게 좋다. 오빠는 그렇게 앉아 쉬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숙제를 했다. 난 담배를 피웠고.

#열 네 살
내 첫 번째 임무는 펠드맨 사건이었다. 존 펠드맨은 우리 가족에게 자기 사업 파트너이자 동생인 샘을 감시해 달라고 의뢰했다. 존은 동생이 수상한 거래에 손을 댄 것 같다면서 2주 동안 샘에게 바짝 따라붙어 자기 직감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사실 존의 직감이 맞긴 맞았는데 존이 샘을 잘못 봤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샘은 사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대신 존의 부인에게 많은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빠와 나는 둘 다 신참내기였다. 하지만 사건이 끝나 갈 무렵 나는 전문가가 되었다. 아버지는 밴을 운전했고 어머니는 혼다를 몰았다. 둘은 무전기를 통해 우리와 연락을 취했다. 샘이 걸을 땐 오빠나 내가 사건 진행을 맡았다. 우리는 차 밖으로 뛰어 내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우리의 동료들에게 무전기로 위치를 전달했다. 만약 샘이 택시나 버스, 혹은 케이블카를 타는 경우가 닥친다 해도 적어도 한 사람은 항상 우리를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갔지만.
우리가 펠드맨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샘이 존의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정보 말고도 그 간의 나의 방황 생활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간의 나의 인생은 나의 피부 속 깊은 곳에 슬그머니 어떤 정신 같은 것을 심어 놓았으며, 한계를 시험하는 법을 가르쳤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오는 기술을 연마시켰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 마음을 읽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타이밍인지 택시를 부를 타이밍인지를 직감했다. 계속 꼬리를 밟아야 하는지 아니면 슬쩍 빠져 주는 게 상책인지 알았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직업적으로 사람들 뒤를 쫓아다니는 그런 부류의 사람처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네 살 때 벌써 나는 다 자라 168센티미터였다. 현재보다 겨우 3센티 모자라는 키였다. 나이보다 조금 성숙해 보였지만, 그래 봐야 학생인지라 쭈글쭈글 티셔츠에 낡은 데님 청바지가 패션의 전부였다. 외모에 관해서 말하자면 특별히 튈 만하지도 안 튈 만하지도 않았다. 긴 갈색 머리, 갈색 눈, 주근깨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쟤 봐, 할 만한 것도 없고. 어머니 쪽을 100% 닮았다면 상당한 수준의 미모를 자랑했을 텐데, 아버지 쪽 유전자가 나의 특질들을 교란시켜 놓았기 때문에 나는 '예쁘다' 라는 말보다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라는 말을 듣는 편이다. 하지만 스물 여덟의 나이인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헤어 스타일리스트인 절친한 친구 하나와 다소 나아진 패션 감각의 도움에 힘입어, 나도 이만하면 괜찮다.
자자, 이 얘긴 그만 하고.

#열 다섯 살
레이 삼촌이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보드카 한 병을 사 달라고 했고 삼촌은 안 된다고 했다. 난, 그러면 자물쇠 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사립 수사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기술은 아니었지만, 알고 있는 거니까 삼촌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2주 동안 삼촌과 말을 섞지 않았다). 일을 할 때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후에 기분 전환 차원에서 종종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했다.

#열 여섯 살
'전화 한 통이 정보를 좌우한다.' 이 분야의 천재는 어머니였다. "안녕하세요, 프랭클린 씨 계신가요? 아, 프랭클린 씨? 전 사라 파커라고 합니다. ACS라는 자산 관리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자산 정보를 잃어버린 분들을 관리해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최근에 게리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블루칩 수천 주를 발견했는데요, 해서 선생님께서 그 분이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출생연월일과 사회 보장 번호를 알려 주시면…."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사회 보장 번호며 출생연월일, 신용카드 영수증과 은행 계좌 통지서, 심지어 경력 사항까지 모든 것을 알아 냈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나도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다. 어머니가 여왕이다.

#열 일곱 살
임무를 수행하며 처음으로 차를 몰아 봤다. 1년 후 운전 면허증을 따고 나면 아버지가 도로 현장에서 실무 교육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원칙은 간단하다. 공격적이되 안전한 운전을 할 것. 목표물과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 것. 혼자 임무 수행 중이라면 차 두 대 이상이 끼어드는 상황은 피하는 게 좋다. 목표물을 파악하고 그 남자 혹은 그 여자가 가는 곳을 예상할 것. 만약의 경우 눈에서 놓쳐 버린 경우에 대비해야 하니까. 이 쪽은 아버지 분야였다. 수 년 동안 몸을 담고 있다 보니 도로에 관한 동물적인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을 뿐더러, 목표물의 다음 움직임에 대해서도 거의 심령술사에 가까운 예언 능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도로 위에서의 전술을 가르쳤다면, 레이 삼촌은 도로 밖에서의 잔기술들을 전수했다. 예를 들어, 밤중에 미행을 하고 있다고 치자. 테일라이트가 둘 다 켜져 있는 것보다는 하나만 켜 있는 게 따라다니는 사람에게 덜 피곤하다. 나는 아직도 레이 삼촌이 나에게 망치 하나를 들려 주며, 닥터 리베르만이 타고 다니던 메르세데스 벤츠의 테일라이트를 박살내 버리라고 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열 여덟 살
스펠만 사에 정식 고용된 마법과 같았던 해. 우리 일이란 게 대부분 법과 관련된 문제가 많은지라 사립 수사관이 되려면 합법적인 연령이 필수 조건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나는 관련 조서들을 열람할 수 있었고 조사 과정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사립 수사관 자격증을 따는 데 요구되는 현장 업무 6000시간을 채워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도 상기시킨 바, 나와 내 자격증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유일한 장애물은 내 전과 기록이었다. 일단 사립 수사관 후보가 되면 그 개인에 관련된 모든 배경 조사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열여덟 살이 되기 전의 나의 생각들은 미성년 범죄 기록에 봉인될 터였지만,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상기시킨 바, 이후로 나는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됐다.

#스물 한 살
생일날 나는 두 시간짜리 객관식 시험을 치렀고 석 달 후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편 데이비드 오빠는 열 여섯 살 때 스펠만 사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었다. 학교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언젠가 본인이 우리를 고용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자기는 절대로 가족 사업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오빠는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사생활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 직업의 핵심은 '캐고 다니기'다. 합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비합법적인 경우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마치 사형 집행인의 운명처럼, 우린 이 직업의 진실에 단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염탐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린 본능적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굳건한 요새를 쌓게 된다. 근래 들어 내가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는지 오빠에게 캐묻는 어머니에게 익숙해지고, 외출할 때마다 내 뒤를 살금살금 쫓아와 내가 만나는 남자친구를 몰래 지켜보는 어머니에게 익숙해져 간다. 열여섯 살이 되면 아무 버스나 집어 타고 세 번 정도 갈아타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들여 가며 어머니를 따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게 된다. 침실 문에 데드볼트를 달게 되고 오빠에게도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한다. 이것도 1년에 두 번은 교체해 주어야 한다. 낯선 사람들에게 질문이랄까 심문이랄까 뭐 그런 것들을 하게 되고, 친구들조차도 몰래 감시 비슷한 걸 하게 된다. 설마 그게 정말 사실일까 싶은 수많은 거짓말들을 듣게 되고, 거울 앞에서 하도 포커 페이스 연습을 하느라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 버린다.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사귀는 친구들에게 보통 이상의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는 내 청소년기 범죄 행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내가 만났던 남자친구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항상 못된 녀석들만 만난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내 변화무쌍한 애정 관계가 나의 알코올 소비와 무단 결석 행위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한편 나의 베스트 프렌드 페트라는 나의 애정 관계 경향에 대해 '대책 없이 발전 지양적'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페트라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나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나하고 헤어지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정도로 남자들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고 했다. 내가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하자, 페트라는 나보고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친구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했다.
전에 만들었던 리스트들처럼, 나의 전 남자친구들의 리스트* 역시 나의 과거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커닝 페이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복잡한 것은 싫기 때문에 만난 순서, 이름, 나이, 직업, 취미, 사귄 기간, 헤어질 때 한 말(다른 말로 하면, 이별의 이유) 등으로 정보량을 최소화시켰다.

*이 리스트에는 '하룻밤 사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범주는 별도의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이 기록물에 밝히긴 곤란하다.

#첫 번째 남자친구
이름 : 맥스 골드스타인
나이 : 14
직업 : 프리시디우 중학교 3학년
취미 : 스케이트 보드 타기
기간 : 한 달
헤어질 때 한 말 : "야, 우리 엄마가 너하고 사귀지 말래."

#두 번째 남자친구
이름 : 헨리 슬레이터
나이 : 18
직업 : 버클리 대학교 1학년
취미 : 시 창작
기간 : 일곱 달
헤어질 때 한 말 : "로버트 핀스키를 모른단 말이야?"

#세 번째 남자친구
이름 : 숀 플래너건
나이 : 23
직업 : 바텐더
취미 : 아일랜드 스타일 따라하기, 술 마시기
기간 : 두 달 반
헤어질 때 한 말 : "기네스 맥주 좋아하는 걸 빼면 우린 공통점이 너무 없어." (아일랜드 식 영어로)

#네 번째 남자친구
이름 : 마이클 콜리어
나이 : 47 (나는 스물 한 살이었음)
직업 : 철학 교수
취미 : 학생들과 상당한 수준의 관계 유지
기간 : 한 학기
헤어질 때 한 말 : "이러면 안 될 것 같다. 이 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겠어."

#다섯 번째 남자친구
이름 : 조슈어 풀러
나이 : 25
직업 : 웹 디자이너
취미 : 알코올 중독 탈출 모임 나가기
기간 : 석 달
헤어질 때 한 말 : "우린 만나선 안 돼, 이런 식으로 계속 살면 안 되잖아."

#일곱 번째 남자친구
이름 : 자크 그린버그
나이 : 29
직업 : 웹 디자인 회사 소유주
취미 : 축구
기간 : 한 달 반
헤어질 때 한 말 : "내 동생 신용 조회를 했단 말이야?"

#여덟 번째 남자친구
이름 : 그렉 마틴
나이 : 29
직업 : 그래픽 디자이너
취미 : 철인 3종 경기
기간 : 넉 달
헤어질 때 한 말 : "내가 무슨 범죄자야? 왜 그렇게 사람을 심문하듯 다루냔 말이야!"

여섯 번째와 아홉 번째에 대해선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가로 3센티 세로 5센티 인덱스 카드에 딱 들어갈 만한 정도로 정보의 양을 축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런 경우는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된다.

리스트는 바로 사건 현장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발생 시점이 한참 지나고 난 뒤 리스트 작성이 나에게 아주 명백한 필요성으로 다가왔을 때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른 리스트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것만큼은 꼭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리스트가 하나 있다. 이것이야말로 스펠만 가를 지배하던 내 공포 행각이 끝나게 된 사연을 말해 주는 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자활 갱생(완전하지는 않음)의 시간들
－첫 번째 사건 : 잃어버린 주말 #.3
－두 번째 사건 : 현관 취침 사건
－세 번째 사건 : 신발 분실 에피소드

짐작했겠지만 잃어버린 주말 세 번째는 별도의 리스트로 작성되어 있는 주말 시리즈의 일부이다. 종이 쪽지에 적힌 나의 리스트들은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열리는 컴퓨터 파일로 저장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스프레드 시트를 만들어 여러 리스트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데이터가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잃어버린 주말 시리즈는 전체 27부작이다. 적어도 기억이 나는 범위 내에선 그렇다. 내가 알지 못하는 횟수가 더 있었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전의 레이 삼촌

지금의 레이 삼촌에 대해 말하려면, 잃어버린 주말 같은 사건이 존재하기 전의 레이 삼촌에 대한 정확한 소개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한 쪽 레이는 또 다른 레이 없인 아무런 의미가 없다.
레이 삼촌은 아버지보다 세 살이 많다. 역시 경찰, 아니지, 경찰이었다. 스물 한 살 때 경찰청에 들어가서 스물 여덞에 강력계 경위가 되었다. 원리 원칙을 굉장히 따지는 편이었고 몸 관리도 여간 철저하지 않았다. 삼촌은 하루에 8킹ㄹ로를 완주했고 아무도 녹차를 마시지 않던 시절부터 녹차를 마셨다. 야채와 암 예방에 좋다는 십자화과 채소를 먹었고, 러시아 문학 교수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처럼 잡지 <질병 예방>을 읽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도 정확하게 위스키 소다 한 잔씩만 마셨다.

레이 삼촌은 마흔 일곱 때 소피 리를 만났다. 항상 일부일처제 주의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에 빠진 것은 소피 리가 처음이었다. 소피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우연히도 레이 삼촌이 수사하고 있던 자동차 살인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6개월 후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베이가 내려다 보이는 연회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안 난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열 두 살이던 내가 레이 삼촌보다 더 많이 마셨다는 사실이다.

내가 알기론 레이 삼촌과 소피 숙모는 행복했다. 그러다 첫 번 째 결혼기념일이 지나고 채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생 담배라곤 손에 대 본 적도 없는 레이 삼촌이 폐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삼촌은 병원으로 들어가 폐의 일부를 떼어 냈고 힘든 화학 요법을 치러야 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체중이 거의 2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암이 전이가 되자 또 다시 어마어마한 화학 요법이 시작됐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집에서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늘 낮게 웅얼대는 소리 뿐이었고 가끔 뭔가 중요한 얘기가 오갈 때도 우리 귀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데이비드 오빠와 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도청 전문가들이다. '감시는 집에서부터.' 이것이 당시 우리의 모토였다. 오랜 노력 끝에 우리는 우리 집의 '약점'을 찾아 냈다. 집 안의 음향 반사 조건이 탄생시켜 준, 완전히 동떨어진 공간에서의 대화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오빠와 나의 지성의 합작은 또 하나의 리스트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레이 삼촌의 화학 요법은 진전이 없다.
－소피 숙모는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홀몸이 아니다.

오빠와 내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이끌어 낸 결과에 의하면 어머니의 임신은 우연한 사고였다. 30년 동안 나를 키웠으니 이제 아이는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이야말로, 한 생명을 보내야 하는 슬픔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였다. 내 생각에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건 레이 삼촌이 죽을 게 거의 확실해지던 시점이다. 딸이었고, 어머니 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양반의 이름을 따 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의사들은 몇 주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었다. 진료 기록표를 봐도 그랬고 몸 상태를 봐도 그랬다. 분명히 죽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눈 주위의 다크 서클이 희미해지고 뺨에 혈색이 돌아왔을 때도 우린 그저 먼 곳으로 떠나기 직전의 미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석 달 후 식욕이 돌아온 삼촌이 끔찍한 화학 요법을 치르면서 잃어버린 20킬로 중 15킬로를 회복했을 때도 우린, 저 세상으로 가려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했었다. 여섯 달 후 의사가 소피 숙모에게 남편이 살아날 것 같다고 했다. 우리 곁을 떠난 것은 레이 삼촌이 아니라 소피 숙모였다. 삼촌에게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레이 삼촌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삼촌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 위스키 소다 한 잔 수준이 아니었다. 내 일생일대 처음으로 삼촌보다 내가 먼저 곯아떨어졌다. 삼촌은 도박을 시작했다.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한 판 치는 포커 게임 수준이 아니었다. 호출기로 알려 주는 비밀 장소에서 한 판에 최소 500달러를 걸고 치는 진짜 도박이었다. 경마장은 제2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새로운 사랑의 대상은 이제 말들이었다. 레이 삼촌이 다시 뛰는 모습을 본 것은 미식 축구 하프 타임 때 스낵 사러 뛰어 나가던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던 시절은 지나갔다. 대개는 치즈 크래커를 먹었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마셨다. 삼촌은 더 이상 순정파도 아니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게 여자였다.
새로운 레이 삼촌이 이전의 레이 삼촌보다 재밌지 않나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은 나 뿐이었다. 레이 삼촌은 '그 망할 놈의 계집'이 삼촌 곁을 떠난 후 처음 1년 동안 우리와 같이 살았다. 후에는 아일랜드 풍 주점 '플라우 앤 스타스'에서 바로 모퉁이 돌아 있는 선셋 디스트릭트에 집을 얻어 나갔다. 시즌이 되면 우리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함께 미식 축구를 본다. 맥주를 마시면서 옆에 캔을 쌓아 놓는데 결국은 피라미드(가끔은 맨 아래 층에 여덟 개가 놓이는)가 만들어진다. 한 번은 아버지가 삼촌의 식습관 및 생활 습관에 대해 언급했다. 레이 삼촌은 "몸에 좋다는 것만 먹고 운동 열심히 하다 보니 남은 게 뭐였나? 다신 그렇게 안 살아" 라고 대답했다.


잃어버린 주말의 나날들

레이 삼촌이 첫 번째로 사라진 것은 내가 열 다섯 살 때였다. 금요일 저녁 모임에 오지 않았고 일요일 아침에 미식 축구 보러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 봤지만 닷새 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버지가 삼촌 집에 들렀는데 우편함이 일주일 분의 우편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삼촌의 아파트를 따고 들어갔다. 싱크대엔 곰팡이 낀 설거지 거리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냉장고 안에 맥주가 하나도 없었으며, 자동 응답기의 불빛이 듣지 않은 메시지가 세 통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각별한 추적 기술을 동원했고, 사흘 후 삼촌이 산 마테오에 있는 불법 포커 게임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삼촌은 여섯 달 후 다시 사라졌다.
"레이 삼촌이 또 다시 '잃어버린 주말'을 보내실 모양인데요?"
어머니가 소리를 죽이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레이 삼촌의 행방불명 행각을 1945년 작 영화 제목으로 언급한 것은 그 때가 두 번째였다. 레이 밀런드가 갱생의 길을 걷는 알코올 중독자로 열연한 교훈적인 영화였다. 학교 수업 시간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난다고 말하고 싶은데, 당시의 여타 다른 방탕한 생활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화 주인공의 생활은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레이 삼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알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 드디어 세 번째 '잃어버린 주말' 사건이 발생했다. 예전에 내가 언급했던 자활 갱생(불완전하나마) 리스트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사건 : 잃어버린 주말 #.3

이번 '주말'은 열흘 동안 지속되었다. 
레이 삼촌이 사라지고 난 뒤 나흘 째 되던 날 우리는 삼촌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두 번의 행방불명 사태를 겪으면서 아버지는 각처의 전화번호들을 수집해 놓았고, 그것을은 이제 종류 별로 분리되고 알파벳 순서로 정리되어 책상 서랍 안에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리스트를 4등분하여 어머니, 아버지, 데이비드 오빠, 그리고 내가 각각 맡았다. 수 차례의 전화 통화 후 우리는 레이 삼촌이 라스베가스에 있는 엑스칼리버 리조트 앤 카지노 385호실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세상에는 가족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가 그만 혼자 길을 잃어버리는 개들이 있다. 보통 그런 개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탈진한 상태로 주인을 찾아 500킬로미터를 낑낑대며 걸어 돌아온다. 삼촌은 그런 종류의 개가 아니었다. 다른 이유로 탈진이야 했을 수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합류'를 제안했다. 데이비드 오빠가 같이 가고 싶어했는데 한창 대학 입학 원서를 작성하던 시기였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떠나는 재미난 가족 여행이 될 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아버지의 제안은 방탕한 생활의 실체를 보여 주려는 방과 후 보충 학습의 일환일 뿐이었다.
아침 5시가 되자 아버지가 내 방 문을 쾅쾅 두드렸다. 우린 6시에 출발 예정이었다. 나는 5시 45분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 쯤 되자 아버지는 나에게 소음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본인이 직접 소란을 피워 대기 시작했다. 귀청이 터질 정도로 방 문을 쿵쿵 치더니 급기야 "당장 그 놈의 궁둥이를 침대에서 떼지 못 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15분 만에 후다닥 옷을 입고 짐을 싼 뒤 아버지가 대고 있는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버디무비에 나오는 액션 스타처럼 움직이는 차 안으로 멋지게 점프해 들어갔다. 안전벨트를 매고 앉으니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곧바로 곯아 떨어져 내리 4시간을 잤다. 잠에서 깬 후에는 라디오 채널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아버지가 "당장 그 짓을 그만 두지 않으면 팔을 꺾어서 그걸로 머리를 내리쳐 버리겠다"고 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다음 세 시간 동안 우리는 회사가 풀어 나가야 할 미해결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레이 삼촌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대충 점심을 때운 우리가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방 문 앞에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지만, 아버지는 385호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 날 아침 내 방 문을 두드렸을 때보다 훨씬 크게 들렸던 것 같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아버지는 호텔 매니저를 불렀다. 아버지에게 설득 당한 매니저가 방문을 열자 온갖 냄새의 향연이 우리를 맞았다. 묵은 담배 냄새, 김 빠진 맥주 냄새, 시큼한 토사물 냄새. 다행히 참지 못한 매니저가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아버지와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사건 현장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방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레이 삼촌의 방탕 생활은 아더 왕의 궁정에게 바치는 오마주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방 안을 둘러보며 레이 삼촌의 현재 행방을 알려 줄 만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탁자에서 널브러진 종이 쪼가리 몇 개를 주워 들었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옷장을 살폈다. 그러더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가 문 밖에서 나를 돌아 보며 말했다.
"가서 삼촌을 찾아 올 테니, 넌 그 동안 이 곳을 깨끗이 치우도록 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치우라니요?"
아버지는 단조롭기가 마치 컴퓨터에 입력된 인조 음성보다 더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우다. 동사. 더러운 것들을 없애고 깨끗한 상태로 되돌린다. 맥주 캔을 비우고 적당한 장소에 깔끔하게 버린다. 쓰레기통을 비운다. 침실 바닥에 있는 토사물들을 처리한다. 동사. 치우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정의가 아니었다.
"아버지, 그런 일은 호텔에서 해 주는 거예요. 청소해 주는 사람들 모르세요?"
나는 나름 훈계조로 말했다. 아버지 역시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문을 닫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알아? 매일 매일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를 보고 얼마나 끔찍한 냄새를 맡고 얼마나 지저분한 것들을 치워야 하는지 알아? 응?"
나는 수사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데 익숙하지가 않았다.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레이 삼촌은 우리들의 쓰레기야." 아버지가 말했다.
"좋건 싫건 간에 우리 건 우리가 처리해야지."
아버지는 이 마지막 문장과 함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조금 후 다시 방을 나갔다. 아버지의 말 속에는 내 인생 속의 쓰레기 역시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는 교훈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열 여섯이었고, 아버지의 교훈이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변화시킬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파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랬다.

#두 번째 사건 : 현관 취침 사건

열 아홉, 나느 그리 변한 게 없었다. 대학에 가는 대신, 나는 부모님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난 스펠만 저택의 맨 꼭대기 층 방으로 이사를 했다. 리모델링이 계약 조건의 일부였다. 나는 여전히 스펠만 사의 자산이면서 스펠만 가의 골칫덩이였다. 지난 3년 동안 내 비행 행각의 리스트는 좀 더 길어졌고, 자정이 넘도록 밖을 쏘다니다가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행동 따윈 이제 부모님 손을 떠난 상태였다.
사건이 발생한 그 날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없다. 다만 그 날 역시 파티가 있었고 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일이 있었다. 현관 계단을 걸어 올라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았는데 이상하게 열쇠가 없었다. 예전엔 안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흔한 일이었다고 이미 말했다) 비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침실로 잠입하거나 뒤 쪽 배수관을 타고 올라가 그나마 땅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데이비드 오빠의 창문을 두드렸었다. 하지만 이제 사다리는 놓여 있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오빠 방의 창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나에게 남은 선택의 여지가 뭐가 있나 곰곰이 생각한 후, 그 꼴로 그 시각에 부모님과 말다툼을 벌이느니 차라리 현관 앞에서 자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 날 아침, 당시 다섯 살이던 레이가 나를 발견하고 어머니에게 나의 위치를 확인시켰다.
"엄마! 이자벨 언니, 밖에서 자요."
부스럭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머니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당혹감과 짜증으로 뒤섞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밤 새도록 밖에서 잔 거야?"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을 걸요? 새벽 세 시에 들어왔으니까."
나는 코트(베개)를 집어 들고 태연하게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 3시간 이상을 내리 잤다. 현관 밖에서 잔 것까지 합하면 거의 일곱 시간이었고, 그건 당시 내 평균 수면 시간을 웃도는 정도였다.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내 근무 시간을 꽉 채웠다.

그 날 밤, 나는 열한 시 조금 넘은 시각에 귀가했다. 이번에는 열쇠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체인이 걸려 있었다. 나는 한두 차례 문을 흔들며 체인의 강도를 시험했다. '나 원 참,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그 때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내 코 앞에서 문을 홱 잡아당기더니 곧이어 쾅 닫았다. 그리고 체인을 풀고 쪼그만 삼각형 만큼 문을 빼꼼 열어 주면서 말했다. "조심해."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시선이 바닥에 있는 뭔가를 향해 있었다. 레이였다. 레이가 슬리핑 백에 들어가 곰 인형을 끌어 안고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얘,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는 거 같니?"
나는 살짝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널 따라 하고 싶댄다."
어머니가 쓴 입맛을 다시듯 말했다.
"두 시간 전에 현관 밖에서 자고 있더라. 20분 동안 달래서 겨우 안으로 들였다. 싫든 좋든 누군가 널 따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 그러니 이제 술 끊어. 집에서 담배도 피우지 말고. 욕도 줄이고. 너무 취해서 네 방까지 못 올라가겠거든 집에 오지 마. 제발 나를 위해 좀 그래 주면 안 되겠니? 아니, 레이를 위해 좀 그래 주면 안 되겠니?"
힘이 빠진 어머니는 뒤돌아 당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 날 밤 딴 사람이 됐다. 나는 레이가 내가 하는 짓을 따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해야 되는 일들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요구 사항은 나를 완벽하게 변신시킬 정도의 파워가 실려 있진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나였고, 여전한 나는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세 번째 사건 : 잃어버린 신발 에피소드

눈 뜨기 전부터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이마 위로 살짝 바람 같은 게 느껴졌고 천장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 때 전화 벨 소리가 들렸고 이어 뭔가 웅얼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 중에서도 남자 소리 같기도 한. 벨 소리의 진원지는 내 휴대폰이었고, 웅얼대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어디선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내가 간밤에 만난 어떤 남자가 내는 소리였다. 휴대폰을 찾기도 전에 남자가 깰 것 같았다. 그러면 어색하게 이 말 저 말이 오고 가야 할 게 분명했고 나로선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눈을 뜨고 침대에 앉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았으니까. 메스꺼움을 겨우 참으면서 방 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방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 더 이상의 언급은 안 하겠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옷더미 속에 휴대폰이 있었다. 나는 소리를 죽였다. 액정 화면에 '데이비드 스펠만'이라고 떠 있었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나는 소곤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오빠는 소곤대지 않았다.
"아, 여기 카펜데?"
나는 그래야 오빠가 내가 소곤대는 이유를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재밌네. 내 사무실에 있어야 할 시각이 15분이나 지났으니 말이야."
오빠가 화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느낌이 영 안 좋은 게, 지난 열두 시간의 기억 뿐만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잊어버린 듯 했다.

나는 자일러 주식회사의 인사부장인 래리 멀버그 씨와 오전 9시에 미팅 약속이 있었다. 자일러는 직원들 인적 조회의 외부 청탁을 고려 중인 제약 회사였다. 데이비드 오빠는 가끔 자기 회사의 고객들을 우리 쪽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가 되긴 했어도, 난 그런 중대한 일을 맡을 만큼의 책임감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버그 씨가 막판에 미팅 제안을 해 온 데다가 다른 날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고 부모님은 딴 사건 때문에 집에 없는 상황이었다. 레이 삼촌에게 부탁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삼촌은 10시 이전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뿐더러 '잃어버린 주말'이 무슨 감기나 피부 발진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이었다.
늘 말썽을 일으키면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인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1년에 10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 줄 거래 건을 그냥 앉아서 날려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부모님도 가만 있지 않을 거고. 나는 무슨 올림픽 경기에나 나온 것처럼 남자의 아파트를 헤치고 다니며 옷을 찾아 입었다. 뛰어 나가면서 회사 소개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신발 한 짝을 미처 찾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쪽 발에만 신겨져 있는 파란색 운동화.
나는 영화 <미드나이트 카우보이>에 나오는 랏소 리조처럼 미션 스트리트를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짰다. 그 계획 속에는 샤워도 하고 신발도 온전히 신은 모습으로 미팅 장소에 등장한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새 신발을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도 없었다. 지갑을 뒤져 보니 전철 값 1달러 밖에 없었다. 나는 누군가 볼 일 본 흔적이 남아 있는 역 계단을 조심 조심 내려갔다. 그리고 오빠에게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셔터 스트리트 311번지 12층 도착. 오빠와 통화를 한 지 30분, 약속 시간보다 15분 늦은 시각이었다. 우선 데이비드 오빠가 핀처, 그레이슨, 스틸맨 앤드 모리스 로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버클리에 들어가 경영학과 영어학 복수 전공으로 차석 졸업했고 스탠퍼드 법대로 행보를 옮겼다. 난 오빠의 자상한 인내심을 고갈시킨 건 법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2학년 때 핀처, 그레이슨 로펌에 의해 스카우트 되었을 때 오빠는, 세상의 모든 가족이 우리 가족 같지는 않고 완벽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는 내가 망가진 게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를 변명하고 덮어 주던 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었다는 말이다.
나는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비상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멀버그 씨를 접견실에서 기다리게 했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래야 만나기 전에 내 모양새를 좀 손 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오빠의 사무실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 쓰면서 미로 같은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오빠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회의실로 집어넣었다.
"그 꼴을 하고 가도 카페에서 아무 말 안 하냐?"
생각했던 것보다 내 행색이 다소 심각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나는 솔직하게 자백하기로 결심했다.
"카페에 안 있었어."
"믿지도 않았어. 그 녀석 이름이 뭐야?"
"기억 안 나. 멀버그 씨는?"
"좀 늦는다고 했어."
"집에 가서 샤워하고 와도 돼?"
"그 정돈 아니야."
오빠의 눈이 아래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신발 한 짝 밖에 안 신었잖아!"
"콜라 좀 없을까?"
다시 메스꺼웠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펩시도 괜찮은데."
오빠는 나의 팔을 잡아 끌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남자 화장실로 데려갔다.
"여긴 안 돼."
"왜?"
"난 여자잖아, 오빠!"
"현재로선 인간인지도 구분이 안 갈 지경이야."
오빠는 나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 하나가 서서 볼 일을 보고 있었다. 오빠가 지퍼를 올리는 그 남자에게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마크 씨. 제가 스물 세 살짜리 여동생에게 세수하는 법을 좀 가르쳐야 해서요."
남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오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거울 쪽으로 내 몸을 틀었다.
"비즈니스 미팅에 이런 꼴로 나타나선 곤란해."
나는 용기를 내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화장 자국이 얼굴 반쯤까지 뭉개져 있었고, 이리 말리고 저리 구부러진 머리는 한 쪽으로 붕 떠 있었다. 셔츠 단추는 짝이 틀렸고 누가 봐도 잘 때 입었던 셔츠였다. 게다가 한 짝 밖에 없는 신발까지.
"씻고 있어. 다시 올 테니까."
나는 여자 화장실로 옮기겠다는 군소리 없이 그냥 거기서 오빠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인간 형상이 나올 때까지 얼굴을 씻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에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화장실 한 칸으로 숨어 들어갔다.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적어도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와 볼 일을 보고 나갔다. 나는 오빠가 예전의 심성을 되찾고 나에게 얼음 넣은 콜라 한 잔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 보았다.
"열어."
목소리를 들어 보니 콜라는 물 건너 갔음이 분명했다. 오빠가 꺼끌꺼끌한 남자 셔츠 하나를 내밀었다. 38사이즈. 초강력 방부제 냄새가 진동했다.
"빨리 입어. 멀버그 씨가 지금 내 사무실에 와 있어."
옷을 입고 나갔더니 여자용 샌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사이즈 7이지?"
"아니, 9."
"비슷하네."
"어디서 난 거야?"
"비서."
"비서한테서 신발을 빌렸으면 옷도 빌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랬겠지. 하지만 네 펑퍼짐한 엉덩이 때문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야."
서둘러 되는 대로 구색을 갖췄다. 패션 감각 제로에 매력 절대 없음이 나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무책임한 인간의 범주에서는 벗어났다. 남자 화장실에서 나와 회의실로 향하면서 오빠가 자기 향수를 나에게 뿌렸다.
"이제 나한테서도 좋은 냄새가 나지?"
"퍽이나 그러겠다."

래리 멀버그 씨도 그다지 감각이 탁월한 스타일은 아니어서, 나의 '자태'에 대해 특별히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비서가 스타킹 발로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마실 걸 좀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콜라를 마실 수 있었다. 미팅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멀버그 씨에게 인적 조사를 외부에 맡김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이점들에 대해 설명했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해 나갈지 전망을 브리핑했다. 나는 가족 친지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비교적 신용을 쉽게 얻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멀버그 씨는 내 얼굴에 남아 있던 초록색 화장 얼룩과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겠노라고 했다.
나는 샌들을 벗어 오빠의 비서에게 돌려 주며 수없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오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다시 쭈글쭈글한 내 셔츠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다가 운동화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맨발로 서서 약간의 동정심을 기대하며 물었다.
"오빠, 택시비 좀 빌려 줄 수 있을까?"
벌써 자기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한 데이비드 오빠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뒷주머니에서 20달러를 꺼내 책상 가장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기 일을 했다.
"어…. 고마워."
나는 돈을 집어 든 후 말했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덧붙였다.
"나중에 갚을게."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두 번 다신' 그런 꼴 하고 다니는 거 안 봤으면 좋겠다."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저 단순한 충고가 아니었다. 오빠가 나가라고 했고 나는 나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 동안 오빠가 맡았던 귀염둥이의 역할이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나를 도와 주는 오빠를 비방하며 돌아다녔지만 오빠는 한 번도 그래 보지 못했다는 것을. 파괴와 반항은 청소년기의 본성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오빠는 내 뒤를 보살피고 내 몫까지 하느라 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했다. 오빠는 대신에 모범생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유일한 결점은 어떻게 하면 완벽해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안다. 죄의 사함을 입은 기적의 변신, 그러니까 보통 복음 전도사가 당신 머리를 철썩 내리칠 때만 이루어진다는 그런 변신은 아주, 정말 아주 많이 희귀한 경우라서 사람들이 웬만해선 믿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변화는 기적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정도는 됐다. 여전히 쭈글쭈글 셔츠를 입고 다니고 여전히 좀 과도한 알코올을 섭취하고 여전히 비적절한 언사를 구사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뒤를 쫓아다니면서 문제를 처리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완전히 손을 싹 씻었다.
처음에는 나의 변한 모습에 대한 불신의 벽이 얼마나 높았던지 까딱하다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뻔 했다. 어머니는 나의 변화가 교활한 속임수라고 확신했고 불신으로 가득 찬 과학자처럼 내 저의를 물었다. 아버지 역시 적어도 2주 동안은 "좋다, 이자벨. 원하는 게 뭐야?" 를 반복했다. 반면 레이 삼촌은 진심으로 걱정을 하며 비타민을 먹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실 처음 몇 주 동안, 다시 태어난 이자벨은 예전의 이자벨보다 훨씬 더 많은 적개심을 드러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신용을 회복하게 되리라 믿고 있었고, 마침내 그렇게 되었을 때는 온 가족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