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을 믿지 말라 - Part.1 수상한 가족의 탄생 <下>

조사실 #.2

내가 하는 일을 둘러싼 신화를 허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립 수사관의 전설은 수십 년 동안 우리 문화 속에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신화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립 수사관에 대한 진실을 말하자면, 사건 해결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는 사건을 탐색할 뿐이다. 우리는 풀어진 끈을 다시 매 준다.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에 대한 증거를 찾아 주는 게 전부다.
반면 스톤 경위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중이다. 범죄 소설에 등장하는 그럴 듯한 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미스터리이긴 한 사건이다.
스톤은 조서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내 눈을 피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고통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경위의 직업적 습관인지가 궁금하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입니까?"
"나흘 전입니다."
"그 때 동생 기분은 어땠나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스톤은 쓸 데 없는 질문만 하고 있다.
"단서를 찾았습니까?"
내가 묻는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늘 하는 말이다.
"스노 씨 가족은요?"
"그들은 별 연관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사를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제 질문에나 대답하십시오."
"제 질문에나 대답을 해 주시죠. 동생이 사흘 동안 행방불명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계시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협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자, 제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러죠."
"그럼 레이에 대한 얘기를 해 보죠."
스톤이 다시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내 생각에도 이제 그럴 타이밍인 것 같다. 너무 오래 끌었다.


Part.1 수상한 가족의 탄생 <下>


레이 스펠만

6주 미숙아로 세상에 나온 레이는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당시 정확히 1.8킬로그램이 나갔다. 정상적인 성장 속도를 회복하는 다른 미숙아들과 달리 레이는 늘 나이에 비해 발육이 더뎠다. 레이가 태어났을 때 이미 14살이던 나는 신생아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최근에 새로 산 램프나 알람 시계 같은 물건인 양, 1년 동안 레이를 '그거'라고 불렀다. 그나마 레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그거 밖으로 좀 내주시겠어요? 나 지금 공부하거든요" 거나 아니면 "이 물건엔 소리 꺼짐 버튼 같은 거 없어요?" 라고 말할 때 뿐이었다. 레이를 물건처럼 대하는 내 행동을 재밌게 여기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무서웠다. 이 아이가 다시 완벽의 화신으로 자라나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곧 레이는 데이비드 오빠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결코 평범한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네 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레이는 내리 20분 동안 나의 하루에 대한 질문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나는 피곤했고, 술도 다 깨지 않아 괴로웠고, 아무튼 4살짜리에게 조사를 받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했다.
"레이, 너 네가 어쩌다 우연히 태어난 거 알아?"
레이는 웃기 시작했다. "정말?"
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웃는 게 레이의 습관이었다.
어머니는 차갑게 나를 째려보면서, 부모의 계획에 따라 태어나는 아이도 있고 안 그런 아이도 있는 거란다 하며 긴급 상황 수습에 나섰다. 레이는 자기가 계획된 아이가 아니라는 것보다 아이를 계획한다는 개념 자체에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황한 설명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여섯 살
레이는 미행하는 데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사흘 밤낮을 끈질기고 끈질기게 졸랐다. 무릎 꿇고 애원했고 두 손 모아 간청했고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이 일에 매달렸다. 결국 부모님이 항복하고 말았다.
여섯 살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당시 레이는 여섯 살이었다. 부모님이 다음 날 피터 영스트롬 미행하는 데 레이도 같이 갈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 분들이 이성을 상실한 게 아닌가 했다. 사실 어머니는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네가 해 봐! 하루 종일 징징대는 소리를 듣고 있어 보라니까! 다시 또 그런 지옥 속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발톱을 뽑히는 고문을 당하는 게 나아!"
아버지 역시 100% 공감하는 모양인지 "발톱 두 개라도 뽑히겠다" 고 거들었다.
그 날 밤 나는 레이에게 무전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벌써 몇 년 째 그 기기의 업그레이드를 미루고 있었다. 오로지 기기의 효능만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그 무전기는 레이의 한 쪽 팔 사이즈였다. 나는 2킬로그램 짜리 그 전자 기기를 레이의 스누피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가방 안에는 과일이 들어간 롤빵, 치즈 크래커, 아동 잡지 두 권도 같이 들어 있었다. 나는 무전기 송화구 부분을 빼 내 레이의 코트 칼라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송화구에 대고 말할 수 있는지, 볼륨은 어떻게 조절하는지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제 말하고 싶을 때 송화구의 버튼만 누르면 되었다.

우리의 임무는 다음 날 새벽 6시 경 목표물의 집 밖에서 시작되었다. 레이는 5시에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5시 15분에서 45분까지 문 앞에 앉아서 나머지 식구들이 떠날 준비가 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뭔가 느끼는 점이 없냐고 했다. 목표물의 주거지에서 세 집 정도 떨어진 장소에 차를 세우고 잠복해 있는 동안, 레이와 나는 다시 한 번 무전기를 점검하고 사용법을 복습했다.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허락 사인 없이 길을 건넜다가는 어린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어머니 역시 언니 말이 옳다고 거듭 강조했다. 레이는 완벽하게 모든 지침을 잘 따랐다. 나 역시 미행의 일반적인 규칙들을 몸소 훌륭하게 제시해 보였다.
효과적으로 미행하는 법에 관한 메뉴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진짜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레이가 이 분야에 타고났다는 인상을 주었을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짐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점심을 나온 사람들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워지자 나는 영스트롬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3미터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홱 돌리고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깨를 스치며 내 곁을 지나갔다. 나직한 "익스큐즈 미" 소리와 함께. 얼굴이 드러난 이상 더 이상의 미행은 불가능했다. 레이는 내 뒤 쪽 10미터 지점, 부모님은 그 바로 뒤 쪽에 있었다. 레이는 어머니 아버지가 보기도 전에 영스트롬이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부모님은 여섯 살 짜리 딸에게 정신을 쏟느라 미행 대상이 자기들 바로 앞에 와 있다는 사실도 알아 채지 못했다. 레이는 이제 미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무전기로 연락을 취해 왔다. "내가 해도 돼요?"
천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영스트롬을 바라보며 레이가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전기 너머로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오케이."
레이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자기보다 60센티는 더 큰 남자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레이는 거리를 내달렸다. 남자가 몽고메리에서 좌회전을 했을 때 어머니의 시야에서 레이가 사라졌다.
"레이, 어디 있니? 레이, 대답해!"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불을 기다리고 있어요." 레이가 대답했다.
"목표물은?" 내가 물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야."
"레이, 엄마 아빠가 갈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 알겠니?"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 아버지가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빌딩이야?" 내가 물었다.
"아주 크고 창문들이 많아."
"주소가 보여? 숫자 말이야. 숫자 같은 게 보여?"
"그렇게 가까이 있지는 않아."
"절대 움직이지 마!" 어머니가 말했다.
"표지판이 보여. 파란 색이야."
"뭐라고 쓰여 있어?" 내가 물었다.
"엠, 오, 엠, 에이."
레이가 천천히 철자를 댔다.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의 어린 여동생은 읽기를 배우기도 전에 미행 업무를 수행 중이었던 것이다.
"레이, 엄마가 갈 테니까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알겠지? 이자벨, 우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 입구에서 만나자."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과 함께 미술관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날 이후 학교를 빼 먹어야 하는 경우이거나 잘 시간이 아니라면, 미행 업무에 레이가 합류하는 것은 우리 가족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여덟 살
레이와 데이비드 오빠는 16살 차이가 났다. 오빠는 레이가 2살 때부터 다른 곳에서 살았고, 우리 집 근처에 살게 되었을 때도 나처럼 늘 모습을 보여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빠는 레이에게 최고의 생일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는 것으로, 그리고 가족 중 유일하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의 존재를 차별화시켰다. 어쩌다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을 때 레이가 오빠에게 늘 궁금해 하던 질문을 던졌다.
"오빠, 오빠는 왜 엄마 아빠 회사에서 일 안 해?"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왜?"
"법은 흥미로운 분야거든."
"재밌어?"
"음,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야."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더 좋지 않아?"
솔직하게 이유를 말했다가는 부모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었기 때문에 오빠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레이, 오빠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 알아?"
"아니." 레이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 시간에 300달러 버는데."
레이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당연히 그 다음은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태도로 물었다.
"누가 주는데?"
"여러 사람들."
"누구? 대 봐." 레이는 자기가 자백을 받아 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건 사업 상 비밀이야."
레이는 이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고민하더니 의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데?"
데이비드 오빠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음…. 협상을 하지." 레이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사라지지 않자 오빠가 물었다.
"'협상'이 뭔지 알아?" 멍한 시선이 레이의 대답이었다.
"협상은 네가 매일 매일 하는 일이야. 예를 들어 가게에 가서 막대 사탕 하나를 사기 위해 점원에게 1달러를 준다고 생각해 봐. 이 경우, 양 측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라는 조건에 합의하고 있는 거야. 너에게는 늘 '이 1달러 짜리 막대 사탕을 50센트에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 그럼 점원은 그래도 좋다거나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겠지. 그게 협상이야. 서로 다른 양 측이 하나의 해결책을 얻어 내는 과정. 이해가 좀 되니?"
"아마도."
"지금 협상을 한 번 해 볼래?"
"응."
데이비드는 협상 주제를 생각했다. "좋아. 난 네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좀 다듬으면 좋겠어."
레이가 마지막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것이 1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까, 누군가에서 이런 요구를 받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늘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 들려 올 뿐이었다. 레이는 자기 머리는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리 삐쭉 저리 삐쭉 들쭉날쭉한 레이의 헤어 스타일은 차마 봐 주기 힘들었고, 더군다나 나름 스타일을 중시 여기는 오빠였으니 동생의 망가진 모습을 바라보는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자신의 스타일에 쏟아지는 반복된 비난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의 동생은 단박에 거절했다.
"내 머리야."
"미용실에 가면 1달러 줄게."
"입 다물면 1달러 주지."
"5달러."
"싫어."
"10달러."
"싫어."
"데이비드, 그만 하렴."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건 오빠의 직업이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15달러."
이번엔 대답하기 전까지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싫다고 했잖아."
상대방이 흔들린다는 것을 감지한 오빠가 마지막 수를 던졌다.
"20달러. 많이 자를 필요도 없어. 그냥 살짝 정리만 하면 되는 거야."
흥미를 보이며 레이가 물었다.
"비용은 누가 대는 거야? 적어도 15달러는 들 거야."
오빠가 어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본인이 시작한 건 본인이 마무리 지어야지."
오빠는 다시 최종 협상을 위해 레이를 바라보았다.
"좋아. 너한테는 20달러를 주고, 15달러는 커트 비용으로 따로 지불하지. 협상 타결이지?"
오빠가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며 물었다. 레이는 악수를 하기 전에 나를 바라보았다.
"레이, 팁을 잊은 것 같은데?" 레이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물었다. "팁?"
"그래. 미용실에서는 팁을 줘야 하거든."
"그래? 오빠, 팁은 어떻게 할 거야?"
오빠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동생에게 교훈을 주려던 나이 많은 오빠에서 냉정한 변호사로 돌변했다.
"다 해서 40달러.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협상은 없던 걸로 하겠어."
레이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데이비드 오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을 알고 있었다.
"받아들여, 레이."
레이는 손을 내밀었고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레이는 손바닥을 내민 채로 돈을 기다렸다. 레이에게 40달러의 미끼를 지불하면서, 데이비드 오빠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일부를 어린 여동생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에 내심 만족하는 것 같았다.
협상 분야의 교훈은 이후 레이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주 깊은 영향이었다. 머리를 다듬는 아주 단순한 행위조차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10살 되던 해 상반기, 레이는 현금 이동,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손을 떠나 자기 손으로 들어오는 현금 거래가 있을 때에만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다급히 소집된 가족 회의에서 부모님과 나는 당장 레이의 나쁜 습관을 끊게 하고 금단 현상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주 후 레이는 머리 감기가 돈 되는 직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열 두 살
중학교 1학년 겨울, 레이에게 적이 생겼다. 이름하여 브랜든 윌러. 그들 사이에 생긴 갈등의 시작은 다소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레이는 나만큼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알기로 브랜든은 그 해 가을 레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왔다. 몇 주 안 지나 그는 반에서 가장 유명한 남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못 하는 운동이 없었고, 모든 과목을 꽉 쥐고 있었고, 피부도 깨끗했다.
레이와 그 남자 아이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제레미 슈벤이 수업 시간에 <허클베리 핀>의 한 단락을 소리 내어 읽게 되었다. 그런데 브랜든이 더듬대는 제레미의 흉내를 내었고 교실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다. 신이 난 브랜든은 자신의 연기 목록에 제레미의 흉내를 추가시켰다. 레이는 이전까지만 해도 브랜든이 어떤 연기에 심취하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브랜든의 연기 대상에는 혀 짧은 빨간 머리 소년은 물론이고 뿔테 안경을 쓴 여자 아이, 사방으로 눈동자를 돌리는 어떤 선생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는 제레미와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사건이 레이를 자극했고 나의 여동생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레이는 첫 번째 공격 방법으로 익명의 편지라는 전형적인 방법을 택했다. 계속해서 제레미를 괴롭히면 호되게 당할 줄 알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점심 시간에 레이는 브랜든이 제레미를 벽 모퉁이로 몰아 세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편지의 진원지가 피해자 자신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레이는 편지는 자기가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브랜든은 레이와 제레미가 사귄다는 소문을 학교에 퍼뜨렸다. 레이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복수의 계획을 짜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다가 어떻게 알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랜든이 12살이 아니라 14살이고 1학년을 벌써 두 번째 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다음 날 브랜든이 또 공부 깨나 하는 것처럼 잘난 척을 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레이는 브랜든이 뭘 좀 아는 것처럼 보이는 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했던 공부를 또 다시 하기 때문이라고 공표해 버렸다. 곧이어 나의 여동생과 열네 살 짜리 남자 아이 사이에 그다지 험하지 않은 말의 전쟁이 시작됐다. 브랜든은 얼마 안 있어 말로 해선 레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기가 아는 유일한 무기를 사용했다. 
나는 레이처럼 정신력 강한 여자애는 만나 보질 못했지만, 레이는 엄마를 닮았고 12살인데도 아직 150센티가 안 됐고, 40킬로도 안 나갔다. 달리기는 곧잘 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벌게진 걸 보니 누가 팔을 잡아 비튼 게 분명했다. 나는 레이에게 언니가 해결해 주면 좋겠냐고 물었고 레이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피구 하다가 다쳤어" 라며 멍든 눈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레이는 계속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괴롭힘을 당하면서 언제까지 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페트라를 태우고 영화를 보러 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페트라가 받았다.
"여보세요? 아니, 페트라 언니야. 이자벨은 옆에 있어. 운전 중. 그래? 자전거는? 알았어. 근처에 있어. 그래, 알았어. 그래."
페트라가 전화를 끊었다.
"학교에 가서 레이 픽업해야겠는데?"
"자전거는 어쨌대?"
"문제가 생겼다는데?"
우린 5분 거리에 있었다. 레이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산산조각 난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오빠가 생일 선물로 사 준 500달러 짜리 산악 자전거였다. 멀지 않은 뒤 쪽에 남자 아이들 몇 명이 서서 레이를 쳐다보며 고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레이는 트렁크를 열라고 하고는 페트라와 함께 부서진 자전거 잔해들을 모아 실었다. 그리고 뒷좌석으로 들어와 앉았다. 교과서 하나를 꺼내어 읽는 척 했다. 눈이 젖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8살 때 철조망에 팔을 베었을 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날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진짜 상처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레이, 언니가 해결하도록 해 줘."
어떻게든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가 모여 있는 남자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브랜든이 실실 웃으며 레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알았어." 레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 밖으로 나왔다.
머지 않아 한 패거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상대를 탐색했다. 그리고 위협적인 표정을 줄곧 유지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내가 너무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몇 명은 알아서 도망쳐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 명이 나의 기도에 응답했다. 남은 건 이제 네 명이었다. 그 중 가장 큰 게 브랜든이었는데, 173센티였던 나는 브랜든보다 적어도 8센티는 더 컸고 10킬로는 더 나갔다. 나는 녀석을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4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결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페트라가 내 마음을 읽고 차 밖으로 나왔다. 페트라는 정문에 기대어 서더니 뒷주머니에서 나이프를 하나 꺼내 그걸로 새끼 손가락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내가 브랜든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나머지 아이들도 집으로 사라질 결심을 했다. 사실 브랜든도 그랬다.
"너는 거기 서!"
나는 나의 목표물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브랜든이 뒤를 돌더니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씩 날렸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녀석을 철사 울타리로 몰았다.
"당장 면상에서 그 바보 같은 표정 없애지 못해!"
실실거리는 미소는 사라졌다. 하지만 태도는 여전했다.
"왜 이래요? 때리시려고?"
"그래, 정확히 봤어. 나는 너보다 크고 너보다 힘도 세. 너보다 화도 더 많이 났고 너보다 싸움도 훨씬 잘 해. 게다가 지원군도 있지. 넌 없어.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지. 누가 더 승산이 있을까?"
"그래서 뭐 하자는 건데요? 우린 그냥 장난을 좀 친 것 뿐이에요."
브랜든이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난이라, 남의 물건 다 망가뜨려 놓는 게 장난이야? 그게 재밌는 놀이야? 남의 눈 멍 들여 놓는 게 재밌다고? 너보다 약한 여자애 괴롭히는 게 재밌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제부터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 볼 수밖에."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울타리로 밀어 붙였다.
"잘못했어요."
"뭐라고?"
"잘못했다고요."
"내 말 잘 들어. 내 동생이건 내 동생 물건이건 지금부터 손 끝 하나 댔다간, 아니 더러운 눈초리로 쳐다 보기만 해도, 넌 그 날로 끝장이야. 알아 들었어?"
브랜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해!"
"잘 알겠습니다."
나는 멱살을 풀고 그 녀석에게 꺼지라고 했다. 브랜든은 사라졌다.

그것으로 상황 종결이었으면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브랜든은 집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고해 바쳤고 그 아버지는 우리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나를 폭행 및 협박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레이와 내가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브랜든의 아버지로부터 첫 번째 협박 전화를 받은 후였다. 잔뜩 굳은 안색을 보고 있으니 허송세월했던 내 어린 시절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예전의 이자벨로 다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조용히 얘기하자면서 레이에게는 가서 텔레비전을 보라고 했다. 레이는 물론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잠가 놓은 문 밖에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자벨,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절 믿으세요. 그 상황에선 아버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열두 살 짜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게 정상이야?"
"일단 걘 열네 살이고요…."
"어린 애야."
"죽이겠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끝장이라고 했을 뿐이에요. 그건 엄연히 다른 거잖아요."
"너 도대체 왜 이러니!"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이렇게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
그 때 레이가 머리로 문을 쾅쾅 박으며 고함을 질러 댔다. "언니 괴롭히지 마세요!"
어머니가 외쳤다. "레이, 가서 텔레비전 보라니까!"
레이는 다시 한 번 잠긴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번에는 소리가 제법 큰 것이 자기 몸을 문에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싫어요! 언니 괴롭히지 마요! 문 열어 주세요!"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레이를 안으로 들였다. 레이는 나를 열심히 변호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다음부터 이런 일은 우리에게 맡기도록 해, 알겠니?"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머니는 세상에 못 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비록 도덕적으로 약간 망설여지는 일이라 해도. 고소 건은 어머니가 맡았다. 엑스레이 같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아킬레스 건을 찾아 내는 건 어머니 전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여과되지 않고 물려 받은 유전적 특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어머니는 윌러 씨의 민사 소송 건을 조사해 수많은 성추행 건을 찾아냈다. 호기심이 발동한 어머니는 윌러 씨의 꼬리를 밟았다. 그리고 정부와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하고 증거가 될 만한 사진을 찍은 후 출근하는 그를 커피 숍으로 불러 들였다. 어머니는 고소를 취하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윌러 씨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사진들을 보여 주며 다시 한 번 당신이 원하는 바를 밝혔다. 그리고 다음 주 안으로 레이의 자전거가 원상 복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윌러 씨는 어머니에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고소는 취하되었고, 금요일엔 새 자전거가 배달되었다.

레이는 그 날 내가 자신을 위해 한 일들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의 신의 관념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흔히 기대하는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레이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선 촉촉하고 달짝지근한 연하장 감정은 발견할 수 없다. 레이는 사실을 언급할 뿐이고, 솟구치는 감성 개발이 되는 쪽은 오히려 당신이다. 레이가 우리 부모님을, 그리고 가끔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전략일 뿐이다. 자기 계획과 맞지 않으면 기쁨을 주는 아이 역할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잘 훈련된 견공처럼 말을 잘 듣는 때가 있긴 하다.

#납치를 피하는 방법
레이 나이 열 세 살. 지방 방송에서 마치 일기 예보 방송을 하는 것처럼 정기적으로 아이들 유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는 다른 해보다 유괴 사건이 많이 줄어든 해였지만, 매스컴에서 하도 야단 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취학 연령 아동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경계 경보가 발동됐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다. 은퇴한 FBI 요원 찰스 매닝이 여섯 시 뉴스에 나왔다. 그는 유괴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비극을 막기 위한 예방 지침을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걸 다 받아 적으셨고 결국 우리가 시행 중이지 않고 있던 유일한 한 가지 지침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반복을 피하라. 늘 움직여 상대방을 교란시켜라.'
부모님은 레이에게 반복적인 습관을 다 버리라고 했고, 매일 매일 하는 일들의 순서를 매일 매일 바꾸라고 했다.
비교를 위해 레이의 이전 아침 일과를 소개하겠다. 아침 8시 침대에서 비틀비틀 기어 나온다. 양치질을 한다. 문 밖으로 나가면서 팝 타르트 한 개를 집어 물고 자전거를 타고 등교한다. 정확히 8시 30분에는 교실에 앉아 있다. 주말에는 10시까지 잔 후, 1시간을 들여 설탕이 듬뿍 들어간 아침거리를 준비한다.
레이에게 새로운 지침이 떨어진 건 일요일 밤이었고 다음 날 아침 레이는 반복적이지 않은 일과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월요일]
레이는 6시에 일어난다. 20분 동안 조깅을 한 후 샤워를 한다. 레이는 조깅을 좋아하지 않는다. 샤워도 마찬가지고. 그런 다음 칼슘이 강화된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신 후 콘플레이크를 먹는다. 학교까진 걸어간다. 평소보다 35분 일찍 학교에 도착한다.

[화요일]
아침 7시 30분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레이는 버튼을 누른다. 45분이 지난 후 레이는 침대에서 부엌까지 비틀비틀 걸어 내려와 초콜릿 팬케이크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거주하는 곳에도 갖출 건 다 갖춘 부엌이 있지만, 나는 아침엔 대개 아랫층으로 내려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는다. 나는 레이의 행동을 관찰한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레이, 8시 25분이야."
"알아."
"수업 8시 30분에 시작하지 않아?"
"오늘은 지각하려고."
레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러면서 초콜릿 밀가루 반죽을 팬케이크 번철에 담기 시작했다.

[수요일]
나는 8시 10분에 부엌으로 내려온다. 레이는 나에게 커피를 따라 주며 신문을 건넨다.
"빨리 읽어. 오늘은 나 학교에 데려다 주는 날이니까."
"너무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레이가 사과를 한 입 먹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사과 먹는 레이의 모습을 본 것이 언제던가. 그나마 온전한 사과도 아니었고 아이 사진이 붙여진 작은 그릇에 담긴 사과 퓨레였다. 사실 우리가 섭취하는 일반적인 양식들은 레이의 음식 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세계의 주인공은 아이스크림, 캔디, 치즈 맛 스낵들과 육포 뿐이었다. 나는 레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소화시키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기뻐, 레이가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내 차(1995년형 뷰익 스카이락)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는데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목요일]
7시 45분. 아버지가 계단 아래서 소리친다.
"레이, 태워다 줄까?"
"네!"
"그럼 서둘러!"
레이가 허둥지둥 뛰어나와 난간으로 점프한다. 그리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온다. 같이 밖으로 나가면서 아버지가 말한다.
"그런 행동 하지 말라고 했잖아, 레이?"
"서두르라면서요."
차를 타면서 아버지가 레이에게 팝 타르트 하나를 던져 준다.

[금요일]
나는 8시 5분에 부엌으로 들어간다. 레이가 우유(두 잔 째)를 마시며 앉아 있다. 피넛 버터 바나나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오늘은 학교에 어떻게 갈 거야?"
나는 내가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는다.
"데이비드 오빠가 데려다 줄 거야."
"그래 준대?" "협상했어."
다른 질문은 하지 않는다. 나는 커피를 따르고 자리에 앉는다.
"언니, 벌써 닷새 째야. 커피 마시고 신문 읽는 거."
"걱정 마. 난 유괴 당할 염려 없으니까."
"처음부터 자기가 유괴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의 증거들
내가 지금 이어 붙이고 있는 불규칙한 연속선상의 사건들은 다양한 조사 방법의 결과물이다. 직접적인 접촉, 간접적인 관찰, 사건 이후 이어진 질문들, 녹음 기록, 인터뷰, 사진, 그리고 상황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의 엿듣기.
내가 제시하고 있는 증거물들이 완벽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이것들은 내 자신이 만드는 다큐멘터리 기록물의 소재일 뿐이다. 사실로 제시된 각각의 사건들은 믿을 만한 것들이지만, 그 안의 이미지들은 내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내가 제공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톤 경위는 과거의 일들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내가 증거랍시고 말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쓸 데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는 것만으론 충분치가 않다.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다른 가족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내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년 8개월 전

나의 여동생이 사라지기 1년 8개월 전. 5월의 세 번째 주고 나는 6번째 남자친구와 석 달 째 접어들고 있다.

#여섯 번째 남자친구
이름 : 숀 라이언
직업 : 노브 힐 에어리어에 위치한, 나름 꾸민 주점 '레드 룸' 바텐더
취미 : 대망에 찬 소설가. 불행하게도 소설 쓰기가 유일한 취미는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지난 닷새 동안 메이슨 워너를 따라붙고 있다. 워너는 노스 비치에서 바를 경영하는 잘 나가는 서른 여덟 살의 사장이다. 우리를 고용한 것은 그의 투자자들 중 한 명인데, 워너가 사업 수익들을 슬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런 일은 공인회계사에 맡기는 게 더 나았겠지만, 조용히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의뢰인이 우리를 택했다. 워너는 요즘 영화에서 각광 받는 부드러운 매력남 스타일이고 옷도 잘 입는다. 이번 사건을 잘 맡았다 싶은 게 워너는 계속 움직여 다닌다. 안 그랬으면 차 속에 틀어박혀 어머니가 "집에 저런 남자 좀 데려오면 안 되니?" 하는 소리를 여덟 시간 동안 듣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워너의 뒤를 쫓아 샌섬 스트리트에 있는 사무실 건물로 들어간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선글라스까지 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기로 결심한다. 다행히 사람들이 아주 많다. 나는 먼저 타서 12층(12층 건물이었다) 버튼을 누른 후 안 쪽으로 가서 선다. 메이슨이 7층에서 내리자 같이 내리면서 모자와 안경을 벗는다. 그리고 뒤에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린다. 워너는 모퉁이를 돌아 정신분석의 캐서린 쇼엔버그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나는 로비로 돌아와 그를 기다린다. 무전기를 켜고 어머니에게 약 50분 동안은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한다. 어머니는 그 동안 커피나 한 잔 마시겠다고 한다. 나는 가죽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5분 후 워너가 나타난다. 밖으로 나가고 있다. 나는 얼른 무전기 연락을 취한다.
"목표물이 움직이고 있어요."
"쫓아. 나는 아직 커피숍이야." 어머니가 말한다.
평소였다면 워너를 한참 앞서 가게 하고 어머니가 차로 뒤를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준비될 때까지 내가 계속 목표물을 눈으로 쫓아야 한다. 나는 신문을 내려 놓고 워너의 뒤를 따른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워너가 뒤를 돌더니 내 쪽으로 곧장 걸어온다. 나는 핸드백을 뒤져 담배 한 갑을 꺼낸다. 담배 끊은 지는 오래 됐지만, 우리 일을 하려면 담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성냥을 찾는 척 하며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워너가 내 코 앞에 서더니 불을 붙여 준다.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워너는 매력적인 미소를 날리고 유유자적 사라진다.
깜빡 잊었다. 이런 남자들은 절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 법이지.

그 날 밤, 여섯 번째 남자친구와 나는 웨스트 포털에 있는 '철학자 클럽'에서 한 잔 하는 중이다. 주인은 나이 많은 노인네다. 지나치게 깔끔한 편이지만, 여기저기 보이는 목재 패널과 오래 된 스포츠 포스터들을 보면 이 곳이 샌프란시스코 엘리트들의 구미를 끄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페트라의 생일 축하 파티*를 마친 후 L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철학자 클럽'이라는 상호 옆에 마티니 잔 하나가 그려져 있는 간판을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거기에 마음이 끌려 페트라와 나는 그 곳으로 들어갔고 밤 새도록 그 곳에 죽치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바텐더 밀로가 아낌 없이 내 주는 땅콩과 팝콘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철학자 클럽'에 첫 발을 디딘 건, 나의 6번째 남자친구와 그 날 거기에 있기 6년 전, 지금으로부터는 7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신의를 저 버리지 않는 충실한 단골 고객이었다. 하지만 그 날 밤 나의 여섯 번째 남자친구와 내가 그 바에 앉아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여섯 번째 남자친구가 묻는다.
"망쳤어."
"들켰어?"
"응."
"절대 안 들킨다고 한 것 같은데."
"거의 안 들켜. 내가 거의 안 들킨다고 하지 않았나?"
밀로가 우리 쪽으로 오더니 내 잔에 위스키를 다시 채워 준다. 밀로를 처음 봤을 당시 그는 50대 중반이었고(산수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말하자면) 지금은 60대 초반이다. 이탈리아계이고 키는 약 170센티미터,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갈색 머리. 늘 주름 잡힌 바지에다 반팔 옥스퍼드 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다. 밀로의 패션에서 그나마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최신 스포츠화이다. 나와 밀로가 그냥 바텐더와 손님 사이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가 십상일 텐데, 아니다. 나와 이 사람은 지난 7년 간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씩은 본 사이다. 나는 그를 나의 베스트 프렌드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섯 번째 남자친구가 테이블 바를 툭툭 치며 잔을 가리켰다. 밀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굼벵이 같은 속도로 잔을 채워 준다. 여섯 번째는 바 위에 돈을 툭 놓는다.
"난 물 좀 빼고 올게."
여섯 번째 남자친구가 바 뒤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제껏 지어 보이던 가식적인 웃음을 확 지우며 밀로가 내게 말한다.
"이 친군 왠지 느낌이 안 좋아."
난 별 생각이 없다. 21살 이후로 내가 사귄 모든 남자친구들에 대해 밀로가 늘 하는 말이다.
"그런 얘긴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네 인생이잖아."
과연 그럴까? 가끔은 내 인생이 내 인생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 한 번 째 생일 기념으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미친 척하고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 놀러 가자" 고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무실에서 주초에 있었던 미행 업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어머니는 제이크 핸드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타 연주자 겸 포르노숍 점원인 24살 짜리 청년인데, 미행 업무가 많을 때 가끔 일을 시킨다. 아버지와 레이 삼촌은 샌프란시스코만 서안에 있는 팰러 알토에 일이 생겨 사무실을 비웠다. 시계가 8시를 알리자 제이크와 그의 문신이 발걸음도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스펠만 부인, 시계를 보세요."
어머니는 시계를 힐끗 본 후 말한다.
"딱 맞춰 왔네. 뽀뽀라도 해 줘야겠어."
제이크는 어머니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뺨을 쑥 내민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살짝 입을 대 준다. 그러더니 킁킁거리며 말한다.
"샤워했어, 제이크?"
"오직 부인을 위해서요."
제이크는 남 모르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데, 샤워 등 주로 자기 몸을 가꾸는 행동을 통해서 그 마음을 드러낸다. 사실 어머니를 아는 대부분의 남자들의 사정이 그렇다. 푸른 눈과 상앗빛 피부만이었다면 그저 그랬을 텐데 긴 진갈색 머리칼이 결정적이었다. 어머니 눈가의 주름이 세월을 말해 주고 있지만, 30년이라는 나이 차는 제이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어머니 역시 진심으로 자기에게 헌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다. 가끔은 둘이 같이 8시간 동안 차에 앉아 있으면 대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자벨, 일 끝나면 오빠한테 좀 갔다 와라."
"왜요?"
"크레이머 건 2만 달러, 아직 못 받았잖아."
"가 봐야 늘 그 말이 그 말일 텐데요, 뭘. 자기네도 돈을 받아야 우리한테 주겠다잖아요."
"벌써 석 달이나 지났어. 그 일 하느라 6천 달러나 썼는데 아직 원금 회수도 못 했다는 게 말이 돼? 여기저기 나갈 돈이 지금 한두 푼이 아니야."
아버지는 나에게 월급을 건네 줄 때마다(가끔은 그냥 당신 손에 든 채로) 사립 수사관 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즐겨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인생살이에 꼭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장소 임대료, 사무실 집기 유지비, 공공 요금 같은 것들이야 무슨 사업이든 돌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야 하는 경비들이다. 하지만 사립 수사관 고용 비용이야 써도 안 써도 그럭저럭 살 수 있지 않은가. 부모님이 이 사업으로 남들에게 기죽지 않을 만큼 벌고 있다곤 해도 자금 유통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들이 간혹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경우란 대개는 데이비드 오빠네 회사 일을 맡을 때다.
"직접 가서 말해 보시든가요. 아들이잖아요. 자식으로서의 죄의식 같은 거 자극해 보세요."
"죄의식보다는 폭력에 좀 더 반응하지 않겠니? 필요하면 손을 좀 봐 줘도 좋아. 아무튼 돈 받기 전에 절대 사무실 밖으로 나와선 안 돼, 알아 들었니?"
어머니는 가방 지퍼를 잠그고 문을 향해 걸어간다. 그 뒤를 제이크가 따르고 있다. 현관 문을 나서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 말한다.
"아 참, 데이비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나는 1시 쯤 오빠 사무실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공짜로 점심이나 먹어 볼까 하는 심산이다.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비서 아가씨 린다가 레이가 먼저 와 있다고 한다. 오빠를 거쳐 간 모든 비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린다 역시 언젠가 오빠가 자기 애정에 대한 보답을 해 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우두머리 수컷들이 그러하듯, 나의 오빠 역시 일부일처제는 마흔 넘어서나 생각해 볼까 말까 한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실 굳이 애써 데이비드 오빠의 결점을 찾으라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오빠는 여자들을 애끓게 만드는 무정한 남자 대표 선수다.
나는 공격 태세를 취하며 오빠 사무실로 들어간다.
"넌 여기서 뭐 해?" 의심스런 눈초리로 레이를 바라보며 묻는다.
"잠시 방문." 레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한다.
"학교는 어떡하고?"
"오전 수업 하는 날이야."
"언니한테도 증거를 보여 줘." 데이비드 오빠가 말한다.
레이는 나에게 쭈글쭈글한 종이 쪼가리 하나를 내민다. 가정통신문이다. 데이비드 오빠가 증거 자료를 요구할 거라고 예상했던 게다. 레이가 학교를 빼먹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린 한 핏줄이기 때문에 내가 의심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 난 갈게. 다음 금요일에 봐, 오빠. 집에서 봐, 언니."
레이가 가고 나자, 나는 데이비드 오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무슨 소리야, 다음 금요일이라니?"
"매 주 금요일에 사무실에 들르거든."
"왜?"
"대갠 그냥이지."
"아니면?"
"용돈을 달라고 하더라고."
"오빠, 레이도 일 해. 시간 당 10달러 씩 받는다고. 더 무슨 돈이 필요해? 이런 지 얼마나 됐어?"
"한 1년 된 거 같은데?"
"매 주 돈을 줬단 말이야?"
"아마도."
"얼마나?"
"보통 10달러 정도? 어떤 땐 20달러도 주고. 요샌 잔돈 갖고 다니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올해 500달러를 레이한테 줬단 말이야?"
"이자벨, 넌 왜 온 거야?"
"돈 문제야."
"물론 그렇겠지. 수금을 오셨다?"
"손가락 한두 개를 부러뜨릴 수도 있어. 갈비뼈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고. 하지만 특별히 잘 생긴 얼굴엔 손 대지 말라고 어머니가 그러시더군, 2만 달러야. 빨리 줘."
"우리 방식 알잖아. 받아야 줄 거 아냐. 가계 수표라도 써 줘?"
"그런 건 안 받아."
"어쩌라는 거야?"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소파에 몸을 묻고 윗사람을 만나게 해 주기 전까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으른다. 데이비드 오빠는 한숨을 내쉬더니 사무실을 나간다. 10분 후 짐 헌터가 들어온다. 헌터는 5년 차 사기 전문 변호사다. 잘 생긴 42살의 이혼남. 소녀 같은 헤어 스타일.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타입. 돈을 받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시선에 대거리를 해 주어야 한다.
나의 협박 전략이 통한 것 같다. 헌터가 경리 직원에게 말해서 만 달러 짜리 수표를 끊어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가 말한다.
"다음 금요일에 저와 저녁을 해야 합니다."
방심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안 그러면 이번 주 급료는 없다. 게다가 내가 변호사와의 데이트 기회도 차 버리고 만 달러도 날려 버린 걸 어머니가 알게 되면 뒷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8시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헌터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데이비드 오빠가 픽 웃는다.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오빠의 계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내가 오빠에게서 돈을 받아 내려고 장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그 시각, 어머니는 워너의 바 앞에 차를 세우고 앉아 제이크의 시시덕거리는 질문들을 받아 넘기고 있다.
"스펠만 부인, 예전에도 지금처럼 이렇게 섹시하셨나요?"
"제이크, 그만 해."
워너가 움직인다. 자기 차에 올라 타더니 라킨 스트리트를 따라 내려간다. 워너는 라킨과 기어리 사이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뉴 센츄리 시어터로 들어간다. 스트립 댄스 클럽이다. 제이크가 안전벨트를 풀더니 어머니에게 몸을 돌리며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꿈도 꾸지 마."
어머니가 벨트를 풀고 밴에서 내린다.
클럽 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어머니는 소다수를 주문한다. 워너는 무대 쇼에는 별 관심이 없고, 검은 색 터틀 넥과 고가의 청바지를 입은 회색 머리 주인이 넘겨 준 서류만 검토하는 중이다. 여기저기 적갈색 벨벳의 물결 사이로 손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워너가 아니다. 앞 쪽 자리, 마치 광신도처럼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진갈색 머리 스트렙 댄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숀 라이언, 얼마 못 가 나의 여섯 번째 '전' 남자친구가 될 사건 당시 내 남자친구다. 어머니는 보아야 할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다 보며 살아 온 분이다. 딸의 남자친구가 스트립 댄스 클럽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노발대발 사건을 일으키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클럽 종업원이 죄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워너는 주인과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샤프트>의 사운드 트랙 같은 주변 소음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워너가 움직이자 어머니도 그 뒤를 따라 클럽을 나온다. 그리고 제이크와 함께 일을 마친다.
다음 날 어머니는 워너 건을 아버지와 레이 삼촌에게 떠맡기고 뉴 센츄리 시어터로 다시 향한다. 이번에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까지 꼈다. 어머니는 설마 다시 그 곳에서 숀을 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숀이 앉아 있다. 이틀 연속 스트립 댄스 클럽 출입이라는 정황에 의심을 품게 된 어머니는 그 다음 주에도 계속해서 그를 주시한다. 클럽 2회 추가 방문, 근처 수많은 섹스 숍 탐방. 밤에는 어머니도 쉰다. 숀은 나랑 있거나 일을 할 테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숀의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함정에 빠진다. 그 질문을 하면서 어머니는 별자리 운세를 보고 있고, 이미 가족도 한 차례 다, 가끔씩 고용하는 제이크 같은 인물들의 운세까지 다 훑고 난 후기 때문이다. 그냥 평범하게 운세나 보자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정말 새끼 손톱 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숀과 내가 (다시 말하건대 나로서는 약간 기록적인 경우로) 사귄 지 석 달이 넘어가고 있는지라 어머니가 조금 많은 관심을 보이는군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해 볼 뿐이다. 그러나 선물이나 사 주자고 생일을 물은 게 아니다. 사회 보장 번호를 알아 내고 신용 조회를 하기 위한 기본 정보 조사였던 것을. 신용 카드 회사에 심어 놓은 정보원을 통해 어머니는 숀의 최근 거래 내역을 조사한다. 이 행동의 부도덕성과 비합법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머니에겐 반드시 알아 내야 할 일이 있다.

목요일 아침, 조사가 끝났다는 결론을 내린 어머니가 나를 사무실로 불러 브리핑을 시작한다.
"이자벨, 네 남자친구는 포르노 중독이다."
"네? 하느님 맙소사!"
어머니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진 기다려 주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셨는데요?"
어머니는 그 간 숀의 행각들을 조목 조목 나열한 뒤 신용 카드 영수증을 비롯하여 비디오점의 대여 목록을 들이민다. 나는 제목을 훑어 본다. 크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목들이 아…. 가관이다.
"이자벨, 가끔씩 성인 비디오를 보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 놈은 거의 강박증이야."
"저한테 뭘 바라시는 거예요?"
"내가 꼭 그 녀석하고 헤어지란 소리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계속 사귀다간 '내가 직접 스트립 댄스 추는 법ㄴ을 배워야지, 안 되겠어.' 이런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는 거지."
나는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예상대로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도 알고 나도 아는 건, 어머니의 증거 해석 능력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니라는 거였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내가 직접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 날 밤 나는 나의 여섯 번째 남자친구가 곯아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웬만하게 주도면밀한 남자가 아니면, 남자에 대해 뭘 알아 내기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컴퓨터 조사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숀과 헤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린 공통점이 없는 거 같아."

#세 번째 변호사
금요일 저녁, 사기 전문 변호사와의 데이트 시각 한 시간 전, 오빠가 전화를 걸어 와 품행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을 거라고 했다. 변호사와 부모님 상견례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밖에서 기다리려고 나가고 있는데, 어머니가 창문 밖으로 외쳤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줘, 이자벨. 알겠지?" 우리 가족의 삶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모순이다.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이건 아니야.' 헌터는 첫 데이트에 하이힐과 드레스 차림으로 나오는 여자들을 만나는 남자다. 나는 하이힐을 신고는 잘 걷지도 못할 뿐더러 내 다리를 보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 날 아침 여섯 번째 남자친구와 헤어진 참이었다. 숀과의 관계에 지독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끝이 그런 식으로 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는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상태였다. 세 번째 변호사와 진짜로 로맨틱한 관계를 맺어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성을 탐색할 기회인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래의 남자친구들의 잠재적 포르노 중독 성향 정도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질문 리스트를 만들었고 그것을 헌터에게 적용해 보았다.

1. 영화 좋아하세요?
2. 플롯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
3. 대략 한 달에 비디오는 몇 편이나 빌려 보세요?
4. 무인도에 버려진다면 다음 중 무엇을 가지고 가실 건가요?
　1) 셰익스피어 전집
　2) 레드 제플린 박스 세트
　3) <데비> 시리즈
5.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1) 메릴 스트립
　2) 니콜 키드먼
　3) 제나 제임슨
6. 가장 선호하는 영화 장르는?
　1) 액션, 어드벤쳐
　2) 드라마
　3) 로맨틱 코미디
　4) 포르노

데이비드 오빠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걸어 난리를 쳤다. 전화로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을 먹는데, 어머니가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냐며 예절 학교를 운운했다. 아버지는 저녁 메뉴는 뭐였냐고 물었다.

#복습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점검 : 일곱 번째 남자친구
이름 : 자크 그린버그
나이 : 29
직업 : 웹 디자인 회사 소유주
취미 : 축구
기간 : 한 달 반
헤어질 때 한 말 : "내 동생 신용 조회를 했단 말이야?"

내 직업은 비록 이래도, 가 아니라 내가 이런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해서 늘 깊은 경외심을 가져 왔고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나 (즉, 내 일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선) 그것을 존중하려고 애 써 왔다. 그래 왔다. 정말 그랬다. 여섯 번째 남자친구 전까진. 어머니가 나의 사생활을 침범하여 내가 직접 알아 냈어야 했을 비밀을 나에게 밝히기 전까진. 숀 이후 나는 내 자신의 본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 15년 경험이 인간 행동에 대해 나에게 가르쳐 준 바가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겨 났다.
3주 후 페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번에 새 고객이 하나 생겼는데 자꾸만 나와 엮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페트라는 로워 헤이트에 있는 뷰티 살롱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뷰티 스쿨이 미래에 여섯 자리 숫자의 월급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건만 페트라의 경우가 꼭 그런 경우였다. 샌프란시스코의 돈 많은 메트로섹슈얼들을 유혹하는 가위와 몸매로 페트라는 두당 백 달러 이상씩을 벌었다. 고객의 80%는 남자였는데, 그 중 페트라를 찾는 반복적인 행위가 단순히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라는 "가죽 바지가 알아서 제 값을 치르는 거지 뭐" 라고 말하곤 했다. 가죽 바지는 사실 페트라의 융자금을 갚아 주고 있는 셈이었다.
페트라는 내 데이트 상대(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포르노 중독이 아닌 상대)를 찾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때 페트라의 눈에 자크 그린버그가 들어 온 것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살롱이 한산할 무렵 우연히 들어온 손님이었다.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머리도 정기적으로 만져 주는 남자. 페트라는 내가 그 정보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할지 알지도 못한 채 나에게 자크의 집 주소와 생년월일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사회 보장 번호를 입수했고 신용 상태와 전과 기록(캘리포니아 주 내에서만)을 조회했으며 자산 정보를 알아 냈다. 서류 상으론 깨끗하고 완벽했다. 내친 김에 그의 부모와 남자 형제 둘과 누나 하나까지 조사해 봤다. 1996년에 기록된 막내 남동생의 파산법 관련 사건을 제외하곤, 가족 전체가 무슨 1950년대 시트콤 같았다. 하지만 내가 데이트를 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자크에게 텔레비전이 없다는 얘기를 페트라가 들려 준 후였다. 간단한 공식이 나오지 않는가. 노 텔레비전＝노 포르노. 잡지도 있고 인터넷도 있겠지만, 진짜 광들은 영화를 탐닉한다.

처음엔 많이 지루했다. 아마 내가 뻔히 다 아는 얘기들을 그가 줄줄이 읊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은 카르멜에서 빵집을 하고 누나는 1.8명의 아이(임신 중이었다)를 둔 가정주부이고 형은 오리건 주 외젠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을 하는데 잘 되는 편이고 남동생은 포틀랜드에서 잘 안 되는 중고 책방을 운영한다는. 모든 정황 증거로 볼 때, 일곱 번째 남자친구는 길게 줄을 서 있는 보이 스카우트들(가끔 파산 배지를 다는)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무료 음료가 제공되는 시간에 와인 쿨러를 주문하는 용기를 가진 남자와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그의 다소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첫 데이트 날 우리는 카스트로 극장에서 <필라델피아 이야기>를 봤다. 카푸치노를 마셨고 그 다음에는 돌로레스 공원을 거닐었는데, 적지 않은 어린 녀석들이 우리에게 마약을 하겠냐고 물었다. 자크는 아이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괜찮다" 라고 점잖게 대답했다. 마치 레몬에이드 파는 간이 판매점에서 제품 구매 거절하듯이. 두 번째 데이트의 순서는 게임장(주로 스키볼), 아이스크림, 짧은 축구 교습이었는데 결국 자크는 정강이에 얼음을 대고 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연신 미안하다고 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어딘가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를 닮은 듯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어쨌든 지속되는 중이었다. 내 입 밖으로 자크 남동생의 부도 건(묻지 마시라)이 나와 버렸는데 자크 본인은 정작 자기는 그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페트라는 내가 '네 힘을 선한 일에만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 전엔' 다시는 누굴 엮어 주지 않겠다고 했다. 자크를 만난 후 불현듯 딸의 결혼식에 대한 백일몽을 꾸기 시작했던 어머니는 사흘 동안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라인 데이트 비용을 대 주겠다고 하더니, 가능성이 있겠냐며 혼자 웃었다. 나는 그다지 예의 바르지 않게 거절했다.


여름 캠프

지난 가을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 또 다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클라이드 선생이 중2 영어 작문 숙제로 '여름 방학에 한 일'을 500자로 써 오라고 했다. 레이(이제 12살 반이 되었다)는 작문을 하는 대신 온갖 예민한 정보가 가득 들어 있는 머크 투자사 감시 보고서 복사본을 제출했다. 레이의 숙세를 받아 본 클라이드 선생은 당장에 부모님을 학교에 오시라 했고 돌아오는 여름에는 반드시 캠프에 보낼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돌아온 봄, 레이가 13살이 되었을 때 클라이드 선생은 또 다시 부모님을 학교에 오시라 했고, 안 그러면 구속이라도 시킬 듯한 태세로 지난 가을에 했던 제안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어머니는 수영 강습과 무용 교실 같은 것으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는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클라이드 선생은 레이에겐 또래들끼리의 사회화 과정과 그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에게 걸맞는 행동이 필요하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캠프 활동과 관련된 모든 준비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시켜 나갔다. 캠프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쉬쉬했다. 어머니는 장소를 정하고 비용을 지급하고 준비물을 사 들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밀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캠프 출발 일주일 전까지는 레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나의 여동생에게 이 소식을 전한 것은 토요일 오전 7시 15분이었다. 내가 정확하게 이 시각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레이의 울부짖음이 내 달콤한 아침 잠을 망쳐 놨기 때문이다. 레이는 아침 내내 절망에 가득 찬 항의 시위를 하더니 오후에는 급기야 캠프 반대 캠페인에 동조해 줄 협력자를 찾기 위해 인척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레이는 '아동 보호 센터'에 전화를 걸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물론 어느 시점이 되자 나에게도 협조 요청을 해 왔다. 나는 "데이비드 오빠도 캠프에 갔었어. 나도 갔었고. 그러니까 너도 가야지"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언니가 캠프에 간 건 법원 명령*이 그렇게 떨어졌기 때문이잖아!" 라고 덤볐다.

*이것은 사실이다. 15번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페트라와 나는 몰래 자동차 시동 거는 법을 배워 보기로 결심했다, 도서관에서 <자동차 절도 방지>라는 책을 빌렸는데 놀랍게도 자동차 훔치는 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손에 들고) 창문이 깨졌거나 문이 열려 있는 자동차가 어디 없나 하며 여기저기 어슬렁거렸다. 자정이 지나서 우리는 경찰에 붙잡혔는데, 자동차 주인이 창문 밖으로 내다보고 힐끗힐끗 손전등(책을 읽자면 필요했다) 빛이 아른거리자 당장에 경찰에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레이 손에 코코아 음료 한 상자를 들려 주며 방에 가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좀 가지라고 했다. 나에게는 가게로 가서 미끼로 쓸 과자 류를 좀 더 사 오라고 했다. 새로 나온 과자가 있어서 이걸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자벨, '철학자 클럽'의 밀로야."
"무슨 일 있어요?"
"아니 큰 일은 아니고, 네 여동생이 지금 바에 와 있는데 나가게 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와서 좀 데려가야겠는데."
"제 여동생이라고요?"
"응. 레이, 맞지?"
"금방 갈게요."
나는 20분 후 밀로의 가게에 도착했다. 레이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예의 그 호소를 계속 하고 있었다.
"평균 성적이 B예요. 체육에서 A를 받고 수학에서 C를 받아서 받은 평균 성적이 아니에요. 다 B를 받았단 말이에요. 협상할 생각이 있다고 했어요. 협상에서도 웬만한 건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제3자를 통해서 협상을 해 보자고도 했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안 먹혀요. 아무 것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태세예요."
나는 레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레이, 집으로 돌아가자."
"아직 다 안 마셨어."
레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갈색 음료가 레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밀로를 바라보았다.
"그냥 진저 에일이야."
나는 레이의 잔을 비웠다.
"이제 다 마셨으니까 가자."
나는 셔츠를 잡고 레이를 의자에서 끌어 내렸다.
차 속에서 레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애처로운 침묵이었다.
"캠프 가야 하는 거지?"
"응."
"안 갈 방법은 없는 거지?"
"응."
레이는 조용히, 그리고 다소 이상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남은 일주일 동안 레이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포도 재배지를 지나고 자갈 많은 먼지 길을 지나 윈만차 캠프로 가는 2시간 동안에도 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저런 말을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늘 레이에게 가르쳤다. 싸움이나 싸움의 상대를 선택할 때는 늘 현명해야 한다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교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이 교훈을 너무나 빨리 받아들인 듯 했다.

시작은 전화였다. 1시간 간격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제 대학 자금은 정신병원 비용으로 쓰시게 될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게 엄마 아빠한테도 좋아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저를 나가게 해 주세요. 하루라도 빨리 꺼내 주시는 게 엄마 아빠한테도 좋은 일이라니까요!"
그러다 레이의 비상용 휴대폰이 압수를 당했다. 레이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야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편지 캠페인이었다. 그 날 오후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며 앉아 레이의 탄원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론적으로는 캠프가 아주 훌륭한 곳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곳은 저에게 맞지 않아요. 이제 그만 하고 피차의 손실을 줄여 보는 게 어떨까요? 내일 저를 데리러 오실 거라 믿어요. 모두를 사랑하는 레이가.]
레이의 두 번째 편지는 첫 번째 편지와 같은 날에 도착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제가 캠프 대표이신 더튼 씨와 잘 이야기했어요. 내일 저를 데리러 오시면 캠프 비용 절반을 돌려 주시기로 했어요. 저의 정신 건강보다 기왕 지불한 캠프 비용을 더 걱정하시는 거라면, 여름 동안에 제가 공짜로 일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요. 내일 봬요. 모두를 사랑하는 레이가. 추신, 지도 한 장과 기름 값 20불을 동봉합니다.]
얼마 후 전화질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약간 달랐다.

화요일 아침 5시 45분.
"안녕하세요. 저예요. 캔디 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전 지금 단식 투쟁 중이에요. 그러니 저에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죠. 혹시 10분 안에 이 메시지를 들으시면 다음 전화번호로…."
아버지는 그냥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화요일 아침 7시 15분.
"이 곳은 아무래도 경기장에 내보내기 위해 백인 노예들을 길러내는 곳인 것 같아요. 이 정보를 십분 활용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으, 헉, 이제 저는…."
잠잠하더니 그 날 오후 3시 42분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레이예요. 마음을 바꿨어요. 여기도 그리 나쁘지 않네요. 방금 코카인을 들이마셨더니 상황이 훨씬 분명해지는 거 있죠. 돈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1000달러 정도? 아, 담배도 좀 더 살 수 있겠다."
이 메시지를 들은 아버지는 큰 소리로 웃다가 그만 마시던 커피에 목이 막혀 10분 동안 켁켁거려야 했다. 아버지는 이런 메시지를 생각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캠프에 간 보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스펠만 사로 걸려 오던 전화가 뚝 끊기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오빠 사무실에서 11시에 회의가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레이가 이미 그 날 들어 4번째 전화를 오빠에게 걸어 온 참이었다.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오빠가 우리 가족을 마치, 돈이 많아서 꼭 잡아야 하는데 다루기는 굉장히 성가신 고객 대하듯 한다는 것을.
"내 말 잘 들어, 레이." 오빠가 말했다.
"비서에게 말해서 오늘 네게 과자 상자 하나 보낼게. 오빠 말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 안에 네가 좋아하는 건 몽땅 넣을게. 그걸 먹어. 다른 친구들한테도 나누어 주고. 그리고 오빠에게 편지를 써. 한 통만 쓰는 거야. 고마운 선물을 보내 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하고 거기서 새로 사귄 친구 적어도 한 명에 대해서 오빠에게 알려 줘야 해. 네가 오빠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거기 있는 동안 더 이상 오빠에게 전화를 걸지 않으면, 올아왔을 때 50달러를 줄게. 알았지? 이제 더 이상 레이 스펠만이 거는 전화는 받지 않을 거야."
오빠는 자신이 요점을 명백하게 전달했다는 것에 만족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말했다. "50달러하고 캔디를 좀 주면 나도 전화 그만 걸게."
5분 후 데이비드 오빠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스펠만 씨, 이자벨 양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자벨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어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연결하세요."
오빠는 전화를 받기 전 잠시 뜸을 들였다. 어떤 전략을 써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좋아, 레이. 이제 캔디도 없고 돈도 없어."
데이비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변호사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내가 이 녀석하고 혈연 지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오빠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너도 마찬가지고" 라고 덧붙였다.
이상하게도 레이는 다신 오빠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나는 레이가 새로운 상대를 선택했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전투를 구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주 후, 레이가 정확히 언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레이 말에 의하면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정도는 아니었어" 라고 말하자 레이는 "그럼 왜 그랬어?" 라고 되물었다.
어쨌거나 터닝 포인트는 캠프 장기자랑 날이었다. 12살 짜리 캐서린 스튜어트는 <타이타닉>에 나오는 '그 짜증나는 노래'를 불렀다. 할리 그랜저와 다시 스피겔만은 듀엣으로 말도 안 되는 탭 댄스를 추었다. 티파니 슈미트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를 립싱크하며 무대 위를 뛰어 다녔다. 그리고 제이미 저버와 브라이언 홀은 자기들이 작사 작곡한 힙합 송 <부끄러워 죽겠네>를 공연했다. 레이는 이 장기자랑 난리법석 속에서 그만 눈물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지난 2년 동안 울어 본 적 없는 레이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레이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캠프 대표의 휴대폰 중 하나를 훔쳐 공연장 밖으로 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아메리칸 아이돌' 후보자들의 공연에 정신이 빠져 있는 동안 나의 여동생은 캠프 감독 웨버 씨의 휴대폰의 배터리를 소모시키며 숲을 거닐고 있었다. 레이가 전화를 건 곳은 오빠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레이에겐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에 걸려 들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내 휴대폰에 3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사무실 전화기에도 1개, 집 전화에도 5개나 되는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지역번호 707로 시작되는 전화를 받기로 결심했다.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얘기를 해 두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이었다.
"레이, 전화 계속 걸면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
"미성년자를 신고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 대신 엄마 아빠만 곤란해지시겠지. 좋아들 하시겠다."
"레이, 전화는 어디서 하는 거야?"
"휴대폰이야."
"압수 당하지 않았어?"
"그랬어."
"그런데?"
"빌렸어."
"빌렸다고?"
"포포브스키 건 기억해?"
레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래."
"언니가 엄마 아빠한테 그 사건 맡지 말라고 했어. 그 부인이 무지하게 이상한 여자고 포포브스키 씨는 미행이나 당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포포브스키 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24시간 미행에 당할 상황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던 거 기억해?"
"기억해."
"한밤중에 그 사람을 공항으로 데리고 가서 곧 이혼할 전 부인이 해외 계좌에 돈을 숨겨 두고 있다는 말을 했던 것도?"
"기억한다고 말했잖아."
"그 남자에게 언니 계좌번호를 준 것도?"
"본론을 말해."
"엄마 아빠가 들으면 좋아하실까?"
나는 나의 여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니, 어감이 좀 안 좋은데?"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떤 영화에서 배운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감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일 봐." 레이가 전화를 끊었다.

나의 자동차가 포도 재배지를 지났다. 단조로움을 이기는 데는 오디오 북보다 분노가 낫다. 나는 통나무 오두막집 풍으로 지은 캠프 사무실 앞에 차를 끽 세웠다. 차 주위로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군용 잡낭 더미 위에 앉아 있는 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차를 보는 순간 레이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나에게로 달려와 힘껏 포옹을 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나는 레이의 팔을 풀고 한 쪽으로 밀치며 말했다.
"널 데려가려면 사인을 해야 하는 거겠지?"
나는 가능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는 재빨리 사무실을 가리켰다. 나는 서류 정리를 끝내고 차로 돌아온 후, 트렁크를 열며 레이에게 짐을 실으라고 했다.
"평생 잊지 않을게, 언니."
트렁크를 쾅 닫은 후 나는 레이의 초록색 캠프 티셔츠를 잡고 살짝 목이 막힐 정도로 멱살잡이를 했다. 그리고 레이를 차 옆 쪽으로 밀어 붙였다(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해 보시겠다?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 내가 다시 13살 짜리 여동생에게 인형처럼 놀아날 거라고 생각해? 협박은 범죄야, 레이. 게임이 아니라고. 사람을 조종하는 건 잘못된 일이야. 인생이 완벽하지만은 않아. 그래도 참고 견뎌야 해. 그럴 수 있겠어? 아니면 다시 나하고 이런 게임을 계속 할 거야? 계속 하겠다면 나도 받아 줄 용의가 있어. 하지만 명심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레이? 페어 플레이를 할 거야? 아니면 내가 얼마나 더티 플레이를 하는지 맛을 좀 볼 거야?"
살다 보면 등 뒤로 눈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두 명의 캠프 교사와 두 명의 캠프 학생이 제 자리에 얼어 붙은 채 서 있었다. 캠프 관계자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잡았던 멱살을 풀고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레이는 관객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긴장감을 완화시켰다. "연기예요." 레이는 이렇게 말하고 차에 탔다.
집으로 향해 가는 동안 레이는 7분 동안 말이 없었다. 이전 기록에서 5분 30초를 추가 갱신한 기록이었다. 결국 입을 열었을 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사랑해, 이자벨 언니. 정말 정말 사랑해."
"입 다물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내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오래 이 침묵을 참아 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5분 후 레이가 말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네 번째 변호사
내가 레이를 캠프에서 빼 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오빠는 더듬이를 세우고 점심이나 먹자며 나를 꾀어 냈다. 카페 클로드에서 홍합과 감자 칩 요리를 먹은 후 오빠는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답이 뻔한 질문을 던졌다.
"레이한테 걸려 든 거지?"
"뭐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순진한 체 했다.
"레이를 캠프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던 게 너야. 그러다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고 집으로 데려왔어. 이건 보나마나 레이가 무슨 수를 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상황이 설명이 안 되잖아."
"잘못 짚었어."
"그렇다고 해 두지 뭐. 하지만 어쨌든 레이한테 잡힌 이상, 이론 상으로 볼 때 넌 나한테도 잡힌 거야. 왜냐.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이가 너에 관해 뭔가 구린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어머니 아버지한테 내가 말할 거고, 그렇게 되면 레이한테서 그게 뭔지 알아 내는 건 시간 문제지 않겠어? 너한테 그리 녹록한 상황이 될 리 없잖아, 안 그래? 그러므로 레이의 수가 뭐든지 간에 나 역시 그 수를 쓸 수 있다는 거지."
"원하는 게 뭐야?"
"토요일에 내 친구 잭하고 데이트를 나가 줬으면 해. 성은 말해 주지 않겠어. 7시에 데리러 갈 거야. 깨끗하게 입고 머리도 빗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아니잖아."
오빠가 대답했다. "지난 세월 내가 수없이 되뇐 말이야."

잭 위버, 네 번째 변호사가 오후 6시 55분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변호사 사이의 상견례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선거 유세를 펼치는 정치인 같은 태도로 캐시미어 차림의 변호사를 대했다. 나는 1분 간격으로 시계를 보면서 초조하게 굴었고 마침내 어머니가 "알았다, 알았어" 라며 우리를 놔 주었다. 어머니는 잭에게 본인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 주었고 내가 혹시 무슨 문제를 일으키면 전화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농담이 재밌었는지 흐흐 웃었다.
오후 7시 45분. 우리는 베이 메도우 경마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잭은 도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시간만 투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의심에 사로잡혔다. 잭은 분명히 여자를 소개 받고 싶어하는 마음 상태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기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남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일부러 꾸민 듯한 지저분한 느낌이 있었다. 엉성하게 주름진 옷 하며 만지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만진 헤어 스타일. 어쨌든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진 못했지만. 절대 자발적으로 잭이 이 데이트에 응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강제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데이트를 성사시킴으로써 데이비드 오빠가 얻는 이득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이득을 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였다.
참 희한한 일이긴 하지만 어머니는 변호사들을 향한 진실하고도 동요되지 않는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완벽한 아들이 변호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 고객의 대부분이 변호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변호사들이 입고 다니는 멋진 양복 때문일 수도 있고, 고등 교육을 받을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일 수도 있다. 나오선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가 심히 우려스러울 뿐이다. 나의 삶의 질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의심은 호기심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 말끔한 변호사의 겉모습 속에는 심각한 도박 벽이 있는 남자의 면모가 숨어 있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베팅을 한 후 우승마 예상 리스트를 주의 깊게 살피는 잭을 바라보며 그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상당수의 여자들이 이런 모습에 질겁했겠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늘 결점이 있는 남자들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던가. 뭔가 다가가기가 쉬워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발견을 특별히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준 것은, 어머니가 나를 마권업자에게 정기적으로 급료를 지불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를 아무 것도 모른 채 엮어 줬다는 사실이었다.
잭이 다시 느낌이 오는 두 살 배기 말에게 500달러를 걸고 있을 때, 나의 눈에 관람석 상단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가 경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이스가 시작되었는데도 남자는 트랙을 바라보지 않고 손님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남자가 간이 판매점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한 손님에게 부딪혔다. 잠시 후 나는 그 손님에게 다가가 지갑이 있냐고 물었다. 없었다. 나는 그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는 관람석 아래 남자 화장실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잭이 나를 쫓아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소매치기 혐의자를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를 쫓아가 화장실 앞에 가로막고 섰다.
"이 자식아, 당장 그거 내 놔!"
남자는 약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는 소린 집어 치우고 그 지갑이나 빨리 내놓으라니까!"
나는 낙서로 뒤덮인 벽에다가 남자를 떼밀며 말했다. 그는 잭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싸워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자는 나에게 지갑을 던지고는 줄행랑쳤다.
나의 짜릿한 활약이 있는 동안 네 번째 변호사는 7번째 레이스를 놓쳤다. 그가 베팅한 말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승산이 없던 말이었기 때문에 통계학적으로 볼 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잭은 자신이 레이스를 놓친 것에 대해 많이 침통해 했다. 많은 도박사들과 스포츠광들이 그렇듯 자기가 레이스를 참관했으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당한 소유주에게 지갑을 돌려 주고 안전요원에게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려 준 뒤, 나는 잭에게 한 번 더 걸고 싶은지 물었다. 잭은 아니라고 했다. 오늘은 운이 다 했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일 문제도 있고 네 번째 변호사 건도 있고 해서 오빠의 사무실에 들렀다. 사실 난 이 변호사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나에 대해 뭐라고 안 해?"
"누구?"
"변호사 4번 말이야."
"그렇게 계속해서 번호를 매기다간 정상적인 데이트라곤 절대 하지 못하게 될 거다."
"뭐라고 말을 했을 거 아냐."
능글맞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오빠가 말했다.
"더티 해리와 낸시 드류의 중간 쯤이라고 하더라."
"칭찬이야?"
"아닐걸?"


잃어버린 주말 #.22

레이 삼촌이 다시 사라졌다. 우리 식구 누구도 삼촌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벌써 열 이틀 째 접어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용카드 결제 내역 조회를 통해 삼촌이 레이크 타호에 있는 시저 팰리스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일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삼촌을 데려오는 임무가 나에게 떨어졌다. 나는 혼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별 희망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가 물었다. "스키 탈 시간이 있을까?"
"그럼. 내가 레이 삼촌의 손에서 위스키 병을 내려놓고 여자들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오빤 열심히 즐기시라고."
내가 빈정대는 소리도 무시하고 오빠가 대답했다. "오케이. 가겠어."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나는 오빠가 어쩌다 어머니의 수에 걸려 들었는지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해, 오빠한테 난 골칫거리야. 그렇지?"
"인정해."
"그러니 오빠가 오빠 친구하고 나를 엮어 주고 싶어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매너 좋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좀 나아질까 해서 그런 것 뿐이야. 돈 안 드는 차밍 스쿨이라고 생각해."
"이 모든 게 어머니의 마스터 플랜이야. 게다가 내가 아는 오빠는 단지 어머니 마음에 들고 싶어서 그런 일을 꾸미지는 않아. 분명히 뭔가 거래가 있었어."
"어머니가 나한테 협박이라도 했단 말이야?"
"왜 우리 가족은 묻는 말에 곧장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그거라면 삼촌이 전문이지."
7시간 후, 나는 카지노에서 캐리비언 포커를 치고 있는 삼촌을 발견했다. 나는 삼촌에게 지난 2주 동안 어디서 뭘 하셨느냐고 물었다.
"어디 보자. 닷새 동안 술을 퍼마셨고, 이틀은 내리 멀쩡한 정신으로 포커를 쳤고, 르노에선 데이트 몇 번. 그리고 다시 포커 게임. 사흘은 기억이 안 나고, 그리고 마지막 나흘은 테이블에 앉아 운을 시험하고 있지. 너는 어찌 지냈니?"
오빠 말이 옳았다. 레이 삼촌은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곧이곧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가끔 내 여동생이 그런 축에 들기도 했지만 그 애는 필요하면 사기를 쳤다. 삼촌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삼촌에게 그것은 마치 왕관과도 같았으니까.
카지노에서 삼촌을 찾아내는 일에는 4시간이 소요됐다. 데이비드 오빠는 본인 입으로 말한 대로 스키를 타러 갔고 힘든 일은 나에게 모두 떠맡겨 버렸다. 알아 보니 지난 이틀 밤 동안 레이 삼촌은 모든 걸 잃은 상태였다. 사실 모든 것이라는 말로는 모자랐다. 통장 잔고는 물론이고 앞으로 6달 동안의 연금, 50달러짜리 시계, 어머니가 지난 생일 선물로 주신 금제 지폐 클립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싸구려 잡화점에서 산 듯한 샌들을 신고 있는 걸 보니 신발도 잡힌 모양이었다. 나는 삼촌을 테이블에서 끄집어 내려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따기 전까진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자벨, 안 돼. 이렇게 끝을 내면 안 돼. 이러면 내 소문이 안 좋아진다고."
"은행 계좌는 생각 안 하세요?"
"이자벨, 인생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단다."
"당연히 그런 걸 찾으셔야 할 거예요. 이제 삼촌에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이자벨,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
레이 삼촌은 다시 한 판을 걸었고 또 잃었다. 하지만 여전히 테이블 위에 칩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삼촌을 자리에서 끌어낼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레이 삼촌, 저기 바로 가시겠어요? 제가 한 잔 살게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이자벨. 하지만 한 잔으론 안 될걸?"
순식간에 우리는 오빠의 차 뒷좌석으로 삼촌을 태웠다. 가슴과 다리 쪽에 벨트를 채운 후, 혹시 토사물이 생기는 경우를 대비해 창가 쪽으로 앉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빠와 나는 어렸을 때처럼 레이 삼촌의 '잃어버린 주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게 별 다섯 개 짜리 주말이 아니고 뭐겠어." 내가 말했다.
"바보 같은 말로 들릴 수도 있는데." 데이비드 오빠가 말했다.
"난 늘 삼촌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어."
"예전의 삼촌은 이미 강을 건너셨어."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어쩌면 삼촌이 오빠 차에다 오줌을 눌지도 몰라."
오빠가 한숨을 쉬더니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알아."

#레이 삼촌의 갱생
잃어버린 주말 #.22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 피해가 상당했다. 삼촌은 정말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아버지는 레이 삼촌을 위해 페탈루마 '푸른 잎 회복 센터'(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때 오빠와 나는 15분 동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에서 진행되는 30일 간의 갱생 프로그램을 찾아 냈다. 여러 가지 중독 증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곳이라고 했다. 레이 삼촌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차를 탔다. 하지만 A자 모양의 집들이 빼곡한 초록 길로 들어설 무렵, 레이 삼촌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 너도 잘 알잖아."
"노력은 할 거죠?" 아버지가 물었다.
"널 위해서라면 해야지. 하지만 얼마 못 갈 거야."
"어떻게 알아요?"
"난 내가 잘 알아."
"어쩌라고요?"
"그냥 돈 낭비하지 않는 게 좋아."
"계속 그렇게 살겠다는 겁니까?"
레이 삼촌은 다음 질문에 대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너희 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 빚도 갚고 기타 등등."
"들어오시겠다는 거예요?"
"데이비드가 쓰던 방 있잖아. 그 녀석이 싫어할까?"
"아니요."
아버지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오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차를 멈추더니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레이 삼촌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 마약, 포커, 모두 끊는 겁니다."
"알았어."
그렇게 하여 레이 삼촌은 클레이 스트리트 1799번지로 들어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