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의 포도 예찬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 대비를 모시고 경회루(慶會樓)에 가서 연꽃을 구경하고자 하니, 긴급한 일 외에는 모든 공사(工事)를 입계(入啓)하지 말고, 연꽃 구경과 축수 올리는 뜻으로 절구(節句)를 지어 바치라. 승지·사관(史官) 각 1원(員)만 궁에 머무르고 그 나머지는 다 경복궁(景福宮)으로 가라." 하였다.

승정원이 그 때 원중(院中)에 수정 포도(水精葡萄) 한 덩굴이 익었으므로 승지들이 따서 얼음 넣은 쟁반에 담아 왕에게 바치니, 어제(御製) 한 절구(節句)를 내리기를,

 

얼음 채운 파랑 알이 달고 시원해

옛 그대로인 성심에 절로 기쁘네

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병든 위 상한 간도 고쳐 주겠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졸(拙)함을 모르고서, 지금 시장(詩章)을 내렸는데, 볼 만한 데에 가까운가?" 하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특별히 내리신 천장(天章)*의 뜻이 높고 아름다우매, 신 등은 감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1505년)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천장 : 임금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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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대략 1억 4,000만 년 전이다. 지구의 전 지역에 널리 분포하던 포도의 대부분이 400만 년 전 시작된 빙하기로 멸종되었다. 빙하기가 끝난 후 동·서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지역의 포도만 생존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 종군과 서아시아 종군 그리고 북아메리카 종군으로 분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속하는 동아시아 종군에는 대표적으로 머루가 있다. 머루는 산머루, 새머루, 개머루, 섬머루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열매가 작고 신맛이 강하다. 과일로 그냥 먹기보다는 주로 열매를 따서 술로 담가 먹었다. 머루의 잎과 뿌리, 줄기 등은 말려서 약재로 사용했고, 머루 순은 구황작물로 이용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포도는 서아시아 종군에 속하는 유럽 종이다. 서아시아 지방에서 기원전 4000년 경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발견되었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알려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포도로 만든 음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포도를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포도와 포도주는 국가 간 주요 무역품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략)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대원열전을 보면 '중앙아시아 동부에 위치하였던 대원이라는 지역에서는 포도로 술을 담그고, 부자들이 포도로 술을 담가 둔 것이 만 석에 이른다. 오래 되어도 술 맛이 변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서아시아에서 오래도록 재배되던 포도가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포도라는 이름이 이란에서 포도를 부르는 '부다우(Budaw)'를 중국어로 음역한 데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아시아 종군의 포도가 들어온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산둥 지역에 있던 북위의 북양태수 가사협이 6세기 전반에 저술한 농서 <제민요술>에 포도 재배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제민요술>이 백제와 신라에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포도 문양을 넣은 와당이 발견된 것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서아시아 종군의 포도가 들어온 시기를 삼국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재배까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주로 포도 열매나 포도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도 포도 재배는 성공하지 못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은 1298년, 1302년, 1308년 원나라 황제에게 포도주를 선물 받았다. 1324년 원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한 안축(1282~1348)은 투루판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 받은 답례로 시를 지었고, 이색(1328~1396)은 포도주를 마신 일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도 포도는 매우 귀한 과일로 대접 받았지만, 포도가 빨리 상하는 과일인 만큼 왕조차도 신선한 포도를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포도는 왕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오죽하면 태조 이성계가 포도를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조순을 시켜 세자와 여러 왕자들에게 포도를 구해 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태조가 자식들에게 포도를 구해 와야 할 이유로 든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다. 태조 자신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도 이미 돌아가셔서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인데, 세자와 왕자들은 태조 본인이 아프기는 해도 살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포도를 꼭 구해 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태조 자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수정 포도를 구해 오라는 반 협박성 강요였다. 이 때의 수정 포도는 '흰 빛이 나는 포도'라는 뜻으로 지금의 청포도로 추정된다.

아픈 부모가 포도를 먹고 싶다는 말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태조의 자식들은 모두 울면서 상림원사 한간을 찾아가 포도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자들이 포도를 찾는 데 모두 나섰다는 말을 들은 김정준이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산포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태조는 아직 덜 익어 맛도 없었을 포도임에도 너무도 크게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한간이 제대로 익은 수정 포도를 구해 오자, 태조는 쌀 10석을 내려 주며 칭찬하였다. 태조는 수정 포도를 한 번에 모두 먹기가 아까웠는지 목이 마를 적에만 1~2개씩 맛보며 아껴 먹었다. 너무도 먹고 싶은 포도를 먹어서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포도를 먹고 나서 앓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기를 좋아하는 세종도 포도를 좋아했다. 세종은 당뇨병이 심했던 만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포도를 자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도가 나오지 않는 때에 병에 걸려 누운 세종이 포도를 찾았다. 정척(1390~1475)이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집 정원에 있던 수정 포도를 올렸더니 세종이 "가슴 속이 답답하더니, 이 포도를 먹고 상쾌하게 되었다" 라며 좋아했다. 이 때부터 정척은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매 년 포도를 따서 왕에게 드렸고, <조선왕조실록>은 귀한 포도를 매 년 왕에게 진상한 정척의 공로를 칭찬하는 기록을 남겼다.

 

연산군은 태조와 세종 만큼이나 포도를 좋아한 왕으로 매 년 포도를 궁궐에 진상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포도의 맛을 예찬하는 시를 남겼다. 연산 6년(1500년) 10월, 연산군은 적포도로 생각되는 마유 포도 한 송이를 갑자기 승정원에 내리고는 승지들에게 맛을 보고 시를 지어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승지들은 "이전에 맛보지 못하던 것입니다. 산중에 비록 더러 있기는 했으나, 서리와 눈 속에 그 맛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산 속에 있는 머루를 먹어 본 적이 있으나, 연산군이 내린 마유 포도는 완전히 다른 맛으로 비교조차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승지들에게 포도를 주고 시를 짓게 한 것은 결코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려는 애민 정신이 아니었다. 왕의 잘못을 비난하며 왕권을 약화하려는 승지들에게 주는 경고였다.

"너희 승지들이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포도 하나 마음대로 먹지 못하지 않느냐? 나는 너희들과 달리 언제든지 포도를 원하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왕이다. 이 차이를 확실히 기억해 두어라."

아버지인 성종이 8년 전에 술과 포도를 승정원·홍문관·병조·도총부에 내려 주고, 근체시(近體詩)를 지어서 바치게 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도였다. 성종이 애민 정신으로 신료들에게 귀한 포도의 맛을 보여 주며 학문의 성취를 높였던 것과는 달리, 연산군은 자신이 절대적인 왕권을 지닌 우월한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 포또를 내려 준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후에도 비싼 포도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얼마나 많이 사 들였는지 왕과 왕족이 사용하는 경비를 담당하는 내수사의 돈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연산군은 포도를 사기 위해 관청의 운영비를 관리하는 풍저창과 군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관리하는 군자감의 쌀을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연산 8년(1502년)에는 유세침과 오익념 등 신료들에게 잘못을 지적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도를 계속 궁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령은 멈추지 않았다.

폭정이 심해질수록 연산군은 포도를 더 많이 찾았다. 연산 11년(1505년)에는 일반 백성의 포도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정을 도외시하고 여흥을 즐기는 데 몰두하였다. 연산군이 포도를 많이 찾은 것은 아마도 매일 술을 먹으면서 계속되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 해 여름 경회루에서 얼음 넣은 쟁반에 수정 포도가 한 가득 올라오자, 기분이 좋아진 연산군은 시를 지었다. 연산군은 매일 계속되는 여흥을 즐기느라 상한 몸을 포도를 통해 회복했으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1년 뒤인 연산 12년(1506년)에 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었다가 그 해 11월 죽었다.

 

조선 시대 제주도 사람들은 귤이 열리기도 전에 미리 세어 둔 귤꽃의 개수로 공물을 징수하던 관리들을 피하기 위해 귤나무를 잘라 버리기도 했다. 아마 연산군 때도 그러지 않았을까? 세종과 성종처럼 성군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귀한 포도를 진상하면 칭찬이 내려졌으나, 연산군 시절에는 귀한 포도를 가지고 있으면 강제로 빼앗겨야 했다. 태조와 세종은 백성과 국가를 위해 정무에 힘쓰느라 해친 건강을 회복하려고 포도를 먹었으나, 연산군은 백성들에게 빼앗은 재물로 연신 마신 술을 해독하느라 포도를 먹었다. 포도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어떤 왕을 만나느냐에 따라 소중한 보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흉물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사시사철 언제든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포도에도 이처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왕도 쉽게 먹을 수 없어 애를 태웠을 정도로 포도가 귀했던 시절, 포도나무를 키우면 출세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러면서 귀한 포도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명분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먹고 시를 지으라 명령했던 성종과, 신료보다 왕이 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포도 한 송이를 주고 시를 지으라고 한 연산군을 보면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