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이용한 조선 최고의 마술 쇼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중(僧) 설징(雪澄)·왜승(倭僧) 신옥(信玉)·사노(私奴) 기금동(奇今同)·정병(正兵) 이계산(李繼山)이 도망 중인 중 설산(雪山)·월심(月心)·계엄(戒嚴)·성명(性明)과 공모(共謨)하여, 사람의 오줌을 이용하여 팔뚝과 손등에 부처(佛)를, 그리고 글씨를 써서 소나무 숯가루를 뿌리고 털어 내면 흑문(黑文)이 되고, 또 사람의 젖을 사용하여 백지(白紙)에 부처를 그리고 글씨를 써서 물에 담그면 백문(白文)이 되고, 불에 쪼이면 적문(赤文)이 되며, 또 백반(白礬)을 사용(使用)해서 백지에 부처를 그리고 글씨를 써서 물에 담그면 백문(白文)이 되게 하여, 이런 요술(妖術)을 가지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광혹(誑惑)하여 재화(財貨)를 취(取)한 죄는, 율이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도망 중인 성명·계엄·월심·설산도 추포(追捕)하여 참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38권, 성종 5년(1474년) 1월 4일 경인 4번째 기사

 

 

---

 

 

조선 시대는 마술을 '환술(幻術)'이라 부르며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위정자들은 환술을 성리학이 이단으로 생각하는 종교가 시행하는 사술, 또는 백성을 속여 재물을 뜯어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기 수단으로 인식했다. 성종 5년(1474년)에 승려 설징과 왜승 신옥을 비롯한 수십 명이 환술을 내세워 집단 사기를 벌이다가 처벌 받으면서 환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각인시켜 주는 사건이 있었다. 성종 때 환술로 사기를 친 설징과 신옥을 비롯한 일당은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파계승 설징, 왜승 신옥, 군인 이계산, 노비 기금동 등 조선 시대 낮은 계층이었다. 특히 왜승 신옥은 일본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건너 와 귀화한 인물로 조선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환술을 이용해 사기 행각을 벌였다. (중략) 파계승 설징과 왜승 신옥은 불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자신들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었으며, 노비 출신의 기금동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마음에 공감해 주었다. 군인 이계산은 귀동냥으로 들은 국법을 내세워 군중들을 겁 주거나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중략)

 

이들은 사람의 오줌을 묻힌 붓으로 팔뚝과 손등에 불상이나 글씨를 쓴 뒤, 숯가루를 묻혔다가 털어냈다. 그러면 먹물로 쓴 것처럼 팔뚝과 손등에 검은 불상과 글씨가 나타났다. 또는 사람의 젖에 불에 탄 재를 넣어 휙휙 휘저은 다음 글이나 불상을 그린 종이를 물에 넣었다가 꺼내면, 까맣던 글과 불상이 하얗게 변했다. 이것을 다시 불에 쬐면 글과 불상이 붉은 글씨로 변했다. 이들이 보여 준 환술은 언뜻 대단해 보이지만, 약간의 화학적 원리만 알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재현해 낼 수 있다. 우선 유리·화약의 원료로 쓰이는 초석(硝石)을 물에 희석하여 종이에 글이나 그림을 그리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이 종이를 불에 비추면 글이나 그림이 나타난다. 붉은 색의 글과 불상을 그리고 싶으면 일반 종이가 아닌 강황의 뿌리 줄기를 말려서 만든 강황지(薑黃紙)에 소다수를 묻히면 된다.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코웃음 칠 만큼 이들이 펼친 환술은 쉬운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붓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면 검은색만 나온다고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의 오줌이나 젖을 이용해 글씨의 색을 바꾸는 이들의 환술은 경이로움을 넘어, 마치 신선이 부리는 요술로 보였다. 그런 가운데 대왕대비의 인장이 찍힌 문서까지 보여 주었으니 이들을 향한 백성들의 믿음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기 행각을 벌였던 성종 4년(1473년)은 세조의 부인이던 정희왕후(1418~1483)가 수렴청정하던 시기였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만큼 국정 운영의 중요한 모든 결정은 정의왕후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7살에 불과한 성종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정희왕후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관중에게 내보이면, 모든 이들이 진실로 여겼다.

 

(중략)

 

성종 12년(1481년)에 환술로 인한 문제가 또 발생했다. 조선 출신의 명나라 환관 정동(鄭同)이 조선에 사신으로 오면서 환술을 펼치는 놀이꾼을 데려왔다. 정동이 데려온 놀이꾼들은 관중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진짜 갈고리를 가짜와 바꿔치기하여 입에 집어넣거나, 오랜 훈련을 통해 진짜 날카로운 창이나 칼을 삼키기도 하였다. 또한 입에 기름을 머금고 있다가 송진 가루를 사용하여 불기둥을 내뿜은 환술을 보이기도 했다. 성종이 이들의 환술을 좋아하며 큰 상을 내리자, 조정 관료들이 크게 반발했다. 임금이 환술을 좋아하여 많은 상을 내렸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면, 이후로 조선에 올 환관들이 재물을 더 많이 얻기 위해 환술사를 계속 데려올 것이라 걱정했다. 더불어 중국에서는 조선이 예의를 갖춘 나라로 알려졌는데, 성종으로 인해 환술을 좋아하는 미개한 나라로 인식될까 두려워했다. 또한 조선에서도 환술하는 자를 내세워 권세를 잡으려는 간신이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기도 했다.

 

(중략)

 

경종 2년(1722년)에도 환술로 사기 행각을 벌인 이상건이 있었다. 이상건은 묵호룡의 고변이라는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환술을 내세운 사기가 발각되어 처벌받았다. 묵호룡은 원래 남인 출신의 서얼이었는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영조를 다음 왕위로 즉위시키려는 상대 붕당인 노론에 줄을 대고 있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하고 소론 세력이 노론의 대신 4명을 몰아내며 권력을 장악하자, 묵호룡은 소론으로 다시 방향을 틀기 위해 삼급수설(三急手說)을 고변했다. 삼급수설은 노론 세력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칼로 죽이거나, 독살하거나, 아니면 모해하여 폐출하고자 했다는 내용이어서, 노론의 대신 4명을 비롯한 많은 노론 인사들이 죽는 신임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묵호룡의 고변을 조사하던 중, 둔갑술에 능하고 귀신을 통해 어떤 물건이든 가져올 수 있는 '백운산인 이태화'라고 밝힌 이상건이 묵호룡의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변에 따르면 묵호룡은 역모 자금을 구하던 정인중에게 이상건을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정인중을 만난 이상건은 귀신을 부려 은화를 얻기 위해서는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 즉 관리의 도장이 찍힌 종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침 홍의인(1683~1722) 집에 관인(官印)이 있어 10여 장의 종이에 도장을 찍어 이상건에게 주었는데, 얼마 뒤 이상건은 철원에서 관리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공명첩으로 위조하여 비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결국 이상건은 11번의 형문을 받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결해 버렸다.

 

영조 39년(1763년)에도 환술을 부린다는 괴인으로 인해 국문이 열렸다. 좌의정 홍봉한(1713~1778)이 강가에 사는 이의배에게 위험한 소문을 들었다며 영조를 찾아왔다. 홍봉한의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깜짝 놀라며 직접 국문을 열고 이의배와 정창욱을 같이 불러 사실을 조사했다. 이의배와 정창욱은 관아에 나와 말하기를 어느 날 한 괴인이 자신들을 찾아왔다고 밝혔다. 괴인은 이들 앞에서 방석 밑에 묶여 있던 끈을 손도 대지 않고 풀었고, 주머니에 있던 5문을 50전으로 늘렸다가 도로 5문으로 줄이는 환술을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라 괴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쓴 글자를 맞추는 등 여러 환술로 자신들의 혼을 쏙 빼 놓은 뒤, 6월 무렵 난리가 일어날 때 자신을 따라 공주로 가면 화를 면할 수 있으니 돈꿰미를 달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영조가 직접 국문을 열어 진상을 조사해 보니 괴인이라 지목한 사람은 성균관의 노복 주영흥이었다. 주영흥은 요술과 6월에 난리가 난다는 말을 공주에 사는 김범갑의 아들 김호희에게서 배웠다고 답했다. 주영흥의 자복에 얼떨결에 붙잡혀 온 김호희는 노끈을 묶고 푸는 방법과 글자를 안 보고도 맞추는 것을 가르친 적이 있지만, 나머지는 모르는 일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이에 영조는 사건과 관련된 여러 사람의 말을 맞추어 본 결과, 김호희는 아무런 죄가 없다며 풀어 주었다.

주영흥이 행한 환술은 순식간에 끈을 묶고 주머니에 물건을 넣었다가 사라지게 만드는 간단한 마술로, 우리가 재미 삼아 따라 해 볼 수 있는 기초적인 마술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영흥은 환술로 세상 원리를 다 아는 도인 행세를 하며 난이 일어날 것이라 겁을 주었다. 그리고 난을 피해 살 수 있는 곳을 알려 준다면서 거액의 돈을 갈취하려다 큰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