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숨은 공신, 해귀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적중에 왕래하는 박여경(朴餘慶)의 진고(進告)에 의하면 '왜적이 중국군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기에 중국군의 수군(水軍)과 육군이 모두 40만 명인데, 해귀(海鬼)와 달자(獺子)도 많이 나왔다고 엄청나게 불려서 말하였더니 왜적들이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곧 사천(泗川)으로 향하여 적장(賊將) 주라궁(周羅宮)과 상의한 뒤에 본진(本陳)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왜병(倭兵)들에게 성(城)을 수축(修築)시키면서 전혀 철거(撤去)할 뜻이 없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1598년) 9월 5일 정해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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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흑인이 노예로 거래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처용과 일부 무인석을 통해 아라비아인이 귀화하여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기록과 유물은 많이 있다. 아라비아인이 먼 신라로 오기 위해서는 노를 저어 배를 움직일 노예가 필수였을 것이다. 당연히 노를 젓는 노예 중에는 흑인이 있었을 것이다. 아라비아인이 교역하기 위해 신라의 부둣가에 닻을 내리는 순간, 흑인 노예들도 잠시나마 뭍으로 나와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려 시대에도 벽란도가 국제 무역 항구였던 만큼 아라비아 상인이 데려온 흑인을 만나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중략)

 

이후 새로 건국한 조선과 명나라는 고려, 원나라와는 달리 쇄국 정책을 내세우면서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하였다. (중략) 그 결과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구한말을 제외하고는 <조선왕조실록>에 흑인의 이야기가 몇 번 나오지 않는다. 태조 때 섬라국 사신이 흑인을 바쳤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흑인 용병이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순저 때 이양선이 제주도에 흑인을 버리고 갔다는 내용만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중략)

선조 31년(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 갈 무렵 명나라 팽신고가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팽신고는 1개월 뒤 남쪽으로 내려가 일본군을 토벌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수부대인 신병(神兵)이 있다고 자랑했다. 팽신고는 우리와 생긴 모습이 확연히 다른 신병을 호광의 남쪽 끝에 있는 파랑국 사람으로 설명했다. 파랑국은 현재의 포르투갈로 그 당시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여러 나라와 교역을 벌이면서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다. 팽신고는 호광이 3개의 바다를 건너야 이르는 곳으로, 조선과 15만여 리 떨어져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호광에서 온 신병들이 조총을 잘 쏠 뿐만 아니라 여러 무예도 뛰어나다고 자랑하였다. 팽신고의 자랑은 그 정도가 심하여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이들은 바다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고,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몇 날 며칠을 버티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병사는 중국에서도 볼 수 없음을 강조하며, 이들을 특별히 조선에 데려온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중략)

 

선조 앞에 나온 신병의 모습은 얼굴과 온 몸이 모두 검고 눈은 노란색이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었다. 또한 1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이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머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 표현을 통해 보았을 때, 팽신고가 소개한 신병은 이슬람교를 믿는 흑인으로 머리에 터번을 두른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트교 국가인 포르투갈 사람이 이슬람 교도가 사용하는 터번을 두를 리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병이라 불리는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 상인에게 잡혀 명나라까지 온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유성룡은 <서애집>에서 신병이라 불린 흑인을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 같다 하여 해귀라고 부른다. 키가 큰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다. 이들은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 라고 기록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프리카 남수단에 사는 딩카족의 경우 남자 평균 키가 190cm이며, 여자도 180cm에 이른다. 이들이 제주도의 조랑말처럼 키가 작은 아시아의 말을 타면 발이 끌린다는 점에서 유성룡의 기록에 믿음이 간다.

 

*반도 : 3,000년에 1번 열매가 열린다는 선경에 있는 전설의 복숭아

 

팽신고가 키가 크고 물 속에서 몇 날 며칠을 버틸 수 있다는 해귀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조선 조정을 넘어 일본군에게도 퍼졌다. 그 해 9월 5일 선조실록 기사에는 명나라 군대가 수군과 육군 합쳐 40만 명인데, 해귀와 달자(몽골군)도 많다고 말하자, 일본군들의 얼굴색이 모두 변하면서 배에 짐을 실어 도망칠 준비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막상 명나라군과 전쟁터에서 마주한 일본군은 소문과 달리 명나라 군대가 40만이 되지 않으며, 해귀라는 존재도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사실 흑인은 생김새만 달랐을 뿐, 일반 병졸과 큰 차이가 없었다. 며칠을 바다에 머물면서 적선을 공격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명나라 군대도 잘 알고 있는 만큼, 상대를 겁 주는 용도로만 활용한 것이었다. 명나라의 거짓 소문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가져왔을지는 모르지만,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아무 소용 없음이 곧 판명 났다. 일본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의 허장성세에 더는 속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듯 성을 쌓고 조선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에 해귀라 불리던 흑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성룡이 밝힌 것처럼 키가 커서 말을 타지 못해서인지 그림 속 수레에 흑인 4명이 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에 들어온 4명이 모두 살아서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림 속 흑인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개선장군의 늠름한 모습이 아닌 풀이 죽어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혹시라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한 일로 처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