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봉의 어머니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의 어머니 유씨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유씨는 당시 양갓집 규수들이 그러하듯 정식으로 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동생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어깨 너머로 글을 깨우쳐 동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함은 물론 시문에도 능했다.

혼기가 차자 당시 도승지로 있던 홍천민과 혼인을 한 유씨는 슬하에 아들 서봉을 두고 다복한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홀몸으로 서봉을 키우고 가르쳤다.

유씨가 시문에 얼마나 뛰어났던지 아는 이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이 지은 문장을 유씨에게 보이곤 했다. 하루는 먼 친척 되는 이가 자신이 지은 시문을 가지고 유씨를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시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꽃이 지니 천지가 붉네 [花落天地紅]

 

이를 본 유씨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글귀대로라면 이 시문을 지은 이는 필경 단명할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친척이 놀라 되묻자 유씨는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잘 보십시오. 꽃이 떨어지니 천지가 붉다 함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겪은 이가 인생의 황혼을 맞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이 글을 쓴 사람의 인생 역시 그와 같이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유씨의 설명을 들은 친척은 아직 마흔도 채 안 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그걸 어찌 그리 쉽게 속단할 수 있습니까?"

"원래 시문이라 함은 마음 속 감흥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스스로 그 같은 심사에 빠져 있는데 무엇을 더 생각한단 말입니까?"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친척에게 유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만약 저라면 떨어질 낙(落) 자 대신 일어날 발(發) 자를 쓰겠습니다."

"일어날 발 자라 함은…."

친척이 다시 묻자 유씨는 천천히 붓과 종이를 꺼내 놓고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내려갔다.

 

꽃이 피니 천지가 붉네 [花發天地紅]

 

그런 다음 유씨는 다정하게 말했다.

"떨어질 낙이 아니라 일어날 발이라면 분명 수명도 길어지고 노후에도 복을 누릴 것입니다. 시문을 지을 때 단명구(短命句)를 함부로 썼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씨가 개작한 글을 받아 든 친척은 몇 번이고 유씨의 문장 실력에 감탄하며 거듭 인사를 하고 되돌아갔다. 이렇듯 시문을 평가하는 유씨의 안목은 정확하고도 예리했다.

또한 이와 같은 유씨의 인물됨은 자식인 서봉의 글 공부를 가르치는 데에서도 절묘하게 드러났다. 유씨는 서봉에게 직접 글 공부를 가르쳤는데, 서봉이 글을 낭송할 때면 언제나 중간에 발을 치고 그 소리를 경청했다.

한 번은 이를 이상하게 여긴 조카가 유씨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큰어머님은 어째서 서봉이 글을 읽을 때면 꼭 발을 치시는 겁니까?"

조카의 물음에 유씨는 잠시 밖을 살피더니 말했다.

"지금 서봉이는 어디 있는 게냐?"

"예. 방금 들어오다가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카의 말에 유씨는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싶으냐?"

"예, 큰어머님."

유씨는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건 바로 서봉이가 내 자식인 까닭이다. 자식이 눈 앞에서 글을 잘 깨우치면 세상 어느 부모가 기쁘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너도 알다시피 서봉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불쌍한 아이다. 그런데 어머니인 내가 하나 뿐인 자식이라고 그저 위하기만 한다면 장차 서봉이의 앞날은 어찌 되겠느냐? 필경 제 하나밖에 모르는 철부지가 되고 말 것이야."

유씨는 자신도 모르게 흐려지는 시야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너, 이것이 뭔지 아느냐?"

유씨는 방 한 구석에 놓인 비단 보따리를 가져왔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씨는 아무 말 없이 비단 보따리를 풀었다.

"아니, 회초리가 아닙니까?"

놀라는 조카를 보며 유씨는 예의 그 표정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 회초리다. 아까 말하다 말았다만 만약 서봉이가 이 어미가 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모습을 본다면 방자하고 교만해질지도 모를 노릇이요, 또 이렇게 회초리를 비단 보자기에 싸 두는 것은 내 아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물건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이니라."

유씨는 말 끝에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카는 큰어머니의 깊은 속뜻을 그제야 알 것 같은지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렇게 자식에 대한 유씨의 훈육은 남달랐다.

유씨는 아들 서봉이 장성할 때까지 비단 보따리에 싼 회초리를 방에서 치우지 않았고, 그런 어머니의 정성은 서봉을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 유씨의 수연(壽宴) 잔치가 있던 날, 인조 임금은 하사품을 내리시어 유씨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조정의 이름 난 대신들 또한 대거 참석하여 유씨의 공을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