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충청 부사

천둥 소리를 앞세우며 갑자기 쏟아진 폭우는 자욱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산천초목을 삽시간에 적셨다. 뿌옇게 먼지가 일던 황톳길은 금세 진흙탕으로 변해 버렸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근처 나무 그늘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갑자기 웬 비가 이렇게 쏟아진담?"

고갯마루 주막집 월선댁은 부엌에서 마당을 바라보며 버릇처럼 치맛자락을 두어 번 손으로 털었다.

"주모! 주모!"

온 몸이 흠뻑 젖은 선비를 태운 말을 끌고 마부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예! 나갑니다."

비가 와서 손님이 없을 줄 알았던 월선댁은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비 한 번 굉장하게 오는군. 주모! 방 하나 있으면 주시구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 할 것 같소이다."

"예! 나리, 마침 좋은 방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월선댁은 눈웃음을 지으며 선비를 방으로 안내했다. 선비는 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문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쯧쯧, 갈 길이 멀거늘…."

선비가 혀를 차며 먹장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데 수십 명의 포졸들이 뒤따르는 행렬이 주막으로 들어섰다. 맨 앞에서 길잡이를 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주모를 찾았다.

"이보게, 주모! 충청 부사의 부임 행차일세. 비로 더 이상 행차하기 어려우니 여기서 제일 좋은 방 하나 마련토록 하게."

"이를 어찌 하옵니까? 제일 넓고 좋은 방에는 방금 손님이 드셨는데…."

주모는 당황하여 말을 맺지 못했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충청 부사 나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누군지 당장 방을 비우라고 하게!"

"아이 참, 먼저 오신 분을 어찌 내쫓습니까? 저…, 먼저 온 손님도 혼자이신 데다 보아하니 글 읽는 선비 같은데 두 분께서 하룻밤만 같이 지내면 안 되겠습니까? 대신 나리께서 아랫목에 자리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모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당장 방 안에 있는 선비에게 양해를 구했다. 선비는 흔쾌히 승낙하며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 주었다.

충청 부사는 젊은 나이에 벼슬에 오른 사람으로 이번이 첫 부임길이었다. 하여 잔뜩 긴장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한껏 의기양양해 있었다. 충청 부사는 부임지에서 백성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한 잔칫상을 받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로 하룻밤을 주막에서 그냥 보내게 되고 보니 들떠 있던 기분이 그만 상하고 말았다. 게다가 초라한 행색의 선비와 하룻밤을 한 방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불쾌했다.

'거 참, 주제에 양반이라고 갓 한 번 크군. 꼴을 보니 겨우 양반 족보 하나 얻은 모양이구먼….'

충청 부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선비를 바라보다가 거만하게 말을 걸었다.

"혹, 장기 둘 줄 아시오? 이렇게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잠시나마 무료한 시간을 달래 봅시다."

"아, 예. 그러시지요."

선비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부사가 반 하대를 하는 것도 관여치 않고 미소를 지으며 존대하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장기판은 서로 지고 이기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지 충청 부사가 장기 알을 놓으며 말했다.

"거, 노인 양반! 장기 깨나 두셨나 보구려.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소이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이번에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 부사로 임명된 김무사요. 노인 양반은 어디 사는 뉘시오?"

충청 부사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예. 저는 회덕에 살고 있는 송 생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젊으신 분이 부사라니 참으로 훌륭하시오."

충청 부사는 선비의 말에 상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허허, 이것도 무슨 벼슬이라고…. 그런데 노인 양반께서는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모양이오?"

그 때였다.

"나리, 부사 나리!"

밖에서 다급히 충청 부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저, 나리! 잠시만 밖으로 나오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큰 일이라도 난 듯 목소리는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안으로 들어와 고하지 않고…."

충청 부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갔다.

"나리! 큰 일 났사옵니다. 글쎄 방에 있는 선비께서…."

"선비? 아, 그 노인 양반 말이냐? 그런데 그 사람이 뭐가 어쨌다고 이리 호들갑이냐?"

"지금 막 그 선비를 모시고 온 마부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 분은 이번에 이조판서에 오르신 우암 송시열 대감이시랍니다."

충청 부사의 얼굴은 금세 납빛으로 변했다.

 

때는 효종 8년, 효종은 청의 간섭으로 오랜 꿈이었던 북벌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의 동정을 살피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효종은 청나라의 섭정인 예친왕 다니곤이 죽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이제야말로 자신의 염원인 북벌을 실행시킬 때가 왔다고 여긴 효종은 곧 송시열을 조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효종의 부름을 번번이 거절했다. 더 이상 조정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친서를 보내 이조판서에 제수하자 송시열은 신하 된 자로서 이를 거절할 수 없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초라한 행색에다 그를 따르는 이라고는 마부 밖에 없었으니 누가 보아도 신임 이조판서의 행차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송시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임 충청 부사 역시 그 노인이 송시열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뭐, 무엇이라!"

충청 부사의 얼굴은 납빛이다 못해 아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인도 깜짝 놀랐습니다, 나리! 그런 줄도 모르고 아랫목까지 빼앗았으니…."

충청 부사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방자함이 끝내 스스로 목을 치는 꼴이 되고 말았구나! 이조판서를 몰라 보고 무례하게 굴었으니 파직은 물론이고 이제 무관으로서의 길 또한 모두 무산되고 말겠구나!'

가슴을 치며 통탄할 노릇이었지만 이제 와서 엎지른 물을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없이 한동안 마당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던 충청 부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굳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볼 일이 생겨서…. 그런데 노인 양반께서는 회덕에 사신다고 하셨지요?"

충청 부사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회덕에 사는 송씨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소이다."

"뭐, 그렇게까지…."

"제가 사실 회덕의 우암 선생 문하에서 잠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나서요."

"그렇습니까? 내가 그 문하생들은 다 알고 있는데, 선생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아니, 댁이 어찌 그 분의 문하생을 다 안단 말이오?"

"실은 내가 바로 그 우암 송시열이오."

송시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별안간 충청 부사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니, 이 노인 양반이 실성을 했나? 듣자 하니 우리 우암 선생님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가 있다더니 바로 당신이었군 그래! 어디 할 것이 없어서 존망이 높으신 분의 이름을 팔고 다닌다는 말이오?"

난데 없이 충청 부사가 호통을 치자, 송시열은 아연해졌다.

"보시오! 우리 선생님을 욕한 죄를 지금 당장 물고 싶지만 노인 양반의 나이도 있고 해서 내 그냥 참는게요!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했다간 용서치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런 다음 충청 부사는 문을 발로 뻥 차더니 주막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떠날 채비를 하라! 내 우리 선생님을 욕되게 하는 저런 양반과는 하룻밤이 아니라 단 한 시도 같이 있을 수 없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서둘러라!"

당황한 송시열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마당으로 내려간 충청 부사는 포졸들이 채 정렬하기도 전에 말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송시열은 혼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박장대소를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인물다운 인물을 만났어! 어허! 그 부사 성질 한 번 대단하구먼. 내가 역습을 당한 게야. 내가 당했어."

젊은 부사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한껏 의기 충천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송시열은 나중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관리로서 거만한 행동을 삼가라고 한 마디 충고하려 했었다. 그런데 사태는 한 순간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충청 부사는 당당하게 송시열을 꾸짖고는 제 갈 길을 가 버린 것이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충청 부사의 임기응변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웃었다.

"저 정도의 기지와 무공을 갖춘 자라면 장차 나라의 큰 일을 맡겨도 손색이 없겠구나."

며칠 뒤 송시열은 한양에 도착하여 효종을 알현했다. 효종이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송시열은 주막에서 있었던 일을 또렷하게 떠올리며, 주저 없이 충청 부사 김무사를 제일 먼저 추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