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로얄(BATTLE ROYALE) :: 제３부 - 종반전 #.1

[제 3 부] 종반전

 

 

　수풀 속에서 모포를 어깨에 두른 채로, 노리코는 무릎을 안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어둠은 깊은데, 그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벌레가 낮게 울고 있었다. 마치 수명이 다하기 직전의 형광등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가와다와 함께 간신히 이 장소로 돌아온 직후, 오전 0시에 사카모치의 방송이 있었다. 노리코는 보지 못했지만, 미나미 가오리를 죽이고 슈야의 눈 앞에서 달아난 시미즈 히로노(여자 10번)의 이름이 나왔고, 세 군데의 금지 구역이 추가되었다. 1시부터 F=7, 3시부터 G=3, 그리고 5시부터 E=4. 노리코와 가와다가 있는 C=3 구역은 관계 없었다. 그리고 슈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방송 이후 겨우 10분이나 20분 뒤에 다시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고, 머신 건 소리도 나, 노리코의 심장은 오그라들었다. 소리가 계속되었다. 그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틀림없는 기리야마의 머신 건 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같은 총을 가지고 있다면 몰라도. 그리고 그것은 슈야가 또 기리야마에게 쫓기다가 결국은 발각되었나, 하는 끔찍한 추측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와다에게 이야기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났다. 기리야마와 싸울 때의 수류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난 뒤, 희미하기는 하지만 머신 건 소리가 또 한두 번 들려오더니, 그 뒤로는 정적이 찾아왔다. 가와다도 그 소리에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칼 같은 것으로 화살처럼 생긴 것을 만들고 있던 손길을 멈추고,「잠깐 보고 올께. 여기서 움직이지 마.」라며 수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금방 돌아왔다. 

 

　「동쪽에서 무슨 건물이 불타고 있어.」 

　노리코는 「그러면」 하며 물어보려 했지만, 가와다는 고개를 저으며, 

　「우리가 기리야마를 만난 곳에서는 상당히 남쪽이야. 슈야는 북쪽 산으로 도망갔을 테니, 아니야.」 

　라고 말했다. 

　「어쨌든 슈야를 기다리자.」 

　그 말을 듣고는 노리코의 가슴이 일단은 가라앉은 듯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들은 뒤로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 슈야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노리코는 손목을 들어 수풀 틈새로 떨어지는 동전 크기의 달빛에 시계를 비추었다. 오전 1시 12분이었다. 아까부터 기도하듯이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무릎을 안고 스커트에 고개를 파묻었다. 머릿속에선 자꾸만 기분 나쁜 상상이 떠올랐다. 슈야의 얼굴. 언젠가 음악실에서, 쉬는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이매진"이란 노래(록의 스탠더스야, 라고 슈야가 말했다)를 부르던 때, 그 입은 반쯤 열리고,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마에는 힌두교도처럼 검고 큰 점이 나 있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그 점에서 붉은 액체가 솟아 나온다. 커다란 점은 실은 아주 어둡고, 그리고 깊은 구멍이었다. 그 안 쪽의, 뇌가 있는 곳에서 천천히 피가 흘러나온다. 그 피가 슈야의 얼굴에 퍼진다. 마치 유리에 금이 가듯이….

 

　노리코는 고개를 저으며 그 망상을 떨쳐버렸다. 옆에서 조용히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가와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옆에는 직접 만든 활이 놓여 있고, 화살 몇 개가 땅바닥에 꽂혀 있다. 

　「가와다.」 

　어둠 때문에 형체만 보이는 가와다가 입에서 담배를 빼더니, 세운 오른쪽 무릎 위에 그 오른손을 놓았다. 

　「왜?」 

　「너무 늦네, 슈야가.」 

　가와다는 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끝이 붉게 빛나면서, 그 붉빛에 어렴풋이 드러나는 가와다의 얼굴은 아주 무표정했다. 그러자 노리코는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가와다의 얼굴이 다시 어둠에 묻혀 버리고, 그 입가에서 천천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군.」 

　가와다의 담담한 말투가 더 애를 타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와다가 몇번이나 자기와 슈야를 구해준 것을 떠올리며, 노리코는 그 초조함을 억눌렀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렇겠지.」 

　「그렇겠지, 라고?」 

　가와다의 실루엣이 두 손을 들었다. 담뱃불의 위치가 이동했다. 

　「기다려 봐. 아까 그 머신 건은 틀림없이 기리야마야. 누가 똑같은 머신 건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장소에서 폭발이 있었다는 것은, 기리야마는 슈야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싸운 거라고 볼 수 있지. 슈야는 기리야마를 따돌렸어. 그건 틀림없어.」 

　「그런데 어째서 슈야는….」 

　「그건.」 

　가와다가 말을 막았다. 

　「어디선가 몸을 숨기고 있을 거야, 아마. 길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고.」 

　노리코가 고개를 저었다. 

　「부상을 당했는지도 몰라. 그뿐만이 아니라─」 

 

　노리코는 등골이 오싹했다. 더 이상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입을 반쯤 벌린 얼굴에 붉은 피가 거미줄처럼 퍼지는 슈야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슈야는 기리야마를 따돌리긴 했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산속을 도망다니다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한다면, 아니, 혹시 어디선가 기절했다면, 그리고 그게 만약에 금지 구역이었다고 한다면, 슈야는 그대로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 슈야가 도망갔을 가능성이 있는 북쪽 산기슭, 거의 분교 북쪽에 해당하는 F=7 구역은 오전 1시부터 금지 구역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1시가 지났다. 그렇다면 결국….

　노리코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슈야는 절대로 죽지 않아, 왜냐하면 슈야는 기타를 든 성인같은 사람인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그렇지만 항상 힘 있는 웃음을 잃지 않는, 건전하고 투명하고, 순진무구하고, 그렇지만 굳은 마음을 지닌, 내게는 수호천사 같은 사람인걸. 그런 사람이 죽을 리가 없어. 죽을 리가 없어. 그렇지만─

 

　가와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노리코는 또 팔목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픈 다리를 움직여 가와다에게 다가가, 가와다의 무릎 위에 얹은 왼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제발. 슈야를 찾으러 가지 않을래? 함께 가주지 않겠어? 나 혼자는 못해. 제발.」 

　가와다는 아무 말 없이 왼손을 들어올리더니, 노리코의 손을 노리코의 무릎 위에 얹고, 살짝 두드렸다. 

　「그건 안 돼. 혼자 간다고 해도 그렇게 하도록 놔 주지 않을 거야. 그냥 놔두면 슈야가 내게 누님을 맡긴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 녀석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하고 누님을 먼저 보낸 의미가 없어진단 말이야.」 

　노리코는 입술을 깨물며 가와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괴로워, 여자애들이 그런 표정 지으면.」 

　가와다는 담배를 든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너는 슈야를 좋아하는 거지?」 

　노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주어 끄덕였다. 가와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뜻에 따라 줘.」 

　그러자 노리코는 다시 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네.」 

　「그래.」 

　가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가와다가 「육감이라고 하는 거, 믿니, 너는?」 하고 물었다. 

　약간 엉뚱한 화제 같은 느낌이 들어, 노리코는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다른 이야기로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고 하는 걸까? 

　「응… 조금은. 잘은 모르지만.」 이라고 대답했다. 

　「…가와다는, 믿어?」 

　가와다는 담뱃불을 땅바닥에 비벼 껐다. 

　「아니. 난 전혀 믿지 않아. 뭐랄까, 무시해도 관계 없다고나 할까? 유령이니, 사후의 세계라느니, 우주의 파워, 육감, 점, 초능력, 그런 것들은 실제로 대응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현실 도피를 하려는 멍청이들이 하는 소리야. 미안, 약간 믿는다고 했던가? 하긴 그냥 내 의견이 그렇다고 생각해 줘. 그렇지만 어쨌든─」 

　노리코는 가와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따금 왠지 근거 없이 아직 불명확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가 있어. 그것이 어긋난 적은 없어, 어찌된 일인지.」 

　노리코는 잠자코 가와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와다가 말했다. 

 

　「나나하라 슈야는 살아있어. 돌아올 거야.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노리코는 휴우, 하며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지금 가와다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고마워. 마음씨가 곱네. 가와다.」 

　가와다는 어깨를 으쓱했다. 

　「느낀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야.」 

　그러고 나서 말했다. 

　「슈야는 좋겠다.」 

　노리코는 눈을 움직여 가와다를 보았다. 

　「응?」 

　「이렇게 사랑 받으니까.」 

　노리코는 약간, 아주 살짝 웃었다. 

　「가와다가 오해하고 있어.」 

　「뭘?」 

　「짝사랑이야, 나. 슈야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나 같은 애는 비교도 안 되게 멋진 사람이야.」 

　「그래?」 

　노리코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멋진 사람이야. 뭐랄까, 순결한 느낌이 드는,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사람. 슈야가 반한 게 이해가 가. 안타깝지만.」 

　가와다는 고개를 숙이며 「그런가?」 라고 말했다. 라이터를 두 세 차레 눌러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래도, 지금은 노리코를 좋아하고 있을 거야, 아마.」 

　노리코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돌아오면….」 

　가와다가 웃었다. 

　「애타게 만들었다고 야단치면 돼.」 

　노리코는 또 살짝 웃었다.

　「이제 자 둬. 나는 밤샘을 할 거야. 슈야가 돌아오면 키스로 깨워 주라고 할게.」

　「응…. 고마워, 가와다.」

　노리코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돌아누웠다. 하지만 오래도록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스기무라 히로키는 초조했다. 물론 게임 개시 이후 내내 걸어 다녔기 때문에 피로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카모치가 여섯 시간 간격으로 하는 방송을 들을 때마다, 즉 발표되는 사망자 수를 들을 때마다 그 초조함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더 심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스무 명 아니, 히로키가 알고 있는 한,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열일곱 명이었다. 

 

　미무라 신지가 죽은 것이다. 세토 유타카, 이이지마 게이타와 함께. 나나하라 슈야 일행이 있던 보건소를 나온 뒤, 히로키는 그때까지 가 보지 않았던 섬의 북서쪽 해안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11시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섬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거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총소리는 멈추었고,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뒤 0시에 있었던 방송에서 금지 구역으로 추가되는 곳들이 발표되어, 히로키는 또 그 지역들을 하나씩 짚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1시부터 금지 구역이 된다고 하는 분교 북쪽의 F=7에 들어 갔을 때 한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바로 다시 그 머신 건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평지 쪽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있었기 때문에, 히로키에게 부락 바로 서쪽의 밭 가운데서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몇 번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쪽을 향하여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이 한순간 밝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따르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을 아래로 질러 내려가 보았더니 빛이 번쩍이던 곳에서 무슨 건물이 타고 있었다. 히로키는 그 머신 건을 지닌 놈이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토 메구미 때와 마찬가지로 확인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신중하게 밭 사이를 가로질러 다가갔다. 아직 불길이 남아 있는 거기서 미무라 신지의 시체를 발견했다. 무슨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은 역시 그 불빛이 폭발이었는지, 거의 허물어졌고, 그 옆에 크고 작은 파편들이 흩어진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한 대의 웨곤 차 앞에 신지가 엎어져 있었다. 몸에는 수많은 총탄을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세토 유타카와 이이지마 게이타의 시체도 기왓장에 묻혀 있었다. 

 

　신지와 싸웠을 머신 건을 쓰는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또 다른 "싸울 생각"이 있는 녀석이 나타날 가능성을 생각하여, 히로키는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섬의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너 남쪽 산의 기슭으로 들어서자, 새삼 미무라 신지가 죽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신지를 꽤 아는 자신으로서는 거의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는 방법이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여도 죽지 않을 녀석─신지에게는 그런 이미지가 있었다. 자신은 분명히 무도 도장 같은 곳을 다니며 권법을 익히고 있지만, 그런 것은 기껏해야 기술에 불과하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신지의 신체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다. 아마 시합을 한다면, 가령 자신이 익숙한 권법 룰에 따라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자기가 10센티미터 이상은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신지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신지는 자기보다 훨씬 머리가 좋았다. 설사 이 게임에서 빠져 나가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그러나 그걸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아마 다른 누군가에게 당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신지를 머신 건을 쓰는 누군가가 쓰러뜨린 것이다. 신지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고토히키 가요코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빨리 찾아내지 않으면─자칫해서 그 머신 건을 사용하는 누군가의 손에 걸리면, 가요코 정도는 아마 순식간에 죽고 말 것이다. 

 

　결국 정각 3시부터 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G=3이 남쪽 산, 산꼭대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로키는 그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이 쪽 산을 오는 것도 여러 번째였다. 그리고 G=3과 인접한 산 중턱, H=4 구역 안에는 치구사 다카코의 시체가 지금도 쓰러져 있을 것이다. 묻어 주지도 못하고, 그저 눈만 감 겨주고, 가슴 위에 손을 모아 주기만 한 시체가. 아직 그 곳은 금지 구역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나아가며, 히로키는 멍하니 '나는 지독한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친했던 소꿉친구의 곁에 있어주는 것조차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G=3 구역을 향해 그 곁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해, 다카코.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은 고토히키 가요코를 만나야만 해. 제발 용서해 줘─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토 유타카였다. 유타카는 히로키와 출석 번호가 붙어 있어, 그 분교에서 히로키 다음 다음에 나왔다. 그렇지만 히로키는 그 때, 상황을 파악하고 분교의 출구를 볼 수 있는 곳에 몸을 안전하게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는 이미 유타카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히로키는 우선 다카코를 먼저 챙기기로 결심하고, 다음에 나오는 다니자와 하루카(여자 12번)도, 다키구치 유이치로(남자 13번)도 그냥 보냈던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신중하게 행동했는데도, 아카마츠 요시오의 등장 때문에 다카코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유타카는 어쩌면 사이가 좋았던 신지나 이이지마 게이타와 이럭저럭 합류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유타카도 신지와 함께 시체가 되어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고토히키 가요코만은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지가 별로 없는 나무 옆에서 일단 걸음을 멈추고, 히로키는 다시 왼손에 쥔 레이더를 확인했다. 백 라이트가 없는 액정 화면이라 달빛만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웠지만, 내내 그렇게 해 온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 화면이 만들어 내는 미묘한 그림자를 추적했다. 그러나 역시 화면은 변함이 없이, 히로키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별 표시 하나만 나타내고 잇었다. 히로키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큰소리로 고토히키 가요코를 부르는 것이 더 나을까? 히로키는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 히로키가 치구사 다카코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니.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우선 자신이 부른다고 가요커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도망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질러 자신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가요코가 목소리를 듣고 나오면 가요코까지 표적이 되어 버리게 된다. 

　결국 정부가 지급해 준 간이 레이더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게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히로키는 이 악몽 같은 게임에 자기들을 던져 넣은 정부를 이가 갈리도록 증오하고 있었지만, 이 레이더만은 고마웠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해야 할까? 불행 중 다행이 아니라, 병 주고 약 주고라고 해야 하나? 

 

　풀이 무성한 낮은 언덕을 하나 지나, 나무가 여기저기 서있는 완만한 경사가 나왔다. 이제 곧 다카코가 누워있는 H=4구역에 들어갈 것이다. 히로키는 또 레이더를 들고, 액정 패널에 달빛이 잘 반사되도록 약간 방향을 틀었다. 패널 한 가운데, 히로키 자신을 표시하는 별 마크가 겹쳐져 보였다. 이런! 너무 지쳤나봐. 눈까지 이상해지다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히로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오른손에 잡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익혀둔 봉술 수법 그대로, 허공에 선명한 곡선의 궤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등 뒤에 서있던 그림자의 팔에 몽둥이가 멋지게 맞았다. 그림자는 「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것─권총을 떨어뜨렸다. 그 누군가는 히로키가 생각에 잠겨 잇던 그 순간에 총을 들고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가 땅바닥에 떨어진 총으로 달려갔다. 히로키는 그 바로 앞에 몽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서면서─

 

　그리고 히로키는 보았다. 일단 멈추어 선 그 그림자가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것을. 다음에는 환한 달빛을 받아 또렷하게 보이는 그 아름다운 얼굴─천사처럼 아름다운 그 얼굴─틀림없이, 출발 직전에 히로키가 아직 충분히 몸을 숨기지 못하기도 하고, 그냥 분교의 운동장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자기 바로 뒤를 이어 교실에서 나온 그 얼굴─소마 미츠코(여자 11번)의 얼굴을. 미츠코가 갑자기 얼굴에 두 손을 들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죽이지 마! 제발, 죽이지 말아 줘!」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어, 주름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하얀 다리가 허벅지 근처까지 보였다. 그런 상태에서 또 뒤로 물러서려 하는 그녀의 다리는 창백하고, 아름답게 움직였다. 

　「제발! 말을 걸려고 한 것 뿐이야! 나는 누굴 죽이려는 생각 없어. 제발! 살려 줘! 살려 줘!」 

　히로키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미츠코를 내려다 보았다. 그 침묵을 히로키에게 당장 적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미츠코는 천천히, 눈 앞으로 들어올린 손을 턱까지 내렸다. 겁먹은 작은 동물 같은 눈으로 히로키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눈물이 빛나고 있었다. 

　「믿어 주는 거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에 빛이 비치며, 희미한 웃음이 눈가에 번졌다. 물론 상대를 잘 속여 넘겼다고 하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심했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저어─저어, 나….」 

　그렇게 말을 하며, 그제야 비로소 허벅지가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스커트를 왼손으로 끌어당겼다. 

　「히로키라면,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나, 무서웠어. 내내 혼자서 이렇게 된 게…. 무서워서….」 

　히로키는 잠자코 미츠코가 떨어뜨린 총을 주워 들었다. 격철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한 손으로 풀고, 미츠코에게 걸어가 손잡이 쪽을 앞으로 하고 내밀었다. 

　「아─고마워─」 

　미츠코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딱 멈추었다. 

　히로키가 손 안의 총을 빙글 돌려, 손잡이를 잡았다. 총구가 정통으로 미츠코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아니─뭐야? 뭐 하는 거야, 히로키?」 

　미츠코의 얼굴이 경악과 공포로 일그러졌다─적어도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멋지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마 미츠코에 관해 이런저런 소문이 들린다 하더라도, 이 사랑스러운 얼굴을, 찡그리며 애원하는 모습을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은(특히 남자들이라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믿는게 아니라, 미츠코가 시키는 대로 해 주려고 할 것이다. 자칫하면 히로키도 그렇게 될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히로키에게는 약간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이제 그만 해, 미츠코.」 

　히로키가 말했다. 총을 잡은 채로 약간 허리를 폈다. 

　「나는 다카코를 만났어. 다카코가 죽기 전에.」 

　「아─」 

　미츠코가 아름다운 큰 눈을 떨며, 히로키를 올려다 보았다. 다카코를 확실하게 마무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기색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겁먹은 표정. 이해와 보호를 원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 아니야. 그건 사고였어. 그래, 난 내내 혼자 있었잖아. 그냥 다카코를 만났을 때─다카코 쪽이었어, 나를─나를 죽이려고 한 거야. 그 권총도 원래는 다카코 것이야. 그래서, 그래서 나는─」 

　히로키는 조금 전에 풀어 두었던 콜드 가버먼트의 격철을 찰칵, 하고 다시 세웠다. 미츠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다카코를 잘 알아. 다카코는 사람을 죽이려고 할 애도 아니고, 당황해서 아무에게나 총을 쏘아 댈 사람도 아니야. 아무리 이런 게임 중이라 하더라도.」 

　히로키가 그렇게 말하자, 미츠코가 턱을 약간 치켜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히로키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 입술에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미츠코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였다. 

　후후, 하고 희미하게 미츠코가 웃었다. 

　「즉사한 줄 알았어, 다카코는.」 

　히로키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가버먼트를 미츠코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미츠코는 주저앉은 자세인 채로 왼손 엄지와 검지로 스커트 끝자락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다시 그 아름답고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히로키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나를 살려주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줄게. 나 괜찮아.」 

　히로키는 총을 잡은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츠코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 

　미츠코가 말했다. 가벼운 말투였다. 

　「하긴 그렇지. 빈틈을 보이면 난 너를 죽이려 들 테니까. 그리고 자기 여자를 죽인 여자애하고는 할 수가 없겠지.」 

　「다카코는 내 여자가 아니야.」 

　그러자 미츠코가 다시 히로키의 눈을 바라보았다. 히로키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어머, 그래?」 

　미츠코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왜 쏘지 않지? 네가 페미니스트여서 여자를 쏘지 않는 건가?」 

　자신에 찬 미츠코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치구사 다카코의 맑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데 나오는 전쟁의 여신 같은 미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열네댓 살 먹은 마녀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게 틀림없다. 활달하고, 귀여운, 사랑스러운, 그러나 차가운 느낌이 든다. 달빛을 받아 그 눈 안에 싸늘한 빛이 가득 차있다. 히로키는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어째서 ㅡ」 

　쉰 목소리가 자기 목을 통해 나오는 것이 들렸다. 

　「어째서 넌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애들을 죽이는 거지?」 

　「바보로구나─」 

　미츠코가 말했다. 이마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게 이 게임의 룰이잖아.」 

　히로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다 그 규칙대로 행동하는 건 아니야.」 

　미츠코가 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금 있다가 여전히 생긋 웃으며 「히로키.」 하고 이름을 불렀다. 마치 교실 옆자리에 앉은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아침 홈룸 시간 전에 뭔가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말을 건네는 듯이 친근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너는 분명히 좋은 사람일 거야.」 

　히로키는 까닭을 몰라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입이 약간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미츠코는 노래하듯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어떤 상황에서는 말이야. 그렇지만, 그 사람도 언제든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있어. 어쩌면 평생 좋은 사람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 넌 그런 사람일지도 몰라.」 

　미츠코는 히로키로부터 시선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빼앗기기보다는 빼앗는 쪽이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하는 게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냥 "그러고 싶은 것"이지.」 

　히로키의 입 주위가 무의식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듯이 떨렸다. 

　「─어째서지?」 

　미츠코는 또 생긋 웃었다. 

　「몰라. 그렇지만 억지로 이유를 든다면, 그래 한 가지는 있지─」 

　똑바로 히로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아홉 살 때 강간 당했어. 세 명이 번갈아 가며 세 번씩 말이야. 아, 참. 한 사람은 네 번이었던가? 너 같은 남자가 그렇게 한 거야. 아저씨였지만. 나는 그 때 가슴도 나오지 않았었고, 다리도 막대기처럼 삐쩍 마른 말라깽이 어린애였는데, 그런 게 좋았었나 봐. 그래, 그래. 내가 울면서 소리쳤더니 점점 더 흥분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다음 번에도 그런 이상한 아저씨를 상대하면 우는 시늉을 해 줄 거야.」 

　단숨에 거기까지 쏟아 놓은 미츠코의 여전히 생긋 웃는 표정을 보면서 히로키는 소름이 끼쳤다. 그 끔찍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히로키는 뭐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미츠코의 손에서 은빛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미츠코의 오른손이 등쪽으로 움직인다고 느꼈지만, 그 때는 이미 히로키의 오른쪽 어깨에 다이버용 양날 나이프가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물론 그 칼은 원래 에토 메구미가 갖고 있던, 정부가 지급한 무기였다). 히로키의 목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총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통증 때문에 뒤로 물러났다. 

　미츠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히로키의 옆을 스쳐지나듯이, 뒤에 있는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히로키가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미츠코의 뒷모습이 언뜻 보이더니 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마 미츠코를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고토히키 가요코마저도 그녀에게 걸려들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히로키는 미츠코를 쫓아 갈 수가 없었다. 다만 나이프가 꽂혀, 교복에 피가 배어나오는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누르며, 미츠코가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미츠코의 이야기는 히로키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키는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생각되지는 않았다. 미츠코는 진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아직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히로키는 자기와 같은 중학교 3학년인 여자애가 왜 저렇게 냉혹해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미츠코는 거의 어른의 정신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일그러진 어른의 정신 구조. 아니, 그건 오히려 잘못된 이야기인가? 일그러진 아이의 정신 구조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까? 

 

　옷소매 안쪽으로 흐르는 피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콜드 가버먼트까지 흘러 내려와, 총구 끝에서 가느다란 줄기를 이루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피는 발밑에 쌓인 부엽토에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남은 인원 17명】

 

 

　오전 3시 30분이 지났을 무렵, 오다 도시노리(남자 4번)는 숨어 있던 집을 나왔다. 그 집이 어쩌면 E=4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집에 몸을 숨긴 직후부터 생각했었는데, 그 E=4가 5시부터 금지 구역이 된다고 사카모치가 방송을 통해 발표했기 때문이다. 부엌 문을 역고 나오기 전에, 마루 문 옆에 쓰러져 있던 시미즈 히로노의 엎드린 시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기만 했을 뿐이다. 특별하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승부다. 피차 매일반이다. 사실 시미즈 히로노는 자기를 본 순간 망설이지 않고 총을 쏘았으니까. 자신도 뒤에서 히로노의 목을 조르려고 살며시 다가가기는 했지만. 새로 자리 잡을 곳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망설였지만, 도시노리는 동쪽에 있는 부락 쪽으로 가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지도상의 각 구역의 넓이는 거의 사방 200미터. 그리고 섬의 동쪽 끝에 있는 부락에서 이어지는 좁은 평지는 밭 가운데 듬성듬성 집이 표시되어 있었다. 충분한 여유를 갖고 구역을 벗어나, 거기서 또 적당한 집에 숨으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시로이와 읍에서는 1,2위로 꼽히는 저택에 사는 도련님이었고(아마 1위는 기리야마 가즈오의 집일 테지만, 도시노리는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수풀 속에 숨는 따위의 천박한 행동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미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집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방탄조끼(고성능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이 끝났다)를 입고 있는 데다가, 시미즈 히로노에게서 빼앗은 리볼버를 손에 들고 있다. 게다가─ 숨어 있던 집에서 발견한, 얼굴 전체를 덮는 오토바이용 헬멧을 쓰고 있었다. 

 

　하늘에 옅은 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상당히 낮은 위치에 떠 있는, 꽉 찬 달에 끄트머리를 걸치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그 슈퍼 디럭스 장비, 도시노리는 헬멧의 턱 언저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일단 집마당을 가로질러 바로 옆에 있는 좁은 밭 끄트머리로 내려섰다. 거기서는 동쪽 해안까지 이어지는 평지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평지라고는 해도 군데군데 솟아오른 부분이 있고, 그 대부분을 차지한 밭이 달빛에 아주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왼쪽, 북쪽 산의 기슭을 따라 100미터 더 떨어진 곳에 또 한 채가 있다. 그 약간 왼쪽에는 두 채의 집이 더 있었다.

　거기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뚝 떨어져, 3,4백 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밭 한가운데 듬선듬성 집이 보인다. 북쪽 산에서 고개를 내민 언덕과 잡목이 가득한 숲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잘 보이지 않지만, 평지는 그대로 동쪽 부락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0시에 있었던 사카모치의 방송 바로 뒤에 거센 폭발음이 울리고, 불길이 솟아오른 곳은 그 언덕 맨 끄트머리에서 바로 오른쪽 부근이었다. 그러나 불은 이미 꺼졌는지, 지금은 그곳도 어둠에 잠겨 있다. 

　지금 서 있는 곳의 오른쪽 앞, 남쪽에도 집 두 채가 나란히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지도상에서 민가의 위치를 나타내는 파란 점이 정확한 것이라고 한다면 E=4구역과 F=4구역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리고 뒤쪽은 이미 남쪽과 북쪽에 있는 산이 근접해 있어─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쪽 산기슭이 섬의 서해안 근처로 계속 언덕처럼 뻗어 있어,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에 따르면 산 쪽으로 한두 채의 집이 있는 것 같았다. 

 

　지도를 잘못 읽은 것이 아닌 한, 동쪽으로 세 번째 집, 또는 네 번째 집의 위치까지만 움직이면 일단 금지 구역은 빠져나간 셈이 될 것이다. 다만 가까이 가 보아, 지나치게 지저분하고, 누추한 집이라면 다른 집을 찾아 좀더 갈 생각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도시노리는 우선 지저분한 집이 너무 싫었고, 품위 없는 곳에는 품위없는 녀석들이 모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도시노리는 그쪽을 향해 움직이기로 했다. 

 

　밭두렁 옆을 따라, 몸을 낮추고 신중하게 걷기 시작했는데, 발에 달라붙는 그 귀찮은 흙의 촉감 때문에 도시노리는 짜증이 났다. 시미즈 히로노(그 까진 계집애!)에게 방탄조끼 위로 총을 맞은 복부의 묵직한 통증도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형편없는 게임에 말려 들어와서, 학급의 어중이 떠중이 같은 애들과 (이건 현의 동부지역 최대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도시노리의 아버지가 집에서 자주 쓰는 말로, 그 자신은 "보통 애들"을 깔보는 말로 자주 쓰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는 좋은 집안 자식 티를 내야 했기 때문에 도시노리는 결코 그 단어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함께 땅바닥을 기어 다녀야 하는 걸까? 

 

　오다 도시노리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도의 문제로 놓고, 각 특별활동 부서의 에이스 급에서 남녀 불량 대표, 게다가 오카마까지(그 오카마는 이미 죽었다, 정말 천박한 오카마였다), 다들 나름대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좋을 B반 안에서도, 아니 시로이와 중학교 전체에서도 그는 분명히 약간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 바이올린을 시작해, 지금은 중학생으로서는 현 내에서 손꼽히는 연주가가 되어 있다. 천재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렇다고 평범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음악과가 있는 도쿄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 진학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고, 아마 나중에는 현 정부의 교향악단 지휘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노리는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가라는 명성을 얻어, 적당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해, 돈이 많은 품위 있는 사람들과 사귄다(회사는 형인 마메노리가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돈을 잘 버는 사장이라는 자리는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도시노리는 식품회사처럼 별 볼일 없는 업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건 품위가 떨어지는 형이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학급의 다른 애들 같은 어중이 떠중이와는 다르다. 놈들은 죽어도 상관 없는 녀석들이지만, 나는 재능을 타고 났고,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해도, 다른 애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 살아 남아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게임 스타트 시점에서는 방탄조끼 같은 엉뚱한 것을 받고, 몰래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총을 갖고 있다. 가차 없이 죽일 작정이었다. 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도 아름답다고? 그런 소리는 멍청이나 하는 이야기다. 분명히 나는 아직 열다섯 살 밖에 안 되고, 세상을 그리 많이 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음악가의 세계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다. 천재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천재에 이르지 못하는 재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연줄과 돈이 전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능을 얼마나 박살내는가, 자기가 어떻게 박살나지 않고 살아남는가가 중요하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어쨌든 도시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3학년 B반의 "어중이 떠중이" 가운데 친한 친구는 당연히 있을 리라 없었다. 그는 오히려 천박한 클래스 메이트들을 증오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는 나나하라 슈야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노리는 "특히 천박한 어중이 떠중이"가 모이는 시로이와 중학교의 음악부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 패거리들은 한없이 천박한 파퓰러 음악만 연주했다(음악부실에는 불법적인 수입 음악의 악보까지 굴러다니는 지경인 것 같았다). 그랬다, 특히 나나하라 슈야. 

 

　어렸을 때부터 단련된 음감, 복잡한 연주법의 이해도, 음악적 레벨에서 이야기하면 수준은 도시노리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학급의 천박한 암컷들은 나나하라 슈야가 유치원생 같은 초보적인 코드로 기타를 치는 천박한 소리에 까악까악 소리를 질렀다(음악 시간 전의 짧은 쉬는 시간에 나나하라 슈야의 연주에 귀를 귀울이는 여자애들의 표정에는 "아아, 슈야! 나 너하고 하고 싶어. 지금 당장, 여기서" 라고 하는 식의 아주 굵은 고딕체 글자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도시노리가 음악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오페라의 한 대목을 멋지게 연주할 때는 마지못해 박수를 치던 것들이. 그것은 일단 암컷 어중이 떠중이들이 고상한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일 테고, 또 하나는 단순히 나나하라 슈야의 얼굴이 잘 생겨서일 것이다(도시노리는 그렇게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심층 심리 수준에서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이 너무 싫었다). 

　상관 없다. 여자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기껏해야 다른 생물에 불과하다. 아기를 낳기 위한(아아, 그리고 물론 남자가 필요할 때는 필요한 만큼의 쾌락을 얻기 위해) 도구에 불과하고, 외모가 어느 정도 괜찮으면 성공한 남자 곁에 놓아 두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렇다. 문제는 돈과 연줄이다. 그리고 내게는 돈과 연줄을 쓸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재능이 있다. 따라서─

　살아 남아야 하는 건 바로 나다. 

 

　밤 사이에 이따금 총소리가 들려왔고, 무엇보다 그 엄청나게 큰 폭발도 있었지만, 지금 섬은 어둠에 싸여 다시 아주 고요해졌다. 도시노리는 이윽고 첫 번째 집을 우회하여 지나친 다음, 두 번째 집으로 다가갔다. 거의 윤곽만 보이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낡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 주위를 둘러싸듯 나무가 심어져 있고, 바로 앞 서쪽 방향으로 유난히 잎이 넓은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다. 밑둥치 둘레가 거의 4,5미터 정도, 높이는 7,8미터 정도 될까? 설마 저 위에 누가 있는 것은 아닐 테지─

　도시노리는 총을 움켜쥐고, 집 뿐만이 아니라 그 나무에도 주위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물론 이따금 발길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편없는 것들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가 없다. 바퀴벌레가 그 좋은 예이다.

　거의 5분 정도를 들여가며 그 집의 옆을 통과하면서,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크고 작은 나무에 둘러싸인 그 집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헬멧의 정면에 있는 사각 창 같은 시야 안에는 특별히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좋았어. 

　목표로 잡은 세 번째 집은 이제 아주 가까워져 있었다. 

　도시노리는 고개를 다시 한 번 돌렸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땅바닥 가까운 곳에 둥그렇게 생긴 검은 것이 살짝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라고 깨달았을 때, 도시노리는 이미 그쪽을 향해 총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이제 곧 금지 구역에 들어갈 이 지역에서 아직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도대체 누구일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손에 쥔 콜드 하이웨이 패트롤 맨의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서 상쾌한 자극이 전해지면서, 약간 가벼운 격발음과 함께 총구에서 오렌지색 불꽃이 튀더니, 도시노리의 등줄기를 찌릿하게 만들었다. 그랬다. 그는 천박한 어중이 떠중이가 싫었지만, 별로 고상하다고 할 수 없는 취미를─모델 건 수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엽총을 몇 자루 가지고 있었지만, 만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진짜 총을 다뤄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총이다, 제길. 나는 진짜 총을 쏘고 있다! 

 

　도시노리는 두 발을 쏘았지만, 그 누군가는 머리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반격을 해 오지도 않았다. 하긴 당연하다.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 쏘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기는 안심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게 아닌가? 도시노리는 천천히 그림자 쪽으로 다가갔다. 

　「잠깐!」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그 그림자가 스기무라 히로키(남자 11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천박한 공수도 같은 것을 하는 꺽다리(도시노리는 키가 큰 남자애들도 싫어했다. 그의 키는 162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학급에서는 세토 유타카 다음으로 작았다.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첫째, 얼굴 잘 생긴 남자. 둘째, 키가 큰 남자. 셋째, 천박한 남자). 분명히 그 천박하게 머리에 물을 들이고, 천박한 액서세리를 달고 다니는 치구사 다카코와 사귄다는 남자애다. 그런가? 치구사 다카코는 이미 죽었다. 얼굴이 꽤 예쁜 여자애였다. 

　「나는 싸울 생각이 없어!」 

　히로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넌 누구지? 다키구치니?」 

　히로키는 도시노리 다음으로 키가 작은 다키구치 유이치로(남자 13번)의 이름을 말했다. 그렇다. 도시노리와 비슷한 키를 가진, 살아있는 녀석이라면 다키구치와 세토 유타카 정도다. 구로나가 히로시는 이미 죽었다. 어쨌든 도시노리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무슨 헛소리를. 이 게임에서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트릭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도시노리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총을 내렸다. 머리 전체를 덮는 헬멧의 턱 보호 부분을 왼손으로 슬쩍 눌러 내리면서, 

　「난 오다 도시노리야.」 라고 말했다. 아, 말을 약간 더듬는 것이 좋겠군. 

　「미, 미안해. 다치지 않았니?」 

　그러자 스기무라 히로키가 천천히 그 큰 몸을 일으켰다. 도시노리와 마찬가지로 왼쪽 어깨에 데이 팩을, 오른손에는 몽둥이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찢어진 것인지, 뜯어낸 것인지, 교복 오른쪽 소매가 없고, 셔츠도 없어, 오른팔이 맨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깨에 무슨 흰 반다나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몽둥이를 쥔 오른팔은 그 부분만 벌거숭이 미개인 같은 상태였다. 천박한 미개인. 히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리고 도시노리의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헬멧이니?」 

　「아, 그래.」 

　도시노리는 대답하면서 밭의 흙을 밟고 앞으로 나왔다. 좋아, 세 걸음이다. 

　「무, 무서워서, 그래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시노리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거리는 5미터. 빗맞을 리가 없다. 

　히로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늦었어, 늦어. 천박한 공수도 녀석. 천박하게 죽어서, 천박한 관에 들어가, 형편없는 무덤에 들어가거라. 그러면 내가 특별히 천박한 꽃을 바쳐 주마. 그러나 콜드 하이웨이 패트롤 맨에서 튀어나온 불꽃 앞에 히로키의 몸은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바로 전에 예상도 하지 못한 행동으로 히로키가 몸을 왼쪽으로─도시노리 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눕혔던 것이다. 권법 동작을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도시노리가 알 리가 없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그리고 누운 자세에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손이 아닌 왼손으로 총을 빼고 있었다(이것은 도시노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히로키는 미무라 신지와는 달리 교정은 했지만, 원래는 왼손잡이였다). 총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은 걸까, 이 바보는…. 거의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도시노리의 눈이 작은 불꽃을 보았다. 순간 오른손에서 총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엄청난 통증이 오른손 약지에서 폭발하더니, 도시노리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왼손으로 그 통증의 뿌리를 잡았다. 그리고 약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가 죽 뿜어 나왔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아아! 이 녀석, 내 손가락을…. 바이올린 활을 정교하게 다루는 내 오른손 손가락을─! 영화 같으면 총은 날아가도 손가락은 날아가지 않잖아! 

　히로키가 총을 쥐고 다가왔다. 도시노리는 오른손을 쥔 채로 헬멧 안에서 겁먹은 눈으로 히로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솟아나는 식은땀으로 헬멧 안의 얼굴이 번질번질해져 있었다. 

　「싸울 생각이 충분하군.」 

　히로키가 말했다. 

　「쏘고 싶지 않지만…. 쏘지 않을 수가 없군, 아무래도.」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없었고, 통증이 심했지만, 어쨌든 도시노리에겐 아직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그 총구는 도시노리의 배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노리가 헬멧을 쓰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 방탄조끼 이상으로 그 부분을 겨냥하지 않고, 도시노리의 몸통을 겨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교복 아래는 방탄조끼가 있는 것이다. 방탄조끼가 총을 막아주면 그 틈을 노려 자기 총을 다시 쥐면─검지는 아직 있으니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그리고 이긴다. 

 

　도시노리의 총은 발쪽에 떨어져 있었다. 도시노리의 번쩍이는 시선 끝, 스기무라 히로키는 또 약간의 시간을 두었지만, 우뚝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차분한 눈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도시노리는 시미즈 히로노와 싸울 때를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리얼하게 "죽는 척 할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노리의 예상 이상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철컥, 하는 작은 금속음이 났을 뿐이었다. 

　히로키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한 번 더 격철을 일으켜,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철컥. 일그러진 웃음이 헬멧으로 숨긴 도시노리의 입가에 떠올랐다. 공수도 녀석. 그건 불발탄이야. 그 오토매틱은 한 번 더 노리쇠를 당겨서 새 총알을 장전하지 않으면 쏠 수가 없어. 도시노리는 발 밑에 떨어진 자기 총으로 잽싸게 손을 뻗었다. 히로키는 순간 오른손의 몽둥이를 휘두르려 하다가─거리를 재고는 포기했는지, 몸을 돌려 집 반대편의 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시노리는 총을 주워 들었다. 손가락을 잃은 손은 통증이 심했지만, 간신히 총을 잡을 수는 있었다. 쏘았다. 손잡이의 홀드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의 중심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히로키의 오른쪽 대퇴부─엉덩이 근처에 명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스치기만 한 걸까? 그래도 히로키의 몸이 휘청, 하고 휘었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계속 달렸다. 도시노리는 자기도 달려 나가면서 한 발을 더 쏘았다. 이번에는 맞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상쾌했던 총의 반동이 상처 입은 손을 아프게 해, 도시노리는 더욱 화가 났다. 그리고 한 발 더. 이것도 맞지 않았다. 다리를 맞았는데도, 히로키가 더 빨리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로키는 산기슭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제길! 

 

　쫓아가야 할까, 어째야 할까. 도시노리는 망설이다가 포기했다. 상대는 부상을 입었지만,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져버린 약지에서 나오는 피 때문에 총의 손잡이가 젖어 있었다. 그리고 산 속으로 들어간 히로키가 다시 총알을 장전하여 반격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폐물도 없이 몸을 무방비 상태에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서둘러 몸을 낮추었다. 

　처음에 목표로 삼았던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모습을 히로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도시노리는 총을 잡은 채로 오른손을 누르고, 통증을 참으면서 비틀비틀 그 쪽으로 걸어갔다. 밭두렁을 걸으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 때문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일단은 이 손이다. 이 손을 먼저 치료해야만 한다. 그리고 전투 태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아아, 제길! 재활 훈련을 해서 다시 바이올린을 잡게 된다고 하더라도 손가락을 잃은 손은 연주할 때─특히 텔레비전 중계를 할 때 클로즈업 되면─틀림없이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이제 나도 그 사이 좋은 그룹, 장애자가 되는 것이다. 장애를 극복한 우아한 연주. 제길, 한심하군! 

 

　목표로 하는 집은 이제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도시노리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지만, 스기무라 히로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다. 쫓아온 것 같지는 않다. 도시노리는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들어가려던 집 앞, 6,7미터 건너편 쪽 밭두렁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불쑥 솟아난 듯이 나타난 남자를. 목이 약간 지나치다 싶게 긴 올백 머리, 그 얼굴에 빛나는 차가운 눈을. 

 

　기리야마 가즈오(남자 6번)였다(도시노리가 싫어하는 타입 1, 얼굴이 잘 생긴 남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따르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불꽃이 거칠게 뿜어 나오더니, 도시노리의 상반신에 몇 번인가 충격이 느껴졌다. 도시노리는 뒤로 밀리면서 벌렁 자빠졌다. 통증 때문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했던 오른손에서 콜드 권총이 빠져나가, 약간 오른쪽에서 툭, 하고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등이 주르륵 땅바닥에 미끄러졌다. 이어서 헬멧을 쓴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총소리의 메아리가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물론, 오다 도시노리는 죽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 사악한 기쁨, 오른손에서 전해오는 심한 통증, 스기무라 히로키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 혹은 싫어하는 타입의 남자에게 급습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고 해야 할 테지만, 어쨌든 시미즈 히로노에게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몸(오른손 약지만 빼고)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역시 헬멧을 쓰고 있기를 잘했던 것이다. 기리야마도 방탄조끼로 보호되고 있는 도시노리의 몸통을 겨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기리야마는 시미즈 히로노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노리가 죽은 줄 알 것이 틀림없다. 

 

　아주 살짝 뜬 눈꺼풀 사이로, 영화의 파노라마 스크린 같은 그 시야 끄트 머리에 콜드 권총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교복 바지 뒤에 꽂아 둔 식칼을(이것은 시미즈 히로노를 죽인 그 집에서 가져 온 것이다). 딱딱한 감촉은 지금도 거기 있었다. 칼날을 감은 헝겊을 푸는데는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도시노리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면서 생각했다. 땀이 흐르는 것은 도저히 의지로는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자, 저기 떨어진 내 총을 주워라. 그러면 나는 너의 그 천박한 숨통을 식칼로 끊어주마. 혹시 등을 돌리고 그냥 가 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스기무라 히로키를 쫓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총을 집어 들고, 너의 그 천박한 뒤통수에 공기 구멍을 하나 뚫어주마. 자, 어느 것이든 좋다. 어서 골라라.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기리야마는 땅에 떨어진 권총 쪽을 향하지 않고, 똑바로 도시노리 쪽으로 걸어왔다. 도시노리를 그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어찌된 일이지? 도시노리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봐, 이렇게 완벽하게 죽은 모습이 어디 있어? 기리야마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똑바로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이미 죽은 거야! 왜 이러지? 

 

　부드러운 흙을 밟는 희미한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시야에 기리야마의 모습이 가득 찼다. 문득 공포감과 낭패감이 도시노리를 휩싸, 도시노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헬멧을 쓴 그의 머리를 향해 기리야마의 잉그램이 불꽃을 뿜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쏜 그 총탄 가운데 몇 발인가는 헬멧의 강화 플라스틱 표면을 깎아내며 다른 색깔의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몇 발은 도시노리의 두개골을 관통한 다음, 헬멧 안에서 튕기자 도시노리의 머리가 헬멧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렸다(몸은 기묘한 부기 춤을 추었다. 분명히 그런 천박한 춤은 본인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리고 당연히 그런 움직임이 끝났을 때는 도시노리의 머리는 헬멧 안에서 이미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이번만은 죽은 척을 하는 게 아니었다. 도시노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수프나 소스를 담은 그릇 모양이 된 헬멧의 끄트머리, 목과의 경계 부분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렇게 해서 천박한 어중이 떠중이들이 너무 싫었던, 너무나 어리석은, 오다 도시노리는 방탄조끼의 존재를 과대평가하고, 기리야마 가즈오의 냉정함을 과소평가한 덕분에 죽고 말았다. 

 

　전날 아침에 구사카 유미코와 기타노 유키코의 죽는 모습을 잘 관찰했다면 마무리를 확실하게 하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지만, 그에게는 그런 정도의 학습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또 그에게는 이미 관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을 쓰러뜨린 남자, 기리야마 가즈오가 얼마 전 시로이와의, 도시노리의 집보다 더 큰 저택의 테라스에서 도시노리보다 훨씬 우아한 솜씨로 바이올린을 연주해 보였다는 사실을(그리고 그가 연주한 뒤에 바이올린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렸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남은 인원 16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