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2권- 사막의 호랑이 :: PHASE.4 에이프릴리우스

우주 공간이 떠 있는 모래 시계처럼 생긴 플랜트, 에이프릴리우스 원. 그 밑부분에 펼쳐진 바다의 어느 섬에서 아스란 자라가 일렉 카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주변은 한적한 주택가였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한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윽고 그는 고급 주택지 중에서도 특히 넓은 땅을 소유한 어느 대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에 접어 들었다. 문 앞에서 차를 세우자, 기둥에 설치된 카메라가 차량을 인식하고 녹색 불이 켜졌다.

「확인했습니다.」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를 모방한 합성 음성이 들리자, 아스란이 렌즈 앞에 신분증을 내밀었다.

"인식번호 285002, 크루제 부대 소속 아스란 자라. 라크스 양과 면회 약속이 있습니다."

컴퓨터가 데이터를 조합한 뒤 문을 열자, 아스란이 다시 차를 몰았다.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기다리는 동안, 아스란은 맨 처음 이 저택에 찾아 온 날을 떠올렸다.

열 네 살이 된 어느 날, 부친이 느닷 없이 라크스 클라인이 네 약혼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부터 라크스는 이미 플랜트 최고의 가수로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 유명인이 자신의 약혼자라고? 아스란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이 곳을 방문했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라크스 클라인이 계단 위에 나타났다. 가볍게 부풀린 분홍색 머리카락,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 아스란을 알아 보고 부드러운 볼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모습은 그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문득 아스란은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다. 예전에는 자신을 둘러 싼 세계가 지극히 단순했다.

"어서 오세요.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를 둘러 싸고 다양한 색채의 하로가 통통 튀어 다녔다.

「하로, 하로, 아스란!」

아스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 늦으신 거예요?"

라크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아스란이 머뭇거리며 가져온 꽃다발을 내밀자,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인사하며 받아 든 뒤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주위를 하로가 시끄럽게 뛰어 다녔다. 아스란이 직접 조립해서 올 때마다 하나씩 선물했지만, 이제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귀찮을 정도다.

"하로가 왜 저러죠?"

"손님을 환영하나 봐요.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라크스는 익숙한지 느긋하게 말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스란은 통통 튕기는 하로를 피하면서 그녀를 뒤따랐다.

"저…, 죄송합니다. 오히려 번거롭게 한 것 같군요…."

마음에 들었다는 라크스의 말에 들떠서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선물한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하지만 라크스는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당신이 손님이라서 저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이렇게 집으로 찾아 와 주신 게 얼마 만이죠?"

"…죄송합니다."

자주 오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려서 아스란이 사과하자, 라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녀가 질책할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둘은 긴 복도를 지나 저택 쪽에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발 밑에 다가온 상자 모양 로봇을 향해 라크스가 "오카피" 라고 이름을 불렀다.

"꽃을 가져가서 앨리스 씨에게 건네 주렴. 그리고 홍차를 부탁할게."

심부름용 로봇을 향해 마치 사람 대하듯이 말을 거는 버릇도 여전하다. 그녀는 로봇의 짐 칸 부분에 꽃다발을 얹었다.

이 오카피가 소위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라크스가 어릴 때부터 있었다는 그 로봇은 당시에도 이미 골동품이나 다름 없었고, 아스란이 방문했을 때 이상한 소리와 함께 동작을 멈춰 버렸다. 말을 들어 보니 라크스가 위에 올라 타서 오래 된 부품이 부러진 모양이다.

"어째서 그러셨죠?" 라고 아스란이 묻자, "어릴 때 그러고 놀았거든요." 라고 라크스가 대답했다. 체중의 변화와 로봇의 적재 중량을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점이 그녀 다웠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사이 좋았던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를 본 아스란이 자신이 고쳐 보겠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리하여 되살아 난 친구의 모습에 라크스는 크게 기뻐했고, 아스란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 보았다. 아스란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스크린 상의 '라크스 클라인'보다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둘의 관계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구식 심부름 로봇을 생물 대하듯이 다루는 라크스에게 아스란이 손수 만든 애완 로봇을 선물한 것을 제외하고는…. 하로를 받은 라크스는 아스란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뻐했고, 지금도 여전히 귀여워했다.

둘은 잠시 정원을 산책한 뒤, 정자에 걸터 앉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주위를 어지럽게 뛰어 다니는 하로가 너무 시끄러워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라크스가 테이블 서랍에서 펜을 꺼냈다.

"네이비, 이리 온."

그녀는 하로를 각자 색깔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름을 불린 남색 하로가 통, 하고 튕겨서 그녀의 무릎에 올라 앉아 「하로, 건강해」 라고 말했다.

"오늘은 수염을 그려 줄게."

라크스는 남색 하로 위에 양 쪽 끝이 치켜 올라간 수염을 그리고는 살짝 밀어 냈다.

"자, 수염이가 오늘의 술래~!"

그 말을 들은 하로들이 일제히 수염이 그려진 남색 하로를 쫓아서 정원 밖으로 굴러 갔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아스란이 입을 열었다.

"추도식 전에 돌아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2월 14일, 피의 발렌타인으로부터 1년. 플랜트는 희생된 유니우스 세븐을 위해 거국적인 추도 행사를 마련했다. 최고 평의회 의장의 딸이자 추도 위원단 대표인 라크스가 그를 초대했지만, 결국 아스란은 전선에서 귀환하지 못했다. 하지만 라크스는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머님을 위해서 제가 대신 기도 드리고 왔어요."

아스란이 허둥지둥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스란은 피의 발렌타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기는 커녕 전쟁터에서 새로운 죽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의문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오카피가 운반해 온 홍차를 라크스가 손수 아스란의 잔에 따랐다.

"귀환 소식을 듣고 언제 만나 뵐 수 있을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느긋하게 쉬시다 가실 건가요?"

"글쎄요…. 휴가 일정이 언제 바뀔지 몰라서…."

아스란이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찾아 올 때마다 라크스는 과분할 정도로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재미있는 농담 한 마디 던지지 못하는 답답한 자신과, 또 만날 기회조차 소원해진 현실이 미안하기만 했다. 다시 만나자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약속을 어기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반짝이며 빛나는 바다 위를 날아 온 작은 새가 정자 위에 멈추었다. 라크스가 과자 부스러기를 내밀자 새가 발톱을 탁탁거리며 내려와 그것을 받아 먹었다. 문득 그녀가 중얼거렸다.

"…요즘 다시 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들었어요. 제 친구들도 많이 지원하러 가더군요."

그녀답지 않은 우수에 젖은 표정을 보고 아스란이 난처해서 시선을 돌렸다.

자프트 군은 대부분이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니우스 세븐에서 일어난 참상을 목격하고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 코디네이터는 없었다. 따라서 사기가 왕성하고 뛰어난 병사들이 많다는 것이 자프트 군의 특징이었다. 라크스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이 점점 확대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스란이 중얼거렸다. 아스란은 하루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어서 군대에 들어갔지만….

"그러고 보니…."

라크스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키라 님은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요?"

그 이름을 듣자 반사적으로 아스란의 몸이 경직되었다. 라크스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후로 만나 보셨나요?"

아스란의 머릿속에 푸른 지구를 향해 거꾸로 추락하는 스트라이크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키라….'

"…그 녀석은 지금 지구에 있습니다. 아마도… 무사하겠지요."

아스란이 자신의 희망을 담아서 그렇게 대답했다.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진 키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에게 기묘한 친근감을 갖고 있는 라크스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죽마고우라면서요? 그렇게 들었어요."

'누가 그런 말을…? 그렇군, 키라가 말했구나.'

라크스가 아크 엔젤의 포로로 잡혀 있을 때, 키라가 그녀에게 아스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스란이 그녀에게 키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형제처럼… 늘 함께 지냈죠."

아스란이 말을 끊었다. 눈부신 기억이 되살아나서 현재의 자신을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 무렵에는 전쟁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곁에는 키라는 물론 어머니도 살아 계셨다.

"하로에 대해 말씀 드렸어요."

라크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당신이 여전하다면서 즐겁게 웃으셨죠."

아스란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크스는 키라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토리도 당신이 만들어 주신 거라며…."

'토리…. 맞아, 잊고 있었군. 헤어지는 날, 키라에게 건네 준 새 모양 로봇…. 키라는 늘 그것을 갖고 싶어했지.'

테이블 위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새를 바라보던 아스란은, 이어진 라크스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키라 님도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네. 다음에 보여 주신다고 하셨죠. 결국 볼 기회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그랬군요."

가슴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애절했다. 차라리 그 말을 듣지 말걸 그랬다. 키라도 아스란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 적대 관계에 놓인 이 상황을 그도 가슴 아파 한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란은 이어지는 라크스의 말에 얼어 붙었다.

"저는… 그 분이 좋아요…."

아스란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라크스의 눈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장난스러웠다면 아스란의 마음이 놓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행복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스란은 말 뜻을 되묻지 못하고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워 했다. 그녀가 말한 '좋아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스란과 라크스는 처음부터 부모가 정한 약혼자라는 입장으로 만났다. 딱히 사귀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라크스도 약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연애 감정이냐 하면, 아스란은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존경할 수 있고,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 지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라크스는 어떨까? 아스란은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되어 그가 돌아가려고 하자, 라크스가 무척 안타까운 듯이 그를 붙잡았다.

"저녁을 함께 드시고 가면 안 될까요…?"

그녀가 어린 아이처럼 졸랐다.

"의회 일이 끝나면 아버지가 바로 돌아오실 거예요. 당신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아스란이 난처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휴가 동안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어서…. 자주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더 이상 붙잡지 않겠어요."

라크스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하자, 아스란이 당황해서 말했다.

"시, 시간이 나면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녀의 모습에 다시 환한 미소가 되살아 났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진무구한, 편안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스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얼굴을 가져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크스는 도중에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스란은 그녀의 부드러운 볼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댄 뒤 바로 떼어 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지금까지 인사의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아… 안녕히 주무세요."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아스란에게 라크스는 오히려 담담한 모습으로 생긋 웃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즐거운 휴가를 보내시길…."

 

 

「저는 지금 지구를 독점하거나 전쟁을 계속하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TV를 통해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하는 사람은 아스란의 부친, 패트릭 자라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들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니콜은 소파에 편히 앉은 채, 화면에서 흘러 나오는 국방 위원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니콜은 플랜트 중 하나인 마이우스 시에 있는 집에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로 돌아온 외아들을 그의 부모는 반갑게 맞이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외출 준비가 더 급한 모양이다.

"여보~! 시간 다 되었어요!"

"알고 있소."

차분한 성격의 아버지와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어머니는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아들인 니콜이 봐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매사에 느긋하기만 했다. 니콜의 어머니 로미나가 "어머나? 그이 가방을 어디에 뒀지…?" 라고 말하면서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있어요. 아까 들고 나오셨잖아요?"

"어머, 넌 참 눈이 좋구나. 우리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니까."

니콜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로미나는 가방을 꽉 끌어 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TV에서 패트릭이 연설을 계속했다.

「중립을 선언했던 오브의 배신, 지난 번의 라크스 양 인질 사건 등…. 그들을 믿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건 그래…."

외출한 줄 알았던 아버지가 니콜 곁에 서서 패트릭의 말에 찬성했다. 니콜의 아버지, 유리 아말피는 마흔 한 살이라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으나, 다정하면서도 늘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방 위원의 일원이며, 기계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원인 그는 모빌 슈트 개발에 종사하고 있으나 사상적으로는 온건파에 속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자라의 말이 옳아. 난 반대하는 클라인을 이해할 수 없다."

"네."

니콜은 TV를 바라본 채 끄덕였다.

"네가 조종하는 블리츠의 구조 데이터를 봤단다. 그걸 보면… 누구라도 위기감을 느낄 거다."

"맞아요. 조종하는 제가 하는 말이니까 틀림 없어요. 아버지, 지각하시겠어요."

시계를 쳐다보며 니콜이 말했다.

"아차!"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니콜이 TV 전원을 끄고 배웅 나갔다.

"차가 도착했어요."

이미 현관에 나와 기다리던 로미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의 모습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십대 아들을 가진 주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젊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를 최대한 빨리 가결시켜야겠다."

유리는 패트릭 자라가 주창하는 작전명을 입에 담았다. 그것은 지구 침공 작전 '오퍼레이션 우로보로스'의 최종 단계이자, 지구 연합군이 총력을 기울여 지키는 최후의 우주항 파나마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이다.

"자라의 주장대로 우린 언제까지나 전쟁을 질질 끌고 살 수는 없어."

"크루제 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니콜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잠시 니콜을 돌아 보았다.

"그렇지…. 새로운 작전이 가결되면 네가 다시 떠나는구나. …우릴 용서해 다오."

"아버지…."

새삼스러운 부친의 말에 니콜은 조금 서먹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로부터 진지하게 감사의 말이나 사과를 듣고 당황하지 않는 십대 소년이 있을가. 그런 점에 있어서 니콜은 다른 소년과 다를 바 없다.

"니콜, 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처럼 네가 돌아왔는데 나도 중요한 회의만 아니면 에이프릴리우스에 가고 싶지 않구나."

"할 수 없죠. 시민의 도리인 걸요."

"밤에 전화하마."

"아버지, 차가 기다리잖아요."

니콜은 아버지가 셔틀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아버지는 다 큰 아들의 담담한 태도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에는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리고, 출발하기 직전에 뽀뽀해 줬는데…."

"그건… 세 살 때 얘기잖아요?"

어이 없는 표정으로 니콜이 지적했다.

"여보, 제가 대신 뽀뽀해 드릴게요."

아내의 위로에 약간 기운을 차린 유리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니콜, 집에 있는 동안 편히 지내면서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려무나."

니콜은 속으로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면서도 그 말을 고맙게 받아 들였다.

"네.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아들이 천사처럼 미소 짓자, 유리는 기쁘면서도 아쉽다는 표정으로 떠났다.

어머니가 아래까지 배웅하기 위해 함께 나가자, 니콜이 한숨과 함께 짧게 웃었다. 도대체 누가 부모고 자식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 없었다.

그보다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지구에 대한 병력 증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결될 확률이 높다. 이자크와 디아카에 이어 자신도 지구로 내려가게 될지 모른다. 이것이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기뻐했을 수도 있다. 지구에 가 보는 것이 그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위대한 음악가들이 활약하던 시대 그대로 보존된 옛 도시를 방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여행은 관광용 셔틀이 아닌 내열 캡슐에 둘러싸인 좁은 모빌 슈트의 조종석에 갇힌 채 시작되고, 행선지는 자신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장소가 될 게 분명하다. 현재 전투는 주로 저위도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 문을 열었다. 그 곳은 어릴 적부터 니콜이 가장 좋아하는 방,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니콜은 피아노 건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두 손을 건반에 얹은 뒤, 제일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면….'

니콜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 피아니스트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까….'

아버지의 연구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고 그 밖에도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 같지만, 살벌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에게 음악 이상으로 위안을 주는 존재가 없었다. 다른 분야를 개척하는 것은 그 뒤에 선택하면 된다. 니콜은 아직 열 다섯 살이고, 앞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돌아 온 어머니가 음악실을 들여다 볼 무렵에는 그는 작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채 자신의 손가락이 자아내는 선율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여 주고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등 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모빌 슈트 전투 영상을 보던 패트릭 자라가 스크린에서 시선을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현 최고 평의회 의장, 시겔 클라인이다. 평의회 회의장에 있는, 소수 모임에 활용되는 소회의실 스크린을 통해 곧 있을 회의에 사용할 녹화 영상을 점검하던 패트릭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클라인이 그 말에 반박했다.

"정확하게 자네가 선택한 정보 말인가?"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패트릭은 지금까지 최대한 시민과 의원들의 위기감을 자극했고,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몰아 세우려 했다. 물론 특별하게 자극할 필요조차 없었다. '피의 발렌타인'에서 시작된 전쟁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 지구 연합군이 극비리에 개발한 신형 모빌 슈트가 발견되자 이미 여론은 급격히 전쟁의 확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예상 외로 약한 지구 연합군과 선전 분투하는 자프트 군의 영향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네의 제출 안건,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는 오늘 내로 가결될 걸세. 여론도 그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까…. 더 이상 막을 방도가 없어."

클라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려움은 다른 공포를 부르고, 증오는 증오심을 가중시킨다. 처음에는 작은 돌멩이가,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동안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모든 것을 삼키면서 점차 가속이 붙는 것과 같다. 그는 곁에서 지켜 보는 수밖에 없다.

패트릭이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국민 총의에 의해 움직이는 겁니다. 시겔,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전쟁이 확대되면 원성도 높아지는 법이지. 자네는 어디까지 가려는 건가?"

클라인이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하지만 패트릭은 굳은 표정을 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조기 종결을 시도하려는 겁니다! 전쟁은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럼 어디까지 가야 끝날까? 적과 우리 모두가 멸망한 뒤에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왜 모르나?!"

두 남자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 스크린에서 반사된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스크린에서 거대한 전함이 불을 뿜으며 터졌다. 패트릭이 탁상 패널을 조작해서 녹화 영상을 멈추었다. 스크린이 어두워지면서 실내등이 켜졌다.

"우리 코디네이터는 인류와는 다른 새로운 종족입니다. 내츄럴의 진화에 동조할 필요는 없소."

그렇게 단언하는 패트릭을 향해 클라인이 다가갔다.

"이미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우리들이 어떻게 새로운 종족이라고 할 수 있나?! 혼인을 강화해도 제３세대의 출산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꿈을 구현한 코디네이터들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유전자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아름답고 영리하며 병에 잘 걸리지 않는 강인한 육체를 가진 신 같은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그들 종족의 미래였다. 한 발 앞선 미래를 지향하며 태어난 그들에게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단한 모순이 아닌가.

그렇기에 클라인은 지금 그들이 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패트릭은 조기에 종결시키기 위해 과감한 병력 증강을 선택했다. 패트릭이 흥분된 목소리로 반박을 계속했다.

"지금까지도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했잖습니까! 이번에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를 하나로 모은다면…!"

끝까지 강경하게 주장하는 패트릭을 답답하게 생각하면서 클라인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패트릭!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니 만드는 게 아냐!"

"마치 블루 코스모스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 따위 개념과 가치관이야말로 시대 착오라는 것을 제발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패트릭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진화합니다!"

"그것만이 행복인가?!"

클라인은 이미 어떤 설득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래의 인류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패트릭은 자신들이 잘못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 내츄럴을 제거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정확성, 자신들이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 그렇기에 더욱 본질에서 눈을 돌리듯이 전쟁에 집착했다.

자신은 더 이상 패트릭을 막을 수 없다. 클라인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자라 위원장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회의장으로 와 주십시오.」

벽면 스피커를 통해 호출되자, 패트릭이 클라인에게 등을 돌렸다.

"…이것은 저만이 아닌 전체의 의견입니다, 클라인 의장 각하."

그는 마지막으로 못을 박듯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현재 소유한 능력을 버리고 진화의 길을 구인류로 역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가 방에서 나가자, 홀로 남겨진 클라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패트릭, 우리들은 진화한 게 아니야."

비통한 심정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커튼이 쳐진 어두컴컴한 그 방에는 신음 소리와 땀 냄새가 가득했다. 흐트러진 침대 속에서 누군가 고통스러운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윽… 으윽…!"

시트 사이로 엉망으로 헝클어진 금발과, 그 위로 고통을 견디느라 꿈틀거리는 등의 곡선이 드러났다. 시트를 쥐어 뜯던 손이 뻗어 나와 떨리는 손길로 침대 옆 탁자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나머지 손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주위 물건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형 컴퓨터와 필기 도구, 약병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물건 중에는 기묘하게 생긴 은빛 가면이 있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억누른 남자가 손을 다시 뻗어서 약병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힘이 빠졌는지 맥없이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최소한의 가구 밖에 없는 무미건조한 방에서 격렬한 숨소리와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겨우 약병을 끌어 당겨서 노인처럼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고 알약을 입에 쏟아 부었다.

그제야 겨우 진통이 가셨는지 남자의 신음 소리가 약해지며 바닥에 축 쳐진 몸이 경련을 멈추었다.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기 전에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제길…."

남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일으켜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 신음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억제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루제입니다."

그렇다. 이 방의 주인은 라우 르 크루제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라우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나다.」 라고 짧게 말했다.

"자라 위원장 각하. 이 시간이면 아직 평의회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땀에 젖어 얼굴을 가리는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시계를 쳐다보며 라우가 물었다.

「이 쪽 안건이 통과됐어. 아직 두세 가지가 남아 있지만 곧 있으면 끝나겠지. 끝나는 대로 자네와 자세히 논의하고 싶은데 일단 이것만이라도 알려 주려고 연락했네. 자네야말로 진정한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를 맡게 될 장본인이니까.」

패트릭 자라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라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럼 다음에는 의장 선출이 남았군요."

「뭐?」

허를 찔린 듯 되묻는 패트릭에게, 라우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클라인의 후임자로는 각하밖에 없잖습니까.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현 의장인 클라인을 일부러 경칭을 떼고 부르면서 은밀하게 말하자, 패트릭이 몹시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 우리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 내면 지구 쯤이야….」

통화가 끝나자, 라우가 진이 빠진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쁜 호흡 사이로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패트릭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된다고 믿고 있다.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코디네이터나 내츄럴이나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흥! 실컷 꿈이나 꾸시지…, 패트릭 자라…!"

힘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얼어 붙을 것 같은 증오심을 담아서 라우가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