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2권- 사막의 호랑이 :: PHASE.3 에비던스 01

"그럼 네 시간 뒤에 만나."

활기찬 모습으로 차에서 뛰어 내린 카가리를 따라 키라도 내렸다. 늘 카가리를 따라 다니는 장신의 남자, 키사카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알았어. 그 쪽이야말로… 알 자이리를 조심해.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고 들었어."

카가리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키사카 일행이 만나러 갈 교섭 상대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앞쪽 차에 앉은 나탈이 뒤돌아 보며 "야마토 소…." 라고 말하려다가 "…소년." 이라고 말을 흘렸다. 이 곳에서 소위라는 것을 밝히면 모처럼 일반인으로 변장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옆에 앉은 토노무라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자, 잘 부탁한다."

어색한 표정으로 나탈이 말한 뒤 허둥지둥 얼굴을 돌렸다. 사이브와 키사카를 태운 지프가 출발하자, 혼잡한 시내 한복판에 키라와 카가리 단 둘만 남았다.

이 도시의 이름은 버나디아. 탓실의 동쪽에 위치한 '사막의 호랑이'의 주둔지였다. 사막 특유의 밝은 햇빛 아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고, 장사꾼의 목소리가 쩌렁 쩌렁 울렸다. 키라는 활기 넘치는 광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봐, 뭘 넋 놓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키라를 카가리가 화 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넌 내 호위병 아냐?"

탓실의 난민을 수용하고, 지난 번 전투에서 많은 무기를 소비한 아크 엔젤과 '새벽의 사막' 일행은 물자 보급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그들이 시내로 파견되었다. 카가리는 현지 시장에 일용품을 구하러, 키라는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반 가게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을 조달하기 위해 떠났다.

사람들 사이를 익숙하게 뚫고 지나가는 카가리를 따라가던 키라가 가만히 속삭였다.

"…이 곳이 정말 '사막의 호랑이'의 본거지야? 굉장히 번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긴장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키라의 질문에, 카가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에게 따라 오라고 턱으로 가리켰다.

인파를 헤치고 몇 분 동안 걸어서 모퉁이를 지나자 키라가 흠칫 하고 멈춰 섰다. 창문 사이에 끈을 매달아 널어 놓은 빨래가 펄럭였고, 그 아래로 아이들이 요란스럽게 뛰어 갔다. 눈부시게 빛나는 흰 토벽이 이어지는 골목 길, 그 한가운에데 땅이 움푹 꺼진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위의 광경이 평화로우면 평화로울 수록 이 땅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그건 모두 허상일 뿐이야."

씁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카가리는 쌓인 벽돌 너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너진 건물 너머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전함이 눈에 들어왔다. 레셉스, 앤드류 발트펠드의 사령선이다.

"저게 바로 이 도시의 진정한 지배자야. 거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이지. 이 곳은 자프트의… '사막의 호랑이'의 소유물이야…."

키라는 벽돌이 어지럽게 널린 땅과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 풍경을 둘러 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목숨이 위험하다면 거역하지 않으면 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지금의 키라보다는 그렇다.

'그런데 어째서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초토화된 탓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키라는 그 곳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목격했다. 전쟁의 대가가, 지켜야 할 가족과 그리운 고향의 상실이라면 키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그로서는 소중한 존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달리 뭐가 있을까?'

 

 

"으아~! 이런 걸 쌓아 두면 어떡하라고…."

머독의 한숨이 격납고의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그는 스트라이크의 조종석에 상반신을 내밀고 안에 널려 있는 식사용 쟁반과 음식 찌꺼기, 컵, 종잇조각 등을 주워서 밖으로 내던졌다. 이동식 통로에 서 있던 프레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쓰레기를 주워서 봉지에 담았다. 군에 입대하고 처음으로 맡은 임무가 쓰레기 수거라는 사실일 불쾌한 모양이다.

조종석의 쓰레기는 최근 며칠 동안 키라가 그 곳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런 일이…?"

다른 통로이 서서, 쓰레기를 줍는 프레이를 바라보며 마류가 목소리를 낮춰 무우에게 물었다.

"글쎄… 아마도 지구로 내려 온 이후가 아닐까? 여태까지는 전혀 여유가 없었으니까."

무우가 대답했다.

"저 아인… 사이의 여자 친구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번엔 키라와…?"

"놀랐지?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 둘이 나누는 대화 내용은 스트라이크의 귀중한 파일럿에 관한 약간 꺼림칙한 정보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키라가 사이의 애인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내용이라 자연스럽게 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들은 키라의 사생활을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함의 안전에 관한 문제라서 파일럿의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었다. 또한 이것은 승무원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별도의 카운슬러가 없는 전함의 함장으로서 마류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사막의 호랑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난해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류가 한숨을 쉬며 격납고를 떠나자, 무우가 따라 나왔다.

"그럼 그 동안 키라가 조종석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마도 그랬겠지."

"그럼 제대로 쉴 수 없잖아요."

"음…."

무우도 긴급용 침낭에서 잠을 잘 때가 있지만, 키라의 경우는 잠시도 스트라이크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아크 엔젤에는 그를 대신할 다른 파일럿이 없다.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무우와 키라, 둘 뿐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당연히 그들이 출격해야 한다는 현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중압감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해지면서 프레이와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들의 관계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꼬마의 상태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어."

무우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자, 마류도 눈을 내리깔았다.

"제 자신이 한심해요. …파일럿으로서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가 정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어린 소년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 만의 책임이 아냐. 나도 좀 더 신경 써야 했어."

키라는 늘 대단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 모빌 슈트의 성능이나 코디네이터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코디네이터와 겨뤄 온 무우 만이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키라는 항상 자신의 생명을 깎듯이 위태롭게 싸워 왔다. '내가 아크 엔젤을 지켜야 한다, 나 밖에 지킬 사람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까지 키라를 몰아 세운 현실에 무우는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엔듀미온의 매'라고 불리는 그조차도 키라를 대신해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고작 열 여섯 살 소년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전함을 지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고개를 돌리자, 발을 멈춘 마류가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전투 스트레스에 관해서. 당신은 선배 파일럿이잖아요?"

"뭐?"

해결… 해결 방법이라. 무우는 생각에 잠긴 채 마류를 바라보았다.

늘 함장 다운 위용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마류도, 자신을 바라 볼 때는 약한 표정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우의 착각일까? 자세히 뜯어 보면, 생각보다 스타일이 나쁘지 않다. 가는 발목이 그의 취향에 딱 맞는다. 가슴도 제법 크고, 입술은 키스하기에 적당한 귀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 무우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러니까…."

당황한 무우가 억지 웃음을 지었다.

"…내 경험은 별로 도움이 못 될 것 같아…."

"그러시겠죠."

마류가 퉁명스럽게 말한 뒤 등을 돌렸다. 그 등에 '남자는 다 늑대야.' 라는 경멸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여하튼 오늘 외출이 기분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억지로 대화를 끝내려는 분위기가 역력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무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 이럴 땐 젊은 사람이 부럽다니까…."

 

 

"그나저나 함장님도 참 대담한 것 같지 않냐? 단 몇 시간이라도 키라를 전함에서 내보내다니."

당직을 맡은 찬드라가 말했다.

"어휴~, 나도 외출이나 했으면 좋겠다!"

승무원들의 비탄에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함교에서 나온 밀리아리아가 작은 한숨과 함께 바깥을 쳐다 보았다.

"왜 그래? 너도 나가고 싶니?"

토르가 물었다.

"응? 아니, 왠지 키라가 없으니까 불안해서 그래."

밀리아리아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걸어가던 카즈이도 같은 심정이다.

'키라가 없는 사이에 만일 적이 공격해 온다면….'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 붙는 것 같았다.

토르가 웃으면서 연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괜찮아. 곧 돌아 올 거야. 그 때까진 우리가 지켜 줄게."

"응, 알아."

밀리아리아가 귀엽게 웃었다. 하지만 카즈이는 어떻게 지킬 거냐고 되묻고 싶었다. 스트라이크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키라 밖에 없다. 스카이 글래스퍼조차 탈 수 없는 토르가 어떻게 그녀를 지킨다는 걸까.

"휴…, 그나저나 일이 점점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지 않아?"

카즈이가 중얼거리자, 토르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어째서 사막에 있어야 하는 거냐고?"

카즈이의 말에 토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할 수 없잖아. 키라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나도 알아."

내심 알고 싶지 않았다. 키라가 없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카즈이는 애당초 키라 때문에 이 곳에 온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왜 하필이면 레지스탕스 기지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이러려고 이 곳에 있는 게 아니잖아…."

카즈이가 깊게 한숨 쉬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사막에 왔지만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바람에 휘날리며 신발 속까지 들어 오는 모래,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체력을 빼앗는 열풍. 콜로니 출신의 그에게 있어서 이 곳 환경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모래가 남아 있는 것 같았고, 밖으로 나가면 공기 속을 떠 다니는 모래가 입 안에 들어와서 씹혔다. 낮의 무더위에 지쳐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손으로 뿌리쳐도 어느 새 작은 벌레들이 날아와서 수분을 빼앗으려 입과 코 부근에 달려 들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남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

'군대에 지원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불쾌한 장소에서 위험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카즈이는 자신이 원한 게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셔틀을 탔으면 지금쯤 저 세상에 있었을걸?"

토르가 무덤덤하게 기분 나쁜 기억을 끄집어 냈다.

그렇다. 만일 그 때 전함에서 떠났다면 자신들이 탄 셔틀이 전투 중에 듀얼의 공격으로 산산 조각 났을 것이다.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건 불가능한 소리다. 개미 지옥에 빠진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어서 몸부림 치는 것 같다.

'언제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말 놀랐습니다. 당신이 저를 찾아 오실 줄이야…."

사치스러운 응접실로 안내 받고 2~30분을 기다리자, 달짝지근한 목소리를 가진 우아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두꺼운 금 목걸이와 값비싼 시계를 본 순간, 토노무라는 그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물 파는 장사 치곤 많이 버는 모양이군, 자이리."

반대로 사이브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가능하면 네 얼굴 따윈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 물병을 마르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그러자 상대방이 활짝 웃었다.

"생각을 바꾸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중한 것은 신념이 아니라 생명이죠, 사이브 아슈만."

예의를 갖춘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면 뭐든지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알 자이리. 이 도시의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를 찾아 오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아시스는 한 군데 머무르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어떤 곳이라도 물은 물이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실 수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프트에 저항하는 사이브에게 자신의 위치를 자랑하듯 말하는 그를 사이브가 가로막았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인지 몰라도 과거에 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설령 사상은 공유할 수 있어도 그들의 성질은 물과 기름처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사이브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지? 이 쪽 요구를 들을 건가, 아니면 무시할 건가?"

"그야 물론…, 동포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쪽에서 지불할 것 이외에는 관심 없어 보이는 남자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금액에 따라서는 동포를 팔아 넘기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럼 구체적인 내용은 공장으로 가서…."

남자는 느릿 느릿 일어나면서 여자처럼 높은 음성으로 "호호호." 하고 홍소를 터뜨렸다.

사이브를 따라 일어난 토노무라는 나탈과 잠시 시선을 나누었다. 늘 야무진 그녀도 이런 자리가 낯설었는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물자 보급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획일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를 뒷거래에 내보내도 괜찮을까, 라고 토노무라는 불안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무우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키라가 전함을 떠난 이상, 무우까지 외부로 나올 수는 없었다. 토노무라는 이번 임무가 끝나기 전에 자신들이 노예 시장에 내던져지지 않을 것을 간절히 바랐다. 이렇게 된 이상 사이브의 수완을 믿는 수밖에 없다.

"물과 식량, 연료 등은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나머지 물건에 관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수상해 보이는 남자들이 그들 앞으로 나무 상자를 운반했다. 자이리가 거드름 피우는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남자들이 뚜껑을 열었다.

"75mm AP탄, 모르겐 레이트 사 제품 EQ 17 자기장 차단기, 마크 500 레이더 어레이…."

술술 제품 명을 읊어 대는 자이리 옆에서 토노무라가 상자 안을 들여다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니! 이건 정품 아닙니까?"

"기가 막히는군. 대체 어딜 통해서 이런 것을…."

나탈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구 연합군 사양의 탄약과 무기, 게다가 복제품이 아닌 정품이 눈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무기는 당연히 군 관계자가 부정 유출한 것이다. 그것은 군대 규율에 대한 그녀의 기존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 수맥이 있죠. 호호호."

자이리는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귀에 거슬리는 웃음 소리를 흘렸다.

"…물론 그 대신에 뭐랄까요…."

그러면서 사이브를 살짝 쳐다보았다. 사이브는 귀찮다는 듯이 "알고 있어." 라고 간결하게 대답한 뒤, 나탈을 향해 "이거라도 괜찮겠어?" 하고 물었다. 나탈은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건은 이상 없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원하는 것을 다 갖출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자이리가 웃으면서 계산서를 사이브에게 내밀었다. 사이브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으나, 뒤에서 서류를 들여다 본 토노무라가 현기증을 일으킬 뻔했다.

"아니, 이게 무슨 터무니 없는 바가지입니까?!"

이런 종류의 뒷거래가 고객의 난처한 처지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서류 상의 액수는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귀한 물이라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이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생명을 구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이브가 말 없이 그 종이를 나탈이 아닌 키사카에게 건넸다.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카가리 뒤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가 금액을 한 번 쓰윽 훑어 본 뒤, 짧게 대답했다.

"…지불은 어드(Earth Dollar의 약칭)로 되겠소?"

"물론이죠."

환한 미소를 띠는 자이리를 보고 심각한 상황에 머리가 마비되었는지 토노무라의 현기증이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큰 액수를? 깎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일시불로? 게다가 지불인이 키사카라고?'

"…그럼 당장 운반하게."

키사카가 담담하게 말하면서 등을 돌렸다.

카가리의 보디가드이자, 주먹은 세지만 머리는 둔한 육체파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의외의 일면을 목격한 토노무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표정의 나탈에게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전 도무지 뭐가 뭔지…."

"나, 나한테 묻지 마라."

자기 말고도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이 또 있다는 사실에 토노무라는 그나마 약간 마음이 진정되었다.

 

 

"휴~."

키라가 카페 의자에 힘 없이 주저앉았다. 옆에는 커다란 쇼핑 백이 쌓여 있었다. 이번 일은 임무라서 거부할 수 없었지만, 여자의 쇼핑에는 절대로 따라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짐을 전부 키라에게 맡긴 채 온 시장을 휘젓고 다닌 카가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목록을 점검했다.

"거의 다 산 것 같아. 잠깐, 프레이라는 여자가 주문한 건 여기 없는 물건들 뿐이잖아? 엘리자리오 제품 로션이나 스킨을 어디서 구하라는 거야?"

키라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빨리 쇼핑을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 앞에 웨이터가 차와 요리를 가져왔다. 얇은 빵 위에 토마토와 양상추,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운 양 고기 조각이 얹혀 있었다. 방금 카가리가 주문한 음식이다.

"…이게 뭐야?"

키라가 신기해서 물어 보았다.

"도넬 케밥이지! 아, 배고파라. 너도 어서 먹어 봐! 이 칠리 소스를 듬뿍 뿌려서."

카가리가 소스 용기에 손을 뻗은 순간, "잠깐만!" 하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바람에 두 사람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더욱 눈이 휘둥그래졌다.

"케밥에 칠리 소스라니 말도 안 돼! 요구르트 소스를 뿌려 먹어야 제 맛이지! 이건 상식 아닌가?"

주먹을 쥐고 강조하는 그 남자는 아랍 풍의 민족 의상이 대부분인 지역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알로하 셔츠와 밀짚 모자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북유럽 출신으로 보였으나 여행자인지 아니면 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인지, 어쨌든 더할 나위 없이 수상해 보였다.

카가리가 "뭐라고요?" 라고 되묻자 그는 과장된 표정으로 양 손을 흔들면서 말했따.

"아니, 상식이라기보다는 좀 더… 맞아! 요구르트 소스를 뿌리지 않는 것은 이 요리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카가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 남자를 무시하고 도넬 케밥 위에 보란 듯이 칠리 소스를 듬뿍 뿌리자, 남자가 비통한 비명을 질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내 취향을 이래저래 간섭 받고 싶지 않아요!"

당연한 의견이지만 일부러 크게 한 입 베어 문 다음 낯선 남자를 쳐다 보는 점이 어린 애 다웠다.

"와~ 정말 맛있다!"

"아…, 어째서 그런 짓을…."

소녀의 만행에 충격을 받은 남자 또한 어른 답지 않았다. 그러다 둘이 동시에 키라를 돌아 보았다.

"자, 어서 먹어 봐."

"엇! 잠깐만 기다려! 그에게까지 사악한 음식을 먹여서는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죠?! 케밥에 칠리 소스는 당연한 거라고요!"

"아니, 요구르트야. 요구르트 소스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어!"

두 종류의 소스 용기를 움켜 쥔 카가리와 남자가 잠시 키라의 접시 위에서 실랑이를 벌인 뒤, 그의 케밥 위에 각자의 소스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앗…!"

"……."

카가리와 남자는 자신들이 저지른 결과를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키라를 쳐다보았다.

키라는 잠시 비참한 표정으로 접시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맛있어 보이던 음식이, 지금은 붉고 흰 소스에 뒤덮여 무참하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꾹 참고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키라는 할 수 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 미안해."

어느 새 남자가 그들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아뇨…. 뭐, 섞어서 먹는 맛도 그럭저럭…."

그렇게 대답하면서 키라는 음료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솔직히 소스 맛 밖에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쇼핑을 아주 열심히 한 모양이네. 파티라도 준비하나?"

남자가 쇼핑 백을 들여다 보자 카가리가 다시 외쳤다.

"쓸 데 없는 간섭 마세요! 도대체 뭐예요? 누가 거기 앉아도 된다고 했죠?"

"에이~."

남자가 카가리를 진정시키려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밖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키라도 몸을 긴장시켰다.

"누구 멋대로 합석을…."

불평을 늘어 놓는 카가리의 팔을 키라가 테이블 너머로 붙잡았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로지르며 가게 안으로 뭔가 날아 왔다. 남자가 테이블을 들어올리자 키라가 그 아래 쪽으로 카가리를 잡아 당겼다. 테이블 위에 있던 케밥과 음료수가 카가리 위에 쏟아졌지만, 키라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 안은 채 바닥에 몸을 던졌다.

가게로 날아 온 로켓 탄이 터졌다. 여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 왔지만 키라 일행은 테이블 밑에 숨어서 불어 닥치는 폭풍과 파편을 피했다.

"괜찮아?!"

모자가 날아 간 것 이외에는 상처 하나 없는 남자가 발목에 채운 총집에서 권총을 뽑으면서 큰 소리로 물어 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이유는, 방금 전의 폭발 음 때문에 일시적으로 마비된 청각과 곧바로 시작된 총격전 때문이다. 가게 밖에서 기관총을 쏘면서 남자들이 뛰어 들어 왔다.

"죽어라, 코디네이터! 우주의 괴물 같으니!"

"푸르고 깨끗한 세상을 위해!"

테러리스트의 외침을 들은 카가리가 "블루 코스모스?!" 라고 소리치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블루 코스모스'는 코디네이터를 배척하는 세력이다. 저들은 그 중에서도 극우 과격파에 속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표적은…?'

테이블 그늘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가 총을 쏘자, 테러리스트의 총구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 때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뛰어 나와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을 사살했다. 아니, 가게 안에서 총을 뽑아 든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손님이 아니라 손님으로 가장하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상관 없어. 모조리 제거하라!"

그들을 향해 남자가 명령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경박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이 사람은 누굴까…?'

여기 저기서 총성이 들려 오자, 카가리를 자신의 몸으로 가린 채 키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테러리스트, 혹은 손님 중 하나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키라의 발치에 권총이 굴러 왔다. 장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동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테이블에 몸을 감추었던 남자가 일어나서 도망가려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주위를 살피던 키라는 전방에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목격하고 숨을 죽였다. 벽 쪽에 숨어 있던 테러리스트가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에서 뛰어 나와 방금 굴러 온 총을 집어서 던졌다.

"으악!"

총은 저격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 간 뒤, 부딪친 충격으로 폭발했다.

상대방이 주춤한 사이에 용수철처럼 뛰어 오른 키라가 그를 발로 내리쳤다. 키라의 옆차기를 얼굴에 맞은 테러리스트가 어이 없이 쓰러졌다.

어느 새 총성이 멈추었다. 그들이 말하는 '제거'가 끝난 모양이다. 주위는 화약 연기로 자욱했고, 아수라장으로 변한 가게 내부에 널려진 시체와 부상자를 둘러 본 키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봐!"

테이블 안쪽에서 카가리가 뛰어 나왔다. 그녀는 키라를 향해 달려 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너 말이야! 사격도 할 줄 몰라? 이 바보야!"

소리 지르면서도 그녀는 키라가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나름대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키라는 웃음을 꾹 참았다. 머리에 온통 소스와 음료수를 뒤집어 쓴 카가리의 모습이 상당히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왜 웃는 거야?!"

"왜냐하면…."

웃음을 참는 키라의 눈이 카가리의 등 뒤에서 멈추었다. 그 남자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선글라스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은 분명히 키라를 향한 채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

남자를 향해 가게 안에 있던 그의 동료들이 달려 왔다.

"대장님! 무사하셨습니까?!"

'대장…?!'

그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는 키라를 향해 턱을 들어 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그래, 난 무사하다. 저 소년 덕분이지."

그리고 얼굴을 가린 선글라스를 벗었다. 곁에서 카가리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앤드류 발트펠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 이름을 듣고 키라의 몸이 얼어 붙었다.

그렇다. '블루 코스모스'의 표적이 될 만한 존재, 이 도시에 그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사막의 호랑이' 이외에….

 

 

"네?! 키라와 카가리가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마류의 목소리가 아크 엔젤 함교에 울려 퍼지자, 당직 승무원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이가 움찔 하며 몸을 경직시켰다.

모니터에는 키라를 마중하러 시내로 돌아간 키사카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100km 이상 떨어져 있어서 당연히 전파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소.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군. 사이브는 그 쪽으로 돌아갔소?」

"아뇨, 아직요."

「시내에서는 '블루 코스모스'의 테러가 있었다고 하더군.」

키사카의 보고를 듣고 모두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라고 사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키라가 코디네이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곳에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다.

「전파 상태가 나빠서 이 쪽에서 그들과 연락을 취할 수 없소. 조사하고 싶어도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오.」

키사카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마류가 고개를 돌렸다.

"파르 하사! 버질 중위를 호출하시오!"

「그 쪽에서 호출이 가능하다면 당장 몇 명이라도 시내로 돌아오라고 전해 주시오….」

마류와 키사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찬드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보나마나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집합 시간을 잊은 게 분명해. 다들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불쑥 나타날 거라니까."

그 목소리에는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만일 키라가 돌아오지 않으면…."

파르가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대변하자, 찬드라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쓸 데 없는 걱정하지 마!"

키라를 걱정하는 승무원들의 불안이 파문처럼 퍼져 가는 동안, 사이는 다른 감정을 남 몰래 억누르고 있었다.

'만일 키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이는 은근히 그러기를 바랐다.

'키라가 테러에 휘말렸을지도 몰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그는 웅성거리는 함교를 몰래 빠져 나와 격납고를 향해 걸어 갔다.

스트라이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이는 잠시 거대한 기체를 올려다 보았다.

'만일… 키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이는 몰래 모빌 슈트의 조종석으로 이동했다. 마치 불법 침입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니, 금단의 성역에 발을 내딛은 것 같은, 마치 남의 여자에 손을 댄 것 같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이는 어두운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키라와는 이것으로 피장파장이다.'

그가 대담한 동작으로 기체의 해치를 열고 OS를 기동시키자, 모니터가 켜지면서 계기판에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사이는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흥분과 불안에 떨면서 양 손을 레버와 스로틀 위에 얹었다. 마침 그 때, 격납고에 울리기 시작한 엔진 음을 들은 머독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상하다. 스트라이크의 눈에 불이 들어와 있다니….'

"이 봐."

그는 가까이 있는 동료를 불러 세웠다.

"꼬마가 언제 돌아왔지?"

"네?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걸요? 방금 함교에서 행방 불명이라고 하던데…."

"행방 불명이라고?!"

머독이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을 때, 스트라이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왼팔을 들어 올리며, 기체 정면으로 뻗어 나온 이동식 통로를 거칠게 밀어 냈다.

"그럼 누가 저걸 타고 있는 거야?!"

정비대에서 벗어 난 모빌 슈트가 휘청거리며 한 발을 내밀었다. 그 둔중한 움직임은 키라의 조종과는 전혀 달랐다.

"어이! 뭐 하는 거야?! 대체 누구냐고!"

머독이 분개하며 주먹을 휘둘렀지만 조종자는 멈추지 않았다.

소란을 듣고 안쪽에 있던 프레이와 바깥에서 토르와 밀리아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스트라이크는 한 발을 더 내밀더니 불안하게 좌우로 휘청거렸다.

"바보야! 어서 멈추지 못해?!"

"대체 누구야?!"

토르의 질문에 한 정비사가 대답했다.

"방금 사이가 이 근처를 어슬렁거렸는데…."

"사이?!"

토르는 느닷없는 친구의 이름에 경악했다.

스트라이크는 계속 어색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걸어 나가려다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애써 몸을 비틀면서 멈춰 서려고 했지만,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다. 결국 견디다 못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악!"

밀리아리아가 비명을 지르자 다들 몸을 움츠렸다.

스트라이크가 손을 앞으로 내밀어 네 발로 기는 상태로 쓰러졌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격납고의 높은 천장에 울려 퍼졌다.

토르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더 이상 꿈쩍하지 않는 모빌 슈트를 바라 보았다.

"…어휴~!"

머독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행히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투에 의해 망가진다면 또 몰라도, 이런 곳에서 손상된다면 정비사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하지만 뒤쪽에 서 있는 프레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무릎 꿇은 모빌 슈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조종석 안에서는 사이가 넋 나간 표정으로 제어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격납고 바닥이 비춰졌다. 그가 조종한 스트라이크는 해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이토록 무력하다니….'

사이의 가슴에 실망이 파도처럼 몰려 왔다. 키라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지키고 싸우기는 커녕, 단 몇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었다. 자신은 키라보다 못난 존재일까….

사이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추한 자신, 키라를 증오하고 질시하며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더러운 자신. 더구나 능력까지 키라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이 때 뼈저리게 느꼈다. 너무나 비참했다. 여태까지 잘난 듯이 키라의 형 노릇을 해 왔다. 프레이의 사랑을 당연히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자신을 돌이켜 보면,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무릎 꿇은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흑… 으윽… 흑…!"

이 곳에 없는 키라의 존재가 확연히 느껴지는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사이는 남 몰래 울음을 터뜨렸다.

 

 

"저, 저기요…. 저희들은 정말 괜찮거든요…."

아까부터 몇 번 씩 되풀이한 말을 키라가 다시 말했다. 그는 호화로운 호텔 앞에서 주눅 든 민간인 소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는, 호텔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자프트 경비병과 정원에 세워 놓은 진 오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식사를 망치고 내 생명까지 구해 줬는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겠어?"

앤드류 발트펠드가 그들의 초조함을 모르는 척, 차에서 내린 뒤 손을 내밀었다.

"게다가 아가씨는 옷이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그것만이라도 갈아 입어야지. 안 그래?"

"아뇨!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카가리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찮지 않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키라와 카가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비장한 각오와 함께 적지에 뛰어 들기로 했다.

앞서 걸어가는 발트펠드를 본 병사들이 경례했다. 요란한 무늬의 알로하 셔츠가 주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문이 열리면서 스무 살 가량의 빨간 머리 청년이 튀어 나왔다.

"대장님! 블루 코스모스의 습격을 받으셨다면서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뭐하러 내게 물어 보는 거냐?"

"아무 생각 없이 시내로 나가지 말라고 제가 그토록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지난 번에는 분석이 덜 끝난 모빌 슈트를 상대로 직접 전장에 뛰어 들지를 않나…!"

그 말은 곧 지난 번에 키라와 싸운 바쿠 중 한 대에 발트펠드가 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때를 떠올리자 키라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코스터, 손님이 계시잖아."

"아…, 실례했습니다."

다코스터라고 불린 병사가 잔소리를 중단하고 키라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 앞을 발트펠드가 유유히 지나가자, 빨간 머리 병사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사람이 상관이라면 고생하겠다고 키라는 그를 동정했다. 하지만 다코스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들을 훑어 보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발트펠드의 뒤를 따라갔다. 테러 사건 직후라서 외부인에 대해 엄격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왠지 자신들의 정체를 들킬 것 같아서 불안했다.

"신경 쓰지 마."

발트펠드가 여전히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아까울 정도로 유능한 부관이지만, 삶을 즐길 줄 모르는 가엾은 녀석이야."

"저…, 시내에 나갈 때는 늘 그런 식인가요?"

키라가 조심스럽게 묻자, 발트펠드가 눈썹을 들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뒤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내 비밀 경호원들 말이지? 귀찮으니까 그만 두라고 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

"……."

당연하다. 오늘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비밀 경호원의 호위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주변의 일반인으로 변장한 채 호위해야 한다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닐 텐데….'

키라는 마류 함장이 상식적인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앤디, 돌아왔어요?"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오자, 놀란 키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드리운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이샤, 지금 다녀왔소."

발트펠드가 그녀의 가는 허리에 팔을 감으며 키스하는 모습을 키라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부인… 같지는 않은데…. 저 남자는 연인을 전쟁터에 데려 온 걸까?'

아이샤라고 불린 여자가 그들을 돌아 보며 생긋 웃었다. 군대에 있기 때문인지 기능적인 점프 슈트 차림이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앤디, 이 아이인가요?"

약간 혀 짧은 아이 같은 목소리로 물으며 카가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같은 여자인데도 카가리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우스웠다.

"응, 어떻게든 해 줘. 칠리 소스와 요구르트 소스, 그리고 홍차를 뒤집어 썼거든."

"어머나, 케밥을 먹었군요. 자, 이 쪽으로 오세요."

아이샤가 다정하게 카가리의 손을 잡아 당기며 데려가려 했다. 카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키라를 돌아 보았다.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기 위해 키라가 뒤따르자, 아이샤가 눈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숙녀가 옷 갈아 입는 곳에 따라오면 안 돼요. 금방 끝나니까 앤디와 함께 사이좋게 기다리세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그녀가 달콤하게 야단 치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카가리를 데리고 나갔다.

이미 어느 방으로 들어간 발트펠드가 "이 봐, 자넨 이 쪽이야!" 라고 키라를 불러 들였다. 설마 저 순진해 보이는 여자가 카가리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지만,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다. 키라는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발트펠드의 방으로 걸어갔다.

"난 커피에 일가견이 있지."

발트펠드가 그렇게 말하명서 사이폰(진공관 식 커피 추출 기구)을 꺼냈다.

"자, 어서 앉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아."

그런 말을 들어도 이 곳은 전혀 집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밝고 넓은 이 방은 그의 집무실일까. 정원에 접한 벽 전체가 프랑스 창 구조를 하고 있었고, 창문을 등지고 고풍스러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저 책상 하나만으로도 한 재산 할 것 같았다. 바닥에는 길들여진 비단 양탄자가 깔려 있고, 소파 세트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벽 쪽에는 실제로 불을 피울 수 있는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우주 이민 가정에서 자란 키라는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대리석 난로 장식 위에는 낯 익은 물체가 놓여 있었다. 동체 부분에 날개 골격이 튀어 나온, 누구나 한 번 쯤은 본 적이 있는 기묘한 생물 화석의 모향이었다. 키라가 모형을 바라보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에비던스 01'. 실물을 본 적이 있나?"

발트펠드가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키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원형인 '에비던스 01'은 현재 플랜트에 있다. 예전에는 지구에서도 견학 여행을 갈 수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당연히 플랜트 주민 의외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발트펠드는 그것을 한참 바라본 다음 물었다.

"어째서 이걸 '고래석'이라고 부르는 걸까? 자네도 이게 고래로 보이나?"

"네…, 저는 그저…."

키라에게 물어 봤자 소용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랑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모형의 날개 부분을 가리키며 주장했다.

"여기 이것, 아무리 봐도 날개 같아. 보통 고래는 날개가 없잖아?"

"그야 물론…. 하지만 이건 다른 별의 생물이니까요…."

키라가 당연한 말을 입에 담았다.

에비던스 01, 일명 '고래석'은 지구에서 진화한 생물의 화석이 아니다. 다른 은하계에서 우연히 발견한,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증거(Evidence)였다. 전체적인 형상은 지구 상의 고래와 비슷했으나 같은 종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문제의 골격만 해도 실제로 날개로 기능했을지 어떨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째서 이게 고래냐는 거야."

"…그럼 뭐가 좋겠습니까?"

키라가 묻자, 발트펠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뭐냐고 물으니까 난감한데? 새처럼 보이지는 않고, 날치도 아니고…. 아 참, 커피는 어때?"

그 말을 들은 키라가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쓰다.

키라의 표정을 살피던 발트펠드가 별로 언짢은 기색 없이 말했다.

"음, 자네에게 어른의 맛을 요구하기에는 아직 이른가 보군."

하지만 자신은 맛있는 표정으로 시커먼 액체를 벌컥 벌컥 마시면서 소파에 걸터 앉았다. 키라도 조심스럽게 맞은 편에 앉았다. 발트펠드가 다시 대리석 난로 장식을 돌아 보았다.

"저건 재미있으면서도 귀찮은 존재야. 안 그래?"

키라가 되물었다.

"귀찮다고요?"

"당연하지. 이런 걸 발견한 덕분에 사람들이 희망이랄까… 가능성을 믿게 된 거잖아."

"……?"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키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말이야."

태평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눈이 한 순간 위험하게 빛나자 키라는 움찔했다.

─아직 끝난 게 아냐.

─우린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어. 좀 더 앞으로…. 좀 더….

그리하여 인간은 여태까지 금기로 여겼던 유전자 변형에 손을 내밀었다. 미래를 꿈꾸고, 자신들에게 커다란 가능성이 있을 것을 믿으면서….

그 결과 새로운 대립이 발생했다. 내츄럴과 코디네이터,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

─좀 더… 더 많이… 한 층 더….

인간의 욕심이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 말은 코디네이터야말로 이번 전쟁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닐까?

키라는 무의식 중에 난로 위의 모형을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키라가 컵을 바라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에비던스 01'은 인류의 희망이 아닐까요?"

"희망?"

"이 넓은 우주에 인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척 외롭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거부하는 어두운 진공 바다 너머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밤길에 멀리 보이는 불빛처럼 키라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인류는 고독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한 다음 키라는 괜히 쑥스러움을 느꼈다. 유치한 감상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트펠드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지금 외롭구나."

키라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상대방은 따뜻하면서도 슬픈 표정으로 키라를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라고 키라는 생각했다. 자신은 여태까지 외로웠구나. 프레이나 토르와 함께 지내도 키라는 영원히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다. 내츄럴과 함께 남을 것을 결심했으면서도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이질감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멀리 보이는 불빛이 그리웠다.

작은 노크 소리에 키라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아이샤가 들어왔다. 카가리가 그 뒤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니? 부끄러워 할 필요 없잖아?"

아이샤가 웃으면서 그녀를 앞으로 밀어 내자, 키라가 입을 딱 벌렸다.

"오호~!"

발트펠드가 일어나서 소녀의 모습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카가리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엷게 화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서는 입욕제와 샴푸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왔다. 햇볕에 탄 자국이 아쉽지만 이렇게 차려 입으니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원래 단정한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약간 미성숙한 야생미가 강조되어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여자… 같아…."

키라가 중얼거리자, 카가리가 발끈해서 외쳤다.

"야!"

키라가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정말 여자처럼 보인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그게 그 말이잖아!"

그렇다…. 키라는 풀이 죽었다. 여자가 기뻐할 만한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웃음 짓는 발트펠드와 아이샤가 둘을 나란히 앉히고 커피를 대접했다.

"왜 내가 이런 귀찮은 옷을 입어야 하지?"

투덜거리는 카가리에게 아이샤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네 옷은 지금 새탁 중이라서 그래."

"다른 옷도 많잖아요!"

"뭐 어떠니? 너도 여자라면 때때로 멋을 부려 봐. 남자 친구도 저렇게 기뻐하잖아?"

"네…?"

느닷없이 지명 받은 키라가 깜짝 놀랐다. 미소 짓는 아이샤와 불만스러운 카가리가 동시에 쳐다보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괜찮은 것 같아."

카가리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이지만 살짝 볼을 붉혔다.

"입고 온 의상도 괜찮지만 그런 차림도 잘 어울리는군. 뭐랄까, 드레스 차림이 익숙한 것 같아."

발트펠드가 칭찬하자 카가리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맘대로 생각하세요."

"말만 안 하면 더 완벽할 텐데."

"무슨 소리예요?!"

커피를 마시는 카가리를 키라가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 마신 뒤 별 말 없이 컵을 내렸다. '어른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생각에 키라는 약간 침울해졌다.

아이샤는 볼 일이 끝났는지 방에서 나갔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니, 자리를 비우도록 발트펠드가 무슨 신호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내게 이런 분장을 시키는 거죠? 당신이 정말 '사막의 호랑이' 맞나요? 아니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취미예요?!"

카가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발트펠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를 고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이샤야. 사람을 가지고 노는 취미라는 게 무슨 뜻이지?"

"변장하고 몰래 시내로 나가거나…, 주민을 도망치게 한 뒤 마을을 불태우거나…. 그런 짓을 왜 하느냐고요!"

카가리의 말에 키라는 조마조마했다. 저런 말을 하다가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발트펠드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고 좋은 눈을 가졌군."

그는 입술을 비틀며 대담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눈을 가졌어."

카가리의 분노가 폭발했다.

"농담 하지 말아요!"

양 손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컵이 엎어지면서 농후한 갈색 액체가 테이블 가득 퍼졌다. 키라가 당황해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카가리!"

카가리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고 키라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동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상대가 바로 눈 앞에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없었다. 발트펠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에서 완전히 미소를 지우고 냉랭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너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냐?"

그의 시선에 사로잡히듯이 둘은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그는 요란한 알로하 셔츠를 입고 그저 소파에 앚아 있을 뿐이었지만, 육식 동물의 잔혹함을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두 사람을 압도했다.

문득 발트펠드가 키라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네…?"

"어떻게 하면 이 전쟁이 끝날 것 같아? 모빌 슈트의 파일럿으로서…."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키라가 숨을 삼키자 카가리가 대신 소리쳤다. 갑자기 발트펠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봐… 너무 순진한 것도 탈이라는 거 알아?"

속을 떠 보려고 한 소리였다. 카가리가 그의 계략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발트펠드가 웃으면서 일어섰다.

"전쟁은 스포츠나 게임처럼 제한 시간이나 점수가 없어. 안 그래?"

키라는 카가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며 소파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럼 어떻게 승패를 가름할 수 있을까? 어디서 끝내야 하지?"

'어디서…?'

상대방을 살피며 도망칠 방법을 생각하는 한편, 동시에 키라는 머릿속으로 상대방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었다.

'어디서 끝낼 수 있을까?'

여태까지는 눈 앞의 상대방을 격퇴하느라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과연 끝이 존재하는 걸까?'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게임이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적을 모조리 해치워야… 다 끝날까?"

잠시 몸을 낮춘 발트펠드는 다음 순간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는 키라를 겨냥하고 있다. 카가리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발트펠드와 키라, 둘 중에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 밖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그런 일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즐거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을 전혀 미워하지 않더라도….

키라는 정신 없이 가능성에 대해 검토했다. 소파를 방패 삼아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2~3층 정도의 높이라면 뛰어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카가리에게는 불가능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주위를 돌린 뒤, 이 쪽을 향한 총을…. 그러자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발트펠드가 말했다.

"총을 빼앗아도 넌 쏠 수 없잖아?"

키라는 잠시 주춤했지만, 억지로 상대방의 눈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쏠 수 있습니다!"

발트펠드가 그런 키라의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만 두는 게 좋아. 아무리 네가 '버서커'라고는 해도 이 곳에 무사히 탈출할 수는 없어.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너와 같은 코디네이터니까."

키라는 눈을 크게 떴고, 카가리는 "뭐?!" 라고 외쳤다.

'들켰다!'

"어떻게…?!"

당황하는 키라를 카가리가 어째서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질책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혐오감을 찾아 볼 수 없었고, 키라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쁘게 생각되었다.

"네 전투를 두 번 쯤 봤지. 사막의 접지 압력, 열대류 파라미터의 조장…. 넌 코디네이터 중에서도 뛰어난 부류에 속해. 그런 파일럿을 내츄럴이라고 믿을 만큼 난 바보가 아니야."

키라는 발트펠드의 말에 놀랐다. 처음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의 사건을 통해 키라와 '코디네이터 파일럿'의 관련성을 확신했다.

"네가 어째서 동포와 적대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빌 슈트의 파일럿인 이상 너와 나는 적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발트펠드는 그럴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 들였다. 키라를 적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제거하기 위해…. 키라는 마음의 동요를 감추고 상대방을 마주 보았다. 스스로에게 이것은 전쟁이라고 되새겼다. 죽느냐 사느냐, 망설이면 자신이 당한다. 등 뒤에 있는 카가리를 지켜야 한다.

신경을 곤두세운 키라를 본 발트펠드가 웃었다.

"역시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는 걸까…?"

그 눈동자는 방금 '에비던스 01'에 대해 말했을 때처럼 다정하면서도 애절한 빛을 띠었다. 갑자기 그가 총을 내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넌 오늘 내 생명을 구해 줬고, 이 곳은 전쟁터가 아니니까."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키라와 카가리에게 등을 돌린 채 총을 치웠다.

"어서 돌아가라. 오늘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 좋은 일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키라는 그의 씁쓸한 목소리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이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중했다. 키라와 카가리는 서로 마주 본 뒤 상대방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발트펠드가 말을 걸었다.

"전쟁터에서 또 만나자."

키라는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 없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아이샤가 서 있었다. 움찔하는 둘을 보고 연상의 여인이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네 옷이야."

그녀의 팔에 깨끗하게 다려진 카가리의 옷이 들려 있었다. 마치 회담의 결과를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카가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 그럼 이 드레스를…."

"괜찮아. 그건 너한테 줄게. 나보다 네가 훨씬 잘 어울리는걸."

아이샤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하, 하지만…."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남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가리를 보며 아이샤가 웃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한테 어울리는 옷은 필요 없어."

여자다운 독설을 부드럽게 풀어서 말하는 그녀에게 카가리는 할 말을 잃었다. 아이샤는 여전히 활짝 핀 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렴. 다른 사람들은 너희들이 온 줄 모르니까."

둘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듯이 그 곳에서 빠져 나왔다.

 

 

"어땠어요?"

창가에 머물러 있는 발트펠드에게 아이샤가 말을 건넸다.

"…끔찍한 기분이야."

"어머나."

아이샤가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말하면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귀여운 아이들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더 기분이 안 좋아."

그러자 아이샤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등에 몸을 기댔다.

"바보 같은 사람. 괜히 변덕을 부리니까 그렇죠."

"맞아."

발트펠드도 웃으면서 뒤돌아 아이샤를 양 팔로 끌어 안았다.

"…시속 200km가 한계인 차로 200km 이상 속력을 내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냥 달리겠죠."

아이샤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어리광 부리는 말투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신랄한 말을 서슴 없이 입에 담을 수도 있다. 지금은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모양이다. 발트펠드가 웃었다.

"맞아. 한계가 200km라고 해도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2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어."

아이샤가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샤. 난 한계를 초월한 만큼 과속한 적이 없어."

"그건 당신의 한계가 시속 2,000km이기 때문이에요."

아이샤가 단순한 진리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단지 남자를 기쁘게 하려고 아첨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녹을 것 같은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못 말리는 사람이군요. 2,000km 이상 속력을 내고 싶으신 거죠?"

발트펠드가 웃었다.

"그래."

자신이 진심으로 도전하면 얼마나 더 싸울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좀 더, 조금만 더….'

아이샤가 그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가엾은 사람…."

그 말은 누굴 향한 말일까? 상관이 무모한 일을 벌일 때마다 속이 타는 다코스터? 혹은 방금 만난 소년? 아니면 발트펠드를 향한 말일까?

아이샤는 이해하기 힘든 여자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