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2권- 사막의 호랑이 :: PHASE.5 버서커의 눈물

앞서 걷던 카즈이가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키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넌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문을 연 다음 뒤쪽에 숨어 있어, 알았지?"

키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즈이가 눈을 돌렸다.

"…혹시라도 사이가 흥분해서 소란을 피울까 봐 그래."

키라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사이는 얼마 전에 무단으로 스트라이크를 작동시켜 승무원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는 이유로 징벌을 받아 이 방에 갇혔다. 하루 세 번, 동료가 식사를 가져올 때를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되었고, 식사도 빵과 물 뿐으로 비참했다. 새삼 자신들이 군대라는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온화한 성격의 사이가 갑작스레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침착하고 이지적이고, 친구들 사이의 중재 역할을 도맡아 하던 그가….'

하지만 키라는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키라와 프레이가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 세웠다. 카즈이도 결코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키라는 갇혀 있는 사이가 걱정스러웠다. 그를 증오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키라는 자신이 저지른 배신의 무게를 겨우 깨달았다. 키라가 카드 키를 밀어 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 카즈이의 말대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사이! 나야, 들어간다."

식사 쟁반을 든 카즈이가 실내로 들어가자, 그늘에 숨은 키라가 숨을 죽이고 몰래 내부를 살폈다.

"괜찮아?"

"아… 응."

어두운 방 구석에서 벽에 기댄 채 무릎을 끌어 안고 앉은 사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깎지 못한 수염이 지저분하게 턱을 덮고 있었고, 당연히 샤워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야위고 초췌해 보여서 키라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사이는 늘 깔끔하고 꼼꼼했으며, 온화한 성격이라 여간해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는데….

"일주일 동안 힘들겠지만, 규칙이라 어쩔 수 없대. 조금만 더 참아."

카즈이는 일부러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 썼지만, 목소리가 폐쇄된 냉랭한 공간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반대로 사이는 의외로 평온한, 오히려 쓴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고 있어. …괜찮아."

그 모습에 키라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이미 이성을 되찾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사이는 독방이 아닌 이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사이도 어째서 자신이 이 곳에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키라도 마찬가지다. 친구인 사이가 역경에 처해 있는데도 들어가서 위로 한 마디 건넬 수 없다. 이렇게 숨을 죽이고 그늘에 숨어서 지켜 보는 수밖에 없다. 그건 사이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키라 자신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절망을 느끼며 문에서 떠나 벽에 기댔다. 그 시선 너머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키라가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자, 누군가 통로 구석에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멀어져 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 스쳐 지나간 긴 머리카락은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프레이."

키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근처는 폐광 구멍 투성이야."

사이브의 손가락이 지도를 더듬다가 한 지점에 멈추었다.

"이 쪽에는 우리가 설치한 지뢰밭이 있지. 전쟁터로 삼으려면 이 부근이 좋아."

이번에는 손가락이 그 주위에 원을 그렸다.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 모처럼 장만한 지뢰를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새벽의 사막' 본거지에 있는 사령실에서 사이브 일행과 아크 엔젤의 사관들이 지도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댔다. 사이브가 세운 작전을 듣고 나서, 무우가 마류를 힐끗 쳐다본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우리들이야 괜찮지만, 당신들의 장비로는 피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마류는 눈 앞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이브가 쥐어 짜듯이 대답했다.

"호랑이 앞에 무릎 꿇고 그 놈을 위해 일한다면 평온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있겠지. 버나디아 사람들처럼 말이야…. 여자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어."

버나디아, '사막의 호랑이'를 받아 들임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보장 받은 도시. 자프트 군 점령 아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시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류는 물자 보급을 위해 그 곳을 방문한 나탈과 토노무라로부터 그렇게 보고 받았다.

"하지만 지배자는 변덕이 심한 법. 수백 년 동안 우리 일족은 그것 때문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지."

무우의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류도 사이브의 말을 복잡한 심정으로 들었다. 그들은 사이브 일족을 힘들게 한 지배자 측에 속했다. 마류가 그들에게 직접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속한 세계는 옛날부터 반항하지 못하는 약자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불리한 위치에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사이브는 약자라는 입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배당하지 않으며 지배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것 뿐이야."

억세고 인내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가. 뜨거운 모래 바다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평화롭고 활기찬 도시, 버나디아. 그들의 평화야말로 환상이다. 마류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평화를 희생하더라도,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존재한다. 자신도 그것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일상적인 전투에 시달리는 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자신도 분명히 사이브와 같은 행동을 선택했으리라. 만일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이 패한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총이 한 정 밖에 없어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전쟁에 승리해서 적을 지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얌전히 두 손을 들고 적을 받아 들이면서 살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막의 호랑이'에게 점령 당한 동쪽 탄광 지역을 되찾아야 해…."

사이브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거야. 그럼 됐지? 쓸 데 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알았어."

무우가 괜한 소리를 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뒤, 마류에게 동의를 구했다.

"함장님?"

마류는 어느 새 저 사막의 사나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따라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레셉스 돌파 작전의 협력을 기꺼이 받아 들이겠습니다."

 

 

"앗!"

"와~! 정말 굉장하다! 벌써 15기 째야!"

"이야~!"

아크 엔젤의 좌현 격납고 한 구석에서 소년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지나가던 토르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뭐 하는 거야?"

스카이 글래스퍼의 시뮬레이터를 둘러 싼 밀리아리아와 카즈이가 고개를 들었다.

"앗, 토르. 이것 좀 봐! 정말 대단하지 않아?"

"와아! 또 1기 격추!"

시뮬레이터 앞에 앉아 조종간을 쥐고 스카이 글래스퍼를 다루는 사람은 카가리였다. 흥미를 느낀 노이만이 다가와 등 뒤에서 들여다 본 뒤,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제법이군. 카가리라고 했나? 혹시 공중전을 해 본 경험이 있어?"

카가리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화면 안에서 마지막 적기가 격추되고, 시뮬레이션을 종료하는 화면으로 변했다. 점수가 나오자 카가리의 이름이 최상위에 등록되었다. 모두들 감탄하자, 카가리가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두 발이나 맞았는걸."

"아냐, 굉장해! 난 전투 시작하자 마자 격추 당했다니까."

카즈이가 흥분하자, 밀리아리아도 "실은 나도…." 라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뭐야, 다들 해 봤어?"

토르가 몸을 내밀었다.

"너희들, 명색이 군인인데 너무 하는 것 아냐? 총을 쏴 본 적도 없다면서?"

카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죽어도 난 몰라.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 전쟁!"

조롱하듯이 말하면서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노이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뭐야. 총을 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자랑하는 거니?"

카가리의 등을 쳐다보며 밀리아리아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군인이니까 당연히 자랑할 만 하지…."

노이만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밀리아리아와 카즈이가 풀이 죽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토르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시뮬레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다음에 내가 해도 돼? 응? 해도 괜찮아?"

"이게 무슨 게임기인 줄 아냐?"

노이만이 웃으면서 주의를 주자, 토르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하겠습니다!"

"좋았어! 만일 격추되면 밥은 다 먹은 줄 알아!"

노이만의 말에 "뭐라고요~?!" 라고 항의하면서도 톨은 이미 의자에 앉았다. 둘러싼 소년들이 성원을 보내고, 주위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가리는 실제 스카이 글래스퍼로 다가가 탐내는 눈빛으로 기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본 정비사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가로막았다.

"안 돼, 안 돼! 실물은 절대 건드리지 마!"

카가리는 약간 시무룩해져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기체를 동경의 눈빛으로 한참 동안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는 키라의 발 밑에서 토리가 깡충 깡충 뛰어 다녔다.

"키라?"

노크 소리가 나자 키라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면서 낯 익은 모습이 문가에 나타났다.

"뭐야? 왜 이렇게 어두워?"

프레이가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조명을 켜고 당연하다는 듯이 키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첫 날 밤 이후로 그녀는 이 방에서 생활했다. 최근에는 개인 물품을 모조리 옮겨 왔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하는 화장품의 달콤한 향기가 완전히 방에 배어 버렸다. 좋아하는 그 향기가 오늘은 몹시 신경에 거슬려서 키라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 뭐 하고 있었어?"

그의 낮은 목소리에 프레이가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뭐?"

프레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키라는 고개를 돌렸다.

"…사이를… 찾아 갔잖아?"

방금 창고 앞에서 봤던 그림자는 틀림 없이 프레이였다. 키라는 자신의 뛰어난 시각을 원망했다.

프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키라 곁에 앉아서 몸을 기댔다.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사이, 정말 바보 같지?"

예상치 못한 대답과 겹쳐진 체온에 키라는 어쩔 줄 몰랐다. 프레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널 이길 수 없는데…. 정말 바보 같아…."

짜증스럽게 말하면서도 그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프레이."

그 말을 듣고 키라는 그녀의 본심을 알아 차렸다. 무의식 중에 몸이 굳었다.

'그렇구나.'

뭔가를 느꼈는지, 프레이가 키라를 쳐다보았다. 키라가 고개를 돌렸다.

"키라? 왜 그래?"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그녀가 몸을 내밀었지만, 키라는 계속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프레이는 더욱 몸을 밀착시키면서 키라의 가슴에 기댔다.

"아무 걱정 하지 마."

목덜미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부드러운 가슴을 들이댔다.

"괜찮아, 키라…. 난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게…."

"프레이…."

그녀를 밀어 내려고 한 키라와 프레이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녀는 입 맞추면서 키라를 침대 위에 밀어 쓰러뜨렸다. 키라는 몸을 뒤틀어서 상대방을 뿌리쳤다.

"그… 그만 해!"

그의 외침에 프레이가 눈을 크게 떴다. 키라는 눈을 꼭 감은 뒤 방에서 뛰어 나갔다.

"키라~!"

프레이의 목소리가 뒤따라 온다.

'싫다, 이런 건 싫어!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냐.'

도망치듯이 달리면서 그는 눈물을 삼켰다. 프레이는 아직도 사이를 사랑하고 있다. 따뜻한 품이 이제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절망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키라는 어두운 통로에서 벽에 몸을 던져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날 좋아한 게 아니었어.'

이를 악물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심하다. 그런 주제에 잘난 척하고 사이에게 상처를 주다니….'

그럼 왜 자신의 품에 안겼을까? 동정이 분명하다. 불쌍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자신은 코디네이터니까. 징그러운 괴물처럼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존재, 프레이가 싫어하는….

키라는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제 뭘 믿어야 할까. 뭘 의지하고 싸워야 할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갈망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하면 사랑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절망적인 소원과 해결책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를 미궁에 빠뜨렸다. 어두컴컴한 방에 갇힌 친구와 마찬가지로.

 

 

"지브롤터 녀석들은 어쩌자고 자우트 따윌 보내는 거야?!"

발트펠드가 신경질을 부리며 서류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바쿠가 품절이래?"

"네…, 더 이상은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다코스터도 내심 상관과 똑같이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 설마 3일 만에 6기의 바쿠를 잃고, 2기마저 손상을 입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사막의 호랑이'가 말이다.

TFA-2=자우트는 몸체가 암적색으로 채색된, 포격 지원에 적합한 지상용 중화기형 모빌 슈트다. 사막과 같은 발 밑이 불안정한 지리적 조건에서는 인간형에서 캐터필러를 회전시켜 움직이는 탱크 모드로 변형이 가능하지만, 워낙 움직임이 둔중해서 민첩함을 특징으로 삼는 바쿠와는 그 기능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다. 발트펠드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모든 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하는 결전을 목전에 둔 지금으로서는.

"크루제 부대의 저 두 명을… 바쿠 대신 보충하라고 보낸 걸까요?"

다코스터는 전함의 현창을 통해 갑판을 바라보았다. 레셉스에 방금 도착한 유송기로부터 붉은 자우트와 함께 낯선 형태의 모빌 슈트가 나타났다. 유송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두 소년은 에이스 파일럿을 상징하는 빨간색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었다. 발트펠드가 비웃듯이 말했다.

"…오히려 짐만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저 녀석들은 지상전을 경험한 적이 없을 것 아냐?"

"엘리트 부대가 납셨군요."

다코스터도 그 말에 동의했다. 솔직히 귀찮은 짐을 떠맡은 기분이다. 크루제 부대 소속 파일럿이라면 자존심도 강할 테고 다루기 힘들 게 분명하다. 부대의 조화를 어지럽힐 가능성도 있었다. 발트펠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크루제 부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난 그 녀석이 싫거든."

"…라우 르 크루제 말씁입니까?"

'가면의 남자' 라우 르 크루제라고 하면 전설적인 파일럿으로서, '사막의 호랑이'와 더불어 널리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물론 다코스터는 발트펠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라고 생각한 다코스터는 상관의 대답을 듣고 힘이 빠졌다.

"남에게 눈을 보여 주지 않는 녀석은 믿을 수 없어."

간결하면서도 아무 근거도 없는 의견이다. 다코스터는 몰래 한숨 쉬면서 라우 르 크루제가 커피 맛에 민감하거나, 눈에 띄는 복장으로 점령지를 돌아다니는 취미를 가졌다고 상상해 보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지만 발트펠드와 크루제 둘 중 누구의 부관이 되겠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현재의 상관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은 우주에서 찾아 온 동료를 맞이하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유송기의 이륙과 돌풍이 불어 와 갑판에 가는 모래를 흩뿌렸다.

"으악! 이게 뭐야?! 정말 끔찍한 곳이군."

신참자 중 금발 머리가 손을 들어 모래 바람을 막았다. 다른 한 명인 은발 소년도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발트펠드가 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사람은 몸소 체험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지."

뒤돌아 선 두 신참이 모래 때문에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불길한 미소를 띠고 걸어 오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레셉스에 잘 왔다. 난 지휘관인 앤드류 발트펠드다."

두 소년이 차렷 자세를 취하고 경례했다. 은발 소년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루제 부대, 이자크 쥴입니다!"

다코스터는 소년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보고 시선을 돌렸다.

"같은 부대, 디아카 엘스만입니다."

이자크보다 키가 큰 금발 소년이 이름을 밝혔다.

"하늘에서 내려 오느라 수고 많았다. 환영한다."

발트펠드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자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갑자기 물었다.

"전사가 지울 수 있는 흉터를 그대로 놔 둔다는 것은 뭔가 굳게 맹세했다는 뜻이지. 아닌가?"

상관의 노골적인 말투에 다코스터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자크는 잠시 주춤하더니 기분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발트펠드는 집요했다.

"그런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는 걸 보니, 굴욕적인 표시였나 보군?"

이자크가 발끈해서 외치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다리 달린 전함의 동향은 어떻게 됐죠?!"

'다리 달린 전함'이란 지구 연합군의 신형 전함 명칭이 아크 엔젤이라고 밝혀지기 전에 크루제 부대가 붙인 호칭이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다코스터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도발한 발트펠드도 잘못이지만, 부관으로서는 그냥 넘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도발에 처음 보는 지휘관에게 대들다니 저 소년은 상당히 급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다.

"그 전함이라면 이 곳에서 서방 180km 지점, 레지스탕스 기지에 있지. 무인 탐사기를 보냈는데 영상을 보고 싶나?"

발트펠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걸음을 옮겨 갑판에 세워진 2기의 X넘버를 바라보았다. 이자크와 디아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발트펠드를 응시했다. 발트펠드가 중얼거렸다.

"과연 같은 계통의 기체로군…. 그 녀석과 비슷하게 생겼어."

모빌 슈트를 올려다 보는 발트펠드는 뭔가에 열중하는 아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가 스트라이크라는 모빌 슈트에 지나치게 빠진 것 같아 다코스터는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저기요."

디아카가 뒤쪽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발트펠드 대장님은 이미 연합군 모빌 슈트와 겨루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응?"

발트펠드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보았다. 마치 그들─, 다코스터의 존재마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음… 맞아. 나도 크루제 부대를 비웃을 수 없는 처지야."

놀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두 소년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코스터는 언제든지 여유 만만한 상관이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는 모습에 적잖은 불안감을 느꼈다.

'마음이 약해졌다고? 설마 저 사람이?'

아무리 많은 적을 상대해도 콧노래를 부르며 싸우던 사람이, 가게에 미사일이 날아 왔을 때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던 그가 그런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을 리가 없다. 다코스터는 자신의 감상을 웃어 넘겼다.

'그럴 리가 없어. 어떤 적이라도 발트펠드의 무릎을 꿇게 할 순 없다. '사막의 호랑이'에게 패배란 없으니까….'

 

 

아크 엔젤의 엔진 음에 암벽이 부르르 떨렸다. 그 주위에는 탓실에서 이동한 피난민들이 레지스탕스 틈에 섞여서 전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라고 소리 지르며 버기 카에 탄약을 나르는 사람, 동굴에서 뛰어 나왔다가 다시 뛰어 들어 가는 사람, 가족들과 서둘러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람….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카가리를 불러 세웠다. 아흐메드의 어머니였다. 사막의 햇빛이 그녀의 피부에 깊은 주름을 새겼지만, 이 지역의 다른 여자들처럼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말 없이 카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카가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인이 그녀의 손바닥에 녹색 돌을 얹었다.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말라카이트(공작석) 원석이었다.

카가리는 잠시 선명한 녹색 돌을 바라보았다. 가는 줄무늬가 마치 비단에 짜인 섬세한 문양 같았다.

"이게 뭐예요…?"

카가리가 머뭇거리며 묻자, 여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예전에 찾은 거란다."

"아흐메드가…."

카가리가 놀라서 되돌려 주려 했다.

"안 돼요.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가져가렴. 그 아이가 네게 준다고 했어."

"저한테…?"

카가리가 손 위의 돌을 응시했다. 피부가 그 빛에 물들 만큼 선명한 녹색이었다.

"그 돌은 사악한 것을 빨아 들이고, 위험을 알려 준다고 하더구나. 가지고 가렴."

여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며 카가리의 손을 잡아 돌을 쥐어 주었다.

"넌 살아서 돌아 오너라…."

카가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흐메드의 어머니가 떠나자, 키사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게 뭐죠?"

"아흐메드가 나에게 준 선물이야…."

그녀는 아흐메드가 왜 자신에게 그 돌을 주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곁에 없는 동지의 옛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가슴이 저렸다.

'아흐메드, 그렇게 젊은 나이에 가야 하다니….'

늘 활기찬 그는 틈만 나면 카가리를 찾아 왔으며, 함께 사막으로 놀러 나간 적도 있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사구의 바람 무늬를 그들은 나란히 앉아서 바라보곤 했다.

그림자처럼 곁에 서 있는 키사카가 그 돌을 보고 잠시 후에 나지막이 말했다.

"…아름다운 돌이군요."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사이브의 목소리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제압하며 울려 퍼졌다.

"출발!"

선두 버기 카가 출발했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카가리도 서둘러 자신들의 버기 카로 뛰어 갔다.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레셉스 함교로 들어 온 발트펠드의 물음에 통신병이 대답했다.

"네! 동쪽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모니터를 본 이자크가 "다리 달린 전함이다!" 라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발트펠드가 지도를 확인했다.

"타르파티아 옛 공장 터로 향하는군. 물론 이 곳을 돌파할 생각이라면 나라도 똑같은 판단을 했을 거다."

마치 이번에는 상대방을 봐 주겠다는 표정이다.

"대장님…."

명령을 기다리는 다코스터의 얼굴을 보고 발트펠드는 난처한 듯이, 하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음~, 조금만 더 기다려 줬으면 했는데…, 할 수 없지."

"출격입니까?!"

이자크가 흥분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발트펠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무원에게 명령했다.

"레셉스 발진! 코드 02! '피트리'와 '헨리 카터'에 송신하라!"

"네!"

승무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발트펠드는 팔짱을 낀 채 쓴웃음을 지었다.

"숙녀를 먼저 움직이게 하다니 그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

다코스터와 승무원들은 늘 있는 일이라 못 들은 척했지만, 그의 발언에 익숙하지 않은 이자크와 디아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발트펠드가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

"사과의 뜻으로 성대한 불꽃 놀이를 준비해야겠어."

 

 

"뭐야, 아직도 안 먹었냐?!"

아크 엔젤 내부 식당에서 키라의 쟁반을 뒤에서 들여다 본 무우가 잔소리를 했다. 키라는 아까부터 요리를 포크로 건드릴 뿐, 거의 먹지 않았다.

"어서 먹어, 자."

무우가 키라의 쟁반 위에 가져온 요리를 툭 얹었다. 키라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흠칫하며 놀랐다. 도넬 케밥이다. 무우가 옆에 앉아서 같은 것을 먹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현지 조달이 최고라니까."

"소령님…, 또 먹어요?"

키라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 무우는 정규 메뉴를 키라의 두 배는 먹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웠다. 그러자 무우가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우린 이제부터 싸우러 갈 거잖아? 많이 먹어 두지 않으면 힘이 안 나지~."

모름지기 파일럿이라면 전투 전에 식사를 끝내고 혈당치를 높여 두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한도가 있다. 그렇게 많이 먹으면 압력을 받고 토할 것 같았지만, 무우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태연한 얼굴로 소스 용기를 키라에게 내밀었다.

"자, 어서 먹어 봐. 소스는 요구르트가 괜찮아."

그 말에 키라는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호랑이도 그렇게 말했어요. 요구르트 소스가 훨씬 맛있다고."

키라의 말에 무우가 케밥을 입에 넣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흠…. 제법 맛을 아는 사람이네."

키라와 카가리가 '사막의 호랑이' 발트펠드를 만났다는 보고를 무우도 들었지만, 그는 상관 없다는 듯이 다시 케밥에 집중했다.

인상적인 적장의 모습과 함께 키라의 입 안에 그 때의 칠리 소스와 요구르트의 맛이, 그 뒤로 이어진 화약 냄새와 뒤섞여서 떠올랐다.

"차라리 적에 대해서 모르는 편이 나아. 빨리 잊어버려."

기억의 바다를 떠 다니던 키라는 무우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네…?"

말 뜻을 못 알아 들은 키라가 되묻자, 무우가 케밥을 입 안 가득 씹으며 대답했다.

"서로 총구를 겨눠야 하는 상대를 알아 봤자 망설임 밖에 더 남겠어?"

키라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 그 사람과 지금부터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키라는 헤어질 때 발트펠드가 했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 좋은 일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발트펠드도 지금의 키라와 똑같은 심정이었을까? 죽여야 할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 자신을 후회하고 있을까?

─넌 지금 외롭구나.

그 때 그는 다정하면서도 슬픈 눈으로 키라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죽음이다. 자신의, 혹은 상대방의 죽음.

─그럼 어떻게 승패를 가름할 수 있을까? 어디서 끝내야 하지?

발트펠드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키라에게 속삭였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는 이토록 망설이고 있다.

'적을 모조리 해치워야… 다 끝날까? 그 사람을 죽이고, 아스란을 죽이고…. 코디네이터들을 모두 다 죽이면 전쟁이 끝날까? 그럼 미래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키라의 생각은 땅이 울리는 둔한 폭발음에 지워졌다.

"뭐야?!"

아크 엔젤의 거주 구역까지 도달한 폭발음에 앞서, 카가리 일행은 폭발을 직접 목격했다. 지평선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쓸고 지나가듯, 눈 앞에 펼쳐진 지뢰 밭이 동시에 불을 뿜어 냈다. 잠시 후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퍼지며 검은 연기가 솟아 올라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레지스탕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버기 카에서 일어난 사이브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진정해라! 공격을 받은 게 아니야!"

지뢰 밭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에 의한 그들의 정신적인 피해가 막심했다.

"그 많은 지뢰를 순식간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술력에 대한 공포심이 싹텄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이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철저하게 세운 작전을 이미 적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쳇!"

카가리가 이를 악물었다. 지난 번에 만난 요란한 셔츠를 입은 적장의 모습과 죽어 간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따위 녀석한테…!'

그녀 자신이 늘 심각했기 때문에, 카가리는 '사막의 호랑이'가 전투를 게임처럼 즐긴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발트펠드는 결코 살아 남기 위해서, 극한 상황에 놓인 자의 심정으로 싸울 만한 위인이 아니니까. 그런 인간의 유희 때문에 아흐메드가 죽은 것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게도 적장과의 만남은 키라처럼 큰 인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웃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압도적인 존재에 패배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사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가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는군."

그렇다. 지금까지는 그저 그의 장난에 불과했다. 카가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궁지에 몰리도록 해 주겠어…!'

 

 

"그래! 1호기에 런쳐, 2호기에 소드야!"

무우가 파일럿 슈트로 갈아 입으면서 통신기를 통해 지시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장비를 바꾸는 것보다 내가 갈아 타는 편이 빠르기 때문이야!"

스카이 글래스퍼의 장비에 대한 지시였다.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무우는 스트라이크에게 교체용 배터리 팩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다면, 같은 기체에 다음 팩을 장착하는 것보다 장착이 완료된 기체를 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 당연히 빠르다. 격납고에 있는 답답한 정비사를 향해 소리 지른 뒤, 그는 통신을 끊었다.

키라도 파일럿 대기실에서 허둥지둥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레지스탕스의 전력 따윈 솔직히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무우가 입을 열었다. 키라도 그 말에 수긍했다.

아마도 적은 모든 전력을 투입할 것이다. 발트펠드를 떠올리며 키라는 생각했다. 이 쪽이 총력을 다해서 레셉스를 돌파하려는 것을 그는 이미 예측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전력을 끌어 모아 적을 저지하자, 그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는다.

"끝까지 잘 버텨라."

키라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무우가 웃었다.

"하긴 요즘 네게 할 말이 아니군."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르자 키라는 지나가는 무우를 붙잡고 물었다.

"소령님, '버서커'가 뭡니까? 무슨 뜻인지 아세요?"

무우가 뒤돌아 서서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버서커'라고? 그건 어느 신화에 나오는 미친 전사라는 뜻 아냐?"

"미친… 전사라고요?"

"그래, 평상 시에는 얌전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흥분해서 사람이 변한 것처럼 흉악해지는 끔찍한 광전사(狂戰士)를 가리키는 단어야."

키라는 등이 오싹하고 내장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발트펠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무리 네가 '버서커'라고 해도….

끔찍한 광전사라고? 내가? 그 단어는 키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전투 중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얼마나 많은 적기를 해치웠는지. 모빌 슈트에 사벨을 꽂아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레버와 스로틀을 다루는 손에 생생한 감촉이 전달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빔이 상대방의 조종석을 꿰뚫을 때, 키라는 틀림 없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 사실을 여태까지 잊고 있었다. 어느 새 닳아 버린 자신의 마음이 적을 쓰러뜨리고, 아군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종석에 들어가는 순간, 키라는 더 이상 키라가 아니다. 스트라이크라는 병기의 일부가 된다.

발트펠드는 키라 자신도 모르는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트펠드가 짧은 시간에 그 사실을 알아 낸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갑자기 왜 그래?"

고개를 들자 무우가 의아한 듯이 키라를 바라보았다. 그 단어를 어디서 누구한테 어떤 문맥 속에서 들었는지, 의외로 눈치가 빠른 무우는 이미 알아 차리지 않았을까. 키라는 상대방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대답했다.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무우가 여전히 신경 쓰인다는 표정으로 키라를 바라보았으나, 마침 그 때 스피커를 통해 밀리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라가 소령님, 야마토 소위님은 탑승기로 가 주십시오.」

"이크."

무우의 주의력이 다른 곳을 향한 틈을 타서 키라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광전사….'

그런 것이 되고 싶지는 않다. 키라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사출 장치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레, 레이더에…!"

카즈이가 놀란 나머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레이더에 빛의 점들이 깜빡이며 이 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토노무라가 그 뒤를 이어 분석했다.

"레이더에 적기로 추측되는 그림자! 교란이 심해서 숫자 포착이 불가능합니다! 1시 반 방향!"

찬드라도 소리를 질렀다.

"그 후방에 대형 열량 둘! 적 모함 및 구축함으로 추측됩니다!"

레셉스와 그 요함(같은 작전 임무를 띠는 군함)이 분명하다. 앞서 보고 받은 전투 헬기가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류가 그것을 바라보며 전투 개시 지시를 내렸다.

"대공, 대함, 대 모빌 슈트 전투, 공격 개시!"

지시를 받은 나탈이 명령했다.

"스트라이크, 스카이 글래스퍼 발진!"

육상 전함 레셉스. 전체 길이 250m, 높이는 모래 위로 나온 부분만 해도 64.5m나 되었으며 거의 이동하는 요새나 다름 없다. 모래에 파묻힌 밑부분에 스케일 모터라는 비늘 상태의 기구를 설치하여 그것이 미세하게 진동함으로써 지면이 액상화되며, 조정에 따라 추진력으로 이용할 수 있다. 밑이 바위인 경우에는 캐터필러로 교체되는 등, 사막이라는 악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전함이다. 또한 전함 앞뒤로 40cm 연장 포탑 3기, 사막 어뢰 발사관을 양 현에 5문씩 갖추었고, 그 밖에 수직 미사일 런쳐(VLS) 32문 등의 화력을 자랑한다. 그 거대한 전함이 지금 이 순간, 먹이를 노리는 방울뱀이 모래를 타고 움직이듯이 아크 엔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정말 에일로 괜찮겠어?"

머독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바쿠를 상대하려면 화력보다 기동력이 우선이라니까요!"

키라가 그렇게 대답하며 해치를 닫았다. 빔의 감쇠율이 높은 대기권 내에서는 무장이 빔 라이플과 사벨 밖에 없는 에일 스트라이커가 머독이 보기에는 다소 불안했다. 하지만 아그니의 연속 사격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이미 첫 지상전을 통해 뼈 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모빌 슈트의 신장보다 더 큰 장도를 휘두르며 민첩한 바쿠와 싸우기에는 지구 중력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스카이 글래스퍼 1호, 프라가, 발진!」

런쳐 팩을 기체 뒷부분에 설치한 무우의 스카이 글래스퍼가 한 발 먼저 출발했다. 에일 스트라이커를 장착한 스트라이크가 정위치에 서자, 밀리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라이크, 발진하십시오!」

'광전사….'

그 단어가 한 순간 뇌리에 떠올랐으나, 키라는 그 생각을 뿌리치고 큰 소리로 외쳤다.

"키라 야마토, 갑니다!"

이동식 사출 장치에 의해 밖으로 사출된 순간, 눈 앞에 전투 헬기가 들어왔다. 적이 발칸을 발사하자 키라가 가까스로 실드를 펼쳐서 피하고 이겔슈테른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망설이면 당한다!'

스쳐 지나가는 헬기가 불을 뿜는 것을 힐끗 쳐다본 키라는 곧바로 주위 상황을 점검했다. 거대한 육상 모함 레셉스가 다른 한 척의 전함을 이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그리고 상공에는 전투 헬기 아자일과 VTOL 전투기 인페스투스가 무수히 날아 다니며 벌떼처럼 아크 엔젤을 에워싸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버기 카로부터 런쳐가 발사되어 1기의 헬기를 격추시켰으나, 새 발의 피나 다름 없었다.

무우의 스카이 글래스퍼가 가볍게 선회하면서 아자일을 향해 기관총을 쏴 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2기의 헬기가 검은 연기를 피우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엔듀미온의 매'는 지상에서도 건재했다.

레셉스의 해치가 열리면서 바쿠가 튀어 나왔다. 모니터가 그 모습을 확대하자, 키라가 코디네이터의 시력으로 숫자를 셌다.

"…넷, …다섯 기!"

키라는 버니어를 내뿜으며 전쟁터로 향했다. 이 때 그는 이미 전투에 빠져들고 있었다.

 

 

"발트펠드 대장님!"

격앙된 목소리가 격납고의 높은 천장에 울려 퍼지자, 발트펠드가 뒤돌아 보았다. 눈부신 주황색에 검은 줄무늬, 헬멧에는 송곳니까지 그려진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파일럿 슈트 차림이다. 안쪽에서 씩씩거리며 걸어 나온 사람은 크루제 부대의 젊은 파일럿들이다. 이자크가 신경질적으로 캐물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저희들 배치가 레셉스 선상입니까?!"

발트펠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상대방의 분노를 무시했다.

"아니, 그럼 크루제 부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병사가 그런 식으로 이의를 주장해도 된다고 가르치던가?"

그의 대답에 이자크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아뇨…, 하지만 저들과의 전투 경험은 저희들이 훨씬…!"

"패배 경험이겠지."

발트펠드 곁에 서 있는 아이샤가 도중에 끼어 들었다. 그녀도 엷은 분홍색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었다.

"뭐라고?!"

아이샤의 신랄한 혹평에 이자크가 발끈했다.

"아이샤."

발트펠드가 꾸짖자 아이샤는 "실례." 라고 말한 뒤 등을 돌렸다. 하지만 전혀 미안해 하는 표정이 아니다. 발트펠드가 다시 두 신참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의 기체는 포전(砲戰) 사양이다. 고속 전투를 특징으로 하는 바쿠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을 거야."

"그건 해 보지 않으면…."

집요하게 주장하는 이자크를 디아카가 어깨를 잡고 말렸다.

"이제 됐어, 이자크. 명령이잖아. 실례합니다."

여기서 고집을 피우다 명령 불복종이라는 딱지를 떼는 것이 싫었는지 디아카는 이자크를 끌다시피 하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발트펠드는 금발머리 소년을 상승 지향이 강한 타입이라고 단정 지었다.

도중에 디아카가 뭐라고 말하면서 이자크를 설득했다. 아마도 난전이 벌어지면 뭘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무훈을 세우면 명령 위반은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 알 바 아니지만.

"그 소년 같은 일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발트펠드가 자신의 기체를 향해 걸어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 저 소년들이 접지용 프로그램을 전투 중에 변환할 수 있다면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물론 그의 먹이에 손 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독백을 들은 아이샤가 키득거리며 자동 사다리에 올라 탔다. 둘이 함께 조종석으로 올라가면서 발트펠드도 따라 웃었다.

"…내가 너무 푹 빠진 것 같지 않아?"

"아뇨."

아이샤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적이에요."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그는 가슴이 뛰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그 소년은 발트펠드의 적이었다. 적이기에 그토록 발트펠드를 흥분시킬 수 있었다.

둘은 나란히 기체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주홍색으로 채색된 짐승형 기체는 바쿠를 바탕으로 성능을 대폭 강화시킨 발트펠드 전용기 TMF/A-803=라고우였다. 등에 2연장 빔 포를 장착했으며, 입에 물린 형태로 빔 사벨을 장비하고 있다. 이 빔 사벨은 지구 연합군에서 탈취한 듀얼의 무기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아직까지 자프트의 기술로는 빔 병기를 이렇게까지 소형화할 수 없어서, 우습게도 내츄럴이 그들을 따라서 개발한 모빌 슈트로부터 역으로 그 기술을 빌린 격이 되었다.

복좌식 조종석 앞에는 사격수, 뒷좌석에는 조종사가 탑승한다. 앞쪽에 아이샤가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그녀는 놀랍게도 사격에 관해 뛰어난 솜시를 보였고, 부대의 어느 파일럿보다도 우수했다. 코디네이터인 이상 그녀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은 당연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여자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자, 그럼 다코스터. 전함을 부탁한다."

「네!」

모니터에 비춰진 다코스터는 씁쓸한 표정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명랑했다. 평상시에는 지휘관이 전선에 나가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역시 발트펠드는 모빌 슈트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다.

발트펠드가 전방을 노려보았다.

"발트펠드, 라고우, 간다!"

 

 

"고트프리트, 발리언트, 발사!"

나탈의 호령이 아크 엔젤 함교에 울려 퍼졌다. 적함에 격렬한 포격을 가하면서도, 적의 공격으로 인해 선체가 끊임 없이 크고 작은 충격에 시달렸다.

바깥에서는 레지스탕스의 버기 카가 날아 다니는 전투 헬기에 런쳐와 바주카 포를 겨냥하면서 필사적으로 엄호하려 했다. 자프트의 공격은 대부분 전력 상 효과가 크고 또한 맞히기가 수월한 아크 엔젤에 집중되었고, 5기의 바쿠는 스트라이크를 가로 막았다.

버기 카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전투 헬기를 격추했다. 쾌재를 부르는 레지스탕스가 다음 순간 미사일 폭발로 인해 산산 조각 났다.

"ECM 및 ECCM 강도 17% 상승합니다!"

근신에서 풀려난 사이가 계기판을 보면서 외치자, 사격 지휘를 맡은 파르가 보고했다.

"발리언트 포신 온도,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탈이 마류에게 말했다.

"함장님! 로엔그린의 사용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안 돼! 그건 지표면에 오염 피해가 너무 커!"

마류가 놀란 표정으로 거부했다.

"발리언트의 출력과 충전 사이클로 대응해 줘!"

"하지만…!"

나탈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그것을 억누르듯이 마류가 강조했다.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마지 못해 나탈이 물러섰다. 그녀에게는 마류의 의견이 허무맹랑한 이상주의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전함이 격추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그러는 동안, 스카이 글래스퍼가 적군 구축함에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아그니에서 발사된 강력한 빔이 갑판에서 포대 대신 사용되던 자우트를 뚫고 선체에 파고든 순간,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구축함이 속도를 떨어뜨리고 옆으로 비껴 나갔다.

"해냈어!"

적함의 전선 이탈에 아크 엔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때, 둔중한 충격이 뒤쪽에서 전함을 뒤흔들었다.

"뭐야…?!"

토노무라가 몸을 일으키고 레이더를 본 뒤 숨을 삼켰다.

"6시 방향에 적기…! 적함인가…?"

"뭐라고?!"

마류가 자신도 모르게 CIC를 돌아 보았다. 6시 방향…, 후방이다. 나탈이 이를 갈았다.

"또 한 척 숨겨 두었군!"

마류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방은 '사막의 호랑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정면으로 쳐들어 오는 척하면서 전투 개시 전에 미리 대기시켜 둔 다른 전함을 이용해 아크 엔젤을 사이에 두고 양 쪽에서 들이칠 계획이 분명하다. 후방에서의 일제 사격이 아크 엔젤을 덮쳤다.

"함포, 직격 코스!"

토노무라가 소리 지르자, 마류와 나탈이 동시에 외쳤다.

"피해!"

"격추시켜!"

하지만 둘 다 불가능한 상태에서 몇 발의 미사일이 전함을 뒤흔들었다.

"으윽…!"

미사일에 명중한 전함이 크게 기울어지면서 타르파티아 옛 공장 터로 추락했다. 그 옛날 희소 금속의 채굴과 정제를 위해 세워진 이 공장은, 현재 사막 한가운데에 내버려졌다. 불어 오는 모래에 거의 파묻혀 있던 건물을 아크 엔젤의 거체가 굉음을 울리면서 무너뜨리며 그 위에 멈춰 섰다. 꼼짝 못하게 된 아크 엔젤을 향해 가차 없이 적의 포격이 집중되었다. 흔들리는 전함 내에서 나탈이 필사적으로 저항을 시도했다.

"헬다트, 코린토스, 발사!"

"이것은…!"

적함 정보를 분석하던 토노무라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쳤다.

"레셉스의 갑판 위에 듀얼과 버스터 확인!"

"뭐라고?!"

전 승무원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곳까지 쫓아 오다니….

마류가 초조한 모습으로 파일럿 좌석에 앉은 노이만을 향해 외쳤다.

"추진 장치 전개, 상승! 여기서는 고트프리트를 발사할 수 없어!"

하지만 노이만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는지 즉각 대답했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체에 뭐가 걸려서…."

추락했을 때, 건물 골조에 아크 엔젤의 날개가 끼여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래서는 포격을 피하기는 커녕 주포의 사선을 전개할 수도 없다.

그 때, 다시 함포가 명중하여 어마어마한 굉음과 충격이 전함을 급습했다. 두려운 예감에 승무원들의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끝나 버리는 걸까…? 이런 곳에서… 사막 한가운데서…? 아군에 연락을 취할 수도 없는 이런 장소에서 모래에 파묻혀 사라지는 걸까….'

 

 

스트라이크와 바쿠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다음 순간 스트라이크는 착지했고, 바쿠는 빔 사벨로 절단되어 폭발했다. 키라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손에 쥔 사벨을 던졌다. 그것은 또 다른 바쿠의 외눈에 박혔다. 카메라를 잃고 한동안 동작을 멈춘 기체를 키라가 라이플로 저격했다. 빔이 뚫고 지나가자, 연달아 내부가 터지면서 마지막 기체가 쓰러졌다. 겨우 바쿠 5기를 물리친 키라가 조종석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크 엔젤이 등 뒤에서 공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아차! 아크 엔젤이!"

엄호하기 위해 서둘러 기체를 돌렸을 때, 갑자기 날아 온 빔을 아슬아슬하게 실드를 펼쳐서 막았다.

"뭐지…?!"

바쿠는 전부 다 쓰러뜨렸을 텐데…. 뒤돌아 본 키라가 목격한 것은 본 적이 없는 주황색 기체였다. 바쿠와 비슷했지만, 머리 부분에 진과 비슷한 뿔이 돋아 있으며 입에 문 형태로 코 양 쪽에 빔 사벨이 뻗어 나와 있었다. 그 움직임은 여태까지 싸운 어느 바쿠보다도 빠르고 정확했다.

"대장기…? 설마 그 사람이…?!"

인정사정 없이 날아 오는 빔을 실드로 피하면서 키라도 라이플로 맞서 싸웠다.

"과연, 솜씨가 대단한걸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이샤가 담담하게 말했다. 라고우를 조종하면서 발트펠드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그렇지?" 라고 동의를 구했다.

"오늘은 냉정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지난 번에는 얼마나 대단했는데."

그 말에 아이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그렇게 기뻐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저 소년 때문에 발트펠드는 열 명이 넘는 파일럿을 잃었다. 모두 다 장래성이 있는 훌륭한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적 파일럿의 강인함을 칭송했다.

문득 아이샤가 중얼거렸다.

"앤디, 많이 힘들죠? 당신 저런 아이 좋아하잖아요."

발트펠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넌 지금 외롭구나.

그 말에 놀란 듯이 고개를 든 소년의 여리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남아 있는 망설임이 그로 하여금 이런 의문을 떠오르게 했다.

"…투항할 것 같아?"

아이샤가 단정했다.

"아뇨."

발트펠드가 웃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너무 시시하잖아?'

 

 

"아크 엔젤이!"

폐공장에 처박힌 채 움직일 수 없는 아크 엔젤을 발견하고 카가리와 키사카가 버기 카를 멈추었다.

"엔진에 맞았나? 저래서야 표적 밖에 되지 않겠어!"

키사카가 스트라이크를 찾아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때 카가리가 차에서 뛰어 내려 아크 엔젤을 향해 달려갔다.

"카가리!"

한 발 늦게 알아 차린 키사카가 뒤쫓으려 했으나, 눈 앞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주춤한 사이에 카가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 동안 카가리는 아크 엔젤의 해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격납고로 뛰어 든 그녀의 모습에 머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봐, 뭐야. …아가씨?!"

카가리는 그를 무시한 채 똑바로 스카이 글래스퍼 2호기로 달려가 순식간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무슨 짓이야?! 이 봐, 아가씨!"

"이 상황에서 기체를 아껴서 어쩌겠다는 거야?!"

따지는 머독을 향해 소리 지른 뒤, 카가리가 엔진에 시동을 걸고 계기판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내가 타고 나가겠어!"

"뭐라고?! 말도 안 돼."

머독이 가로 막으려는 듯이 기체 앞으로 나왔다. 카가리가 방풍 유리를 내리면서 외부 스피커를 향해 외쳤다.

"거기 비켜! 죽고 싶어?!"

소란을 듣고 다른 정비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몰려 왔으나 그녀의 말을 듣고 허둥지둥 물러섰다.

"해치를 열어!"

"어휴~! 요즘 애들은 왜 저러냐?!"

머독이 소중한 기체를 걱정하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지만, 카가리는 이미 기체를 띄우기 시작했다. 제트기에서 바람이 뿜어 나오자, 머독이 각오한 듯이 외쳤다.

"해치를 열어 줘라! 하지만 추락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협박과 함께 차단 벽이 닫히고, 스카이 글래스퍼의 등 뒤에 있는 제트 분사용 셔터가 내려갔다. 사출 장치를 통해 밀려 나가는 중압감에 카가리가 숨을 죽였다. 자신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된 기분이다. 다음 순간, 시야가 360도로 전개되는 감각에 깜짝 놀라서 조종간을 움켜 잡았다. 카가리는 하늘에 떠 있었다. 긴장된 손길로 어색하게 조종간을 움직이자, 기체에 장착된 소드 팩인 슈베르트 게벨의 무게 때문에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으나 시뮬레이션과 마찬가지로 기체가 반응하면서 상승했다. 그것을 보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스카이 글래스퍼 2호기가 발진…?!」

「뭐라고? 프라가 소령님이?」

「이 봐! 2호기에 누가 탔어?!」

당사자인 프라가 소령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오자, 함교에서 다들 숨을 죽였다. 카가리가 소리쳤다.

"나야! 카가리 유라!"

그리고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1호기가 공격 중인 레셉스를 향해 날아갔다. 2기의 스카이 글래스퍼가 먹이를 눈 앞에 두고 내려오는 매처럼 하늘에 우아한 궤적을 그리면서 거대한 모함을 습격했다. 카가리가 방아쇠를 당겼다. 발칸이 발사되어 갑판에 박히며 주포를 명중시켰다. 잠시 후에 폭발이 일어나자 무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이잖아, 아가씨. 추락하진 마!」

처음에 느꼈던 어색함은 예전에 사라졌다. 카가리는 마음껏 지체를 다루며 다시 상승했다.

2기의 전투기가 날개를 빛내면서 선회하여 또 다른 구축함을 향했다. 1호기의 런쳐 아그니가 불을 뿜고, 2호기가 함체에 로켓 앵커 '판자 아이젠'을 발사했다. 그 지점을 중심으로 급선회하여 포탑을 슈베르트 게벨로 절단했다.

"어때?!"

카가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흐메드와 죽은 동료들의 원수다! 여태까지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풀기 위해 그녀는 기체를 조종했다. 하지만 이탈하는 2호기를 뒤쫓듯이 구축함으로부터 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어 기체를 스쳐 지나갔다.

"아차!"

다행히 직격은 아니었지만 바로 곁에서 폭발한 미사일은 스카이 글래스퍼의 우측 엔진에 손상을 입혔다. 기체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추력이 점차 떨어졌다.

"쳇!"

카가리가 혀를 차며 계기판을 때렸다.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하지만 곧 계기판을 조작하느라 불평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 조종간을 힘껏 잡아당겨서 겨우 사막에 착륙했다.

아크 엔젤의 함교 부근에서 적의 함포가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전기 계통이 마비되어 계기판에서 불꽃이 튕기고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여전히 아크 엔젤은 움직일 수 없었다. 노이만이 아까부터 필사적으로 여러 추진 장치를 작동해서 전함을 띄우려 했지만,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뿐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 때 버스터가 발사한 빔이 우연히 선체를 스쳐 지나가면서 건물 잔해를 날려 버렸다.

"빠져 나왔습니다!"

노이만이 환호성과 함께 조종간을 잡아 당겼다. 아크 엔젤의 거체가 건물 파편을 날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마류가 명령했다.

"우현으로 60도! 나탈!"

두 말할 필요 없이 나탈도 외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트프리트 조준!"

시야가 펼쳐지면서 모래 바다에 떠오르는 거대한 모함이 눈에 들어왔다.

"발사!!"

아크 엔젤의 주포, 225cm 2연장 고에너지 수속 화선 포 '고트프리트 MK.71'이 불을 뿜어 냈다. 레셉스의 갑판에 있던 버스터가 뛰어 올라 사선을 피했다. 굵은 열선이 레셉스의 후부 주포를 꿰뚫자, 곁에 배치된 자우트가 폭발에 휘말려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레셉스는 검은 연기를 피우며 모래 바다 위에 좌초한 듯이 동작을 멈추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살필 여유도 없이, 키라는 라고우를 상대로 아슬아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라고우의 포구에서 발사된 빔을 실드로 막은 뒤, 스트라이크가 높이 뛰어 올랐다. 그것을 예상한 라고우도 함께 허공에 떠오르자, 키라가 공중에서 적기를 겨냥했다. 하지만 상대는 추진 장치를 이용하여 가볍게 몸을 돌린 뒤 스트라이크를 덮쳤다. 앞다리를 휘두르자 스트라이크가 뒤로 튕겨 나갔다.

'강하다!'

키라는 기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적을 응시했다. 파워가 바쿠와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조종자가 기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때때로 키라가 예상치 못한 동작으로 그를 몰아 세웠다.

─그럼 어떻게 승패를 가름할 수 있을까?

발트펠드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어디서 끝내야 하지? 적을 모조리 해치워야… 다 끝날까? 정말 그런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싸운다는 것이 그런 뜻일까? 하지만 나는….'

망설이던 키라는 계기판을 보고 흠칫 놀랐다. 파워의 잔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망설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편, 라고우의 조종석에서는 아이샤가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레셉스를 포착했다.

"…앤디, 큰일 났어요."

발트펠드가 혀를 찼다.

"다리 달린 녀석! 그렇게 공격 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던 아크 엔젤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고, 자신들의 모함이 검은 연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지시를 내릴 만한 바쿠도 없다. 듀얼과 버스터는 불타는 갑판에서 피신했는지, 아니면 그 전에 몰래 빠져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상으로 내려왔다. 2기 모두 발 밑에 흐르는 모래에 꼴 사납게 휘청거렸고, 저런 모습으로는 레지스탕스의 버기 카조차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새 뒤바뀐 형세에 발트펠드가 이를 갈며 라고우를 조종했다. 스트라이크를 붙잡으려 했으나, 반대로 공격을 받고 앞발에 탄두가 박혔다. 재빨리 그 부분을 분리시켰다.

"흥분하지 말아요! 질 수도 있어요!"

아이샤가 야단치듯이 말하자 발트펠드가 신음했다.

"알고 있어!"

스트라이크가 라이플을 들어 올리자, 아이샤가 먼저 선수를 쳐서 라이플을 폭파시켰다. 가까스로 스트라이크가 라이플을 내던지고 실드를 펼쳤다. 그 틈을 타서 라고우가 달려 왔다. 스트라이크는 빔 사벨을 뽑아 들었다. 둘의 그림자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라고우의 빔 포가 갈라지면서 폭파되었다. 발트펠드가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떼어 내고 착지했다.

'이제 슬슬 물러설 때가 왔군.'

발트펠드가 통신 회선을 열었다.

"다코스터."

「대장님!」

좌초된 레셉스에 남아 있던 다코스터가 모니터에 비춰졌다. 살벌하고 지친 표정을 한 부관이 발트펠드의 목소리르 듣는 순간 눈을 빛냈다. 그것을 본 발트펠드는 그를 비롯한 자신의 부하들을 무척 안쓰럽게 생각했다. 다코스타는 마법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 발트펠드가 명령하면 뭐든지 잘 될 거라고, 형세가 다시 역전될 거라고 믿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다름 아닌 '사막의 호랑이'다.

부하의 맹목적인 신뢰를 느끼면서 발트펠드가 말했다.

"퇴함 명령을 내리게."

모니터 너머로 다코스터가 숨을 죽였다.

"승패는 정해졌다.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버나디아로 돌아가서 지브롤터와 연락을 취해라."

「대장님…!」

일방적으로 지시한 뒤 다코스터가 뭐라고 외치는 것을 무시한 채 그는 통신을 끊었다. 불쌍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발트펠드가 진심으로 열중할 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앞좌석에 앉은 아이샤에게 말했다.

"당신도 어서 탈출해, 아이샤."

아이샤는 힐끗 그를 쳐다 본 뒤,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

발트펠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죽는 게 낫다는 그 말 뜻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바보야."

그렇게 말하자 아이샤가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맘대로 생각하세요."

사랑하는 여인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기억한 뒤, 그는 전방을 향했다.

"그럼… 함께 갈까?!"

라고우는 총알처럼 앞으로 뛰어 나갔다.

"발트펠드 씨!"

빔 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달려 드는 라고우를 향해, 키라가 통신 회선을 열고 말을 걸었다.

「아직 멀었어! 애송이!」

스피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흘러 나왔다.

"이제 그만 하자고요! 승부는 결정되었잖습니까! 항복하세요!"

아크 엔젤은 무사하다. 레셉스와 나머지 전함은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직까지 싸우는 자는 그들 밖에 없었다.

라고우가 눈 앞으로 달려와서 입에 문 빔 사벨로 스트라이크를 베어 내려 했다.

「전에 말했을 텐데? 전쟁의 종말에는 명확한 규율 따윈 없다고!」

발트펠드의 대답에 키라는 경악했다. 키라는 그의 사벨을 피하고 스쳐 지나가면서 스트라이크의 사벨을 휘둘렀다.

"발트펠드 씨!"

에일 스트라이커의 날개 끝 부분이 절단되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라고우의 사벨 한 쪽과 날개 또한 키라의 사벨에 의해 끊어져서 모래 위에 떨어졌다.

그 때, 경고음이 울려 퍼지면서 페이즈 시프트가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빔 사벨의 날도 함께 사라졌다. 라고우의 등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며 상대방의 손상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발트펠드는 한 쪽 발을 잃고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를 느끼게 하지 않는 민첩함으로 라고우를 조종하여 모래 위를 돌아 다시 뛰어 왔다.

「싸우는 수밖에 없잖아?! 서로가 적인 이상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말이야!」

예전에 그는 총을 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전쟁터다.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키라는 재빨리 에일 장비를 강제 분리시키고 실드를 내던졌다. 기체가 가벼워지자 아머 슈나이더를 꺼내서 양 손에 쥐었다.

라고우가 정면으로 달려 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스트라이크는 격렬한 충격을 받아 등 뒤로 튕겨 올랐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라고우의 목덜미에 나이프가 꽂혀 있었다. 모래 위로 떨어진 키라가 신음했다. 모니터에 라고우의 모습이 비춰졌다. 한 쪽만 남아 있던 빔 사벨이 깜빡이면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지자, 주황색 기체가 묘하게 실감 나는 동작으로 모래 위에 쓰러졌다. 꽂혀 있는 나이프를 통해 불꽃이 피어 오르는 것을 키라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앞 좌석에 앉은 여인이 잡아 채듯이 안전 벨트를 떼어 내고 일어나는 모습을 발트펠드는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아이샤가 뒤를 돌아 보았다.

"앤디?!"

그녀는 아마도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발트펠드의 예상은 또 다시 빗나갔다.

뒤돌아 본 그녀는 팔을 크게 펼쳤다. 그 얼굴에는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발트펠드도 몸을 일으켜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멋진 여자다. 이런 여자와 함께 죽을 수 있다니 인생은 참 멋있다. 그녀는 자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것일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다.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끔찍한 폭발이 그의 시야를 하얗게 뒤덮어서, 말도, 생각도, 눈 앞에서 미소 짓는 아름다운 얼굴도 모두 함께 날려 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불길에 모래 바다를 붉게 비추었다.

쓰러진 스트라이크 안에서 키라는 모니터로부터 눈을 떼어 낼 수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지웠다.

"난…!"

'죽이고 싶지 않았어.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게 아냐. 하지만….'

끊임 없이 흐르는 눈물이 볼을 적셨다. 마치 생명이 흘러 나오듯이 키라로부터 남은 체력을 빼앗았다.

전쟁에는 규율이 없다.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키라는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 그리고 미래에 남은 것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그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까? 그것을 알고 나면 조금 더 편해질 수 있을까? 이 눈물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새벽의 사막'을 위해."

사이브가 들어 올린 술잔에 답하기 위해 마류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손에 넣은 미래를 위해."

"뭐, 어쨌거나."

무우가 허무하게 끝맺으며 나탈을 포함한 네 명이 술잔을 기울였다. 나탈이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독한 술 맛에 콜록거렸다. 마류가 똑같은 술을 단숨에 비우는 것을 보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이브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표정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레지스탕스들의 거점인 바위 산 앞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승리와 술에 취해서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본 무우가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들, 앞으로도 고생이 많겠어."

그가 잔을 든 채 어깨를 으쓱였다.

"호랑이가 죽어도 자프트 자체가 이 곳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들이 탄광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면서? 곧 다음 타자가 찾아 오겠지."

잔칫상에 물을 끼얹는 발언이었으나,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이브는 잔을 내리고 곁에 세워 둔 총을 잡았다.

"그 때는 또 싸우면 돼. 우리는 우릴 괴롭히는 놈들과 계속해서 싸운다."

사막의 명예로운 전사를 마류는 존경심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싸운다. 언젠가 싸움이 사라지는 날을 꿈꾸며….

그들은 결코 굴하지 않는다.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땅을 자신들의 손으로 되찾는 날까지. 나도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자신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

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장로님께서 전사를 송별하는 기도를 하신대요."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이들을 보내고 살아 남은 자들은 그 뜻을 이어 받는다.

무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싸운다, 라…."

예포가 계곡에 울려 퍼진 뒤, 장로가 전사자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계곡에 반사되는 메아리가 마치 황천에서 되돌아 오는 대답 같았다.

마류는 공포탄을 쏘아 올린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 꽉 찬 별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의 미래를 지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