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수빈 박씨

박명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 참, 이를 어쩐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전하께 뭐라 아뢰어야 한단 말인가?'

답답한 심사를 견디다 못한 박명원이 닫힌 방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밖에는 며칠 전부터 시작된 장마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듣자니 그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촌 조카 딸이라는 단서라도 붙이지 말 것을….'

추녀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박명원의 기억 속으로 정조를 알현했던 그 날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허허, 과인의 나이 아직 어린데 무엇이 급하다고 이리 서두르는지 모르겠소."

"전하, 그리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옵소서. 어서 후사를 보셔야 왕실이 안정되는 법이옵니다. 신은 항시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그는 정조의 혼인을 성사시키고자 간곡히 말했다.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로, 살아 생전 아버지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준 화평 옹주의 남편이었기에 정조는 그를 남달리 신임하고 있었다.

"과인이 이토록 건강한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랍니까?"

효의왕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뒤를 이어 간택된 선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후 더 이상 후사가 없자, 많은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적극 간청했지만 정조는 매번 거절했다. 그러나 박명원은 사사로운 고모부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더는 미룰 일이 아니라고 여겨 벌써 며칠째 정조에게 똑같은 주청을 올리고 있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정조는 박명원의 주청에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좋은 규수를 찾아 주십시오. 신료들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그런 사람 말입니다."

정조가 승낙하자 박명원은 기뻐하며 아뢰었다.

"전하, 실은 소신의 질녀 중에 재색을 두루 갖춘 규수가 한 명 있사옵니다. 가세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오나 전하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박명원은 은근히 심중에 두고 있던 사촌 조카 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간택이다 뭐다 해서 일을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공의 사촌에게 의견을 물어서 좋다 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정조는 모든 일을 박명원에게 일임하였다. 박명원은 퇴궐하자마자 사촌의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의논하였다. 그런데 기뻐 날뛸 줄 알았던 사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형님! 그 무슨 말씀이시오? 대궐의 후궁 자리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인 데다 설령 왕자를 생산한다 해도 시기와 암투가 끊이지 않는 곳인데 내 어찌 귀한 딸을 그런 곳에 보낸단 말이오!"

"이보시게! 이 일이 성사되면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박명원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내 비록 가난하지만 곱게 기른 딸자식을 호랑이 굴 같은 대궐에 보내면서까지 가문을 빛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말씀 하시려거든 그만 돌아가십시오."

"허허…, 이거 참!"

박명원은 혀를 찼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안 하는 것을…. 내 이만 돌아가겠네."

그 날부터 박명원은 혼자 속을 끓이기 시작했다.

'허, 이를 어쩐다? 친척이라 말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다른 집 규수를 고를 수도 없고….'

박명원은 방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박명원이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 박 생원님이 오셨습니다!"

박명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저 양반은 또 웬일이신가?'

박 생원은 박명원의 먼 친척 뻘 되는 이로 전라도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서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집안이 워낙 곤궁하여 친척들과는 일절 연락을 끊고 사는 박 생원이었지만, 박명원은 가끔 한양에 올라오는 그를 며칠씩 집에 묵게 하고 내려갈 땐 노자라도 얼마 손에 쥐어서 보내곤 했다.

"아니, 대감. 어디 편찮으시오?"

박 생원이 박명원의 낯빛을 보더니 놀라 물었다.

"아닙니다. 헌데 이 장마에 한양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실은 이번 장마로 집이고 뭐고 다 홍수에 떠내려가고 말았네. 그래서…."

이번 장마로 여주 일대가 큰 피해를 보았는데 박 생원 역시 살고 있던 살림살이 하나 건지지 못하고 그저 식솔들을 데리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왔다는 것이었다. 살림이야 워낙에 가난하여 건질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논 몇 마지기마저 불어난 강물에 다 씻겨 내려가 살 길이 막막하여 무작정 한양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무작정 올라오긴 했는데 당장 거처할 곳도 없이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네 그려. 다른 이는 몰라도 대감께서는 우리를 무정하게 내치지 않을 것 같아서…."

박 생원의 눈가에 희미하게 눈물이 고였다.

"그럼 식솔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선 남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다 큰 딸자식을 그런 곳에 두고 와서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

"딸자식이라고요?"

박명원의 귀가 번쩍 트였다.

"딸아이가 올해 몇입니까?"

"말하기 창피하지만 벌써 열 아홉이구먼. 그 아이도 어서 혼처를 정해야 하는데 누가 우리 같은 가난뱅이와 사돈을 맺으려 하겠는가?"

박 생원의 말에 박명원은 마음이 급해졌다.

"여봐라! 당장 박 생원님을 모시고 가서 식솔들을 모셔 오도록 하라! 그리고 마님과 따님도 계시다 하니 가마를 대령하여 가도록 하라!"

박명원의 예기치 않은 환대에 박 생원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잘만 하면 체면은 세우겠군. 시골에서 자란 아이니 조금 모자라긴 하겠지만 부인이 잘만 가르치면 되겠지.'

박명원의 가슴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시원해졌다. 얼마 후 박 생원이 식솔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박명원은 하인에게 미리 일러 둔 방으로 박 생원과 식솔들을 모시게 한 후 박 생원의 딸만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사뿐한 걸음걸이로 방으로 들어오는 박 생원의 딸을 본 박명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이 진흙 속에 묻혀 있었구나! 시골 아이인 데다 집안이 가난하여 기대하지 않았거늘….'

박 생원의 딸은 그야말로 어느 양갓집 규수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와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박명원이 묻는 말에 또박또박 공손하고 재치 있게 대답하니 박명원의 입에서는 연신 웃음이 배어 나왔다.

"허허허, 형님께서 딸아이 교육은 제대로 하시었소. 정말 훌륭한 아이입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남의 집이라 생각지 마시고 자리가 잡힐 때까지 편히 지내도록 하십시오."

아무 것도 모르는 박 생원은 그저 박명원의 말에 감격할 따름이었다.

며칠 후, 박명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정조를 알현했다.

"전하, 지난 번 말한 규수의 집에서 승낙을 받았사옵니다."

"그러셨습니까? 한 번 더 말하지만 규수는 별 탈 없을 사람이겠지요?"

정조는 신료들이 후궁 간택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터라 집안도 그렇거니와 인물 됨됨이도 정숙한 여인을 원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가세가 좀 곤궁하다는 것 뿐이옵니다."

"가세가 곤궁하다? 허허, 그거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그려. 처가가 가난하니 세도를 부릴 염려가 없을 것이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을 것이니 신료들의 당쟁에도 관여치 않을 것 아닙니까?"

정조는 박명원이 중매를 선 박 생원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장마통에 재산을 모두 잃은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온 것이 계기가 되어 하루 아침에 후궁이 된 이 시골 처녀는 다름 아닌 정조의 셋째 부인인 수빈 박씨였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제 23대 왕인 순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