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를 살린 한명회

세조의 부름을 받고 어전으로 들어간 신숙주는 이미 자리를 하고 있는 한명회와 구치관 옆에 정좌했다. 어전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세조의 얼굴이 불그스레한 것으로 보아 이미 몇 잔의 대작이 있은 모양이었다.

"과인이 경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날씨도 좋고 해서 그간 정사에 바빴을 경들의 노고도 치하할 겸 부른 것이니 마음 편히 즐기도록 하시구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또한 이 자리는 이번에 새로 임명된 영상과 우상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니 두 분은 특히 많이 들도록 하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세조는 얼마 전 영의정에는 우의정에 있던 신숙주를, 우의정에는 이조판서였던 구치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좌의정은 한명회를 유임시켰다.

"과인은 이제부터 경들과 함께 놀이를 할 것이오. 지금부터 과인이 한 사람씩 호명할 터인즉 잘못 대답하는 사람은 큰 잔으로 벌주 한 잔을 내릴 것이오."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세조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 그럼 먼저. 신 정승!"

"예, 전하!"

신숙주가 즉시 대답했다.

"저런! 과인은 이번에 새로 임명된 신(新) 정승을 부른 것이오. 그러니 영상이 아니라 우상이 답했어야지. 자, 벌주 한 잔 드시오. 하하하!"

세조는 벌주를 내리며 몹시 즐거워했다. 신숙주는 단번에 벌주를 들이켰다.

"구 정승!"

신숙주가 술잔을 비우자 세조가 다시 호명했다.

"예, 전하!"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동시에 대답했다.

"허허허! 이번에는 옛 구(舊) 자를 쓴 구 정승을 부른 것인데 구 정승이 답하였으니 우상이 벌주 한 잔 드셔야겠소."

구치관이 벌주를 마셨다.

"신 정승!"

세조가 부르자 이번에는 두 사람 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신 정승."

세조가 다시 한 번 호명했으나 신숙주와 구치관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어허, 그럼 구 정승!"

역시 누가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세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과인이 부르는데 아무도 답하지 않다니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두 사람 다 벌주를 들도록 하시오!"

세조의 호명은 계속되었고 어느 누가 대답을 하든 세조는 트집을 잡아 벌주를 주니 나중에는 두 정승 모두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경들 가운데 누가 성(姓)을 바꾸지 않고는 계속해서 벌주를 드셔야겠소. 이렇게 경들만 벌주를 먹으니 과인에게는 술잔이 돌아오지 않는구려. 자, 경들 중 누가 과인에게 벌주를 주시겠소?"

신숙주와 구치관이 많이 취한 것을 알고 세조는 스스로 벌주를 자청하고 나섰다.

"전하, 어찌 신하 된 몸으로 전하께 벌주를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또한 지금 소신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하의 벌주를 피할 방도가 없는 듯 하옵니다. 다만 소신이 전하와 팔씨름을 한다면 혹 이길 승산이 있는 듯 하옵니다만…."

신숙주가 취기 어린 목소리로 아뢰었다.

"그렇소? 그럼 어디 경의 팔 힘이 얼마나 센지 한 번 볼까?"

원래 팔 힘이 센지라 팔씨름이라면 자신이 있었던 세조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신숙주의 손을 맞잡았다. 세조와 신숙주는 그렇게 일곱 번을 겨루었으나 모두 세조가 승리하였다. 세조는 더욱 흥에 겨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영상이 호언장담하여 혹시나 했더니 역시 글만 읽을 줄 알았지 힘은 안 되겠소이다."

"전하, 소신이 지금까지는 감히 전하와 대적하기 어려워 일부러 져 드린 것이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신숙주는 다시 한 번 대적할 것을 청하고 나섰다.

"허허 그렇게 지고도…. 좋소이다. 한 번 더 해 봅시다. 이번엔 과인도 봐 주지 않을 것이니 손목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세조는 다시 손을 내밀어 신숙주의 손을 잡았는데, 세조가 미처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신숙주가 재빨리 세조의 팔을 한 쪽으로 넘겨 버렸다.

"이런! 영상…."

세조가 몹시 분한 듯 소리치자 한명회와 구치관이 놀라 신숙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세조의 안색은 점차 굳어졌다.

"전하, 영상이 아무래도 술이 과한 모양입니다. 이제 밤도 깊었사오니 그만 침소에 드시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한명회가 급히 사태를 마무리했다.

"알았소. 경들도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음…."

어전을 물러나온 세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향했는데 다른 날과는 달리 한명회가 신숙주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술에 취한 신숙주를 하인들이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가자 한명회는 집사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이보게. 내 말 잘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하네."

"예, 나리."

"지금 자네 대감의 방에 있는 초와 촛대를 모두 치우도록 하게나.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대감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는 버릇이 있으니 내일 새벽에도 술이 깨면 그리 할 것이네. 하지만 그리 했다간 큰 일이 날 것이야.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읽지 못하도록 초와 촛대를 모두 치워 놓아야 하네."

세조의 안색이 굳어진 것이 영 께름칙했던 한명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집사에게 그리 이른 것이었다.

한편 세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숙주가 괘씸하였다.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영상이 평소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무엄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혹시, 술 핑계를 대고 일부러 나를 시험한 것은 아닐까?'

한 번 시작된 세조의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아니 되겠군. 영상이 진짜 술에 취해 그런 것인지 알아 봐야겠어.'

세조는 동이 틀 무렵 내관을 불러 즉시 신숙주의 집으로 가서 신숙주의 동태를 살피고 오라 일렀다.

그 시작,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머리가 조금 아팠으나 평소 습관대로 책을 읽고자 불을 밝히려 하였다. 그런데 늘 촛대가 있던 자리에는 자리끼만 놓여 있을 뿐 아무리 더듬어도 촛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시각에 하인을 꺠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신숙주는 도로 자리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한편, 신숙주의 집에 도착한 내관은 집안이 어둠에 쌓여 조용한 것과 신숙주의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궐로 돌아갔다. 내관은 자신이 본 바를 소상히 세조에게 아뢰었다.

"과연 영상이 몹시 취하긴 취했나 보구먼. 평소 같으면 이 시각에 책을 읽고 있을 터인데…. 그러면 그렇지! 영상이 내가 일부러 그럴 리가 없지."

세조는 잠시나마 신숙주를 의심한 자신을 책망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평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늘 경계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조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던 한명회로서는 비록 취중이라 해도 신숙주의 실수는 세조에게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미리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기지를 부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었던 신숙주를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