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박문수

박문수는 꿈에도 그리던 기생 소금천의 집에 당도하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 동안 소금천이 어떻게 변했을꼬?'

박문수와 기생 소금천이 인연을 맺은 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젊은 날의 박문수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진주에 내려갔을 때 알게 된 그들은 한 날 한 시에 죽자고 맹세까지 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정이 깊었다. 박문수는 10년 전 일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임지가 바뀌면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에도 그는 한 시도 소금천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박문수는 장원 급제를 하여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또한 당당히 벼슬길에 올라 소금천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학문에 더욱 힘썼다.

마침내 박문수는 장원 급제를 하였고 암행어사에 제수되어 꿈에 그리던 진주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암행을 하는 처지라 박문수의 차림새는 거지와 다름 없었다. 행색에 걸맞게 밥도 구걸하여 먹었다.

박문수는 소금천의 집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밥 좀 주시오! 불쌍한 사람에게 밥 한 술만 줍쇼!"

박문수가 소리치자 대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나왔다.

"밥을 구걸할 양이면 잘못 찾아왔소. 지금은 찬 밥 한 덩어리도 없으니 다른 데나 가 보시구려."

소금천의 모친이었다. 박문수는 반가운 마음에 빙그레 웃었다. 소금천의 모친은 박문수를 바라보다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생긴 것이 꼭 박 서방님 같으이. 혹여 박 서방님이 맞소?"

"하하, 나를 알아 보시겠는가? 다행이네 그려. 내 지금 며칠을 굶어 죽기 직전이니, 우선 주린 배를 채울 밥이나 좀 주지 않겠는가?"

소금천의 모친이 자신을 알아 보자 박문수는 허리를 구부리며 더욱 배고픈 시늉을 했다.

"아이고, 서방님. 이것이 무슨 일이오? 어찌하다 이리 상거지가 되었단 말이오?"

소금천의 모친은 박문수를 황급히 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방에 앉아 막상 가까이서 보니 박문수의 행색이 더욱 가관이라 소금천의 모친은 탄식하며 물었다.

"아이고. 서방님, 이게 웬일이시오? 어쩌다 신세가 이리 처량하게 되셨소?"

박문수는 쑥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 내가 못난 탓이지. 한양으로 올라가 공부는 아니하고 허구헌 날 기생집이다 투전판이다 넋이 팔려 다녔으니…. 그러다가 그 많던 가산까지 모두 탕진해 버리고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 나를 이리 반겨 주니 고맙구려."

소금천의 모친은 그런 박문수가 측은해 할 말을 잃고 옷고름으로 눈물만 찍어 냈다.

"그래, 소금천은 요즘 어찌 지내는가?"

"예, 본부(本府)의 청기장번(廳妓長番)이 되어 집에는 자주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요."

박문수는 적이 실망스러웠다. 10년 만에 소금천을 만나기 위해 왔건만 볼 수 없다니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거 참, 보고픈 마음에 내 천 리를 마다 않고 왔건만….'

소금천의 모친은 박문수에게 곧 밥을 지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이른 뒤 부엌으로 나갔다. 박문수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밖에서 소금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니, 웬일로 이 시각에 들어왔느냐? 아 참, 지금 방 안에 박 서방님이 와 계신다."

"예? 박 서방님이요? 혹여 박문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어요?"

소금천의 목소리가 커졌다.

"쉿! 그런데 말이다, 서방님이 패가망신을 하신 모양이더라. 꼴이 상거지 중에 상거지야. 쯧쯧, 불쌍하지 뭐냐.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라더니…."

소금천의 모친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뭐라구요? 내 참, 10년 만에 나타났다는 사람이 겨우 거지 꼴이래요? 용기도 가상하지, 어떻게 그 꼴을 하고 여기 올 생각을 했을까?"

소금천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얘, 무슨 말을 그리 하누.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서 여기까지 너 보러 온 사람 아니냐? 어서 들어가 위로라도 해 주거라. 그래도 명색이 네 첫 서방이 아니냐?"

"어머니도 그런 소리 말아요. 난 그런 사람 모르니 어머니께서 방에 들어가 새 옷이나 꺼내 주세요. 내일 병 사또님의 생신 잔치가 벌어진다고 곱게 차려 입으라고 하네요."

"새 옷을 입든지 헌 옷을 입든지 네 알아서 꺼내 입어라! 못된 년 같으니…!"

소금천의 모친은 딸을 나무라며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금천은 하는 수 없이 뾰로통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모녀가 마당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박문수는 기분이 상했지만 모르는 척 소금천을 반겼다.

"오호, 소금천이로구나! 나를 알아 보겠느냐?"

"난 댁이 누군지 모르니 아는 척 마시오."

소금천은 박문수를 본 체 만 체 하고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서는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금천에게서 무안을 당한 박문수는 더 이상 그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소금천의 모친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분을 삭이지 못해 길거리를 한참 배회하던 박문수는 물동이를 이고 가는 한 처녀와 마주쳤다. 처녀는 박문수를 바라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지를 처음 보시나? 왜 그리 뚫어지게 보는가?"

박문수는 화가 나 있던 터라 처녀에게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박 서방님이라는 분과 너무나 닮으셨기에 저도 모르게 그만…."

박문수는 자신을 알아보는 처녀가 누구인가 싶어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쳐다 보았다.

'앗, 춘심이 아닌가?'

춘심은 동헌에서 물 긷는 일을 하는 관비인데, 얼굴이 박색인지라 늘 마을 남자들로부터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었다. 박문수는 그런 춘심이 불쌍하여 하룻밤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10년 전 일이라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를 알아 보겠느냐?"

박문수가 아는 척을 하였다.

"그럼, 진정 박 서방님이십니까? 그런데… 옷차림이…. 서방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누추하지만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춘심은 박문수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서방님, 아니 어찌 이리 되셨단 말입니까?"

눈물까지 흘리며 묻는 춘심에게 박문수는 소금천의 모친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소녀, 서방님이 가신 후 지금까지 정성 들여 기도했거늘 이 무슨 헛된 일이란 말입니까? 흑흑, 우선 시장하실 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진지를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그 동안 편히 쉬고 계십시오."

춘심은 정성껏 상을 차려 박문수를 대접하고는 낡고 해진 옷을 벗기고 자신이 직접 지어 놓은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박문수는 춘심의 지극한 마음에 감동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밤이 깊어 박문수가 춘심이 깔아 준 새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탐관오리인 이 고을 병 사또를 어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방 문을 열어 보니 마당에서 춘심이가 그릇을 깨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 밤에 왜 그릇을 깨는 것이냐?"

"소녀, 서방님이 떠나신 날부터 지금까지 이 그릇에 정화수를 담아 놓고 오직 서방님의 건강과 장원 급제하시기만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헛일임을 알았으니 이 그릇이 무슨 소용 있겠사옵니까? 흑흑."

춘심은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구나!'

박문수는 그토록 지극한 춘심의 정성에 감동하였다.

 

다음 날 박문수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병 사또의 생일 잔치가 열리는 촉석루에 나갔다. 촉석루에는 주변 고을 수령을 비롯한 지방 유지들이 모여 기생과 즐거이 놀고 있었다. 거지 차림을 한 박문수는 당당하게 촉석루에 올라갔다.

"허허, 이 곳에 잔치가 벌어진 듯 하여 염치 불구하고 밥이나 한 술 얻어 먹으러 왔소이다."

박문수의 행색을 본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병 사또 역시 불쾌했지만 행색이 비록 남루해도 양반의 차림새이고 또 자신의 생일인 만큼 한 쪽 구석에 박문수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박문수가 구석일지언정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언짢아 하는 것은 주변 고을 수령이나 지방 유지들 뿐만이 아니었다. 병 사또 옆에 있던 소금천도 불쾌한 얼굴로 박문수를 노려보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어 좌중의 손님들에게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한 잔 올리겠으니 기분들 푸시고 즐거이 노시어요."

잠시 후 박문수 앞에도 상이 차려졌는데,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보잘것 없는 음식들만 놓여 있었다.

"허허, 누구의 상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하거늘, 어찌하여 이 상은 변변치 못한 것들만 있단 말인가! 같은 양반도 이리 푸대접을 하는데, 평민들 대접은 오죽할꼬!"

박문수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저 놈이 남의 잔치에 와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왜, 내가 말을 잘못 하였소?"

"아니, 그래도 저 놈이. 여봐라, 당장 저 놈을 내치거라!"

병 사또가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내려가긴 누가 내려간단 말이오. 그렇게 내려가기를 원한다면 사또나 내려가시구려. 여봐라!"

박문수의 고함 소리에 주변에 매복해 있던 포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어사 출두요! 암행어사 출두요!"

병 사또의 생일 잔치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잠시 후 박문수는 탐관오리인 병 사또는 하옥한 후 한양으로 압송케 하였고 사또와 결탁하여 백성들의 등골을 빼 먹은 지방 유지들도 죄과에 따라 형벌을 내렸다. 그는 또한 소금천을 악덕한 여인이라 하여 곤장을 치게 하였고, 그의 모친에게는 사람의 도리를 아는 여인이라 하여 상을 내렸다.

잠시 후 포졸들이 춘심을 데리고 왔다. 박문수는 그녀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는 자신의 옆에 앉혔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박문수는 그 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 여인이야말로 부덕(婦德)을 아는 진정한 여인이로다."

박문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춘심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춘심의 신분을 관비에서 평민으로 올려 주고, 후한 상금을 주어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일을 마친 박문수는 또다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암행의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