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2권 황장미 혁명 -3- 생각지도 못한 여파

생각지도 못한 여파(思わぬ 余波)

 

 

    1

 

소문이 생각보다 빨리 퍼진 것에는 신문부의 힘이 컸다. 다음날 점심때에는 고등부 학생 전원이 베스트 스-루 상을 받은 자매의 파국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굉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한방 먹었군, 츠키야마 미나코"
"설마 다음 날 아침에 호외를 낼 줄이야"
점심시간.
유미가 도시락 주머니를 들고 장미의 관에 와 보자,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기간티아가 테이블에 마주앉아 으음-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진한 차 좀 끓여 주겠어?"
로사 기간티아는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과장님 같은 말투로 말했다. 테이블에 펼쳐진 종이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등을 구부린 채. 이래서야 완전히 '아저씨' 다.
"로사 키넨시스도 일본차로 괜찮으시겠어요?"
"응... ....아니, 가능하면 오렌지 페코"
평소라면 같은 걸로 괜찮다고 하거나 스스로 좋아하는 차를 끓이는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오렌지 페코"
다즐링으로는 안되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찬장을 찾아보자, 유리병에 든 오렌지 페코 티백이 나타났다. 뭐가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로사 기간티아께는 다기에 진한 일본차를, 로사 키넨시스께는 찻잔에 오렌지 페코를 끓여서 각자 앞에 놓는다. 내 것은 뭐로 할까 고민한 끝에 로사 기간티아와 같은 일본차를 다기에 3분의 1쯤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두 사람이 신음하는 원인은 테이블에 펼쳐진 예의 호외였다. B5 크기의 복사용지에 단면 단색으로 인쇄된 간소한 것이었지만 꽤나 눈길을 끄는 것이다. 표제는 커다란 글자로 '황장미혁명'. 그리고 그 옆에 '노란 장미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고 정성스레 카피까지 붙여서 독자들을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
"무슨 스포츠 신문 같아"
열광적인 고정 팬 밖에 주문하지 않는 머스터드 타라모 샐러드 샌드위치를 잔뜩 베어 물며 로사 기간티아가 투덜거렸다.
"학교공인 신문치고는 저질이지"
쌀자루 모양의 주먹밥을 도시락 통 안에서 굴리며 로사 키넨시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 사이에 앉아있는 유미로 말하자면, 게 모양 비엔나를 포크로 찌르며 '그랬었나.'하고 묘하게 납득해버리는 것이었다.
리리안 백서는, 예전엔 좀더 정통파 학교신문이었다고 한다. 제대로 구석구석 읽게된 게 요 2, 3호 정도다 보니 이렇게 가십 같은 기사들만 잔뜩 실어온 건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의 소문을 쫓아다니며 기사로 써 버리는 츠키야마 미나코씨란.
품성이야 어쨌건, 열흘쯤 전에 발행된 '리리안 백서' 에서 사용했던 레이님과 요시노양의 투 샷을 이번엔 한가운데를 찢은 형태로 레이아웃하는 센스 같은 건 '꽤 하는군.'하는 느낌이 들지만. 센스라고 하면, 눈앞의 장미님 두 사람. 샌드위치에 진한 일본차, 주먹밥에 오렌지 페코라는 것도 미스매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로사 기간티아가 재미있는 듯이 유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어차피 또 백면상이라던가 생각하고 있을 거야.
"요시노쨩은 안나왔다며?"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의 얼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이야기를 되돌렸다.
"아, 예. 쉬는 시간에 국화반에 가 봤지만 요시노양은 역시 결석한 모양이에요"
"레이는 와 있었지"
아무튼 성실하다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로사 기간티아는 입가에 묻은 타라모 샐러드를 왼쪽 넷째 손가락으로 닦아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듣자하니, 레이님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요시노양없이 혼자 등교해서 1교시부터 성실히 수업을받고 있다고 한다. 하룻밤 새 많이 안정되었는지 표면적으로는 그저 힘이 없는 정도까지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보기 안쓰럽다는 게 로사 키넨시스의 의견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칠 수 없다며 씩씩한 척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도 자신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호외는 예상 외였는지 한부 받아들고 잡아먹을 듯이읽고 있었다고 한다.
"레이는 채인 쪽이니까 클래스메이트들도 신경 써 줘서 아무 것도 묻거나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다행이지만-"
로사 키넨시스는 거기서 말을 끊었지만, 그 다음은 유미로서도 왠지 알 것 같았다. '본인 대신 이것저것 질문을 받아야 하는 우리가 큰일' 이라고 하시려던 거겠지 분명히. 그도 그럴 것이 말은 하지않지만 로사 키넨시스도 로사 기간티아도 오전에 수업만 들은 것치고는 상당히 피로해져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체육 수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 내내 마라톤을 했다거나 풀에서 수영만 했다거나 하는 정도로 축 늘어져 있다. 하지만 풀은 시기가 맞지 않고, 애초에 두 사람의 기색이 운동으로 인한 피로와는 전혀 다른 거라는 것 정도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다. 두 사람의 피로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스트레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소문을 듣고, 혹은 호외를 읽고 로사 페티다 안 뷔통 자매의 앞날을 걱정한, 혹은 흥미진진하게 생각한 학생들은 본인에게 직접 물을 수 없으니 레이님 주변의 인물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주변이라고 하면 산백합회 간부인 장미님들이며, 장미의 관에 출입하는 뷔통, 그 동생들까지 타깃이 된다. 내부 사정을 잘 알고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유미마저도 클래스메이트로부터의 질문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장미의 관에 도망쳐온 거니까 장미님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설마 우리 때도, 이런 식으로..."
학원제 기간 2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유미는 되새겨 보았다. 유미가 사치코님의 동생이 될까 되지않을까 하는 화제로 학생들이 멋대로 흥분해 있었던 그때의 느낌과 조금 비슷하다.
"그러니까, 그런 건 폐가 아니라잖아"
로사 기간티아는 샌드위치가 들어가 있던 빈 비닐봉투를 한번 구겨서 등나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라는 건, 역시 유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도와주고 계셨던 거다.
"귀찮은 구석은 있지만 그건 레이나 요시노쨩 탓이 아니잖아? 그 애들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부가가치세 같은 거야. 그러니까 뭐 괜찮아."
장미님들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두 살밖에 차이나지않는데, 똑바로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같은 걸 분석하고 있다. 유미로 말하자면 그저 막연히 '힘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뿐인데.
"그건 그렇고, 시마코는? 같은 반이잖아. 같이 도망쳐오지 않았어?"
"생긋 웃고서 '저는 몰라요.' 라고 하면 다들 얌전히 물러나니까요."
지금쯤 비밀의 은행 숲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은행 줍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들떠있었으니까.
"과연. 미인의 혜택인가. 사치코의 경우는 반대로 무서워서 소문의 진상 같은 거 묻기 힘들테고."
유미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사 키넨시스도 충분히 미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미형이었다. 로사 기간티아도 표준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미술실의 석고상에 필적할 정도로 아름답다. 로사 페티다도-.
"어라?"
그러고 보니, 로사 페티다는? 로사 페티다만큼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이럴 때 로사 키넨시스나 로사 기간티아보다 먼저 여기 와서 투덜거리고 있을 사람인데. 특히나 레이님은 로사 페티다의 동생이니까 주위에서도 꽤나 끈질기게 추궁해댈 것이 분명했다.
"로사 페티다도 결석하신 건가요?"
유미가 묻자, 두 사람의 장미님은 얼굴을 마주보며 '오긴 했는데' 하고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했는데?"
"어제의 레이보다 더 맛이 가 있어. 저래서야 불안해서 아무도 말 같은 거 못 걸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거 같은걸.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된 걸까, 라니 볼을 괴고는 로사 키넨시스. 로사 페티다의 일이니까 좀더 진지하게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나. 어쨌거나 레이님의 경우에는 맛이 가 있는 원인을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좋았다 쳐도. 아니, 사실 좋지 않았지만. 원인을 모르니까 대처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뭐, 우리 힘이 필요하게 되면 로사 페티다쪽에서 먼저 이야기하겠지"
로사 기간티아도 느긋하시긴.
"그런 얼굴 하지않아도 괜찮다니까, 유미쨩. 꼭 필요할 땐 제대로 손이건 입이건 내밀 테니까.그보다"
레이님들 쪽을 수습하는 게 먼저라는 로사 기간티아의 주장에 로사 키넨시스도 동의했다.
"하지만 어제는 집안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어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는 거야. 이런 게 나와 버려서야 말이지"
로사 키넨시스는 테이블 위의 호외를 손끝으로 톡 튕겼다.
"이 기사가 무슨 문제라도..."
유미는 기사를 내려보았다. 실은 오늘 아침 은행나무 길에서 한부 받아보았기 때문에 한번은 죽 읽어보았지만.
"문제야 잔뜩 있어. 이건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야"
이번엔 다섯 손가락으로 호외를 쳤다.
"소설, 인가요"
"'?는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운운, 전부 억측이야.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죽 읽어 보면 얼핏 그게 현실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잘 쓰여 있어"
츠키야마 미나코는 기자보다 소설가가 되어야 해, 라는 로사 기간티아의 말은 물론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것이겠지. 그렇게 듣고 보니 분명히 신문기사라기 보다 소설 같은 문장이었다. 사실 관계를 나열하고있는 것 뿐 아니라 취재했을 리 없는 요시노양이나 레이님의 마음까지 상상해서 적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지적당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문장은 교묘했다. 원래 신문이라는 건 사실이 적혀있다는 전제 하에 나오는 것이니까 독자들이 믿어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과 다른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레이님들을 지키시려는 건가요?"
"지킨다는 거랑은 좀 잘라. 더 이상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뿐이지"
"하아..."
유미는 애매하게 끄덕였다.
'안되겠어.'
아까부터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점점 이야기에 따라갈 수가 없어졌다.
'에에 그러니까. 로사 기간티아와 로사 키넨시스는 애초에 보고만 있으려고 했지만, 소설처럼
각색된 기사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레이님들의 일이 빨리 해결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라고 생각되긴 하는데.'
"문제는 말이지, 굉장한 미담으로 그려져 있다는 거야"
로사 키넨시스는 일어서서 두잔째의 오렌지 페코를 이번엔 스스로 끓였다.
"아마 영항이 나오겠지"
로사 기간티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에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유미로 말하자면. 3인분의 찻잔을 싱크대에서 찰박찰박 씻으면서도 두 사람의 장미님들이 중얼거린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장미의 관을 나와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한 뒤에도 갸웃한 머리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담...? 영향...?"
하지만 그것은, 의외로 빨리 밝혀진 것이었다.

 

 

    2

 

예비종이 울려서 유미는 황급히 교실로 들어갔다.
5교시 수학의 시모노세키 선생님은 수업 종과 동시에 교실에 들어온다는 엄격한 할아버지 선생님이어서, 학생들도 당연히 책상 위에 교과서, 노트, 필기도구를 꺼내어 놓고 조용히 앉아있도록 하라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싹 잊어버렸는지, 유미 책상 옆에는 점심시간이 끝났는데도 아직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그래?"
다가가자, 비스듬히 뒤쪽 자리의 오야마다 미유키양이 훌쩍훌쩍 하고 울고 있다. 그걸 둘러싸듯 모여 있던 그녀의 친구 중 한명이 '별거 아냐.' 하며 눈가를 훔쳤다.
'울음 전염...?'
잘 관찰해 보니, 거기 모여 있던 소녀들은 다들 눈을 글썽글썽 하고 있었다. 한명이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해서, 주위가 다들 전염되듯 우느라 아무도 예비 종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별거 아냐.'라니 전혀 설득력이 없다.
"아, 미안. 지금 비킬게"
그곳에 서 있으면 유미가 의자를 당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한명이 장소를 조금 옮겼다. 그럼사양 않고, 하며 자리에 앉아 교과서 같은 걸 꺼냈지만 아무래도 뒤쪽이 신경 쓰이고 만다. 그때, 시마코양이 그제야 돌아왔다.
"풍작?"
책상 옆을 지날 때 물어보자 시마코양은 후후후 하고 기쁜 듯이 웃었다. 아무튼 묻는 내가 바보지 싶을 정도로 행복한 얼굴 하고선.
나갈 때 가지고 있었던 비닐 봉투와 젓가락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수확한 건 교정 어딘가에 숨겨놓고 온 모양이다. 몇 겹이나 비닐봉투로 싸서 입을 꼭 묶어 놓아도 그 냄새는 어디선가 새어 버리니까 교실에 가지고 들어오지 않도록 신경 쓴 거겠지. 그렇다곤 해도 반 최고의 미녀가 이래도냐 할 정도로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유가 은행이라니, 우리 반의 그 누구도 생각 못할 거다. 유미와 츠타코양을 빼고는.
"그보다"
시마코양은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유미에게 귓속말을 했다.
"레이님들 일이 원인으로 일이 커진 것 같아"
"커졌다니?"
"자매 관계를 끊는 학생들이 나타난 거야. 그것도 한두 쌍이 아냐"
'에엣?!?'
큰 소리를 낼 뻔 하다 황급히 입을 손으로 막자, 보고 있던 시마코양도 동시에 유미의 입을 막으려고 한 덕에 2중의 셔터가 내려져 목소리가 새지 않고 끝났다.
"어, 어째서"
그 즉시, 등 뒤의 미유키양이 울고 있는 이유도 '그거다.' 라고 반짝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유미라도 뒤돌아서 확인할 만큼 섬세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 본인에게 묻고 싶은 충동을 꼭누르고 시마코양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역시 레이님과 요시노양의 일이 영향을 주고 있는 거 아닐까..."
그 뒤 곧바로 수업종이 울리고 동시에 시모노세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시마코양이 가져 온 상세한 정보는 들을 수 없었지만 비스듬히 뒤쪽 자리에서 미유키양은 수학 시간 내내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영어 리딩이나 국어 같은 것과 달리 교과서를 읽거나 하지 않으니 이 시간이 수학이라 다행이었을지도 몰라, 같은 생각을 했다. 게다가 시모노세키 선생님은나이가 많이 드신 탓인지 학생들의 태도를 그다지 깊이 관찰하거나 하지 않으니까. 조용한 교실에 선생님의 분필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리고 있다.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기간티아가 걱정하고 있던 건 아마 이런 식으로 다른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레이님과 요시노양이 전교생들이 동경하는 자매만 아니었더라면. 신문부가 말을 꾸며서 두 사람의 다툼을 미담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다른 학생들에게 불똥이 튈 일도 없었을 텐데. 유미는 교과서 사이에 끼워 놓았던 B5판의 종이를 꺼내어 양쪽을 접어서 노트와 같은 사이즈로 만든 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황장미혁명' 이라고 크게 쓰인 그 호외는 맨 먼저 마리아상 앞에서 요시노양이 레이님에게 로사리오를 돌려줬다는 사실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사정으로 그 관계를 끊은 자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도권이 언니 쪽에 있었다. 자매의 관계를 맺을 때도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통례였고 끊을 때도 언니 쪽에서 결별을 이야기하는 패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언니에게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동생이 아직 동생인 동안에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거기다, 상대는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인 레이님. 레이님의 동생이 되고 싶다고 원하고 있는 학생은 일이십 명이 아닐 것이다.
'...그럼, 요시노양은 꽤나 파격적인 일을 해 버린 거구나.'
호외의 기사를 읽으면서 유미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럼, 출석번호 5번. 예제를 풀어 보도록"
잘 들리지 않아서 한순간 35번인 자신이 지적당했나 하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조금 후에 비스듬히 뒤쪽 자리에서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랗게 '예'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선 것은 미유키양이었다. 그녀는 한번 손수건으로 코를 누른 후 비척비척이라고도 흐늘흐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힘없는 발걸음으로 교실 앞의 교단에 나가 섰다. 유미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뭘 해도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의 그녀지만, 지금은 왠지 안쓰럽고 허무한 부분이 지나칠 만큼 강조되어 보였다.
"미유키양, ...불쌍해"
사정을 알고 있는 일부의 클래스메이트가 서로 속삭였다. 그러나 귀가 좋지 않으신 노교사는 그런 작은 소란을 알아채는 기색도 없이, 미유키양의 부은 눈과 빨간 코를 보고 '꽃가루 알레르기인가.' 하고 핀트가 맞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분필을 쥐고 있는 것도 무겁다는 듯이 미유키양은 칠판에 올렸던 팔을 털썩 내렸다.
아마 수업을 제대로 듣고 있었으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문제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풀 수 없었다. 왜냐니, 선생님의 설명 내내 울고 있었으니까.
"자리에 돌아가도록. 그럼 15번"
미유키양과 교대로 교단에 선 츠타코양은 명백히 '왜 내가' 하는 얼굴이었지만, 수업은 제대로 듣고 있었던 듯 제대로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칠판 위에 하얀 숫자로 이끌어 냈다.자리에 돌아올 때, 츠타코양은 유미를 향해 살짝 손가락질을 한 후 '조심해' 라고 입만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 그걸 받고서야 흠칫 했다. 5번, 15번이면 오늘의 번호는 당연히 5번이라는 것. 그럼 다음은 25번, 그 다음은 35번으로 유미의 번호인 것이다. 이제 와서라도 호외를 집어넣고 교과서에 집중했다.
그때부터 수업이 끝내기까지의 20분간은 꽤나 길게 느껴졌다. 차라리 일찍 지적당해 버린 쪽이 마음 편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5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쯤엔 미유키양의 눈물도 말라 있었다. 하지만 우수어린 느낌은 그대로. 비스듬히 뒤쪽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쉬는 시간,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유키양과 사이가 좋은 클래스메이트가 와서 그녀를 둘러싸고 뭔가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 들려온 이야기 내용으로, 아무래도 역시 미유키양은 언니와 헤어진 모양이라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불쌍해라"
미유키양을 둘러싼 소녀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유미는 그녀들이 드라마에서 대사를 말하고 있는 듯이,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어, 이러는 수밖에"
미유키양은 위로받아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차저차 하는 사이에 6교시 종이 울려 각각 자기 자리로 흩어져 갔다. 유미는 마음 속으로 '다음 회에 계속' 하고 중얼거렸다.

 

 

    3

 

"그건 말이지, 요시노양 놀이야"
방과 후 복도를 걸으며 츠타코양은 싫은 이야기라도 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요시노양, 놀이?"
너무나도 딱 맞아 들어가서 유미는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점심시간 이후의 미유키양은 요시노양이었다. 아니, 진짜 요시노양이라기 보다 다들 가지고 있는 요시노양의 이미지 그 자체. 가련하고, 열심이고, 귀엽고... 그런, 유미가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요시노양 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두고 봐. 지금부터 더 늘어날 테니까"
"설마"
"그 설마에 내기를 걸어도 좋아"
뭘 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별거 아닐 테니까 그건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요시노양 놀이라면 뭘 하는 거야?"
"비장한 얼굴로 언니를 불러내서, 마리아님 앞에서 로사리오를 돌려주는 거지"
듣자마자, 유미는 '히에에에?' 하고 뒤집어졌다.
"그, 그럼, 미유키양은 채인 게 아니라 찬 쪽이라는 거야? 자기가 차 놓고는 그렇게 울고 있었던거야?"
"그래"
츠타코양은 간단하게 말해버린다. 게다가 마음이 끌리면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여기저기로 향해서 셔터를 누르거나 하니까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츠타코양에게 있어서는 '바보 같은' 이야기인 모양이지만.
"유미양, 잘 들어. 인생에는 말이지, 서로 좋아하더라도 사정이 있어서 헤어져야만 하는 일이 있는 거야. 요시노양이 웃으면서 로사리오를 돌려줬다고 생각해?"
"아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소리 나지 않게 우는 게 어울리지 않아?"
확실히. 요시노양이 눈물을 참으며 로사리오를 내미는 장면이라면 머릿속에 몇 패턴씩 떠오른다. 하지만 그 외에 웃는다거나 화내면서 그러는 건 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카츠라양 말로는 분명히 요시노양이 화를 터뜨리는 형태로 결별을 말했다는 건데.
"활자의 영향이라는 것은 강하지. 이걸 읽고 나면 이미 그때 상황을 보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되는 걸"
그랬었다. 그 호외.
그것에는 요시노양이 마치 스스로 사양한 듯이 적혀 있었다. 언제까지나 레이님에게 기대고만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언젠가 황장미가 될 레이님에게는 힘든 업무를 보좌할 수 있는 튼튼한 동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일대 결심을 한 거라고. 홧김에 로사리오를 돌려준 것은 사양한다는 걸 레이님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연기였다는 것이다.
"언니가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이라는 것이 비극이었다고. 잘도 기사를 써놨지"
뷔통은 상급생이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그대로 장미님이 된다. 그러니까 장미님이나 봉오리라고 불리는 학생들은 단순히 상성 같은 것만이 아니라 언젠가 장미님이라 불리기에 걸맞은 사람을 동생으로 골라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왔다. 그다지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면 내년에 유미는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이 되는 것이다. 사치코님이나 레이님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 자리에 가 버려도 괜찮은지 걱정부터 된다.
"유미양은 아직 멀었어. 시마코양 봐봐, 벌써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에다 내년엔 2학년이면서도 로사 기간티아야"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사람 일이지만 오싹해졌다. 시마코양, 무지 힘들지 않을까나.
"뭐, 장미 봉오리의 동생이라곤 해도 장래 장미님이 되지 않는 경우가 절대 없다고도 말못하니까"
츠타코양은 위로의 말인지 압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유미의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그래도 나중에 장미님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분에 넘치는 큰 임무에 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지만 사치코님의 동생이면서도 장미님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참한 기분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치코님의 동생이 된 이상 아마 고등부 졸업할 때 까지 내내 이런 부담을 떨칠 수 없을 것이고, 요시노양은 아니지만 이런 상태라면 심장에 부담이 걸릴 만도 하다.
"츠타코양, 저기. 아까 미유키양은 요시노양 놀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건 연기라는 거야?"
문득 떠오른 의문을 이야기해 본다. 그러자 츠타코양은 계단 중간의 높은 창문을 올려다보며 '우-웅' 하고 신음했다. 가을도 깊어 오후의 하늘색은 무겁고 싸늘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나무들에게 열심히 달라붙은 잎들은 따뜻한 색조도 동그란 모양도 따사로움이 느껴졌다.
"어려운 점이지. 본인은 진심이라고 하고 있는 거겠지만"
"무슨 말이야?"
"단지 감화당한 것뿐이지만 자신은 전부 스스로 생각해서 낸 결론이라고 단정짓고있는 거야. 물론, 요시노양과 레이님의 일은 제대로 머리에 들어 있는 거지. 하지만 그건 단순한 계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녀들은 말이지, 분명히 어제오늘 처음 생각해낸 주제에 자신은 전부터 언니께 걸맞지 않은 동생이라며 고민하고 있었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포기할 때라고"
본인이 없다고 해서 츠타코양은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지야.' 싶을 정도로 용서 없이 뒤따른 파국의 소녀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들은 정말로 오랫동안 고민해 온 걸지도 모르잖아? 그래, 마침 유미가 그런 것처럼. 언제나 '걸맞지 않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자신 없이 우물쭈물 고민하던 차에 마침 요시노양이 선수를 쳤다거나. 그런 우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걸 입 밖에 내어 말하자 츠타코양은 깔깔 웃고서 '우연으로 점심시간 만에 세 쌍?' 하고 말했다. 확실히 좀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걸지도. 그건 그렇고 츠타코양의 통찰력이라니.
"꼭 보고 온 것 같아"
"응, 사실은 보고 왔어. 유미양과 맞먹을 정도로 평범함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대표선수인 미유키양이 눈물을 글썽이며 로사리오를 돌려주는 걸"
츠타코양은 카메라를 눈앞에 내세워 당연히 그 결정적 순간을 필름에 담았다는 것을 어필했다. 유미가 얼굴을 찡그리자 '우연히 본 거라니까' 하고 황급히 변명한 후, 점심시간에 소화도 시킬 겸 교정을 산책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걸 덧붙여 강조했다. 하지만 그 모양새로 볼 때 다른 두 쌍의 사진도 몰래 숨어서 도촬했다는 걸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곤란한 친구다.
"하지만, 왜 요시노양 흉내를 내는 거야? 흉내 내서 뭔가 좋은 거라도 있는 거야?"
계단의 마지막 한 칸을 내려가며 유미는 물었다. 지금부터 츠타코양은 클럽하우스, 유미는 장미의 관으로 갈 예정이니까 여기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계산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쾌감이 있는 거 아냐? 비극의 히로인 같잖아"
"비극의 히로인인가..."
확실히, 요시노양의 이미지는 비극의 히로인 그 자체인데다, 유미 역시 여자애니까 가련한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서 잔뜩 울거나 했던 적이 한두 번은 있지만. 그래도-.
"그만큼 일상이 따분하다는 거 아닐까? 조금은 자극이 필요한 거야"
물론, 그건 계산해서 하는 게 아니겠지. 하고 츠타코양은 말했다.
"리리안의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혜택 받은 환경에 있으니까"
유치원부터 리리안 여학원에 다녀 온 학생이라면 어느 정도의 학력과 재력만 있으면 대학까지 아무런 고생 없이 진학할 수 있다. 물론 중간에 들어온다거나 다른 학교에 진학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험전쟁 같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교풍이다. 학교라는 건 수험이 없는 것만으로도 꽤나 느긋한 분위기가 된다. 느긋한 건 물론 여유가 생겨서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따분함을 부르는 일이 있다.
"나날이 스릴 있는 생활을 보낸다면 이런 병에는 절대 걸리지 않겠지만"
"병인가"
"그래, 병이야. 따분해서따분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할 일은 보이지 않고, 그런 걸 자신의 마음이 원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에 마비되어 있던 때-"
요시노양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 버렸다.
"너무나도 자극적이라서, 자신도 모르는 새 마법에 걸려 버린 거야"
"과연. 그런가"
유미는 그제야 츠타코양이 말하려는 것을 이해할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바쁘게 보낸다면 따분해할여유 같은 게 생길 리도 없겠지만,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치코님의 동생이 되지 않았다면 유미도 지금쯤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츠타코양처럼 정열을 쏟을 수 있는 부활동 같은 것도 없고.
"그럼, 혹시 요즘 '리리안 백서'가 애들 사이에서 호평인건 그런 따분한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인 걸까. 자기들이 할 수 없는 만큼 화려한 산백합회 간부들의 학교생활을 훔쳐보고 싶다는-"
"그런 것도 있다고 봐. 그러니까 제대로 된 취재라면 어느 정도 인정해줄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하지만 말이지, 전에 유미양에게 했던 것처럼 면역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돌격 인터뷰를 시도한다거나, 본인의 확인도 받지 않은 기사를 싣는다거나 하는 건 좀 곤란해"
소녀들의 체조복 차림 같은 걸 숨어서 찍고 있는 츠타코양이, 분개한 듯 말했다. 뭐, 그녀의 경우에는 그녀 나름으로 선을 긋고 있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만.
"이 소동, 신문부만 나무랄 수는 없겠지. 원래라면 좋지 못한 행위가 되어야 할 요시노양의 행동이 정당화되고 미화까지 되고 있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
츠타코양은 '어쨌거나 세 쌍으로 끝날 리 없어.' 하고 점쟁이 같은 예언을 남긴 채 중앙정원에 있는 클럽 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뭔가 말도 안 되게 일이 커져 버렸다. 레이님과 요시노양의 일 하나만 해도 어쩌지 할 정도인데. 츠타코양 말처럼 다른 학생들에게 전염되어간다면 점점 자매가 줄어들어서 리리안 독자의 규율같은 것마저 붕괴되어 버릴지도.
'어쩌면 좋을까...'
장미의 관으로 향하려던 발을 일단 되돌려서 반대쪽을 향했다. 이런 때는 역시 요시노양과 레이님을 화해시켜서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생각했다. 모방범죄라는 건 원조를 해결하면 없어진다고도 하니까.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요시노양을 설득해서 로사리오를 다시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결석. 레이님은 클럽활동에 나가 있겠지만, 채인 쪽을 설득해 봤자 될 일이 아니다.
거기서 생각한 것이 둘을 이어줄 수 있는 로사 페티다였다. 무엇 때문에 힘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여운 동생들의 위기인 것이다. 힘을 빌려주셔도 되지 않을까. 상태가 평소와 다르니까 다들 기분 나빠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하면 좋은 해결방법을 가르쳐 주실 지도 모른다. 가르쳐 주시기만 하면, 유미는 그걸 실행할 것이다.
마침 1층에 와 있었으니까 신발장을 보러 갔다. 로사 페티다는 3학년 국화반. 그러고 보니 학년은 다르지만 레이님도 요시노양도 국화반이구나, 하고 괜히 감탄하면서 목표인 소형 사물함을 찾았다.
'...로사 페티다의 본명이.'
분명히 들은 적이 있었을 텐데, 곧바로 나오질 않는다. 로사 페티다 뿐만 아니라 로사 키넨시스도 로사 기간티아도 거의 본명으로 불리지 않으니까 죄송스럽게도 풀 네임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이래서야 출석번호 순으로 늘어선 이름을 전부 확인해서 이거다 싶은 문을 여는 수 밖에 없다.
'나란 앤 역시 무지무지 바보일지도.'
잠시 낙담한 후,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시작하려던 차, 시계의 구석에 학생의 모습이 나타났다. 신발을 갈아 신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옆으로 물러서려고 하자, 놀랍게도 로사 페티다 바로 그 분이었다.
"로사 페티다!"
유미는 감격해서 다가갔다. 그러나 힘없이 돌아선 그녀는, 놀랍게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데다 한쪽 뺨이 붉었다.
"어, 어떻-"
어떻게 된 거에요, 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로사 페티다는 유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빨갛게 부어오른 왼쪽 뺨을 손으로 누르며 옆을 돌아 봐 버렸기 때문에.
'-아냐'
왼쪽 뺨을 누르고 있는 로사 페티다의 모습이, 언젠가의 하나데라 학원 학생회장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사치코님에게 맞은 뒤의 불쌍한 그도, 이런 식으로 뺨을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유미는 순식간에 알아챈 것이다. 로사 페티다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로사 페티다의 뺨은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이렇게 심하게 때리다니 꽤 깊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왜?"
태연한 척 하며, 로사 페티다는 물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옆을 보고 있는 상대에게 상담 같은걸 하는 건 좀 힘든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레이님과 요시노양의 일 보다 로사 페티다쪽이 큰사건이라고 생각되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바빠. 그러니까 용건이 있으면 간단히 말해 줘"
로사 페티다는 한숨 섞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뇨, 그럼 괜찮아요. 불러 세워서 죄송합니다"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다 로사 페티다도 그럴 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유미쨩"
등을 돌리고 걸어가기 시작한 로사 페티다는 문득 생각난 듯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왼쪽 뺨은 감춘 채.
"예"
"미안하지만, 이거-"
"말 안할게요. 아무한테도"
유미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학생이 뜸해진 이런 시간을 골라서 하교하는 것도 이 얼굴을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다지 숨기거나 하는 것 아니지만, 좀 꼴불견이니까"
"아뇨, 그런"
뭐가 '아뇨, 그런' 인지 자신도 모르는 채, 유미는 로사 페티다를 입구까지 배웅했다.
"안녕히(ごきげんよう)"
그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 것을 유미는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맞은 걸까. 로사 페티다를 때릴 수 있는 상대라니, 이 학교에 몇 명이나 있을까.
'괜찮으시려나...'
신문부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굉장히 신경 쓰였다. 로사 페티다의 모습이 교정의 나무들 사이로 사라진 후, 유미는 건물 안으로 돌아와서 한숨을 쉬었다. 로사 페티다가 저런 상태래서야 앞길이 더 불안해지고 만다. 예전에 카츠라양이 말했던 '황장미는 3학년 2학년 1학년 모두 안정' 이라는 말을 문득 생각해내고는, 세상에 절대란 건 있을 수도 없는 거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꼈다. 로사 페티다가 신발을 갈아 신지도 않은 채 귀가해 버렸다는 걸 유미가 깨달은 것은 장미의 관에 막 도착하려는 때였다.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쫓아가도 소용없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던 데다 유미도 꽤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만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기도 좀 뭐하지만.
그 상태라면 로사 페티다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실내화를 신은 채 와버렸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겠지. 동생들의 위기마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까.

 

 

    4

 

"유미쨩, 그런 걸 보고 무리라고 하는 거야"
로사 기간티아가 웃었다. 익숙해진 건지 마음을 다 잡은 건지, 점심때의 그 지친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힘이 넘친다.
"하아... 무리인가요"
"그으래. 로사 페티다가 저렇게 되어버리면 그걸로 끝. 부활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저렇게' 라면?"
"'저렇게' 는 '저렇게' 야. 산건지 죽은 건지 알 수도 없는 눈을 하고선 고민하는 건지 아무 생각없는 건지 불명인 상황. ...뭐, 뭔가 생각하고는 있는 것 같지만?"
장미의 관에는 달리 아무도 없었고, 그럴 때 마침 유미가 온 것이다 보니 로사 기간티아는 두 손들고 환영한다는 듯이 인스턴트 커피를 타 주었다. 장미님이 서비스 해주신다니 클래스메이트들이 들으면 어지간히 부러워하겠지.
"언제였더라, 역시 '저렇게' 되어 버렸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는 다들 처음이라서 약간 패닉 상태가 되었었지만. 일주일인가 쯤 후에 원래대로 돌아왔었으니까 그냥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뭐, 이번엔 레이들의 소동이랑 겹쳐 버린 게 최대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봐 줘"
"하지만-"
뺨을 맞은 채 울고 있는 로사 페티다를 이대로 놔둔다니. 그래도 입막음 당한 이상 빨갛게 부어 있던 뺨 이야기는 로사 기간티아에게 할 수 없다. 유미는 말을 뜨거운 커피와 함께 목으로 다시 넘겼다.
"아, 맛있다"
"그렇지? 유미쨩 취향은 파악했으니까"
커피는 그냥 잘 탄 것뿐만 아니라 설탕과 분말 크림의 양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었다.
"누구한테다 한두 개쯤 특기가 있는 법이니까"
"로사 기간티아의 특기 둘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취향 파악인가요"
무심코 물어보자, 로사 기간티아는 더 이상 유쾌할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뭐, 그렇다고 해 두지. 그건 그렇고"
자신의 컵에 들어있는 블랙 커피를 마시고,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에게 물었다.
"로사 페티다의 특기, 뭔지 알아?"
"...아뇨"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유미는 정직하게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그럼 서투른 건?"
"그것도, 죄송하지만"
사치코님이 서투르거나 거북한 거라면 곧바로 '남자' 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고 보니 로사 페티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그게 정답이야"
로사 기간티아는 손을 뻗어서 유미의 머리를 착하지착하지 했다. -아무튼,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런 건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어라, 하지만 정답이라뇨?"
"로사 페티다에게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는 거지"
"엣?"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 로사 기간티아의 말뜻을 잘 알 수가 없어서 유미는 머리를 갸우뚱 했다.
"뭐든지 평균점인 유미쨩을 파워업시켜 놓은 형태라고나 할까. 그녀는 노력하지 않고도 뭐든지 남들보다 잘 해버리는 거야. 알겠어?"
"예에... 부러운 일이네요"
"그게 아니잖아"
모르는구만-, 하고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건 그렇고 로사 기간티아의 스킨쉽이 전혀 두근두근하지않는 건 어째서일까. 사치코님이라면 이렇지 않은데.
"인간이란, 뭔가 하나라도 특출한 면이 있는 게 기분적으로 편한 거야"
"어째서요?"
"뭘 하는 게 좋을지 고르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해 봐. 마음만 먹으면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을만한 걸 찾을 수가 없어. 전 분야를 비슷비슷하게 잘 하니까"
그건 불행한 거다, 라고 로사 기간티아는 말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잘 하는 만큼 나름대로 고민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로사 페티다는 항상 왠지 의욕없는 것같고 따분한 얼굴하고 있잖아"
"예"
하고 말하고 나서, 흠칫 어쩌지하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로사 기간티아도 그다지 험담을 하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실제로, 그녀는 따분한 거야. 뭘해도 결과를 미리 알아버리는 거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 말이야"
"한계도 알 수 있다는 건가요?"
"그래. 뭐든지 할 수는 있지만, 하나밖에 할 수 없는 천재에게는 당하지 못한다거나 말이지"
그래도, 굉장한 차원의 이야기다. 만약 유미가 그렇게 선택받은 입장이라면 제비뽑기로 결정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낸다면 절대로 놀림받을 게 분명하니까 잠자코 있었다.
"뭘 하는데도 따분한 듯한 그녀가 산백합회의 간부 같은 귀찮은 일을 맡은 건, 그렇게 해서 조금이나마 변화가 풍부한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아닐까나. 유미쨩 같은 특이한타입이 동료로 들어와서 제일 기뻐하고 있는 것도 그녀일 테고, 레이를 동생으로 삼은 것도 의외성이라는 면이 꽤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생각하는데"
"---"
주륵... 하고 몸 어딘가에서 땀이 흐른 것 같았다. 그럼, 뭐야? 로사 페티다는, 인생이 따분해서, 그러니까 행동의 기준은 조금이라도 유쾌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거야?
"뭘 어려운 얼굴하고 있어. 동생을 고르는 기준 같은 건, 사람마다 다른 거야. 얼굴로 고르더라도, 그런 사람 난 잔뜩 알고 있는 걸"
"로사 기간티아... 설마, 시마코양을 동생으로 고른 이유가"
"글쎄, 그건 어떨까요"
의미심장하게 웃고, 로사 기간티아는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로사 페티다에게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도 최소한 자매니까 당연히 레이를 소중히 여기고 있겠지만, 레이와 요시노쨩만큼 강하게 이어져 있진 않으니까. 게다가 어느것에도 몰두하지 않는 로사 페티다가, 지금 뭔가 하나에 얽매여 있다는 것,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 아냐?"
로사 기간티아는 로사 페티다의 부은 뺨을 보지 못했으니까 좋은 일이니 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기가 겹치지만 않았다면 이번 레이들의 소동을 제일 즐기고 있는 건 로사 페티다겠지만"
그럼, 어쨌거나 로사 페티다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우웅, 하고 생각에 잠겨 있으니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의 컵에 손을 뻗어서 '한 모금 줘' 하고 입을 대었다.
"아, 한 컵 더 끓일까요?"
"그래? 그럼 말이지, 새 컵에 홍차 삼인 분 끓여 줘"
"삼인분?"
"응. 나하고 유미쨩하고 또 한명 있잖아"
또, 알 수 없는 말을.
"또 한명?"
"어라, 유미쨩 모르는구나"
"..."
괴담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리안에는 전통적으로 그런 이야기 없으니까. 절대로 없으니까. ...놀래키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래도 깊이 따지는 게 싫어서 유미는 싱크대 옆까지 걸어가서 시키는 대로 홍차 삼인 분을 꺼냈다. 딱히 지정한 종류가 없었으니까 평소대로 다즐링 티백. 쟁반에 컵 세 개를 올려서 돌아서자, 거기에는 로사 기간티아가 소리도 없이 서 있었다.
"걋!"
"뭐야. 도와주려고 온 것뿐인데. 덮쳐진 것같은 소리 내는 거 그만 둬"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고 테이블 위에 컵을 놓았다.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정말로 덮쳐 버릴 테니까"
아직도 경직되어 있는 유미에게 장난스럽게 웃은 후, 로사 기간티아는 꼬옥 하고 끌어안아 왔다.
'...그러니까, 아무 느낌도 없다니까요.'
그래도, 어쨌거나 계속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뭐하니까 손발을 바둥바둥 움직여서 저항해 본다. 하지만 뭐어. 아무리 로사 기간티아라도 진심으로 덮칠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쪽도 적당히 바둥대는 거지만.
"로, 로사 기간티아. 아무나 가리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시마코양 참기 힘들겠지. 자신의 언니가 다른 여자애와 끈적끈적하고 있으면, 하지만, 로사 기간티아는 밀착해 있던 몸을 잠깐 떼어 말했다.
"아무나라니 그런 절조 없는"
그리고는 '유미쨩한테 뿐이양.' 하면서 다시 한번 끌어안고, 유미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자, 잠깐 로사 기간티앗"
그건 좀 곤란하잖아요. 정말로 바둥거리자, 너무나 간단히 풀려났다. 그러나 도망친 그 앞에, 어째선지 마침 사치코님이 서 있었다.
"-유미"
"사, 사치코님"
아니, 이건 전혀 깊지 않은 물웅덩이 같이 얕은 사정이 있어서요― . 하지만 사치코님은 유미를 무시하고 로사 기간티아에게 또박또박 다가가 쌀쌀맞게 말했다.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알고서 하신 거죠?"
'세 개 준비된 찻잔!'
그제야 처음으로, 유미는 '당했다'라고 생각했다. 로사 기간티아는 사치코님이 장미의 관에 들어온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유미를 놀리고 있는 모습을 일부러 사치코님에게 보여주려고-. 역시 사디스트다,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쨩, 부드러워서 끌어안으면 기분 좋으니까 버릇 들어버릴 것 같아"
"사람 속살이 그리우시면 자기 동생을 끌어안으시는 게 어떠세요?"
사치코님도 참, 그 부분만 잘라내면 무지 오해받을 듯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버리시고. 듣는 쪽이 빨개질 것 같아.
"시마코? 생각도 못했네"
"그럼, 생각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제 동생에게는 손대지 않으시길 부탁드리겠어요."
"그쪽도 생각해볼게"
로사 기간티아는 미동도 하지않는다. 애초에 사치코님이 째려본다고 물러설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장난칠 마음도 먹지않았겠지만.
"유미, 너도 말이지"
사치코님은 돌아서서 말했다.
"볼썽사납게 바둥대는 게 아냐. 오히려 로사 기간티아를 기쁘게 할 뿐이잖니"
"...예"
그다지 나한테 잘못이 있는 것 같진 않지만, 하고 유미는 생각했으나 얌전히 대답했다. 그럼 가만히 있었던 쪽이 나았을까.
하지만 사치코님의 말은 본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약간의 질투에서 나온 거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됐으니까, 빨리 닦도록 해"
사치코님이 호주머니에서 하얀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서 유미의 볼을 문질렀다. 로사 기간티아의 입술이 닿았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볼인데. 사치코님의 손수건이 쓰다듬자 뜨거워졌다. 사치코님의 머리카락 냄새가 살짝 코에 닿아서, 두근두근했다.
사치코님은 심통쟁이지만. 자신의 몸에는 꽤 정직한 사람이구나―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5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할 때가 왔다. 사실은 좀더 빨리 결론을 내리고 그에 맞는 처치를 해야만 했는데, 두려워서 하루하루 미뤄 온 끝이 결국 찾아오고 말았다.
더 이상 놔두면, 분명히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자신의 몸이니까 이미 한계까지 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을 한다, 그 뿐인 것이다. 더 이상 여유는 없다. 슬슬 다른 사람들도 알아채기 시작하고 있다.
아아, 그러나.
그 공포를, 나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마취가 되어 있으니까 직접적인 아픔은 없다지만, 마취가 풀리면 아프겠지. 거기다, 그 이전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그 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할 수 없었다.
한번, 마음을 굳게 먹고 반투명 유리문 앞에 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10분정도 그곳에서 고민하던 끝에, 결국 그냥 가고 말았다. 리리안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앞쪽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꼴은 절대 보일 수 없었다.
이럴 바에야 좀더 빨리 누군가와 상담해서, 억지로라도 진찰대에 동여매이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이젠 늦을 일.
"가야지"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무거운 허리를 일으키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현금카드와 보험증이 언제든지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놓여 있었다. 과연 보험이 될지 어떨지, 그리고 얼마나 들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건 최초의 경험인 것이다.
"차라리, 큰 종합병원 쪽이 가기 쉬울 지도 몰라"
그 편이 돈도 적게 들 거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들켰을 경우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십수 년간 살아오면 이렇게까지 핀치에 몰렸던 적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몇 년 전의 중이염 따위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건 몸의 일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쓸모가 없어지는 건가-.
결국 인체 같은 건 나사 하나가 고장 나면 움직일 수 없어지는 기계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비교적 성능이 좋은 그녀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