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2권 황장미 혁명 -1- 베스트 쇠르

황장미 혁명(黃薔薇革命)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상쾌한 아침인사가 맑게 갠 하늘에 메아리친다.
마리아님의 정원에 모인 소녀들이 오늘도 천사같이 천진한 웃음을 띠고 높은 문을 지나간다.
더러움을 모르는 몸과 마음을 짙은 색의 교복으로 감싸고.
스커트의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세일러 칼라가 펄럭이지 않도록, 차분히 걷는 것이 이곳에서의 몸가짐. 물론 등교시간 아슬아슬하게 뛰어가는 등의 품위 없는 학생 따위 존재할 리도 없다.

ㅡ사립 리리안 여학원.
메이지 34년(1902년)에 건립된 이 학교는 원래 귀족의 영애를 위해 세워졌다는, 전통있는 가톨릭 계열 귀족학교이다.
도쿄도내, 무사시노의 옛 모습이 남아 나무가 많은 이 지역에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일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녀들의 정원.
시대는 변하고 연호가 메이지에서 세 번 바뀌어 헤이세이가 된 오늘날에도 18년간 다니면 온실에서 순수 배양된 아가씨들이 박스에 포장되어 출하된다는 시스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귀중한 학교인 것이다.

하세쿠라 레이도 시마즈 요시노도, 그런 아가씨 가도를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걸어- 오늘에 이른다.

 

 

베스트 스-루(ベスト ス-ル, Best soeur)

 

 

    1

 

학원제 다음날.
임시 휴일이 된 월요일을 그저 고양이처럼 게으름피우며 보낸 유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부터 기다려오던 평범한 일상 같은 것이 아니라, 학원제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분주하면서도 활기찬 나날의 연장이었다.
"우왓, 늦었다"
버스를 내려서 서둘러 교문을 지나 등교하는 학생 수가 거의 없는 틈을 타서 은행 가로수 길을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아니, 반쯤 뛴다고 하는 게 맞겠지. 스커트의 주름이 조금 흐트러져 버렸다고 해도, 옷깃이 조금 펄럭이더라도, 오늘 아침에는 관대하게 봐 주시길 비는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아아, 그래도 그렇지 왜 자명종시계 바꿔 놓는 걸 잊어버렸을까."
일요일 밤, 자기 전에 간 화장실 변기 위해서 한번은 '바꿔 놔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방에 돌아왔을 때쯤에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손을 씻은 자극이 기억에 뚜껑을 덮어 버린 건지, 아니면 화장실 문이 잘 안 닫혀서 포기한 것이 문제였을까. 아냐 아냐, 계단 중간에서 동생과 만나 이야기를 해 버린 게 제일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임시휴일은 모처럼 늦잠 자야지 하고서 그저께 밤에 자명종 스위치를 꺼 놓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버렸으니, 오늘 아침 일어날 때까지 자명종 시계 맞추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실수를. 이런 실패를. 이렇게나 중요한 날에 지각이라니.
갈래 길의 마리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서두르고 있는데도 유미는 역시 그 앞에 서서 양손을 모았다. 습관이라는 건 그런 거다.
마리아님, 오늘 하루도 저를 지켜봐 주세요.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고 보낼 수 있도록.
눈을 뜨고 다시 달리, ...아니 걷기 시작했을 때.
"기다려요"
등 뒤에서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려, 무심코 유미의 등이 핑하고 펴졌다. 순간 이 학교 안에서 유미가 가장 무섭게 느끼는 그 사람의 목소리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전혀 달랐다.
"'유미, 뭘 그렇게 서두르고 있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고 천천히 돌아보자, 최신식 소형 카메라의 렌즈와 눈이 맞았다.
"안녕하셔요. 어때? 사치코님이라고 생각했어?"
그 말과 함께 찰칵 하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사진부의 에이스, 다케시마 츠타코양이었다.
츠타코양은 셔터 찬스를 노리고 있을 때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카메라를 눈에서 떼지않으니까 꼭 사이보그 인간과 마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셔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농담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유미는 한 장 더 찍자는 요구를 거절하고 클래스메이트에게 등을 돌린 후,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어머, 여유가 없다니 무슨 일이야?"
카메라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츠타코양은 따라왔다. 피사체라면 좀더 좋은 게 잠시 후면 잔뜩 등교할 텐데.
"과연. 유미양은 지금,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지무지 서두르고 있어. 그건 틀림없이 사치코님과 관계있음, 이라고 보이는데 어때?"
테없는 안경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런 때의 츠타코양은 신문부의 선배들과 같은 냄새가 난다. 결국 뭐든 알고 싶어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다.
"뭐 글쎄, 틀린 건 아니지만"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대답을 하면서 유미는 열심히 교정을 향해 걸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빠른 등교. 그런데도 지각 아슬아슬한 듯한 모습"
츠타코양은 반걸음 앞으로 나와 유미의 얼굴을 돌아보는 듯한 모습으로 용케도 걸어간다. 풋워크가 가볍다. 이것도 도촬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그녀의 촬영 스타일에서 나오는 성과인 걸까.
그건 제쳐두고, 확실히 유미는 츠타코양의 지적대로, 수업에 지각할 것 같아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통지표의 출결란에 '지각 1'이라고 적히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알았다. 유미양, 사치코님과 만나기로 한 거야? 이른 아침, 성당 뒤쪽 같은 곳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랑데부?"
"랑데부라니?"
"프랑스어. 직역하면 '만남' 일까나? 로맨티스트인 츠타코양으로서는 역시 '밀회'라고 번역하고 싶지만. 그러고 보니 '랑데부'라는 단어도 요즘엔 우주 관련 이야기에서 밖에 나오지 않게 되었구나아"
나오지 않게 되었구나아, 라니. 절실하게 이야기하는 츠타코양은 대체 어느 시대 사람인 건지. 츠타코양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가끔 같은 열여섯 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뭐어, 고등학생이라는 범주에 밀어 넣을 수 없는 사람이야 유미 주위에는 그녀 외에도 바글바글하지만.
"밀회라니, 그렇게 달콤한 게 아냐"
쌀쌀맞게 대답하자, 츠타코양은 안경의 위치를 조금 고친 후에 입술 끝을 살짝 올리고서 유미의 얼굴을 탐색하듯이 보았다.
"어머나. 그럼 그 가슴에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는 로사리오는 뭐야?"
"웃"
눈도 날카롭지. 그건 분명히 그저께 밤,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에게서 받은 로사리오였다. 로사리오를 받았다는 것은, 전교생의 동경의 대상인 사치코님의 스-루가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한 것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때의 기세랄까, 사치코님의 진지함에 눌렸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로사리오를 받아들여 버렸지만. 이렇게 오전중의 밝은 빛 속에서 생각해 보면, 그 다음에는 꽤나 굉장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절벽 밑에는 역시나 험한 낭떠러지가 있는 법. 바로 밑에서 폭신폭신한 깃털이불을 펼친 천사님이 기다리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현실은 가혹하다. 뛰어내리는 방향을 잘못 잡으면 다리 하나쯤 부러질 지도 모르고, 자칫하면 목뼈가 부러져 즉사다.
"그것도 보란 듯이. 유미양, 보통은 보이지 않도록 교복 밑에 숨겨 두는 거야"
"이건 평소에 걸고 다니던 게 아니라서 교복을 입은 뒤에 생각난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가 아니라, 느긋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유미는 아차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이야기에 열중해서 어머니들 수다 떨듯 서서 이야기해버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늦었는데 이래서야 완전히 지각이다.
"유미양, 나중에 천천히 들을 테니까-"
츠타코양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등 뒤에서 몇 번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력 질주하는 여고생의 뒷모습 같은걸 찍어서 뭐가 재밌는지-
어쨌거나 요즘 들어 근처에 별난 사람이 늘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유미였다.
 
고등부 교정의 중앙정원 구석에 서 있는 학생회 본부, 장미의 관에 도착한 것은 7시 50분이었다.
"늦었습니닷"
학원제까지는 '산백합판 신데렐라'의 소도구실로 바뀌어 있던 1층 다목적 공간의 문을 열자, 쟁쟁한 멤버의 화려한 얼굴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흐에...'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 로사 페티다(황장미님), 로사 페티다 안 뷔통(황장미 봉오리) 하세쿠라 레이님,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백장미 봉오리) 토도 시마코 양, 그리고-.
"교통체증에라도 걸렸니?"
저혈압이라 아침에 약할 터인 사치코님이었지만, 날카로운 눈을 이쪽으로 향하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뇨"
"그럼 어떻게 된 거지?"
트레이드마크인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벗어나 가슴 앞에서 찰랑찰랑 흘렀다. 약간 눈썹을 끌어올린 채 차갑게 이쪽을 바라보는 표정이 또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다. -하고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아냐. 말 자체는 부드러웠지만, 사치코님의 그것은 '질문'이라는 가벼운 게 아니라 아무리 좋게 봐도 그야말로 '심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것이었다.
"잠깐만, 사치코"
레이님이 어깨 근처를 살짝 찌르며 말렸지만, 사치코님은 '잠자코 있어' 라고 단번에 셧아웃시킨후 다시 유미를 향했다.
"늦은 이유가 있으면, 확실히 말해 보렴"
"..."
그렇게 말씀 하셔도, 사치코님에게 그렇게 야단맞고는 정직하게 '늦잠 잤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해?"
"7시 52분...인데요"
바보같이 정직하게 시계를 보고 대답하자, 사치코님 뒤쪽에서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가 참지 못하고 '풋'하는 소리를 흘렸다.
학원제 다음 화요일은 간단한 뒷정리와 반성회가 있다고 해서 유미들은 아침 여덟시까지 장미의 관에 집합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시점에서 도착해 있는 거니까 실제로는 지각이 아니지만, 유미는 사치코님에게서 당부를 받았던 것이다. 1학년이니까 적어도 집합하기 15분 전에는 와서 선배를 맞도록, 하고.
"3학년 언니 분들보다 늦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몰랐다. 사치코님은, 이런 면에서는 운동부 쪽 타입이다-. 그런 걸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사치코도 많이 컸구나~"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틈도 없이 유미는 뒤에서 머리부터 끌어 안겨버린 바람에 볼썽사납게도 '우겟' 하고 뒤집어져 버렸다.
"안녕하셔요, 여러분."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
이건 또 참 개성으로 똘똘 뭉친 듯한 분의 등장이었다.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학생회 '산백합회'의 간부, 홍 백 황의 세 장미 중 한명인 로사 기간티아는 체통 없게도 유미의 목에 손을 돌린 채 손도 대지 않고 크게 하품을 했다. 잠자코 있으면 마네킹처럼 정돈된 얼굴인데, 아깝게도.
"미안미안. 완전히 잊어먹고 평소처럼 와 버렸어. 8시 집합이니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지? 사치코."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는 인질을 방패로 삼은 강도, 혹은 인형을 안은 복화술사처럼 유미를 질질 끌면서 사치코님의 앞까지 나아갔다.
"예, 예에... 하지만 유미는-"
"아유, 그 정도로 됐잖아"
이번에는 로사 페티다(황장미님)가 입을 열었다.
"요는 8시부터 반성회를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저는, 유미에게 좀더 자각을"
"그저께 선배를 25분 기다리게 한 사람이 말해 봤자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학원제 연극의 집합시간에 25분 늦은 또 한명인 유미는 더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은 사치코님은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서 항의했다.
"언니분들, 유미에게 너무 관대하세요."
하지만, 그쪽은 이 사치코님마저 손바닥 위에서 굴려댈 정도의 분들. 로사 키넨시스는 가슴을 펴고 팔짱을 끼고서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우리 3학년에게 있어서는 2학년이 딸이고 1학년은 손녀 같은 거니까. 가르치는 건 기본적으로 부모 역할. 할머니는 무책임하게 귀여워하는 게 당연하지."
할머니라는 말을 듣고, 유미는 같은 1학년인 시마코양과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런가, 장미님들은 할머니였었나.
"사치코도 1학년 때는 졸업하신 나의 언니께 어지간히 어리광 피웠었잖아?"
"그, 그건..."
사치코님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1학년 때 꽤나 '할머니'에게 귀여움 받은 것에 틀림없다.
"세상이란 건 그렇게 돌아가는 거야. 포기하렴"
"---"
사치코님의 완패.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승리도 아니지만.
장미님들이란, 기본적으로 사디스트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사치코님이 마조히스트인가.
항상, 어느 틈엔가 이런 식으로 사치코님이 지게 되는 것이다. 전교생이 동경하는, 정진정명 명가의 공주님을 가지고 노는 쾌감이란 생각하기도 과분한 것이지만, 장미님들이 쏟는 애정의 양도 그만큼 보통이 아니라는 걸 유미는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장미님들 틈에 있을 때의 사치코님이란 왜 이렇게나 평소와 인상이 다른 걸까. 평소의 사치코님은 단아하고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미소녀 그 자체인데.
"어라, 유미쨩. 이거 뭐~야?"
겨우 배후령 놀이를 그만둔 로사 기간티아, 이번엔 성추행 아저씨로 변해서 세일러복의 옷깃 사이로 손을 슬쩍 집어넣어 왔다.
"꺄ㅇ"
차가운 손이 좌골에 닿아서 무심결에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로사 기간티아는 '실례' 하고 입으로만 말하며 겨우 집어넣어 뒀던 유미의 로사리오를 줄줄 끄집어내었다.
"아항, 사치코가 빡빡해져 있는 건 이것 때문인가"
"어머나아-"
"할 때는 하는구나"
장미님들은 제각기 말하며 유미의 목에 걸린 로사리오와 사치코님을 번갈아가며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래서야 완전히 동물원의 팬더다.
"반성회를 할 시간이 없어지지 않나요, 언니분들"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사치코님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부끄러운 걸 감추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 리 없지.
"아유, 그러지 말고 조금쯤 서비스해 봐. 대체 언제, 어디서 의식을 치른 거야?"
"서, 서비스라구요?"
급기야는 사치코님, 미간 근처가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신경에 거슬릴 걸 뻔히 말면서도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니까, 장미님들도 보통이 아니다.
"어째서 제가, 언니들께 서비스를 해야만 하는 거죠?"
"아 그래. 그럼 유미쨩한테 물어봐야지. 유미쨩은 정직하니까 가르쳐 줄 거지?"
"에에 그러니까-"
곤란하다. 사치코님은 '말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하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고, 그렇다고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3강을 적으로 돌린 채 살아가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고. 어쩌지-, 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갑자기, 그 자극으로 위 근처가 꿈틀 하고 작게 움직인 것 같았다.
'이, 이건...'
큰일 났다. 작은 꿈틀거림이 시발점이 되어 꿈틀꿈틀 하고 제 2파가 닥쳐왔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극히 가까운 미래에, 장난이 아닌 일이 벌어진다.
'어떡해.'
하지만 인생에는 노력해서 피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라. 지금 유미에게 일어나려고 하는 건 틀림없이 후자니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볼썽사나움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걸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고를 하고 얌전히 창피를 당한다. 2, 크게 소리를 질러서 무마한다. 3, 지금 당장 도망친다.'
유미는 3번을 택했다. 어차피 창피를 당할 거라면, '그것'이 주위에 들리게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앗, 요놈, 어디가"
그러나 달려 나가긴 했지만, 문에 도착하기 전에 로사 기간티아에게 붙들려서 원의 중심으로 다시 끌려 들어와 버렸다.
"뭐야, 그렇게 말하기 싫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추억이야?"
유미는 고개를 옆으로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자매의 연을 어떻게 맺었나 하는 걸 숨기고 싶어서 도망친 게 아니라.
'아아, 하지만... 이젠.'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밥을 먹고 오는 거 였어-. 후회와 동시에, 꼬로로로록- 하는 개구리 울음 같은 소리가 유미의 몸 중심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믿을 수 없게도 10초는 충분히 되는 16년 인생의 최장기록으로, 결국 방 안이 쉬잉 하고 조용해진 후에도 미련이 남는 듯 꼬록꼬록하고 울리고 있었다.
'아아, 이젠 다 끝이야...'
아무리 그래도 하필이면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개구리의 독창을 들려드려 버리다니. 구멍이 있으면, ...아니, 이 바닥판을 벗겨내고 10미터쯤 구멍을 파서 10년쯤 묻혀 있고 싶다.
"...큭"
침묵을 깨고 웃기 시작한 것은, 로사 기간티아였다. 그녀는 체통 없게도 '후후후'도 '쿡쿡'도 아닌 '앗핫핫' 하고 입을 크게 벌리며 뒤집어졌다. 그에 이끌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도 이끌린 게 아니라 참고 있었던 것이 뿜어져 나올 계기가 된 것이겠지만- 유미와 사치코님을 뺀, 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의 파도에 휘말려버렸다.
"멋져. 유미쨩, 최고!"
"사치코 언니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했더니, 아니 정말 최고의 타이밍이었어."
"유미쨩의 맹함에 경의를 표해서, 이 자리는 넘어가 주도록 하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미님들은 매우 만족한 듯 미소지었다. 간단한 뒷정리란 정말로 간단한 것이었는지, 맨 처음 온 레이님과 시마코양이 벌써 끝내 버렸다고 해서 다들 웃음의 여운을 남기며 계단을 올라간다. 반성회를 하기 위해 명목상은 회의실이지만 분위기는 살롱인 2층의 한 방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다. 한 방이라곤 해도 2층엔 그 방뿐이지만.
2층에 방 하나, 1층에 방 하나. 장미의 관은 관(館)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약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오두막이라고 잘라 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멋진 건물이다. 중앙 정원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아마도 학교 건물보다도 훨씬 오래되었을 목조 건물로 삼각지붕과 스테인드글라스, 외벽을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넝쿨, 나무로 된 퇴창 등등 세피아색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뒤집힌 바닥판이나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계단 같은 건 조금 낡았긴 해도 대대로 학생회의 본부로서 소중하게 사용되어 온 만큼 정결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가득한 건물이었다.
좁고 경사가 급한 계단을 아름다운 선배들이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 이런 경우 먼저 가서 자리를 준비해 둬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계단이 좁아서 앞지를 수도 없으니 별 수 없이 맨 뒤에 서기로 했다. 같은 반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산백합회에 대해서 시마코양에게 이것저것 배워야지,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오늘부터, 아니 정확히는 어젯밤 로사리오를 받은 시점부터 자신은 사치코님의 스-루가 된 거니까.
사치코님이라고 하자면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학생회 즉 산백합회의 회장인 세 장미 중 한명, 로사 키넨시스의 동생으로, 다음 로사 키넨시스가 되실 분. 물론 언제가 자신이 로사 키넨시스가 될 거라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유미였지만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인 사치코님의 동생이 된 이상 장미의 관에 나와 산백합회 간부 여러분을 돕는 건 당연한 것이다. 라기 보다 조금이라도 사치코님의 곁에 있으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동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사치코님의 동생으로서 최초의 하루인 것이다.
그런데.
'빨리도 실망시켜 드렸을까나.'
한 칸 올라갈 때 마다 차갑게 흔들리는 바로 눈앞의 검고 곧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유미는 조금 우울해졌다. 볼썽사나운 꼴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자존심의 덩어리 같은 사치코님은 겨우 맞아들인 동생의 꼴불견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첫 만남부터가 그랬었으니까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으셨겠지만 오늘은 좀 너무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로사리오를 돌려달라거나 하시진 않겠지.'
삐걱삐걱.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며 '아냐 혹시 몰라'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사치코님은 성격을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앞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개구리 노랫소리로 대 폭소였으니 말이지...'
열 몇 개의 계단이 오늘은 끝없이 길게만 느껴진다. 최소한 뭐라도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없으면 나쁜 쪽의 생각만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자매의 관계를 백지로 돌릴 바에야 여기서 커다란 벼락에 맞는 편이 차라리 낫다. -라고 생각했을 때, 계단을 다 올라간 사치코님이 빙글 돌아서서 유미를 내려보았다.
눈초리는 여전히 약간 험악함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가장 높은 위치는 사치코님의 아름다움을 더더욱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유미는 그 모습에 솔직하게 넋을 잃고 말았다. 사치코님이 예쁘니까 그녀의 동생이 된 건 아니지만, 역시 동경하게 된 계기는 멀리서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화려한 용모였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을 내밀어."
말씀하시는 대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금을 보는 것도 아니니까 한손은 아니겠지 하고 멋대로 판단한 후, 흠칫 하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이건.'
뭔가와 비슷하다. 아아, 맞아. 가정교사에게 벌을 받고 있는 소년의 그림, 딱 그대로다. 분명히 소설의 삽화로, 지시봉으로 손바닥을 맞아야 한다는 아플 것 같은 체벌이었다는 걸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설마 사치코님, 그걸 나한테 하시려는...?'
상상하고는 튀어오를 뻔 했다. 벼락을 맞는 편이- 같은 생각 하고 있었으면서 막상 닥치면 '역시 아픈 건 좀...' 으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유미는 눈을 꼭 감았다. 사치코님의 앞에서 걸어가던 레이님은 이미 비스킷같은 문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사치코님과 유미는 지금 계단 위에 단 둘만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손바닥에 아픔은 오지 않고, 대신 바스락바스락 하고 사치코님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하고 생각하고 있자 가벼운 감촉이 손 위에 찾아왔다.
"이거-"
눈을 떠 보자, 거기에는 목캔디가 데굴 하고 두 개 놓여 있었다.
"이런 거라도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야."
"에...?"
"아침밥도 못 먹을 정도로 서둘러 온 건 알았으니까."
사치코님은 발길을 돌려 유미에게 등을 보였다.
"너무 창피하게 하지 마."
"사치코님..."
마지막 한 계단을 뛰어올라가서, 유미는 뒤를 따랐다. 엉뚱한 망상에 빠져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
하지만, 설마 사치코님이 배고픔을 덜도록 목캔디를 주신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니까.
문 앞까지 따라가자, 사치코님은 문득 생각난 듯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유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치코님'이라고 부르는 거 이제 그만 둬."
"엣?"
"넌 내 스-루니까. 확실히 구분을 지어서, 똑바로 '언니' 라고 부르도록."
사치코님은 그리고 유미의 타이를 단정하게 정리한 후, '대답은?' 하고 말했다.
"...예."
무슨 말인지 잘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그래도 유미가 끄덕이자, 그 사람은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먼저 비스킷을 닮은 문 너머로 사라졌다.
"언니..."
아주 살짝, 소리를 내서 되뇌어 본다. 말하는 쪽이 빨개질 정도로,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낱말이었다.
언니.
뒤쪽이 조금 간지럽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뛰는 속도를 높이고 있다.
바보같이 보일 지도 모르지만, 숨겨 놓은 로사리오를 교복 위로 만져서 이게 현실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로사리오는 분명히 거기 있었다. 그저께 밤, 사치코님이 목에 걸어 주셨던 사치코님의 로사리오.
그러니까, 사치코님을 그냥 '언니' 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전교에서 유미뿐인 것이다. 유미는 감동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물어물거리지 마."
사치코님이 방 안에서 부르신다.
"예, 옛."
유미는 허둥지둥 대답한 후, 사탕을 입에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먹 속에서 따뜻해진 사탕은 껍질이 달라붙어서 잘 벗겨지질 않았다.

"어라, 요시노양은...?"
주요 멤버들이 평소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서야 레이님의 스-루인 시마즈 요시노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유미는 깨달았다. 1학년이 맡은 일이라고 해도 될 차 준비를 시마코양 혼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미는 서둘러 그것을 도왔다.
"어제부터 열이 내리질 않아서"
레이님이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학원제때 보기 드물게 열심히 해 버렸기 때문이겠지만"
행사 후에는 꼭 몸 상태가 나빠진다고 한다. 유미 말고는 다들 알고 있었던 듯, 특별한 감상도 없이 그 이야기는 살짝 옆으로 흘러간다.
시마코양이 끓인 홍차를 쟁반에 얹어서 나눠드리며, 멍하니 '요시노양은 몸이 약한 걸까나아.'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체육수업을 쉬고 있는 걸 유미는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시마즈 요시노양과는 둘 다 유치원 때부터 리리안 여학원에 다녔는데도 아직 같은 반이 된 적이 한번도 없다. 요 최근 들어 친해지긴 했다지만 학원제 준비라든가로 분주했기 때문에 아직 차분히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요시노양이라고 하면 용모도 행동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특별한 얼굴들 가운데서 항상 조심스럽게 조금 떨어져서 미소 짓고 있는 식의 가련한 소녀라는 이미지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장미나 백합들 사이에 핀 한 떨기 은방울꽃.
로사 페티다의 앞에 찻잔을 놓았을 때, 레이님과의 잡담 같은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맞아 맞아. 신문부가 조만간 요시노쨩과 레이를 취재하고 싶다고 하는데."
"신문부가? 저와 요시노를요?"
레이님은 '어째서'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유미도 따라서 머리를 구부렸다. 품행방정, 그런 면에서는 딱딱할 정도의 레이님과 솔직하고 성실한 요시노양이 신문부에 쫓겨다닐만한 일을 일으킬 리 없다.
"이봐, 유미쨩 다른데 보지 마. 쏟아져"
로사 기간티아가 자기 몫의 찻잔을 쟁반에서 들며 '떽' 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죄송해요."
어쨌거나 사과하긴 했지만 로사 페티다쪽 자매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저기 말이지, 신문부도 스캔들만 다루는 건 아냐. 그야 뭐, 그렇게 소란을 떨면서 자매가 된다거나 하면 편견도 생길지 모르지만."
로사 기간티아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사치코님과 유미를 교대로 보았다.
"그런가―"
멍하니 학교신문의 기사를 떠올려 보니, 분명히 스캔들 같은 건 그다지 실려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보통은 착실하게 학교행사라던가 운동부의 시합결과 같은걸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내일 나올 신문도 아마 학원제 특집으로 되어 있겠지.
"너와 요시노쨩이 신문부 주최의 전교 앙케이트에서 베스트 스-루상을 받았대. 정식 의뢰니까 거절할 이유도 없지만?"
로사 페티다는 수학 방정식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어쩔래?'라고 레이님에서 물었다.
"하지만, 요시노는 언제 학교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지"
알았어, 하고 로사 페티다는 쌀쌀맞게 끄덕인 후 찻잔을 양손으로 들고 손가락을 덥혔다. 로사 페티다란 분은 이런 재미없는 듯한 얼굴을 자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다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일은 완벽하게 해 내는데다 결석도 지각도 없다. 뭐든지 확실히 해놓고, 재미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왠지 신기해.
로사 페티다와 레이님이 자매라니. 그건 유미와 사치코님처럼 스릴있는 관계도 아닌데다 로사 기간티아와 시마코양같은 자칭 '닮은 꼴끼리' 라는 관계와도 다른, 아무래도 잡히는 부분이 없었다.
어째서 로사 페티다는 레이님을 스-루로 골랐을까. 레이님은 어째서 그에 응한 것일까. 자신에게 언니가 생긴 탓인지 유미는 다른 자매의 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들 컵 받았지? 그럼 건배하자"
로사 키넨시스가 일어서서 말했다. 반성회라는 건 명목상이고, 아무래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수고하셨어요회'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일은 극이 끝난 뒤에도 학원제 실행위원이었던 장미님들은 바쁘게 뛰어다녔고, 일이 일단락된 뒤에도 후야제 같은 곳에 흘러가버려 다들 한 곳에 모일 수 없었으니까.
"일단은, 학원제의 성공을 축하하며"
스트레이트 다즐링으로 건배. 시마코양이 끓인 홍차는 사치코님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부드럽고 맛있었다. 기분 좋게 두 모금째를 입에 넣었을 때, 로사 키넨시스는 다시 컵을 높이 들고 말했다.
"그리고, 사치코가 유미쨩을 자기 걸로 만든 걸 기념해서"
"붓"
방심하고 있었기도 해서, 순간 유미는 홍차를 뿜어낼 뻔하다 겨우겨우 참았다.
"어마나, 수줍어하긴"
"-로, 로사 키넨시스"
3학년들은 '좋구나 젊은 사람들은' 하며 늙은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완전히 놀림 받고 있지만 발끈하면 그만큼 상대가 바라는 바니까 더 곤란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걸로 만든'이라는 말투는 좀 아니잖아. 유미는 할 말을 찾아서 뻐끔뻐끔하고 입을 금붕어처럼 열었다.
"입 다물고, 입 주위를 닦도록 해. 볼썽사납게"
사치코님의 고져스하고 하얀 레이스 손수건이 날아왔다. 하마터면 뿜어낼 뻔 했던 홍차가 입 주위에 흘러 있었다.
"어머, 닦아 주지 않는 거야?"
로사 기간티아가 호들갑스레 눈썹을 올렸다.
"로사 기간티아라면 시마코의 입가까지 보살펴주실 건가요?"
"시마코에겐 하지 않겠지만, 유미쨩이라면 꼭 하고 싶은 데에"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겠습니다만, 제 동생을 너무 어리광피우게 하지 말아 주세요."
직접 공격당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사치코님은 냉정했다. 무엇이 스위치가 되어 엘레강스 모드가 히스테릭 모드로 바뀌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자매가 되었다곤해도 아직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사치코님은.
조례 시간이 다가와서 각자 홍차를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정리하면서 시마코양이 말했다.
"자매도 여러 가지 모양이 있구나."
수도의 물은 지난 주보다 아주 조금 차가와져 있었다.

 

 

    2

 

"요시노, 일어났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식으로, 노크 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요시노는 목제 세미더블 침대에 위를 보고 누운 채, 머리만 조금 움직여 침입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째서"
환자에게 '어서와' 같은 인사를 기대하고 있진 않았지만, 오자마자 '어째서' 라는 것도 좀- 하고 생각하며 레이는 의자를 옮겨 머리맡에 앉았다.
언제 와도 살풍경한 방이다. 요시노의 방은. 이전에는 숙부님의 서재였다고 하니까 화려한 벽지 같은 게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보리색 벽 외에는 대부분이 갈색. 바닥도 천정도 창틀도 책장도 침대도 전부. 꽃무늬 커튼이라도 걸어 두면 좋을 텐데, 하고 쓸데없는 참견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열은 아직 안 내려가?"
요시노의 이마 위에는 어렸을 때부터 열이 났을 때 꼭 등장하는 병아리무늬 핸드타월이 올려져 있었다. 그 타월이 아니면 요시노는 안정되질 않는 것이다. 프린트된 무늬가 닳아서 희미해진 지금도 가장자리의 뜯어짐을 몇 번이나 고쳐서 쓰고 있는 굉장한 타월이다. 숙모님이 조금 전에 짜서 놓아둔 건지 정성스레 접힌 그것을 만져보자 아직 서늘하니 차가왔다.
"몸 상태는 여전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지 요시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건 익숙해진 일이라 레이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이양은 오늘 우편배달부니까, 배달이 끝나고 가면 곧바로 갈 거야"
가방에서 바인더를 꺼내 투명 케이스에 넣어 둔 서류 한 꾸러미를 책상 위에 놓았다.
"영어 읽기 프린트는 다음 주까지 숙제래. 그리고 고문(古文) 리포트가 돌아온 걸 받아 왔어. 또-"
"클럽활동은 어떻게 했어?"
가로막듯, 갑자기 요시노가 말했다. 교내에서는 주위를 의식해서 존댓말을 쓰지만, 그 외에는 예전처럼 대등한 말투가 된다. 호칭도 '언니'와 '레이쨩'을 재주 좋게 나눠 쓰고 있다.
"클럽활동?"
레이는 가방을 닫고 되물었다.
"이제 곧 친선시합이 있으니까 특훈이라고 했잖아."
"말하긴 했....는데?"
"나 때문에 빠진 거야?"
병아리 타월을 일부러 치우고 요시노는 추궁하듯 물었다. 추리소설과 하드보일드를 애독하는 그녀는 뭐든지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니까 무심코 정직하게 끄덕여 버릴 뻔 하게 된다. 하지만 끄덕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심장발작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화낼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오랫동안 사귀어 온 만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레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냐. 오늘은 아버지께 훈련 받으려고 일찍 돌아온 거야"
"정말?"
"정말"
요시노의 눈동자 속에, 요시노에게만 거짓말을 하는 게 능숙해져 가는 자신이 있었다. 요시노도 레이가 거짓말을 하는 만큼 그걸 꿰뚫어보는 것이 능숙해져 갈 것이었다. 지금도 일단은 납득했지만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래도 전부 거짓말은 아니라고 변명처럼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버지께 집의 도장에서 훈련을 받을 약속을 한 건 정말이다. 그저 그게 좀더 늦은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빨리 돌아오고 싶었던 건 요시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학교에서도 무심코 요시노가 떠올라서 아무 것도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사념은 죽도에도 나타나겠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후배들에게 절대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 그래서 일이 있다고 하고 클럽활동을 쉬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기술은 좋지만, 너의 검은 안정되어 있지 않다. 정에 흘러버리는 여자의 검이다, 라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검의 길에 있어서 남녀차별을 두지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말은 레이에게 깊이 꽂힌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프린트 보여줘."
요시노는 젖은 타월을 머리맡의 바구니에 놓은 후 본격적으로 몸을 일으켜 배달된 것을 훑어보았다. 조금 여위어 보이는 것은 트레이드 마크인 땋은 머리를 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역시 열 때문인 걸까. 시선을 느끼고, 요시노는 '왜 그래?' 하고 얼굴을 들었다.
"으응"
레이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시노는 어렸을 때부터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같은 담 안에 세워진 옆집에서 태어난 사촌동생에 대해서는 자매의 의식을 할 것까지도 없이 친동생처럼 생각해 왔다. 요시노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마리아님을 등지는 일이라도. 요시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요시노의 평온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지금까지 요시노의 나이트로서 살아 왔으니까.
"레이쨩, 이거 뭐야?"
요시노는 프린트에 섞여 있던 갈색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맞아. 잊고 있었다. 신문부에게 부탁받은 앙케이트"
"앙케이트?"
"응"
레이는 베스트 스-루로 뽑힌 것과 신문부에게서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한 것 등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베스트 스-루상..."
중얼거리면서 요시노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취재가 안된다면 우리 둘이 앙케이트 형식으로 대답해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바람에. 그걸 재구성해서 기사로 할 거라고"
"흐-응, 그럼 레이쨩이 써. 내 것까지"
"알았어"
레이는 용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것과 나란히 책상에 놓은 후 쓰기 시작했다.
앙케이트는 한 명당 두 장씩 있어서 한 장은 퍼스널 데이터 같은 것으로, 요시노에게 확인할 필요도 없이 쓸 수 있었다. 나머지 한 장은 좋아하는 단어라거나 애독서, 동경하는 연예인 같은 설문이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요시노에게 물어보고 대답을 그대로 적어갔다.
"저기, 레이쨩. 그리고 또 무슨 상 있었어?"
"그게..."
자신 것과 요시노 것, 각각 클립으로 묶은 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레이는 지긋지긋한 듯이 말했다. 실은 신문부 주최의 전교 앙케이트로 뽑힌 상이라는 건 베스트 스루뿐만이 아니었다. 앙케이트의 집계가 늦어져 오늘 방과 후에야 모든 상이 정해졌다는 것 같지만, 레이는 미스터 리리안이라는 이상한 상을 받아 버렸다.
"미, 미스터...?"
예상했던 대로 요시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가끔, 착각한 하급생들이 '오라버니'하고 부르는 게 문제였어"
"레이쨩, 머리 기르면?"
요시노는 손을 뻗어 레이의 짧은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어울리지도 않고, 호구 쓰는데 방해돼"
"흐-응"
사치코는 미스 퀸이고 시마코는 미스 프린세스. 올해는 깜짝상으로 미스 신데렐라에 유미쨩이 뽑혔다는 말을 하자, 요시노는 '유미쨩인가아' 하고 감개 깊은 듯 중얼거렸다.
"왜, 유미쨩이 신경 쓰여?"
"조금"
그다지 특정 인물에게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요시노인 만큼, 그 대답은 의외였다. 옛날부터 학교를 쉬는 일이 많아서인지 반 아이들 등과는 깊이 사귀려고 하지않는 면이 있었으니까. 외견은 좋으니까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듯 보이지만 이래 보여도 꽤나 편협한 구석이 있다.
"사치코의 로사리오를 받았다고 하니까 이제부터 더 친해질 수 있어."
레이의 말에 요시노는 '정말?' 하며 이불을 젖히고 몸을 내밀었다. 늦가을의 저녁때, 난방을 넣을 것까지는 없지만 잠옷 한 장이라는 차림은 보는 쪽이 추울 정도다. 레이는 의자에 걸려 있던 카디건을 요시노에게 걸쳐 주었다.
"사치코님은 행복하시겠지."
잠옷의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요시노의 가슴에도 로사리오가 걸려 있다. 레이가 올 봄에 준, 짙은 녹색의 돌은 요시노의 하얀 살결에 굉장히 잘 어울렸다.

 

 

    3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신문부 부장, 츠키야마 미나코는 들떠 있었다.
왜냐, 요즘 그녀들이 책임발행하고 있는 주간신문, '리리안 백서'가 호평이기 때문이다.
"훌륭해"
B4 사이즈의 종이를 오른손에, 왼손은 허리에 대고 우아하게 선 채 시선을 황홀하게 지면(紙面)으로 떨어뜨린다. 그녀가 들고 있는 그것은, 최종 체크를 위해 준비된 다음 호의 시험 인쇄판이었지만, 올 컬러의 아름다운 완성도로 외관은 발군이었다.
"외관뿐만이 아냐. 기사의 내용도, 문장도 완벽할 정도의 아름다움"
화제는 날것 시간이 생명, 이라는 것이 미나코의 신조였다. 독자가 원하고 있는 것을 즉시 제공하지 못해서야 어떻게 신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리리안 백서'는 그 부분은 확실히 잡고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야. 화제가 없을 때는 선생님의 취미라거나 교정에 핀 꽃 이야기 같은 것으로 물을 흐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은 독자의 기호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 지금 최고의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산백합회 간부들이다. 그녀들을 쫓아다니고만 있으면 독자들은 따라온다. 그야말로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자신은 과거의 선배들과는 달리 학생회 임원이라 해도 겁먹지 않고 취재할 수 있을 만한 배짱이 있고, 문장력도 있다. 산백합회의 간부들도 이렇게나 뛰어난데다 개성적인 인물들이 모였던 일이 과거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미나코는 선반 위에서 지난주 분을 꺼내어 그 표제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독점 인터뷰!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 동생에 대해 과감히 말하다.'
보라, 자신은 이렇게나 멋지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신神에게 사랑받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재능. 무심코 한숨마저 나올 법도 하다.
'그래 그러고 보면-'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의 이야기는 스릴 만점이었다.
스-루를 만들지 않았던 전교생의 동경의 대상 오가사와라 사치코가 현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인 토도 시마코에게 거절당하고, 완전히 노마크였던 후쿠자와 유미에게까지 죄송해요 당한 후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한발 앞서 캐치한 것은 자신이었다. 클레임이 걸리는 바람에 곧바로 기사화할 수는 없었지만, 신데렐라 연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 후일담도 함께 실을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대 호평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언니, 넋 빠져있는 것도 그만 좀 해 주세요"
모처럼 기분 좋게 도취해있었는데, 스-루인 야마구치 마미(山口 眞美)의 목소리가 현실로 다시 끌어다 놓는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숭고한 세계에 몸을 맡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책상 대신 쓰는 커다란 테이블 하나와, 조금 오래된 컴퓨터 한대, 그리고 올해 예산위원회와의 전투 끝에 겨우 구입한 최신형 컬러 프린터가 있는 평소의 부실이었다. 마미 외에 두 명의 부원이 더 있었지만, '늘 있던 일' 이라는 듯 말없이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마미. ...너 말이지"
"기사를 체크해주시지 않으면 내일까지 찍어낼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언니의 입버릇인 '화제는 날것, 시간이 생명'을 실천할 수 없어지는데요."
"알았어."
미나코는 별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동생으로 골랐다고는 하지만, 저렇게나 말 빡빡하게 하는 애가 또 있을까 하며 한숨을 쉰다. 아무튼, 말하는 게 맞는 말이니까 더 귀엽지 않은 거다. 부활동에서 은퇴한 3학년의 언니는 '미나코 1학년 때를 보는 것 같아' 라고 하시지만, 적어도 자신은 좀더 나았던 것 같은데.
"시마즈 요시노 정도까지는 안 되더라도"
적어도 반만 착하고 상냥한 아이가 되어줄 순 없을까-. 미나코는 시험 인쇄판의 투 샷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소년같은 하세쿠라 레이와 함께 찍힌 소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마치 연인들처럼 붙어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뽑힐만해서 '베스트 스-루상' 에 뽑힌 것이다. 고상한 언니와 고분고분한 동생이라는 공식은 이미 낡았다. 사촌지간에 소꼽친구, 병약한 소녀와 그를 상냥하게 지켜준 나이트 같은 관계. 백장미, 홍장미 이야기가 계속되어 왔지만 지금부터는 황장미 붐이 올 것이다. 이것을 기사로 쓰지 않고 어쩌겠나.
"언니"
다시 주의 받고, 미나코는 허둥지둥 기사를 눈으로 쫓았다.
-헌데.
'어라...?'
왠지, 어딘가 이상하다. 오자도 탈자도 아니다. 항목별로 대답하는 거니까 특별히 이상하게 돌려 말한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어딘가 현실감이 없다, 라기 보다...
"저기, 이거 워드 작업 누가 한 거야?"
미나코가 묻자 마미의 옆자리에 있던 1학년 부원이 '저요' 하며 손을 들었다.
"뭔가... 잘못됐나요?"
그거, 라는 건 베스트 스-루상 기념 인터뷰 기사였다. 시마즈 요시노가 병으로 결석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지면으로 대답을 받은 것이다. 하세쿠라 레이가 대필한 것인 듯 양쪽 다 같은 파란색 만년필, 같은 필체로 꼼꼼하게 적혀 있다. 대필에 대한 에피소드마저도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확실히 기사에 적어 두었다.
"...앙케이트 용지, 바뀌지 않았어?"
"엣!?"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의 신문부원은, 거의 동시에 시험판에 달라붙었다.
"하세쿠라 레이님의 애독서가 소녀소설 전반에, 시마즈 요시노양이 이케나미 쇼타로의 검객물"
"레이님의 취미가 바느질에 요시노양이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관전"
"레이님의 좋아하는 말이 '진심'에 요시노양이 '선수필승'. 이건-"
틀림없다, 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아니, 이건 틀린 것이다, 라고. 기계적으로 쳐 넣는 틈에 두장 한 세트의 용지가 섞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전 여기 있는 대로"
워드 작업을 한 1학년생은 원래의 원고를 갈색 봉투에서 끄집어내었다. 앙케이트 용지는 두 세트, 가지런히 정리된 채 나타났다.
"하항, 이래서야 너만 야단칠 수도 없겠구나."
하세쿠라 레이라고 이름이 적힌 첫 번째 장과 '바느질'이라는 문자가 적인 두 번째 장은 분명히 클립으로 이어져 있다.
"레이님이 실수하신 거군요."
"아마도"
하지만 신문에 실리는 이상, 제대로 확인한 후에 정정해야 할 것이다.
"요시노양은 오늘도 결석입니다."
마미가 알아채고 보고했다.
"이 시간이라면 아직 레이양은 부활동 하고 있겠네. 아니면 장미의 관에 있을 지도."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되겠지만, 미나코는 스스로 일어섰다. 이런 때 보고를 기다린다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 카디건을 걸치고 부실을 나섰다. 가는 도중 중앙 정원에서 다케시마 츠타코와 만났다.
"어머, 거기 계시는 건 신문부의 미나코님. 늦게까지 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시네요."
사진부와 신문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아무래도 거북한 상대였다. 행동이 단순한 주제에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레이님요? 장미의 관에는 안계셨어요. 그 왜, 시합이 가까워졌다고 매일 부활동에 바쁘신 모양이던데요."
타이밍 좋게도 그녀는 지금 막 장미의 관에서 나오는 참이라고 한다. 후쿠자와 유미의 클래스메이트라는 연줄로 요즘 들어 종종 장미의 관에 드나든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부러워 죽겠네.
"무도관에 가실 거라면 함께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다케시마 츠타코양은 생긋 웃고서 그렇게 말했다. 실은 그녀, 운동부를 돌며 학생들의 사진을 찍는다는 필생의 업을 가지고 있다. 검도부나 펜싱부 등은 연습이 끝난 직후를 노린다고 길을 가면서 이야기했다.
"검도는 아름다운 스포츠지만, 그 호구가 방해되거든요."
그럼 호구를 입기 전이라도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닌 모양이다.
"연습 후, 그 호구를 벗은 순간의 얼굴이 최고로 좋은 거예요."
땀투성이가 된 얼굴이라거나, 볼에 달라붙은 한줄기 흑발이라거나- 하고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아쉽게도 그런 취미가 없는 미나코로서는 '아아 그러신가요' 하고 끄덕이며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화제였다.
무도관이라고 불리는 순 일본식 건물은 학교 뒤쪽, 제 2체육관 뒤편에 있었다. 여기는 검도, 궁도, 유도, 공수도 등의 공동연습장으로 오늘은 바닥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다다미를 깔아서 유도부가, 나머지를 검도부가 사용하고 있었다.
"아, ...아름다워."
다케시마 츠타코양은 연습시합으로 도복이 헤쳐져 티셔츠가 드러난 유도부원에게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에휴우"
미나코는 관두고 검도부 옆으로 갔다. 그녀들도 연습시합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에 앉아 견학하기로 했다.
대강 훑어본 바로는 하세쿠라 레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호구를 쓰고 있는 인물인가 했지만 호구에 적혀 있는 이름이 아무래도 다르다.
"한판!"
심판을 보고 있던 고문 선생님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걸 듣고 일단 한 시합이 끝났다고 생각해 시합을 견학하고 있던 1학년생인 듯한 부원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2학년의 하세쿠라 레이양은..."
"아, 레이 선배라면 조퇴하셨습니다."
"...엣, 언제?"
"30분쯤 전이었을까요."
30분이면 귀가 준비를 끝내고 이미 교문을 나갔겠지. 처음에 신발장을 체크했어야 했다고 후회해도 늦은 일이다.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1학년생 부원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다시 정면을 향했다. 조금 귀여울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자마자 옆에서 다케시마 츠타코가 소리도 없이 나타나 셔터를 눌렀다.
'...'
미나코는 말없이 그 일어섰다.
"미나코님, 벌써 일은 끝나셨나요?"
"하세쿠라 레이양은 조퇴했다고 하니"
"그건 아쉽게 됐네요."
카메라를 눈에서 떼지 않고 이쪽을 보니까 카메라가 다가오는 것 같아서 무심코 양손을 내밀어 렌즈를 피했다.
"자신의 가드는 단단하시군요. 미나코님"
"그거 비꼬는 거야?"
"그럴 리가요. 칭찬하는 거예요"
다케시마 츠타코는 카메라를 눈에서 떼고 그 뒤에 나타난 테 없는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런 면이 거북한 거야, 라고 미나코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무도관을 혼자 뒤로하고 학교 건물을 향해 걸어가면서 투덜거리고 싶어졌다.
인쇄 직전에서 기사를 정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태가 되는 데다, 하세쿠라 레이는 간발의 차로 못 만나고, 게다가 거북한 카메라 꼬마에게 잡히고. 조금 전까지의 밝았던 기분은 어딘가 멀리 사라져 버렸다.
클럽하우스에 돌아가기 전에 일단 하세쿠라 레이의 집에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비교적 학교 근처에 살고 있을 테니 어쩌면 이미 집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소 앞에 있는 녹색의 전화는 다행히 아무도 쓰고 있지 않았다. 카드를 넣고 넘버를 삑뽁삑 재빨리 누른다. 미나코의 머리 속에는 약 70명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었다. 참고로 신문부원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능력이 요구되는 건 아니다. 이건 그저 취미. 연초에 배포되는 학생들의 주소록을 읽는 것이 미나코의 남모를 즐거움이었다. 결국 뿌리부터 다른 사람에게 흥미가 있는 인간인 거다.
너무 조급해서 불필요한 지역번호까지 눌러 버렸지만 수화기에서는 제대로 연결 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기다려도 응답이 없다.
"아무도 없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며 전화 코드를 둘째 손가락으로 건드린다. 기다리는 쪽으로서는 벨이 열 번 울리는 시간이 영원한 듯 길에 느껴지는 법이다.
열세 번째 울렸을 때 겨우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입력되어 있는 개인 정보에 의하면 하세쿠라 레이는 외동딸이니까 적어도 형제는 아닐 것이다.
'죄송합니다. 지금 본가에는 아무도 안 계시는 모양이라...'
부친의 도장에 다니는 소년인 듯 하다. 그러면 하세쿠라 레이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일 테고, 문하생이 도장주 딸의 취미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어쩔까 하고 있을 바로 그 때, 미나코는 손님용 현관 저편에서 어느 학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걸겠습니다."
서둘러 수화기를 놓고 실내화를 신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로사 페티다!"
한 박자 늦게 그 사람은 도서관 앞에서 천천히 돌아보았다. 세미롱의 머리카락을 헤어밴드로 살랑살랑 모아 넘긴 평소의 헤어스타일. 세일러 칼라 깃의 연장선상에 있는 타이의 매듭은 전교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그녀야 말로 로사 페티다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뭔가, ...볼일이라도?"
무심코 미나코는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돌아본 로사 페티다는 평소보다 더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저, 저기"
평소에도 그다지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무뚝뚝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쪽이냐 하면 나른한 분위기. 색기마저 느껴진다, 라는 건 부적당한 표현일까.
"불러 세워서 죄송합니다."
미나코는 한번 깊이 사과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어쨌거나 하세쿠라 레이와 시마즈 요시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확인을 받는 수밖에 없다. 확인을 받으면 즉시 부실로 직행해서 기사를 고쳐 프린트아웃 한다. 실내등과 컴퓨터 모니터 전원을 꺼 두면 한동안은 클럽하우스에 남아 있을 수 있을 터. 수위아저씨가 돌아다니기 시작할 때 까지는 모든 프린트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레이와 요시노의 취미, ...라?"
눈썹 사이에 작은 주름을 만들며 로사 페티다는 반문했다.
"예에. 조금 인터뷰 기사에 의문이 생겨서요. 그 확인 차..."
"레이는 검도, 요시노쨩은 독서겠지. 어떤 책을 읽는 가 같은 건 몰라."
"?"
그래서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 뜨개질 같은 건?"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
"뜨개질?"
로사 페티다는 '뜨개질'이라는 단어를 몇 번 반복해서 말한 후, 겨우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떠올린 듯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당연히 미나코는 짚이는 게 있는 건가하고 기대했으나 불발이었다.
"뜨개질이라면, 털실로 스웨터라던가 짜냐는 말?"
"그, 그런...데요"
"털실 짜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요시노쨩의 클래스메이트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에 있어서만은 역시 로사 페티다도 하세쿠라 레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당연한 듯 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그녀들이 좋아하는 말 같은 건..."
새끼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질문을 해 본다.
"좋아하는 말이라는 거, 일부러 누구와 이야기하지 않잖아?"
"-확실히"
미나코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매관계는 좀 사양하고 싶다.
"이제 됐어?"
멍한 눈으로 로사 페티다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아, 죄송합니다. 시간을 뺏어서"
길을 비키고 깊이깊이 인사를 하며, 뭔가 페이스가 이상해지네, 하고 생각했다. 따분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라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로사 페티다가 오늘만은 어째서 이렇게 템포가 떨어져 있는 걸까.
"저기, 너"
그대로 돌아가는 듯 했던 로사 페티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다.
"강을 말이지, 보트를 타고 흘러가고 있는데, 그 앞에는 커다란 폭포가 있다고 하잖아? 하지만 그 폭포를 내려가지 않으면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야."
"하아..."
이건 뭔가의 비유일까. 하지만 미나코는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저 대꾸하며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노는 있어. 어느 쪽으로 저으면 좋을까?"
언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결국 보트 이야기로 끝인 것같다.
"어느 쪽으로 저을까, 인가요. 강 위쪽인가, 아니면 강 아래쪽인가 하는 뜻인가요?"
"아아, 됐어. 나도 참, 뭐하러 다른 사람 의견 같은걸..."
대답도 듣지 않고, 로사 페티다는 이번에야말로 뒷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녕히 가셔요(ごきげんよう)"
미나코가 말을 걸어도 로사 페티다는 돌아보지 않았다.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들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대체 로사 페티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눈앞의 위기도 잊은 채 미나코의 기자 혼이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뭐, 그저 몸이 좋지 않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절대로 사건이 있을 거라고 혼자 생각해 버리고 있다.
이거라고 확신해 버리면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그런 면이 미나코에게는 있었다.

 

 

    4

 

학원제의 여운이 겨우 가신 어느 날 방과 후.
"어라?"
교실 청소가 끝나고, '그럼 장미의 관에라도 갈까' 하고 복도를 걷고 있던 유미는 1학년 국화반 교실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요시노양?"
"아아, 유미양"
요시노양은 책상에서 시선을 들고 평소처럼 귀엽게 웃었다.
국화반도 이미 청소가 끝난 듯 책상과 의자가 똑바로 줄을 맞춘 듯 정렬해 있었다. 클럽활동 중인 학생 것인지 책상 옆에 가방이 몇 개 걸려 있긴 해도 인기척은 없다.
"학교 와 있었구나."
실례합니다― 하는 시늉을 하며 유미는 교실에 들어갔다.
"응, 오늘부터. 결국 일주일이나 쉬어 버렸어."
후후후, 하고 입술을 약간 올리며 웃는다. 익숙한 일이니까, 라는 듯한 여유 있는 웃음이다.
"요시노양 혼자 있는 거야?"
"응. 쉰만큼 노트를 빌려서 베끼고 있어."
책상 위에는 클래스메이트에게서 빌린 듯한 몇 권의 노트가 쌓여 있다.
"힘들겠다"
"이제 다 됐으니까 기다려 줄래?"
요시노양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노트를 베끼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럼 여기 있어도 되는 거로군, 하고 판단한 유미는 의자를 당겨 요시노양의 앞자리에 앉았다.
유미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요시노양은 어떤 사람일까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는 조금 작은 편. 조금 여위긴 했지만 비쩍 말랐다는 느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자그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겠지. 스커트 위에 살짝 올려놓은 무릎덮개는 그녀가 직접 만든 걸까.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지 교복에 맞춰서 짙은 녹색 털실로 짜여 있다.
유미는 시선을 옮겼다.
앞머리를 눈썹 정도에서 똑바로 자르고, 한가운데에서 둘로 나눈 머리카락을 아래쪽에서 두 갈래로 땋아 있다. 레이님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갈색이 도는 머리카락이니까 깔끔하게 땋은 머리가 그다지 무겁게 보이지는 않는다.
속눈썹은 길다기 보다 짙다는 느낌. 약간 고개를 숙인 이 각도가 우수를 띤 듯해서 굉장히 좋다. 이래서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사람 넘버원인 것도 납득이 된다. 2학년이 되면 그녀 같은 1학년생을 동생으로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아아, 나란 애도 참,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자신의 망상에 부끄러워진다. 유미는 새빨개진 볼을 손으로 눌렀다.
"왜 그래?"
갑자기 요시노양이 얼굴을 들었다.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앗, 으응, 아무 것도 아냐. ...미안"
허둥지둥 둘러대 봤자 이미 늦었다. 거기다 뭐가 뭔지 의미 불명인 변명 밖에 나오질 않으니까 더 난감하다.
"로사 기간티아 말씀대로, 유미양은 재밌어."
힐끔힐끔 보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트를 다 베낀 건지 웃으면서 샤프와 지우개를 필통에 넣고 있다.
"나, 또 백면상하고 있었어?"
"응"
"우와..."
얼굴에서 불이 난다. 왜 이렇게 미소녀 앞에서만 창피한 짓을 해 버리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애초에 요즘, 주위에 미소녀가 늘어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떻게 보일까"
가방에 노트를 넣던 손을 멈추고, 요시노양은 작게 말했다.
"요시노양을?"
"응. 유미양의 관점에서 본 내 이미지"
"요시노양의 이미지라-"
새삼스레 물어보면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물론 요시노양은 속눈썹이 짙다거나 머리카락이 갈색이라거나, 그런 걸 묻고 싶은 게 아닐 테고. 겉모습이 아니라 좀더 뭔가 그 내면적인 이미지로-.
"조금 몸이 약하고, 지켜주고 싶은 타입?"
"그거다."
본인에게 도움을 받고는 무심코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동의해버렸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실례되는 발언이었을 지도.
"에 그러니까... 병약이라는 건 조금 다르지만"
이제 와서 정정해봤자 늦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몸이 약한 건 정말이니까. 그리고?"
재촉 받아서 이번에는 말을 잘 골라서 신중하게 대답한다.
"여자애구나- 하는 느낌. 사람 대하는 게 부드럽고, 친근감 있고, 귀엽고. 우리 동생 같은 게 틀림없이 좋아할 타입. ...어라?"
실례가 되지 않을 말을 골라서 이미지를 전하려고 했는데,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 버렸다. 아무도 가족의 취미 같은 거 물어본 적 없는데. 하지만 요시노양은 '영광인 걸' 하고 쿡쿡 웃고 있었다.
"요시노양은, 집에서는 프릴 달린 앞치마를 두르고 쿠키를 굽는다거나, 레이스 식탁보를 짠다거나 할 것 같아"
"좋아하는 음료는 밀크티고?"
"맞아 맞아. 그리고 하얀 고양이를 기르고"
"응. 그런 이미지"
레이스랑 리본이랑 작은 꽃병.
스커트라면 타이트보다 플레어.
코트는 A라인.
좋아하는 과일은 딸기.
색은 블루 보다 핑크.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쿠키를 좋아하고, 사탕을 좋아하고.
영어와 현대국어는 잘 하지만 수학과 과학은 조금 어렵다.
여자아이가 '여자아이다운 것' 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란 다들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요시노양과는 그 점에서 일치해서 굉장히 즐겁게 잔뜩 이야기 해버렸다.
"하지만, 틀렸어. 나, 전혀 그런 여자애가 아냐."
요시노양은 말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한숨과도 비슷하게 숨을 내쉬고 웃은 후 요시노양은 무릎덮개를 들어올려 접었다. 모티프 잇기로 만든 무릎덮개는 밋밋한 색이었지만 굉장히 소녀다운 것이었다. ...그럼 그녀가 짠 게 아니라는 건가.
"이미지대로의 여자아이 같은 건, 보기 드문 건가"
왠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 요시노양은 어떤 사람인지 새삼스레 흥미가 일어난다.
"없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말한 후 요시노양은 일어섰다. 그리고 교실 뒤쪽까지 걸어간 후, 사물함 문을 열고 무릎덮개를 넣었다.
"장미의 관에 갈 거야?"
유미가 묻자 요시노양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이제 곧 언니가 데리러 올 시간이니까, 같이 가야 해."
"레이님이...?"
하지만 레이님이라면, 검도 시합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해서 매일매일 클럽활동에 매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요즘 특히나 방과 후 장미의 관에서 자주 벌어지는 '회의라는 이름의 다과회'에도 나오지 않는 거고.
"오랜만에 학교에 온 거라고. 걱정도 많아, 우리 언니는"
"과연"
나이트로서는 공주님을 마중 나오지 않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 공주님은 나이트를 호되게 깎아내렸다.
"게다가, 소심하고"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검도 하고 있으니까 강하게 보이긴 하지"
"...용서가 없구나, 요시노양"
확실히 실제로는 처음에 유미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요시노양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악담 같은 거 하지 않을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구석구석까지 알고있는 것뿐이야"
"에?"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 했다. 그러자 거울처럼, 요시노양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유미양 몰랐어? 나랑 레이쨩, 사촌자매야"
"엣!?"
처음 들은 사촌자매라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요시노양이 언니인 레이님을 '레이쨩'이라고 부른 쪽이 상당히 쇼크였다.
"유미양은 소문에 그다지 밝지 않은 모양이네"
그건 교내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특히나 올해 봄,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인 레이님이 요시노양을 동생으로 선택했을 때 '리리안 백서' 의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리리안 여학원에 들어온 학생들도 알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유미는 유치원 때부터 리리안이면서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별 수 없다면 별 수 없는 것이, 신문부에겐 미안하지만 '리리안 백서' 같은 건 흥미있는 부분 밖에 읽지않는데다, 무엇보다 산백합회 간부라곤 해도 유미는 사치코님뿐이니까.
"유미양, 사치코님에게서 로사리오 받았지? 어땠어?"
"어땠...냐니"
"두근두근하거나, 했어?"
물론.
"...했어"
겨우 일주일 전 일이니까 그때의 장면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쭉 동경해 왔던 사치코님이 진지한 얼굴로 로사리오를 내밀었다. 이렇게 행복했던 건 16년간 살아오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속에서 폭죽이 파앙- 하고 터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의 경우엔 말이야, 그런 게 없어."
"없다니?"
"나도 언니도 계속 리리안이잖아? 언제부턴지, 고등부에 올라가면 자매가 되자고 암묵적으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던 거야."
요시노양은 레이님을 이번엔 제대로 '언니' 라고 불렀다.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하지만 두근두근이랑은 관계가 없지. 추리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봐 버린 것같이."
"흐-음"
간단히 말하자면, 요시노양은 조마조마 두근두근하고 싶은 거다. 유미 같은 건 가능하면 평온한 생활을 하고싶다고 바라고 있는데.
"하지만 말이지, 요시노양. 아무리 원해도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거니까. 레이님과 사촌자매라는 것도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
"맞아. 그러니까, 그냥 투정일 뿐이야. 왠지 유미양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졌을 뿐"
"듣기만 하면 되는 거야?"
"충분해. 나, 지금까지 그런 친구 없었으니까"
아무리 사이좋은 사촌자매라고 해도, 레이님에게 레이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지.
"그런가"
말하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잠깐 있어봐. ...그럼, 요시노양은 붙임성이 있는 것 치고는 클래스메이트 같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거야?'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는 거다. 그건 사치코님으로 충분히 배웠잖아.
"그러니까 유미양은 귀중한 존재야"
요시노양은 뺨을 괴고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천사 같은 미소 뒤에서 유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걸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시노, 기다렸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작은 침묵을 메우는 듯, 레이님이 기운차게 교실로 들어왔다.
"어라, 유미쨩이랑 같이 있었어?"
"아, 저는 잠깐 지나가다 들렀을 뿐이라서. 금방 갈 거예요"
왠지 있기가 뭐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님이 없는 곳에서 레이님 이야기를 하고 있던 탓인지, 연인들 사이를 훼방 놓는 듯한 기분이 된 탓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유미양. 뭐야, 신경 써 주는 거야? 그럴 필요없는데"
"맞아. 우리는 어제오늘 자매가 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거나 하지 않아"
요시노양과 레이님은 똑같이 건조한 투로 말했다.
"끄, 끈적끈적..."
레이님의 말투로는, 어제오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갓 만들어진 나와 사치코님이 마치 항상 달라붙어 있는 것 같잖아.
"끈적끈적이라니?"
요시노양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본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야단친다거나, 그다지 흐트러지지도 않은 타이를 고쳐준다거나, 사탕을 몰래 쥐어 준다거나. 동생이 생긴 뒤로, 사치코 꽤 즐거운 것 같아"
"저, 저기. 레이님"
여보세요, 하고 끼어들고 싶어진다.
사탕은 그렇다 쳐도, 야단친다거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걸 체크한다거나 하는 건 일반적으로 끈적끈적이라고 하지 않는 거 아닐까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레이님과 요시노양이지만 역시 그런 면은 사촌자매. 이상한 부분에 가치를 둔다거나 하는 부분이 꼭 닮았다.
"자, 그럼 갈까"
레이님이 요시노양의 가방을 가볍게 들었다.
"유미쨩, 장미의 관에 갈 거면 언니 분들께 잘 이야기해 줘. 시합이 끝날 때까지 어리광 피워서 죄송합니다, 하고"
"아, 예"
"안녕히, 유미양. 이야기 들어 줘서 후련해졌어."
요시노양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 말한 후, 레이님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나갔다. 하지만 유미로선 뭐가 후련해진 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요시노양, 뭔가 꾸미고 있는 거야?"
무심코 불러 세우자, 요시노양은 조용히 돌아본 후 한 박자 늦게 '왜?' 라고 물었다.
"왜, 라니?"
레이님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참이었다. 요시노양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글쎄 어떨까' 하는 애매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글쎄 어떨까, 라니?"
뭐가, 하고 생각하다 흠칫 했다. 그건, 아마 틀림없이 먼저 유미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것이다.
"그럼... 요시노양은 역시 뭔가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른다, 라는 거야-?!"
혼자 남겨진 다른 반 교실에서, 유미는 의자에 고쳐 앉아 머리를 감쌌다.
글쎄 어떨까, 하고 말했을 때 요시노양의 눈은, 지금 생각하니 왠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뭘 할 작정인 걸까. 말리는 게 좋을까. 누군가에게 상담해야 할까.
자신이 이야기를 들어서 '후련해졌다.' 같은 말을 들으면 왠지 책임감을 느껴 버리게 된다. 하지만 인생경험도 적고, 요시노양이라는 사람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 머리로는 열심히 생각해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예측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열날 것 같아."
유미가 바라는 '평온한 생활' 까지는, 아직도 한참 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