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Jean Grenier) -침묵, 그 뒤에 오는 고독 때문에-

침묵, 그 뒤에 오는 고독 때문에

쟝 그르니에 명상 아포리즘

정명철 역

 

Jean Grenier (1898~1971)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프랑스 북부지방 브르타뉴에서 성장

1968년 국가에서 수여하는 문학대상을 받은 바 있다

<일상적 삶>, <섬>, <정통신앙에 관하여> 등의 주요 작품이 있다

그의 글은 깊고 따스한 서정, 존재와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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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어제와 다르듯이 창조는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다른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보다 못한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거의 닫힌 문 앞으로 돌아가 그 문을 두드리는 우매한 행동은 그만 두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존재로서 끝없는 삶에 대한 욕망을 준다.

 

인간은 그 정신의 빛으로 도형이나 숫자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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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랑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여기서는 어떤 비길 데 없는 힘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정확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저 가벼운 언어는 음악의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알베르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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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와 공空]

 

 

밀물과 썰물이 있는 바다

이 곳은 브르타뉴에서처럼 항상 움직이는 바다이다. 그 곳의 해안에는 한 눈으로는 다 껴안을 수도 없을 만큼 광대무변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엄청난 공허인가! 바위들, 갯벌, 물…….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밑에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거리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처음 느낀 무無의 인상이었다. 그 느낌은 바로 생존의 인상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그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 없다는 이 사실에 대하여, 바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소연昭然하게 그 생각을 되씹어 보아야만 한다.

 

안개 속에다 대고 그 문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인생은 방랑과 피곤이 극도에 달해서야 비로소 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얼마나 하찮은 일에 매달리며 그 문 앞에서 많은 불안의 밤을 보냈던가? 마침내 어느 날 끝장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 문을 떠난 후 두 번 다시 그 장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공간의 벽을 허물어 버린 다음 시간의 벽을 허물어 버리려 할 때 이는 진보인 것이다. 내가 대자연을 그 연속성 가운데서 파악할 때 그리고 한 존재의 소멸을 슬퍼하는 대신 그 존재가 다른 존재로, 나무가 불꽃으로 변하는 것처럼 빨리 변형되는 것을 볼 때, 겨울이 여름의 무덤이 아니라 봄의 요람이라는 것을, 늙은이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는 훨씬 더 나은 것이다. 나는 꽃들이 시들어 간다고 한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꽃봉오리가 곧 이어질 것이며 이곳에 장미꽃이 없다면 다른 곳에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 즐기는 대신에 꺾어서 손에 쥐고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꽃을 보며 오로지 꽃 속에 나타나는 우주의 신비를 아무런 질문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자는 주관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려 하기 때문이며, 후자는 하나의 주체로 간주하는 주객합일의 경지에서 삶을 긍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 떠 가는 꽃들아,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아, 저녁의 희망아.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없는 사랑아…. 온갖 희망은 구름과 같이 고요히 파도 위로 흘러가는데 그것이 회상인지 또는 꿈인지…….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질 수는 없는 것인가?

나는 <명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명상에서 무無가 되고 싶다.

 

조언을 하는 사람은 있으나 행동을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은 내 곁에는 없었다.

낮과 밤의 어렴풋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어디에 이르는지 진정 알고 싶었다.

사랑이야, 이제부터 놀랄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놀라서는 안 되리라!

 

인간적인 나약함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드러나면 그것은 가치들의 혼돈을 증대시킬 뿐이다. 나는 주관성의 책임들과 객관성의 책임들 사이에서 선택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탄스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보다 낫다는 원칙 위에 세워진 행동이나 표현, 내적 삶에 관한 몇몇 제안을 하게 될 것이다.

정신의 문제들이 언제나 베일에 싸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그런데 이는 비밀들의 존재를 믿게 하는데 사실은 신비들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신비들이란 불행히도 헤아릴 수가 없다. 반면에 비밀들이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주의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신비의 감정이 없는 인간은 정신적 진보에 있어서도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보란 단지 묵설법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설은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 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해 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살아가는 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인 힘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타고난 부족함을 무슨 드높은 영혼의 소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런 비밀에 대한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하찮은 행동들을 숨기곤 한다.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사람은 스스로를 알기 위하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양심에 대한 규명은 바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을 돌이켜보는 내면의 거울이 없다면

불행이라는 감정도, 생로병사에서 오는 모든 번뇌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혼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절대에 대한 욕망에 의해 패어진 심연은 뭔가 인간을 초월하는 것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 할 것이다.

삶이란, 그 영역에서의 관계가 나쁘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간이 필사적으로 의식주를 손에 넣기 위해 동물적인 무분별한 행동을 해 온 사실을 보아 왔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생명을 부지해 나가는가? 이는 인간이 동물 이상으로 제기하지 않는 물음이며 자신 또한 동물이기에 인간은, 태어났으므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저마다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그에 따른 일을 해야 할 운명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적인 욕망만을 실현코자 할 뿐만 아니라, 이처럼 의식주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동물에게는 필요없는) 초과 노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이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로하여 몸을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동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충실하고 훨씬 흥미로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노력은 생존의 노력에 비해 왜 부차적인 단계에 머물고 마는가? 우리가 이행해야 할 숙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 끝에 이르기만 하면 되지 그 끝이 목적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숙명 뿐이 아니라 사명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명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낙천주의자와 염세주의자의 두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우리에게는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생을 마치는 순간에 우리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하고 나서 단지 <나는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역할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행할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수동적인 상태에 만족할 수가 없다. 선택이란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가장 좋은 것과 함께 가장 나쁜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온 우리의 생生은 처참하다.

가장 좋은 것, 그것은 가장 강렬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으며 어떠한 존재도 다른 존재로 대치될 수 없다.

 

초연히 우주를 응시하다 보면 얻게 되는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도취의 순간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사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구속하는 보편적 사명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위는 자기 고유의 본성을 완전하게 실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외적인 성과, 즉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방향이다. 더군다나 내적 필연에서 자신 속에 새겨진 것을 표현하고자 창조하는 순간에 나의 행위가 본성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 수 있으며 무한히 자유로운 생각들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는 고뇌도 희망도 갖지 않게 되고, 현재 모습 그대로의 내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은 보통 악의보다는 오히려 허영에서 욕을 한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찾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내 자신의 사명도 찾게 된다.

어린 아이는 항상 자기 주위에 보이는 사물들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물어보는데, 젓가락에 관한 물음이라면 대답은 수월하겠지만 바다나 별 등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관한 물음이라면 우리의 대답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대답은 성경에서처럼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도구의 모습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인간 자신이 그보다 강력한 존재에, 즉 자연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살려는 의지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살려는 의지가 충만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부족한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엄밀히 보아 인간은 태어나면서 아무런 보장도 받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악과 선은 같은 시험관에 붙어 있는 이름표 속의 두 가지 이름이므로 악을 원치 않고 선만을 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어떤 꿈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은 그 꿈의 헛됨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자신만의 특별한 운명으로 비밀스럽게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같은 비밀의 감정이 마치 끈질기고 숨막히는 어떤 냄새, 심지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아도 떠나지 않는 냄새와 같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고자 한다. 그 때 하나의 사물은 아름답게 비밀을 예찬한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비밀스러우면서 은밀한 어떤 아름다움을 몹시 원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빛바랜 겨울과 같이 더 이상 걸작품들이 발산하는 장엄한 힘을 반영하지 않게 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떤 얼굴 앞에서는 지나치게 빨리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이른바 새로운 삶이다.

 

명상 없는 진실은 없다. 나는 한낮에 죽은 자의 얼굴인 조각된 모습들과 고대 미술품인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 사이들을 누비고 다녔다. 그 때 진정한 태양은 유리창을 통해서 무심코 바라보이는 태양이 아니다. 그것은 어렴풋한,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의 여신이다. 그 자체가 꽃이고, 태양빛은 한낮의 그런 시간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윽히 깊고 한적한 명상의 세계에 다가와 눈앞에서 그 눈부신 영광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내가 부재함을 알린다. 어깨 위로 기대어 오는 머리처럼 존재의 가벼운 움직임, 그러면 어느새 세계는 홀연히 사라지고 다른 세계가 버팀대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내가 나의 가장 깊숙한 것 위로 기울어지면 나는 존재하기를 그치며 이제 내가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남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나의 사고思考와 욕망들은 그것들을 불어일으키는 그이에 비한다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자기만 알고 있는 자기과실을 괴로움 없이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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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사람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만사 어느 것과도 다를 바 없는 높이에 두고 생각하면 세상이 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삶은 자질구레한 일들에 혐오감을 느낄 소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살아가노라면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바로 이 삶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무심無心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아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음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아본다.

 

고독이란 느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느낌 자체가 일상적이 되어 다시는 고독감이라 이름 붙일 수 없게 된다. 사람은 고독하지 않기 위해서 고독하다. 고독은 근본적인 것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을 선택할 수도 없으며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 성자,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창조자들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고독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오히려 고독을 창안하고, 고독의 공간을 자유로 바꾼다. 인간성이 풍부할 때는 고독 때문에 권태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을 선택한 사람은 그 선택의 시간을 초월한 도취감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한순간의 도취일 뿐 잠시 후 기산의 균형이 깨지고 소란스러움의 상황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일수록 고독을 즐기기 위하여 고독을 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고독을 동반해야 한다. 근본적인 고독은 사물로서의 고독이다.

바로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부른다.

 

때로 고독은 파멸이고 공백이다.

삶이 황량했던 날의 공허 때문에, 긴장된 고요 때문에,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 때문에 그리고 심장 속에서 존재하기를 멈추고, 고독은 우리가 아래로 떨어지기를 요구한다.

 

인간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특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된다.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내 불안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이는 바로 새로운 날이 태어나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 밤이 영원한 것이라 믿으며 그 어둠 속에 지체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반올림 도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것이 반내림 레와 그토록 가깝다는 것을, 또 음정의 미소한 간격이 시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러한 즉각적인 미래에 대한 사상은 희망이라 불리는 것과 비록 겉보기에는 비슷하나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전체성과 필연성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쾌락이나 오락, 최면제 같은 망각을 위한 인위적 형태들이나 속임수의 형태들에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로 인한 우울증은 그것이 주는 흥분만큼이나 깊고 심각한 것이며 의식은 평온을 되찾기보다는 단지 더 동요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나는 내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존재가 내 외부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단지 하나의 영상에 불과하다면?

인식은 하나의 공백을 형성하는데, 이 공백은 인식으로 하여금 기지를 넘어서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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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행동의 근본 조건은 바로 자유이다. 최고의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와 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더욱 우리들을 행복하게 한다.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유가 태어나는 존재기반(가치체계)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부정하며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자유를 <가치체계까지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자유>라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행동은 그들의 만든 자유의 정의 속에 구속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되새기지만 이런 주장 뒤에 갑자기 나타나는 공허로 인하여 그들은 다시 종교나 혁명이란 신앙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초월자나 혹은 실존주의자들은 신의 존재를 통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자유로움은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즉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였기 때문에 그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면 할 수록 오히려 반대로 그들 스스로를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써 올라선 높은 곳에 계속 머물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다시 아래로 떨어져야만 한다는 절망감에 항상 불안해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무無의 공간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이다.

우리가 삶에 그토록이나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몸이 마련하곤 하는 그 예기치 않은 놀라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롭다고 느끼면서도 그와 동시에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인간조건에 대해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의 본질은 모르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방향을 향해 애써 나아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최선의 것을 추구한 것이라 해도 차선의 것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여러 꽃 중에서 하와이 섬의 난초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꽃이 노란 마가렛과 수선화와 마리우 호의 양귀비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택일한다는 것은 그와는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일이 전제된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못하는 까닭은 대부분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자신 스스로의 불성실 때문이다.

 

빛은 아직 짙어지지 않았다.

빛의 발자취가 당신의 뒤에서 작고 희미하게 즐거운 소리를 내며 다시 닫힌다.

 

사람들은 근원에 가까이 있음을, 솟구치는 맑은 물에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영원한 새로움이고 마치 새벽이 꽃 피듯 열리는 것과 같다. 이윽고 좀더 짙은 빛이 그 돛을 펼칠 것이다. 실제로 셀 수 없이 많은 소란으로 이루어진, 분명히 드러나는 정오의 부동성 속에서 마침내 자리 잡을 그러한 한 줄기 빛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인가! 술잔 속에 담긴 한 송이 꽃처럼 태양이 하루종일 휴식을 취하는 팔레르모의 금빛 소라고둥을 나는 꿈꾼다. 하지만 그 곳에서의 빛은 안달루시아와 카나스털 사이에 있는 그 거대한 공간 속에서처럼 빛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묶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구속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는 것을 망설이고 자신들의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에 가입하는 것을 주저했던가! 끔찍한 하나의 구속.

<나는 싫다><나는 괴롭다>라는 말을 우리는 언제나 순수정신과 동일하게 보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 의지가 무엇인지 확실성을 붙들지 못하고 삶의 문제 앞에서 공空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그 의지를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행복이란 주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은 결코 주어진 구속을 인정하거나 혹은 거부하는 따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은 이러한 주어진 구속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새롭고 또다른 모습을 창조해 내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존재양식을 선택하는 문제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것이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는 복종해야 하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계급사회나 신분에 얽매인 사회규범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자연의 이치 등을 어떤 제한된 생각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또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편의대로 생각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개념들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즉 개념적이고 종교적인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우리를 구속시킬 어떤 절대적인 힘과 권위와 개념들이 전혀 없으며 풀려버린 것일까?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각자의 자유로움을 도취하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즉 인간 자신을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결과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궁극 목표, 즉 길에 접어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구속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대상에 신의 이름을 붙인다거나, 또 현세적인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가 바라는 대상에 신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낡은 덮개로 새로운 상품을 싸려는 거짓이며 말장난에 불과하다. 신을 향한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실현을 추구하는 순간에,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가 신이라는 애매한 존재와 부딪히는 상황에서 생겨난다. 현대인은 사람들이 만든 신이라는 전형에 의해서 구속받지 않는다. 대신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이랑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이제 신들은 존재하지 않고,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홀로 존재해 온 독자적인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알지 못하여 홀로 있음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다. 자연 속에 고립된 채 문틈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만이 그 존립을 알려주는 집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미래 앞에서 어리둥절한 채 절실히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다른 사상에 의지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자신의 독창성에 필요한 인내만을 보탬으로써 홀로 자신의 숙명을 애써 완성시킨 사람은 흔치 않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숙명에 복종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운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목적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에는 회의적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이 그 목적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할 때에는 종교적이 된다. 일관된 가치기준이 없는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며 반면 무한히 생명을 창조하는 자연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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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사람은 왜 자신이 죽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또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흔히 가장 좋다는 방식으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다시금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는 도착 지점으로 향한다.

무참하게도 강물결은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쯤에서 사라진다.

우리도 영원히 그 공空의 문 앞에서 쓸쓸한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죽는다.

무엇이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오직 그 문에는……

아무런 출구도 없었다. 설사 그 상태는 죽음의 끝일지라도…….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겪게 되는 하나의 시련이며 상상으로 우리는 그 시련을 겪고 있다. 거기에다 죽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돌발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기다림의 대상뿐만 아니라 놀라움의 대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이자. 한편 죽음의 경우 나는 그것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보편적이며 불확정적인 하나의 진리일 뿐이다.

죽음은 그 죽음의 위험이 자신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날 때 두려움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고뇌를, 달리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공포를 유발시킨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관여하지 않는데, 이는 산 자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이 우주의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면, 즉 인간들이 신들의 눈이라고 항상 가정해 왔던 그 눈으로 본다면 우리는 거기서 불행도 행복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왜 그런가? 전체를 통찰한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 하여금 이 전체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기를, 또 내가 그 속에 합체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이렇게 될 때 바로 그 진리에 도달한 자들이 누리는 마음의 위안을 마침내 맛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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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 선과 악의 대립관계는 어떤 물리적 영역에서와 도덕적 영역에서도 악이 선과의 상관관계 속에 있으며, 또 나쁘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즉 괴로워하고 괴롭히는 것은 형이상학적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것이고 우선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제기된다 하더라도 여름날 아침의 안개처럼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바로 이것이 이 세계, 즉 선이라고 불리는 것이 악이라 불리는 것과 불가분의 결합을 맺고 있는 이 세계의 진실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유일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를 그대로 두고서도 그 관점을 바꾸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인가?

 

개인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사실 나의 존재란 한 요인의 전이가 다른 요인의 전이를 유도하게 될 충만하고도 일관성 있는 세계, 요컨대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고 상호 대체가 가능하게 될 세계 속의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있는 그저 하나의 존재는 아니다. 이 존재의 각각은 그 자체로서 그 자신과 직면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 존재가 자신에게 현기증을 일으키는 허공을 옆에 나란히 끼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추락하게 되면 그 존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장이다.

 

나는 무엇인가? 이 우주로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로선 전부이다.

 

 

미래는, 상상력을 매혹하고 또 우리의 행복이나 타인들의 행복을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을 향해 언제나 더 멀리 나아가도록 하는 그 아득한 지평선으로 하여 더욱더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수많은 수정이나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상적인 역사의 한 철학은, 제어할 수 없는 한 흐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더 좋음에 대한 의지에 의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 좋음은 과거 속에, 마치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처럼 숨을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현재 속에 살고 있는 명상의 종교인들은 행복할지어다!

 

유혹의 본질은 더 나음 속에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대충매체의 광고가 이브를 유혹한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더 나음은 또한 인간의 나약함에 따라, 그의 무지와 자만심에 의해 진실의 적이 된다.

 

하루살이에게도 가장 오랜 삶을 사는, 완벽하게 채워진 하루가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개체로서의 우리의 바램과는 다른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연기하도록 강요되는 코미디를 거부하거나 그것에 감탄하는 두 가지 태도만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총제적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만든 가치는 한 순간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돌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평가될 수도 있다. 이처럼 가치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등 우리의 독특한 의식은 정신 현상학의 원리가 될 수 있으며, 이 가치평가 능력은 다른 존재들을 무시한 어느 한 개인의 <직관>을 전제로 한다.

 

오로지 인간적인 견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는 태도는 매우 과격한 것이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 보면 결국 인간은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의 숙명을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인간으로서 또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물체의 종으로서 보편적 사명을 떠맡아야만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에게만 매달리는 경우에 개인이 미리 정해진 목표를 갖고 있지 않듯이 인간은 인간적 가치를 창조할 뿐이며, 그 앞에는 추구해야 할 목표가 미리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목표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개인은 수많은 상황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할 필요 없이 <자신>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은 여러 관념을 신봉말 필요 없이 자신의 진실을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육체보다는 정신에 있어서 한층 안일을 탐내고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벳의 승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바람인가, 깃발인가?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기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밖에는 별 흥미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늘 적당한 순간에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만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왜냐면 그런 것은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나 슬프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들을 서로 구별지어 주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행동이다. 우리는 언제나 도박에서 돈을 따기만 바랄 뿐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터무니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욕망이지 도박 자체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언제라도 이 도박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은 더욱더 터무니없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인간의 염원도 생명의 멈춤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조건에서 다음의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는 단 한 번 이 세계 속에서 살게 되고, 우리의 생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기에 너무도 소중하지만 우리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커다란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예술도 과학도 생의 쾌락도 부유함도 모두 죽음이 파 놓은 이 무분별한 구멍을 감추기에는 무기력할 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절대적 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한다. 그런데 환상이란 너무 깨뜨려 버려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 환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나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멀리 있는 것에의 환상 등이 그것이다. 가장 먼 것─공간적으로─은 오늘날 지구 전체가 다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 유혹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더 멀리! 라는 것이 아직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여행을 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본능을 쫓아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외적 요인에 구속당하지 않고 자신 내부의 힘에 의하여 자유로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 내부에 존재하는 과잉의지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해진다.

 

우리는 의지적인 사고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미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자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에 현재의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자유도 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로움이란 현기증으로 시작해서 도취감으로 끝난다.

우리는 어떤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땅 위에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죽음이란 것으로 우리 삶은 종말을, 아니면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를─그것이 존재한다면─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선 그 동안이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대양의 물방울처럼 물질의 덩어리 속에 함몰되지 못하게 하는, 잠시도 잠들지 않는 이 신비로운 <나>라는 의식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동안을 살아내야 하며 가능하다면 여기에 어떤 의미를 찾아내서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천지창조 이래의 시간 속에서, 우주의 생성으로부터 그 종말까지 천문학이 펼쳐 놓은 수억 년의 지평선상에서, 그 현기증 나는 해석 속에서 우리는 백 년이 못 되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그들을 살찌게 하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하다.

짐승들은 행복이다. 세계가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제가 행동하게 된 원인인 환상을 깨뜨리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사실은 보수주의자이다. 왜냐하면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항은 지키고,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부당한 일에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이 자유인가를 진정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치 못할 때 과잉의지가 된다.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것보다, 마음대로 한 결정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없지는 않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그 이유는 자유로움이란 항상 어떤 상황에서라는 조건을 달 수밖에 없기에, 자유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록 그만큼 더 상황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상황에 구속되는 조건 속에서 자유는 한편으로는 가치의 부재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의 필요성으로 인해 빠져나갈 방도도 없이 꼼짝할 수 없게 된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하고 모든 사물과 현상에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하여 마침내 그 알 수 없는 가치에 얽매이고 있다.

존재의 자유는 어떤 가치와 상황으로부터 전적으로 해방되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자유 그 자체를 모든 가치의 기본으로 간주해야 하고 자유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초월적 가치, 즉 신의 개념과 관계하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내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시간 못지않게 내가 죽은 이후에도 있을 그 막대한 시간. 햇볕이 잘 쪼여드는 이 가득한 시간이 내게 기대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지혜는 우리의 재산처럼 운명의 손에 맡겨진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만사가 신비로운 수수께끼다.

 

어떠한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받침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류에게 정신적 받침점이 되어 왔던 신과 사회 규범과 자연을 이제 현대인은 받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현대인은 규정지을 수 없는 막연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철저하게 허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진정으로 정의롭고 합리적인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은 현실을 뒷받침해 주고 안내해 주는 개념이나 사상을 필요로 한다는 양식에 호소하고, 그렇게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나가지만 꼭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결국은 받침점에 대해서 순응하는 것은 공허한 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일 무無의 상태에서의 행동을 일종의 반항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 개인적인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반항은 가장 역겨운 순응주의가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고 무의 상태에서 출발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다 보면 기존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가치 중 가장 확고한 것만을 재확인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반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오히려 무정부주의자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적 신비주의─아레오파키타의 (가짜)「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서부터「미지의 구름」의 익명의 저자와, 수도승 에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신의 개념은 베다Veda나 신플라톤파 철학에 표현된 생각을 결합시키면서 <신성> 즉 무물無物인, 유일자唯一者가 되는 경향과 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자신 속에 있는 신적神的 특성의 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고 있다. 즉 이것은 끊임없고 능동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이다. 내 자신 속에서, 타인과 사이에서, 인류 속에서, 완전히 인간적으로 되기 위한 우리의 능력 속에서 나의 믿음은 역시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한 주관적인 증거로 인해 확신하고 있는 진리의 확실성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개념이나 사상들은 무無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 완전한 허무 속에서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주관적 능력에 의해서 무에 반항을 하고 있는 끊임없는 노력일 것이다.

*5세기경의 신비주의적 저작, 1세기에 실재한 동명의 인물과 저작에 혼동하기 때문에 붙인 명칭.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참다운 공감이 경험되는 곳이다. 마음 속에 느껴지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동정이 느껴지는 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로 인하여 초월적인 힘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나아갈 길과 자신이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범위를 선택해야 하며, 본질적으로 확실한 상태에서 주어진 모든 운명을 넘어서 자신의 가치와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게다가 초월 행위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사람들은 ……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할 뿐이다. 자신에 의한 자신의 창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초를 확립하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얻게 된 확신과 그가 창조한 작품에 대해 책임져야만 한다.

초월행위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라면 이 초월행위는 그것을 이루는 사람이 생각한 대로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또한 빛이 밝혀진 물체 속이 아니라 그 물체를 밝히는 등잔불 속에 있듯이 초월적 실체란 주체가 생각하는 것처럼 주체 너머에, 주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체 속에 있다는 사실이 주체의 창조능력을 통해 드러난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름아닌 자신의 내부에 초월적 존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초월적 행위를 완수할 수 있게 된다.

 

완성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완성된 사명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증적 정신으로) 인간을 철저하게 분석하다 보면 인간은 실패작인 동물이요, 자신이 동물인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인 까닭에 <미완성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상반되는 이중적 사명을 지니게 되는데, 그 첫 번째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이상적인 것이다.

절대라는 존재는 숨은 채로 이 세계라는 병풍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그 존재를 볼 수는 없지만, 사람들 앞에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모든 준비를 하는 파티의 집주인처럼 절대의 존재는 우리 눈 앞에 보이는 현시顯示보다는 보이지 않는 암시暗示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숙명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본래부터 부여받은 본성에 의해 자신의 숙명이 <만들어지게끔 내맡기는 것>이다.

 

역사상 어떠한 가치체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체계가 과연 존재할까?

도道가 이 같은 사상의 유일한 것이다. 무위는 이 사상의 실천 방법이고 현실에 대한 태도를 논하는 철학의 행위로서 그 사상체계를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이 된다.

인생이 환상임을 깨달은 사람을 현자라고 부른다. 그는 명상으로 자신의 도道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세계와 모든 접촉을 멀리함으로써 힘(정열)의 사용을 꺼려하며, 그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여행하듯 산책을 즐기며 홀로 지내길 좋아한다. 타인의 삶을 불구경처럼 바라보며 비몽사몽의 현실적인 것들의 모습에 아무런 마음도 두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며 자신의 정기精氣를 사용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쪽은 그 전쟁을 가장 오래까지 견디는 사람에게 돌아가듯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 사람이 헛되이 노쇠해 가는 동안에도 현자는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적게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속하여 일한다. 그리고 그는 권위적인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선택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면 가장 오래된 것을 택한다. 현자는 남에게 가장 적게 간섭당하고 조금도 구속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운명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지만, 그 하늘과 땅이 자연의 섭리가 언제까지라도 지속되는 한, 도道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섭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水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순리에 따라 흐르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지도 않으며 모든 존재에게 고루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하늘, 땅, 물은 어떠한 운명에 의해서라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운명을 극복하거나 운명을 정복하여 얻은 위대함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자유로움이란 무엇보다 힘을 얻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타나지 않고 안으로 축적되는 자연의 창조력과 같은 힘을 얻는 것이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물을 휘저어도 물은 언제나 거울처럼 잔잔하고 투명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인간은 자연에 복종할 때만 자연에 명령할 수 있다. 자연에 따르는 사람은 만물간에 존재하는 친화력을 발견하고 사물과 조화를 이루려고 애쓰는데, 이는 사물을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더불어서 목표道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따른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고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만이 상책이며, 따라서 가장 좋은 정신이란 무기력한 정신이라는 논리이다. 텅 비어 있는 상태, 그래서 무엇인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그 현재의 순간을 지속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파도는 뒤에 따라오는 파도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삼키고 있다.

유일한 행복은 이 땅에서의 행복이며, 유일한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이다.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저녁, 그는 내가 다가가는 발소리도 못 들은 채 자기 집 정원 깊숙한 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외투로 몸을 감싸고 버드나무 의자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둠이 내렸다.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한 지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층 창문께에는 희미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왔던 자취도 보이지 않고 되돌아 나왔다.

참으로 그 날은 암담했다. 돌 위에 새겨진 비문 속의 그 유일한 희망의 말마저 이제 금방이라도 나를 절망하게 만들 듯한 내 주위의 모든 정경. 그것들은 절망 못지 않게 끔찍한 모습이다. 아니, 절망이라는 말조차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 보이는 그 정경을 나는 현실이라고 믿을 순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 순간, 그 무엇을 <믿을 수> 있기에는 육체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정신에게 그 무너질 듯한 정경이 어떤 환상을 일으켰던 것일까?

 

우리는 어느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명예를 올려 세운다.

 

사람은 악덕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경멸하는 일이 없다.

오직 미덕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경멸한다.

 

사람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필연성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믿음의 불가능성이 아닐까? 우리는 관습이라는 해결방식을 배제해야 한다. 관습은 믿음의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필연성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못한다.

원대한 계획을 품은 성숙한 인간은 관습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 계획들을 실현시키려면 자신의 온 정력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한 부분을 축소시켜 버린다.

 

인간적 가치는 지고의 절대적 가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가치도 절대적이지 않으면, 또 다른 가치로 그것을 대치할 수도 없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머리 속에 새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법칙에 맡기는 행위를 할 때이다.

우리가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이고 오랫동안 내려온 방법은 운명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운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정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전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운>이다.

 

각 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시대와 직업과 환경에 따라서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를 위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것들이 실현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자기 이웃과 국가를 진실의 길로 이끌어 갈 사상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러한 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잡아야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누구나 무관심이라는 최초의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 걸맞는 방향만을 따른다면 사회로서도 유익한 일이요 개인으로서도 마음 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가 공정하게 계층간의 질서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세계가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지 구경거리가 되는 순간 뿐일 것이다. 또한 이 세계의 정당함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학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아닌 모습 즉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제외하고 난 후의 모습은 아무런 실체도 갖지 않는 빈 껍데기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고여 있는 늪의 물 속이나 들판을 적시는 옅은 안개 속에 하늘거리는 꽃처럼 우리 모두가 자유롭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공존>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한 우리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본연의 모습을 갖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모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야만 하는 비극적인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또 우리는 무엇이며 무엇이 될까?

 

자유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버리고 극도로 간소화시키면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발견할 것이다.

개인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무의지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따를 때만이, 즉 애써 자유를 구하지 않을 때만이 조화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언제나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그의 자유의지는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직책을 수행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모든 결정을 전적으로 우연에 맡길 때만이 자유로운 것처럼, 내가 이 자유를 사용하지 않을 때만이 귀중한 자유를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애써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불쾌하다. 현 사회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그리고 자신의 선배와 환경과 야망에 이끌려 어떤 집단에 가입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의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서 자유로움이 생겨난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단지 본능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바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기존의 사회질서를 거부하거나 혹은 사회질서에 따르면서 우리 자신이 원하는 세계, 즉 완전한 자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확고부동한 특성과 일률적인 성격을 가진 훌륭한 인간의 전형을 만들어 내었다. 그 전형의 모범에서 이 시대에는 다른 많은 전형들이 분류되고 규정되고 정착되었다. 인간의 본성 중 필요한 부분만을 종합하여 만든 인간의 전형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의 모범이 되므로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여 바로 우리가 보게 되고 느끼며 모방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러한 전형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구속된 상태에서 선택할 뿐이다.

 

 

<시詩와 쾌락, 그것은 똑같은 것이다.> 아니다. 시는 오랫동안 두근거리는 그런 쾌락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듯이 자신의 쾌락, 오로지 자신만의 쾌락을 찾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하는가. 성자聖者와 영웅은 자신의 쾌락만을 사랑할 뿐이다.

 

희열은 비극성의 결정인 것이다. 어떤 정열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속에는 엄청난 침묵이 찾아든다. 지금은 삶이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에 매인 채 정지하고 있다. 무엇에? 우리는 모른다. 그 침묵 속에는 무엇인가 가득 차 있다. 그 침묵은 소리나 감동의 부재가 아니다. 이 같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존재 속에서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대만 골목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마치 존재의 모든 틈은 다 막혔다는 듯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행복의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감정을 가지고서 고뇌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하는 것이다.

 

가장 잔혹한 처벌이란 바로 그 죄를 다시 재현시키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야말로 고발행위인 것이다.

 

아무런 감출 것이 없을 때 진정 자기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법이다.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하고 싶으면 그럴수록 더욱 비밀얘기는 솔직하고 소상한 것이 좋다. 비밀스러운 삶, 그런 삶은 우리들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떤 행동의 방식을 묘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나는 내 자신의 투영된 모습에 만족해 왔다.

그것은 나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된다.

 

 

여기에서 동양은 얼마나 먼 곳에 있어 왔던가! 동양은 순수한 존재를 우주 공간에서 일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사라질 전쟁을 시작하는 순간, 아르쥬나Arjena는 연민이 엄습해 옴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그가 계급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수치라고 하며 그의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해서 그에게 최후의 진리를 계시한다. <현자들은 죽고 사는 것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와 대지의 모든 왕들처럼 언제나 존재해 왔노라. 우리는 결코 삶을 멈추지 않으리니, 탄생도 없고 죽음도 또한 없으리. 그 누구도 삶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삶을 끝내지 않으리라. 육신이 쓰러진다 해도 영혼은 영원히 쓰러지지 않으리라. 불멸의 영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며 그 또한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새 옷을 입으려고 자신의 옷을 벗듯이 영혼도 이와 같이 쇠약해진 육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다른 육신과 결합하도다.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고 물이 그를 적시지 못하고 바람이 그를 메마르게 하지 못하리라 … 칼도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어떤 감각으로도 감지될 수 없는 그 영혼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고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도다. 영혼은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대는 어떤 연민도 없으리라!>

동양은 다만 변화를 피하고 불변의 것에 고정되기를 꿈꾸고 있는 장소이다.

 

우리는 어떠한 각도에서 인간의 사명에 근본이 될 영원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이 가치체계가 객관성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되어 어느 한 순간이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가치체계든지 의문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객관적 가치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사회나 집단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는 경우, 물론 맹목적으로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명에 대해 모든 구성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적인 방법, 즉 맹목적인 추종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가치체계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이 가치체계를 따르기만 하면 항상 진실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가치기준이란 대체 무엇일까?

더군다나 모든 가치체계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모두 똑같이 신성하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서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국위나 계급의 패권, 공동체 내의 신성함, 또는 영웅주의와 같은 개인의 이상이 모두 이러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가장 열렬한 혁명가들에게서조차 이러한 상반되는 요소들이 뒤섞인 개념에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사상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좋은 결과나 좋지 않은 결과 중 어떠한 결과를 줄 것인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이 때문에 전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또 없어 본 적이 없는 주류와 비주류의 사회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어떠한 제약도 없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느낀다. 물론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역할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통념이 있다.

 

모든 신비론자들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미 말했다. 모든 인간들은 평화를 희구하지만 언제나 전쟁이 지배하고 있다. 사실상 몇몇이 온갖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평화를 고집할 경우, 조금 덜 양심적인 다른 이들이 그들을 짓밟기 위해서 이를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자들의 너그러움이란 악이 영원히 지속되게 내버려두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러한 상황이란 참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언어도단이므로 전자들이 개입하여 전쟁을 하게 된다. 그 때 그들 역시 악을 주도하게 되면 이는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한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것, 이는 우선 그 나라에게 전쟁을 거는 것이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다는 것은 허구적인 직선 위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는 것

다시금 바람이 불어 와도 우리는 도착 지점으로 향한다.

 

 

 

 

 

어느 날 오후 해질 무렵 나는 루르마랭 근처를 돌아다녔다. 9월의 짧은 노을빛이 짙은 어둠에 묻혀가고, 높이 뻗은 나무들도 어둠에 묻혀 차츰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되자 듀랑스 강은 유난히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잘 조화된 하나의 존재, 저절로 창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만일 이것이 위안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이 존재들은 분명히 환상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 멈추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빠져 있던 이 어둠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해야 할 환상을 믿고 지금 이 순간 그 나름대로 진실을 간직한다. 삶은 그가 만난 장소에서 경험하는 행위이다. 바로 자신의 기억 속에 갖고 있다. 자신이 그 기억을 방출할 때 삶은 자신의 심적 상태를 통해서 명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관능적인 짙은 밤이 오더라도 그 짧은 오후의 노을빛을 영원히 선택할 것이다.

내 주위를 에워싼 침묵들은 하나씩 하나씩 더해져 갔다. 집의 침묵, 들의 침묵, 작은 도시의 침묵 그리고 닫혀 버린 마음의 문, 나는 여러 겹으로 싸인 솜덩어리 속에서 숨이 막혔다. 그것을 걷어내고 싶다.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 가는 푸른 바다가 나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켰다. 그 존재가 내게 착각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 착각도 덜 착각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 준다. 매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나가도 속수무책이지만 저 혼자라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은밀하게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항상 어디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존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른 존재는 단순한 정신적 애착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한 번도 위험 지역에 이르러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용기를 말할 자격이 없다.

 

대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잔인성의 위장이란 참으로 놀랍다. 거기서 인간은 자신보다 나은 자들 앞에서는 기면서 그와 동등한 자들에겐 질투를 하고 열등한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군다. 그러나 말로는 아름다운 영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자기 스스로 그런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선한 것이 타인에게는 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차지될 수 없다는 것을, 즉 결론적으로 그가 타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취할 수 있는 한 빈자리처럼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든 간에 유배자이다. 그를 위해 버려진 땅도 약속된 땅도 없이 유배되어 있다. 격리되어 있는 사실만으로 족하다. 그런데 이 격리란 우리가 불행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한 상태의 근원을 이룬다. 그것은 부재이며 결핍이며 무無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어떠한 흠집도 그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의 순수성을 갖고 그것과 마주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악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그것은 악이 아니라 기껏해야 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불편 혹은 하나의 내적 분열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것이란 오직 선과 악을 뛰어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은 부동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그것은 언제나 활동하고 있으며 모순 속에 있다. 바로 이 불의로 생겨난 혼합이 악이라는 불행을 낳고 그 고통이 아닌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간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 순간은 영원으로 가는 관문이다.

그러나 무념무상의 신비론자들이 체험해 온 이 시간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므로 이 황홀한 순간에 영원히 안주할 수만은 없다.

 

다른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실을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실을 얻기 위해 하나의 고통을 원해야 할 때가 있다. 마치 과적된 선박에서 태풍이 일면 양羊 상인은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의 귀중한 가축들을 갑판 너머로 던져 버린다. 인간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기쁨을 얻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절대를 생각할 때는 그 모든 범주 따위가 우리들에게는 불필요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인식은 값있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노라면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절대를 믿느냐 아니면 절대에 도달할 수 없으니 이 세계의 현실만을 쫓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 세계로 갈 수 있고 신神을 통해서만 신神에게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미천하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겁을 먹은 짐승들이 몸을 숨긴다. 그들이 몸을 숨기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삶은 분명 내면적으로 약한 데가 있다는 증거라고 여겨진다. 거기에는 심지어 업신여김을 당하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구까지 있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미천한 존재가 되고자 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하고 정신병원의 대기실을 가득 메우는 이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망이 결핍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은 작은 구실만 있어도 자신을 비하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런 치욕에서 그는 씁쓸한 쾌감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슬픈 일을 유쾌한 것으로 여기고 유쾌한 일을 슬프게 여긴다. 규칙 따위와는 상관없는 활동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내고 규칙이 정해진 활동에는 규칙을 없애버린다. 가면을 벗어 팽개친다. 그 가면 대신에 다른 가면을 쓴다. 나중 것이나 먼저 것이나 매한가지이고 먼저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중 것도 중요하다. 작은 일도 큰 일 못지 않게 화급한 것이다. 잃어버릴 일 분의 시간도 없고 찾아야 할 일 분의 시간도 없다. 모두가 다 잘 해결되었고 모두가 다 망쳐졌다. 진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이런 감정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시니시즘Cynicism에 이른다. 그러나 시니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참으로 시니컬한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총명한 것은 아니다. 사실 진지함, 의젓함, 체통, 소유의 감정이 그러한 몰이성적인 멸시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방벽의 구실을 해 준다.

 

 

햇빛이 가득 내리쪼이는 풍경을 보고 사람들은 어찌하여 상쾌한 풍경이라 말하는가? 태양은 인간의 내면을 텅 비워 버리며, 생명 있는 존재는 저 자신의 모습과─아무런 가식도 없이─대면하게 된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구름과 안개와 바람과 비가 하늘을 가리고, 일거리니 걱정거리니 하는 따위를 구실로 인간의 부패를 은폐해 준다.

 

아름다운 것 중에는 지나치게 완성될 때보다는 미완성일 때가 더 광채를 내는 것이 있다.

 

정신은 늘 마음에 속아서 지낸다.

 

순전히 물질적인 구속 이외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이 (그 때만 해도 나는 물질적인 구속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만은 결코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내는 그 이상적인 생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위적이며 속이 텅 빈 생활로 여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항상 멋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 다음에는 멋이 덜해진다. 인간의 정신과 물질 사이에는 견디기 어려운 관계가 맺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사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 스스로 사랑한다고 자처했던 이 존재들, 그리고 내 자신과 따로 떼어 놓을 길 없었던 나를 보고 넋을 잃고 있다. 당혹스러운 어떤 필연성이 나의 조건으로부터 멀리멀리 나를 데려간다. 인간들은 남이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부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농부가 되고 왕의 아들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이 출생에 따른 자연적 우연을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어떠한 방도도 없다. 그래서 신분상의 불합리화를 이성에 의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신분을 합리화시켰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인들은 전생에 그에 합당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우리들은 우연에 의해 발생된 선택의 삶에 대해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없지만, 운명보다는 훨씬 덜 강력한 우연에 만족하며 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이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무는 무엇보다도 우리 신분상의 정형화된 모습을 펼쳐 보여야 하는 것이며 이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고유한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한 근본이 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결정함으로써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자시느이 의사나 자유를 표현한다. 그리고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선택일지라도 이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고,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힘들다. 이유는 사람이 좋은 것만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최선이란 종종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듯 최선의 것이란 없으며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똑같다고 생각할 경우 우리는 양쪽에 걸쳐 있는 애매한 상황이나 일관성 없이 번복하게 되는 경우나 예측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로써 우리는 양쪽을 다 취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협일 뿐 근본적인 선택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고 말하겠지만 모든 좌석은 다 차야만 한다. 인생의 연극은 관객은 관객으로서, 배우는 배우로서 선택된다. 좋은 좌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인생의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나, 좋은 배역을 맡지 못하고 연기해야만 하는 배우도 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 필요한가? 그것은 연극 그 자체를 위해서다. 완전히 이 편 아니면 저 편에 서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며, 우리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선택은 자신이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처럼 선택되었다는 것을 종종 마음 속으로나마 거부한다. 선택에 있어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머리 속에 새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운명에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혼자서 선택해야만 하는 고민을, 우리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행복과 함께 동시에 맛보면서 살아간다. 물고기는 자신이 날아야 하는지 뛰어야 하는지를 문제삼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새는 자신이 헤엄쳐야 하는지를 문제삼지 않듯 누구나 나름대로의 상황에 처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을 무한정 선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선택하게 되므로, 선택의 어려움은 어떤 사건이나 자신의 성격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떠한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테두리 안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로움을 절대적 자유로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본능에 따라 선택하는 사람은 자연적인 현상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행위를 하게 될 때에 나타나는 자연현상과의 단절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위적으로 자연현상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도구로 삼는 선택을 하게 될 경우에는 자연과의 단절이 심화되며, 형식적인 윤리상의 문제가 실제적 문제보다 우선하게 되어 <왜 하는가>의 윤리적 문제가 <어떻게 하는가>라는 실제 방법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신뢰의 생각은 대부분이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생긴다.

 

 

감각적 세계가 한갓 외관의 얇은 천에 지나지 않고 밤이면 우리가 찢어발기고 고통을 헛되이 걷어내려고 애쓰는 변화무쌍한 악몽의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그 베일을 다시 만들고 그 외관을 다시 건설하며 범우주적인 삶을 다시 도약시키려 한다. 외관의 건설적인 삶의 충동은 범우주적 삶의 들판 가운데서 샘물이 흐르는 삶을 주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그같은 충동이 없다면 범우주적 삶 가운데서 어디쯤에선가 사라져 버리는 샘물처럼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인 명분론에 입각하여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 체계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중국의 옛 통치자들은 생각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되면 분명히 변화 없는 안정된 사회가 될 것이지만 이것은 부조화로 이루어진 안정이요,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균형인 것이다. 이 현세계에 공정하게 계층간의 질서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세계가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지 구경거리가 되는 순간 뿐일 것이다. 또한 이 세계의 정당함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학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 결과 과학의 발달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에게서 인간본질을 추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상대적이고 일시적으로 행동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면은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이데아(신)의 붕괴로 온통 불안정한 상태이다.

 

길고 짧은 불행과 행복의 나날에 삶은 기한이 있거나 아니면 없다. 그리고 목적지도 마찬가지다. 영원의 공간으로 가야만 하는 우리는 그 쓸쓸함 때문에 특별한 깨우침도 없이 반복되는 삶을 산다. 한순간 한순간 기다리는 시간의 문은 우리를 유혹하고 돌연한 빛을 뿜어댄다. 그리고 그 문들은 덫처럼 우리를 감시한다. 자칫 잘못 걸려들면, 아니다 그 문을 조금만 건드려 보아도 그 문은 우리들을 가두어 버린다. 우리의 삶을 정지시키고, 다시 과거로 되돌려 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깨우침이여! 깨우침 없는 삶은 언제나 습관처럼 반복이 된다.

 

이웃 사람의 몰락은 친구나 적도 즐거워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미치는 힘은, 자기가 자기에게 미치는 힘보다 크다.

 

 

때로 독毒도 약이 될 수 있고, 고통이 성숙의 기본 요소이듯 <악>도 선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악과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악이 극도에 달하면 선이 될 수도 있다.

 

진실로 악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선에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악을 발견할 수 없으며, 예기치 않은 악도 생겨날 수 없다. 다만 선과 악이 입장에 따라 두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한 면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와 대립되는 다른 한 면도 똑같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철책을 한 창문들이나 분수의 물이 흘러나오는 안뜰, 그리고 요새의 성벽처럼 두껍고 높은 벽들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밤에 창문 하나 없는 그 거창한 벽들을 따라 거니노라면 마치 그 벽들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저 방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기 마련인 저 방벽,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저 방벽….

 

사람의 본성은 어떠한 형태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이 자유롭고자 할 때 당연히 따르는 임무란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능을 쫓아 행동하는 사람은 어떠한 외적인 요인에 구속당하지 않고 자신의 내부의 힘에 의하여 자유로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사회의 법률을 살펴보면 그것은 공표되자마자 항상 낡은 것이 되어 버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들은 그 법률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개정하거나 폐기해 버린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을 제약하는 법률을 만들어, 지켰다기보다는 지켜지지 않는 구속 수단으로, 즉 사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는 단순한 문구文句로서만 공표하였을 뿐이다.

오늘날의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은 과거 사람들을 강력하게 구속하였던 전형典型을 만들려는 힘만큼이나 강렬하여, 이제 이 의지는 무한히 뻗어 가는 사람들의 사고능력과 더불어 이제까지 우리들을 유지시켜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속하였던 과거의 전형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의 최후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현대인은 사람들이 만든 신이라는 전형에 의해서나 혹은 사회라는 사람들 간의 질서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며 동시에 자연의 법칙에까지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어떠한 것도 미리 주어지지 않았으며 모든 기준들은 변화한다. 19세기부터 모든 생물은 변모 또는 진화라는 것이 수천 년 수만 년을 거쳐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라 할지라도 지구상의 생명체가 결정적으로 주어진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같은 생각이 우리 삶의 온갖 분야에 기름얼룩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수천 년 전에 이미 오이디푸스가 자문했던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면서도 인간은 어떠한 모습이라도 가질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다. 즉 과학에 대해서만 적용했던 공식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면서, <과학이란 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를 만듦으로써 창조되고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스스로 창조해 가는 인간만이 훌륭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모든 실용주의 개념을 대변해 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낱 하찮기만 한 목적만을 성취할 뿐이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우리는 애써 노력을 하지만 단 하루 저녁의 계시로 그 노력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진정한 자유는 가치체계 안에 있지 않고, 모든 가치체계를 넘어서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사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또 다른 상황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왜 어떤 측정한 방향을 따르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가치체계의 부재로 인간은 회의주의자가 되며 결국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 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게 된다.

 

신神이란 영원히 스스로를 창조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며, 스스로를 만들어 내기 이전의 신, 즉 현재는 신이 아니지만 앞으로 신이 될 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같이 자신의 의지대로 누릴 수 있는 신적 자유는 사람들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기는 자유와 모순이 되는 것인가?

신적인 자유와 인간의 본능적 자유는 때때로 일치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상충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존재도 사람보다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그의 자유로운 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하여 양해를 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모든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제멋대로 <긍정인가, 부정인가, 직선인가, 곡선인가>라는 새로운 가치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배움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그러한 생각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역사는 주어진 목표를 향해 진행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정의와 이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을 보수적이며 소심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할 수 있는 반면에 그들도 새로운 모습의 신神을 세움으로써 바로 한 손으로 쓰러뜨린 것을 다른 손으로 세우는 일을 하는 셈이 된다.

 

도덕적인 악과 과오, 죄악의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신에게는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정돈된 세계와 균형 잡힌 인간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악의 근원이란 창조주에서 벗어난 창조물 속에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악이 문제인가?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부분과 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피할 수 없는 악이 아무리 부당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에 분노하지 말자. 재앙은 우리를 쳐부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부서질 만하기 때문에 부서지는 것이다. 선과 악은 낮과 밤처럼 그렇게 무관하게 이 세상에 배분된 것이 아니다. 악에는 밝혀낼 수 있는 원인이 있다. 전체의 운행은 악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지속적인 한 규칙이며 인류 전체에 속하는 하나의 선이다. 그러나 단지 징벌이 될 뿐인 악이 어떻게 필수적일 수 있을 것인가? 순결함이 그것을 예방할 수 있으며 기도가 그것을 멀리할 수 있다.

 

신은 벌하는 악을 만들었지 더럽히는 악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모든 악을 그의 악의로, 즉 그의 자유의사에 의해 끌어들인 것은 바로 인간이다.

 

악의 생성에 있어서의 자유와 필연이 서로 얽힌 이 복잡한 성격은, 인류에게 가장 중대한 사건인 전쟁을 통해 더욱 뚜렷하게 된다. 전쟁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전국 중 그 어느 나라에 의해서도 명백하게 원해진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전쟁은 최고 통치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포된 것도 아니며 그 결과는 미지수이고 그 성공도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전쟁이란 이 세계의 법칙이며, 그 앞에서도 인간은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하나의 필연이다. 그러나 그 전쟁이 이 세계의 법칙이고 또 이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신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신적인 것이므로 이 법칙은 단지 사물들의 본질에서 유래할 때처럼 그렇게 중성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좋은 것이다. 이 무슨 역설인가!

그런데 우리가 계속 추측하여 제３의 결론에 이르게 되면 이는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즉 전쟁은 사실상 악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 악용에서 기인하며 그 전쟁은 그것의 흐트러진 균형을 바로잡는 징벌이 되는 한에서만 선이 되며 그렇게 하여 치료약으로나 속죄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한 예가 전투에 내려진 판결에 의해 주어진다.

 

악의 존재는 여전히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악의 존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현재보다도 더 나음을 지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음, 에덴에서 저질렀던 원죄도 바로 더 나음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다.

 

현대인이 취하는 정치적인 태도는 전적으로 무신앙에 의존하고 있다.

 

 

사회적 분야에서 개인적 야망과 사회정의나 국가독립에 대한 염원은 신성하고 강력한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동기에 의한 행위가 아니며 본능에 의한 순수한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혁명을 위한 혁명, 다시 말해 변화 자체를 위한 의도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신이 어떠한 혁명에 가담하고 있는지를 알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인 혁명가이며,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극히 비관주의자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주의자이다.

행위 가운데서 무위를, 무위 가운데서 행위를 볼 줄 아는 자, 이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현자이다. 행위의 결실에 무심하고 항상 만족하며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아무리 분주하다 하여도 실상 그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는 행동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

그는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스스로 형성되도록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며, 스스로 살도록 그들을 독점하지 않으며 스스로 행동하도록 그들을 경영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냥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틀거릴 것이고 내 상대역이 묻는 질문에 해야 할 대답을 잊어버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

내 스스로 돌이켜 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마침내 내 스스로 사랑한다고 자처했던 이 존재들.

 

운명과 변덕이 세계를 지배한다.

 

침묵이란 자신이 없는 사람들의 최상의 방책이다.

 

 

우리는 자유의 측면을 분명하게 통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자유로움 속에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한 조상의 과오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도 결코 그 자체로서 한 개인이 아니며, 그의 행위 각각에서 그는 종種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출발점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도달점이다.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며, 자신의 잘못들보다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이중성을 제거할 때 우리는 자유가 된다. 이 때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이며 동시에 심판자로서 어떠한 외적인 요소를 생략하게 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스스로 그 존재의 진상을 밝힌다. 신과 인간의 이중성 관계의 믿음 속에서는 우리의 존재가 모호하고 부조리하다. 그리고 무조건 신뢰의 행위로 믿음을 가진다면 존재가 소멸된다. 우리의 자유가 곧 신과 인간 사이의 이중성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이 인간 본질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목적을 대체하는 수단이 지닌 모습을 제공하지 않으며, 이러한 수단들 중에서 해롭지 않은 대용물을 선택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힘은 우리가 가진 약점을 이용하기만 하고, 우리의 능력은 우리가 가진 더러운 면을 계산하기로만 되어 있다. 우리들 중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접근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조차 점진적으로, 간헐적으로 또는 매개물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개념과 그것에 의해 아름답지 않은 것의 개념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들은 좋은 것의 개념과 또 그것에 의해 좋지 않은 것의 개념을 갖고 있다. 이리하여 존재와 무, 어려운 것과 쉬운 것,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음, 음音과 색조, 앞과 뒤,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로 이미 알려진 한 개념은 다른 개념을 드러내 준다.

 

연애할 때는 지나치게 연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랑을 받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다.

 

 

분리된 것, 즉 사물을 배타적이고 선택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비밀스럽다. 누군가 비밀에 싸여 있다면 그 비밀을 털어놓도록 강요되며 그리하여 거기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은 그 인물이라기보다는 그 인물이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는 사물에게 주어진다. 분리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총체로서 드러날 경우 단계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단계적인 것이 용납되지 않고 혼합이 요구되는 시기가 오게 된다. 그리고 난 후 우리는 비밀의 폐지를 위해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념이나 가치를 바꾸면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새로이 나타난 가치가 인간을 좀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새로이 나타난 가치는 인간을 단지 주인만 바뀐 노예로 만들 뿐이다.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를 경계짓는 좁은 틀 사이에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나 불행한 존재이다.

자유는 가치를 무효화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유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철저한 무관심의 지배를 받게 되며 심리적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치를 없애는 것이 현재 생활의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알지 못할 공상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현재의 상황은 행동을 위한 수단 대신에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며, 앞에 놓인 가장 평탄한 길을 따르게 된다. 또한 가치 체계에 따른 이념적 속단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며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된다.

 

각자가 저마다의 숙명에 따르는 것은 그 숙명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갖는 가치 이외에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없음을 의미하는 한편 인류에게 사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미리 정해진 의무가 없다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를 창조하는 자신의 능력을 심사숙고해 보면 곧 그 가치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며 결국 그 능력 속에서 현재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인간의 자유란 미리 정해진 의무를 사랑하게 할 뿐이다.

 

 

자연은 모든 존재에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연의 견지에서 보면 낮과 밤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연이여! 인간을 곤충으로, 곤충을 인간으로, 그리고 삼라만상 전체를 무無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 다오.>

 

우리가 정신적 차원에서 자신의 판단을 재고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바라는 것은 실제적 측면에서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 즉 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이미 지나온 길을 지나오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과 흡사하다. 이처럼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은 선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우리가 행동한 것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고 이것이 쌓여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기 때문에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울 수는 없다. 진실되며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생이란 사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삭제하거나 가필하는 노력이다.

죽음은 단지 일생의 끝일 뿐이지 인생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한 채 현재 우리로서만 존재하게 되고, 우리 아닌 어떤 존재도 될 수 없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인간의 죽음이란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어떤 것이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고 묘사했다.

인간은 왜 죽는가?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완전한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러한 완전함을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점차 신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신을 찬양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신과 멀어지며 신을 피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인간도, 짐승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되고 싶은 것이 없으며 단지 무無가 되어 표면이 매끄럽고 고를 수록 사물을 잘 비추는 거울처럼 신의 존재를 더 잘 반영하고자 할 따름이다.

 

초월자들이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 무슨 큰 뜻이 있을까? 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낱 하찮기만 한 목적만을 성취할 뿐이다. 인간은 번갯불처럼 짧은 순간에만 자유로울 뿐이며, 그 순간이 지나면 곧 다시 새로운 가치에 구속당하게 된다. 그는 또다시 자유로워질 것이지만 다시 어떤 가치엔가 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삶을 생각하면 할 수록 또는 예감을 갖는다 해도 이미 그것은 쓰디쓴 교묘한 독약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갑자기 죽음이 되어 시간의 벼랑에서 찌꺼기가 된다.

우리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를, 왜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가? 우리에게 자연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끝없는 삶에 대한 욕망을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햇빛 가득히 쬔 환락의 맛과 진실과 노래를 주었다.

오늘 밤이 지나고 조금 후에 달이 잠들고 별들이 눈감을 때 우리는 곧 영원한 진리를 알게 된다.

삶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꽃내음의 전원으로 데려가 잠들게 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반항해야 한다. 사물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에서 일치할 때까지.

결국 우리가 갖게 되는 견해가 바로 우리의 결론을 유도하는 것이다.

 

전쟁은 기존의 가치체계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났다. 인간 본연의 자유는 종교적 가치와 더불어 존재할 수 없으며, 종교적 가치체계가 정립되어 감에 따라 인간 본여닁 자유는 회복될 수 없는 길로 빠져들게 된다. 도뎍 규정은 사회 규정과 일치한다. 인간의 궁극 목적은 언제나 자유이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 즉 규율은 언제나 새로운 구속이 되며 이러한 구속은 또 다시 사람에게 신념을 강요하게 되고 이 신념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규율은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숙명의 고대적 개념인 운명은 사람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으며 점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숙명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으며 사람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내적 필연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인생에 미리 정해진 의무가 없다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를 창조하는 자신의 능력을 심사숙고해 보면 곧 그 가치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며 결국 그 능력 속에서 현재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란 미리 정해진 의무를 사랑하게 할 뿐이다.

숙명에 대해 취하게 되는 행동에서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태도는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서 그저 상황이 만들어 내는 우연에 따르는 태도이다.

운명과 숙명─ 운명이란 비인격적이고 맹목적이며 가차없는 것이고 인간에게나 식물에게나 똑같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영향을 전 우주에까지 미치는 것이지만 숙명은 개별적으로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 내부의 힘에 의해 무엇인가를 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그 힘의 포로가 될 정도로 그것에 지배받게 되었을 때 그가 취하게 되는 행동의 방향을 숙명이라고 한다.

운명은 외적 존재이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지워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명은 우연적 발생의 실현이며 예고이다. 운명을 알아내는 방법들에 있어 그 첫 번재가 전조이다. 두 번째 방법은 별을 조사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손금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의 논리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의 거울과 같으며, 커다란 기계에 매달려 있는 작은 톱니바퀴의 축과도 같아서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인간에게 그대로 전달한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나무에도 각각 기생하는 해충이 있듯이 모든 존재는 저마다 하나의 불가해한 존재, 즉 자신이 현재로부터 벗어나 본질의 모습을 찾을 수 없도록 하는 모든 사회적, 윤리적 규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사람은 이 불가해한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지 않으면 당장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강요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바꿀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는 더더욱 없다. 사람은 배워서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방향을 자신의 성격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며, 적절한 노력의 방향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게 부합되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숙명을 인식함으로써 자유로워지지만 운명은 그것을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운명의 존재란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