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시몬 비젠탈 :: 심포지엄 (2)

"문제는 '용서했어야 했는가'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가'이다"

- 에바 플레이슈너 (가톨릭 신학자, 미국인)

 

어떤 사람은 시몬이 그냥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상 답변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시에 시몬은 그 와중에도 계속 답변하고 있었다. 그는 SS대원이 자기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당장이라도 그 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음에도 계속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그 죽어가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파리를 쫓아 주기까지 했다. 처음에 시몬은 억지로 그 곳까지 끌려왔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 그 곳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했고 카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카를의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외로운 노부인에게서 '착한' 아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빼앗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대하고 인도적인 '답변'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임종실에서 나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시몬은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카를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했는지 자문하면서 고민한다. 내가 보기에 그 질문은 그가 카를을 '용서했어야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가 '용서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과연 그에게 카를을 용서해 줄 능력이 있었을까?

 

지난 20여년 간 나는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를 내가 담당한 홀로코스트 관련 강의에서 교재로 사용했다. 매번 학생들은 이 책의 내용을 갖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신자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용서를 주장한 반면 유대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몬이 카를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점이다. 거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말이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용서'라는 문제에 대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접근 방법에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실상 용서라는 개념은 본래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다른 많은 유산들처럼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 예로, 죄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 팔을 벌리고 반기는, 사랑이 많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들 수 있다(이사야 55장 6~7절, 요엘 2장 12~13절, 시편 130편 7~8절)*. 성서의 전통에 근거한 이와 같은 내용─모두 열거하면 더 많다─은 여러 랍비의 가르침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어느 왕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한 번은 집을 나가 백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돌아가자." 그러자 아들은 말했다. "내 힘으론 할 수 없어."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선 네가 올 수 있는 데까지 오거라. 그러면 나머지 길은 내가 마중을 나가도록 하마."

하느님도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신다. "내게 돌아오거라. 그러면 나도 네게 돌아가마."

- 페시크타 라바티*, 184b~85a (해리엇 카우프먼, <유대교와 사회정의> 29p에서 재인용)

 

이른바 '탕자'에 대한 예수의 유명한 비유도 이같은 유대교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진정한 참회─'테슈바'나 '메타노이아'*─뿐이다. 이러한 '돌이킴'은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 전통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참회가 없이는 용서도 없다.

 

*페시크타 라바티(Pesikta Rabbati) : 유대교의 절기에 대한 중세의 미드라슈(성서에 대한 주석) 모음. 모두 4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누카, 유월절, 로슈 하샤나(새해 첫날), 욤 키푸르(속죄일)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메타노이아 : '참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즉 기독교와 유대교 양쪽 모두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 또한 양쪽 모두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어째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토록 서로 다른 답안이 나온 것일까?

 

첫째, 내가 생각하기엔, 기독교인 사이에 자주 인용되는 이른바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네 왼쪽 뺨도 내밀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는 오로지 남이 '나에게' 행한 잘못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또한 남에게 앙갚음하지 말라고 오로지 '나에게' 부탁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사하라며, 바로 '나에게'만 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결코 '남들에게 죄 지은 자를' 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많은 기독교인이─그리고 일부 비기독교인조차─이 대목을 잘못 읽었으며, 또한 지금까지도 계속 잘못 읽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가 어떤 행동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한다는 식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잊어버린 중요한 요소는 예수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며, '나에게'만 과제를 준다는 것이다(이 자체만으로도 힘겨운 시험대가 아닌가!). 하지만 예수는 그 어디에서도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잘못까지 용서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과연 시몬은 카를의 요청을 들어 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희생자들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마태복음 5장 39절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6장 12절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둘째,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타난 차이는 한편으로 속죄나 보상의 개념적 차이와도 연관이 있다. 마침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유대인의 절기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전에 나는 어느 유대인 친구로부터, 욤 키푸르를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자기가 혹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보상해 주는 것임을 배운 바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유대인)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고, 또한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슈나*>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에게 범한 죄는 속죄일에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이웃에게 범한 죄는, 설령 속죄일이 되었더라도 그가 자기 이웃과 화해하기 전까지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미슈나>, 요마* 8장 9절 (해리엇 카우프먼, <유대교와 사회정의> 30p에서 재인용)

 

*미슈나(Mishnah) : 랍비의 구전을 모은 책으로, 유대교에서는 <토라> 다음으로 권위있는 경전으로 여긴다.

*요마(Yoma) : 미슈나에 나오는 축제일 규정 가운데 하나로, 욤 키푸르(속죄일)를 다루고 있으며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아는 어느 유대인 친구는 로슈 하샤나*와 욤 키푸르 사이에,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떤 식으로건 상처를 준 것 같은 사람들에게 무려 40통이나 편지를 썼다. 가톨릭 교도들이 참회할 때 '주기도문이나 성모송을 암송함으로써' 얻는 간단한 속죄에 비하면 이는 너무 복잡한 일이다. 물론 가톨릭 측의 이런 풍습 또한 오늘날에는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유대교의 속죄 개념에서 비롯되었지만 말이다.

 

*로슈 하샤나(Rosh Hashanah) : 유대력의 새해 첫날. 장장 열흘에 걸친 새해 기념일 가운데 처음 이틀이 '로슈 하샤나'이고 마지막 열흘째가 '욤 키푸르'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시몬은 어쩌면 카를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나로선 당신을 용서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또한 감히, 그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리고 내가 믿는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우리에게 그저 죄를 뉘우치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당신의 참회가 진정한 것이라면, 당신으로선 죄를 보상해 줄 길이 없으니, 부디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시몬의 입장에서는 이것조차도 너무나 큰 희생을 강요받는 꼴이 아니었을까? 극도의 무력감과 끝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그리하여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고 죽음이 항상 곁을 맴도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실제로 나는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그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뿐만 아니라 그가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해서, 또한 시몬과 동료들이 겪은 고난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대해서도 새삼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카를은 시몬을 자기 병실로 불러들임으로써, 비록 처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칫하면 처벌받을 수도 있는 입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기가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아무나 '유대인 한 명'을 불러 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자기 고통에만 눈이 멀어서, 단지 자기가 참여한 그 학살에서 죽은 유대인들을 제외하면, 수용소와 게토에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앞에 선 시몬의 고통조차도 말이다.

물론 카를이 임종을 앞두고 겪은 심리적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 과연 카를은 자기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그 무기력하고 불쌍한 유대인 한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는 대신, 자기 동료인 SS대원을 불러다 놓고 똑같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하다못해 몇 명의 목숨이라도 구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었을까?

 

(신학적으로 가장 정확한 답을 내려 준 글.)

 

※ 에바 플레이슈너(Eva Fleischner, 1925~) : 몽클레어 주립대학(Montclair State University)의 종교학 명예교수이다. 또한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회(U.S.Holocaust Memorial Council)의 교회협력위원회와 미국가톨릭회의(U.S.Catholic Comference)의 자문회 멤버로, 가톨릭-유대교 협력사무국(Office of Cafholic-Jewish Realations)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독일 기독교 신학에서 바라본 유대교(the View of Judaism in German Christian Theology)>와 <아우슈비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가?(Auschwitz: Beginning a New Era?)>가 있다.

 

 

"지혜로운 침묵, 정의를 뛰어넘은 연민"

- 매튜 폭스 (가톨릭 사제, 미국인)

 

그 SS대원은 한때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하는데, 가톨릭 신자가 자기 죄를 고해할 때는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슬픔과 통회도 함께 드러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내겐 오히려 시몬이야말로 이상적인 고해 신부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카를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면을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침묵이었다. 그 사면을 통해 시몬은 카를을 저 혼자 스스로의 죄의식과 함께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시몬은 결코 유대인으로서 그에게 용서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가 어떻게 그 불타는 집에서 죽은 수백 명, 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어 간 수백만 명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몬은 고해 신부의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어떤 죄는 너무 커서 진짜 신부조차도 차마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고해보다는 오히려 공개적인 참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고해에 머물렀고, 자기가 직면한 진실의 침묵 속에서 죽어가야만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침묵한 채 걸어나가기로 결정한 시몬의 지혜야말로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유의미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시몬은 자신의 영혼을 지켰고, 또한 카를은 자신의 영혼을 구제받았던 것이다. 그 SS대원은 자기가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인물에게 제 영혼의 짐을 덜어놓았다. 그 최적의 인물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죄에도 그저 값싼 은혜를 베푸는 신부가 아니라, 그가 죽인 희생자들의 동포였던 것이다.

 

시몬은 카를에게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고 성숙한 답변을 한 것이다. 침묵하라, 너의 양심을 생각하라, 너의 희생자를 생각하라, 너의 하느님을 생각하라…. 나는 카를이 시몬의 답변을 고맙게 생각했기 때문에, 빈약하게나마 자기 유품을 일종의 답례 삼아서 그에게 주려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몬은, 또다시 현명하게도, 그 물건에 손조차 대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몬은 그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죄의식에 시달리는 군인을 위해 그를 괴롭히는 파리를 쫓아 주었다. 그의 손을 잡아 줌으로써 '인간 이하'의 존재였던 시몬은 잠시나마 현존하게 되었고, 또한 잠시나마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끔찍한 이야기가 계속되자 결국 손을 놓아 버렸지만, 그럼에도 시몬은 여전히 방 안에 남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상대방의 고백을 들어 준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동정심을 표출하는 행위였다. 그 자리에 남아서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고통스런 침묵을 지키면서도 그토록 극악한 범죄에 대해 값싼 은혜 베풀기를 거절한 것이야말로 시몬이 카를에게 베푼 동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범죄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시몬에게 하느님을 대신해 상대방을 용서하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내 생각에는 시몬이 바로 이 죽어가는 SS대원을 만난 덕분에 이후 자신의 사명에 투철하게 종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몬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후 평생을 바쳐 한 일이야말로, 사실상 그 병원 침대 위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된 장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시몬은 나치 한 명 한 명을 철저하게 색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임종에 직면했을 때 참회와 고해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나치 전범들은 물론이고 그 피해자들 역시 다음 생에서도 결코 편히 쉬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몬은 그 SS대원을 공정하게 대했고, 단순히 공정한 것 이상으로 대했다. 즉 시몬은 그에게 연민을 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이야말로 정의를, 또한 연민을 추구한 것이었다. 정의 없는 연민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몬은 자기가 찾아낸 전범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법정의 판사에게 그 일을 위임할 뿐이다. 단지 그는 증언을, 고백을, 그리고 증거를 제시할 뿐이다. 왜냐하면 전범들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카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시몬의 입장에서 베푼 또 다른 연민의 표시는 그가 아무런 의도 없이 카를의 어머니를 방문한 것이었다. 자기 아들의 악행을 부인하고 아들의 선량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카를의 어머니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어 연민의 표시였다. 그는 불행한 어머니에게 진실을 밝혀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너무 때가 늦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나치와 관련해서 '범죄 이상의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부인(否認)이다. 얼마나 많은 평범한 독일 시민이, 또한 성직자와 주교들이, 그런 악행이 벌어졌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계속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의도적인 무지는 범죄나 다름없다. 그런 무지야말로 홀로코스트를 가능케 한 파멸적인 범죄였기 때문이다. 시몬은 어머니와 아들 모두를 똑같이 대했다. 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었으며, 또한 침묵한 채 떠나 버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비록 부분적이지만 각자의 진실을 안고 죽게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시몬의 활동은 그런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었고, 실제로 벌어졌던 일의 완전한 진실을 계속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두 모자에게 연민을 표시했던 자신의 행동을 국제적인 규모로 지속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윤리적인 일화들과 마찬가지로, 어제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이야기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의 능력은 결코 단일하고 개별적인 결정이나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나치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우리를 그러한 악행에 깊이 관여하게 만드는 '공모죄'와 '태만죄' 그리고 '부인죄'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언론과 정치꾼과 기득권 세력의 선전으로 인해 거짓이 제멋대로 횡행하는 사회 속에서, 이러한 죄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부인은 이러한 죄가 뿌리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 준다.

 

(중략)

 

용서하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시몬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고─그 덕분에 우리에게 이토록 훌륭한 명저를 선사했고─정의와 연민을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야말로 거룩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이 비극을 잊지 않도록 해 준다. 이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우리는 훗날 다른 사람들을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구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 매튜 폭스(Matthow Fox, 1940~) :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Oakland)에 개교한 창조영성대학(University of Creation Spitituality)*의 설립자다. 영성과 문화에 관한 수많은 저서가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노동의 재발견(the Reinvention of Work)>, <원래의 축복(Original Blessing)>, 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와 공저한 <천사의 물리학(the Physics of Angels)> 등이 있다. 로마 가톨릭 사제로 28년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있었고, 지금은 감독파 소속의 성직자다.

 

*지금은 위즈덤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붕대 너머로 보아야 할 것들"

- 레베카 골드스타인 (작가, 미국인)

 

나치의 짐승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고문 및 살인 기계의 희생자인 당신은 어느 죽어가는 SS대원의 고백을 듣기 위해 불려갑니다. 그는 자신이 마음 편히 죽기 위해 당신에게 뭔가를 요구합니다. 바로 '용서'를 말입니다(그는 자기에게 마음 편히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 확고한 가정은 아마 그가 한때 가졌던 종교적 확신의 잔재겠지요). 당신이 불려간 까닭은 다름아닌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유대인'을 마치 '물'이나 '소금'처럼 개별성 없는 집단 명사로 생각한 모양이지요. 가령 "여기 물이 조금 있다"고 할 때처럼 말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이렇게 생각한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닙니다. '집단' 명사, '집단' 학살, '집단' 매장 등등. 그들의 악행도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으니까요.

 

(중략)

 

두려움이나 혐오감이 있었음에도 당신은 눈앞에 있는 특별한 개인을 바라보는 임무 앞에서 결코 위축되지 않았고, 그 임종실에서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진정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려 노력했습니다. 당신이 공들여 재구성한 카를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저는 그의 '양심' 혹은 그의 규범적인 체질만큼은 나치로 개종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나치로서 순종한 그 관념은 결코 관념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용서를 간청한 범죄를 저지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반인륜적인 범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붕대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자기가 잘 알던 유대인조차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주치의를 걱정했지만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태도야말로 정말 저주받을 짓이 아니겠습니까!

비젠탈 씨, 당신은 우리 인류의 얼굴을 감싼 그런 맹목적인 붕대를 풀어 버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관념의 붕대에 둘러싸인 그는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얼굴을 결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일가족 세 명이 불에 타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대체 얼마나 더 구체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고서야 자기가 따르는 관념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가스실에서 죽은 300만 명에게 사용된 치클론B*가스가 사실은 살충제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치클론B(Zyklon B) : 맹독성인 시안화물(청산가리) 성분으로 된 독가스. 나치가 학살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용한 독극물.

 

(중략)

 

이후에 전장에 나가서도 문득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으며 심지어 시력을 잃고서도 계속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분명 다른 나치에 비해서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인간적 측면들을 최후의 하나까지 모두 한 군데에 쌓아 올린다고 해서, 과연 그 무게가 그때까지 그가 이론이나 실천에서 적극 관여했던 공포의 무게와 대등해질 수 있을까요? 그가 당신에게 '용서'를 요청한 그 한 가지 행동은 물론이고,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많은 행동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SS대원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는 자신의 죄가 여전히, 또한 영원히 남으리라는 것까지는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깨달았더라면, 그는 감히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올바로 자각했다면, 그는 자기가 그 어떤 용서도 받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결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난 다음에야, 즉 자신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용서를 청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단지 그 불타 죽은 가족 뿐 아니라, 수백만 명에 달하는 모든 희생자들의 몫까지 말입니다.

 

※ 레베카 골드스타인(Rebecca Goldstein, 1950~) : 원래 철학 교수였다가 훗날 소설가가 되었다. 장편 및 단편소설로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맥아더재단 지원금(McArthur Hellow)을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심신문제(the Mind-Body Problem)>, <어둠의 자매(the Dark Sister)>, <스트레인지 어트랙터(Strange Attractors)>, <행운(Mazel)> 등이 있다.

 

 

"그 나치가 가야 할 곳은 집단수용소였다"

- 메리 고든 (작가, 미국인)

 

어쩌면 그는 '용서'를 현실에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되돌리는 일종의 마술 지우개로, 즉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그의 행동은 도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르시시즘적인 것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범죄 사실의 인정을 원하는 희생자의 요구보다도, 오히려 죄를 씻어 버리고자 하는 가해자의 요구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물론 용서는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지만 망각은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로 망각은 일종의 부인인 셈이며, 둘째로는 과거의 범죄 사실을 양쪽에서 공히 인정해야만 그러한 끔찍한 일이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건 죄인에 대해 선명한 표식을 반드시 해 두어야만, 집단적 참회라는 공적 의례를 통해 그러한 일을 한시라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나치 장교가 시몬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한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이었다.

첫째, 그는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유대인의 공적 상징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상징이란 본래 집단적인 것이며, 누군가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회 전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인물'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물론 신부 한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주기는 하지만, 그는 단지 사회와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경우는 사회에서 그에게 그러한 역할을 하도록 자격을 부여했던 것이다.

둘쨰, 그 나치는 참회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성례전에서 자기 역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신부라면 결코 공중(公衆)을 향해 죄를 지은 자를 속죄해 줄 수 없다. 그 죄인은 반드시 공중 앞에서 자기 죄를 시인해야 하고, 그런 연휴에나 속죄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내가 보기에 그것은 성례전의 남용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떄문에 가톨릭 신자들 중 다수가, 공개적인 참회의 절차가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형태의 참회에 대해 불편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시몬 비젠탈은 이 죽어가는 사람의 고해 신부가 될 수 없었다. 신부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그는 오로지 자기 이름으로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한 개인인 이상에는 결코 남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피해자들의 용서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만약 그 죽어가는 나치 군인에게 진정으로 보상하려는 의미가 있었다면, 그는 마땅히 집단수용소에 들어가야 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용서를 구했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 비참한 환경에서 서서히 죽어갔어야 옳았던 것이다.

 

※ 메리 고든(Mary Gordon, 1949~) : <마지막 계산(Final Payments)>, <여자들(the Company of Women)>, <인간과 천사(Men and Angels)>, <다른 곳(the Other Side)> 등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썼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중편집 <여생(the Rest of Life)>, 단편집 <임시대피소(Temporary Shelter)>, 에세이집 <착한 남자와 못된 여자(Good Boys and Dead Girls)>, 회고록 <그림자 인간(Shadowman)> 등이 있다. 라일라 애치슨 월리스/리더스 다이제스트 작가상(Lila Acheson Wallace-Reader's Digest Writer's Award)과 구겐하임 지원금 수상자이며, 현재 버나드 칼리지(Bernard College)의 영문학 교수이다.

 

 

"죽은 이들이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산 사람들 또한 그렇게 할 수 없다"

- 마크 골든 (언론인, 영국인)

 

몇 년 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관련 재판*에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정확한 희생자 수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여러 증거들에 따르면 총 440만 명의 남녀노소(이는 거의 덴마크의 총 인구 수와 맞먹는다)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을 당시 생존자는 겨우 6만여 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그 곳으로 이송된 사람들 가운데 무려 98.5퍼센트를 독일인이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뜻이다. 죽음의 수확이 이 정도라면, 쥐를 잡은 것이라 해도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심지어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 죽였다니!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the Frankfurt Auschwitz Trials) : 독일에서는 1947년의 아우슈비츠 재판에 뒤이은 '제２차 아우슈비츠 재판'으로 통칭된다. 1963년 12월 20일부터 65년 8월 10일까지 벌어진 일련의 재판을 통해 22명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관련자 가운데 18명이 종신형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이후에 독일인이 짊어지게 된 죄의식이었을 테지만, 그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어떤 속죄도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런 짓을─직접적 참여이건 간접적 묵인이건─저지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죄과를 잊어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을 종종 제기하곤 했다. 감히 그들이 문명사회에서 다시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독일인이 유대인 희생자들의 팔에 새긴 결코 지워지지 않는 다윗의 별*문신처럼, 독일인의 이마에도 그 카인의 낙인*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인가?

 

*다윗의 별(Star of David) : 일명 '다윗의 방패', '솔로몬의 문장', '유대인의 별'이라고도 한다. 삼각형 두 개가 겹쳐진 육각형 별 모양으로 유대교와 유대인을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되며,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에도 들어있다. 제２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 표지를 가슴에 달도록 의무화하기도 했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자 하느님은 그를 타향으로 추방한다. 이 때 타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며 카인이 겁을 내자, 하느님은 그에게 '특별한 표식'을 주어 타인으로부터 해를 면하게 해 주었다. 유대인의 전설에서는 이 표식이 카인의 이마에 새겨진 것이라고 하고, 어떤 전설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이라고도 한다.

 

(중략)

 

이 외계 종족 나치는 하필이면 지구상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문명화된'*국가에 제멋대로 내려와서, 독일인으로서는 감히, 결코, 그리고 '전혀'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중략) 여기서 문득 의문이 생긴다. 설령 (지금껏 아무도 알지 못했던) 어느 외계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지금껏 아무도 보지 못했던) 범죄라고 해서, 반드시 이 세계가 그 일을 그토록 빨리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여기서 저자는 '쿨투르(Kultur)'라는 독일어를 사용하여 '쿨투르한(Kultured)'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나치 정권 당시 이른바 국민정신을 고양한다는 의미로 벌어진 정신문화운동(쿨투르)을 비꼬는 대목이다.

 

 

"정의 없는 용서는 자기만족적 유약함일 뿐"

- 한스 하베 (언론인, 독일인)

 

당신은 카를에 대해 "그는 타고난 살인자도 아니었고, 살인자가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어"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용서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 말은 타당하지도 않고, 또한 변명이 될 수도 없습니다. 만약 타고난 살인자가 있다면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이례적인 경우일 테니, 그런 사람이 저지른 범죄는 오히려 '멀쩡하게' 태어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면죄를 받을 가능성도 더 클 겁니다. 반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를 선택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살인을 저지르기로 스스로 결단을 내린 사람의 경우,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비하면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살인은 배심원이나 재판관조차도 감히 속죄해 줄 수 없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 다시 말하지만 세상 모든 사회는 특정한 도덕적 원칙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그 원칙 중에서도 맨 앞에 놓인 것이 바로 이런 중대한 범죄에 대한 단죄의 원칙입니다.

 

(중략)

 

그 악마 같은 나치 정권은 결코 모든 사람을 타락시켰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렇게 타락한 자들이라 해서 모두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각 개인의 책임을 그 조직의 탓으로 전가시키려는 투의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월트 휘트먼*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나, 혹은 거기 속한 주(州)에나, 혹은 그 주에 속한 도시에나, 누구든 저항은 크게 하고 복종은 적게 하라!" 악에 대한 저항은 영웅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 미국의 시인.

 

용서는 결국 하느님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처벌 또한 하느님을 흉내내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죄인을 처벌하고 나서야 용서합니다. 이 순서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하느님은 결코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가치는 훌륭하기는 하지만, 우리로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중략)

 

최소한 당신은 그 죽어가는 살인자를 미워하지는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었습니다. 정의 없는 용서란 자기만족적인 유약함에 불과합니다. 또한 사랑 없는 정의란 진정한 능력의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나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용서할 수 없도록 만든 일일 것입니다. 이 문제만 나오면 우리는 영혼의 미궁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미궁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살인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입니다. 단지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용서만을 감행하거나, 단지 정의라는 미명으로 처벌만을 감행해 봐야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단죄와 용서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의, 단죄와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증오 없는 삶이라는 똑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스 하베(Hans Habe, 1911~1977) : 헝가리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신문기자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나치의 박해로 인해 발생한 난민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열린 1938년의 에비앙 회의*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소설 <사명(the Mission)>이 있다. 제２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뮌헨의 <노이에 차이퉁(Die Neue Zeitung)> 편집장으로 근무했으며, 탁월한 시온주의자에게 수여하는 헤르츨 상*을 받기도 했다. 그 외의 대표작으로는 <오염된 강물(Poisoned Stream)>과 <자랑스러운 시온(Proud Zion)> 등이 있다.

 

*에비앙 회의(Evian Conference) :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난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38년 7월 프랑스 에비앙에서 29개국이 참석해 연 회의. 그러나 주최국이었던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자국과 관련된 난민 문제를 고려해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 탓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헤르츨 상(Herzl Prize) :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저널리스트 시오도어 헤르츨(Theodore Herzl, 1860~1904)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

 

 

"비록 과거는 잊을 수 없다고 해도"

- 요시 클라인 할레비 (언론인, 미국 출신 이스라엘인)

 

1989년 11월에 이르러 나는 언론인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였다. 어느 추운 날 저녁, 나는 많은 군중들의 틈에 끼어 서베를린의 번화가인 쿠담* 쪽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중략) 그 때 문득 나는 깨달았다. 지금 독일인이 느끼는 기쁨을 나 혼자만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이며, 나 자신을 인류로부터 추방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독일 베를린 거리인 '쿠어퓌르슈텐담'의 약자. 동서 분단 시절에는 서독 최대의 번화가이자 경제 중심지였다.

 

(중략)

 

그 젊은이들에게 나는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자부심을 느끼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저 웃음 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도 신이 났을까? 하지만 그들의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중략) 미어바움 하우스의 젊은이들은 홀로코스트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기 나라의 순수한 기쁨조차도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엿보다는 상대적 쾌감 대신, 오히려 무고한 자들에 대한 복수의 허망함만을 느꼈다. 결국 나는 아우슈비츠 때문에 그들이 자존심을 되찾은 지금 이 순간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독일 젊은이들에게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독일인이나 유대인 중 어느 누두고 과거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를린에서의 그 만남 이후로, 나는 점점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화해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시몬이 카를의 어머니에게 행했던 자비로운 행동을 보면서, 나는 우리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보낸 고난의 세월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우리가 그들을 넘어설 때가 올 것이라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 대학살의 생존자인 시몬 비젠탈이 SS대원의 모친에게 보여 준 고귀한 행동에는 무척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그 다음 세대인 지금의 우리가 새로운 세대의 독일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솔직히 약간의 윤리적 상식만으로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요시 클라인 할레비(Yossi Klein Halevi, 1953~) : 뉴욕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다. 이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예루살렘 리포트(Jerusalem Report)>의 주필로 일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어느 유대인 과격파의 회고록(Memorirs of a Extremist)>이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라면 하느님조차 피고인일 뿐"

- 아서 허츠버그 (유대교 신학자, 미국인)

 

그 죽어가는 군인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그의 죄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지기만 한다. 그가 나치가 된 것은 결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가톨릭교도였고, 그의 아버지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서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히틀러 소년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더욱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막무가내였고, 이후에는 더욱 도전적으로 바뀌어 SS에 입대하였다. (중략) 그는 일부 확고한 나치들과는 달리,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몰살해 버리기 위해서라면 "무덤 속에라도 기꺼이 들어가겠다"고 자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기가 합류하려는 살인자들이 결국 성공하리라고 확신하자 그는 기꺼이 악행을 선택했다.

사실 나치 정권은 '마음이 약한' 병사들에게는 다른 임무를 부여하도록 허락해 왔다. 심리적 충격이 그토록 컸다면 자기 손으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마땅히 피했어야 했지만, 그는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다. 설령 '인종적으로 열등한 자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는 주장에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당시 승승장구하던 나치 정권하에서 뭔가 특별한 혜택을 얻으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군인의 침대 곁에 앉아 있던 긴장된 순간, 시몬 비젠탈은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한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탈무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어찌 너의 피가 남의 피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겠느냐?"

 

(중략)

 

그 SS대원이 참여했던 범죄는 인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한계조차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범죄에 있어 오히려 피고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악을 보시고 그곳을 멸망시키려 작정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항변한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자들 중에 있는 의로운 자들도 모두 죽이실 셈입니까?"* 하느님은 그 악한 도시에 정의로운 사람이 단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아브라함은 그 숫자조차도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과의 대화 속에서, 온 땅의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조차도 반드시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이 악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한꺼번에 멸망시킬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신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가운데는 수많은 정의롭고 경건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처 죄를 알지도 못했던 아이들도 100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논쟁'을 보면, 아브라함은 결코 하느님이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장 23.25절)

 

어쩌면 하느님은 욥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를 변호했을지 모른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치조차도 우리로선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하느님의 도구였다는 식의 지나친 확대해석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나치와 그 동조자들을,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도 숨어서 침묵하고 계셨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구약성서 욥기의 주인공 욥은 원래 부유했으나 갑작스럽게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고는 불행을 겪는다. 자신이 아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행을 겪는다며 욥이 원망하자, 하느님은 그 앞에 나타나 절대자의 능력이 얼마나 심오한지 펼쳐 보인다. 그러자 욥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감히 자신의 정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게 된다.

 

(중략)

 

나는 1912년 갈리치아의 루바추프(폴란드 남동부의 도시)에서 태어났고, 1926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오는 바람에 가까스로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은 세대의 독일인들은 물론이고 그 위성국가의 동조자들과도 결코 화평할 수가 없었따. 왜냐하면 나와 같은 세대의 그들은 분명히 나치에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패하고 죽는 그 날까지도 그를 향해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내 친지들─할아버지와 삼촌들과 숙모들과 사촌까지─은 물론이고 나 또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학살한 자들의 정신세계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따. 자신의 죄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죄의식에 맡길 문제다. 나로선 홀로코스트를 감히 '설명'하려는 갖가지 글들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은 비록 역사적인 통찰력이나 정교한 신학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답변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하나같이 외면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어째서 인간은, 그리고 하느님은 그토록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침묵한 채 그 SS대원의 침대 곁을 떠난 시몬 비젠탈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아서 허츠버그(Arthur Hertzberg, 1921~2006)는 뉴욕 대학(New York University)의 인문학 전공 브론프먼 방문교수이자 다트머스 칼리지(Dartmouth College)의 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랍비 허츠버그의 대표작으로는 <시오니스트 사상(the Zionist Idea)>, <프랑스 계몽주의와 유대인(the French Enlightment and the Jews)>, <미국의 유대인(the Jews in America)>, <유대교(Judaism)> 등이 있다.

 

 

"브리스크의 랍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 (유대교 신학자, 미국인)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유명한 학자이며 점잖은 인품의 소유자로 잘 알려진 브리스크*의 어느 랍비가 집에 가기 위해서 바르샤바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평범한 외모의 이 랍비가 들어간 객실에서는 여행 중인 상인 몇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놀이가 계속될수록 흥미도 배가되었다. 하지만 랍비는 그저 초연한 태도로 명상에만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런 태도를 불편하게 느낀 상인들은 랍비에게 카드놀이를 같이 하자고 권했다. 그러자 랍비는 카드놀이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랍비의 초연한 태도를 더욱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랑 놀든지, 아니면 여기서 나가시오."

잠시 후, 그는 랍비의 멱살을 붙잡고 그를 객실 밖으로 몰아냈다. 결국 그 랍비는 기차가 목적지인 브리스크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서 있어야만 했다.

 

*오늘날 벨로루시의 지방 도시인 브레스트를 말한다. '브리스크'는 브레스트의 옛 이름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속칭이다.

 

그런데 그 상인들의 목적이 또한 브리스크였다. 랍비가 기차에서 내리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달려와 반기며 악수를 나누었다.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상인이 물었다. "저 분을 모르시오? 그 유명한 브리스크의 랍비시라오." 그 순간 상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자기가 행패를 부린 사람이 누구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랍비에게 다가가 자기가 한 짓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랍비는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호텔에 와서도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던 상인은 급기야 랍비의 집으로 찾아갔다. "랍비님." 그가 말했다.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금해 놓은 것이 300루블 쯤 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그 돈을 랍비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랍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럴 수는 없소."

상인은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위안을 얻기 위해 회당을 찾아갔다. 그가 자신의 근심을 회당 안의 몇몇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토록 고매하기로 소문난 그들의 랍비가 어떻게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상인에게 랍비의 큰아들을 찾아가서 그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조언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아들 역시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불안해하는 상인에게 자기가 아버지와 한 번 이야기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아들이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율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용서에 대한 율법으로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누군가가 세 번씩이나 용서를 간청하면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랍비가 언급하자, 아들은 곧바로 그 상인의 이름을 꺼냈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왜냐하면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지. 사실 그는 유명한 랍비가 아닌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거란다. 그러니 그 상인한테, 나 말고 그 이름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말해 주려무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대신 용서해 줄 수는 없다.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600만 명이 받은 고통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어떤 한 사람이 대표해서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인간이 당신을 향해 지은 죄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 지은 죄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가장 이해하기 쉽고 지혜로운 글이라 전문 옮겨 왔다.)

 

※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 : 저명한 신학자 겸 철학자로,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공부했으며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대인 성인을 위한 교육기관인 프랑크포르트 레르하우스(Frankfort Lrhrhaus)에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후임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직후에는 1972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 유대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에서 유대교 철학, 윤리학, 신비주의를 강의했다. 랍비 헤셸은 시민권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행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제２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에는 유대교-기독교 간 대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종교철학이 반영된 대표작으로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Man is not Alone)>,<사람을 찾는 하느님(God in Search of Man)>,<예언자들(the Prophets)>,<안식일(the Sabbath)>,<이스라엘: 영원의 반항(Israel: An Echo of Eternity)> 등이 있다.

 

 

"용서받지 못하는 두 개의 죄악"

- 수재너 헤셸 (유대학자, 미국인)

 

유대교에서는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참회와 보상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살인이며, 다른 하나는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한 죄다. 두 가지 모두 참회는 가능하지만 용서는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이 그 살인자를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명예란 한 번 훼손되면 결코 이전과 똑같이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두 가지 죄에 모두 해당한다. 살인은 물론이고, 반유대주의적 선동을 통해 유대인의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범죄에 대해 그들이 아무리 참회를 하더라도, 보상이 불가능한 까닭에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중략)

 

유럽에서 유대인을 말살한 것만이 나치의 유일한 반인륜적 범죄는 아니었다. 나치는 심지어 반독일적인 범죄조차 서슴지 않았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독일 국민은 죽음을 무기 삼아 협박하는 나치 정권 때문에 일종의 감옥 같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히틀러에게 복종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 사회 전체가 나치 정권에 협조적이었으며, 독일 국민은 종종 자발적으로 나치의 범죄에 가담했다. 괴츠 알리*는 일부 '아리안족' 독일인 가정에서 나이 많은 조부모나 장애가 있는 어린 자녀를 이른바 안락사라는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그것은 살인일 뿐 아니라 국가적인 자살 행위이며, 어떠면 독일의 영원한 황폐화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만행이 어떻게 속죄가 되겠는가?

 

*괴츠 알리(Götz Aly, 1947~) : 독일의 언론인 겸 역사가.

 

나의 아버지인 랍비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은 "죄 없는 자의 피가 영원히 외칠 것"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만약 그가 외침을 그쳐야 한다면, 인간성 또한 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용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희생자들과 그 후손들이 가족들의 피의 외침을 듣고서도 슬픔과 원한을 갖지 않고, 또한 그들 스스로의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나치의 후손들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차라리 유대인들의 피의 외침에 계속 귀 기울임으로써 그들 자신의 인간성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 수재너 헤셸(Susannah Heschel, 1956~) : 랍비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의 딸로, 현재 미국 뉴햄프셔 주 다트머스 칼리지에서 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브라함 가이거와 유대인 예수(Abrahan Geiger and the Jewish Jesus)>가 있고 <인사이더/아웃사이더: 다문화주의와 미국의 유대인(Insider/Outsider; Multiculturalism and American Jews)>을 공동 편저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 호세 호브데이 (가톨릭 수녀, 미국인)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세네카족과 이로쿼이족, 그리고 세미놀족의 후예)으로서, 평생 이 땅에서 차별대우를 당해 왔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종족이 당해 왔던 온갖 잔혹 행위와 처형과 굶주림과 종족말살에 대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어 왔다. 우리의 역사에는 이러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원주민들은 미국 정부가 선물한 담요에 묻은 천연두 병균으로 인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백인들은 우리를 향해 개를 풀어놓는가 하면, 그저 운동삼아 우리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무려 600만 명 이상이었다. 한 세기 내내 지속된 이러한 학살을 그 침입자 겸 정복자들은 멀거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세상의 다른 많은 종족들도 이와 비슷한 끔찍한 치욕을 당한 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길을 걸으며 복수와 앙갚음을 원하던 내게, 세네카 족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너도 저 사람들처럼 무지하고 어리석고 비인간적이어서는 안 된다. 장로님께 가서, 네 마음을 씁쓸함에서 달콤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약을 지어 달라고 해라. 너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독을 뽑아내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망각과 용서는 마치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런 악행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마음 속에 몇 년이고 몇 년이고 그대로 남아 있곤 한다. 그리고 매번 내게 용서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데, 그것을 결국 용서하기까지 나는 실상 그 악행의 영향력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중략) 비젠탈 씨는 자신이 선을 행하고 정의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마음이 평화와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며, 비록 그 기억이 여전히 짐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이제는 그 짐을 벗어 버렸으면 한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기억도 우리를 절망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평화를 깨뜨려서도 안 된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의 추상적인 개념에만 매달린 글이지만, 피해자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확실해 보인다.)

 

※ 호세 호브데이(José Hobday, 1929~2009) : 아메리카 인디언인 세네카족과 이로쿼이족과 세미놀족의 후손이며 평생을 프란체스코회 소속 수녀로 살았다. <패러볼라(Parabola)>, <크로스커렌츠(Cross-Currents)>,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ational Catholic Reporter)>, <프레잉(Praying)> 등에 가톨릭과 아메리카인디언의 영성에 대해, 그리고 아메리카인디언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강사로도 유명해서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강연을 했으며, 그 내용이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용서할 권리가 충분했고, 용서해야 했다."

- 크리스토퍼 홀리스 (언론인, 영국인)

 

중세의 전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가 천국에서 모두 만나 최후의 만찬을 다시 한 번 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침 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배신자인 가롯 유다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리스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입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네."

 

(역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의미없는 소리만 장황하게 늘어놓았기 때문에 건질 것은 없었다. 다만 출처가 달리 있을 마지막 일화만 건졌다.)

 

 

"당신은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

- 로저 카메네츠 (작가, 미국인)

 

당신은 결코 한 '개인'의 자격으로 그의 앞에 불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당신은 그저 '유대인'에 불과했지요. 그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이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셈이지요. 그것은 당신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그 당시 상황에서 당신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의 접근 방법 속에 일종의 모욕이 숨어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을 직시했고, 또한 자기 죄를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기 영혼과 자기 시대의 훨씬 더 깊은 질병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그는 당신을 오로지 '유대인'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결국 당신을 '인격체'로 대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를 특별한 인격체로, 즉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탁월함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과 똑같은 시각으로 접근했더라면, 그 때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용서를 위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로저 카메네츠(Roger Kamenetz, 1950~) : 미국의 시인 겸 작가로서, 유대계 불교 신자의 이야기를 다룬 <연꽃 속의 유대인(the Jew in the Lotus)>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턴루지(Baton Rouge)에 위치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Lousiana State University)에서 유대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 나치 병사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 해럴드 S.커슈너 (유대교 신학자, 미국인)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영혼은 일종의 '피드백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 우리는 여러 선택을 놓고 무작정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었는지를 떠올린다. "이런저런 선택이 있는데 지난 번에는 이걸 선택했었지" 라는 식인 것이다. 마이모니데스*와 에리히 프롬*은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파라오가 매번 모세의 요청을 거절한 것을 두고, 시간이 갈수록 파라오로서는 요청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이 점점 더 쉬워지는 반면,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요청을 수락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피드백 메커니즘'이 계속해서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모세스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1135~1204) : 에스파냐 출신의 유대교 철학자 겸 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유대 신학을 접목시켰으며, 의학 및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중세 유럽의 최고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으며, 나치스의 대두로 인해 1933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주요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 등이 있다.

 

(중략)

 

만약 죽음 직전이 아니고 조금만 더 일찍 자기 죄를 뉘우쳤더라면, 그는 이후 똑같은 상황을 맞아서도 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뉘우침이 갖는 정화의 힘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어느 유대인 한 명을 불러서 자기가 다른 유대인에게 한 짓을 용서해 달라고 강요함으로써, 과연 그가 유대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나치의 시각을 확실히 버렸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치는 유대인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인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서로 대체 가능한 집단으로만 생각했고, 간혹 개별적으로 볼 때도 어느 흑인 한 명이나 백인 한 명이 자기에게 한 짓 때문에 모든 흑인, 모든 백인, 모든 기독교인, 모든 유대인, 모든 독일인을 미워하는 것과 동일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우리 회당에 나오는 어느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세 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저희를 버린 후 줄곧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남편은 재혼하고 다른 주(州)에 가서 잘 사는데, 저는 아이들에게 영화 보러 갈 돈조차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편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당신에게 남편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그가 한 일을 두둔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남편의 행동은 비열하고도 이기적이었으니까요. 제가 용서를 권하는 이유는, 계속 당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서 당신을 괴롭히고 매사에 분노하는 사람으로 만들 자격이 그에게 없기 때문이지요. 남편이 물리적으로 당신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되었듯이, 이제는 감정적으로도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놓지 않는군요. 그를 붙잡는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해칠 뿐이죠."

 

용서란 그 나치가 시몬에게 요청한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 스스로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슬픔을 벗어던지는 것인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유대인 한 사람이 나치를 용서한다는 것은─그럴 리는 없겠지만─결코 "당신이 한 일은 이해할 만하군요.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제 그 일로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오히려 이래야 한다. "당신이 한 일은 참으로 야비하고, 차마 정상적인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희생자로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유대인 전체'로 규정하고, 또 그로써 만족하게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며 다만 거부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치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양심에 속박되어 있을 것이고, 유대인 자신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 해럴드 S.커슈너(Harold S.Kushner, 1933~) : 매사추세츠 주 나틱(Natick)에 위치한 이스라엘 회당(Temple of Israel)의 명예 랍비이며 유대인 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와 클라크 대학(Clark University)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저자로도 유명한 그의 대표작으로는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아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물을 때(When Children Ask About God)>, <삶으로!: 유대인의 존재와 사고에 대한 찬양(To Life!: A Celebration of Jewish Being and Thinking)> 등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막힌 경험 중 하나는,

아픈 뒤 건강해졌음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 랍비 해럴드 S.커슈너(Harold S.Kushner)

 

 

"카를에게 묻고 싶은 것들"

- 로렌스 L.랭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그 SS대원은 자기 입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대인 남녀노소를 한 건물 안에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 SS대원은 불을 피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심지어 아이들까지 포함된─유대인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과연 이처럼 끔찍한 짓을 뉘우치는 것이 '가능'할까? 나로선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사격 명령을 받았을 때, 그 SS대원은 자신의 정신적 고결함을 확인할 수 있는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간이었다(물론 그 전에 다른 범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하지만 상급자의 명령에 고의적으로 미적거리거나 불복하는 대신 기꺼이 방아쇠를 잡아당김으로써, 그는 시험에 실패한 동시에 스스로를 용서의 가능성으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켰다. 다른 범죄에 대해서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럽 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은 결코 일반적인 범죄라고 할 수 없다.

그 범죄자들─그런 범죄를 계획하고 주도하고 저지른 사람 뿐만 아니라 그에 동조한 사람까지도─이 나중에 뭐라고 변명했든지 간에, 홀로코스트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로 남을 것이다. 그토록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누가 감히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 SS대원의 '진심어린' 참회를 높이 평가했지만, 솔직히 그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시몬이 회고한 내용, 즉 나중에 재생된 목소리일 뿐 그의 진짜 목소리는 아니다. 죽어가는 SS대원의 긴 독백은 당시 그가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니라 단지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몸을 둘러싼 붕대 안에 감춰진 내심이 어땠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중략)

 

볼레크는 시몬이 용서하지 않은 것을 너그러이 질책한다. 무방비 상태의 유대인 부자를 살해한 행위를 단순히 '잘못'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우리는 그 범죄를 좀 더 익숙하고도 용서 가능한 사소한 '위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한편, 그 공포의 실체와 직면하는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시몬이 묘사한 볼레크의 대사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상투적인 표현이 흘러넘친다. 내가 생각하기엔, 무방비 상태의 유대인을 학살한 행동을 단순히 '과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그 문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 단지 자신의 신학적 용어에만 얽매인 탓에, 그 풋내기 신부는 범죄자의 무죄를 암시하는 단어의 테피스트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사건의 책임에 대한 부담을 교묘하게 범죄자 측에서 희생자 측으로 전가한 셈이다.

 

'범죄자들의 잠적'은 홀로코스트의 경험이 남긴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그야말로 탄식할 만한 유산이다. 그 SS대원이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도덕적 결정에 대한 부담을 자신의 어깨에서 상대방(어쩌면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의 어깨로 떠넘겼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설적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SS대원의 요구야말로 그가 자기 범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본래 의도까지는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잘못'이니 '과오'니 하는 단어는 가스실과 화장터가 넘쳐나던 아우슈비츠나 마이다네크 같은 장소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 낸 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계속 등장하는 용서와 관련된 단어들─보상, 속죄, 참회, 죄 씻음 등─또한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기존의 사법 용어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사건을 우리 귀에 익숙한 단어로 포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진실을 호도한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고초를 서술한 장 아메리의 명저 <정신의 극한에서>의 독일어 원제는 <범죄와 속죄를 넘어서>이다. 아메리는 이 제목을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극악한 범죄를 평가할 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들을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중략)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시몬 비젠탈이 그 날 그 SS대원을 용서해야 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그 나이 어린 소년은 굳이 아버지를 실망시키면서까지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했을까? 도대체 왜 그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실망시키면서까지 SS에 자원해서(즉, 본인의 자유의지로) 입대했을까? 도대체 왜 그는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그 살인자 무리와 함께 행동하면서, 임종 자리에서 고백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도대체 왜 그는 결국 죽을 때가 되어서야 참회를 하고 용서를 구한 것일까? 이 모든 물음에 대해 그 SS대원은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시몬의 이야기에 내포된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결국 시몬 비젠탈은 그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던 셈이다.

 

※ 로렌스 L.랭어(Lawrence L.Langer, 1929~) : 보스턴 시몬스 칼리지(Simmons College)의 영문학 명예교수다. 대표 저서로는 <홀로코스트와 문학적 상상력(the Holocaust and Literary Imagination)>, <홀로코스트의 증언(Holocaust Trstimonies)>, <홀로코스트를 인정하며: 에세이 선집(Admitting the Holocaust: Collected Essays)> 등이 있다.

 

 

"용서했다면 더 큰 고통에 직면했을 것"

- 프리모 레비 (작가, 이탈리아인)

 

만약 그를 용서하려 했다면, 당신으로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에게 끔찍한 도덕적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경우에 '예' 또는 '아니오'를 확실히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른 한 쪽에서도 뭔가 말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이 경우에 당신은 '해프틀링'*, 즉 희생자로 예정된 존재였습니다. 만약 그 순간 당신이 스스로를 유대 민족 전체의 대변자로 생각하고 그를 용서했더라면, 지금쯤 당신은 그를 용서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느끼는 것보다 더욱 깊은 후회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해프틀링(Ha̋ftling) : '죄수' 또는 '수감자'라는 뜻의 독일어.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말을 비롯하여 '라거(수용소)'* 등의 용어를 독일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거(Lager) : 독일어로 '수용소'를 뜻한다. 역시 프리모 레비 특유의 표현이다.

 

(중략)

 

당신이 묘사한 그 SS대원은 도덕적인 관점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임박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당신이 본 것과 다르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서야, 가령 독일이 패망한 뒤에야 참회했거나 아니면 결코 참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을 한 명 데려다 달라"는 그의 행동은 제 눈엔 그저 유치하고도 뻔뻔스러워 보일 뿐입니다.

제가 그를 뻔뻔스럽다고 하는 까닭은, 그 나치가 다시 한 번 유대인을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요구로 인해 그 죄수가 어떤 위험과 충격에 노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고민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싶어했을 따름입니다.

 

※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 이탈리아 토리노(Torino) 출신의 화학자이며, 국내의 저명한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유명 작가이기도 하다. 제２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해서 체포되었다가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뒤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Is This a Man)>와 <아우슈비츠 생존기(Survival in Auschwitz)>로 유명하다. 그 외의 저서로는 <주기율표(the Periodic Table)>,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the Drowned and the Saved)>, <지금이 아니면 언제?(If Not Now, When?)>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