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김훈

(중략)

수많은, 경이로운 악기들이 거기에 널려 있었다. 악기는 인간의 생명의 모습과 질감을 닮아 있었다. 모든 악기는 인간이 끌어안거나 두들기거나 입술 대기에 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연장(延長)이었으며 꿈의 도구였다. 악기는 스스로 자족(自足)한 세계 안에서 꿈꾸는 듯했으나, 악기는 몸이 지닌 결핍의 보완물로서 불우해 보였다.
이제는 주법(奏法)이 단절되어서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옛 악기들도 진열장 속에 들어 있었다. 악기의 잠은 혼곤했고 아무도 그 잠을 깨울 수 없었지만, 잠든 악기는 그 깊은 잠 속에서 무언가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귀 기울이고 또 기울였으나 들리는 것은 맹렬한 적막 뿐이었다.
 
잠든 악기 앞에서, 그 악기가 통과해 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이 아니다. 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 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
3년 전 겨울, 나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이순신의 칼을 들여다보면서 한 계절을 보냈다. 칼을 들여다보는 일과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나에게는 같았다.
 
2003년 겨울에 나는 그 악기들의 내면의 맹렬한 적막에 관하여 쓰기로 작정을 하고 다시 연필을 쥐고 원고지 앞에 앉았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적막을 어찌 말로 옮길 수 있겠는가. 내 글이 이루지 못한 모든 이야기는 저 잠든 악기 속에 있고, 악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
 
- 2004년 정월 김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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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다오.
니문이 망치를 건넸다. 우륵은 널판들을 차례로 두들기며 귀를 기울였다.
─나무가 소리를 먹는다. 아직도 멀었구나. 이게 다 물건이 되지는 못할 게다.
니문의 시선은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허리춤에 머물렀다. 니문이 물었다.
─소리를 먹는다 하심은….
─소리가 울려서 퍼지지 못하고 안으로 스민다는 말이다. 속이 아직도 습하다는 말이지.
─마른 곳에서만 소리가 납니까?
─그렇지 않다. 허나, 제 몸이 바싹 말라야만 남의 소리를 울려서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금(琴)은 줄의 소리이고 통은 그 울림이다.
─금의 소리는 줄의 것입니까?
─북은 가죽의 소리이고 피리는 바람의 소리이다. 징은 쇠의 소리고 목탁은 나무의 소리다. 소리의 근본은 물(物)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오면, 물이 어찌 사람을 흔드는 것입니까?
─울림이다. 울림에는 주객(主客)이 없다. 그래서 소리가 울릴 때, 물과 사람은 서로 넘나들며 함께 울린다. 개 소리, 꿩 소리, 닭 소리가 다 마찬가지이고 대장간 쇠망치 소리와 다듬이 소리며, 파도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눈길에 소달구지 미끄러지는 소리와 어린아이 울음소리와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다 이와 같다. 이 말이 너무 어려우냐?\
─하오면, 듣는 자가 여럿이면 한 소리가 여러 소리가 되어 소리는 정처 없는 것입니까?
우륵은 멈칫하면서 니문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대숲을 흔들어, 빛들은 뒤집히면서 깨어졌다. 니문의 얼굴 위로 죽고 또 태어나는 빛의 알갱이들이 스쳤다. 우륵은 그 흔들리는 얼굴을 향해 말했다.
─니문아, 네 말이 너무 어렵구나. 이 널판이 악기가 되는 날, 아마도 알 수 있을런가.
 
- 대숲 中


아침에 비가 그치자 강은 부풀었다. 흐름이 빠른 강심 쪽에 여울이 일었고 가장자리를 흐르는 물은 나루 쪽 모래톱과 건너편 갈대숲을 깊숙이 적셨다. 출렁거리면서 먼 산줄기들을 돌아 나온 강은 들판을 건널 때는 순하고 크게 굽이쳤는데, 개포 나루에 이르러서 수면은 들판 언저리까지 차 올라와서 강을 바라보는 사람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듣 싶었다. 우륵은 고물 쪽 어창 바닥에 니문과 마주 앉았다. 우륵은 시간에 실려 출렁거리는 몸을 느꼈다. 사공이 삿대로 물밑을 밀어서 배를 강심 쪽으로 부렸다. 배는 물살 빠른 여울에 올라타서 아래쪽으로 흘렀다. 바람은 강폭을 가득 메웠다. 사공은 부푼 돛을 모로 세워 바람을 걸러냈다. 배는 물이거나 바람이듯이 나아갔다. 여울 위에서 반짝이는 빛들은 흔들리면서 배를 따라왔다. 산 그림자를 지날 때 빛들은 물 밑으로 잠겼고, 산 그림자를 벗어나면 빛들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배가 강 언저리로 다가갈 때 바람에 수런거리는 숲의 소리가 들렸고, 배가 강심으로 흘러갈 때 서로 부딪치는 물의 소리가 들렸다. 숲의 소리는 바람 속에서 일어났다가 바람 속으로 스몄고 물의 소리는 강의 흐름에 실려 재잘거렸다. 숲이 바람에 뒤채이고, 물결들이 부딪쳐 새로운 물결이 솟아날 때마다 빛과 소리는 출렁거렸다. 빛나는 것과 소리 나는 것들이 흐르는 것들 속에서 태어나 거기에 실려서 함께 흘렀다. 상류 쪽으로 해가 기울자 먼 산들은 헐겁게 저물었고 강심 쪽 수면 위에서 빛들은 더욱 들끓었고, 빛과 소리와 물이 함께 여울졌다. 배는 여울을 따라 내려갔다. 물살에 올라탄 사공은 노를 끌어 올려 놓고 키만으로 배를 부렸다.
─니문아, 강이란 참 좋구나.
스승의 어법에 익숙한 니문은 대답하지 않고, 점점 더 붉어지는 먼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스승의 말은 바람 소리나 물 소리처럼 들렸다.
니문아, 여름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새벽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보리밭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억새밭의 바람 소리란 참 좋구나. …니문아, 떡갈나무 숲의 빗소리란 참 좋구나. …니문아, 암말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수말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메추리, 비둘기, 쥐, 까치, 오리, 닭이란 참 좋구나. …니문아, 밭에 쪼그리고 앚은 여자란 참 좋구나. …
스승은 때때로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좋구나, 라고 말할 때 스승의 목소리는 길게 끌리면서 낮아졌다. 스승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니문은 그 말투의 안쪽을 헤집어 보면서 아득함을 느꼈다. 스승의 목소리는 봄과 여름, 새벽과 저녁, 흘러가는 시간들과 살아 있는 것들로 더불어 살아 있으되 더 이상 그것들을 어찌 해 볼 수 없는 체념이나 단절의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좋구나, 라는 스승의 혼잣말에 니문은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또 그 말은 여름의 힘과 새벽의 풋내, 바람의 흔들림과 비의 적심, 암말의 엉덩이와 수말의 갈기와 쥐의 앞발과 닭의 벼슬을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때 니문은 암말의 엉덩이와 수말의 갈기에서 선명한 기쁨을 느꼈다.
니문아, 강이란 참 좋구나, 라는 스승의 말은 결국 니문아, 강이란 강이로구나 또는 강이란 이러하구나, 라고 말하는 것과 같게 들리기도 했다. 그 때 스승의 말은 빈 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도무지 하나 마나한 말과 같았는데, 니문은 그 하나 마나한 말을 깊은 시름처럼 내뱉는 스승의 혼잣말에 웃음을 느꼈다. 니문아, 강이란 참 좋구나, 라고 우륵이 말할 때 니문은 속으로, 스승은 늘 이러하구나, 라고 대답하면서 시선을 먼 곳에 주고 조용히 웃었다. 니문은 보따리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스승께 드렸다. 수면의 빛 속에서 물고기들이 튀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 강 中
 
 
─악사 우륵이옵니다. 출행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의 금(琴)은 어찌 되어 가느냐?
─민촌에서 쓰던 옛 금을 몇 개 얻어서 뜯어 보았습니다. 소리가 조악하고 짜임이 없었습니다. 목재가 마르면 열두 줄짜리 새 금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나무가 저절로 마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살아서 들을 수 있겠느냐?
─비와 바람이 하는 일이오니, 오래 기다려 주소서.
─이제 몸이 급하다. 별에 가서라도 듣고 싶구나.
…소리는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이옵니다. 쇠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
우륵은 그 말을 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침을 삼키고 나서, 우륵은 말했다.
─별의 적막이 금의 소리보다 아름다울 것이옵니다.
─너의 말이 힘들다.
─황공하옵니다.
─들어라. 금이 갖추어지면, 여러 고을의 소리를 따로따로 만들어라. 고을마다 말이 다르고 산천과 비바람이 다르다고 들었다. 그러니 어찌 세상의 소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할 수 있겠느냐. 고을마다 고을의 소리로 살아가게 하여라.
…고을은 이미 무너졌고, 쇠붙이가 무너진 고을들을 가지런히 하고 있사옵니다. …
다시, 우륵은 말을 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리는 본래 고을마다 제가끔인 것이어서, 그것이 여러 고을의 복일 것입니다.
─그러할 것이다. 오래 말하여 피곤하다. 이제 물러가라.
우륵은 물가로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나무들이 밤의 향기를 토해 냈다. 박차를 지르지 않아도 말은 제 신명으로 콧바람을 쏘아 대며 달렸다. 물 속의 달이 말을 따라왔다.
 
- 오줌 中
 
 
니문은 시렁에서 금을 내렸다. 울림통이 없는, 네 줄짜리 금이었다. 니문은 금을 무릎에 안고 켜기 시작했다. 니문은 쥐가 사라진 구멍과 까치가 떠나간 가지를 바라보며 줄을 뜯었다. 손가락이 줄을 튕길 때, 소리는 태어났다. 태어나서 흔들렸고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손가락이 줄을 버릴 때, 줄은 떨렸고 소리는 일어섰다. 떨리던 줄이 고요를 되찾은 후에도 소리는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잦아들었다. 소리가 태어나는 자리와 흔들리는 자리와 사라지는 자리가 어디인지, 니문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나, 소리가 흔들릴 때 그 흔들리는 동안만큼의 시간이 니문의 몸 속으로 흘러 들었다. 니문의 손가락은 줄에서 줄로 건너뛰며 소리를 뜯어냈다. 먼저 태어난 소리와 나중에 태어난 소리가 허공에서 합쳐지고 빗겨갔다. 소리가 빗기는 사이사이에서 새로운 소리가 흔들렸다. 니문의 몸 속에서 시간이 바스러졌다가 다시 살아나 한 줄로 이어지면서 출렁거렸다. 니문은 더욱 빠르게 줄을 뜯어 나갔다. 태어나는 소리와 흔들리는 소리와 사라지는 소리들이 함께 흔들렸다. 니문의 마음 속에, 쥐와 까치가 돌아왔다. 돌아온 쥐가 줄을 따라 달리며 이리저리 기웃거렸고 까치가 금에 내려앉아 부리로 줄을 쪼았다. 니문의 어깨가 흔들렸다.
 
니문은 쥐나 새처럼 근본이 없었다. 알터 마을 개울가에 버려진 핏덩이를 자식 없는 농부가 주워다 길렀다. 개포 나루 창기의 몸에 붙은 대장장이의 씨라고도 했고, 암말과 수꿩이 흘레붙는 마을의 병풍 속 그림에서 나온 아이라고도 했다. 핏덩이를 주워 간 농부는 선왕의 장례 때 순장되었다. 다섯 살 때, 니문은 그 농부와 함께 구덩이에 묻히게 되어 있었으나 그 근본을 더럽게 여긴 집사장이 순장에서 제외시켰다.
저녁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논밭에 내려앉는 흰 왜가리의 날갯짓을 들여다 볼 때, 니문의 눈빛은 빛났고 어깨가 흔들렸다. 빌어먹거나 잡아먹는 그 아이는 늘 강가나 밭두렁에 앉아 있었다. 왜가리 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어린아이의 어깨를 바라보며, 우륵은 속으로 웃었다. 우륵의 웃음은 깊고도 조용했다. 우륵이 니문을 거두어 대문 옆 헛간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을 때, 니문은 열 다섯 살이었다. 그 열 다섯 해를 어떻게 살아 온 것인지 니문은 알지 못했다. 우륵은 묻지 않았고 비화도 묻지 않았다.
 
- 쥐 中
 
 
금관을 쓰고, 금칼을 찬 왕의 시신이 침전 가운데 모셔져 있었다. 태자가 머리맡을 지켰고 그 뒤로 트레머리를 풀어헤친 비빈과 문무 군신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방 안의 울음소리는 가파랐고 마당의 울음소리는 느렸다. 방 안의 울음이 잦아들면 마당의 울음이 일어섰다.
윗목에 앉아 있던 집사장이 우륵의 팔목을 잡아 끌어 옆 방으로 데려갔다. 집사장의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떨렸다.
─지금, 천문이 비색하다. 내일 새벽에 순장자들을 묻으려 하니, 뚜껑이 덮이고 묻기가 끝나면 악사는 산에서 소리를 베풀어 북두에 고하라.
─하관 때 묻는 것이 법도라 알고 있소만….
─한 년이 달아났다. 별자리가 들떠 있어 역심이 번질까 저어한다. 변방 또한 위태로워 나라의 근심이 크다. 우선 저것들을 서둘러 묻어서 천문을 달래야 한다. 법도가 방편을 따라야 할 때다.
차고 푸른 별들이 쏟아질 듯 와글거리던 새벽의 밤하늘이 우륵의 눈 앞에 떠올랐다. 잡힐 듯 가까운 별들이었다. 순장 시녀 한 명이 달아나려고 별들은 그리도 영롱했던 것인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흉흉한 별들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인가. 우륵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간밤에 별들이 맑았소.
집사장이 우륵을 노려보았다. 마당 쪽에서 길고 질긴 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집사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국상 중이다. 너의 말이 요망하구나. 악사가 어찌 천문을 입에 담느냐!
우륵은 고개를 떨구었다.
─송구하오이다. 새벽에 잠이 덜 깨 헛것을 본 모양이오.
집사장은 노기 띤 목소리로 다그쳤다.
─성상께서 유명으로 이르시기를, 여러 고을의 소리를 따로 따로 갖추라 하시었다. 네가 이번 산역에서 그 고을들의 소리를 베풀어 능침을 평안케 할 수 있겠느냐?
─불가한 일이오. 고을들의 소리가 본래 제가끔이나 사람마다의 소리도 제가끔이고 금수나 풍우의 소리 또한 마찬가지요. 그 소리를 고르고 추려서 금으로 베풀기는 쉽지 않소. 그만한 틀이 아직은 마련되지 않았소.
집사장은 숨을 길게 내쉬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고루 묻을 것이니, 그 고을들의 소리가 울려퍼져야 능침이 평안하고 성운(星雲)이 순조로울 것 아니냐. 악사가 소리만 알았지 천지간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소리는 본래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오. …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살아 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평안케 하고 북두를 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 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 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죽일 도리가 없을 것이고, 죽여질 리가 없지 않겠소? 그 또한 모를 일이로되,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소…
우륵은 말이 되어지지 않는 말들을 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침전 큰방에서 태자가 죽은 왕의 입을 벌리고 쌀을 물렸다. 여러 고을들의 낟알이 섞여 있었다. 물릴 때, 죽은 왕의 입이 굳어서 쌀알이 흩어졌다. 태자가 손가락으로 낟알을 주워서 왕의 입에 넣고 입술을 오므렸다. 메마른 입술이 늘어져 흰 쌀알이 내비쳤다. 마당의 울음이 사그라지고 방 안의 울음이 일어섰다. 집사장이 타구를 당겨 가래를 뱉었다.
─일출 전에 묻어야 하는데, 고을의 소리를 갖추지 못했으니 두렵지 않느냐!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기는 하되, 고을들이 따로따로 흩어져 느슨하니 적들이 우리를 넘보는 것 아니겠소.
─그것이 지금 악사의 대답이냐!
─대답은 못 되오만….
─옥체를 덩이쇠 위에 모시고 또 여러 고을의 순장자를 바치는 것이 다 경토(境土)를 지키고자 함이다. 악사가 염려할 일이 따로 있다. 새벽에, 소리를 어찌 할 것이냐?
─아직은 고제(古制)를 따를 뿐이오.
집사장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도리 없으니, 우선 너에게 맡긴다. 허나, 너의 불충은 크다.
…소리가 어찌 충(忠)을 감당할 수 있겠소….
우륵은 말을 밀어 넣었다. 망루로 나가는 내위병들의 횃불이 장지문에 비치었다. 우륵과 집사장의 그림자 두 개가 길게 벽 위에 늘어졌다. 횃불에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림자 속에서, 집사장의 수염은 방바닥에까지 닿았다. 내위병들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말들도 울지 않았다. 횃불이 지나가자 그림자는 사라졌다. 왕이 죽자 침전 구들에는 불을 때지 않았다. 저녁 한기가 서늘했다. 한참 후에 집사장이 말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새벽에 우륵은 능선 위로 올라갔다. 니문과 악공 다섯 명이 뒤를 따랐다. 악공은 대궐 내위군에 딸린 자들이었다. 능선까지는 가파른 달구지 길이 닦여져 있었다. 달은 비스듬했으나 빛이 깊이 스며서 숲의 안쪽까지 들여다 보였다. 이슬이 흠뻑 내려 풀벌레들은 고요했다. 맹렬한 적막 속에서 별들이 와글거렸다. 우륵이 앞서고, 악공들은 말 없이 걸었다. 산 중턱에서부터 무덤의 능선은 시작되었다. 사백 년 역대 왕들의 무덤이었다. 올려다 보이는 무덤들은 윤곽이 겹쳐지면서 산마루턱까지 이어졌다. 뽀얀 달빛이 어둠에 풀려 먼 무덤이 가까워 보였고 가까운 무덤이 멀어 보였다. 길은 무덤들 사이로 파고들지 못하고 무덤의 아래쪽 외곽으로 뻗어 나갔다. 칠부능선 남쪽 사면을 헐어 낸 자리에 넓은 개활지가 드러났고, 거기에 구덩이들이 파여져 있었다. 왕의 석실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구덩이 스무 개가 북두의 별자리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구덩이마다 돌뚜껑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들뜬 흙이 정리되었고, 비질 자국이 선명했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구덩이 속은 깊어 보였다.
지관은 우륵보다 먼저 능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지관은 군졸 셋을 인솔했다. 지관의 군졸들은 가마솥에 불을 때고 있었다. 장작불이 사위었고, 밥 익는 향기가 퍼졌다. 어둠 속에서 시관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가죽신에 감발을 쳐서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검댕칠을 한 지관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지관은 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이슬이 맑소.
우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슬이 넉넉하니 순한 밤이오.
가까운 숲에서 밤 부엉이가 울었다. 북두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지관은 또 말했다.
─서둘러 묻으라는 분부가 계셨소. 뚜껑이 덮인 후에 소리를 베풀어야 할 것이니… 저 쪽에 가 계시오.
지관은 개활지 가장자리의 초막을 가리켰다. 지붕만 있고 담벽이 없는 초막이었다. 우륵은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니문과 악공들이 따라 들어왔다.
 
(중략)
 
지관이 초막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순장례가 끝날 때까지 말소리를 내지 마시오.
산 아래쪽에서 횃불의 대열이 궐문을 빠져나와 능선 쪽으로 향했다. 두 줄로 늘어선 횃불은 우마차 길을 따라 능선 위로 올라왔다. 순장자들을 호송하는 내위군의 횃불이었다. 두 줄의 횃불 사이에서, 정장을 차려 입은 순장자들은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산 위로 올라왔다. 횃불은 무덤을 돌아서 가까이 다가왔다. 모두들 감발을 쳐서,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횃불의 대열은 물 흐르듯이 다가왔다. 흔들리는 불빛에 그림자가 너훌거렸고 도끼날이 번쩍거렸다. 송진이 타는 연기가 길게 흩어졌다. 횃불의 대열은 구덩이가 패어진 개활지 안으로 들어왔다. 순장자들은 꿇어 앉았고, 그 둘레에 군사들이 도열했다. 지관이 나아가 두 번 절하며 대열을 맞았다. 내위장이 대열 앞으로 나와 두 번 절로 답례했다. 순장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대궐 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
지관이 가마솥 쪽의 군졸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군졸들이 솥뚜껑을 열고 삽으로 밥을 휘저었다. 김이 오르고 비릿한 밥 냄새가 퍼졌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밥 냄새는 깊었다. 초막 안에서 우륵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군졸들이 토기에 고봉밥을 담아 내서 구덩이마다 한 그릇씩 가져다 놓았다. 달빛이 밥 속으로 스몄다. 지관이 구덩이들을 차례로 돌며 두 번씩 절했다. 지관은 천천히 돌았다. 달이 기울고, 멀리 강 건너 동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
어두운 산맥의 연봉은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그 끝 쪽에서 가야산의 검은 윤곽은 멀고 완강했다. 북두는 가야산 위로 흘러와 있었다.
 
(중략)
  
지관은 순장자의 대열 앞으로 돌아왔다. 지관은 돌아서서 가야산 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 팔을 쳐들 때 넓은 옷 소매가 바람에 날렸다. 지관은 오래 엎드려 있었다.
내위장이 순장자들의 턱을 손바닥으로 치켜들어 신원을 확인했다. 내위장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네가 알터 농부냐? 이 쪽이 너의 처자식이냐?
─네가 바람 나루 사공이냐? 너는 몇 살이냐?
─네가 구슬터 무당의 딸이냐? 경도는 멎었느냐?
내위장은 신원 확인이 끝난 순장자들을 지관에게 넘겼다. 지관이 넘겨 받은 순장자들을 각자의 구덩이 앞으로 데려갔다. 군사들이 뒤따랐다.
무당의 딸이 흑, 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순장자들이 서로 얼굴을 더듬으며 술렁거렸다. 뒤에서 달려 든 군졸이 도끼로 무당 딸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순장자들은 다시 고요해졌다. 지관이 구덩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무당의 딸을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장자들은 무릎으로 기어서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반듯이 누웠다. 젖먹이가 딸린 농사꾼 내외는 마주 보며 모로 누웠다. 젖먹이는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군사들이 구덩이 안으로 밥그릇을 던졌다. 지관이 두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려 신호를 보냈다. 구덩이마다 지키고 섰던 군사들이 돌뚜껑을 덮었다. 구덩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녀와 근위 무사들은 왕의 석실에 가까운 구덩이로 기어 들어갔다. 시녀들이 구덩이 언저리에서 멈칫거렸다. 군사들이 시녀의 등을 발길로 찼다. 돌뚜껑이 덮혔다.
문무 신하 두 명이 내위장 앞으로 끌려 왔다. 늙은 측신들이었다. 둘 다 몸매가 파리했고 수염이 길었다. 문신과 무신의 정복으로 성장을 하고 있었다. 늙은 신하 두 명은 산 채로 왕의 석실 안에 함께 묻어야 했다. 석실 뚜껑은 왕의 시신을 모신 후에 덮게 되어 있었다. 출상까지는 열흘이 남아 있었다. 내위장은 난감했다. 내위장이 지관에게 물었다.
─어찌해야 하겠느냐?
─열흘이 남았으니… 생장(生葬)은 불가하오.
─흉하지 않겠느냐?
─흉해지겠지요. 허나 토막을 내지는 마시오.
─찌르라는 말이냐?
내위장이 늙은 신하들 앞으로 다가갔다.
─의관을 풀어라. 속옷까지 벗어라.
늙은 신하들은 옷을 벗고 엎드렸다. 마른 등뼈가 솟아올랐다. 지관이 두 번 절했다. 내위장이 창을 쥔 군사들에게 일렀다.
─재워라.
군사들이 엎드린 등을 창으로 찔렀다. 창은 깊숙이 박혔다. 군사들은 표적물을 발길로 차며 창을 빼냈다. 지관은 쓰러진 시체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군사들이 시체에 묻은 피를 물로 씻어내고 다시 옷을 입혔다. 관을 씌우고 요대를 채우고 가죽신을 신겼다. 흩어진 머리카락과 수염을 빗질로 가다듬었다. 지관이 의관을 갖춘 시체 두 구를 석실 안으로 옮겼다. 시체는 덩이쇠 위에 반듯이 뉘어졌다. 문신이 우측, 무신이 좌측이고, 두향(頭向)은 문신이 정동(正東)이고 무신이 정서(正西)였다. 지관이 시체의 머리맡으로 밥 한 그릇씩을 가져다 놓고 두 번 절했다. 열흘 뒤에 왕의 시신이 그 사이로 들어오면 돌뚜껑은 닫힐 것이다. 지관이 초막으로 다가왔다.
─이제 소리를 베풀어 북두에 고하시오.
 
우륵은 석실 앞으로 나아갔다. 니문과 악공 다섯 명이 따라 나왔다. 강 건너 쪽에서 번지는 일출의 노을이 가야산 너머까지 뻗었다. 새벽 노을이 번지는 하늘에서 빛들은 어둠 속으로 녹아 들면서 어둠을 걷어냈다. 하얗게 사윈 별들이 먼 곳으로 불려가고 있었다. 악공들은 석실 앞에서 일렬로 도열했다. 북, 피리, 쇠나팔들이었다. 니문은 네 줄짜리 금을 안았다.
─서두르시오. 일출 전에 끝내야 하오.
지관이 독촉했다. 외곽 쪽 구덩이 속에서 아이 울음이 새어 나왔다. 땅 속에서 재갈이 풀린 모양이었다. 구덩이마다 울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돌뚜껑에 눌린 울음소리는 희미하고 아득했다. 깊은 곳에서 땅이 울리듯이 웅웅거렸다. 내위장이 지관을 불렀다.
─뚜껑 밑이 소란하니, 낭패로구나.
─생장은 무리였소. 허나 곧 조용해질 것이니….
웅웅 소리는 웅웅웅 거리며 퍼져 나갔다. 우륵은 악공들의 대열 앞으로 나왔다.
─북이 길을 열고 피리는 따라라. 쇠나팔은 길을 멀리 뻗게 하고 금은 그 사이를 들고나며 길을 고르게 하라.
북이 울려 새벽 산을 흔들었다. 북소리가 산봉우리들을 멀리 밀어내, 흔들리는 봉우리가 밀려난 자리에서 남은 시간들이 곤두박질로 무너지고 새로운 시간이 돋아나는 환영이 우륵의 눈 앞에 펼쳐졌다. 그 환영에, 무너져 가는 하구의 고을들이 겹쳤다. 북장이는 춤을 추듯이 북틀을 돌면서 가죽을 때리고 북통을 때렸다. 돌뚜껑 아래서 웅웅웅 소리가 멎었다. 피리가 멀리 밀려난 산봉우리들을 다시 불러 들였다. 봉우리들은 흔들리면서 다가왔다. 다시 불려 온 봉우리들은 비에 씻긴 듯 푸르렀다. 피리 소리는 잇닿은 연봉을 따라 가야산 쪽으로 출렁거리며 나아갔다. 쇠나팔이 산과 산 사이를 찢었다. 우륵의 눈 앞에서, 산들은 번개를 맞듯이 하얗게 지워졌다. 나팔 소리의 끝이 땅으로 깔리더니 하늘로 치솟았다.
흔들리는 허공 속에서 니문은 새롭게 짜여지는 바람의 무늬를 보았다. 무늬는 하늘과 들을 가득 채우고, 물결처럼 다가왔고, 흘러갔다. 니문은 그 무늬를 향해, 무늬가 흔들리는 대로 금을 뜯었다. 네 줄짜리 금은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고랑이 팼다. 고랑을 건너뛰기 위하여 니문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소리는 소리의 끝에서 태어났다. 피리가 어두운 봉오리 뒤쪽으로 흘러가고 나팔 소리의 꼬리가 하늘로 치솟았을 때, 북이 뒤로 돌아와 소리들을 밀어냈다. 소리들은 여울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륵은 일어섰다. 우륵은 가야산 쪽을 향해 세 걸음 나아갔다. 오른팔로 허공을 더듬어 내리면서 우륵은 뒤로 돌았다. 왼팔을 추켜들면서 우륵은 다시 뒤로 돌았다. 붉은 허리띠가 너훌거렸다. 몸이 소리를 끌고 나갔고, 몸이 소리에 실려서 흘렀다. 우륵은 날이 밝도록 춤추었다. 아침의 첫 햇살이 가야산에 부딪쳤다. 산은 보라색으로 빛났다.
 
순장자들이 묻히던 밤에서 아침 사이에 하구 쪽 세 고을이 잇달아 무너졌다. 왕의 부음을 받은 수령들이 고을을 비우고 대궐로 향한 직후에, 신라 군대는 기병을 몰아 기습해 왔다. 신라 군대는 강 건너에 미리 포진하고, 수령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고을들은 대적하지 못했다. 싸움은 한나절 만에 끝났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신라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다. 신라 군대는 가야의 관아에 주둔했고, 관아 둘레에 못을 파기 시작했다. 무너진 고을의 수령들은 국장이 끝난 뒤 고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수령들은 대궐에 가까운 민촌을 식객으로 떠돌았다. 봉분을 쌓는 공사는 늦가을에 끝났다. 석실과 스무 개의 구덩이가 하나의 봉분 아래 묻혔다. 무덤의 능선 남쪽 사면으로 새 봉분 하나가 들어섰다. 그 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흰 봉분에 칼바람이 부딪혀 눈보라가 일었다. 봄에, 봉분은 파랗게 피어나서 하늘에 선명한 윤곽을 그렸다.
 
- 구덩이 中


우륵은 돌아누운 비화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았다. 소리가 한 번 일어서고 한 번 사라지면 정처 없듯이 몸과 몸 사이의 일도 한 번 사라지면 가뭇없는 것이라고 우륵은 생각했다. 그래서 비화의 냄새는 날마다 새로운 냄새이고 저 몸 속의 빨아당김도 날마다 새로운 당김이고, 당길 때만 당겨지는 당김일 것이었다. 그 가뭇없이 사라지는 소리의 떨림이 왕의 것일 리도 없고 자미원의 것일 리도 없었다. 고을마다 소리가 다르다 해도, 그 덧없는 한 순간의 떨림이 고을의 것일 리 없고, 다른 소리가 다른 고을에 울려서 소리는 결국 같거나 다름이 없을 것이었다. 쇠붙이를 허리에 차고 쇠붙이 위에서 죽은 왕은 쇠붙이로 막아내지 못한 고을을 소리로 추억하려 했던 것인가. 아니면 땅 위의 고을들이 다 무너진 뒤에 고을의 소리들을 자미원에 모아 놓고 떨리고 흔들리는 소리의 도읍을 세우려 했던 것인가. 왕의 뜻은 알 수 없으되, 비화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있을 때 소리가 왕의 것일 리는 없었다. 왕은 죽었고, 소리는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였다. 그것은 확실했다. 새벽에 우륵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언젠가는 여기를 버리게 될 것 같구려. 아마 그렇게 될 것이오.
비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여기라니요?
─가야 말이오.
─가야가 그리도 힘들던가요. 가야가 아니더라도 이름만 달랐지 다 똑같은 싸움터가 아니던가요. 갈 곳이 따로 있나요?
─갈 곳은 아직 모르오. 허나 가야는 이제 곧 결딴이 날 것이오.
─소리가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상관이 없다 해도 살아야 소리를 내는 것이오. 목숨은 소리와 다르지 않소.
─언제 그런 마음을…?
우륵은 누운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순장자들을 묻던 능선 위의 밤과 땅 밑에서 울음이 웅웅웅 울리던 새벽에 추던 춤이 떠올랐다. 야로의 웃음과 검댕칠을 한 지관의 얼굴과 엎드려서 창을 받던 늙은 군신들의 등뼈도 떠올랐다.
─새벽에 장지에서 춤을 추다가 그런 생각을 했소.
─아…. 가엾어라….
비화가 우륵의 머리를 젖가슴 사이에 품었다.
 
(중략)
 
─어느 고을 물건이냐?
─물혜(勿慧)의 금입니다.
물혜는 비화의 고향이었다. 젊어서 여러 부족장들의 예악을 수발들며 떠돌 때 우륵은 물혜에 머문 적이 있었다. 가을이었는데, 낮고 먼 산줄기들이 바다에 닿아 있었고 강과 들이 넓어서 산에서 퍼지는 노을이 바다를 건너갔다. 비화는 고향을 말하지 않았다. 물혜는 금 한 대로 니문의 무릎에 앉혀졌다.
─뜯어 보아라.
니문은 줄을 뜯었다. 소리는 굵고 무거웠다. 줄과 줄 사이에서 소리의 낭떠러지는 가팔랐다. 소리가 소리의 꼬리를 물지 못했고, 널판이 소리를 맞지 않았다.
─어떠냐?
─소리가 무겁고 축축하옵니다.
─또.
─사이가 거칠고 끊겨서 흐르지 못하옵니다.
─그 뿐이냐?
─달아나는 소리를 붙잡아서 데리고 놀 수가 없습니다.
아하하하…. 우륵은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은 절벽처럼 끊어지고 우륵의 눈빛이 빛났다.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 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 소리는 덧없다. 흔들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소리의 본래 그러함이다. 다시 한 줄 뜯어 보아라.
니문은 엄지로 한 줄을 튕겨 올렸다. 소리가 솓구치더니 긴 떨림을 이끌고 잦아들었다.
─이제 들리느냐?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사는 일과 같다. 목숨이란 곧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리는 동안만이 사는 것이다. 금수나 초목이 다 그와 같다.
─하오면 어째서 새 울음소리는 곱게 들리고 말 울음소리는 추하게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소리가 곱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금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 덧없는 떨림을 엮어내는 틀이다. 그래서 금은 사람의 몸과 같고 소리는 마음과 같은데, 소리를 빚어낼 때 몸과 마음은 같다. 몸이 아니면 소리를 끌어낼 수 없고 마음이 아니면 소리와 함께 떨릴 수가 없는데, 몸과 마음은 함께 떨리는 것이다.
─그 떨림의 끝은 어디이옵니까?
─그 대답은 인간세(人間世)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떨림의 끝은 알 수 없되, 떨림은 시간과 목숨이 어우러지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목숨은 늘 새롭고 새로워서 부대끼는 것이며 시간도 그러하다. 소리는 물러설 자리가 없고 머뭇거릴 자리가 없다.
 
(중략)
 
─어째서 대장장이 야로의 소행을 대궐에 고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이냐?
─야로가 병장기를 신라에 넘기는 일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륵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륵은 백발로 덮인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병장기는 병장기의 흐름을 흘러갈 것이다. 야로의 소행을 대궐에 고하면 가야는 더 빨리 망할지도 모른다. 너는 야로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마라. 물러가라.
우륵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식은땀에 등판이 질척거렸다.
…니문아, 언젠가는 여기를 버려야 할 것이다. 내 말했지 않느냐. 소리는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다. …
우륵은 그 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 현 中
 
 
우륵은 대숲으로 들어갔다. 마른 가을 숲이 작은 바람에도 버스럭거렸다. 바람에 습기가 빠져 버스럭거리는 소리는 튀어 올랐다. 우륵은 오동나무 널판을 두들겼다. 널판의 안쪽에서 거죽으로 울려나오는 소리가 맑았다. 소리는 뒤로 끌리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세게 두드릴 때의 소리와 가볍게 두들길 때의 소리가 크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르게 응글었다. 널판의 안쪽 소리가 널판 거죽의 소리에 치이지 않았다.
…되었구나. 되었나 보다. 되었을 것이다.
널판을 진 니문을 앞세워, 우륵은 대숲을 나왔다. 마당에 짚자리를 깔고 우륵은 니문과 마주 앉았다.
 
(중략)
 
니문이 패어진 널판의 가장자리를 두들겼다. 소리가 일었다. 우륵은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널판의 빈 통 속을 돌면서 흐르다가 밖으로 퍼져 나왔다. 통이 소리를 누르지 않았고, 소리가 통 속을 돌면서 퍼졌다. 우륵의 눈에, 소리는 통 속의 나뭇결을 따라서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소리는 나무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빈 것을 지나 온 소리였다. 빈 통이 단단한 나무의 소리를 펴서 둥글게 돌려내고 있었다.
─니문아, 봐라, 비어야 울리는구나. 소리란 본래 빈 것이다. 비어 있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 놓고, 우륵은 야로의 말투를 닮은 자신의 말이 우스워서 웃었다. 니문은 스승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륵은 널판을 길게 파 나갔다. 통이 길어야 소리가 크게 돌아서 옹글고 편안해졌다. 니문이 인두를 달구어 패어진 통의 안쪽을 지졌다. 푸른 연기가 올랐고, 연기가 흩어지자 짙어진 나이테 무늬에서 윤기가 흘렀다.
우륵은 패어진 통을 뒤집어 놓고 널판 위에 줄을 걸었다. 니문이 얼레를 돌려 줄을 풀었다. 줄은 여러 가닥을 꼰 명주실이었다. 니문이 물었다.
─여러 고을의 금이 석 줄이나 넉 줄인데, 이제 새 금에 몇 줄을 걸어야 하리까?
─열두 줄을 걸자. 열두 줄이면 이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이 담기기에 족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두 손은 능히 열두 줄을 넘나들며 울려낼 수 있다. 더 많아도, 더 적어도 안 될 것이다. 열두 줄이다.
우륵이 널판 왼쪽 끝에 부들을 매고 줄을 걸었다. 가는 줄을 맨 아래쪽에 걸었고, 점차 굵어져 가는 줄들을 그 위쪽으로 걸었다.
─니문아, 다로의 금이 생각나느냐?
─줄을 버팀목으로 고여, 그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다. 새 금에 줄마다 버팀목을 받쳐야 한다.
니문이 야로의 끌로 버팀목 열두 개를 깎아냈다. 우륵은 줄마다 버팀목을 하나씩 받쳐 넣었다. 줄들은 버팀목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었다. 맨 아래쪽 줄은 왼쪽이 길었고 올라가면서 오른쪽 줄이 길어졌다. 금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에 폭이 한 자 세 치로, 사람의 키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다. 굵고 가는 줄들이 가지런히 들어섰고, 버팀목들이 들어선 모양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대열과 같았다.
─니문아, 이것은 곧 사람의 몸이로구나. 끌어안고 뜯어 보아라.
니문이 금을 무릎에 들여 앉혔다. 니문은 오른손 엄지와 장지로 줄을 당겼다. 니문은 엄지의 손톱으로 줄을 밀다가 튕겨냈다. 니문의 왼손이 오른손이 당기고 튕기는 줄을 따라가며 버팀목 왼쪽 줄을 흔들고 누르고 들어올렸고 지웠다. 니문은 솟아나는 소리의 앞을 흔들다가 꼬릿자락을 굴렸고, 꼬리를 누르다가 앞을 들었다. 니문의 손가락이 열두 줄을 아래서 위까지 넘나들며 소리를 뜯어냈다. 니문의 손가락은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처럼 가벼워 보였다.
소리가 울렸고, 울리는 소리가 우륵의 몸 속으로 들어와 흔들렸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소리의 그림자들을 모두 끌어안은 소리였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냈고, 불러낸 소리가 태어나면 앞선 소리는 죽었다. 죽는 소리와 나는 소리가 잇닿았고, 죽는 소리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소리가 솟아, 소리는 생멸을 부딪쳐 가며 펼쳐졌고 또 흘러갔다. 소리들은 낯설었고, 낯설어서 반가웠으며, 친숙했다.
 
(중략)
 
우륵이 금을 안고, 니문이 피리를 잡았다. 겨울날이 투명해서 기러기 울음소리에 날개 치는 소리가 묻어오는 듯 했다.
─니문아, 짐승을 보지 말고 너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불어 보아라.
니문의 피리 소리는 깊고 가파른 굴곡을 이루며 흘러가다가 여울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니문아, 금과 피리는 어떻게 다르냐?
─피리는 숨을 길게 내서 소리를 끌고 갈 수 있지만 금은 소리를 한 번 튕기면 그만입니다. 또 피리는 숨의 크기로 소리의 크기를 바꿀 수 있지만, 금의 소리는 한 번 울리면 크기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모두 몸의 일이다. 숨이 소리를 끌거나 밀고, 손가락이 소리를 튕기는 것이다.
─하오면 소리는 몸 속에 있는 것입니까?
─소리는 몸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 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 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 주는 것이다. 소리는 곧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바로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는 거스를 수 없다.
─사람의 말소리는 어떠합니까?
─말소리나 노래도 그러할 것이다. 몸 속의 숨이 세상의 바람과 부딪치고 비벼져서 떨리는 동안만이 소리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같은 말소리나 같은 노래란 없는 것이다.
─북소리는 어떠합니까?
─북소리도 그와 같다. 모든 북소리는 새롭게 태어나는 북소리다. 북소리가 한 번 쾅 울릴 때, 세상은 그 이전에 없었던 세상으로 새로이 열리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소리를 빌리고 사람의 마음이 소리를 이끌어, 그 새로움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운 소리에 사람이 실려서 사람도 새로운 것이다.
우륵이 열두 줄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늙고 거친 손등에 저승꽃이 피어 있었다. 순장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던 백성들과 고을들을 태우고 부수는 연기와 말 먼지, 우물과 시궁창을 메우고 썩어 가던 시체들이 우륵의 눈 앞에 떠올랐다. 다로의 넓은 들을 크게 굽이치는 강과 바람에 서걱이던 달기의 숲과 별과 물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시간의 소리가 몰려오던 물혜의 바닷가도 떠올랐다. 그 여러 고을 사람들의 말투는 느리거나 빨랐고 치솟거나 주저앉아 고을마다 달랐다.
열두 줄은 위로 올라갈수록 굵고 소리는 점점 넓어져서 아랫줄과 윗줄 사이는 이 세상의 넓이만큼 넓었다. 제가끔의 소리가 깃든 줄들이 가지런히 늘어서서 그 넓이를 메웠다.
우륵이 손을 펼쳤다. 우륵의 손아귀 안에 그 넓은 세상은 잡혔고, 우륵의 손은 그 세상과 더불어 편안하였다. 열두 줄은 길고 또 넓어서 여러 고을의 금들이 그 열두 줄 안에 스스로 합쳐져 사라지고 사라짐으로써 또 살아남을 만했다.
우륵이 줄을 뜯었다. 둥글고 영근 소리가 솟았다. 소리는 느리게 흘러서 크게 굽이치다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더니 다시 모여들었다.
─니문아, 이 소리는 어떠냐?
─다로의 들이 떠오릅니다.
우륵이 크게 웃었다.
─내 마음이 다로의 들로 달려가는 소리다.
그것은 다로의 소리였다.
우륵이 다시 줄을 뜯었다. 소리는 가파르게 치솟아 급한 물살을 이루었고 다시 잘게 갈라져 흩어졌다. 달기의 소리였다.
다시 소리는 여러 갈래가 휘몰아치면서 부딪치고 깨어졌다. 부딪히는 소리들이 쏟아져 내리면서 다시 가지런한 가락을 잡아 나갔다. 물혜의 소리였다.
무너진 고을들이었고, 신라가 고을을 부순 뒤 다시 군대를 거두어들여 이제는 어느 나라도 아닌 고을들이었다.
 
- 기러기 떼 中


태자의 봉분이 들어선 뒤, 니문은 살던 집을 비워 놓고 우륵의 집 아래채로 옮겼다. 봄, 가을로 빈과 월광을 문후하는 신라의 관원을 맞는 자리에 나갈 때 이외에는 아라가 순장된 뒤로 우륵은 금을 만지지 않았다.
우륵은 열두 줄짜리 새 금을 방구석에 세워 놓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금의 열두 줄은 널판 위에 가득 차서, 줄들은 넓고 가지런했다. 버팀목 열두 개가 사선을 그리며 줄들을 건너가고 있었다. 금은 세상의 넓이만큼 넓어 보였는데, 그 넓이는 모두 사람의 손아귀에 잡힐 만했고, 줄을 넘나들며 뜯고 튕기고 누르고 들어올리는 손가락 끝의 떨림이 세상의 넓이 속으로 스며들 만했다. 햇살이 마르고 공기가 바스락거리는 가을날, 열두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서 끊어질 듯 했는데, 그 때 줄들은 사람의 손가락이 닿지 않더라도 스치는 바람결에 닿아 바람 속으로 소리를 실어낼 듯 했으며, 먼 고을들이 무너지는 소리나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나 닭 우는 소리가 줄에 닿아서 그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를 실려 보낼 듯 싶었다. 우륵은 금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였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우륵의 귀는 적막의 끝에 닿았다. 닿았다기보다는 귀가 거기로 끝없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는데, 귀가 다가갈수록 소리는 모든 소리의 자취와 떨림들을 몰고 더 멀리 물러나는 것이어서, 거기는 소리의 나라라기보다는 시간의 나라인 듯 싶었다. 우륵의 귀는 더 멀리 뻗어나가 시간의 나라로 넘어 들어갔다. 시간의 나라는 여름도 겨울도 아니었고 낮도 밤도 아니었는데 차갑고 어슴푸레해서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었다. 거기는 가장자리에 닿을 수 없이 넓고 아득한 나라였다. 그 나라의 먼 가장자리 너머에서 무수한 가루 같은 것들이 반짝이며 하늘로 퍼져 올라 길게 이어지면서 흔들리며 다가왔고, 사라졌으며, 쉴 새 없이 피어 올랐다. 소리들은 새처럼 그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달빛이 방 안 깊숙이 비치는 밤에 금의 열두 줄이 널판에 드러난 나이테 무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빛이 나이테 무늬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림자 열두 줄은 흐리게 풀어졌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 줄의 그림자는 아래서부터 지워졌고 달이 구름을 벗어날 때 그림자는 윗줄에서부터 다시 살아났다. 차례로 사라지고 또 드러나는 줄의 그림자들이 나이테 무늬를 스쳤다. 그 때, 금은 사람의 손가락이 닿지 않아도, 바람이 스치지 않아도, 새롭게 밀려오는 시간에 부대끼며 스스로 소리를 낼 듯 싶었다. 우륵은 귀를 기울였다. 우륵의 귀는 멀리 나아갔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중략)
 
─니문아, 요즘도 봉분 쪽을 맥없이 쳐다보며 소리를 듣느냐?
니문이 고개를 숙였다.
─봉분 쪽에 소리는 없었습니다.
─쳐다보지 마라. 아라는 죽었다. 소리는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다.
니문의 눈에 눈물이 비치는 듯했다. 우륵이 니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니문아, 내가 비록 여러 고을들의 소리를 챙겨서 금에 담았다고 하나, 소리는 본래 나라가 없는 것이다.
니문이 고개를 들었다.
─짐승이나 버러지 속에도 소리가 있을 터인데, 어찌 고을들의 소리가 없겠습니까?
─고을들의 소리가 있다. 고을마다 왕이 있어, 고을마다 순장이 있고 봉분이 있다. 허나, 소리에 나라가 없어야 그 고을들의 소리를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니문아, 너는 알겠느냐?
니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니문이 다시 술을 따랐다. 무덤의 능선 쪽으로 해가 저물어, 아래쪽 태자의 봉분은 어둠에 잠겼다. 한참 후에 우륵은 말했다.
─니문아, 이제 신라가 들이닥치기 전에 가야를 떠나야 한다. 가야를 버려야 한다. 신라가 닥치면, 금도 목숨도 온전할 수 없다.
─어디로 가면 금과 목숨이 함께 온전하리이까?
니문의 마음 속에 풍문으로 들은 우산(于山)이 떠올랐다. 해 뜨는 쪽을 향해 몇 날이고 한없이 바다를 나아가면 가없는 물 한가운데 섬이 있는데, 신라 이사부가 그 섬을 찾았다고 하나 아직은 어느 나라도 아니라는 섬이었다. 풍문이 전하기를, 날마다 섬 뒤쪽에서 해가 뜨고 저무는 해가 다시 섬 뒤쪽으로 돌아와 섬은 늘 밝아서 대낮이었고 사람들은 고기 잡고 밭 갈아 살았으되 나라가 없어 왕도 없고 봉분도 없다고 했다. …스승은 지금 열두 줄 금을 안고 그 먼 섬으로 가려 하시는 것인가…. 큰 강의 물길에 잇따라 가야의 고을들이 번창했을 무렵에, 가야의 선조들이 하구에서 바다를 건너 왜(倭)로 들어가 거기에 이루어 놓았다는 여러 고을들도 니문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 고을은 아늑하고 기름진 땅이었고, 왜왕의 군대도 신라나 백제의 군대도 닿을 수 없는 땅이라고, 백성들은 대를 물려 가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왔다.
…스승은 금을 안고 왜로 건너가시려는 것인가. 허나 하구는 이미 가야가 아니고 이사부의 배가 아니라면 어찌 그 너른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는가….
우륵은 한동안 잠자코 앉아서 능선 너머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라가 죽을 때 그 능선에서 금을 뜯고 춤을 추던 자신의 모습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니문은 다시 물었다.
─가시려는 곳이 우산입니까?
─…….
니문은 거듭 물었다.
─왜로 가시렵니까?
─아니다.
─하오면 어디로….
─신라로 가겠다.
니문이 고개를 들고 우륵의 얼굴을 살폈다. 스승의 눈동자는 동자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고 입가에 엷은 미소가 비꼈는데, 웃음인지 슬픔인지 어두워서 구별할 수 없었다.
─하필 적의 나라로…?
─가야는 지옥이다. 신라는 더 깊고 더 뜨거운 지옥일 것이다. 그리로 가야 살 수 있다. 때가 거의 되었다. 니문아, 금을 들고 더 깊은 지옥으로 가자.
우륵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호했다. 우륵은 잔을 들었다. 우륵은 술 한 모금을 깊이 밀어 넣었다. 어느 강을 건너고, 어느 산맥을 넘어야 신라로 가는 길인지, 니문은 알 수 없었다. 니문은 취해서 비틀거리는 우륵을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략)
  
우륵은 말없이 삽질로 땅을 팠다. 관이 겨우 덮여질 만큼, 얕은 깊이였다. 니문이 구덩이 속으로 관을 밀어 넣었다. 우륵은 흙으로 관을 덮고 마른 댓잎을 모아 그 위에 깔았다. 관이 묻힌 자리는 땅을 파기 전과 똑같았다. 댓잎이 바람에 날리며 버스럭거렸다. 니문이 삽질로 그 위에 흙을 쌓기 시작했다. 우륵이 니문의 삽을 빼앗았다.
─봉분은 쌓지 마라. 우리는 가야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평평해도 좋지 않겠느냐?
비화가 묻힌 자리는 평평했다. 봄에 대 뿌리가 무덤 자리로 넘어 들어와 새 순이 돋았다.
 
우륵은 개포 나루의 버려진 색주가 토방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나루터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강을 따라 들어선 군막과 대장간들은 비었고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빈 군막들이 말똥 냄새를 풍겼고 대장간 화덕에는 불 냄새가 배어 있었다.
니문은 빈 군막 두 채를 헐어냈다. 니문은 기둥과 서까래를 뽑아서 통나무를 골라냈다. 우륵은 나루터 북쪽 산 속으로 들어가서 칡넝쿨을 걷어 왔다. 마구간 울타리를 엮었던 삼줄을 풀어냈다. 니문이 통나무를 모래밭에 펼쳐 놓고 칡넝쿨과 삼줄로 묶어 나갔다. 뗏목을 엮는 데 이틀이 걸렸다.
새벽에, 우륵은 금을 등에 지고 뗏목에 올랐다. 날이 가물어 강물은 낮아졌고 젖은 모래가 드러났다. 니문이 삿대로 강바닥을 밀어 뗏목을 강심 쪽으로 몰아갔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건너편 강 언덕이 희미했다. 뗏목은 강 건너편 나루로 향하고 있었다. 뗏목 앞쪽이 물살에 밀렸다. 니문은 삿대를 비스듬히 박고 길게 밀어냈다.
상류 쪽에서 해가 능선 위로 올라섰다. 먼 데서부터 어둠이 걷히고 새벽 산이 다가왔다. 먼 산이 밝았고 가까운 산은 어두워, 산들은 멀어지면 빛났다. 산들은 젖어 있었다. 물 위로 빛이 깔렸다. 햇살이 닿는 먼 상류 쪽에서부터 수면이 드러났다. 빛들은 수면을 따라 흘러내려왔다. 멀리서 타오르던 빛들은 가까이 오면서 유순해졌고, 하류 쪽으로 흐르면서 어두워졌다.
강심에서부터, 니문은 삿대를 올려놓고 노를 저었다.
우륵은 손을 강물에 담갔다. 빛의 알맹이들을 튕겨내는 잔물살들이 우륵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맞은편 나루는 무너져 있었다. 니문은 나루 아래쪽 모래밭으로 뗏목을 들이댔다. 우륵은 내려섰다. 굽은 등에 금을 친 우륵의 그림자가 수면 위로 길게 늘어졌다.
거기서부터 우륵은 신라군의 서부 전초를 향해 산길을 걸었다.
 
- 뱀 中
 
 
─얼마 전에 서라벌로부터 통지가 있었다. 네가 가야의 악사 우륵이냐?
─그러하오.
─네가 너희 대궐에 온 우리 사신 편에 귀부의 뜻을 서라벌로 전했느냐?
─그러하오.
─이 변방 산성에까지 어떻게 왔느냐?
─개포 나루 건너 귀국의 서부 전초에 의탁했소. 귀국의 사신이 그리 일러 주었소.
─데리고 온 자는 누구냐?
─내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오.
─귀부하는 뜻이 무엇이냐?
─이제 신라 병부령께서 가야를 토벌하실 것이니,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
─그 뿐이냐?
─그 뿐이오.
─너는 가야의 녹을 받았느냐?
─많지는 않았소.
─가야의 악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
─왕들이 죽으면,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금을 뜯으며 소리를 베풀었소.
─왕의 장례에 소리를 베풀며 녹을 받던 자가 적국으로 귀부함이 온당하냐?
─귀국의 도끼에 맞아 죽는 것 또한 온당치 못할 것이오.
이사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부는 온 몸을 흔들며 웃었다.
─그렇겠구나. 세상에, 온당하기란 쉽지가 않구나. 내, 풍편에 들었다. 너의 소리가 그리도 절묘하냐?
─나의 소리가 아니라, 본래 스스로 흘러가는 소리요.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
─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 더 잘 아시리이다.
이사부는 숙사 아래쪽 들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구덩이는 흙으로 덮여졌고, 보졸들이 그 아래쪽으로 배수로를 파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로구나. 너는 몇 살이냐?
─올해, 일흔 살이오.
─그 또한 나와 같구나. 내가 죽인 야로도 일흔이라 하더라. 오래들 살아 왔다.
─하온데, 신라 병부령께서 어찌 가야의 대장장이를 아시오?
─너처럼, 야로도 얼마 전에 나에게 귀부하여 살 길을 청하였다. 야로의 병장기가 국경을 넘나들어 내 너무 힘들어서 야로를 죽였다. 죽여서 모든 시체들과 함께 쇠붙이 위에 묻었다.
─가야 왕의 무덤들이 그러하오.
─그러하냐? 그러하겠구나. 그러고 보니 신라왕들의 무덤도 대체로 그러하다.
이사부는 니문이 메고 있는 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것이 너의 금이냐? 한 번 보여 다오.
니문이 금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가까이 가져오라.
이사부는 금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이것이 가야의 금이냐?
─그것이 가야의 금이오. 가야 여러 고을들의 소리의 틀이요. 그리고 아마 모든 나라의 금이오.
─내가 한 번 튕겨도 좋겠느냐?
─심하게 당기지는 마시오.
이사부는 줄을 쥐고 튕겼다. 소리가 솟아올랐다. 둥글고 단단한 소리였다. 소리의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이사부는 귀를 기울였다. 사라지는 소리의 끝에서, 서라벌 홍륜사의 종소리가 다시 일어나 일몰의 산맥 너머로 흘러가는 환영이 이사부의 눈 앞에 스쳤다. 군마와 병장기를 이끌고 또 묻으면서 그 산맥들을 다 건너갈 수 있을 것인지…. 이사부는 오래 침묵했다.
─그래, 네가 나에게서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나를 그저 내버려 두시오. 신라가 가야를 멸하더라도, 신라의 땅에서 가야의 금을 뜯을 수 있게 해 주시오.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 주시오.
이사부는 섬칫 놀랐다. …이 자는 대체 누구인가. 이 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자가 소리로 저 산맥을 건너가려는 것인가. 이 자는 나와 같은 자인가. 이 자는 나의 적인가. 양쪽 다인가. …
이사부는 말했다.
─무인이 악사를 죽여서 무슨 득이 있겠느냐. 병장기를 지니고 있지 않으니, 우선 너를 살려 둔다. 허나, 여기는 군영이다. 악사가 머물 곳이 아니다. 너는 낭성(娘城)의 민촌으로 가라. 거기는 신라의 내륙 본부 변방이다. 외치고 적막하여 금을 켜기에 좋을 것이다. 내, 그 곳의 전초 병력에 일러 너의 정처와 양식을 마련해 주마.
 
(중략)
 
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우륵은 낭성에 머물렀다. 신라의 군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무너진 집 한 채를 고쳐 주었고, 때때로 보리쌀이나 소금이나 사냥에서 잡은 산짐승을 보내 오기도 했다.
우륵은 겨우내 금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백발이 흘러내려 수염에 닿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뒤섞여 배 위로 흘러내렸다. 니문이 돌을 달구어 우륵의 다친 무릎에 찜질을 했고 명아주나무로 지팡이를 깎아 우륵의 손에 쥐어 주었다.
봄에, 우륵은 지팡이를 짚고 밭두렁에 나와 앉아 볕바라기로 소일했다. 봄바람에 수염을 날리면서 우륵은 봄볕에 풀어지는 흙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곤 했다. 흙 속으로 햇살이 스며, 얼었던 땅은 솟았고, 들뜬 흙의 틈새로 벌어진 잔 구멍들 속에서 햇살이 오글거렸다. 녹은 흙에 물기가 흘렸고 흙 구멍마다 젖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녹아서 젖은 흙의 구멍들은 날마다 조금씩 벌어졌고, 햇살은 흙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스몄다. 우륵은 흙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땅 속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고, 그 들려 오는 듯한 소리 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아, 소리란 얼마나 먼 것이냐. 몸이 그 먼 소리를 당기는구나. 당겨서 베풀어 내는구나. 그러니 소리는 또 얼마나 가까운 것이냐…. 니문이 밥을 차려 놓고 부르러 올 때까지 우륵은 밭두렁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흙 냄새가 번질 때, 우륵은 죽은 비화의 몸 냄새를 생각했다. 산 것의 냄새는 스치고 지나가면 그 뿐이었고, 날마다 새로운 냄새가 솟아나는 듯 했었다. 그 겨드랑에 코를 박고 냄새를 들이마실 때, 냄새는 거꾸로 거스를 수 없었고 붙잡을 수 없었고, 새롭게 생겨나되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흙을 스치는 바람이, 그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멀리서부터 되돌려 실어 오는 듯 했으나, 그 먼 냄새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흘러 들어온 백성들이 땅에 코를 박고 봄 일을 시작했다. 소가 없는 백성들은 몸에 쟁기를 묶어서 끌었고, 산맥은 봄꽃을 품어냈다. 가끔씩, 백제가 쌓은 분수대에서 신라의 봉화가 올라 산맥을 건너갔으나, 낭성은 신라도 백제도 아닌 듯 싶었다.
산지 사방에서 떠돌아 들어온 백성들이 끼니 때면 밭두렁에 모여 앉아 뭐라고 지껄이며 떠들어 댔다. 백제 원주민들의 말은 느리고 순해서 출렁거림이 적었고 말의 끝이 느슨하게 열려 있었다. 신라에서 넘어 온 지방민들의 말은 크고 빠르게 출렁거렸고, 말의 끝이 치켜 올려져 있었으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의 말은 둥글거나 각져 있었고, 가파르거나 느슨해서 제가끔이었다. 꽃가루가 날려 희뿌옇던 산맥은 꽃이 걷히자 푸른 등허리로 번쩍거렸다. 봄이 다 가도록, 우륵은 밭두렁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봄이 다 가도록, 우륵은 금을 만지지 않았다.
 
- 주인 없는 소리 中


니문이 지게를 지고 우륵의 발치에 꿇어 앉았다. 지게 앞쪽에 금이 실려 있었다. 우륵은 금의 뒤쪽으로 지게에 올랐다. 우륵은 두 손으로 지게 뿔을 잡았다. 니문이 작대기로 땅을 밀고 일어섰다. 지게 위에서 우륵이 말했다.
─니문아, 무겁지 않느냐?
─무거우나, 견딜 만 하옵니다.
스승의 몸이 가벼워서, 니문은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걸었다. 니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 아래로 늘어진 우륵의 다리가 흔들렸다. 낭성의 민촌에서 하림까지는 꼬박 하루 걸음이었다.
며칠 전에, 말 탄 전령이 낭성의 민촌으로 달려와 사월 보름날 저녁까지 하림성으로 들어오라는 이사부의 명을 우륵에게 전했다. 전령은 병부령의 명령임을 강조했다. 부르는 까닭을 묻자 전령은, 신라왕의 순행 대열이 하림성에 당도하여 왕이 군사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다. 군장은 낭성에서 하림성에 이르는 길을 자세히 일러 주고 나서, 가지고 온 술 한 통과 말린 사슴 넓적다리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보름까지는 닷새가 남아 있었다.
그 날 밤, 우륵은 니문과 마당에서 마주 앉아 신라 전령이 가져온 술을 마셨다. 술을 넘길 때 우륵의 늙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니문아, 이제 신라왕 앞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내야 하는 모양이다.
─여기는 신라의 땅이옵니다.
─그렇구나. 니문아, 죽은 가야왕의 무덤에서 춤을 추는 것과 산 신라왕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다르겠느냐?
─아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소리는 스스로 울리는 것입니다.
─이제, 신라가 가야를 토벌한다 해도 그것이 다르지 않을 것이냐?
─소리는 왕의 것이 아니니, 아마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륵은 소리 내서 웃었다. 니문은 스승의 큰 웃음소리에 놀라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늙어서 짓무른 눈가에 눈물이 번진 듯했다.
─보름날, 하림성으로 가자. 가서 무너진 이 낭성의 소리를 들려 주자.
그 날 밤 우륵은 취해서 먹은 것을 토했다. 니문이 우륵을 눕히고 옷을 갈아 입혔다.
 
(중략)
 
─갈아 입어라. 신라 금척(琴尺)의 옷이다. 마침 행궁에 준비된 것이 있었다.
우륵은 입었던 옷을 벗었다. 마른 뼈 위로 늘어진 가죽에 저승꽃이 번져 있었다. 우륵은 신라 금척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니문도 갈아 입었다. 붉은 비단옷이었다. 각진 소매가 늘어졌고 깃이 넓었고 허리에 금실로 꼰 띠를 둘렀다. 띠의 매듭이 발목에 닿았다.
─내, 폐하께 너희 둘의 일을 이미 아뢰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폐하께서 물으시는 말에만 대답하라. 대답이 길어서는 안 된다. 문에 들어서면서 멀리서 절하고, 부르시면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절하라. 따르라.
내관이 대전 문을 열었다. 왕은 먼 안쪽 옥좌에 앉아 있었다. 날 출(出)자 관에서 구슬이 반짝였다. 금술을 드리운 도끼 두 자루가 왕의 등 뒷벽에 엇물려 ㄱㄹ려 있었다. 그 앞으로 갑옷을 입은 신라 군장들이 두 줄로 도열했고, 이사부가 대열의 맨 앞자리로 앉았다.
문지방을 건너서, 우륵은 왕을 향해 절했다. 우륵은 두 팔을 치켜올려서 머리 위에서 손을 모았다. 신라 금척의 옷소매가 넓게 펼쳐졌다. 우륵은 몸을 낮추고 허리를 수그렸다. 신라 금척의 옷 속에서 다친 무릎이 쑤셨다. 우륵은 두 손을 모아 마룻바닥에 대고, 손등 위에 이마를 얹었다. 멀리서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라.
우륵은 일어서서 다가갔다. 다가가서 우륵은 다시 절했다.
─얼굴을 들어라.
우륵은 고개를 들었다. 젊은 왕의 얼굴이 열아홉 살의 혈기로 빛났고 목소리는 깊었다.
─네가 스스로 금을 메고 강을 건너 오니 어여쁘다. 내, 새로 얻은 백성과 오래 된 백성들을 두루 어루만져 기를 것이니 너는 과인의 나라에 의탁하여 심신을 편케 하고 너의 소리를 펴게 하라. 소리를 들어 보자.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 가는 소리를 들어 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우륵의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왼손이 둥근 파문으로 벌어져 가는 소리를 눌렀다. 소리는 잔무늬로 번지면서 내려앉았고, 내려앉는 소리의 끝이 감겼다. 다시 우륵이 세 번째 줄을 튕겼다.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았다. 솟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다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더욱 눌렀다. 소리의 방울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잔 방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맨 윗줄을 튕겼다. 깊고 아득한 소리가 솟았다. 솟아서 내려앉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지웠다. 지우면서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세 번째 줄을 당겼다. 당기면서, 다시 우륵의 왼손이 소리를 들어올렸다. 올려진 소리는 넘실대며 다가왔다. 다가오는 소리를, 다시, 우륵의 왼손이 눌렀다. 우륵의 몸이 소리 속으로 퍼져 나갔고 소리가 몸 속으로 흘러 들었다. 몸은 소리에 실려, 없었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 나갔고, 흘러 나간 몸이 다시 돌아와 줄을 당겼다. 열두 줄은 우륵의 손바닥에 가득 찼다. 손바닥 안에서 열두 줄은 넉넉했다. 우륵의 손가락은 열두 줄을 바쁘게 넘나들었다. 손가락들은 바빴으나, 가벼워서 한가해 보였다.
니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라 금척의 옷소매가 위로 치켜올려졌다. 우륵의 소리가 먼 곳에서 돌아올 때, 니문의 소매가 허공을 곡강(曲江)으로 쓸어내리며 돌아섰다. 우륵의 소리가 솟을 때 니문의 소매가 옆으로 돌면서 아래를 쓸어올렸다. 허리띠 매듭이 둥글게 펴지면서 펄럭였다. 우륵의 소리가 여울졌다. 여울진 소리는 빠르고 가벼웠다. 니문은 반 걸음 나아가서 다시 반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비켜서면서 멀리 나간 두 팔을 불러 들이며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다시 두 팔을 태극으로 펼쳐들어 허공을 쓸었다.
소리가 멎고, 니문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이사부가 말했다.
─악사의 춤을 보여라.
우륵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니문이 금을 안았다. 우륵의 팔이 소매를 뻗어 허공을 각으로 끊어냈다. 허공은 부서졌다. 펼쳐진 소매가 돌면서 부서진 허공을 지웠다. 지우고 나서 소매는 가슴에 모였다. 소매가 다시 뻗어나가 새 허공을 움켜쥐었다. 소매는 새 허공을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서, 안고 돌았다. 새 허공 속으로, 허리띠 매듭이 나부꼈다. 우륵은 앞으로 한 걸음 나가면서 몸을 낮추었다. 우륵은 몸을 일으키면서 소매를 위로 펼쳤다. 펼쳐서 쓸어 내리며 안으로 당겨서 뒤로 돌았다. 우륵의 소매에서 부서진 공간의 파편들이 흘러내렸다. 우륵의 춤이 니문의 소리를 이끌었고, 니문의 소리가 우륵의 춤을 밀어냈다.
왕이 말했다.
─더 가까이 오너라.
우륵은 다가갔다.
─지금 그 소리가 무슨 연유가 있는 소리냐?
우륵은 대답했다.
─대왕께서 부수신 낭성 옛 백제 고을의 소리이옵니다.
왕이 우륵을 노려보았다.
─그 고을의 소리를 어찌 금에 담았느냐?
─무너진 고을에 살아남은 백성들의 소리를 한 토막씩 주워서 다듬고 이었사옵니다.
─너의 말이 거칠다. 무너진 고을이 아니다. 새로 얻은 고을이다. 다시 말하여 보아라.
─대왕께서 새로 얻으신 고을에….
─되었다. 그만 하라. 그러면 너희 무너진 가야 여러 고을들의 소리도 너의 금 안에 담겨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어느 고을들이냐?
─물혜, 달기, 다로, 가라, 기물, 알터, 바람터, 노루목과 여러 강가 마을들의 소리이옵니다. 고을의 소리로되, 고을을 넘어가는 소리이옵니다.
─그러니, 너의 금은 나의 나라와 같구나!
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왕은 손으로 옥좌 팔걸이를 두들기며 웃었다. 이사부는 몸을 흔들며 웃었다. 도열에 있던 군장 오십 명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들의 웃음소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우륵은 구부린 등 위를 밟고 지나가는 웃음소리를 느꼈다. 다시 왕이 말했다.
─너의 금을 보여라.
내관이 금을 들어서 왕 앞에 바쳤다. 왕은 미소 띤 얼굴로 금을 내려다 보았다.
─아름답구나. 헌데, 왜 하필 열두 줄이냐?
우륵은 대답했다.
─열두 줄이 세상을 아우르기에 모자람이 없고, 사람의 손에 잡혀 넉넉하고 또 가지런한 것입니다.
─너의 말이 아름답다. 그러니 너의 금은 나의 나라와 같다.
왕은 또 크게 웃었다. 군장들이 일제히 따라 웃었다. 군장들의 웃음을 따라서 왕은 더 크게 웃었고, 왕이 더 크게 웃자 군장들은 더욱 웃었다. 군장들은 주먹으로 마루를 치며 웃었다.
─네가 지금 사는 곳이 낭성이냐?
─그러하옵니다.
왕이 이사부에게 물었다.
─낭성은 어떠한 마을이오?
─백제와 고구려가 번갈아 들이닥쳐, 폐하의 땅이 된 지 오래지 않습니다. 아직도 들뜬 백성들은 짐승과도 같고 논밭은 버려져 있사옵니다. 속히 지방민들을 옮겨 살게 할 작정이옵니다.
왕이 우륵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 낭성을 꺼나서 국원(國原)으로 가라. 국원은 새로 차지한 고을로 지금은 어수선하나 삼한의 중심이다. 내 거기 소경(小京)을 열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새로운 왕도(王都)를 세우려 한다. 너를 위해 국원에 거처를 마련해 주마. 너는 국원에 살면서 너의 소리를 과인의 나라의 소리로 키워라.
우륵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는 스스로 스러지는 것이옵니다…. 우륵은 말을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륵은 보름 동안 하림성에 머물렀다. 저녁이면 왕의 술자리에 불려가 노래하고 춤추고 금을 뜯었다. 왕은 저녁마다 크게 웃었다. 너의 금은 나의 나라와 같다, 를 술 취한 왕은 거듭 말했다. 강 건너 산맥에 산벚이 피어 꽃잎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렸고, 꽃잎 뜬 강물에 하림성이 거꾸로 비쳤다.
 
- 악기 속의 나라 中
 
 
우륵의 거처는 삼각주가 내려다 보이는 강 언덕이었다. 뒤로 떡갈나무 숲이 우거졌고 위아래 두 물굽이 사이의 강이 내려다 보였다. 신라 군사들이 방 두 칸에 마루 한 칸 짜리 초가를 지어 주었고 국원에 상주하는 신라 군장이 가끔씩 곡식을 가져다 주면서 우륵과 니문의 동태를 살폈다. 우륵은 겨우내 담장 밖을 나가지 못했다. 무릎이 땅을 딛지 못했고 가래에 피가 묻어 나왔다. 니문이 우륵의 머리를 안고 미음을 먹였다. 니문이 우륵의 아래를 벗겨 요강에 앉혔다. 니문이 아궁이에 군불을 땠고 햇볕이 좋은 날 금을 열어서 말렸다.
 
(중략)
 
초여름에 우륵의 거처를 찾아온 신라 군장이 가야의 마지막 고을들이 멸망한 소식을 전했다. 우륵은 마루에 나와 앉아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햇빛이 마루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군장은 말했다.
─가야는 고을이 제가끔이니 어찌 신라를 대적할 수 있겠소?
우륵은 강 쪽으로 시선을 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강을 스쳐오는 바람이 강물에 밴 수목의 향기를 실어 왔다. 해가 곧게 내리비쳐 강물은 푸르고 깊어 보였다. 군장이 말했다.
─이제 신라의 지경(地境)이 백제와 마주 닿게 되었으니, 저 삼각주의 대장간들이 바빠질 것이오.
우륵의 시선이 강물을 훑어 내려가 먼 물굽이에 닿았다. 물이 떠나는 자리에 물이 와 닿았고, 물이 와 닿는 자리에서 물은 또 떠나고 있었다. 우륵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 되었구려.
─그리 되었소. 그리 되었고, 임금께서 악사의 소리와 춤을 신라로 옮기라 하시었소. 허나 악사께서 이미 연로하시어 기력이 없으시니, 임금께서 신라 관원 세 명을 곧, 악사께로 보내실 것이오. 서라벌의 젊은 관원들로, 소리에 재주가 있는 자들이오. 악사께서 그 관원들에게 소리와 춤을 가르치어 신라에 전하도록 하시오. 이것은 임금의 분부요.
군장은 소달구지에 싣고 온 곡식 자루를 마당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니문이 금을 안았다. 우륵은 돌아앉아 니문의 등에 등을 기대었다. 해가 삼각주 쪽 산 능선 위로 올라섰다. 빛들이 산 꼭대기로 몰렸고 골짜기들의 깊은 안쪽이 들여다 보였다. 빛들은 강물 속 깊이 닿았으나, 물에 쓸려 흘러가지 않았고, 빛들은 새롭게 당도하는 물 속에서 어른거렸다. 모래를 실은 쪽배들이 삼각주 쪽 나루를 떠나 강심으로 나왔다. 노들이 물을 헤집어 빛들이 깨어졌다. 빛은 우륵의 마루 안쪽으로 깊이 와 닿았다.
니문이 금을 뜯었다. 니문의 오른손을 열두 줄 위에서 가벼웠다. 물혜, 달기, 다로, 알터, 바람터, 노루목의 소리들이 울렸다. 니문의 손가락이 새로운 시간을 끌어당겼고, 니문의 손가락이 끌어당겨진 시간을 누르고 또 튕겼고 헤치고 모았다. 금이 떨릴 때 명주실 올 속에 닿은 빛들이 흔들렸다.
우륵의 몸 속에서 가래가 가르릉거렸다. 가래 끓는 떨림이 니문의 등으로 전해졌다. 니문의 손가락이 열두 줄의 맨 윗줄을 튕겼다. 넓고 깊은 소리가 솟았다. 니문이 솟은 소리를 흔들어 잘게 부수었다. 부서진 소리들이 흔들리면서 넓게 퍼졌다. 퍼지는 파문들이 겹치면서 흘러갔다. 우륵이 말했다.
─니문아 너는 이제 몇 살이냐?
─쉰이거나 쉰 둘일 것입니다.
우륵이 몸을 꺾고 기침을 했다. 니문이 우륵의 등을 두드렸다. 니문이 우륵의 머리를 안고 타구를 받쳤다. 피가 섞인 가래사 왈칵 쏟아져 나왔다. 우륵의 목이 식은땀에 젖었다. 니문이 젖은 수건을 우륵의 옷 속으로 넣어 식은땀을 닦아 냈다. 니문이 우륵을 누이고 수염을 가슴 위로 가지런히 모았다. 우륵이 말했다.
─니문아, 내가 죽거든 저 열두 줄을 신라로 보내라.
니문이 섬뜩 고개를 들었다.
─어찌 하필 신라로….
─악기란 아수라의 것이다. 금을 신라로 보내라. 거기가 아마도 금의 자리이다.
니문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니문의 어깨가 흔들렸고 니문의 눈가가 젖어 왔다.
 
신라의 관원 세 명은 여름에 왔다. 셋 다 키가 크고 눈매가 싱그러운 청년들이었다. 신라에서 대사(大舍)의 관등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우륵은 대사의 지위를 알 수 없었다. 처음 온 날 신라 관원들은 신라 금척의 정장 차림으로 흙 마당에 엎드려 우륵에게 절했다. 우륵은 마루 기둥에 기대 앉아 관원들의 절을 받았다. 장마의 습기가 무거웠다. 우륵은 숨을 몰아쉬며 니문의 부축을 받아 겨우 맞절의 시늉을 냈다. 관원들은 우륵 앞에서 늘 두 손을 앞에 모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이 신라의 공자들로, 무너진 가야의 금을 배우려는 까닭이 무엇이냐?
─전하께서, 열두 줄 금은 나라와 같은 것이라 하옵시며 그 소리로 천하의 민심을 가지런히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소리는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 소리는 살아서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손가락으로 열두 줄을 울려 새로운 시간을 맞는 것이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신라 관원들은 우륵의 마루에서 금을 배웠다.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니문이 젊은 관원들의 손을 쥐어 줄 위에 얹어 주었고 줄을 누르고 당기는 손가락의 힘을 빼거나 더해 주었다. 줄을 누르는 몸의 떨림이 눌리는 줄의 떨림과 만나고 또 갈라서는 자리로 니문은 관원들의 손가락을 이끌었다. 우륵은 벽에 기대어 관원들이 뜯는 금의 소리를 들었다. 우륵은 이따금씩 팔을 내저어 소리를 중단시켰고, 소리를 바로 잡았다. 우륵이 팔을 내저을 때마다 신라 관원들은 머리를 숙이고 절했다.
첫 서리가 내릴 무렵에 신라 관원들은 무너진 가야 열한 고을의 소리를 모두 익혔다. 관원들은 우륵 앞에서 그 열한 고을의 소리를 모두 베풀었다.
우륵은 삼각주 쪽 강으로 눈을 주며 신라 관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 아래쪽으로 대장간들이 늘어났고 화덕을 달구는 연기가 솟아 올랐다. 모래를 실은 쪽배들이 분주히 삼각주와 대장간 사이의 강을 오갔다. 신라 관원들이 뜯는 금에서 물혜, 달기, 다로, 알터, 바람터의 소리가 울렸다. 우륵이 신라 관원들에게 물었다.
─가야 고을들의 소리가 어떠하냐?
신라 관원들 중 나이 많은 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려운 말씀이오나….
─말하라.
─가야 고을들의 소리는 번잡하고 들떠서 아정(雅正)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들렸습니다.
우륵이 관원을 노려보았다. 우륵의 눈가에 경련이 일고 목울대가 흔들렸다. 우륵이 물었다.
─아정이란 무엇이냐?
─바르고 가지런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입니다.
─번잡이란 무엇이냐?
─거칠고 급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륵이 니문에게 말했다.
─금을 다오.
니문이 우륵의 무릎에 금을 안겼다. 우륵이 맨 윗줄을 당겼다. 넓고 깊은 소리가 솟았다. 솟은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급히 눌렀다. 소리는 꺾여져서 곤두박질치면서 쏟아져 내렸다.
─이것이 번잡이냐?
우륵이 다시 줄을 당겼다. 솟은 소리가 낮게 깔리기를 기다려 우륵이 왼손으로 소리의 꼬리를 눌렀다. 눌러서 가볍게 흔들었다. 사라지던 소리의 끝 쪽이 둥글게 감기면서 여울져 흘렀다.
─이것이 아정이냐?
신라 관원들은 침묵했다. 우륵이 말했다.
─그것이 아정이라면, 너희들의 아정일 뿐이다. 아마도 그 아정이 너희들의 벽일 것이다.
우륵이 허리를 꺾고 기침을 토했다. 피가래가 쏟아져 앞섶을 적셨다. 니문이 수염에 엉긴 가래를 닦아냈다. 우륵이 또 말했다.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아정과 번잡은 너희들의 것이다.
신라 관원 셋이 마당에 내려가 우륵에게 작별의 절을 올렸다. 관원들을 서라벌까지 호송하는 군사들이 담장 밖에 도열해 있었다.
우륵이 툇마루를 깊고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니문아, 금을 가져오너라.
니문이 마루로 올라가 금을 내려왔다.
─주어라.
니문이 금을 신라 관원들 앞으로 내밀었다. 우륵이 말했다.
─내 금을 너희들에게 주마. 서라벌로 가져가라.
관원들이 금을 받아 상자에 담았다.
─너희들의 나라가 삼한을 다 부수어서 차지한다 해도 그 열두 줄의 울림을 모두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늘 새롭고 낯설지 않겠느냐.
신라 관원들이 출발했다.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대열은 언덕을 내려가 강가로 향했다. 밤새 내린 비가 멎어, 부푼 강물에 산맥의 진액이 흘러내렸다. 지게에 금을 진 군사 한 명이 대열의 맨 뒤를 따라갔다. 우륵은 떠나는 신라 관원의 대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니문이 우륵을 안고 소리 내 울었다.
 
- 금의 자리 中
 
 
우륵은 가을에 죽었다. 객혈을 하다가 가래가 빠지지 않고 기도를 막았다. 니문이 우륵의 등을 두드리고 나서 자리에 눕혔다. 숨이 멎어 있었다. 오줌이 흘러 두 다리를 적셨다. 니문이 우륵의 수염을 가슴 위로 모았고 눈을 쓸어 감겼다. 니문이 수건으로 우륵의 밑살을 닦아 윗목에 눕히고 홑이불을 덮었다.
니문은 대장간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에서 옹관을 구할 수 없었다. 니문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니문이 우륵의 사체를 거적에 말아 지게에 실었다. 니문이 작대기로 땅을 밀며 일어섰다. 우륵의 다리가 지게 옆으로 삐져나와 흔들렸다. 니문은 사립문을 나왔다.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니문이 작대기를 휘둘러 개를 쫓았다. 지게를 지고 산 쪽으로 걸으면서 니문이 요령을 흔들었다. 숲 속에 가을빛이 흔들렸고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요령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아 올랐다. 소리의 방울에 빛이 부딪쳤다. 먼 물굽이 사이의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에 니문은 우륵을 묻었다.
 
우륵을 묻고 나서 니문은 국원을 떠났다. 니문은 무너진 가야의 고을들을 떠돌았다. 니문은 마을의 초상이나 혼례에 소리를 베풀고 얻어 먹었다.
일흔 살인지 일흔두 살인지 되던 가을 날, 니문은 가야 대궐 위 무덤의 능선에 올랐다. 불타 버린 대궐 터에는 검게 그을린 석재들이 나뒹굴었고, 봉분들은 팽팽한 하늘 아래서 우뚝했다. 니문은 아라가 묻힌 태자의 봉분 아래 주저앉았다.
풀섶에서 사마귀 한 마리가 다가왔다. 여름 내 햇볕에 그을린 대가리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사마귀는 긴 앞다리를 내밀어 땅을 긁고 몸통을 꺾으면서 다가왔다.
니문이 등짐을 내려 금을 꺼냈다. 옛 가야 고을의, 네 줄짜리 금이었다. 사마귀는 앞다리 두 쪽을 모두 들고 몸통을 꺾었다.
니문이 사마귀를 들여다 보며 금을 뜯었다. 사마귀가 앞다리를 들었다. 니문의 소리가 솟았다. 사마귀가 앞다리 한 쌍을 마주 비볐다. 니문의 소리가 잘게 부서졌다. 사마귀가 긴 몸통을 꺾으며 다가왔다. 니문의 소리는 꺾이면서 휘돌았다. 사마귀는 니문 앞을 지나 봉분 위로 돌아갔다. 니문의 소리가 멎었다. 민촌에서 저녁을 짓는 연기가 올랐다. 산맥과 봉분과 민촌의 지붕 위에 가을빛이 가득히 내렸다.
 
- 가을빛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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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삼국사 연표】
 
기원전 10세기-1세기 :: 김해 지역이 가락구촌(駕洛九村)으로 나뉘어 구간이라는 촌장에 의해 영도되고, 부족 연합 단계의 사회 생활을 하였다.
 
69년 :: 박혁거세가 태어났다.
59년 :: 천제 해모수가 홀승공성에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다.
58년 :: 동부여에서 주몽이 태어났다.
57년 :: 신라에 혁거세가 즉위하였다.
37년 :: 동명성왕이 즉위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19년 :: 석탈해가 태어났다. 유리가 왕의 부인 예 씨와 함께 부여에서 고구려로 도망을 왔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즉위했다.
18년 :: 비류·온조 형제가 고구려에서 남하했다.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백제를 세웠다.
 
서기 42년 :: 수로왕이 즉위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삼국유사』, 이하 유사)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일명 惱窒朱日)이 즉위하여 대가야국을 건국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하 승람)
 
43년 :: 수로왕이 신답평(新沓平)에 도읍을 정했다.(유사)
44년 :: 금관가야가 궁궐과 관사를 낙성하였다. 수로왕이 신궁으로 옮겨 정무를 보았다. 탈해가 나타나 왕위를 쟁탈하려 하자 수로왕이 싸워 계림(鷄林)으로 쫓아냈다.(유사)
48년 :: 아유타국(阿鍮陀國)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금관가야에 와 수로왕이 그녀와 혼인하였다. 금관가야가 9간(干)의 명칭을 고쳤다.(유사)
77년 :: 금관가야가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의 공격을 받아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1천여 명이 사로잡혔다.(『삼국사기』, 이하 사기)
80년 :: 신라의 탈해왕이 사망하고 5대 파사왕(婆娑王)이 즉위하였다.
87년 :: 7월에 신라 파사왕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소(加召)와 마두(馬頭)에 성을 쌓았다.(사기)
94년 :: 2월에 금관가야가 신라의 마두성을 에워쌌으나 아찬 길원(吉元)의 공격을 받아 물러났다.(사기)
97년 :: 정월에 금관가야가 신라 파사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 하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사기)
102년 :: 8월에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역 싸움을 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아 해결에 나서 문제된 땅을 음즙벌국의 것으로 판정하였다. 이 때 신라 파사왕이 수로왕을 대접하는데, 5부에서는 이찬을 파견하였으나 오직 한기부(漢祈部)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내자 화가 난 수로왕이 한기부주(漢祈部主) 보제(保齊)를 죽이고 귀국하였다.(사기)
106년 :: 8월에 신라 파사왕이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게 하였다.(사기)
112년 :: 신라의 파사왕이 사망하고, 6대 지마왕(祗摩王)이 즉위하였다.
115년 :: 2월에 금관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사기) 7월에 금관가야가 신라 지마왕이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 공격해 오자 물리쳤다.(사기)
116년 :: 8월에 금관가야가 정병 1만으로 구성된 신라의 공격을 받자 성을 굳게 지켰다. 때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려 신라군이 물러났다.(사기)
189년 :: 3월에 금관가야의 허황후가 157세로 사망하였다.(유사)
199년 :: 3월에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158세로 사망하고 세조(世祖) 거등왕(居登王)이 즉위하였다.(유사)
201년 :: 2월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사기)
209년 :: 7월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야를 침범하자 가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나해왕(奈解王)이 태자 우로(太子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을 보내어 가야를 구원하여 8국을 항복시켰다.(사기) *『삼국유사』에는 212년 포상8국이 아라(阿羅)를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12년 :: 골포(骨浦),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 등 3국인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하였으나 패퇴하였다.(사기) *『삼국유사』에는 215년의 일로 되어 있다.
3월에 가야가 신라에 왕자를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하였다.(사기)
253년 :: 금관가야의 거등왕이 사망하고, 마품왕(麻品王)이 즉위하였다.(유사)
291년 :: 금관가야의 마품왕이 사망하고, 거질미왕(居叱彌王)이 즉위하였다.(유사)
346년 :: 금관가야의 거질미왕이 사망하고, 이시품왕(伊尸品王)이 즉위하였다.(유사)
400년 ::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력이 가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으로 구성된 수병(守輧)은 그에 저항하였다.(광개토대왕릉비)
407년 :: 금관가야의 이시품왕이 사망하고, 좌지왕(坐知王)이 즉위하였다.(유사)
421년 :: 금관가야의 좌지왕이 사망하고, 취희왕(吹希王)이 즉위하였다.(유사)
451년 :: 금관가야의 취희왕이 사망하고, 질지왕이 즉위하였다.(유사)
452년 :: 금관가야가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유사)
479년 :: 대가야의 왕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되었다.
481년 :: 4월에 가야가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미질부성(彌秩夫城) 등을 침공하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사기)
492년 :: 금관가야의 질지왕이 사망하고, 겸지왕(鉗知王)이 즉위하였다.(유사)
496년 :: 2월에 가야가 꼬리가 다섯 자 되는 백치(白雉; 흰 꿩)를 신라에 보냈다.(사기)
521년 :: 금관가야의 겸지왕이 사망하고, 구형왕(仇衡王)이 즉위하였다.(유사)
522년 :: 3월에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니 신라에서는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또는 누이동생)을 보냈다. 그들 사이에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태어났다.(사기, 승람)
524년 :: 9월에 대가야 왕이 신라 법흥왕이 남쪽 국경으로 순행하여 땅을 넓혀 오자 가서 만났다.(사기)
527년 :: 신라의 이차돈이 순교하였다.
528년 ::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였다.
532년 ::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신라는 그들을 진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사기, 유사)
540년 :: 신라의 진흥왕이 즉위하였다.
541년 :: 신라가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으로 삼아 내외 군사의 일을 맡게 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544년 :: 신라가 2월에 홍륜사를 지었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중이 되고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551년 :: 신라가 연호를 개국이라 하였다. 혜랑이 백고좌강회와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3월에 신라의 진흥왕이 낭성(娘城; 지금의 충주)에 행차하였을 때 국원(國原)에 있던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니문(尼文)을 불러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러 있게 하며 가야금을 연주케 하였다.(사기)
552년 :: 신라의 진흥왕이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3인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사기)
553년 ::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졌다.
554년 :: 대가야가 백제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였다.(사기)
562년 ::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가야가 반란하므로, 신라왕은 이사부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가야가 멸망하고 그 곳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을 두었다.(사기) *『일본서기』에는 같은 해 6월에 임나(가야) 10국이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