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 머릿말

아버지가 그어 놓은 따뜻한 밑줄

 

우리 집 안방에는 책장이 놓여 있다. 잠을 잘 때도 책을 끼고 자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이 좀 비좁기 때문이다. 방 셋, 욕실 하나가 딸린 아파트인데 방 두 개는 딸과 아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안방과 거실 뿐이다. 장롱이 있는 쪽과 창 쪽, 두 벽을 제외한 나머지 벽에 빙 둘러 책장이 놓여 있다. 거기엔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빽빽이 차 있다. 그것도 모자라 베란다, 거실, 창고에도 책다발이 쌓여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묵은 책들을 골라 내도 늘 집 안이 비좁다. 그런 책들 모두를 내가 산 것은 아니다. 상당량이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책이다. 아버지는 시골 교회 목사셨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어머니의 구박을 받아 가며 책을 한 권 한 권 사 들여 보물처럼 여기셨다. 그 아버지께서 40년 목회 생활 끝에 10년 전인 1988년 일흔 두 살을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나는 책을 버릴 때도 아버지가 물려 준 오래 된 책들은 한 권도 버린 적이 없다. 어쩌다 책장에 서서 그 책들을 뒤적이다 보면 아버지가 그어 놓은 밑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밑줄 그은 대목을 다시금 두 번 세 번 읽어 보며 뜻을 새기다 보면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파스칼의 <팡세>,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토인비의 <역사의 한 연구>, 본 회퍼의 <옥중 서신> 같은 책 속에 그어진 아버지의 밑줄에서 아버지와 만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나를 불러 "부드러운 것만 먹으면 이가 상한다. 딱딱한 것도 씹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 며 상중하 세 권으로 되어 있는 <역사의 한 연구>를 읽어 보라고 하셨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 없는 이 책을 붙들고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얼마 동안을 읽다 말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에 들어가 다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때도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오기로 독파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자 생활 20년 째 접어드는 40대에 들어 안방에 꽂힌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깊은 울림이 둔탁하게 온 몸을 쳤다. 나에게,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 두 권을 꼽으라면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와 더불어 이 책을 꼽는다.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책의 숲을 걷다 보면, 가슴을 쿵 하고 치는, 그리하여 눈과 귀를 열게 하고, 나와 남, 사람과 자연의 본디 모습이 일순간 드러나는, 감동의 한 마디를 만나게 된다. 그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나에게도 그런 책들이 있었던 것이다.

 

1997년 1월부터  SBS의 '이숙영의 파워 FM'에 출연해 8개 조간 신문을 압축, 정리해 주는 '조간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방송 끝 머리에 내가 읽었던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내가 밑줄을 그었던 부분(아버지가 그어 놓은 밑줄도 포함되어 있다)을 골라 그 날 그 날의 어록으로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지난 1년 반 동안의 방송을 통해서 나는 많은 청취자들과 만났다. 송구스럽게도 그들 중에는 내 어록을 받아 적거나 녹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청취자는 차를 몰고 가다 내가 읽어 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사랑 노래)>를 듣고 옛 사랑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차를 세워 놓고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켰노라고도 했다. 한 마디 글귀에 마음이 통하고, 감성이 통하고, 영혼의 울림까지 있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고도원 기자의 오늘의 어록'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는 이 1년 반 사이에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부쩍 컸다. 나아가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는 체험을 맛보았다. 이숙영 DJ, 송연호 PD, 송정연 작가, 한순 청아출판사 주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어록의 정리를 도와 준 황정임 후배에게도 특히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내 강은주, 딸 새나, 아들 대우도 이 책의 둘도 없는 후원자였다.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을 내면서 여기에 소개되는 '좋은 책 102권'의 저작권 문제이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해당 출판사의 목록을 만든 뒤 일일이 '양해 확인서'를 받을 요량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뜻밖의 반응이 왔다. "우리 책을 잘 소개해 주어서 고마웠다", "방송에 나가니 책이 잘 팔렸다", "이제나 저제나 우리 책을 소개해 주었으면 하고 청취해 왔다" 고 했고, 어떤 출판사 대표는 "좋은 책을 소개하는 마당에 한 구절의 저작권을 문제 삼을 만큼 우리 출판계가 아직은 그렇게 야박스럽지 않다" 고도 했다. 그래서 열댓 군데의 출판사 사람과 통화하다 이를 중단했다.

혹여 이 책에 자기 글이 소개 된 것이 큰 손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리야 없겠지만, 행여라도 계신다면 아무쪼록 큰 혜량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가 그어 놓은 밑줄을 아들이 찾아냈듯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의 한 마디를 한 신문 기자가 따뜻한 시선으로 찾아내 소개하는 것도 그만큼의 문화적, 정신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1998년 5월 1일

저자 고 도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