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 신과 인간

신과 인간

Divine and Human

 

S. Stepniak-Kravchinsky 의 <러시아의 지하세계>를 읽고 쓴 작품.

처음 <부활>의 한 장면으로 썼다가 나중에 출간되기 전에 제외한 후에 독자적인 작품으로 확대 개작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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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0년대, 제정 러시아 정부와 혁명 단원들의 싸움이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독일 출신인, 한 남부 속주의 총독은 수염이 입술 아래로 축 처지고 눈빛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몸집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늘 군복 차림에 흰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녔다. 어느 날 밤, 그가 네 개의 푸른 등갓 속에서 촛불이 빛을 발하는 집무실의 탁자에 앉아 비서실장이 놓고 간 서류를 넘기며 결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총독 어쩌구 저쩌구' 하는 긴 서명을 쓴 다음, 서류를 제쳐 놓곤 하였다.

그 서류들 중에서 현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참여하여 교수형을 선고받은 노보로시스크 대학교의 학생 아나톨리 스베틀로구프에 대한 서류가 눈에 띄었다. 총독은 이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유달리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나이 들어 주름이 졌지만 반들반들한 하얀 속으로 서류 더미의 끝을 반듯이 맞춘 후에 옆으로 제쳐 놓았다.

다음 서류는 식량 운송을 위해 배정된 자금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꼼꼼히 읽으면서 총액이 적절하게 계산되었는지를 따져 보는데, 갑자기 스베틀로구프 사건에 대하여 부총독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총독은 스베틀로구프의 집에서 발견된 폭발물로 범되 의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부총독은 그가 반정부 단체의 우두머리임을 입증하는 증거는 다이너마이트 외에 많다고 했었다. 총독은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훈장이 묵직하게 매달린 두껍고 딱딱한 군복 속에서 심장이 쿵쿵거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기쁨이자 자랑인 하얀 십자가가 가슴팍에서 위아래로 들썩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기장을 불러서 형 집행을 보류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를 부른다 만다?'

심장의 박동이 더 심해졌다. 그가 종을 울리자, 비서가 곧바로 들어왔다.

"이반 마트베비치 퇴근했나?"

"아닙니다, 각하. 지금 막 사무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심장의 박동이 멈추었다가 아까보다 더 빨라졌다. 사흘 전 심장을 검사했던 의사의 경고가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심장이 느껴진다 싶으면 일을 멈추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너무 무리를 할 땝니다. 그것만은 피하셔야 됩니다.'

"불러 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총독이 말했다.

'그렇군. 우유부단해서 더 골치를 썩이는 꼴이군. 서명을 했으니까, 그걸로 끝이야. 독일 속담에, 침대를 만든 사람이 잠도 잔다는 말이 있지.'

그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속담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은 직접적으로 나와 관계가 없다. 명령만 따르면 되고, 동정에 치우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는 눈썹을 끌어모아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에도 없던 잔인한 마음을 짐짓 꾸며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리고는 황제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회동을 생각했다.

엄격한 얼굴로 황제가 안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자넨 전쟁 중에 결코 자기 연민 따위에는 빠지지 않았단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적(赤)군과의 싸움에서는 훨씬 단호해야 하네. 속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게. 잘 가게!"

황제는 그를 껴안은 다음에 오른쪽 어깨를 들어 손등에 입맞춤을 받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했던 대답도 떠올랐다.

"신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 목숨을 황제와 조국의 군대에 바치는 것 뿐입니다."

그는 황제에게 바치는 무조건적인 헌신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비굴한 애정이 의식되자, 순간적인 망설임을 떨쳐내며 나머지 서류의 결재를 재빠르게 마쳐 버렸다. 그리고 벨을 울렸다.

"차 준비되었나?"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하."

"알았네. 나가 보게."

총독은 한숨을 내쉬며 심장 부위의 가슴을 어루만진 후에, 바닥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웅장한 회랑으로 걸어갔다. 텅 빈 회랑을 무거운 걸음으로 지나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던 거실로 들어갔다.

 

총독의 아내가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지사와 그의 부인인 애국심이 열렬한 공주, 그리고 총독의 맏딸과 약혼한 근위대 장교였다.

차가운 인상에 입술이 메마르고 까칠한 총독의 아내가 은제 찻그릇과 화로가 놓인 낮은 탁자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업무의 과중에 대한 애기를,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뚱뚱한 부인에게 짐짓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매일마다 역모를 밝혀냈다거나 나쁜 소식을 전하는 보고서 뿐이래요. 그러니 바실이 부담스러운 거예요. 어쨌든 그이가 최종 결재자잖아요."

공주가 불어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 끔찍한 사람들이라면 얘기만 들어도 화가 난답니다."

"맞아요. 정말 끔찍해요! 그이가 그 약한 심장으로 하루에 열두 시간을 일한다면, 상상이나 되시겠어요? 사는 게 정말 아슬아슬해요."

그녀는 남편이 들어서자 화제를 바꾸었다.

"아, 바니니 노래를 들어 보세요. 정말 훌륭한 테너예요."

그녀가 공주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마치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내내 그랬다는 듯이 가수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귀여운  총독의 딸이 거실의 구석에 두른 병풍 뒤에 약혼자와 앉아 있다가 막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음, 귀여운 내 딸! 오늘은 처음 보는구나."

총독이 딸의 볼에 입을 맞춘 후에, 그녀의 약혼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총독은 최근의 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뇨, 안 돼요. 업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어요."

총독의 아내가 끼어들었다.

"자, 여기 코페프 씨가 오셨으니까, 재미있는 얘끼를 해 주실 거예요. 코페프 씨, 부탁해요."

그리고, 그는 유명한 익살꾼답게 최근 유행하는 농담들을 풀어 놓으며 사람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2.

 

"안 돼! 이럴 순 없다. 이 손 놔!"

스베틀로구프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인 아들의 친구에게 붙잡힌 팔을 매려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고, 의사는 그녀의 등을 끌어 잡으려고 하였다. 스베틀로구프의 어머니는 눈꼬리의 주름이 유난히 많고 회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말린 중년의 여인이었다. 스베틀로구프의 친구는 사형 선고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의 어머니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 가며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들 얘기를 꺼내자마자, 어머니는 그의 목소리와 다소곳한 눈길에서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것을 미리 짐작해 버렸다.

최고급 호텔의 작은 방이었다.

"왜 붙잡는 거예요? 제발 놓으라니까!"

그녀가 의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면서 소리를 질렀다. 집안의 오랜 친구인 의사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는 팔꿈치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탁자 위에 약병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 순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예감에 차라리 누군가가 자신을 제지시키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어떤 짓을 할지 살상을 할 수가 없는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제발 진정하시고, 이 진정제 좀 마셔 보세요."

의사가 흐릿한 약물이 든 작은 유리잔을 건넸다.

 

순간, 말이 없던 그녀가 고부라지더니 머리를 허룩한 가슴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소파 위에 몸을 눕히고, 석 달 전 얼굴에 수심을 담은 채 헤어졌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갈색의 유연하게 말린 머리에 우단 코트를 입은 여덟 살 아들이 기억에 겹쳐졌다.

'그래 이런 아이를, 이렇게 귀여운 아이에게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녀가 의사의 손을 걷어 낸 후에 비틀거리며 탁자 쪽으로 쓰러질 듯 걸어갔다. 하지만 문가에 이르러 다시 안락 의자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느님이 계시다는데,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다는 거야?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 애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악마니까, 그 아일 데려가는 거야."

그녀가 넋이 나간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우리 애 목을 매단다고, 목을 매달아 죽인다고? 출세도 무어도 다 포기한 애를, 돈도 가진 것은 뭐든지 다른 사람들, 그의 사람들에게 다 줘 버린 아이를 죽이다니."

이전에 그녀는 아들의 희생을 야단치기 일쑤였지만, 이제 그것을 자랑으로 마치 아들이 벌써 순교를 당한 것처럼 말했다.

"이런 애한테 그런 짓을 하겠다고? 그렇게 착하던 아이에게 그 짓을 하겠다고? 하느님은 존재하신다고 당신도 말했잖아요."

그녀가 소리쳤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이 약을 좀 드시라는 말 밖에…."

"아무 것도 필요 없어. 하하하!"

그녀는 절망에 빠져 울다가 웃다가 하였다.

 

밤이 되자, 그녀는 지쳐서 울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멍하니 넋이 빠진 사람처럼 앞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의사가 진정제 주사를 놓아 주자, 그녀는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그녀는 꿈쩍하지 않고 잠을 잤다. 차라리 깨어 있다는 것 자체가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깔끔히 면도를 한 장군들과 경찰관들 뿐 아니라 차분한 얼굴로 방을 청소하러 온 어린 하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옆 방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잔인함 자체라는 것이 가장 끔찍스러웠다.

 

 

3.

 

두 달 동안, 스베틀로구프는 아주 고통스러운 작은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자신이 부자로서 누린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부당성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이런 자각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때로 자신의 행복과 안락을 생각할 때마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힘든 노동과 결핍 속에서 온 생애를 보내고 인생의 기쁨과 평안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농부와 노인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말의 죄의식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시골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집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 여자들을 위한 합숙소와 조합을 설립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일들을 하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할 때나 값 비싼 말을 살 때보다 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 모든 것들 속에 그릇되고 나쁜, 도덕적으로 더러운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마을의 봉사 활동에 낙담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대학 때부터 가장 가까이 사귀던 친구를 만나러 키예프에 갔다. 그로부터 3년 후 키예프 요새 앞에 파 놓은 호에서 총살 분대에 의해 처형되었던 그 친구는 머리도 비상했으며, 또한 가슴의 피 끓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관여했다. 그 곳에서 친구가 스베틀로구프를 비밀 단체에 소개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어 이들을 계몽시키고 자신들의 권리를 이해하도록 도와 주고 궁극적으로는 정부와 지주들의 속박에서 자유를 찾자는 것이었다. 스베틀로구프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전에 막연했던 질문들을 명료하게 해결하고, 또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마을에 돌아와서도 새 친구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펼쳤다. 그는 스스로 선생이 되어 어른들을 위한 수업을 시작했다. 책과 전단을 농민들에게 읽어 주며 그들의 현실을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농민들을 위한 불법적인 책과 소책자를 발행했으며, 어머니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마을회관을 짓는 데 도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단계를 밟아 나가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장애물이 나타났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그를 거의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었다. 오직 몇 명의 예외적인 사람들만이 그에게 동조했지만, 그들은 도덕적으로 가끔씩 수상쩍은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정부의 눈길이었다. 결국 그의 학교는 금지되고, 그와 친구들은 수배되고 책과 유인물들은 압류를 당했다. 스베틀로구프는 첫 번째 장애물인 사람들의 무관심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의 몰지각하고 남발되는 탄압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다른 곳에서 유사한 운동을 하는 그의 친구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정부에 대한 분노가 날로 커지면서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폭력과 테러로써 정부에 맞서자는 결정을 내렸다. 모임의 대표는 메제네츠키였다. 그는 혁명이라는 대의에 온 몸을 바친, 흔들리지 않는 의지력과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논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인물이었다. 스베틀로구프는 이 사람의 지도력에 자신을 맡겼으며,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헌신했던 것과 같은 열정으로 테러에 가담했다.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스베틀로구프는 무엇보다 그 위험에 마음이 끌렸다.

'승리냐, 순교냐', 중얼거리곤 했다.

'만일 순교라면, 이 순교 역시 미래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은 7년의 혁명적 테러 활동 동안에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동료들의 사랑과 존경심으로 더 맹렬히 타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거의 모든 재산을 혁명의 대의에 쓰고 이를 약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뿐, 활동에 필요한 노동과 고생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와 그녀가 수양딸로 입양한 젊은 처자가 자신의 활동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스베틀로구프는 수배 중인 무뚝뚝한 동료 테러리스트가 찾아와 폭발물을 자신의 집에 숨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단순히 그가 빨리 떠났으면 해서 주저하지 않고 물건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이 집을 수색하여 폭발물을 찾아 내었고, 그는 어디에서 어떻게 그것을 입수했는가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예견했던 순교자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근래에 수많은 동료들이 처형이나 투옥을 당하고 추방되고 수많은 여자들이 학대를 받을 때에도, 그는 고통을 감내하기만을 원했다. 체포되던 순간과 처음으로 취조를 받을 때에, 그는 오히려 기쁨에 가까운 전율을 느꼈다. 그들이 옷을 벗길 때, 그를 찾을 때, 그를 감옥으로 데리고 갈 때, 등 뒤로 철문이 닫힐 때에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한 주, 두 주, 세 주가 지나갔다. 그는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더럽고 미끈거리는 독방에서 고립감과 강요된 휴식에 의해서 지쳐 갔다. 옆 방의 재소자들이 철 지난 이런 저런 소식을 벽을 두드려 알려 주거나, 때로 냉혹하고 낯선 세계의 사람들인 것 같은 형사들이 더 많은 죄과를 캐내려고 심문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똑같은 생활 속에서 그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강인함은 차차 허물어져 갔다. 낙심한 가운데 오직 한 가지, 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어떻게 해서든지 끝이 나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버틸 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슬픔이 뼛 속 깊이 파고들었다. 사실, 투옥 두 달 즈음에 그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경찰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자신의 이런 나약함에 소름이 돋고 혐오스러운 느낌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더욱 침울해졌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지금 감옥에서는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지만, 자유로웠을 때 쉽사리 내던져 버린 그 모든 젊음의 에너지와 기쁨에 대한 후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전에 지녔던 신념과 그 모든 활동들까지 후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골이나 해외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그 여자나 다른 숙녀와 결혼해서 소박하나 즐겁고 빛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4.

 

투옥 두 달 째, 끔찍이도 모든 것이 똑같던 어느 날, 간수가 스베틀로구프의 방으로 일상적인 순찰을 돌면서 작은 책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갈색 가죽 장정에 금색 십자가를 표지 가운데에 박은 책이었다. 간수의 말에 의하면, 총독 부인이 감옥을 방문하면서 재소자들에게 기증한 성경책이었다. 스베틀로구프는 간수에게 슬쩍 미소를 짓고 붙박이 침대 위에 책을 던져 놓았다. 간수가 떠난 후에 스베틀로구프가 옆 방 벽을 두드리고, 간수가 왔다 갔는데 새로운 소식은 들려 주지 않고 성경책만 남겨 두고 갔다고 말했다. 옆 방의 사람들도 똑같이 성경책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스베틀로구프는 책을 펼쳐 들었다. 습기 때문에 책장이 서로 엉겨 붙었지만 읽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신약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다. 신약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신학 수업이나 성당에서 신부님들과 성도들이 성경을 봉독하는 중에 주워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가 1장을 읽기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그는 계속 읽었다.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그것은 그가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혼란스러운 내용 전개와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허튼 소리들이었다.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단 한 쪽도 읽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읽기 연습을 하는 셈 치고, 계속 읽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나는 단지 고골리의 꼭두각시 페츄쉬카를 읽고 있는 거야.'

그는 처녀의 출산과, '하느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라는 뜻을 지닌 이름의 임마누엘이 태어난다고 예언한 1장을 모두 읽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예언일까?'

그는 여러 생각을 하며 읽었다. 유성에 대한 2장, 메뚜기를 먹는 요한에 대한 3장, 예수에게 지붕에서 뛰어내려 향락을 즐기라고 유혹하는 사탄에 대한 장들을 읽어 나갔다. 이런 모든 내용들은 지루한 투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별 흥미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책장을 덮고 윗도리를 벗어 벼룩을 잡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한 번도 빼 먹지 않은 일과였다. 갑자기, 5학년 시험 시간에 여덟 가지 지복 중에서 하나를 말하지 못해서, 얼굴빛이 불쾌하고 머리가 곱슬인 신부님이 화를 내며 좋지 못한 점수를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팔복을 전하는 산상수훈을 읽고 싶었으나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복음서 중의 아무 곳이나 읽기 시작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어쩌면 이 말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 같군.' 그는 생각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했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은 우리에게 해당될 것 같지 않고….'

"화내지 말라, 간음치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그래, 사람들이 이렇게만 산다면 혁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5장을 다 읽은 후에 그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을 계속 깊이 깊이 탐구해 나갔다. 읽어 나가다 보니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쓰여 있다는 결론에 자꾸 이르게 되었다. 근본적이며 간단하고 감동적인 것, 그 전에 결코 들어 보지도 못했지만 친숙하고 확연한 어떤 느낌들이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잊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자신의 영혼을 잃고서 세상을 얻는 자가 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 맞아. 옳은 말이야. 정말 그렇군!'

그는 어느 새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과 똑같군. 내 영혼을 포기하는 것,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기쁨이자 생명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의 명성과 군중들의 환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나타샤 세로모프와 같은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위해서 일을 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 후로 의심하고 걱정하고 망설였지. 내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할 때에만 기분이 좋았지. 나 자신에게 소중한 그 모든 것을 주고 싶었는데….'

 

그 날부터, 스베틀로구프는 대부분의 시간에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묵상을 했다. 이러한 독서는 그 간 살아 왔던 환경을 멀리 하고, 지금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생각들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성경에 전하는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이유가 사뭇 의아스러웠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해서 사는 길이다. 이렇게 살아야 돼. 그래야 슬픔도 가난도 없고 오직 기쁨만 있다. 언젠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석방되던지 중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겠지. 아무렴 어때, 다 똑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이렇게 살아야지. 가능해. 이렇게 미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책대로 살아가야 돼.'

 

 

5.

 

그의 영혼이 드높고 들떠 있던 어느 날, 간수가 평상시와는 다른 시간에 감방에 들어와 기분은 좋은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를 물었다. 스베틀로구프는 이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는 거절될 거라 생각하면서 담배를 청했다. 간수는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른 간수가 담배와 성냥을 가지고 왔다. 스베틀로구프는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 대해 교도관에게 얘길 했겠지.'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감옥을 이리저리 거닐며, 이 변화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 보았다.

 

다음 날, 그는 법정에 출두하였다. 그 전에도 여러 번 와 보았던 법원에서는 아무런 심문을 받지 않았다. 다만 판사 한 사람이 그를 외면한 채 의자에서 일어나자, 다른 판사들도 따라서 일어났다. 선임 판사가 서류를 손에 들고, 낮은 목소리를 꾸며 크고 억지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스베틀로구프는 판사들의 얼굴을 보면서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스베틀로구프를 쳐다보지 않았으며, 모두 진지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그 요지는, 스베틀로구프는 가까운 또는 먼 장래에 현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반란 활동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는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이에 따라 그에게 교수형을 선고한다는 것이었다. 스베틀로구프는 판사가 소리 내어 읽는 말들을 듣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그에게는, '가까운 또는 먼 장래'라는 말과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그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이 논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이들이 자신에게 이러한 것들을 읽어 주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정리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 후에야 어떤 말이 오고 간 것인지를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됐어. 이건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가 감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아 중얼거렸다. 마음 끝에서부터 죽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생명력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자아에 대한 의식을 자아에 대한 부정인 죽음과는 도저히 연관시킬 수가 없었다.

 

스베틀로구프는 감방의 붙박이 침대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타인에게 친절하고 유쾌했으며, 아직도 젊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어머니와 나타샤와 친구들이 그에게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 그리웠다.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목을 매단다고! 누가, 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지? 그럴 수는 없어.'

그가 중얼거렸다. 간수가 다가왔으나, 스베틀로구프는 그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구요? 아, 교도관님?"

스베틀로구프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물었다.

"교도관님이군요. 언제 사형이 집행됩니까?"

"나도 알 수 없네."

간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고, 다시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부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자네를 만나 몇 마디 나눠 보고 싶어한다네."

"아니오,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말씀이라면 그냥 가 주세요."

스베틀로구프가 대답했다.

"편지라도 쓸 사람은 있나? 그건 허락되었네."

교도관이 말했다.

"그럼, 종이를 좀 가져다 주세요. 몇 자 적을 게 있습니다."

 

그는 교도관이 간 사이에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 해치우겠다는 뜻이군. 항상 하던 식으로 말이야. 내일 아침이면, 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아니, 이럴 수는 없어. 이건 꿈일 거야.'

그리고 조금 있다가 가까이 지내는 간수가 펜 두 자루, 잉크병, 편지지 꾸러미와 파란 봉투 몇 장을 가지고 왔다. 그는 의자를 탁자 쪽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고 꿈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래, 편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야 돼.'

스베틀로구프는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어머니!" 라고 쓰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렇게 커다란 고통을 당신께 주는 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저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한 가지만 들어 주세요. 먼저 가는 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계속 써 내려갔다.

"저 때문에 슬퍼하지는 마세요. 조금 빠르나 조금 늦으나,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요? 두렵지도 않고 지난 일을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 부디 용서하세요. 제 친구들도 저를 처형하는 사람들도 원망하지 마세요.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마세요. 저 자신에 대해서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 마음이 한결 고요하고 따뜻해집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어머니의 거친 손에 입맞춤을 보냅니다."

두 줄기 눈물이 하나 둘 편지지에 떨어지고 글씨가 번져 나갔다.

"이 눈물은 두려움이나 슬픔 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아들이는 심정과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제발 저의 친구들을 원망하지 마시고 사랑해 주세요. 특히, 저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프로크호로프를 사랑해 주세요. 죄가 있다면 그에게 있지만, 그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마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세요. 적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머니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길입니다. 나타샤에게 그녀의 사랑은 제게 기쁨이었고 위안이었다고 전해 주세요. 예전에는 잘 느낄 수 없었지만, 이제 그녀의 사랑이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저의 삶은 그녀가 존재하고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의 아들은 물러갑니다. 어머니, 부디 안녕히 계세요!"

그는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끝 부분에 프로크호로프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불현듯 다른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는다면, 프로크호로프의 이름을 읽게 될 것이고 그것은 그에겐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곧바로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등불에다 하나하나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앉아서 지독한 절망감 속에서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하자, 차츰 기분이 진정되었다가 차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편지지를 꺼내서 다시 써 내려갔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 밀려 들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라고 쓰자, 또 다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이전에는 제 자신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나의 사랑과 늘 가슴 속에 간직한 감사의 마음을 알지 못했었습니다만, 이제는 압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했던 그 모든 무례한 언행과 그 모든 사소한 다툼을 생각할 때면, 얼마나 부끄럽고 고통스러우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제게도 좋은 점이 있었다면 그것만을 기억해 주세요. 전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솔직히,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또 믿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과 같은 것, 즉 소멸이 있다면 30년 만에 죽든 30분 만에 죽든 그게 뭐가 대수롭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다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너무 철학적이 되어 버렸군. 아까 그 편지처럼 써야겠어. 마지막엔 좋은 말로 끝내는 게 좋을 거고.'

그는 생각했다.

"친구들을 원망하지 말고 사랑해 주세요. 제 죽음에 어쩌다가 연관이 된 그 친구라도 말씀이에요.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나타샤를 위로해 주시고, 제가 언제나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는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한 뒤에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수없이 자문하면서 깨어 있고자 했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몰고 왔다.

'혹시 이승의 삶은 꿈이고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승의 삶을 의식한다는 것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전생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승의 삶은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삶이고, 이제 나는 죽을 것이고 또 다른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이 좋았다. 그렇다라도 이런 생각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생각으로도 죽음 앞에서는 자기의 두려움을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지쳐 버렸다. 끝내는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될까? 무(無)? 아니, 무가 아니지. 그럼 무가 아니면 뭐야?'

그는 다시 생각에 파묻혔다, 그러다 문득, 그는 살아있는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답할 수 없는데, 왜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왜, 정말 왜 그럴까? 질문을 하느니, 이 편지를 쓸 때의 나처럼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 없이, 영원히.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도 사랑을 할 때는 기쁘게 살아간다. 그래, 사랑할 때는 더욱. 이 편지를 쓸 때, 나는 사랑 안에 있었고, 기분도 좋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방법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고, 감옥에서든 자류 안에서든, 오늘과 내일과 세상 끝날까지도, 이렇게 사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을 말하고 싶었다. 그가 문을 두드렸다. 간수가 감방 안을 들여다 보자, 지금이 몇 시이고 곧 교대 시간이 아니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베틀로구프는 간수장을 불러 달라고 했다. 간수장이 와사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방금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좀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 생각이 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간수는 편지를 받으며 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떠나려고 하자, 스베틀로구프가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 일이 힘드시지 않으세요?"

간수장이 동정적인 눈빛으로 그리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무튼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소."

"다른 일을 찾아 보시지 그러세요? 이보다는 다른 일을 하실 수 있잖아요. 친절한 분이시니 제가 알아 봐 줄 수도 있…."

간수장이 훌쩍이는 소리를 내면서 재빨리 몸을 돌려 나간 후에, 요란스럽게 문이 닫혔다. 간수장의 눈물에 자극을 받은 스베틀로구프는 기쁨의 눈물을 애써 억눌렀다. 그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세상 위를 거니는 기분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답을 구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던, '죽음 뒤에 무엇이 일어날까' 하는 물음은 긍정적이고 이성적인 대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진정한 삶을 인정함으로써 해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경 말씀을 떠올렸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을 것이요,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래 나도 땅에 떨어지지. 그래, 참 좋은 말씀이다.'

그는 생각했다.

'잠을 좀 자야겠군. 나중에 피곤하지 않으려면.'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붙박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침 여섯 시에 그는 생생하고 신나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꿈 속에서 금발을 말아 올린 예쁜 소녀와 함께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나무에는 새콤하게 여문 검정 버찌들이 그득했다. 그는 이 버찌들을 따서 큰 구리 냄비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버찌는 냄비에 떨어지지 않았고 땅 위로만 떨어지고 고양이 같이 생긴, 처음 보는 이상한 동물들이 이 버찌들을 서로 던지며 노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소녀가 너무 재밌게 깔깔 웃기에,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자기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소녀의 손에서 구리 냄비가 떨어졌다. 스베틀로구프가 그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냄비는 가지를 때리고 땅에 떨어지면서 굉음을 냈다. 엄청난 굉음을 들으면서, 그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 굉음은 복도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통로에서 발자국과 총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확연히 되살아났다.

'아, 세상에 나 혼자만 잠들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불가능한 일을 생각해 보았다. 열쇠가 구멍에 들어가는 소리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장과 간수 몇 명 그리고 소장이 들어왔다.

'죽음? 그렇다면? 이제 나는 떠나는 것이다. 그래, 그것도 괜찮지. 모든 게 괜찮았어.'

스베틀로구프는 어제의 엄숙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6.

 

스베틀로구프가 갇혔던 같은 감옥에는 구교도인 한 노인이 투옥되어 있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의심을 품고, 진정하고 진실한 신앙을 찾고 있었다. 그는 정교회의 대주교인 니콘 뿐 아니라 적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표트르 대제 이후의 모든 주교들 또한 부정했다. 그는 귀족 정부를 '골초 국가'라고 비아냥거리며, 사제들과 노예 근성을 가진 시민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숨김 없이 떠들어 댔다. 그는 교회와 황제에 대한 모독 혐의로 투옥되어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이감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량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자유를 억압당한 채 구속을 받으며 간수들의 조롱을 받았다. 죄수들이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자신들 안에 모신 신들을 모독하고 신을 비난하였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괘념치 않았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도 이러한 참상은 익히 보아 왔던 터였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어미를 잃은 눈 먼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헤매는 것과 매양 한 가지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진실한 신앙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신앙이 있는 곳을 찾았고, 그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받게 될, 그리고 신의 진실을 보여 줄 '그 미래'를 매 순간 기다리며 비밀스러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스베틀로구프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노인은 북 소리를 듣고 창살 사이에 매달려 내다 보았다. 마차가 끌려 나오고, 두 눈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는 한 젊은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젊은이는 작고 하얀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젊은이가 책을 가슴에 꼭 껴안을 때, 노인은 그 책이 신약 성경임을 알아 보았다. 젊은이는 창문에 매달린 죄수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냈다. 노인과도 눈길을 주고 받았다. 말들이 출발하였다. 얼굴이 창백한 젊은이는 천사처럼 간수들에게 둘러싸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차가 자갈길을 달가닥거리며 철문 밖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노인은 창가에서 내려와 붙박이 침대에 앉으며 생각했다.

'저 젊은이는 진리를 발견했다. 적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 젊은이가 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밧줄에 매달아 죽이려는 것이다.'

 

 

7.

 

음산한 가을 아침이었다. 태양은 보이지 않고,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 왔다.

스베틀로구프는 맑은 하늘, 신선한 공기, 나무, 도시, 집, 말, 사람들 모두가 반가웠다. 그는 마차 맨 윗자리에 마부와 등을 지고 마주 앉은 군인들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석회 투성이인 옷을 입은 석공들만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가 들어서면 길에서 허겁지겁 벗어나서 뒤돌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말을 하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돌아서서 하던 일을 계속 하였다. 짐 수레에 철 조각들을 운반하던 땜장이들은 말을 멈춰 세우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스베틀로구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하얀 앞치마에 모자를 쓴 여자가 손에 작은 냄비를 든 채, 문 밖으로 나와서 마차를 보고 재빨리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 이내 다른 여자를 데리고 길거리로 나온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켜 보았다. 지저분한 옷에 수염이 까칠한 노인은 스베틀로구프를 가리키며 감독관에게 비난 어린 몸짓을 지었다.

두 아이들이 마차를 따라 잡으려고 바짝 달라 붙어서 앞은 보지 않고 머리를 마차 쪽으로 향한 채 내달렸다. 나이 든 아이는 성큼 성큼 달리고, 모자를 쓰지 않은 작은 녀석은 형의 손을 잡고서 두려운 듯이 마차를 힐끗 바라보다가, 형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잰걸음으로 다시 비틀비틀 내달렸다. 스베틀로구프가 어린 소년의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소년은 마차에 실려 가는 이 끔찍한 남자가 자기를 붙잡는 줄 알고, 놀란 눈에 입을 벌리고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스베틀로구프가 자기의 손에 입을 맞추고 소년에게 손짓을 날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뜻밖에도 은근한 미소로 활짝 웃었다. 스베틀로구프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며 평화롭고도 엄숙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마차가 교수대로 막 들어서는 순간, 기둥과 빗장 그리고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밧줄이 눈에 들어오자, 그의 심장이 갑자기 한 방 맞은 듯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지러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교수대 주위에 소총을 든 군인들이 빼곡이 열을 맞추어 서고, 장교들이 그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갑자기 요란히 북 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그가 몸서리를 쳤다.

스베틀로구프는 군인들 뒤로 처형식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 탄 마차 행렬을 휘둘러 보았다. 그는 처음엔 이 모든 것이 놀라웠으나, 제 정신을 차리고 감옥 앞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는 아무도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이 사람들이 불쌍히 보이고 슬퍼졌다.

'하지만 저들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죽어도 진실은 죽지 않는다. 저들도 그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죽게 될 테지만 저들은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질 것이다.'

 

누군가 스베틀로구프를 교수대로 데려가고, 장교가 뒤 따라 올라갔다. 북 소리가 멈추고, 널리 트인 장소에는 적당치도 않고 북 소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장교 한 사람이 억지스러운 사형 선고를 어색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피고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가까운 또는 먼 장래에 박탈한다는 것으로 법정에서 낭독한 내용과 똑같은 것이었다.

'왜, 왜 이러는 것일까?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저들은 모르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또 저들에게 그것을 전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간 알게 되겠지. 모두들 알게 되겠지.'

길고 가는 머리카락에 몸이 비쩍 마른, 그 감옥의 사제가 진한 자주색 가운을 입고 그에게 왔다. 그는 가슴에 작은 황금 십자가를 달고, 검은 우단 소매에서 앙상하고 거친 연약한 손을 꺼내 은빛의 큰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하느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소서."

사제가 읊조렸다. 그리고 십자가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 스베틀로구프에게 입을 맞추도록 들어 올렸다. 스베틀로구프는 몸을 떨면서 옆으로 비켜 섰다. 그는 사제가 자비를 말하면서도 악의 행위에 동참한다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저들은 자신들이 한 것을 알지 못하느니' 라는 성서 말씀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겸손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런 의식은 필요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지 고맙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사제가 십자가를 왼손으로 옮겨 쥐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교수대를 내려갔다. 다시 북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온갖 소음이 가라앉았다.

 

사제가 떠난 후에, 한 중년 사내가 무겁고 빠른 걸음으로 연단을 흔들며 스베틀로구프에게로 다가왔다. 어깨가 넓고 손이 근육질인 그는 농부들이 입는 품이 넓은 윗도리에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사내가 스베틀로구프를 휙 훑어보며 다가오자, 술과 땀 냄새가 역겹게 진동하였다. 사내가 억센 손으로 팔목을 등 뒤로 잡아 돌려 두 손을 단단히 묶었다. 스베틀로구프는 통증을 느꼈다. 스베틀로구프의 손을 묶은 후에, 사내가 잠깐 멈추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스베틀로구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후에 자신이 갖다 놓은 도구들과 기둥에 매달린 밧줄을 쳐다보았다. 필요한 일들을 짐작하면서 밧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스베틀로구프를 밧줄에 매달린 단상의 끝으로 밀었다.

사형 선고를 법정에서 처음 들을 때에, 스베틀로구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말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는 절대절명의 순간의 의미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끔찍한 임무를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수행하는 사형 집행인을 바라보았다. 이 사형 집행인도 복잡다단한 일들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념하는, 러시아의 악의 없는 평범한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저 쪽으로 가시오. 이제 이 쪽으로 오시오."

사내가 거친 소리로 그를 교수대 쪽으로 밀었다.

"하느님! 부디, 저를 도우시고 구하소서!"

스베틀로구프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때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기도 했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믿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말로 표현할 수도, 자신의 생각 안으로 포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에게 말씀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알았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진정한, 정말로 진정한 것이 될 것임을 알고 또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말씀이 바로 자기에게 평온함과 힘을 주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교수대에 자리를 잡으며, 그는 열병한 군인들과 사형장의 구경꾼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왜, 왜 저들은 이러고 있는 것일까?'

자신과 그들 모두가 불쌍히 보이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의 연민을 내게 조금만 주시오!"

그가 사형 집행인의 섬뜩한 회색 눈길을 붙잡으며 물었다. 사형 집행인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야! 입 닥쳐!"

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사형 조끼와 천을 집어 들고 스베틀로구프의 뒤로 가 섰다. 그는 광목자루를 스베틀로구프의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고 등판과 가슴에까지 빠르고 거칠게 끌어 당겼다.

"당신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

스베틀로구프는 성경 말씀을 떠올렸다.

그의 영혼은 죽음에 저항하지 않았지만, 건강하고 젊은 몸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버둥거리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뛰어내리고 싶었다.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떠미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잠시 허우적거렸다. 목이 조여들며 동물적인 공포가 전신을 휩쓸었다.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곤 곧바로 그것이 사라졌다. 스베틀로구프의 몸이 밧줄에 매달려서 흔들렸다. 그의 어깨가 두어 번 위아래로 들썩였다.

 

2분 뒤에, 사형 집행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손을 시체의 양 어깨에 올린 다음, 힘껏 내리 눌렀다. 발발 떨리던 시체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더니 인형처럼 앞뒤로 흔들거렸다. 자루 속에 든 머리가 어색한 모양으로 꺾여진 채, 죄수용 양말을 신은 다리만 대롱거렸다. 사형 집행인이 단상에서 내려와 선임 장교에게 올가미를 풀고 매장해도 좋다고 말했다.

한 시간 후에, 시체는 교수대에서 내려져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사형 집행인은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스베틀로구프가 했던, '당신의 연민을 내게 조금만 주시오!' 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인자로서 죄수이기도 한 그는, 사형 집행의 일을 맡음으로써 약간은 자유롭고 약간은 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날부터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스베틀로구프의 사형을 집행하고 받은 돈은 물론 비싼 작업복까지도 1주일 만에 모두 술값으로 탕진해 버렸다. 그는 이내 감옥의 굴에 갇히더니 끝내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8.

 

스베틀로구프를 테러 활동으로 끌어들였던 이그나티 메제네츠키는 테러 혁명당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다음, 페테르스부르크로 이감되었다. 스베틀로구프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것을 지켜 보았던 구교도 노인은 잠시 메제네츠키와 같은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시베리아로 이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노인은 진정한 신앙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였다. 때때로 웃음을 머금고 유쾌한 표정으로 형장으로 사라진 스베틀로구프의 밝고 빛나는 얼굴을 생각하곤 하였다.

 

노인은 스베틀로구프처럼 정직한 신앙을 지닌 친구가 같은 감옥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구교도로서 기쁨에 넘쳐 간수에게 스베틀로구프의 친구에게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엄격한 감옥 내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메제네츠키는 당원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황제의 전용 기차의 선로 밑을 파고 들어가 폭발물을 매설하는 작업을 하는 당원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몇 가지 잊고 있던 세부 항목들을 기억해 내면서 친구들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간수가 그의 감옥으로 와서 은근하고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다른 감방 안에 있는 죄수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람을 통해서 당과 접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이 누구요?"

"농부요."

"왜 만나고 싶답니까?"

"신앙에 대해 말하고 싶답디다."

메제네츠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나자고 해 주시오. 이리 오시라고…."

'그 구교도인도 정부를 싫어하겠지. 어쩌면 연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간수가 떠나고 몇 분 후 문이 열린 뒤, 작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머리카락이 굵고 엷은 회색의 삼각 턱수염을 기르고, 눈 색깔은 깊고 푸르렀지만 지친 기색이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메제네츠키가 물었다. 노인이 푸른 눈으로 바라보다가 서서히 고개를 숙이더니 마르고 힘 센 작은 손을 내밀었다.

"무얼 원하십니까?"

메제네츠키가 다시 물었다.

"당신과 한 마디 나누고 싶소이다."

"무슨 말씀을?"

"신앙에 관해서요."

"신앙이라뇨?"

"오데싸에서 적 그리스도의 밧줄에 죽은 젊은이와 당신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던데?"

"어떤 젊은이를 말씀하세요?"

"오데싸에서 교수형 당한 젊은이 말이오."

"스베틀로구프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가 당신의 친구였소?"

노인은 질문을 할 때마다 온화한 눈빛으로 메제네츠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캐묻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네, 가깝게 지냈습니다."

"신앙도 같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메제네츠키가 말하며 웃었다.

"내가 젊은이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거요."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당신네들의 신앙에 대해 알고 싶소."

"우리들의 신앙이라고요? 그러면 앉으시죠."

메제네츠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신앙이란 이렇습니다. 저는 권력자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속인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에 대한 연민은 버리고 권력자들과 맞서 싸워서 그들의 착취로부터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이 같은 말을 수 없이 해 온 것처럼 힘 주어 말을 했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 대가를 이제 그들도 치러야 합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말입니다."

노인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자꾸 내쉬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횡포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수립해야 합니다."

노인이 더욱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자락을 똑바로 펴고 메제네츠키의 발치에 엎드리며 지저분한 나무 바닥에 이마를 댔다.

"왜 절을 하는 겁니까?"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고 당신의 진정한 신앙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게나."

노인이 머리를 들지 않고 엎드린 채 말을 했다.

"전 우리의 신앙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일어나시죠. 그렇지 않으면 전 어떤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구교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게 그 젊은이의 믿음이었단 말인가?"

그가 메제네츠키 앞에 일어서서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내리깔며 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이런 믿음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같은 신앙 때문에 성 베드로와 바울 요새에 이송된 거고요."

노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조용히 감방을 떠났다.

 

'아냐. 그 젊은이는 이런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어. 아마 이 사람은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랑하거나 진정한 신앙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을 거야. 진정한 신앙을 찾아야 한다. 우선은 이 곳부터 시작해서 시베리아에서라도 찾고 말 것이다. 어느 곳에나 하느님이 계시고, 또 어느 곳에나 사람들은 있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다가 길을 잃는다면, 물어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묻고 또 물어서 알아 내고 말 테다.'

그는 다시 신약 성경을 집어 들어 요한계시록을 펼쳤다. 그리고 안경을 끼고 창가에 앉아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9.

 

메제네츠키가 성 베드로와 바울 요새의 독방에 감금된 지, 7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시베리아 중노동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7년이나 버티고도 전향하지 않았으며 그 열정 역시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는 요새에 투옥되기 전 고문을 받을 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권력자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퍼부어서 심문하는 검사들과 판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이제 다시는 자유롭지도 못하고 자신이 시작했던 일들도 끝마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고통스러워했지만, 겉으로는 이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적들과 마주치면 힘이 솟고 넘치는 것 같았다. 심문을 받을 때는 침묵을 고수하다가도, 검사나 장교들을 조롱할 때에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걸 자백한다면 훨씬 편해질 거요' 라고 회유를 해 오면, 그는 한 번 비웃음을 띄우고 잠깐 입을 다문 후에 '안위나 두려움 때문에 동료들을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들의 행동의 기준을 두고 나를 판단한 것이오. 또 당신들의 기준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를 판단했다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아무런 준비도 해 두지 않았을 것 같소? 당신들은 나와 헛수고를 하고 있는 중이오. 아무리 해도 나는 놀라는 사람이 아니니, 얼마든지 당신들이 바라고 원하고 할 수 있는 어떤 짓이든지 해 보시오' 하는 식으로 반박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서로 무안한 듯 쳐다보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바라 보았다.

 

그는 성 베드로와 바울 요새의, 축축한 벽과 조그마한 창문이 있는 좁디 좁고 어두컴컴한 감방에 갇힐 때에 이미 이 생활이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 것임을 짐작했다. 이에 생각이 미치자 온 몸에 두려움이 몰아쳤다. 이렇듯 죽은 듯한 침묵의 공간에 자기 혼자 만이 아니라 벽과 벽 사이마다 자신과 똑같이 10년이나 20년의 선고를 받은 죄수들이,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을 매달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서서히 미쳐 가거나 서서히 폐결핵으로 죽어 간다는 생각은 그에게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 곳에도 어쩌면 그의 여자나 남자 친구들이 있을 터였다.

'몇 해가 지나면 너도 딴 사람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미쳐 버리거나 목을 매달아 죽거나 그저 죽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 아무도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자기를 이렇게 만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원한이 치솟곤 하였다. 특히나 감옥에 가둔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는 듯 했다. 그의 증오심은 움직임이나 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있어야 했지만, 감옥은 침묵과 고요 뿐이었다. 죽음만큼이나 완벽한 적막, 문을 여닫는 소리와 때마다 나오는 음식, 태양이 뜰 때의 희미한 빛 그리고 어둠과 변함 없는 침묵, 하나같이 나직한 발자국 소리와 또 침묵, 오늘도 내일도 또 다음 날도 모든 것이 늘 똑같았고,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증오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심장을 파 먹고 있었다.

 

그는 문과 벽을 마구 두드려 댔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반응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가 문과 벽을 두드리고 나면, 언제나 일정하고 나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낮은 목소리가 '굴 속에 처넣어 버리겠다' 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에게 위안이 되는 순간은 잠 자는 시간이었지만, 잠에서 깨어 지독한 공포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는 꿈 속에서는 자유롭고 대부분은 혁명과 동떨어진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이상스러운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고, 계집질을 하거나, 보트를 타거나 사냥을 하기도 하고, 어느 외국 대학에서 과학이나 학문에 대한 특이한 발견으로 명예 철학박사 칭호를 받고 환영 만찬회에서 고상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 꿈들은 얼마나 선명하고 또렷했던지, 그는 현실과 자신의 기억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꿈 속에서 힘든 것은 오직 하나, 그가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간절히 원하던 것을 이루려는 찰나에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그 순간, 단 한 번의 맥박에 사랑스런 세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후에, 그는 전등 빛에 묵은 얼룩들이 겨우 드러나는 회색 벽 안의 우둘툴하고 썩은 마루 바닥 위에서 이루지 못한 고통스러운 욕망만을 끌어안은 채 내던져 있곤 하였다.

취침 시간이 제일 좋은 시간이었지만,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서 잠들기도 그에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애타게 잠을 청해 보지만, 그럴수록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지금 자고 있는 거지?' 생각이 들면 졸음마저 싹 달아나고, 그는 눈을 말똥말똥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좁은 감방에서 높이 뛰기도 하고 달려도 보았지만 별 도움을 얻지 못했다. 운동량이 많아지면 더욱 피곤하고 그래서 더 신경이 곤두섰다. 또한 뒷골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눈을 감으면 고통스러운 환한 빛을 배경으로 환영이 나타났다. 온통 털로 뒤덮인 끔찍한 것이 맨 얼굴을 드러내고 다시 커다란 입으로 변하면서 뒤틀리다가 다시 이전보다 더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바뀌는 환영이 반복되곤 하였다. 끔찍스러운 얼굴들이 그에게 험상궂은 인상을 쓰며 달려드는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조차 그 얼굴 뿐 아니라 그 형상이 춤을 추고 말을 걸며 아른거렸다. 그는 겁에 질려서 팔짝팔짝 뛰며 머리를 벽에 박고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문 위의 조그만 구멍으로 차분하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소리 지르라고 했나?"

"검사를 데리고 와!"

메제네츠키가 고함을 질러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문이 닫혔다. 그는 절망 속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죽음.

 

이러한 기분이 지속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목숨을 처리하기로 작심을 하였다. 그는 통풍구 창살에 밧줄을 묶어 목을 매고 침대에서 미끄러지면 간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밧줄이 없었으므로 시트를 찢어 줄을 만들었다. 그래도 줄은 목을 매달기에는 짧았다. 이번에는 곡기를 끊고 죽기로 하고 이틀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기력이 소진하자 심각한 환각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흘 째 되는 날, 배식 담당이 의식을 잃고 허옇게 눈을 뜬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의사가 감방에 들어와 그를 침대에 눕히고 진통제와 진정제 주사를 찔러 주었다. 그러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그는 잠에서 깨어 곁에 있는 의사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갑자기 그에게 익숙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치솟았다. 강렬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부끄러운 줄 알아!"

그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맥박을 짚고 있는 의사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거야. 나를 더 괴롭히려고 치료하는 거야?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또 똑같은 수술을 하는 것은 그만 두라니까."

"제발 잠자코 누워나 있으시오."

의사가 그를 외면하고 무던한 목소리로 말하며 옆 주머니에서 청진기를 뺐다.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나으면, 또 남은 회초리를 맞아야 한단 말이야. 이 저주 받을 놈아. 지옥에나 가라!"

메제네츠키가 고함을 지르며 다리를 침대에서 버둥거렸다.

"어서 나가. 꺼져. 죽게 내버려 둬!"

"이봐. 그래 봐야 소용 없어. 자네 아주 버릇이 없군. 버릇 없는 놈들에겐 다 방법이 있지."

"어서 꺼져! 어서 나가!"

의사는 메제네츠키에게 질려서 감방을 서둘러 나가 버렸다.

 

 

10.

 

약효가 있었는지, 메제네츠키가 고비를 넘겨 내서인지, 아니면 의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지 그는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 그는 다시 자신을 부여잡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영원히 이 곳에 가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풀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 되면 새 정권이 들어설 수도 있다. 동료들이 우리의 대의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 때까지 살아 있으려면 원기를 회복하고 건강하게 계속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

그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오랫동안 생각해 본 후에, 계획을 세워 실천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각 아홉 시에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도록 노력한다. 잠이 오든 오지 않든 새벽 다섯 시까지는 언제나 그렇게 누워 있는다. 그리고 정각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 운동을 한다. 다음엔 볼 일을 보러 떠난다. 상상 속에서 프로스펙트에서 나데츠딘스카야 거리에 이르기까지 페테르스부르크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는 걸으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해 본다. 간판, 집, 경찰서, 마차와 거리의 보행자를 그려 본다. 그러고 난 후에는 친구나 동지를 방문하여 미래의 계획을 토론한다.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인다. 실제로, 그는 자신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중얼거리며 말을 했다. 어떤 때는 너무나 크게 떠드는 바람에 출입문의 작은 창문에 대고 간수가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메제네츠키는 그런 것 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상상의 여행을 계속 했다.

친구들과 두세 시간을 보낸 후에 집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상상 속의, 조금 후에는 현실 속의 저녁 식사를 즐긴다. 그러나 언제나 적당히 먹는다. 그리고 상상 속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역사나 수학을, 때로 일요일에는 문학을 공부한다. 역사 시간에는 사건의 연대나 인물을 회상하고, 수학 시간에는 여러 가지 정리나 방정식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거나 기하학 문제를 푼다. 기하학은 재밌으므로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푸쉬킨과 고골리,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때때로 자신의 작품을 써 보기도 한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짧은 여행을 한다. 상상 속에서, 떠들썩하게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친구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때로 과거의 대화들을 각색하기도 하고 새로운 대사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방 안에서 이천 보를 걷는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 밤새 숙면을 취할 수 있다.

 

다음 날도 똑같다. 때로는 남쪽으로 순회를 하며 연설을 하기도 하고, 지주들을 상대로 반란을 주도하여 성공적인 투쟁을 마친 후에 농부들에게 농토를 분배한다. 모든 것들은 한 번에 전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세부적으로 마음에 그려 보며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는 혁명당이 언제나 승리를 하고 결국 정부가 궁지에 몰려 의회 선거를 실시한다. 노동자들을 억압하던 황제와 그 일족과 박해자들이 사라지고 공화국이 들어서고, 그리고 메제네츠키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때로 너무 성급히 결론에 이른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다른 수단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식의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1년, 2년 그리고 3년을 이렇게 살았다. 때로는 엄격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다시 제 자리를 찾아 갔다.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부터는 환상과 공포의 악몽이 사라졌다. 끔찍하고 기괴한 얼굴로 망상이 찾아오면, 가끔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도 않았다. 환기구 창살에 밧줄을 매어 고리를 만든 다음에 목을 매다는 꿈도 꾸긴 꾸었지만 이내 극복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그는 거의 7년을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감금 생활이 끝나 성 베드로와 바울 요새에서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이감될 때에는, 그는 왕성한 건강과 건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1.

 

그는 중죄인으로 독방에 갇혀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그러다가 크라스노야르스크 감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노동형을 받은 다른 정치범들과 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여자 둘 남자 넷, 모두 여섯으로 메제네츠키 뒤에 가입한, 말하자면 차세대 혁명당원들이었다. 메제네츠키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아주 마음이 끌렸으며, 그들을 다정하고 겸손하게 대우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또한 그의 이념을 따르고 자신들의 전임자들, 특히 메제네츠키 자신이 행했던 것들을 높이 존중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은 그를 선구자나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훨씬 월등하다는 생각에 그의 구시대적인 견해를 업신여겼다. 메제네츠키에게는 불쾌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 새로운 혁명당원은 메제네츠키와 그의 동료들이 행했던 모든 것, 농부들에게 혁명을 선동했던 그 모든 노력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던 총대장 크로포트킨과 경찰서장 메젠체프 총독과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테러 등은 크나큰 오류라고 지적했다. 메제네츠키에게, 이 젊은이들은 봉건주의 시대로 퇴행했던 알렉산드르 3세의 통치 시대에 만연했던 보수주의의 자식들로서 인민의 자유를 쟁취하는 데에 확연히 다른 노선을 견지하는 세력으로 보였다.

 

거의 이틀 밤낮을 메제네츠키는 쉬지 않고 새로 만난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다. 특히 그들의 대표 격인 로만이라는 자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로만은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메제네츠키를 업신여기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이전에 이루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고 조롱하였다. 이런 그의 태도는 메제네츠키에게는 심한 충격이었다. 로만은 소박한 농민들을 '어중이 떠중이'에 불과한 우둔한 집단이며, 이러한 발전 단계에 속한 사람들과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농민들을 계몽시켜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얼음이나 돌멩이에 불을 지피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쓸 데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느니 근면한 사회주의 조직체가 나서서 농민들을 계몽시켜 혁명의 주체와 연대시킬 수 있는 세력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에 넣어 둔 권위자들의 의견과 통계를 내세웠다. 땅은 사람들을 보수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러시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을 노예로 만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땅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이런 일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사람들이 공장으로 많이 가면 갈 수록 자본가들이 더욱 많은 땅을 차지하고, 사람들은 더욱 억압을 받고, 그러면 공장에 더 몰려들 것이고, 그러면 혁명 세력이 더 많아지므로 더 좋다는 것이다. 독재주의와 그보다 중요한 문제인 자본주의는 인민들의 연대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으며, 이러한 연대는 노동자 조합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농민들이 땅을 소유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들이 될 때에 연대도 혁명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메제네츠키는 로만과 토론을 벌이면서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난히 검은 눈을 반짝이며 피부가 거무스름한 예쁘장한 여자가 그의 신경을 바짝 태웠다. 토론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가 가끔 톡톡 몇 마디 말을 던지면서 로만의 의견을 거들어 주거나 메제네츠키의 의견을 비웃곤 하였다.

"농민들을 공장 노동자로 모두 바꿀 수 있다는 거야?"

메제네츠키가 물었다.

"왜 할 수 없다는 거죠? 그것이 보편적인 경제 법칙이잖아요."

"그 법칙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메제네츠키가 물었다.

"카우츠키를 읽어 보시죠."

거무스름한 여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난 인정하지 않지만, 만약 인민들이 모두 프롤레타리아와 공장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 들어맞는다고 하면, 무슨 근거로 이것이 당신이 사전에 결정한 형태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건 과학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죠."

여자가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에 대해 말할 때, 차이점은 더욱 확연히 두드러졌다. 로만과 그의 동료들은, 농부들을 공장 노동자로 전환하도록 촉진하고 그들을 사회주의자로 교육시켜서 노동자 군대를 준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와 공공연하게 맞서려고 하지 않았다. 반면에 메제네츠키는 정부가 훨씬 강하고 또 비열하기 때문에 테러로써 정부와 직접적으로 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당신들은 정부를 기만하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정부는 다르게 생각할걸. 그래서 우리는 인민들을 선동해서 정부와 싸우고 있는 거고."

"큰 일을 했군요!"

거무스름한 여인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부와 공공연하게 싸운다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거요."

로만이 말했다.

"3월 1일 황제를 암살하려던 일이 역량을 낭비한 거라고?"

메제네츠키가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그 때 목숨을 걸고 싸웠어. 그 때 너희들은 집에서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다가 놀면서 설교나 할 때 말이지."

"우리도 놀지는 않았습니다."

로만이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크게 웃었다. 거무스름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제네츠키에게 경멸하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도 놀지는 않았어요. 우리가 이렇게 잡혀 온 것은 3월 1일 암살의 여파로 생겨 난 정권 때문이라구요."

메제네츠키는 점점 할 말을 잃어 갔다. 그는 목을 죄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려고 복도로 나가 버렸다.

 

 

12.

 

메제네츠키는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거닐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취침 점검 전이라 감방 문들이 모두 열려 있었다. 키가 크고 누런 턱수염을 기른, 인정 많게 보이는 죄수가 메제네츠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머리 절반이 삭발한 것으로 보아 갓 입소한 친구였다.

"우리 감방에 당신을 만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소이다. 그가 전해 주랍디다. '제발 그 사람을 좀 불러다 줘' 라고 말이오."

"누가 말이오?"

"그 사람 별명이 '골초 국가'라고 하는데, 나이가 꽤나 먹은 구교도인이오. '제발 그 사람을 좀 불러다 줘' 라고 했다니까. 당신을 말하는 거요, 선생."

"어디에 있소?"

"우리 방에."

머리를 절반만 삭발한 그가 반말조로 말했다.

"당신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니까."

 

메제네츠키는 그 남자와 함께 작은 감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여러 명의 죄수들이 침대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구교도 노인은 회색 죄수복을 입고 빈 침상에 누워 있었다. 7년 전에 스베틀로구프에 관해 물어 보았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주름 진 얼굴이 깡마르고 창백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예전처럼 더부룩했다. 엷은 회색의 수염이 온통 뻗쳐 올라가고, 따뜻하고 상냥한 푸른 눈빛은 여전히 상냥하게 보였다. 양 볼이 벌겋게 달아 오른 채, 등 지고 누워 있는 기색이 감기에 걸린 듯 했다. 메제네츠키는 다가가서 물었다.

"왜 뵙자고 하셨습니까?"

노인은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 메제네츠키에게 앙상한 작은 손을 떨면서 내밀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를 쓰다가 말은 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나직하게 말을 했다.

"자네는 그 때 내게 진실하지 못했네. 그러나 하느님이 자네와 함께 하시네.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해 주겠네."

"무슨 진실 말입니까?"

"난 양에 관해 말을 하고 있는 거네. 그 진실한 양에 대해…. 그 젊은이는 양과 함께 있었어. 양은 모든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다고…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신실한 사람들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메제네츠키가 말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네. 왕들이 권세를 얻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악한 자들과 동맹을 맺을 것이고. 그렇지만 순결한 양은 그들을 이길 거야."

"어떤 왕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메제네츠키가 물었다.

"일곱 명의 왕들이 있어. 다섯 분은 이미 죽었고, 한 분은 남았고, 남은 한 분은 미래에 올 거야. 그 분이 오시면, …아주 잠시 권세를 얻었다가 마찬가지로 종말이 오지. 이해가 되나?"

메제네츠키는 고개를 저었다. 열이 너무 심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노인 자신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메제네츠키를 불러 왔던 죄수가 팔꿈치를 툭 치면서 눈짓으로 노인을 가리켰다.

"저 노인은 입만 열면 우리에게 '골초 국가가 어쩌구 저쩌구' 중얼거리지.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모두가 노인을 바라보면서 메제네츠키와 신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이 한 말도 또 그 말의 의미도 분명하고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노인의 말은, 악은 더 이상 오랫동안 권력을 갖지 못할 것이며 양은 부드러움과 겸손함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이며 그 후로 모든 눈물을 닦아 내고 더 이상은 눈물도, 질병도, 죽음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노인은, 죽음에 임박하여 깨달음을 얻은 그의 영혼에는 이미 도래하였으므로 세상에도 곧 그 시대가 오리라고 느끼고 있었다.

"보라! 곧 오실 것이다! 아멘! 그리스도시여, 어서 오소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메제네츠키를 올려다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메제네츠키에게는 실성한 사람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13.

 

'여기 인민의 대표가 있다.'

메제네츠키는 노인의 감방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다. 그러나 지금은 암담한 시대!'

로만과 그 친구들이 떠올랐다.

'저 노인 같은 사람들과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지.'

메제네츠키는 한동안 혁명가로서 소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했었다. 그 때, 그가 늘 말하는 바이지만, 러시아 농민들은 커다란 타성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역이거나 퇴역한 군인들을 만나 보았는데, 황제에게 철저하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농민들을 그저 단순한 말로써 설득을 해서는 그들의 어떤 생각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결론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혁명당원들과의 대화 후에 그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들은 저명한 혁명당원들이고 테러리스트들인 할투린, 키발치치 그리고 페로프스카야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보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득보다는 해가 되었으며, 그 여파로 알렉산더 3세의 보수적인 정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황제가 노예와 농노를 풀어 주자 지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황제를 죽이고 혁명을 주도하였다고 러시아 인민들이 믿게 된 것도 그 사람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멍청하긴! 그런 오류가 어디 있어?'

그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모든 방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새로 온 혁명당원들 감방은 열려 있었다. 메제네츠키가 그 방에 가까이 가자, 그 밉상인 거무스름한 여자의 목소리와 로만의 크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자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로만이 말했다.

"경제 법칙을 고려하지 않으니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 사람은 이 점을 잘못 알고 있다니까…."

메제네츠키는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로만의 말처럼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로만의 말투에는 혁명만을 위하여 12년의 인생을 바친 혁명의 영웅인 메제네츠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증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지독한 분노가 메제네츠키의 마음 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이 어리석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치솟아 올랐다.

'이런 세상에서는 단지 동물과 같은 사람들만이 살아 남는다. 양과 함께 있는 노인이나, 반은 동물이고 반은 인간인 사형 집행인들과 간수들, 로만과 그의 친구들처럼 알랑거리며 자만하는, 이도 저도 아닌 보수적인 혁명당원들만 살 수 있는 세상이구나.'

 

간수가 여자 죄수들을 여감방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건너 오고 있었다. 메제네츠키는 그들을 피하여 멀리 복도 끝으로 갔다. 간수가 돌아왔다. 그들은 정치범들의 감방 문을 잠그고 그에게 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메제네츠키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방문은 잠그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감방 벽을 바라보고 누웠다.

'나는 과연 모든 정력과 에너지, 의지와 재능을 헛되이 써 버린 것일까?'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 시베리아로 오다가 스베틀로구프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생각했다. 테러 조직이 자기 아들을 받아 주지만 않았다면 자기 아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그를 비난했다. 보통 여자들처럼 참 한심한 말이었다. 그 편지를 받아 들며, 그는 속으로 그녀를 경멸했다. 이 미련한 여인이 그와 스베틀로구프가 이전에 목표로 삼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 편지와, 스베틀로구프의 온화하고 믿음직한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성품을 떠올리며 스베틀로구프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의 인생 전체가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 대신에 성 베드로와 바울 요새에서 처음 한 달 동안 느꼈던 것과 같은 오싹한 공포가 밀려 들었다. 뒷머리가 무거워지면서, 깜깜한 어둠 위에 뜬 별들을 배경으로 징그럽도록 큰 얼굴과 털투성이인 입 등이 울렁울렁 커졌다 작아졌다 세상의 모든 공간을 점령해 버리는 것 같았다. 눈을 떴는데도 작은 형상들이 눈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제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검은 바지를 입고 삭발을 한 혼령이 앞에서 날아다니는 것도 보였다. 메제네츠키가 갑자기 밧줄을 매달려고 환풍구에 달려들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그의 가슴 속에서 타올랐다. 그는 그 증오에서 벗어나지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증오였다. 그는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란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만 하지? 동맥을 끊어?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목을 매달아? 그래, 그게 간단하겠군."

그는 복도에 쌓여 있던 장작 더미와 끈을 생각해 냈다.

'장작 위나 의자 위에 올라간다. 복도에는 간수가 있다. 곧 잠을 자거나 쉬러 가겠지. 그 때까지 기다린다. 그 끈을 방으로 가져와서 환풍구에 묶는다.'

메제네츠키는 복도를 키지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를 문 옆에 서서 엿들었다. 그 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지자 문 밖을 내다 보았다. 간수는 밖으로 나가지도 잠을 자지도 않았다. 그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

 

그 순간, 또 다른 감방 안에서는 코를 골고 신음 소리를 내고 기침을 해 대는 소음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든 노인은 작고 희미한 등불이 갈라 놓은 어둠 속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영혼의 눈 앞으로 그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 속에서 양의 형체를 띤 젊은이를 거룩하게 바라보았다. 온갖 나라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이 앞에 서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더 이상 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영혼 뿐만 아니라 실제 세상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노인은 위대한 환희와 평안을 느꼈다.

함께 감방을 쓰는 사람들은 노인과는 아주 판이한 광경,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노인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노인의 옆에 있던 죄수가 잠에서 깨어나고 그 죄수가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와중에, 노인의 신음 소리가 그치고 잠잠해지더니 노인이 싸늘히 식어 갔다. 죄수들이 감방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간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10분 후에 죄수 둘이 시체를 들고 영안실에 그것을 내려 놓았다. 간수들이 모두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가 텅 비었다.

 

'그렇지. 그래, 문을 닫아, 닫아.'

메제네츠키는 감방 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이 터무니 없는 공포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메제네츠키는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내면의 공포를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망상에만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엇도 그가 의도한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가슴이 요동을 쳤다. 장작 다발 근처로 가서 끈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복도 끝의 마지막 문을 살피면서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의자 위로 올라가 환풍구 창살에 끈의 중간을 감아 돌렸다. 양 쪽 끝을 묶고 시험 삼아 당겨 보았다. 그리고 올가미를 두 겹으로 만들었다. 줄이 너무 긴 것 같았다. 그는 끈을 더 높은 곳에 매달고 다시 올가미를 만들고 그 안에 목을 걸어 보고 내려왔다. 문 쪽에 가서 주변을 살피면서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올라서서 올가미에 머리를 집어넣고 줄을 조였다. 의자를 밀어 찼다.

 

다음 날 아침, 간수가 순찰을 돌면서 메제네츠키의 방을 들여다 보았다. 메제네츠키가 뒤집힌 의자 옆에 무릎을 구부린 채 서 있었다. 간수들이 그에게서 올가미를 풀어 내고, 교도소장을 불렀다. 로만이 의사였다는 것을 아는 소장이 그를 급히 찾았다. 사람들이 메제네츠키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응급 처치를 해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영안실의 타일 바닥 위에, 그의 시체는 구교도 노인의 시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