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 내가 살아 온 이야기 & 헬렌 켈러 연보

chapter.1

 

…행복한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짧았던 봄날, 울새와 흉내지빠귀새의 교향악도 그치고, 장미가 만발하며 과실이 무르익던 여름도 지나, 울긋불긋 단풍이 열정적이고 발랄한 아기의 발 아래 귀한 선물을 내려놓았다.

마침내 음울한 2월의 어느 날 청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아기의 눈과 귀를 닫더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의식불명 상태로 몰아넣었따. 위와 뇌에 심각한 울혈이 생겼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들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이른 아침, 갑작스레 열이 떨어졌고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회복이 시작됐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이가 살아났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누구도, 의사조차도 그 아이가 다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건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너무 아파 자리에 누워도 푹 잠들지 못하다가 극심한 고통 때문에 깨면 엄마는 어떻게든 통증을 덜어 주려고 끊임없이 나를 어루만졌다. 눈이 너무 메마르고 따끔거려 한때 그토록 좋아했던 빛으로부터 눈을 돌려 벽 쪽으로 돌아 누워야 했다. 눈 앞은 갈 수록 흐릿해지고 점점 더 어두침침해졌다. 잠시의 이 덧없는 기억을 제외하곤 다른 것은 하나같이 현실이 아닌 듯 악몽과도 같았다.

나는 차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과 고요에 익숙해졌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닐까. 소리를 들었던 것도 빛을 보았던 것도 잊었다. 내 영혼의 자유를 찾게 해 준 나의 선생님, 그 분이 내게 오기까지는. 그러나 내 삶의 첫 열 아홉 달 동안 얼핏 본 푸르고 너른 들판과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나무와 꽃의 반짝임은 내 안에 있었다. 어둠도 그 한 점 기억마저 앗아갈 순 없었다. 단 한 번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았던 "그 날은 우리 것이다. 그 날이 보여 준 것들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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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이 오시기 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어머니와 친구들이 나와 다른 신호를 사용하며, 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때때로 나는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그들의 입술을 만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입술을 움직여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미친 듯이 손짓 발짓을 해 댔다. 이것이 때론 나를 더욱 화나게 했으며, 그러면 나는 지칠 때까지 발길질을 하고 괴성을 질러 댔다.

 

당시에도 그런 내 행실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보모 엘라를 걷어차고 괴롭히다가도 좀 진정이 되면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이 후회스러운 느낌을 떠올리고 나쁜 행실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는 통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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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

 

…그러는 사이 의사 표현의 욕구는 점점 커져 갔다. 내가 만들어서 사용해 온 신호가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데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갈 수록 자주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한 나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폭발시켰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꾸 나를 움켜쥐는 것만 같아서 나는 미친 듯이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 수록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저항하려는 생각만 꾸역꾸역 강해져서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고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발버둥을 쳤다.

 

혹 어머니가 가까이 있어서 그 품에 파고들어 울기라도 할 때면,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왜 그렇게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는지 그 이유마저 잊어버리곤 했다. 의사 소통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질 수록 이런 식의 감정 폭발은 날마다, 거의 매 시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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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 있다면 바로 이 날, 내가 앤 맨스필드 설리번 선생님을 만난 날이다. 무엇으로도 측량할 길 없으리만치 대조적인 우리 두 삶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생각할 수록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1887년 3월 3일 만 일곱 살을 꼭 석 달 남겨 놓은 때였다.

바야흐로 이 중차대한 날 오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멀찍이서 구경하는 자세로 나는 우리 집 현관에 나와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의 움직임에서 막연하게나마 뭔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집안 곳곳에 예사롭지 않은 분주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문으로 향했고 계단 위에서 기다렸다. 한낮의 햇살은 현관을 뒤덮은 겨우살이 덩굴을 뚫고 내려와 치켜든 내 얼굴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이제 막 다다른,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남국의 봄 인사를 전하는 친근한 잎사귀와 꽃을 향해 내 손가락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더듬더듬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질 놀라운 미래를 알지 못했다. 벌써 몇 주 째 고통과 분노가 나를 갉아 먹어 온 뒤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 이미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예의 그 노발대발 날뛰며 치러 온 전투에서 나의 패배를 기꺼이 받아 들인 상태였던 것이다.

 

혹 바다에서 짙은 안개를 만난 적이 있는가? 부연 어둠이 당신을 가둬 버린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태운 배는 조심조심 수심을 재는 다림추와 측심연(測深鉛)을 늘어뜨려 길을  찾으며 해안선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내게 교육이라는 게 시작되려 할 즈음 내 모습이 꼭 바다에서 안개를 만난 배와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나침반도 측심연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항구를 찾아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빛을! 제발 나에게 빛을!" 내 영혼은 그저 소리 없는 외침을 내지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한 줄기 사랑의 빛이 마침내 내게 이른 것이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나를 끌어당겨 양팔로 꼭 감싸 안았다. 그녀는 온갖 사물을 내 앞에 드러내 보이려고 온 사람, 사물의 비밀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내게 사랑을 주려고 여기까지 찾아 온 사람이었다.

 

이튿날 아침, 선생님은 방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인형을 주었다. 퍼킨스 학교의 앞 못 보는 어린이들이 내게 보내 온 이 인형은 로라 브리지먼이 손수 옷을 지어 입힌 것이었다. 물론 나는 이 사실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인형을 가지고 제법 놀았을 즈음 설리번 선생님은 내 손에 천천히 '인형'이라고 썼다. 나는 곧 이 손가락 놀이에 흥미를 느꼈고 그대로 흉내 내려고 애썼다. 마침내 '인형'이란 글자를 정확히 쓰는 데 성공한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아래층에 있는 어머니한테 달려가 손을 치켜들고 그 위에 '인형'이라고 썼다. 내 속에 자랑과 긍지가 가득했다. 나는 내가 쓴 것이 한 낱말의 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원숭이가 하듯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낱말의 철자를 익혔다. 그 중에는 핀, 모자, 컵도 있었고, 앉다, 서다, 걷다와 같은 동사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비로소 깨닫기까지 선생님은 똑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하며 나와 몇 주를 더 씨름해야 했다.

 

어느 날 나는 새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무릎에 누더기가 다 된 크고 낡은 인형을 올려놓고 '인형'이라고 썼다. 선생님은 내게 새 것이든 헌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이 '인형'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 날 아침 우리는 벌써 '컵'과 '물'을 놓고 한바탕 격전을 벌인 터였다. 선생님은 'm-u-g'는 물을 담는 그릇을 가리키고 'w-a-t-e-r'는 그릇에 담긴 물을 뜻한다는 걸 깨우쳐 주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알 게 뭐냐는 듯이 이 둘을 섞어 썼다. 결국 선생님은 시간이 흘러가도록 이 문제를 잠시 미뤄 두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과 같은 기회를 잡았을 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도전할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매 번 같은 방식으로 거듭되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태였던지라 당장 새 인형을 낚아 채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드러냈다. 깨진 인형 조각이 발에 닿자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슬프지도 않았고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사실 마음에 드는 인형도 아니었다. 내가 사는 적막과 암흑의 세계에는 슬픔이니 애정이니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깨진 인형 조각을 쓸어 난로 한 편에 모아 놓았다. 어쨌거나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던 원인이 제거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선생님은 모자를 가져왔고, 나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가려나 보다 하고 짐작했다. 만약 말에는 담을 수 없는 이 느낌이 생각이라고 불리는 것이라면, 지금 든 이 생각이야말로 나를 기쁨으로 팔짝팔짝 뛰어 오르게 했다.

우리는 펌프가를 뒤덮은 겨우살이 향기에 이끌려 오솔길을 걸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 댔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흘렀다. 그 때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썼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 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기억의 저 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을 감지했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 위로 세차게 내리꽂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 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것이 가져다 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다. 나는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물론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것들이었다.

 

펌프가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내게 배움의 열의를 불어 넣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으며, 각각의 이름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 왔다. 집에 돌아오자 만지는 모든 것에서 생명의 떨림이 느껴졌다. 이제는 내가 사물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문을 열자 조금 전 산산조각을 내 버린 인형이 생각났다. 난로 한 편에 치워 놓은 깨진 무더기를 더듬어 부서진 조각을 찾아 들고 어떻게든 그것을 맞춰 보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눈물이 차 올랐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난생 처음 후회하는 마음이 들더니 슬픔이 몰려 왔다.

  

나는 그 날 정말 많은 낱말을 익혔다.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선생님이 들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아론의 지팡이에 꽃이 핀 것처럼* 이들 낱말들로 하여 세상은 바야흐로 내 앞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즐거운 사건의 연속이었던 하루가 마침내 저물고 침대에 누웠을 때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한 아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아, 내게 찾아 온 이 기쁨이 계속되기를, 나는 처음으로 다가올 새 날을 소망했다.

 

*구약성서 민수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모세의 형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돋고 꽃이 피게 하여 그를 선택했음을 증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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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6

 

처음으로 '사랑'이란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던 아침이 생각난다. 낱말을 많이 알기 전이었다. 어느 날 다소 일찍 일어난 바이올렛 몇 송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따다가 선생님에게 드렸다. 선생님은 내게 입을 맞추려 했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 외에 누구와도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한 쪽 팔로 나를 포근히 감싸 안고 내 손에 "나는 헬렌을 사랑해" 라고 썼다. 나는 물었다. "사랑이 뭐예요?"

선생님은 나를 더욱 바싹 껴안으며 내 심장을 가리키더니 "그건 여기 있단다" 하고 말했다. 난생 처음 나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만질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로선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만 했다.

 

나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바이올렛 향을 맡은 뒤 갓 배우기 시작한 낱말과 예전에 쓰던 신호를 섞어 가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질문을 했다.

"사랑은 꽃의 달콤함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단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마침 선생님과 나는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 따뜻한 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나는 열이 감지되는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것이 사랑인가요?"

만물을 키워내는 따뜻함의 원천인 태양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도 혼란스러워 나는 낙심천만이었다. 왜 선생님은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 걸까 의아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슬을 나누어 놓고 큰 것 두 개, 작은 것 세 개 하는 순서로 꿰고 있었다. 나는 자꾸 틀렸고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친절하게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어디서 자꾸 틀리는지 알게 된 후, 작업에 정신을 집중하게 됐으며 어떻게 해야 틀리지 않을지 생각하게 됐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 이마에 대고 '생각하다'라고 결정적인 한 단어를 써 주었다.

바로 그 때 나는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바로 그 단어를 섬광과도 같이 깨우쳤다. 추상적인 개념을 최초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릎 위에 놓인 구슬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래도록 가만히 앉아서 사랑의 의미를 알아 내려고 애썼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루 종일 흐린 날씨였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남부 특유의 찬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물었다. "선생님, 사랑은 이런 건가요?"

"그래, 맞아. 사랑은 햇살이 비치기 전 끼어 있던 구름 같은 거란다."

당시 나로서는 이 짧은 한 문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헬렌,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구름을 만질 수 없단다. 그러나 비를 만질 수는 있지. 한낮의 무더위에 시달려 목마른 대지와 꽃이 단비를 받아 마시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잘 알잖니? 사랑도 꼭 그렇단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모든 것 위에 부어지는 그 달콤함만은 느낄 수 있지. 사랑이 없다면 행복하지도 뭘 하고 싶지도 않을 거야."

 

이 아름다운 진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과 사람의 영혼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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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7

 

선생님은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 중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끌어 낼 기회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 삶을 즐겁고 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본을 보이기를 잠시도 쉬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 처지를 누구보다도 빨리 공감했고, 사랑으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천재였다. 때문에 선생님과 함께 한 첫 해는 너무도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선생님은 그 때 그 때 내가 잘 받아들이도록 즐겁게 지식을 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선생님은 아이의 마음이 얕은 시내와 같아서 잔돌이 많은 배움의 과정을 지날 때에도 즐겁게 춤을 추듯 잔물결을 일으키며 여기는 꽃, 저기는 덤불, 또 저 위엔 양털구름을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산 속의 숨은 생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며 깊은 강줄기를 이루듯이, 그리하여 그 고요한 수면 위에 작은 꽃송이의 고운 자태와 굽이치는 언덕과 선명한 녹음, 그리고 푸른 하늘까지 고스란히 담아 내듯이 꼭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제자의 정신을 이끌었다.

 

아이를 교실로 데려오는 건 어느 선생님이나 할 수 있지만, 그 아이로 하여금 무언가를 배우도록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는 할 일이 있든 없든 제 스스로 할 마음을 먹지 않으면 어떤 일이 되었든 즐겁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교과서를 붙들고 본격적인 씨름에 들어갈 의지를 다지기에 앞서 승리의 기쁨과 실패의 상실감 같은 것을 충분히 겪어야 한다.

 

선생님은 늘 가까이 있었으므로 나는 선생님과 나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의 내 기쁨 가운데 얼마만큼이 나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얼마만큼이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인지 말할 수 없다. 선생님 따로 나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의 발자취는 고스란히 선생님의 발자취다. 내게 훌륭한 점이 있다면 그건 모두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분의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내겐 재능도 영감도 없었을 것이고 기쁨 또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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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연보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출생.

1882년 1월, 열병을 앓고 난 후 시력과 청력을 잃음.

 

188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만남. 벨은 헬렌의 부모에게 보스턴의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를 추천해 줌.

1887년 3월 3일,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앤 설리번이 가정교사로서 터스컴비아에 옴.

1887년 4월, 펌프가에서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 쓰며 '물'이라는 단어를 깨우치고 "영혼이 해방됨".

1887년 5월, 연결된 이야기를 읽기 시작함.

1887년 7월, 점자 공부를 시작함.

 

1888년 5월 26일, 보스턴의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 입학.

1890년 3월 26일, 사라 풀러에게 발성법을 배우기 시작.

1893년, 벨과 함께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 견학.

 

1894년 10월, 뉴욕의 라이트 휴메이슨 시각장애인 학교에 입학. 그 곳에서 2년 동안 체계적으로 공부함.

1896년 10월, 래드클리프 대학 예비학교인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입학.

1900년, 하버드 대학교 부설 래드클리프 대학 입학.

 

1902년, <레이디스 홈 저널>에 <내가 살아 온 이야기> 연재.

1903년, <내가 살아 온 이야기> 단행본으로 출간.

1903년, <낙관주의 : 한 편의 에세이> 출간.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 졸업. 졸업 증서에 '전 과정을 수료했으며 특히 영문학이 우수함'이라고 쓰임.

1906년, 주지사의 추천으로 매사추세츠 주 시각장애인 교육위원회 위원이 됨.

 

1908년, <내가 사는 세상> 출간.

1910년, <돌담의 노래> 출간.

1913년,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강연. <어둠 바깥으로> 출간.

1916년, 네브래스카, 캔자스, 미시시피 등에서 반전 강연.

1918년, 자신의 삶을 극화한 영화 <해방>에 주연으로 출연.

1927년, <나의 종교> 출간.

 

1929년, 두 번째 자서전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 : 나의 최근의 삶> 출간.

1931년 2월, 템플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받음.

1931년 4월, 제1회 세계 시각장애인 회의에 참가.

1932년 6월 15일, 글래스고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받음.

1932년, <황혼의 평화> 출간.

1933년, <스코틀랜드의 헬렌 켈러> 출간.

1937년, 한국 방문.

1938년, <헬렌 켈러의 비망록> 출간.

1941년, <믿음을 가지자> 출간.

 

1942년, 2차 세계대전 부상병 구제 운동 전개.

1955년, <나의 선생님 : 앤 설리번 메이시> 출간.

1957년, <열린 문> 출간.

 

1964년 9월 14일, 미국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 받음.

1965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여성 명예의 전당에 오름.

1968년 6월 1일, 88세의 나이로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