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시몬 비젠탈 :: 심포지엄 (3)

"참회와 속죄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하여"

- 데보라 E.리프스테트 (역사학자, 미국인)

 

'테슈바', 즉 참회는 '돌이킨다'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유대교에서 이것은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사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뉘우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새롭게 만드는 행위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되돌아오기를 '열망하신다'. 테슈바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이 그에게 돌아오시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주위 사람과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중략)

 

탈무드는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먹은 이후에 하느님이 "이 사람(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처럼(c'echad memenu)' 되었으니" 라고 언급하신 창세기 3장 22절을 인용한다. 인간이 원죄를 저지르고 나서 도리어 하느님과 같이 되었따는 이런 설명은 오히려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마이모니데스는 <미슈나>와 <토라>에서 이 대목을 조금 다르게 읽었다. 그는 앞에 있는 '하나처럼(echad)'이라는 단어 뒤에 마침표를 넣고 그 단어를 '유일무이하게'라고 해석한 다음, 뒤에 있는 '우리 중(memenu)'이라는 단어를 '그 자신 안에서'라고 해석했다. 즉 "이 사람(아담)은 이제 '유일무이하게' 되었다. '그 자신 안에서' 그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라고 해석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하며, 또한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점에서도 유일무이하다.

따라서 잘못을 저지른 뒤에 '테슈바'를 행한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참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그 죄수가 그 SS대원에게 보인 반응을 평가하려면, 먼저 참회에 필요한 여러 단계를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가장 첫 단계는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저질러진 죄일 경우, 이런 개인적 만남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상당히 오래 전 <60분>*에서 마이크 월러스가 닉슨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의 최측근이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비리를 저질렀던 척 콜슨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콜슨에게 월러스는 혹시 당신 때문에 힘들어 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콜슨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이미 제 마음 속에서는 하느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으니까요."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가라고 가르치는 '테슈바'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유대교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야말로 희생자의 회복을 위해서나 가해자의 진실한 변화를 위해서나 최선의 방법이라 여긴다. 하느님과의 평화는 그 다음의 일이다.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과 직접 대면하도록 함으로써, 유대교는 '죄'라는 것이 불투명한 대상을 향한 행동이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죄를 지었을 경우, 피해자와 그리 가깝지도 않은 누군가를 대신 찾아간다거나 제３자에게 용서를 부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0분(Sixty Minutes) : 미국 CBS에서 1968년부터 방영하고 있는 TV 시사 프로그램.

 

내 죄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을 찾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다음에는, 이제 하느님을 만날 차례다. 이 때는 내 죄를 입으로 고백하고, 그런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보여 주어야 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더라도 가장 높은 단계인 '테슈바 게무라', 즉 완전한 테슈바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이 단계는 죄를 지은 사람이 다시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테슈바'와 '카파라', 그러니까 '참회'와 '속죄(죗값을 치르는 것)'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죄는 오로지 내가 내 행동의 결과를 인정한 다음에만 따라온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참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굳이 처벌이 필요한가?" 유대교의 기본 원리에 따르면,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의로운 행동은 축복을 낳고 악한 행동은 처벌을 낳는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움으로써 죄를 범했을 때,*그는 이후에 '테슈바'를 행했다(그의 진정한 뉘우침은 그 가증스러운 죄를 범한 직후에 쓴 시편 51편에 뚜렷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처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한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간통 사실을 숨기고 전장에 나간 우리아를 집으로 돌려보내 아내와 동침하도록 유도한다. 충성심이 투철한 우리아가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다윗은 총사령관 요압에게 명령하여 우리아가 전투 도중 적군에 의해 죽게 만든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종종 이렇게 물어본다. "이젠 '너희 유대인'들도 독일인 전범들을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 그만 잊어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우리보다 덜 박해당한 민족들에게는 오히려 이같이 물어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아직까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전범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다른 나라의 국민 가운데 전쟁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과거의 일에 대해 직접적 죄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물론 국가적 차원의 책임감을 지닐 수 있고 그들의 모국이 역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오점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직접적인 죄의식은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일 내가 용서를 청하는 어느 전범을 만나더라도 과연 나에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로선 그들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 특히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로선 그 SS대원이 진정으로 '완전한 테슈바'를 행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만약 죽음이 임박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가 과연 진정으로 뉘우쳤을까? 또한 그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진정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려 했더라도, 자신의 범죄에 대해 처벌받아야 하는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설령 죄수가 SS대원에게 입으로 용서를 베풀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SS대원의 죄가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다. 그런 경우의 속죄란 다만 그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인정하고, 이후 자기가 그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왔음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줄 때만 가능할 뿐이다.

 

※ 데보라 E.리프스태트(Deborah E.Lipstadt, 1947~) :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위치한 에머리 대학(Emory University)의 현대 유대학 및 홀로코스트 전공 도로트 기념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믿기지 않는 사실: 미국 매체와 홀로코스트의 대두, 1933년부터 1945년까지(Beyond Belief: the American Press and the Coming of the Holocaust 1933~1945)>,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정: 진실과 기억에 대한 폭력의 증대(Denying the Holocaust: the Growing Assault on Truth and Memory)> 등이 있다.

 

 

"하느님이 침묵하셨고 당신이 침묵했듯이"

- 휴버트 G.로크 (정치학자, 미국인)

 

영어의 '답변(response)'이란 단어의 기원이 된 라틴어에는 '보장하다', '약속(맹세)하다' 혹은 '직접 관여하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제시한 지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는 셈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의, 혹은 여러 개의 '답변'을 갖고 있다고 한 경우, 우리는 그러한 답변이 어떻게든 당신의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해 주리라고 '보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그 답변의 정확성(감히 말하자면 '진실성')을 유효하게 만드는 게 '직접 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답변은 곧 개인적 '관여'나 '실천'을 통하여 우리 주장의 진실성을 기꺼이 증명하거나 확인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략)

 

언제쯤 당신과 동료들이 수용소를 벗어날 수 있을지, 혹은 언제쯤 학살될 것인지에 대해 혹시 뭔가 새로운 소식이 없느냐는 질문에 노부인은 대뜸 "새로운 소식은 없다. 하느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으니까"라고 했다지요. 아마도 그 당시에는 하느님조차도 침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순간─당신과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순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도 침묵하셨는데, 우리 중 누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휴버트 G.로크(Hubert G.Locke, 1934~2018) : 시애틀에 위치한 워싱턴 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의 행정대학원 학장 겸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프랭클린 리텔과 공동으로 홀로코스트 연구자 연례회의를 창설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표 저서로는 <조국에서의 유배: 마르틴 니묄러가 모아비트 형무소에서 보낸 편지(Exile in the Fatherland: Martin Niemoeller' Letters from Moabit Prison)>와 <나치에 저항한 교회(the Church Confronts the Nazis)>가 있다.

 

 

"그의 인간성에 경의를 표하며"

- 에릭 H.로위 (윤리학자,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

 

그 SS대원은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부에게 고해하고 면죄받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생자에게 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이 상처입힌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누군가에게 인간적인 용서를 받고 싶어했다. 여기서 하느님이나 어떤 전능자의 용서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젠탈로선 그런 요청을 묵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섣부른 용서는 악을 희석시킬 뿐"

-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 독일 출신 미국인)

 

나는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이며, 정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한 다음, 심판의 때가 닥치자 간단히 요청해서 용서를 얻어내다니!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범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라테나우*가 암살된 후 그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어머니를 찾아가 위로했다는 사실에 나는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한 범죄를 쉽사리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본질적인 악의 문제를 희석시킬 뿐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 독일의 기업가 겸 정치가. 유대인이었지만 기업가로 크게 성공했으며, 훗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부장관을 역임했으나 우익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값싼 은혜는 위험하지만 용서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 마틴 E.마티 (종교사학자, 미국인)

 

W.H.오든*의 헤롯*은 기독교인의 용서를 패러디하고 있다. 헤롯은 죄를 짓기 좋아하고 하느님은 남의 죄를 용서하기 좋아하니, 결국 이 세상은 매우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증오에 사로잡힌 자들과 살인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언제든지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아무리 역설한들, 그들은 결코 손에 든 갈고리를 치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병실에서 저자가 침묵을 지켰던 것은 은혜가 값싸게 변하는 것을 막으려는 행동이었다.

 

*W.H.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 : 영국의 시인.

*신약성서에 나오는 헤롯 대왕을 말한다. 예수의 탄생을 소재로 한 오든의 풍자 시 <당분간: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for the Time Being: A Christmas Oratorio)>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중략)

 

비젠탈은 자신이 처해 있던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훌륭하게 일을 처리한 셈이라고 하겠다.

용서하는 것과 용서받는 것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날을 위해 더욱 자유로운 인간이 되게 해 준다.

 

 

"그가 용서받지 못하고 죽도록 내버려 두라"

- 신시아 오지크 (작가, 미국인)

 

도덕적 문제로 고민하는 인간은 복수와 용서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가기 쉬울까? 복수는 무엇이고 용서는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복수는 곧 폭력이고, 용서는 곧 정화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반대도 진실이다. 랍비들은 이렇게 말한다. "잔인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결국 무고한 자에게도 무심하게 마련이다." 결국 용서도 폭력이 되는 셈이다.

용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살인은 회복할 수가 없다. 또한 돌이킬 수도 없다. 살인에는 '다음 기회'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설령 그 용서 덕분에 누군가가 또다시 새로운 주검을 한 무더기 만들어 내는 일을 막는다고 치자(물론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이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게 한다고 지난 번에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날 수 있는가? 또한 세상에는 용서로도 씻어낼 수 없는 오점이 있다. 구제를 허락하는 용서는, 단지 구제가 가능한 상황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중략)

 

복수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다. 복수는 결코 뭔가를 갚거나, 앙갚음하거나, 청산하거나, 똑같게 하거나, 배상할 수 없다. 만약 복수를 통해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대량학살에 대한 복수로서 우리는 상대방의 가족은 물론이고 그 나라 사람들 대부분을 죽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희생자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복수'라고 하는 것은 악에 대하여 공공의 정의를 적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똑같은 악을 반복하거나, 그런 악을 모방하거나,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악을 결코 관대히 봐 주지 말자는 것이다. 심지어 관대히 봐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악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외면하거나 애써 모른 척하려는 것은 실제로는 공모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30~40년이 지나 그 악이 역사로 남게 되었을 때 그런 역사를 외면하려고─또는 잊으려고─하는 것 또한 공모에 해당된다. 그러한 악이 자기 세대의, 또는 다음 세대의 집단적 망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는 일은 사실상 악을 관대히 봐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략)

 

용서는 곧 냉혹함이다. 희생자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생자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부인한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희석시킨다. 그것은 희생자에 대해 둔감해지는 대신 살인자에 대해 민감해지는 법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른바 '복수'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것, 그것은 죄의 본성에 맞서 이 세상을 밝히는 정의를 뜻한다(여기서 '죄의 본성'이라 함은 뭔가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악행자의 바로 그 행위를 말한다. 즉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이다). 이러한 복수는 동정에 의해 불붙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복수는 적절하게 차려입은 정의로서 동정의 불을 계속 불러 일으킨다. 오히려 가차없는 쪽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다. 용서의 얼굴은 온화해 보이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냉랭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제 야만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런 자들은 자신의 야만성에 의기양양해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조차, 또한 그런 야만적 행위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뒤에조차, 그는 그 일을 의기양양해한다. (중략) 그 당시에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 그는 마치 천사와 같았다. 실제로도 '죽음의 천사' 노릇을 하며, 손에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움켜쥐고, 구둣발로는 저주받은 자들의 목을 밟고 서 있었으니까. 그 당시에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지금도 그 때의 기분과 추억을 씻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중략)

 

우리가 양심이 있고 지적인 사람을 단죄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심성적으로는 야만인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스스로를 야만인인 듯 행세하게 만들었고, 또한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에게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양심을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지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지각을 망쳐 놓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간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인간성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근거에 대해서는 인디애나 대학의 멜빈 L.플로틴스키 교수의 견해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비가역성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용서의 능력이다." 결국 또다시 뜻 모를 문장이다. 아렌트는 이 시대 최고의 도덕철학자이긴 하지만, 그녀조차도 역사의 나사로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 미국의 정치학자.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나치를 피해 194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1년에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고 나서 집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에서 이른바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사로(Nazarus) :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인물.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 만에 예수에 의해 되살아난다. 이른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유명한 누가복음의 '거지 나사로'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의 지옥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옥이 영원한 불 속에서의 고통이라는 개념은 중세 시대에나 통용된 것이었고, 이제는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의 영원한 격리야말로 진정한 지옥으로 봐야 한다고.

그가 용서받지 못하고 죽도록 내버려 두라.

그가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라.

그보다는 차라리 날아다니는 파리가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레이엄 그린(Henry Graham Greene, 1904~1991) : 영국의 작가.

 

※ 신시아 오지크(Cynthia Ozick, 1928~) : 장편 및 단편소설, 그리고 에세이 등을 통해 미국 내 저명한 문학상을 휩쓴 유명 작가. 최근의 저서로는 <명성과 어리석음: 에세이집(Fame＆Folly: Essays)>과 장편소설 <퍼터메서 비망록(the Puttermesser Papers)>이 있다.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회원인 그녀의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화해는 불가능해도 용서는 가능했다."

- 존 T.폴리코우스키 (가톨릭 신학자, 폴란드계 미국인)

 

화해는 공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해는 용서보다도 더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화해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후회, 회개, 책임의 인정, 치유,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재결합이 이루어진다. 화해는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시몬의 묘사를 통해 본 바에 의하면 그 죽어가는 병사는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용서'보다는, 오히려 시몬 개인과는 물론이도 나아가 유대민족 전체와도 일종의 '화해'를 원했던 것 같다.

 

시몬이 그러한 화해를 거절한 것은 옳은 행동이었다. 그가 줄 수 있었던 것은 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말마따나 "값싼 은혜"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운인이 시몬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미국의 신학자. 독일 출신으로 이른바 실존주의적 신학을 제창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나, 나치에 의해 추방되어 1933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하느님 탓이라고, 즉 하느님이 충분히 진지하게 은총의 책임을 지지 못했고 나치의 행로를 중단시키지 못했다고 원망하기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시몬의 퉁명스러운 대답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신정론(神正論)*적인 답변 또한 '싸구려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악의 존재에 대해 하느님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변증론을 말한다. 가령 "하느님이 전능하고 선하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악조차도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을 개인적인 생각으로 마음대로 해석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개념 상으로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한 글. 큰 가치는 없었던 글.)

 

 

"유대인들의 지지와 기독교인들의 비난"

- 데니스 프레이저 (방송인, 미국인)

 

10년이 넘도록 매주 기독교인들과 나눠 온 대화와 친밀한 토론의 결과 나는, 예수의 신성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그리고 가장 중요한─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용서에 대한 이해의 차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의 차이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의 초판이 발간되었을 때 나는 비젠탈이 참회하는 나치를 용서하지 않은 것은 정당했다며 하나같이 그를 두둔한 유대인들의 답변, 그리고 그와 반대로 하나같이 그가 잘못했다고 비난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을 보고 매우 당혹스러웠다. 나중에서야 나는 이것이 단지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만의 비극이어서가 아니라, 악에 대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용서에 대한 양측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다만, 용서에 대한 기독교의 다른 관점과 악에 대한 기독교의 다른 관점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먼저 용서에 대해 살펴보자. 비젠탈의 동료 죄수들과 이 책에 기고한 다수의 유대인 답변자들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유대인에게 '용서'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그 피해자에게 직접 찾아가서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해자 뿐이다. 만약 가해자가 그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한다면, 심지어 하느님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이다. 그러므로 살인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주 깊이 회개(내 생각에는 살인자가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리라 본다)하는 경우라면 하느님도 그 살인자를 용서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살인은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다. 가령 살인자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라면 결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부모가 그 살인자를 용서한다면, 그 부모는 아이를 자율적인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소유물로 여기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희생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고 따라서 살인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유대교의 믿음은, 살인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살인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다. 가령 고문을 동반한 살인은 다른 살인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살인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근본 자체를 잠식하는 행위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이 홍수 직후에 인간에게 주신 세 번째 계명(첫 번째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두 번째는 "산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도 바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였다(창세기 9장 1~6절). 살인을 방조하지 않는 것(<토라>에 의하면, 살인자를 살려두는 것 또한 살인을 방조하는 행위였다)이야말로 문명의 도덕적 기초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오늘날처럼 살인을 방조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퇴보하고 있다는 뜻인 셈이다. (중략)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살인자들을 용서하고 있다(살인자들은 감옥에서 나오며 "이 사회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들이 어떠한 참회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현대 사회의 지성인들은 살인을 '반(反)사회적'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불운한 사건으로 간주하면서, 살인자를 처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복귀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혹시 우리 사회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지나치게 깊이 영향을 받은 까닭일까? 아니면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도덕적 면죄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견해를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양자의 조합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못지않게 우울한 <보니 갈란드 살인사건>이란 책에서 정신분석학자 윌러드 게일린*은 살인자─가톨릭 계통 대학에 다니던 히스패닉 학생으로, 자기 여자친구를 때려 죽였다─를 보호하면서 그가 기소되지 않도록 노력한 가톨릭 사제들의 노력을 묘사하고 있다.

 

*윌러드 게일린(Willard Gaylin) : 미국의 정신분석의 겸 저술가.

*1977년 7월 7일 아침, 예일대 대학원생이던 리처드 헤린이 변심한 여자친구 보니 갈란드를 망치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헤린은 체포되어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그의 모교인 예일대와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그가 LA의 빈민가 출신이며 이 사건은 결국 잘못된 사회구조 탓이라는 식의 지나친 옹호론을 펼쳐 미국 내에서 한동안 크나큰 논란이 벌어졌다.

 

실제로 나는 이러한 주장을 현실에서 검증해 본 바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나는 지난 10년 동안 매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개신교 목사며 가톨릭 신부며 랍비 등 다양한 초대 손님들을 만났다. 당시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어느 여성이 다수의 청년들에게 윤간당하고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들이 체포되어 수감된 직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어느 '추기경'이란 사람이 감옥을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너무 화가 나서, 차라리 누군가가 '추기경으로부터 개인적인 방문을 받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써도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뉴욕의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추기경이 자기 교회를 단 한 번만 개인적으로 방문해 주어도 그야말로 감격해 마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방문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가학적 강간범들로, 눈부신 현대의학이 아니었다면 분명 살인범이 되었을(그들은 피해자가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고 도주했다) 인간들이었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은 한동안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명 '센트럴파크 조깅 여성 사건'이다. 1989년 4월 19일 밤에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20대 여성이 강간 및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근처에 있던 흑인 및 히스패닉 청소년 5명을 체포하고 심문해서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고, 법원은 이들에게 최소 5년~최대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2001년에 DNA 검사를 통해 진범이 따로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일명 '센트럴파크 5인'은 경찰의 강압수사 및 인종차별의 희생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뒤늦게 누명을 벗었고, 뉴욕 시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게 되었다. 사건 발생 당시 뉴욕 대주교 존 오코너 추기경(1920~2000, 본문에서 필자가 비난한 바로 그 추기경)은 뉴욕의 치안 문제가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했고, 가해자로 지목된 5인 뿐만 아니라 피해자도 직접 찾아가 위로하며 이 사건이 자칫 인종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진화에 나섰다. 반면 훗날의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당시 신문의 전면 광고를 통해 '센트럴파크 5인'에게 극형 선고를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

 

랍비들은 개혁파건 보수파건 정통파건 간에 하나같이 그 범죄자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억지로라도 만나야 한다면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말해 줄 것이며, 엄하게 처벌받고 나서도 평생 동안 그 죄를 갚아야 한다고 거듭 일러 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 사례에서 드러난 기독교인들의 용서에 대한 관점,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관점으로 미루어─평생 유대교를 공부하고 가르쳐 왔지만, 나는 이제껏 한 번도 하느님이 악한 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유대인을 만나 본 적이 없다─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또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은, 악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악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옛 소련의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똑같이 박해받는 처지였다. 냉전 말기에 와서는 유대인보다 기독교인들이 더 심하게 박해를 당했다. 소련 내 유대인을 위한 전세계 유대인들의 노력 덕분에,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소련에서 유대교 신자가 감옥에 가는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고 있었다. 겨우 1300만 명에 불과한 전세계 유대인이 소련에서 유대교를 합법하는 데 성공하는 동안, 무려 10억이 넘는 전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은 왜 잠자코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독교 특유의 용서 개념으로 인해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조차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둘째, 심지어 적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관념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셋째,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제아무리 악하더라도─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악한 자를 미워하거나 맞서 싸우려 하지 않기 떄문이다(기독교인들이 대량학살자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한 자의 손에 기꺼이 죽겠다는 뜻은 아닐 텐데 말이다). 넷째, 기독교인들이 사후에 있을 영혼의 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생전에나 가능한 육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홀해졌기 때문이다.

 

※ 데니스 프레이저(Dennis Prager, 1948~) : 1982년부터 LA에서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로 활약했으며 도덕, 인권, 종교 문제에 대한 강사로도 유명하다. 1985년부터는 <얼티밋 이슈(Ultimate Issues)>라는 제목으로 개인 저널을 펴내고 있다. 저서로는 <한 번만 더 생각해 봅시다: 43가지 주제에 대한 43가지 에세이(Think a Second Time: 43 Essays on 43 Subjects)>, 조셉 텔러시킨과의 공저인 <사람들이 유대교에 대해 궁금해하는 아홉 가지 질문(the Nine Questions People Ask About Judaism)>, <왜 하필 유대인인가?: 반 유대주의의 이유(Why the Jews?: the Reason for Antisemitism)> 등이 있다.

 

 

"그것은 참회가 아니라 위선이었다."

- 테렌스 프라이티 (언론인 겸 작가, 영국인)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남들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 이들은 너무나도 겁에 질리고 불행한 기분을 느끼게 마련이다.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죽어가는 SS대원이 자신이 참여한 학살에서 희생당한 당사자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중략)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보다는 오히려 죽을 게 '확실한' 상황이 되었을 때, 사람은 더욱 절실하게 자비를 요청하게 된다. 비젠탈이 만난 SS대원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략)

 

나는 그의 요청을 무척이나 값싸고 편리한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로 간주했을 것이고, 그가 유품 몇 가지를 남긴 것도 그저 연극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위선적 행동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유대인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상대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다. 결국 종족말살이라는 크나큰 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인간이 용서를 구하는 게 나로서는 더없이 역겹게 느껴진다. 자기가 죽게 되었으니 용서를 간청한다? 그것이야말로 거짓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평소에도 늘 고통스럽고 잔인한 대우를 받았던 집단수용소의 수감자에게 철학자 노릇까지 바란다는 건 지나친 기대가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그에게 고해 신부 역할까지 바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놀라운 인내로 그 SS대원의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그 잔인무도한 행위에도 자신의 공포나 증오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병실을 걸어 나감으로써 그는 가장 분별있고 가장 논리적인,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행동을 했던 셈이다.

 

 

"자비를 베푼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조슈아 루벤스타인 (인권운동가, 미국인)

 

자발적이고 진정성 있는 고백은 극히 드물다. 최근의 극적인 사례─오래 전에 아르헨티나의 어느 해군 장교가 정신을 잃은 정치범을 비행기에서 바다로 집어던졌다고 자백한 사건─는 우리로 하여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여전히 그와 비슷한 범죄자들이 자기 침대에서 발 뻗고 편히 잠든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것은 이제 노년에 접어든 나치 범죄자들이 평안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득 SS사령관 겸 독일 경찰총장이던 하인리히 힘러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1943년, 포츠난(폴란드 중서부의 도시)에서 일단의 나치 장교들에게 한 연설 도중에, 힘러는 대량학살을 저지르면서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제군 대부분은 시체가 100구, 또는 500구나 1000구씩 여기저기 나란히 놓여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동시에─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한 몇 가지 예외와는 별개로─또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로선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힘러의 주장을 보면 그 전체주의 정권이 인간적인 감정에서조차 얼마나 싸구려 감상주의에만 몰두했는지를 알 수 있다. 가령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다. 또한 나치는 결코 무감각한 짐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웠고, 자녀에게는 자애롭고, 아내에게는 사랑스럽게 굴 줄 알았다. 다만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을 학살했을 뿐이다. 힘러가 부하들에게 자랑스레 설명했듯이,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는 나름의 기술을 익혔던 것이다. (중략) 나로선 부상을 입은 나치의 용서해 달라는 요청에는 오히려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의 어마어마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심각한 부상과 임박한 죽음 때문에 더 자극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 때 비젠탈은 알 수 없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독일 군인들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 젊은 나치도 비무장 상태의 남녀노소를 불태우고 총으로 쏘라는 명령에 굳이 복종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중략) 물론 지금 집에 편안히 앉아있는 우리가 그 나치에게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쓰지 그랬느냐"고 해 봤자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다. 아무튼, 그가 히틀러 소년단과 SS에서 무려 10년을 보냈고 특히 마지막 2년은 동부전선의 무지막지한 전장에서 보냈으면서도, 상부에서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이 특별한 나치는 신앙심 깊은 가톨릭 집안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애정이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그는 청소년기에도 문제아가 아니었고, 타고난 가학자도 아니었으며, 잔인하거나 무감각한 인간도 아니었다. 물론 당시의 독일 사회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각 개인은 여전히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 젊은 나치의 선택은 자신의 진정한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SS에 입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압력을 느낀 다른 청년들은 오히려 나치에 반대하는 비밀 조직인 백장미단*에 가입하거나, 아예 병역을 기피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백장미단(Die Weiße Rose) : 제２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다섯 명의 대학생이 조직한 비폭력 저항단체. 뮌헨의 대학생이던 한스와 조피 숄 남매의 주도 아래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43년에 체포되어 전원 처형당했다. 숄 남매의 누이인 잉거 숄이 쓴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힐 만큼 인기를 얻었다.

 

한 가지 특이한 예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동생이자 열성적인 나치였던 하인츠 하이드리히의 경우다. 이른바 '최종 해결(라인하르트가 그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를 파악한 직후 하인츠는 100여 개의 여권을 위조해서 독일 내 유대인들을 해외로 도주시켰고, 1944년에 게슈타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운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SS장교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이 정보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유대인을 박멸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을 외부 세계에 폭로했음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깊이 참회하면서, 그 박해받은 희생자들을 위하여 각자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 : 독일의 군인. 나치스에서 힘러 다음 가는 SS의 최고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잔혹한 행동으로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숨기고 홀로코스트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체코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피격당한 직후 사망했다.

*쿠르트 게르슈타인(Kurt Gerstein, 1905~1945) : 독일의 군인. SS소속 장교로 유대인 학살과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후 각국 외교관 및 교황 피우스 12세와 접촉함으로써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는 국제 여론을 모으려 했으나 실패한 후 자살했다.

 

고백과 참회만으로는 용서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죽어가면서 겁에 질린 그가 연약한 유대인 죄수를 불러다가 용서를 구걸한 것은, 사실 상 잘못된 참회의 행위인 동시에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이기주의였다.

참된 인간성은 정의와 자비를 겸비해야 한다. 비젠탈이 그 부상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얼굴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아 준 행동은 집단수용소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인간의 본성을 다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죽어가는 나치는 대량학살의 원흉이었고, 비젠탈은 그를 충분히 자비롭게 대한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비젠탈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인 나치를 만날 기회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테니, 마음만 먹었으면 그를 질식사한 것으로 위장해 죽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만약 그를 용서했더라면, 그것은 비젠탈 자신과 가족이 겪은 무수한 고통을 배신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대체 누가 지옥에 간단 말인가?"

- 시드니 섀크나우 (군인, 미국인)

 

성인이 된 이후 대부분의 세월을 군대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전쟁과 군인 생활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아는 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육군에서 40년을, 특히 그 중 32년을 그린베레*에서 보낸 나로선 그 죽어가는 SS대원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닌 셈이다. 전투에 직접 참가해 본 우리는 전쟁이란 것이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선과 악을 증폭시키고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전쟁은 우리의 용기를 자극하는 동시에 전우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북돋아 준다. 동시에 전쟁이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인간성을 위협한다.

 

*그린베레(Green Beret) : 미국의 대표적인 특수부대이며 정식 명칭은 미 육군 제10공수특전대이다. 1952년에 창설되었으며 전쟁 발발 시 적지 침투와 정보 수집, 유격전 등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중략)

 

시몬 비젠탈이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옳은 행동이었다.

첫째로 그에겐 윤리적으로 그럴 권리가 없었고, 둘쨰로 그 잔인무도한 나치에겐 용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다. 그 나치는 용서가 가능한 범위를 이미 넘어섰던 것이다. 그 SS대원은 차라리 비젠탈보다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SS대원이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연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하실 수 있을지도 미심쩍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지옥에 간단 말인가?

 

※ 시드니 섀크나우(Sidney Shachnow, 1934~2018) : 미국의 예비역 육군 소장이며, 리투아니아의 콘보에서 태어나 1941년부터 44년까지 콘보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탈출했다. 1960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뒤 육군에 입대했고 이후 그린베레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여러 전투에서의 혁혁한 수훈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1991년부터 92년까지 특수부대 총사령관(Commanding General of the Special Forces)을 역임했다.

 

 

"거기에 분명히 하느님이 계셨다"

- 도로테 죌레 (기독교 신학자, 독일인)

 

나는 시몬 비젠탈이 자기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모순적인 답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모순─"아니,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독일인인 동시에 SS의 살인자인 당신을 말입니다"와 "예, 나는 당신의 참회를 믿습니다. '압솔보 테*'. 편히 가시오" 사이의 모순─은 비젠탈의 이야기 자체에도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침묵한 채 병실에서 나온 것이며, 다른 동료 죄수들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이며, 또한 그 나치의 어머니를 찾아간 것까지 말이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아니"를 감지한 직후에 곧바로 "예"를 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그대를 용서하노라"라는 뜻의 라틴어.

 

(중략)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참회라는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한참 뒤에서야 나는 유대교에서 그런 의미로 쓰이는 '테슈바'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이는 '해방', '가던 길에서의 돌이킴', '새로운 시작' 등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유대교의 전승에 의하면 '테슈바'는 천지창조보다도 앞서서 <토라>, 메시야의 이름,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신비들과 함께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테슈바'가 불가능한 사람이나 시간이나 장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어쩌면 나는 다른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아니,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마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오레무스*".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는 뜻의 라틴어.

 

 

"만약 그 나치가 깨어나 참회의 삶을 살았더라면"

- 마네스 스페르베르 (작가 겸 편집자, 프랑스인)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의 에필로그에서 독자들 앞에 제기되는 양심의 문제에 대하여, 독자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즉 우리가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당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용서에 대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어째서, 그리고 어떤 내적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망각 상태에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희생자의 망각과는 별개로 가해자의 입장에서도 망각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며, 실상 그것은 피해자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완전한 망각이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비(非)현실화'를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뭔가를 용서하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범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동시에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환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중략)

 

'쿨로 차야브', 즉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뜻의 유대교 교리가 있다. 모두가 죄를 지었으니 모두가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할 것이고, 인류의 존재를 위협할 것이고, 또한 인류는 결코 멸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범죄자 자신은 잊어버릴 수 있는가? 과연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기도 전에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 고백이나 진정한 참회가 없다면, 그들의 망각은 단지 자신들의 범죄를 지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용서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죄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략) 우리로선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는 짓을 저지른 상대방이 이제 더 이상 용서할 것도 기억할 것도 없다고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침묵은 희생자의 도덕적 승리였다."

- 앙드레 스타인 (언론학자, 캐나다인)

 

그 곳에서는 이전까지 알던 지식에 근거한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었다. 어떤 명령에 대한 판단, 행위, 심지어 순종조차도 삶을 위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이치에 닿지 않았다. 희생자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축출되었다. 그 결과는 시몬이 "정신적 마비 상태"라고 표현한 혼수상태였으며, 자칫하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파멸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수용소라는 그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과거 유대인의 세계에 존재했던 그대로 살아남지 못했으니, 결국 시몬의 침묵은 선택 아닌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의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감희 논의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과연 그에게는 용서를 요청할 만한 권리가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그의 참회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까?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조차도 용서를 바랄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전쟁 범죄자들을 용서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그러한 관용으로 인해 생존자와 희생자들의 기억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솔직히 나로서는, 유아살인자나 고문자나 강간범 등을 기꺼이 용서하면서 그러한 범죄의 원인을 사악한 이데올로기나 선동 탓으로 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뚤어진 열성에 참여할 마음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어쩌면 카를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의 젊은이다운 경솔함이 주된 이유일 뿐이라고 들먹이지 않을까?

 

"자네가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도 나올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이 말은 두 가지 진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시몬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실상 희생자보다는 죽어가는 살인자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그런 사람들은 젊은 SS대원을 용서하라고 압력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나치즘조차도 지극히 인간적인 색안경을 통해 바라본다는 점이다. 당시 카를은 스물 한 살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였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신앙이나 가족의 도덕적 가치에 의거하여 행동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엔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힘을 주겠다며 유혹하는 감언이설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살인에 가담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품고 생을 마감했지만, 정작 진실한 후회나 참회를 보여주는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임종 당시 그의 고백이 어딘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시몬이나 그의 동료들처럼 그 SS대원의 '도덕적 고통'에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오히려 그의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평안하지 못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오만한 나치로 인해 얼떨결에 이 드라마에 연루된 시몬에게 가 있었다.

 

진정한 참회에는 피해 당사자에 대한, 나아가 그와 비슷한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카를은 간호사에게 유대인을 한 사람─아무 유대인이나─데려오라고 부탁했다. 그 유대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써 속죄를 얻고 마음 편히 죽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요청이야말로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척해진 유대인 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여차하면 자기의 동료 SS대원에게 살해될 수도 있는 그 유대인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대했다니! 이것은 결코 참회의 증거라고 볼 수 없다. 단지 카를이 여전히 유대인을 하나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든 기적적인 영적 구원을 베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은, 카를이 시몬을 자기와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 단지 구원의 도구로만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죽기 직전에 자기 유품을 시몬에게 남김으로써 교묘하게 시몬의 삶에 스스로를 각인시키기까지 했다. "나는 무덤 속에서도 너에게 손을 뻗어서, 네가 죽어가는 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만들겠다…." 그리하여 카를은 여전히 시몬의 양심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시몬은 이미 죽은 자들의 귀로, 또한 죽어가는 자들─엘리, 시몬의 어머니, 동료들─의 귀로 그 나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존중을 표한다. 결국 그의 침묵은 다음과 같은 단호한 선언이었던 셈이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들었습니다. 또한 그런 양심의 부담을 느끼며 죽는 것을 당신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도 알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입니다. 나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의 증오의 불길은 너무나도 거센 까닭에, 미처 당신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나 자신을 삼켜 버릴 테니까요.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까닭은 단지 내가 당신에게 살해된 희생자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이 내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도록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저주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음으로써, 시몬은 사실 상 카를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부득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그는 상대방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괴물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때 인간성을 잃어버렸던 사람이 회복한 인간성에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정녕 우리는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용서하자는 데 동의해야 할까? 지금 어떤 악행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살인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훗날 임종의 자리에서조차 아무런 자비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지 않아도 될까? 종족학살이라는 만행에 관여했다면 훗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죽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텐데 말이다. 지금 한창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 또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을 실제보다 더 숭고하게 미화시키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고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생존자들에게 도덕적 태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용서하지 않음'이 곧 잔인함이나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고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몬 비젠탈은 자신의 선택 아닌 선택을 비난하며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그를 향해 유대-기독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그런 내용의 도덕적 설교를 읽다 보면, 어떻게 한편으로는 시몬이 나치를 용서했어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몬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단죄하려 드는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도덕적으로 혼탁한 이 세상에서는 그조차도 끝까지 고결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그가 인간 이상의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다는 걸까?

 

<깨어진 침묵: 극한에서의 대화>란 책에서, 나는 우리 친척인 자리 아주머니가 나치 형사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자궁과 우리의 목숨을 뒤바꾼 일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나치의 아이를 배고 난 뒤, 자리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식구들을 모두 살려 줘요. 그렇지 않으면 내 뱃속에 든 당신 아이도 온전치 못하게 될 테니까." 결국 그 나치는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숨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자기 쾌락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살려 준 그 겁탈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라곤 눈곱만치도 들지 않는 것일까? 네 아이와 두 어머니의 생명을 구해 주면서 우리 아주머니에게 그 대가를 요구한 그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 속엔 그저 분노밖에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

이 용감하고 자기 희생적인 비극적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히려 자리 아주머니를 비난했다. "아무리 식구들의 목숨을 구한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리 아주머니에 대한 '심판관'들도 피해자의 도덕성이라는 관점에 단단히 붙박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끝내 침묵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결정은, '인간 이하의 존재'인 희생자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적 승리라는 점에서 내겐 무척이나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 모든 비인간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도덕적 태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는 이 섬뜩한 놀이에 가담하는 것을 거절했다.

 

(중략)

 

계속 침묵하고 두려워함으로써, 그녀는 집단적 죄책감이라는 짐의 일부를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한 나라의 착한 아들들에 의해 수백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에 관여한 자기 아들이 도덕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다는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는 어머니라면, 실상 아들의 범죄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침묵에 담겨있는 것들"

- 네케이마 테크 (사회학자, 미국인)

 

그 SS대원의 죄의식은 단지 어느 유대인 가족을 학살한 경험에만 국한될 뿐, 결코 유대인 전반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인 죄수에 대해서조차 전혀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자기를 과거의 죄로부터 속죄해 줄 유대인 한 명만을 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대인의 곤경에 대해 얼마나 무신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 죽어가는 남자는 자기 스스로도 비합리적이라 여긴 요구를 유대인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 죽어가는 나치는 그저 자기만의 고통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자기연민에만 사로잡힌 탓에, 그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그 유대인들은 금방 죽었기 때문에 저만큼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저만큼 죄가 많지도 않았을 테고."

 

그는 자기가 죽인 유대인이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그저 무고한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다. 임종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듯하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나치 때문에, 안 그래도 머지않아 죽을 운명인 집단수용소의 수감자는 졸지에 커다란 부담을 추가로 떠안게 된다. 그 나치는 자기의 요구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더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부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압니다만, 당신이 대답해 주지 않으면 저는 결코 마음 편히 죽지 못할 겁니다."

 

그 SS대원은 자기연민으로 인해 타인의 상황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그리고 자기가 내면의 갈망을 토로하고 싶어하는 대상인 유대인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나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당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왜 그 상황에서는 비젠탈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을까? 그 SS대원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하나의 개인,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방을 하나의 유대인으로, 즉 유대인이라는 집단 내지 종족을 대표하는 자로만 여겼을 뿐 결코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유대인이란 다 똑같아서, 각자의 개성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모든 유대인을 열등한 존재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간주한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

죽어가는 남자는 상대방이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붙들어 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담을 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타인의 입장에 대해서는 완전히 둔감한 상태로, 그 나치는 그저 자기 소원을 이루는 데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중략) 유대인들은 자기보다 고통을 덜 당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가해자인 자기가 겪는 고통을 감히 희생자들의 고통에 견주기까지 했다.

 

(중략)

 

비젠탈은 그곳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끝까지 머물렀다. 주위 상황이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악화된 와중에서도 그가 여전히 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그가 용서를 단지 선택사항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용서란 결코 단순하고 개별적인 행동이 아니다. 용서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또한 그것을 인정하는 정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용서와 마찬가지로, 용서하지 않는 것도 이런저런 방식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비젠탈의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을 침묵을 통해서 나타낸 것이다. (중략) 나는 그 상황에서 비젠탈의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자비로웠다고 믿는다. 그는 비록 내키진 않았지만 그 죽어가는 SS대원의 곁에 남아서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는 SS대원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몸서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딱하게 여겼다. 비젠탈을 비롯한 그의 동료 죄수들이 집단수용소라는 절박한 환경에서도 용서의 도덕적 함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경탄할 만한 일이다.

 

비젠탈은 그 죽어가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침묵한 채 나와 버린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조용히 나온 것, 그리고 그 전에 오랫동안 그 SS대원과 함께 있어 준 것만 해도 매우 관대한 행동이라고 본다. 비젠탈은 자기가 그곳에 머물러서 이야기를 들어 준 것만으로도 그 죽어가는 남자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비젠탈이 자기 행동에 대해 일종의 양가감정을 느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적절한 행동이었는지 계속 의구심을 가졌다는 사실 또한 그의 도덕적 우월성을 나타낸다. 이는 자기와 직접 연관되지 않은 문제에는 아예 무관심했던 그 나치의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참회의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이유"

- 조셉 텔러시킨 (유대교 신학자, 미국인)

 

과연 그 젊은 나치의 참회는 진실한 것이었을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그를 완전히 낫게 해 줄 수 있는 기적의 약품이 발명되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여전히 죄의식을 느낄 수 있었을까? 만약 그가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군에서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려 한다면, 그는 과연 훈장을 거부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 나이 어린 살인자가 뉘우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뉘우침에는 자기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자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는 죽기엔 너무 젊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기가 불태워 죽인 그 유대인들은 금방 죽었기 때문에 자기만큼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가 지금 어느 '유대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또한 이 '유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라도 했는지, 이 젊은 나치는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저만큼 죄가 많지도 않았을 테고."

"저만큼 죄가 많지도 않았을" 것이라니?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말뜻은, 그 살해당한 유대인들도 죄를 지었고 그들을 살해한 자기도 죄를 지었지만, 자기의 죄가 그들보다는 '조금 무거울' 뿐이라는 것 아닌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실한 듯 보였던 그의 고백은 바로 이 순간 갑자기 확실한 거짓으로 판명되고 만다. 만약 그가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의로운 사람이었다면─물론 그런 사람이었다면 결코 이런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겠지만─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저야 이런 고통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 유대인들은 결코 그런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제 동료들에 의해 죽은 무고한 희생자였으니까요."

어떤 사람의 참회가 진실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이 지난 번과 같이 죄를 지을 만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는 것 뿐이라고 모세스 마이모니데스가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죽어가는 나치에겐 이런 기회조차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가 자신의 끔찍한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고 이야기했다는 사실 뿐이다. 아쉽게도 그게 전부다.

 

그렇다면 비젠탈이 그 나치의 요청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그의 행동에 공감한다.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비젠탈 자신이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 젊은이가 살인처럼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은 결코 말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이라고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만 받았더라면, 훗날 그토록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수도 있다(더군다나 이 나치에게 더욱 불리한 사실은, 당시 독일군 내에서는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고서도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던 군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이 저지른 죄 가운데 대부분은 가해자의 참회가 진실하고 그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는 진정한 노력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용서가 가능하다. 하지만 보상할 수 있는 97퍼센트에 속하는 일부 죄를 용서하는 것과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죄인 까닭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아서 결코 가해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나치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씻어낸 상태에서 죽고 싶어했다. 하지만 과연 그에게 그런 특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만약 사람이 그 나치를 용서할 수 없다면 하느님께선 하실 수 있을까? 중세의 어느 유대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알 수만 있다면, 내가 곧 하느님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조차도 그런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한다. <탈무드>에 나온 유명한 내용에 따르면 '욤 키푸르', 즉 속죄일에는 사람이 하느님께 지은 죄만을 속죄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는 오로지 가해자가 그 피해자의 분노를 누그러뜨림으로써만 속죄가 가능하다.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만약 살인자가 기꺼이 형벌을 감내하고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죽은 뒤에 저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뜻밖의 만남으로 인해 '길굴', 즉 환생에 대한 주장 쪽으로 이끌리고 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시 이 세상에 돌려보내실지도 모르고, 그는 평생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로선 그가 평생 선을 행함으로써 전생의 커다란 악을 속죄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결국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나는 그 모두가 각자의 신도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도덕적 판단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일깨워 주기를 소망한다. 용서란 거의 항상 선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동시에, 잔인함은 악이며 특히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더 힘들긴 하겠지만 분명 도덕적으로 더 바람직한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다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참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조셉 텔러시킨(Joseph Telushkin, 1948~) : 로스앤젤레스 연예인 회당(Synagogue of the Performing Arts)의 랍비이며, 저서로는 <유대인의 교육(Jewish Literacy)>, <상처를 주는 말, 치유를 주는 말(Words that Hurt, Words that Heal)> 등이 있다. 또한 데니스 프레이저와 공저한 <사람들이 유대교에 대해 궁금해하는 아홉 가지 질문(the Nine Questions People Ask About Judaism)>, <왜 하필 유대인인가?: 반 유대주의의 이유(Why the Jews?: the Reason for Antisemitism)> 등이 있다.

 

 

"반 세기 뒤의 질문이 의미를 가지려면"

- 츠베탕 토도로프 (평론가, 불가리아 출신 프랑스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 뿐이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그 외의 어떤 비유적인 확장도 내가 보기엔 적절치 못하다. 어느 누구도 남을 대신해서 누군가를 용서할 수는 없다. 마치 한 개인의 죄를 집단으로 전가하거나 이른바 '집단적 죄의식'을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말이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살인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셈이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여기 없으므로, 용서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용서가 인생에서 어떤 본질적 요소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히려 정의나 도덕을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략)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나치 범죄자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뉘른베르크에서조차도 자신의 죄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사람은 오직 슈페르 뿐이었다. 1963년의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쪽은 오히려 과거의 피해자였고, 과거의 가해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늘날 옛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또다른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집단수용소의 간수나 그 상관들은 결코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젠탈이 만난 SS대원은 이들과 달랐고, 그러한 예외를 강조한다면 그는 당연히 이들과 다른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용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가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루소가 말한 우리의 '완전성'을 위한) 변화를 시도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치의 범죄를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악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반드시 그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도덕 교육의 새로운 단계로서, 우리는 타자(他者)를 악과 동일시하며 자신을 선과 동일시하는 성향을 거부해야 한다. 아울러, 로맹 가리*의 말마따나 비인간성 또한 인간다움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상대주의를 거부하자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마니교적 이분법*을 받아들이자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적 판단에서 두 가지 측면의 상호보완적 작용을 가능케 하자는 것이며, 과거를 올바로 판단함으로써 어제의 악은 물론이고 오늘의 악에 대해서도 맞서 싸울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 : 프랑스의 소설가.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공쿠르 상을 받고 20여년 후인 1975년에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다시 공쿠르 상을 받아, 동일 작가에게 한 번만 주는 이 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출간된 유고에서 그가 에밀 아자르와 동일인임이 밝혀졌다.

*마니교의 교리는 선과 악, 즉 빛과 어둠의 대립이라는 뚜렷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용서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 데스먼드 투투 (가톨릭 주교, 남아프리카공화국인)

 

나는 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진 광범위한 인권침해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과거의 부패 및 악질 범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그야말로 압도당했던 경험이 있다. 피의자의 커피에 독약을 섞고 뒤통수에 총을 쏘고 그 시체를 불태운 경찰관들의 증언을 청취하면서, 나는 정말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런 학살극이 벌어지는 와중에 그들이 태연하게 바비큐를─그것도 한꺼번에 두 개씩이나─만들어 먹었다는 사실이다. 가해자 쪽의 상황은 이랬다.

반면 그로 인해 크게 고통받은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은, 그토록 극악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가해자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커다란 아량과 고귀한 정신이야말로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우리가 어느 거룩한 장소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신을 벗읍시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만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격리'라는 뜻의 아프리카어로, 1948년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제도를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 및 비(非)백인을 탄압함으로써 특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이 차별 제도는, 1994년 남아공 역사상 최초로 흑인까지도 모두 참여하여 실시한 총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기독교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지금 서 있는 장소가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복수만을 위해 정의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고립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용서란 뭔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 정치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용서가 없다면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역시 허공에 떠 다니는 글. 그냥 주석의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타이핑.)

 

 

"나치 청년 카를에게 보내는 편지"

- 아서 와스코우 (유대교 신학자 랍비, 미국인)

 

과연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선 누군가가─바로 당신이─'궁극적 일체'의 연결고리를 부숴 버림으로써 그 통일을 산산조각내고 말았습니다. 인간과 대지가 이 세상을 공유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세계 속에 포함된 네 가지 세계를 산산조각내 버렸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세계는 하느님의 실체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간단한 도해로서, 감동적인 사랑이, 지적인 소통이, 그리고 거룩한 현존 안에서 공유된 현존에 대한 영적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각각의 세계들을 파괴했습니다.

 

(중략)

 

어떻게 보면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지를 가르쳐 준 선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나는 수소폭탄이 이 세계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폭탄 하나하나가 일촉즉발의 즉석 아우슈비츠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나는 가학성이 기술적으로 대량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나는 새로운 기술의 무분별한 남용이 지구의 대기와 토양과 물을 오염시킴으로써, 아무런 미움 없이도 수많은 생물을 죽여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나는 사랑 많고 인자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를 매스미디어가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으로부터, 그리고 당신과 함께, 아래와 같은 모든 '티쿠님' 즉 회복의 필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 이 지구상의 사람들과 생물 종 사이에 보다 깊고도 넓은 의미에서의 공동체를 이뤄야 할 필요성

- 히브리어 '요다야'*와 마찬가지로, 지식이 곧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접근 가능한 지성의 한 형태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

- 저 '하늘 위' 옥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중에, 우리 사이에,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

- 또한 이스라엘의 자연적 국경을 재설정하는 것, 거룩한 춤과 행동으로 우리의 육신을 일깨우는 것, 이 땅과 지구와 우리의 물리적 관계를 다시 생동하게 만드는 것, 나아가 지상의 열정을 기쁘게 꽃피우기 위해 다시금 <아가(雅歌)>를 펼쳐 봐야 할 필요성까지도.

 

*요다야 : '알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 '야다'는 지적인 앎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앎, 즉 남녀 간의 육체관계까지 의미한다.

*아가 : 구약성서 가운데 하나.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관계를 남녀관계에 빗대어 노래한 시.

 

(중략)

 

나는 당신이 우리의 선생 노릇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한편, 당신을 육체와 마음과 영혼의 세 가지 세계에 그대로 내버려 두겠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듯이, 이 세상에서도 가장 외롭고 고립되고 낯설기 그지없는 한모퉁이에 내버려 두겠다는 말입니다.

 

 

"중국 강제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 해리 우 (인권운동가, 중국 출신 미국인)

 

1957년, 내가 다니던 베이징 지질공과대학의 학생 모두에게 각자의 '자본주의적' 성향과 출신에 대하여 비판하기 위한 '투쟁 대회'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책임자인 마(馬)동무라는 여성 단원은 무척 격한 어조로 대회를 이끌어 나갔다. 1959년 4월, 그녀는 우리 반의 모든 학생들에게 당(黨)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개선'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이에 부합하도록 누구나 각자의 의견을 발언해 보라고 강요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일련의 모임을 열게 하면서, 이른바 '백화제방'*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말하게 했다. 첫 번째 모임에서 나는 가급적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으려 했다.

두 번째 모임이 있었을 때, 당시 나는 학교 야구부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시합에 나가느라 모임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모임에도 빠지려 하자 마 동무는 버럭 화를 냈고, 더 이상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운명은 급변하게 되었다. 마 동무는 이후 나를 계속 불러내서 '반동 우익 분자'라는 죄목으로 연이어 비난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 : 갖가지 꽃들이 함께 피어나고 갖가지 주장이 함께 펼쳐진다는 뜻. 원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제자백가들이 펼쳤던 다양한 사상과 토론을 말하지만, 1956년 마오쩌둥에 의해 이른바 '쌍백운동'이라는 정치운동으로 재등장했다. 말 그대로, 누구든지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수용하겠다며 의견을 개진케 했다가, 이후 그런 인물들을 불평분자로 지목해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0년 4월 27일, 나는 또다른 투쟁 대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칠판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극우 분자 오홍달을 규탄하는 모임.'

우리 과의 정치교육 담당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끝끝내 훌륭한 사회주의자 학생이 되기를 거부하고 혁명의 적으로 남기를 선택한 우익 분자 오홍달의 탄핵과 격리와 추방을 공표하는 바입니다." 그날 밤 나는 그 지역의 구치소로 끌려갔고, 그 때부터 19년 간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 동무였다. 19년 간 감옥에 있으면서 나는 그 곳 간수 및 당국자들로부터 종종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매를 맞거나 모욕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에 입은 상처로 인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다.

 

*라오가이(勞改, Laogai) : 노동 개조(勞動改造), 즉 노동을 통한 사상 개조라는 뜻으로 중국 내 강제노동수용소의 별칭이다.

 

(중략)

 

1962년의 어느 겨울─정말 난생 처음 겪는 혹독한 날씨였다─우리는 막사 안에서 얇디얇은 이불을 덮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당시 새로 부임한 감독관 조(曺)대위가 밖에서 소집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막사에 나와 바깥 담장을 마주 보고 섰다. 현재의 끔찍함에 뭔가 새로운 고난이 덧붙여지겠거니 예상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조 대위는 조만간 우리를 위해 특별히 추가 식량을 얻어 올 예정이라고 알렸다. 또한 매일 해가 뜨면 바깥에 나와 좀 걷기라도 하면서 기운을 내라고 우리를 격려했다. 내가 밖에 나와 걸으면 조 대위는 종종 내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자네 아주 잘 하고 있어. 앞으로 더 나아질 거야. 오늘은 이 정도면 됐네. 가서 쉬게나."

나로선 조 대위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행동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몇 달 혹은 몇 년 씩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친절도 얻지 못한 우리 수감자들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조 대위 같은 사람과 마 동무 같은 사람이 같은 집단에 공존할 수 있었을까?

 

1979년에 석방되고 나서, 나는 문득 베이징에 가서 마 동무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녀는 성실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베이징 지질연구소의 정치업무분과 담당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녀를 마주하고 보니, 나로선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단지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코 절망하거나 자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이젠 다 옛날 일이에요, 옛날 일."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에 불과해요. 온 나라는 물론이고 당 또한 그 일로 고난을 겪었죠. 그 와중에 끔찍한 실수가 벌어지기도 했던 게 사실이고요. 이제 당신이 돌아온 걸 보니 무척 기쁘군요. 앞으로 같이 잘해 보자고요."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고, 불과 몇 분 만에 결론을 내렸다. 결국 마 동무도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전형적인 종류의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당이 인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맹종했다. 그 날 그녀는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짧게나마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속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결코 우리 모두를 파멸시키진 못했어."

 

비젠탈 씨의 이야기를 읽고 내 경험과 비교해 보면서 한 가지 확신한 바가 있다면,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가해자들 중에서 그 나치 군인이 유대인 수감자에게 한 것처럼 용서를 구할 사람은 전혀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현재 중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에게 자행하는 짓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 동무 같은 사람들이 전형적인 경우다. 그들은 개인의 목지에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지도자들이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니 인민 또한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그 당시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든 자기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버려야만 했다. 조 대위는 무척이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가 그렇게 하면서도 체포되거나 처벌당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사회는 각 개인에게 남아있는 인간성마저 모조리 말살해 버린 셈이다. 비젠탈 씨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 죽어가던 나치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해서 이 무시무시하고 잔인무도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는지 이해합니다. 물론 당신 스스로도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 또한 당신과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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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용어】

 

국제인도법 (Internationnal Humanitarain Law) : 넓은 의미에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맺어진 국제법 일반을 말하며, 좁은 의미에서는 전쟁 중에 포로나 부상자에 대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법규를 뜻한다. 후자의 경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네바 협정'이다.

 

뉘른베르크 법(Nuremberg Laws) : 1935년 9월 통과된 '독일 혈통 및 명예 보호법'과 11월부터 시행된 '제국시민법'을 말한다. 전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었으며, 후자는 유대인 및 유대 혼혈인(조부모까지)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Nuremberg Trials) : 제２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독일의 전범 재판. 1945년 10월 18일에 시작되어 1946년 10월 2일에 끝났으며, 피고인 24명 중 12명에게 교수형, 2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나치스와 게슈타포와 SS 등을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의 도쿄 재판과 함께 반인륜적 침략 전쟁 처리에 대한 대표적인 선례로 평가된다.

 

독일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 1875년에 설립된 정당. 마르크스주의에 근간을 두면서도 폭력 혁명이 아닌 민주적 절차에 의한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초기에는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가 1890년에 합법화되었으며,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몰락했다가 제２차 세계대전 후 부활하여 1980년대 초까지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했다.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 1900~1959) : 폴란드의 변호사. 1944년에 '종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제노스'와 '학살'을 뜻하는 라틴어 '사이드'를 결합한 신조어 '제노사이드(종족말살)'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붉은 군대(赤軍) : 옛 소련군의 별칭.

 

아르메니아 종족학살(Armenian Genocide) : 오토만 제국의 통치 말기인 1915년부터 1923년까지 벌어진 동(東)아나톨리아 주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100만~1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로 인해 "반인륜적 범죄"라는 말이 사상 처음으로 사용될 정도로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유대역사기록센터(Jewish Historical Documentation Center) : 시몬 비젠탈이 다른 3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함꼐 1947년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설립한 단체. 나치의 죄상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함으로써 이후 나치 전범 추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네바 협정 (Geneva convention) : 1864~1865년에 걸쳐 체결된 적십자 조약으로, 전쟁 중 야전병원의 운영 및 부상자와 포로 취급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제노사이드 협약 (Genocide convention) : 1948년에 체결된 협약으로, 제노사이드(종족말살) 금지 및 처벌 등을 규정하고 있다.

 

최종 해결(the Final Solution) : 제２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수립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이송 및 학살 계획을 말한다. SS의 아돌프 아이히만이 계획을 수립하고 하인리히 힘러가 실행을 총지휘한 결과, 당시 유럽 내 유대인 가운데 약 4분의 3이 몰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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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문화 용어】

 

노스트라 아에타테(Nostra Aetate) : '우리 시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며, 정식 명칭은 '비(非) 기독교 종교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 힌두교 및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에 대한 가톨릭 측의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유대교에 대해서는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유대인을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으며, 아울러 어떤 식으로든 반유대주의를 표방해서도 안 된다고 못박았다.

 

몰록(Moloch) : 바빌로니아와 가나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적인 우상 가운데 하나다.

 

아미다(Amidah) : '일어섬'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의 예배에서 일어나 암송하는 기도문을 말한다. 아미다에는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인 '비나',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인 '테슈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예시바(Yeshiva) : 탈무드를 가르치는 유대교 학원.

 

자디크 : 의로운 사람

테슈바 : 참회. 돌이킨다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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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수용소】

 

*나치의 수용소는 크게 집단 및 강제노동수용소와 학살수용소(죽음의 수용소)로 구분된다. 전자는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정치범과 전쟁 포로 등을 다양하게 수용하며 주로 강제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던 반면, 후자는 이른바 '최종 해결'의 일환으로 오로지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운영한 곳이었다. 학살수용소는 독일의 점령지인 폴란드에서 6곳이 운영되었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저 유명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였다.

 

*당시 시몬 비젠탈이 수감되어 있던 곳은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였다.

 

그로스로젠(Gross-Rosen) : 폴란드 슐레지엔 인근의 나치 집단수용소. 1940년에 설립되어 12만 5000명이 거쳐갔으며, 그 중 4만 명이 사망했다.

 

마우트하우젠(Mauthausen) : 오스트리아의 나치 집단수용소. 1938년에 설립되어 19만 9404명이 거쳐갔으며, 그 중 11만 9000명이 사망했다.

마이다네크(Majdanek) : 폴란드에 위치한 학살수용소. 1941년에 설립되어 50만명 이상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그 중 약 36만명이 사망했다. 이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1944년에 폐쇄되었다.

 

베르겐 벨젠(Bergen-Belsen) : 독일의 집단수용소로 1943년에 설립되어 약 5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및 정치범을 수용했다.

베우제츠(Bełżec) : 폴란드에 위치한 학살수용소. 1940년에 설립되었고, 무려 6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과 집시가 학살되었다.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부헨발트(Buchenwald) : 독일 북부의 나치 집단수용소. 1937년에 설립되어 23만 8980명이 거쳐갔으며, 그 중 4만 3045명이 사망했다.

 

트레블링카(Treblinka) : 1942년 폴란드에 설립된 학살수용소. 약 87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이 곳에서 학살당했다.

 

플라스주프(Plaszów) : 폴란드 크라쿠프 인근의 나치 집단수용소. 1942년에 설립되어 한창 때는 수용인원이 2만 4000명에 달했다. 유대인 학살로 악명높은 곳 중 하나로, 1944년 소련군에 밀린 나치가 수감자 전원을 아우슈비츠로 퇴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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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이 책은 시몬 비젠탈의 홀로코스트 체험기(제１부 해바라기)와 거기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53인의 답변(제２부 심포지엄)을 엮은 <the Sunflower: 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s of Forgiveness>(New York: Schocken Books, 1997)의 완역본이다. 한국어 초판본은 <해바라기>라는 제목으로 2005년에 출간되었는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제２부의 글들 가운데 일부를 제외한 상태로 나오고 말았다. 다행히 이번에 뜨인돌의 제안으로 뒤늦게나마 완역본을 내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완역본에서는 초판본에서 누락되었던 제２부의 글들을 모두 수록했으며, 번역문을 다시 원서와 대조해서 실수를 바로잡고 문장을 다듬었다. 아울러, 초판본에 실었던 국내 필자들의 글 세 편을 완역본에서는 빼기로 했다. 원래는 이 책에서 제기된 과거사와 용서라는 주제를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 논의한 사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지만, 자칫 원저의 흐름을 방해하는 지나친 간섭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완역본에서는 최대한 원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물론 최근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 책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의 과거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대표적인 역사적 비극인 동시에 과거사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과거사 논쟁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외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 및 반(反)유대주의 선전물을 번역 출판하는 전문 출판사가 생겼을 만큼, 반유대주의는 의외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어쩌면 인종차별주의의 확산은 다문화 사회로의 변모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지난 반 세기 동안 유대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변화를 겪어 왔다. 냉전 시대에만 해도 유대인의 이스라엘 건국이나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다가 최근 팔레스타인 문제 등을 이유로 이스라엘이야말로 대표적인 깡패 국가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높아졌다. 물론 그런 변화의 와중에도 <탈무드> 해설서나 유대인 처세술 및 학습법 같은 상업적 용도로는 유대인 그 자체가 일종의 상표처럼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말이다.

지금의 선진국 독일과 과거의 나치 독일이 동전의 양면 관계이듯이,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가해자로, 또는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희생자로 바뀌고 수많은 입장과 주장이 뒤얽히다 보면,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홀로코스트 기념사업조차도 '홀로코스트 산업'으로 변질되었다는 일각의 비판, 그리고 이런 정당한 비판까지도 반유대주의라며 일축하는 역비판까지 접하고 보면, 과거사 논란에 쉽게 염증을 느끼며 외면하는 대중의 심리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죽어가는 SS대원을 만난 이후 줄곧 고민하다 못해 악몽에까지 시달리는 저자를 지켜보던 수용소 동료의 일침이야말로, 저 크나큰 역사의 비극이 남긴 상처와 기억이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정확하게 요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용서니 뭐니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거야. 옳다는 사람도 있고, 그르다는 사람도 있고, 자네가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도 나올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온전한 이해나 말끔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처럼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범람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기억을 지속시키고 생각을 환기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평생 나치 전범을 추적하며 역사의 심판을 요구했던 시몬 비젠탈이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내 공개토론에 붙인 이유이며, 53명의 필자가 저마다의 의견을 보태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 이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