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감동언어 -천 년 학-

수평선 너머

 

소년의 어릴 적 배경은 온통 바다로 메워져 있다. 어느 기억이고 바다와 떨어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고만고만한 초가들이 바지락 조개들처럼 다도해를 향해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마을. 그 마을의 가장 위쪽에 소년의 집이 있었다. 해당화가 넝쿨을 이루고 있는 소년의 집. 그 집의 마루에는 앉거나 서거나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아침이면 소년은 섬들을 찾아서, 바다를 헤집고서 떠오른 해가 해당화 꽃마당에 빨갛게 입 맞추는 것을 보았다. 또 달이 뜨는 밤이면 소년은 달빛이 파도 소리에 밀려서 남실남실 문지방을 적셔 들던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으레껏 소년의 할아버지가 방문을 바르시면서 돌쩌귀 근처에 밀어넣어 놓으신 대나무 잎사귀가 창호지 사이로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삼, 사월 봄날이면 저녁 안개 속에서 아련히, 오는 줄 모르게 소년의 앞으로 다가오던 돛단배도 있었다. 더러 평화를 이야기할 때면 소년의 가슴 속에는 이 시절의 정경이 살아 움직이곤 한다. 동무들끼리 술래잡기를 하다가 골목길을 달리다 보면 골목 끝을 봉해 있던 푸른 바다. 약간의 배고픔이 일 때 그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뱃속이 맑을 수가 없었다. 흡사 배에 은모래를 일구는 바닷물이 찰랑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무렵, 소년한테는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궁전이 있었다. 백 살도 더 먹어 보이는 소나무가 양산처럼 멋진 그늘을 퍼뜨리고 있는 벼랑 아래였는데 우뚝 우뚝 솟은 바위가 흡사 망루 같았고, 어쩌다 날아와 앉는 물새는 파수병 같았다. 소년은 그 성곽 안에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서 바다가 연주해 주는 교향악을 들었다. 바람과 파도와 물새 울음이 어울린 음악을. 그 비밀의 궁전에서 소년은 수평선에 떠오르는 흰 구름을 만나곤 했다. 흰 구름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꼬마 임금님. 명령만 하시면 대궐도 지어 올릴 수 있고 사자도 빚을 수 있습니다."

"아녜요. 나는 그렇게 큰 것은 싫어요. 젖 짜는 염소나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캐러 다니시는 조개들이나 많았으면 좋겠어요."

"꼬마 임금님이라서 작은 것을 좋아하는군요. 그러나 임금님, 큰 것은 빚기가 쉽습니다. 허나 작은 것은 어려워요. 빌딩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싫어요. 나는 작으니까 작은 것이 좋아요. 초가집이 좋고 외돛배가 좋아요."

그럴 때면 흰 구름은 더욱 하얘지면서 이런 다짐을 주곤 했다.

"그 마음 언제까지고 변치 말아요, 우리 꼬마 임금님."

아아, 그리하여 얼마 후 소년이 하늘을 우러러보면 나타났던 것들. 염소, 초가집, 외돛배, 그리고 조개들.

 

봄날이면 또 소년은 궁전에 때때로 떠밀려 와 있던 붉은 동백꽃 송이를 보았다. 그럴 때면 소년은 수평선 너머에 사는 어떤 궁전의 소녀가 파도에 띄워 보내 온 동백꽃 송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년은 동백꽃 송이를 바라보다가 은모래 위에 자기처럼 외로운 바다 건너 궁전의 소녀를 그렸었다. 목이 길고 눈이 큰 단발머리를. 그러다가 이를 발견한 물새가 '까르르 까르르 까르륵' 하고 놀리면 다급히 지우던 모래 위의 얼굴. 누구,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동백꽃잎처럼 빨개져서 좀체로 가실 줄 모르는 소년의 뺨….

 

그러나 소년이 이 바닷가 비밀 궁전에서 만난 전부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 보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외짝 고무신이 비밀 궁전의 성곽에까지 밀려 와 있던 날도 있었다. 파래를 뜯던 아낙네의 허리춤에서 빠진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의 고통을 삭이지 못해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인의 신발일까? 소년은 깍지 낀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저녁 놀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그 막연한 슬픔에 눈물 짓곤 했다.

 

소년은 고향을 떠났다. 읍내에서 작은 도시로, 그리고 또 큰 도시로 흘러 들어갔다. 학교가 높아 갈 수록 소년의 꿈 또한 거대해졌다. 나중에는 대궐 같은 집을 원했고 사자와도 같은 권력을 원했다. 빌딩 같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남을 밟았고 또 밟았다.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문득 가을 비 내리는 날 밤에 날아가고 삭아 버린 옛날의 음표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선마저도 낡아서 희미해져 버린 지금에….

창 밖의 빗줄기 주렴에 꿈결인 듯 실루엣처럼 어리는 소년의 궁전.

'오오, 너 거기 있었구나.'

소년은 밤 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바닷가 그만의 궁전에 이르렀다.

벼랑 위의 소나무는 아직도 푸른 빛 그대로였으나 소년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년은 가만히 예전 그 의자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물새들이 반가운 듯 어깨를 스치며 날았다. 파도 또한 팡파르를 연주했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수평선에 뜬 흰 구름이 대궐처럼, 사자처럼 부풀어 올랐다. 빌딩처럼 층층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그 거대한 것들은 소리 없이 스러져 가없는 하늘에 새털처럼 흩어졌다. 소년의 잔주름 많은 눈가에 이슬 방울이 맺혔다.

'아, 허망한 꿈이었어.'

그는 바위 가장자리에 떠밀려 온 나뭇잎을 보았다. 이미 할머니가 되었을 수평선 너머의 소녀가 띄워 보낸 엽서 같은 낙엽. 소녀도 지금 그녀만의 궁전으로 돌아와 있는가.

파도에 그의 신발 한 짝이 떠밀려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소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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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우리들의 축복

 

깊은 산 속에 토끼가 살고 있었습니다.

산마루를 달리고 언덕을 뛰어 내려갈 때는 바빠서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우두커니 양지바른 풀섶에 누워 있을 때는 많고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서도 토끼는 늘 자기들의 잃어버린 말이 안타까웠습니다. 호랑이는 어흥, 부엉이는 부엉, 원숭이는 지지지, 심지어는 잔디 속으로 숨는 여치도 찌르르르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자기네만 목이 막혀 버렸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짐승들끼리는 눈동자로 얘기를 나누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지…. 상상만 해도 토끼는 오줌이 찔끔 나왔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우리의 귀를 멀게 할 것이지. 소리를 빼앗아 가실 게 뭐람.'

토끼는 투덜거리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오래 살기 때문에 옛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학을 찾아갔습니다.

 

"그래, 알겠네. 자네 조상이 어떻게 해서 말을 못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이거지?"

소나무 위에서 한 다리만으로 척 서서 먼 데를 보고 있던 학은 토끼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우리 할머니께로부터 들은 바로는 이렇네. 먼 옛날, 그러니까 저 아래 인간들이 그래도 염치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 짐승들을 자기들의 양식으로 쓰기 위해 죽이는 일이 있은 다음에는 그것을 허용해 준 하늘에 꼬박 꼬박 제사를 지낼 때의 일이지. 그 무렵 우리는 모두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었는데, 그 시절의 자네 토끼네는 정말 재간둥이였다네. 몸 빠르겠다, 귀 밝겠다, 말 잘 하겠다. 그런데 자네네 조상이 한 번은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자네들 간을 구하러 나온 거북이한테 속아서 용궁까지 가게 된 것을 자네도 들어 알고 있겠지. 맞아. 그래, 자네네 조상이 간을 육지에 빼 놓고 왔다고 속인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그렇게 살아 나왔으면 됐지, 그 둔한 거북이가 홧병이 나게 놀릴 게 뭐람. 이 때 하느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자네네한테 주었던 말을 되찾아 가고 말았다네."

토끼가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만했었던 조상을 탓한다고 해서 잃어버린 소리가 다시 돌아올 것도 아니었습니다.

토끼는 터벅 터벅 걸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조상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빌어 보고 싶었습니다.

 

토끼가 참나무가 많은 산고개 하나를 넘었을 때였습니다. 너도밤나무 위에서 원숭이가 한 마리 훌쩍 뛰어 내려왔습니다.

"토끼야, 어디 가니?"

토끼는 눈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냥 무작정 가는 거야. 우리 조상님이 지은 죄를 나의 착한 일로 씻어 볼까 하고 말이야."

"그럼 나도 함께 가자. 사실 교만하기는 우리 원숭이들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을 많이 닮았다고 해서 아주 방자하게 놀았거든. 나도 좋은 일을 해서 그 동안에 지은 죄를 씻겠어."

이렇게 해서 토끼와 원숭이는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소나무가 많은 오솔길을 빠져 나올 때였습니다. 오래 된 무덤 뒤에서 여우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얘들아, 어디 가니?"

"좋은 일거리를 찾아 나선 길이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데려가 다오. 우리는 그 동안 귀신들과 함께 어울려서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죄가 여간 많은 게 아니거든."

"그래, 그래. 우리 함께 가자."

토끼와 원숭이와 여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 날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셋은 산자락이 한 번 접혀진 산골짜기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예로부터 산에는 이렇게 아랫마을에서 쫓겨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아마 이 젊은이도 마을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도망을 온 것 같았습니다.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피가 밴 상처가 많았습니다.

"이 사람을 위해 우리가 좋은 일을 하자."

셋은 금방 의견이 맞았습니다. 우선 먹을 것을 구해 오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원숭이가 숲으로 가서 머루를 따 왔습니다. 여우는 물가로 내려가서 물고기를 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무엇을 따 오거나 잡아 올 재주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토끼가 원숭이와 여우에게 눈으로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곧 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구해 올 테니 불을 피워 놓아."

 

토끼는 숲 속에 있는 옹달샘 가로 갔습니다. 맑고 맑은 옹달샘 물로 몸을 씻었습니다. 토끼는 처음으로 자기네한테 주어진 귀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전나무의 높은 가지를 흔드는 은은한 바람 소리와 골 따라 흘러 가는 물 소리….

"목을 막은 대신 귀를 크게 열어 주신 은혜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소리를 내기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토끼는 깡총 깡총 뛰어서 골짜기로 돌아왔습니다. 원숭이와 여우가 독촉하였습니다.

"무얼 가지고 왔어? 어서 이 불 위에 내놓아 봐."

 

이 때였습니다. 토끼가 불 속으로 깡총 뛰어 든 것은.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 토끼는 자기의 몸을 젊은이에게 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하느님께서 갑자기 소나기를 퍼부어 토끼를 살려 냈습니다. 그러고는 누구에게보다 큰 축복을 토끼에게 내려 주었습니다.

"오, 착하고 착한 토끼야. 너희는 이 덕행으로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 힘이 센 자는 더 깊은 산중으로 몰리거나 없어지거나 할 것이나, 힘이 없는 너희는 오히려 작은 동산에까지 자손이 미치는 번영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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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동 속에서

 

석공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조금만 걷는다는 것이 달빛이 흐르는 산여울을 따라 걷다 보니 그만 산허리 하나를 넘고 말았따. 멀리 숲 속 사이로 내다보이는 동해엔 달빛이 가득 넘실거리고 있었다.

'달빛도 제 그릇대로 받게 마련인가.'

산여울은 골짜기 모양으로, 호수는 둥글게, 그리고 바다는 저렇게 넓고 넓은 모양으로.

'그럼 나는 어떤 그릇일까? 실오라기 하나에도 이르지 못한 바탕이 아닌가.'

석공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석굴암의 부처님 지어 내는 일을 맡은 지 3년.

그 동안 석공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에는 물론 나라 밖에도 그를 따를 만한 석공이 없을 것이라고 소문난 그였다. 그는 예로부터 솜씨가 좋기로 이름 난 백제 땅 출신으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돌을 떡 주무르듯 하며 살아 온 돌쟁이 집안의 맏이이기도 했다. 집을 떠나 오던 날 아침,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늙은 아버지가 석공에게 이른 말이 있었다.

"자신의 숨결과 체온을 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일보다 더 복된 일은 없는 것. 이번 큰 일에 네 안에서 타고 있는 생명의 불을 붙여 주고 오너라. 사람의 육신은 여든을 넘기기 어려우나 땅 위의 돌은 천 년, 만 년을 사느니라. 부디…."

그래서 욕심이 지나쳤던 것일까. 번번이 석공의 정이 빗나갔다.

 

석공은 마음을 맑히기 위해 새벽마다 샘물로 몸을 씻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을 댕겨 주십사' 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쪼아서 버린 돌무더기는 늘어만 갈 뿐이었다. 대궐로부터 재촉은 벌겋게 달군 쇠창살 같았다.

"대감께옵서,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일이 늦어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음이 부족한 탓이지요. 마음이…."

"그런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시한을 못 받아 주십시오."

땅을 보고 있던 석공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편 하늘 가에 쪽배처럼 나와 있는 낮달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반 년만, 반 년만 더 기다려 주십사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반 년이 지난 다음에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요?"

"그 땐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석공은 낮달 주변에 아스라히 펼쳐지는 고향 풍경을 보았다. 사철 푸른 빛을 내는 대밭 하며, 맨발로 황톳길을 달리는 아이들 하며, 길쌈을 하는 누이동생의 모습과 논을 매는 아버지의 모습과…. 지금은 백일홍이 필 때니 두벌매기겠지.

아, 그의 아버지가 되풀이하여 들려 주시던 말씀이 석공의 머리에 떠올랐다.

"돌로 무엇을 만들려고 해선 안 된다. 돌 속에 감춰져 있는 모습을 그대로 가만히 드러내 모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돌쟁이의 참다운 태도란다."

'그래, 찾아야 해. 부처님의 모습을 지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석공은 그 날로 방을 써서 토함산 변두리 마을은 물론 서라벌 거리에까지 내다 붙였다.

 

알림

석굴암의 부처님으로 모실 훌륭한 석재를 구합니다.

돌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시는 분께 상금을 후히 드리겠습니다.

- 석굴암 일터에서

 

이렇게 방을 붙인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이 곳 저 곳에서 귀한 돌이 있다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

그러나 막상 달려가 보면 헛일이었다. 돌의 질도 중요했지만 우선 석공의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없었다.

'뜻이 맞는 만남은 처음 보는 순간 울림이 있다. 눈을 감아도 저절로 그 모습이 떠오르며….'

이것은 석공이 그 동안 마음에 드는 조각을 몇 만들고서 얻은 결론이었다.

'불경에도 있듯 마치 맑은 거울과 같이 환하게 돌 속에 있으면서 밖으로 드러나는 부처. 멀리서 바라볼 수록 더욱 더 거룩하게 보이는 돌은 영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석공은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산여울길을 버리고 솔밭길을 따랐다. 바람이 솔잎 사이를 지나면서 석공의 여윈 얼굴에 이슬을 뿌렸다. 길참나무 밑동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는지, 후닥닥 산토끼가 달아났다. 석공은 산토끼의 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걸었다. 산허리에 있는 억새풀이 석공의 키를 넘었다. 그 총총한 잎의 서슬이 석공의 손등을 그었다. 그러나 석공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석공이 다시 일터로 돌아왔을 때는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 있었다. 달맞이꽃들이 노오란 꽃잎을 오무리고 있는 것을 그는 한참 들여다 보았다. 다시 발을 떼어서 돌계단을 밟았을 때였다. 석공은 부엌 쪽으로부터 들려 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일까?'

석공은 소리 나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엌 앞 안마당에서 젊은 일꾼들이 늙은 사람 하나를 빙 둘러싸고 '이 놈 저 놈' 하면서 주먹질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웬 일들이오? 나이 든 노인에게…."

"저 늙은이는 맞아 죽어도 쌉니다."

"맞아 죽어도 싸다니? 저 노인이 무슨 일을 했길래 맞아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오?"

"이 늙은이가 글쎄, 문둥이골로 밥을 날라다 주었지 뭡니까."

"문둥이골…?"

"네, 이 토함산 서편에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데가 있지요. 그런데 이 늙은이가 밤마다 밥을 가지고 그 곳엘 들락거린 겁니다."

"어디, 노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 젊은이의 이야기가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만을 가져다 주었을 뿐입니다."

"음식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몹쓸 병이라도 옮기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지요."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흰 머리카락, 이마에 패여진 깊은 주름살. 하지만 눈은 고즈넉한 호수처럼 그렇게 맑아 보일 수가 없었다. 불국사 일터에서, 석굴암 일터에서 부엌 일만 하면서 살아 온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아야지요."

그 말은 깊은 가을 밤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처럼 숙연한 느낌을 주었다.

 

"부처님의 뜻이라면…. 부처님의 뜻이라면…."

석공은 노인이 한 말을 읊조리며 차가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폭포의 물줄기가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순간, 석공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기둥을 느꼈다.

석공은 물에 젖은 채 부엌으로 달려갔다. 노인은 장작더미에 걸터앉아서 수건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고 있었다.

"노인께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

"부처님으로 모시고 싶은 돌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 같은 미천한 늙은이가 무슨…."

"아닙니다.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겁니다."

"허어, 참…. 정히 그러시다면 한 번 같이 가 보고 싶은 데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 곳이 어디입니까?"

"문둥이골입니다."

젊은이들이 와아 웃었다.

"저 놈의 늙은이가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았군. 아무리 그래도 부처님으로 모실 돌을 그런 더러운 곳에서 가져 올 수가 있나, 원…."

"조용히들 하시오!"

석공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 속의 목소리가 큰 메아리를 깨워 놓고 있었다.

"지금 곧 관솔불을 준비하시오. 문둥이골로 가겠소."

석공이 서둘러서 짚신을 갈아 신었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관솔불 주위로 모여 들었다. 그것은 불꽃들의 행진이었다. 바위는 이 세상 모든 어둠을 감싸 버린 것처럼 골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는 계곡에 있었다. 수백 마리의 학이 고요를 품고 앉아 있는 전나무 숲 아래. 열댓 명의 나무꾼이 쉬어 갈 수도 있는 넓이였으나 소나기가 쏟아져도 아늑하게 피할 수 있는 크기였다.

석공은 두 손을 모으고 바위를 한 바퀴 돌았다. 찍히고 패인 자국이 무수했다. 피고름을 닦은 듯한 흔적도 많았고, 시체를 불태우기라도 한 듯 검게 그을린 부분도 보였다.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화강암입니다."

그 때 석공은 그 바위 속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부처님 모습을 보았다.

흔들리는 관솔불에 노인의 그림자가 길게 바위를 덮는 순간, 바위 속이 거울처럼 환하게 비춰져 보이는 것이었다.

석공은 무릎을 꿇었다. 바위 안에서 큰 미소를 띠고 앉아 있는 부처님을 향하여.

"부처님, 이젠 그만 밖으로 나오십시오. 제 손을 잡으시고 이 세상으로 걸어 나오십시오."

동해의 먼 동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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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때리는 아저씨

 

수수는 '쿵 쿵' 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실눈을 뜨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또 한 번 쿵쿵거렸다. 벽이 흔들리고 방구들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수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옆자리의 아저씨 쪽을 보았다.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가 잠자던 자리는 말끔히 치워져 이부자리가 윗목에 개켜져 있었다. 수수는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올렸다. 그래도 '쿵 쿵'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 오고, 그 때마다 문간집이 세차게 흔들렸다.

할아버지가 해 준 이야기 속의 도깨비들이 드디어 나타난 것일까. 그 뿔 나고 눈이 튀어나온 도깨비들이 이 문간집을 떠메 가려고 저렇게 땅을 쿵쿵 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어디를 갔을까? 도깨비들한테 붙들려 간 것은 아닐까? 아냐. 외양간 소에게 여물을 갖다 주러 갔을 거야. 아니면 텃밭에 두엄을 져 내고 있겠지. 아저씨는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일을 마치고는 온 몸에 두엄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들어오곤 했었으니까.'

수수는 살며시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로 살금 살금 기어갔다.

 

'쿵' 소리는 바로 창 아래에서 나고 있었다. 수수는 손가락으로 창문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었다. 거기에 한 쪽 눈을 갖다 대었다. 그랬더니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도끼 자루가 보였다. 이어서 '쿵' 소리가 났다. 도끼 자루가 내려올 때마다 쿵 쿵 벽이 울리고 방구들이 울렸다.

'나무도 없는데 무엇을 찍는 것일까?'

수수는 용기를 내었다. 창문을 빠끔히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아니, 아저씨가….'

수수는 하마터면 '아저씨'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저씨는 연신 도끼질을 하면서 옷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수수는 아저씨가 무슨 일로 이른 새벽에 문간집의 땅 밑을 도끼로 내리찍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끼질을 하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 보면 잔뜩 슬퍼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수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슬그머니 창문을 닫고는 도로 자리에 누웠다. 문간집을 흔드는 쿵 쿵 소리는 한참을 더 계속되더니 날이 환하게 밝아질 무렵에야 그쳤다. 수수는 얼른 자는 척, 이불을 덮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야아, 힘들다!"

아저씨가 혼잣말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수는 곁눈질로 아저씨를 살펴 보았다. 아저씨는 세수를 하고 온 모양인지 수건으로 얼굴과 손등을 닦고 있었다. 수수는 이불을 차고 일어나 앉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왜 땅 밑을 도끼로 때렸어?"

아저씨는 눈가의 사마귀가 이마 쪽으로 올라 붙을 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지 않고 있었구나."

"응. 집이 흔들려서 깨었어. 무서웠어."

아저씨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저씨, 얘기해 줘. 응? 왜 땅 밑을 도끼로 때렸어?"

"넌 알 것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저씨는 수건을 허리춤에 찌른 다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수수는 아저씨의 허벅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난 알고 싶어. 알고 싶단 말이야."

수수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원, 녀석두. 그래, 그래, 얘기해 주마."

수수의 떼에 못 이겨 아저씨가 주저앉자 아저씨의 턱 밑에서 수수의 두 눈이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너, 이 문간집을 짓기 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던 것 생각 나지?"

"으응."

 

그 느티나무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수수 또래 열두 명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 겨우 닿을 만큼 덩치가 큰 나무였다.

그런데 재작년 봄이었다. 아저씨가 데리고 온 복이가 느티나무를 타다 그만 발을 헛디뎌 땅에 떨어졌다. 복이는 그 날부터 앓다가 이슬비가 하염 없이 내리는 날 저녁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동네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가리켜 액나무라 불렀다. 나중에는 수수네 할아버지가 액나무는 베어 버려야 한다면서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을 시켜 느티나무를 잘라 버리게 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문간집을 지었다. 문간집은 베어 낸 느티나무 밑동 위로 벽돌을 쌓게 되었다. 느티나무 뿌리가 워낙 땅 속 깊이 뻗어 있어서 파 낼 수가 없으니 나무 밑동 위에 벽돌을 쌓아서 액운을 눌러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왜 도끼로 땅을 때려요?"

"나무 밑동을 지금 도끼로 찍어 두지 않으면 나무 뿌리가 꿈틀꿈틀 살아나기 때문이란다."

커다랗고 힘 센 느티나무 밑동이 새 봄이 되어 꿈틀꿈틀 살아나면 문간 집의 벽돌이 뒤틀려 집이 허물어진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아저씨가 봄이 오는 이 때 나무 뿌리를 도끼로 때려서 나무 밑동이 용을 쓰지 못하게 해 놓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밑동만 남은 느티나무가 봄만 되면 다시 살아나려고 땅 속에서 버둥거리는 것일까. 문간집, 이 무겁고 단단한 벽돌에 깔려서도 봄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는 것일까.'

수수는 더운 여름 날, 동네 사람들이 느티나무 그늘에 쉬러 와서 땀을 들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톱질을 해서 가까스로 느티나무를 넘어뜨린 그 모습도 눈에 선했다. 느티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던 수많은 가지들과 함께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었다. 그 때 웬일인지 수수는 막 눈물이 나왔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다. 사람들이란 누구나 뽑혀지지 않는 나무 밑동 같은 아픔을 갖고 있단다. 그래, 그 아픔을 느낄 때마다 나무 뿌리를 때리듯이 제 가슴을 치면서 살아가는 거란다."

수수는 아저씨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죽은 복이 생각이 나서 하는 얘긴가 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저씨가 방문을 열자, 나뭇가지에 앉지 못한 참새들의 울음 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수수는 벌떡 일어나 아저씨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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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가시나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지어 놓으시고 이 세상에 필요한 나무와 풀포기들을 빚으시던 날의 일입니다.

더 아름다운 생명으로 나서기 위해 나무와 풀들의 바람은 컸습니다. 그 중에서도 못생긴 가시나무의 소원은 몸에 지닌 가시 끝만큼이나 간절하였습니다.

'장미처럼 이쁜 꽃을 얹어 주소서.'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해가 지자 손을 털고 일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가시나무는 황급히 하느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아버지, 저에게도 뽐낼 수 있는 무엇을 주셔요. 이렇게 가시만 가득 달고 세상에 나가서는 미움만 받고 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가시나무를 타일렀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너한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후일 네가 마음을 갖기에 따라서 장미꽃보다도 더 거룩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말씀을 믿고 가시나무는 세상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눈총만 받고 사는 나날이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나무들과 풀들을 가려서 옮겼습니다. 과실나무와 꽃나무들은 뜰 안으로, 곡식과 채소들은 논밭으로 가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산에서는 밀려 내려오고, 들에서는 쫓겨나서 비탈진 언덕 같은 곳에서나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날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 가시나무가 죽고, 아들 가시나무가 아버지가 되고, 또 아들 가시나무가 태어나고…. 그 동안에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율법과 장식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죄를 돌무더기처럼 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땅 위의 동쪽에 있는 한 작은 도시에서 이 세상에 길이 전하여질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의 권세에 눈이 어두운 철부지 사람들이 눈에 하늘빛이 가득한 분을 붙잡아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날 가시나무는 그 도시의 감옥이 있는 언덕의 비탈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어진 병사 하나가 칼을 들고 나타나서 가시나무를 싹둑 잘랐습니다.

병사가 가시나무로 테를 둥글게 엮어서 그 분의 머리 위에 얹기까지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아, 미안해요. 이건 제가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 아니니 용서하셔요. 저는 당신의 피를 흘리게 하려는 가시가 아니라 위로의 가시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언젠가는 거룩히 쓰일 것이라는 하느님의 언약을 믿고 살아온 우리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저주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가시나무는 눈물로 빌었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울지 마라, 가시나무야. 너는 이제 진실한 너의 그 마음 하나로 거룩히 되었다. 땅 임자의 황금으로 된 왕관보다도 몇 천 배나 높은 하늘 임자의 면류관이 된 것이다."

하늘의 별들이 온통 가시마다에 내려와서 총총총 총총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19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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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학

 

젊은 도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공에게는 도공을 한 마음으로 따르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공은 소녀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도자기 빚는 일에만 빠져서 지낼 뿐이었습니다. 도공은 늘 움막에 머물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물레를 잣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자기가 빚어지면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마에서 장식불을 지피며 밤을 새우곤 하였습니다. 졸음이 오면 찬 물로 목욕을 해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때로 소녀의 그림자가 달빛 속에 어려들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도공은 새를 쫓듯이 후여 후여, 손짓으로 그림자를 밀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마를 열면 도공의 손 끝에서 빚어진 청자 대접이며 백자 항아리들이 쏟아져 나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그 어느 것 하나도 도공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더러는 선이 둔했고, 더러는 결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색깔도 또한 청자는 가을 하늘처럼 영명했으나 어딘지 구정한 기운이 배여 있는 것 같았고, 백자는 늘 화평의 기운이 약해 보였습니다. 도공은 도자기들을 깨뜨리면서 울부짖곤 하였습니다.

"고령토야, 미안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사금파리 몸을 얻고 말았으니 너를 볼 얼굴이 없구나. 차라리 고령토로 남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럴 때면 매화나무 등걸에 몸을 숨기고 내다보는 젖은 눈동자가 있었습니다. 안타까워 못 견뎌 하는 그는 바로 도공을 연모하는 소녀였습니다. 얼굴이 정월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꽃처럼 해맑은 소녀.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슬픈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입 속에는 도공에게 하고 싶은 그리움과 격려의 말들이 봄날 바람받이의 목련 꽃잎처럼 쌓일 수밖에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고 있는지 모르시지요? 저 밤 하늘의 은하수처럼 영원으로 흐르고 있어요. 누군가가 전능하여 바닷가의 모래알을 다 헤일지 몰라도 내 마음 속의 당신을 향하여 흐르는 이 은하는 헤이지 못할 거예요.'

'세상 일이 어디 하루 아침에 다 이루어질 수 있는가요? 천천히 풀나무랑 이야기하면서 해 봐요. 흙하고도 상의해요. 장작불한테도 물어 봐요. 당신과 말이 통하면 그들이 도와 줄 거예요. 당신은 당신 혼자서만 이루려고 해요. 당신은 너무 넘치고 있어요. 제발 좀 비워요, 네?'

그러나 소녀의 마음 속 말은 좀체로 도공한테로 모종되지가 않았습니다. 한숨으로 흐르고 눈빛으로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북녘에서 학들이 돌아오는 봄날부터였습니다. 소녀는 하고 싶은 말 대신에 종이 학을 접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 예순 마리…. 백 마리….

도공이 가마곁에 버려 놓은 사금파리처럼 소녀가 접어 놓은 종이 학 또한 소녀의 방 웃목을 하얗게 덮었습니다.

 

마침내 소녀가 천 마리 째의 학을 접은 날, 그녀는 슬프게도 이 세상에서의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전갈을 받은 도공이 달려와서 소녀를 품에 안았지만 그러나 이미 소녀의 몸은 종이 학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도공은 소녀를 뒷산 솔밭에다 묻었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접은 천 마리의 종이 학으로 소녀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도공은 고향을 떠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소녀에 대한 자책감이 자꾸만 가슴을 옥죄었기 때문입니다. 도공은 이내 봇짐을 싸서 지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성황당 고갯마루에 올라 선 도공은 소녀의 무덤이 있는 솔밭에서 학들이 일제히 날아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공은 방랑의 발길을 떼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도공이 가서 머무는 곳마다 학이 하얗게 산과 들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도공은 혹시 저 학들은 소녀가 접은 천 마리의 종이 학들이 진짜가 되어 나타난 것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들 또한 도공을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이 기이하였습니다. 도공이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학들이 건중거리며 따라오기도 하고 머리 위를 맴돌기도 하였습니다. 도공 또한 학을 볼 때마다 소녀에 대한 애틋한 정이 새삼 우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 어디를 둘러 봐도 소녀의 젖은 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참숯 같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간직해 둘 것을, 하고 도공은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소녀의 그림자마저도 이 세상에 걷혀 간 지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도공도 이젠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마에 골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손등에는 거뭇거뭇한 저승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공한테는 자기가 빚은 도자기에 대한 미움이 걷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도공은 사금파리 무덤을 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렇게 내 생이 끝나고 말 것인가. 오직 도자기에 미쳐 흘려 보낸 나날이 아닌가. 그래, 그녀의 아리따운 마음 하나 담아 둘 그릇 하나도 못 남기고 죽을 것인가.'

도공은 달을 보고 하소연하기도 하였습니다.

"달아, 내 마음을 너는 알겠구나. 해질녘의 순한 산그리메 같은 그녀의 혼이 머무를 도자기를 빚어 내는 것이 나의 소원이란다. 물론 나도 젊은 날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도공이 되려고 했었지. 그리하여 임금님의 거룩한 가마로 인정 받아서 이 세상의 영화를 누려 보고자 하였어. 내 젊은 가슴에 찬란히 피어 있던 그 무지개를 담아. 너는 알고 있었지?"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도공은 문설주에 기대어 기다리다가 달이 다시 화안히 나오자 그의 말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아. 이러한 욕망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이었는가를 알았어. 이젠 그저 가련한 그녀의 혼이나 편안히 쉴 수 있는 작품을 빚었으면 해.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도공은 다시 허연 수염을 미풍에 날리며 물레를 돌렸습니다.

 

이 날 밤은 고요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흡사 옛적 벙어리 소녀의 초롱한 눈동자에 비친 세상 같았습니다.

도공은 달빛으로 붓을 씻은 다음 방금 막 빚은 화병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화병에 고향 뒷산 소녀의 무덤가에 있는 노송 한 그루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 소나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세상 온갖 풍상을 겪은, 그리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외로운 자태.

단, 거기에 학이라도 한 마리 깃들어 주었으면 했으나 자신이 학을 그릴 염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도공은 아쉬운 마음으로 붓을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화병을 가마 속에 넣었습니다.

 

뒤란에서 장작을 져 오던 도공은 문득 달빛 속에서 새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새가 난담.'

이 때였습니다.

고개를 든 도공은 학이 한 마리 천천히 날아서 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이 가마 속으로 들어가다니,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도공은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가마에 불을  때는 동안 내내 도공은 자기 코를 의심하였습니다. 고기 타는 냄새 같은 것이 영 걷히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가마를 여는 날이었습니다. 화병을 꺼내 든 도공은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풍만한 백자 화병 허리에 청청하게 살아 있는 소나무, 그 가지에 학이 한 마리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듯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오자 쏴아아, 하고 솔바람이 일었습니다. 순간, 고동은 학이 날아갈 것 같아서 얼른 품 안으로 화병을 끌어 안았습니다.

햇살이 온 누리에 영명하게 쏟아져 내리는 아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