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감동언어 -행복한 눈물-

 

성모님의 유치원

 

은아는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은근히 마음 쓰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은아가 집에서 어떻게 하고 있나' 하고 유치원 선생님이 요술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알을 흘릴까 봐 조심이 됐고, 시장 가는 엄마한테 저도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다가도 흠칫 놀라서 그만 두기도 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한 움큼 끊으려 하다가도 "안 돼요. 아껴 써야 해요." 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절반만 끊어 쓰기도 합니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홉 시를 알려 드립니다." 하고서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하고 아나운서가 말할 땐 두 말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온 식구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웃음거리를 보고 있는데 또 아홉 시 시보가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심술이 난 은아는 벌떡 일어나서 아나운서가 하려는 말을 자기가 가로챘습니다.

"알겠다, 알겠어. 착한 어린이는 어서 잠자리에 들어라, 이 말 하려고 그러지?"

은아는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문 이 쪽에서 식구들의 웃음이 터졌습니다. 할머니는 틀니까지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일찍 잠자리에 들면 빨리 잠이 깨었습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은아처럼 빨리 자고 일찍 일어나면 새 나라의 어린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은아는 더 일찍 잠이 깨었습니다. 아침 일찍 꽃밭에 나가서 꽃들하고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 날의 꽃밭은 마치 은아네 유치원 교실 같습니다. 저마다 이쁜 얼굴을 하고 모여 있는 꽃밭 교실.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꽃들의 모습은 영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쩌다 밤 사이에 소나기로 샤워라도 한 날이면 옷자락이 스치기만 해도 꽃물이 옮아 올 만큼 싱싱한 꽃나무들.

유치원에서는 원생인 은아지만 꽃밭에서는 은아가 선생님입니다. 꽃밭 가운데 서 있는 성모님은 원장 선생님이고.

현관을 나온 은아는 먼저 성모님께 절을 합니다.

"성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꽃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여러분, 잘 자고 밥 맛있게 먹었어요?"

"네에."

일제히 대답하는 꽃들의 소리는 기운찹니다. 빨간 꽃은 빨간 입을 벌리고, 노란 꽃은 노란 입을 벌리고, 파란 꽃은 파란 입을 벌리고.

은아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팔꽃."

"네."

"금잔화."

"네."

"맨드라미."

"네."

"과꽃."

"네."

"채송화."

"네."

"봉숭아."

"네."

"분꽃."

"네."

"해바라기."

"네."

 

은아는 커다란 돌이 교탁인 양 거기에 두 손을 얹고 꽃들을 향해 말을 합니다.

"오늘도 우리 이쁜 원생들이 다 나와 주었군요. 정말 기뻐요. 봉숭아, 어제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지요? 좀 어때요? 아, 이젠 괜찮다구요? 정말 다행이어요. 정말 기뻐요. 어제도 선생님은 요술 망원경을 보았어요. 집에서 누가누가 잘 하나, 누가누가 잘못하나 하구요. 그런데 우리 원생들은 모두모두 잘 했어요. 밥알을 흘리는 사람도 없었어요. 떼를 쓰는 사람도 없었어요. 휴지도 아껴 쓰고 물도 아껴 쓰고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정말 착한 어린이들이었어요."

은아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 쪽 저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꽃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는 것입니다.

맨드라미꽃 앞에서 발을 멈춥니다. 허리를 구부려 맨드라미 아랫잎에 묻은 흙을 씻어 줍니다. 나팔꽃이 헛디딘 발을 울타리에 기대어 놓습니다. 과꽃의 고개를 바로 잡아 주면서 "버릇 돼요." 하고 주의시킵니다. 키다리 해바라기를 쳐다보면서 "혼자 햇빛 다 먹으면 안 돼요." 하고 타이르기도 합니다.

 

꽃밭을 한 바퀴 다 돈 은아의 눈길은 문득 한 곳에 가 머뭅니다. 꽃밭의 담은 작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담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름 모르는 꽃나무 한 그루.

자갈 틈을 비집고 나와서 그런지 키도 작습니다. 돌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이파리에는 벌레 먹은 흠집이 많습니다. 간혹 은아네 유치원 창 밖에 서 있다가 떠나곤 하는 그 아이처럼.

언젠가 은아는 할머니께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하느님은 어디에 계셔요?"

"은아야!"

할머니는 은아의 손목을 가만히 거머쥐며 말했습니다.

"하늘에도 바닷가에도 그리고 들녘의 풀숲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단다."

"할머니, 하느님은 꽃처럼 이쁘시기도 해요?"

"그럼, 이쁘시고말고."

"무슨 꽃처럼 생기셨어요? 채송화처럼? 봉숭아처럼?"

할머니는 파란 하늘을 보시다가 한참 만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채송화처럼도 생기셨고, 봉숭아처럼도 생기셨지. 그리고 우리 꽃밭에는 없는 백합처럼도 생기셨고, 풀꽃처럼도 생기셨단다."

 

은아는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그래, 하느님은 저 이름 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은아는 성모님을 돌아보며 말하였습니다.

"성모님, 저기 저 바깥에 있는 가난한 꽃나무도 우리 꽃밭 안에 들어오게 해요. 괜찮지요?"

은아는 돌담을 허물었습니다. 못난 꽃나무가 꽃밭 안에 들어오게 담을 고쳤습니다. 호미로 땅을 파고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습니다.

손을 씻고 꽃들 앞에 다시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새 동무를 소개하겠어요. 여러분도 진즉부터 보았지요? 우리 유치원 바깥에 서 있던 가난한 동무여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요. 알았지요?"

"네에!"

어느 때보다도 꽃들의 대답은 우렁찼습니다.

 

이 때입니다. 은아의 뒤편에 서 있던 성모님이 은아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것은.

 

<19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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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환이는 귀가 멀어서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환이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강가에 나가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강가에는 이 세상이 시작되면서부터 전해 오는 온갖 이야기가 줄기 줄기 흐르고 있습니다. 여기엔 가끔 험악한 천둥이 내려친 적도, 그리고 별똥이 가라앉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손톱만한 생채기 하나 없이 예나 지금이나 항시 푸른 터 그대로 있습니다. 환이는 강가에 나가서 마음을 모아 돌을 던지곤 합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그리고 외로울 때도.

풍덩, 돌이 떨어지면 그 물에서는 물결이 깜짝 일어납니다. 그럴 때의 물 무늬는 모래알 하나 하나에 부딪치는 빛의 반짝임 같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돌이 강물에 파문지어 보내 주는 물결에서 환이는 세상의 갖가지 표정을, 그리고 말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하루 내내 꽃밭에서 놀다가 와 던진 돌에 이는 물결은 꽃봉오리처럼 예쁘고 기쁨으로 일렁입니다. 또는 봄바람이 어루만지는 버드나무의 새순처럼 여려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터를 구경하고 와서 던진 돌에는 물결도 '와와' 수선스럽게 부서졌습니다. 그 속에는 두리번거리기 잘 하고 자주 훔쳐보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물결이 환이의 슬픔마냥 가늘게 가늘게 떨렸습니다. 환이네가 기르고 있던 다람쥐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갈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동무. 그 다람쥐는 약초를 캐려고 백운산에 가셨던 환이 아버지께서 잡아 오신 것입니다. 환이한테 주면서 아버지는 손짓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거라. 너무 귀찮게는 하지 말아라' 고.

처음 얼마 동안 다람쥐는 환이가 주워다 주는 도토리도 잘 까 먹고 상자 속의 쳇바퀴도 곧잘 돌렸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쳇바퀴가 쉬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그 맑던 눈망울이 안개가 낀 듯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는 환이가 사다 넣어 준 밤톨을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상자 속의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먼 하늘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더니, 그만 오늘 아침에 죽고 만 것입니다.

환이는 꽃밭의 등나무 아래 다람쥐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말갛게 뜨고 죽은 다람쥐의 눈망울에 행여 티끌이 묻을까 봐 하얀 접시꽃으로 눈을 가리고 흙을 덮었습니다. 라일락꽃 가지로 엮은 십자가를 무덤 앞에 세워 주었습니다.

 

환이는 차돌 하나를 주워서 강 한가운데로 던졌습니다. 차돌이 풍덩 떨어져서 지어 보내는 물결은 환이한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왜 나를 동무들이 기다리는 산으로 보내 주지 않았니? 아름드리 전나무를 오르내리고 바위 위를 달음박질하던 내가 어떻게 그 좁은 상자 속에서 살 수 있었겠니? 내가 얼마나 산으로 가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환이는 그만 울먹이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눈물 두 방울이 그의 양뺨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환이는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습니다.

 

흐느끼고 있는 환이의 어깨를 누군가가 흔들었습니다. 환이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언제 왔는지, 둥그런 베레모를 쓴 아저씨 한 분이 환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겨드랑이에 화판을 끼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환이에게 왜 여기 혼자 앉아 있느냐고 묻는 듯 했습니다.

환이는 먼저 손바닥으로 귀를 덮고 다음에 입을 막아 보였습니다. 그제서야 아저씨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저씨도 환이가 자주 오는 이 강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아저씨는 강 언덕에 화판의 다리를 세웠습니다. 곧이어 분꽃 같은 붓이 너울대기 시작했습니다. 화폭에는 금방 파란 강물이 굽이쳐 흘렀습니다. 한쪽 귀퉁이에 물거품이 보글대는 것도 그려졌습니다. 화판을 거꾸로 들면 발 아래로 푸른 물이 쏴아,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화폭엔 강 하나 밖에는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분꽃 같은 붓이 너울되기를 멈췄습니다. 하얀 윗부분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아저씨의 생각이 막혀 버렸나 보았습니다.

아저씨는 화판 아래 주저앉았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으로 깍지를 껴 그 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였습니다. 아저씨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려나…. 환이도 아저씨 곁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강에는 미루나무들이 물구나무 서 있었고, 가끔씩 강을 거슬러 오는 바람결에는 강 아랫마을의 찔레꽃 향기가 묻어 오곤 하였습니다. 하늘엔 솜털 같은 흰 구름이 목화송이처럼 둥둥 떠 갔습니다. 환이는 아저씨의 어깨를 흔들어 강 속에서 부푸는 흰 구름을 가리켰습니다.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시며 환이의 눈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환이의 눈동자에도 흰 구름이 화안히 비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이의 눈이 갑자기 깜빡 감겼다가 떠졌습니다. 강 위를 나는 새 한 마리가 비쳤습니다. 그 새는 물총새였습니다. 물총새는 색색의 고운 날개를 펴고 포롱포롱 강 기슭을 스쳐 날고 있었습니다. 환이는 저도 모르게 물총새를 따라 나섰습니다. 대밭을 지나고 가시덩굴을 넘었습니다. 물총새가 날아가 앉은 곳은 강 언덕의 비탈진 벼랑이었습니다. 환이의 눈이 커졌습니다. 물총새가 붉은 황토 벼랑의 작은 구멍으로 살짝 꼬리를 감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환이는 조심조심 발끝 걸음으로 황토 벼랑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오른손을 뻗어서 지금 막 물총새가 기어 들어간 작은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환이는 제 몸의 모든 피가 오른팔에 몰리는 듯 하였습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습니다. 구멍은 자꾸만 깊어졌습니다. 환이는 팔을 안으로 안으로 뻗어 넣었습니다. 손 끄트머리에 물총새의 모드레한 깃이 닿았습니다. 환이는 가슴이 '콩콩' 소리내며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팔을 조금 더, 어깨가 구멍 속으로 다 들어가도록 뻗어 넣었습니다. 손끝을 타고 물총새의 깃의 따스함이 그리고 물총새의 두근거리는 가슴 소리가 전해져 왔습니다. 환이의 가슴도, 물총새의 작은 가슴도 가쁘게 뛰놀았습니다.

환이는 얼마 동안 그렇게 있었습니다. 소리개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떠 와서는 한참 맴돌다 갔습니다. 환이는 불현듯 아까 본 물결이 생각났습니다. 물결이 일러 주던 그 말이.

'동무들과 살게 해 주어야 한다…. 다람쥐도 전나무를 오르내리고 바위 위를 달음질하고 싶어 죽었었지….'

환이는 방글방글 웃으며 걸었습니다. 가시덩굴을 넘어서 대밭을 지나 강 언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저씨는 여전히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화판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화판 위의 그림은 아직도 채 그려지지 않은 그대로였습니다. 환이는 벼랑을 가리키며 물총새의 가슴에 닿았던 부드럽고 따스한 바른손을 아저씨의 뺨에 대었습니다. 환이의 작은 손 위에 아저씨의 큼직한 손이 포개졌습니다. 환이는 왼손을 들어 물총새의 집이 있는 황토 벼랑을 다시 한 번 가리켰습니다.

마침, 황토 벼랑에서 물총새 한 마리가 포르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활짝 편 색색의 날개가 햇살에 아롱졌습니다. 환이는 갑자기 아저씨한테 제 말을 들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 밑에서 작고 둥근 차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눈을 감았다 뜨면서 고개를 갸웃하였습니다. 환이는 물총새의 가슴에 대었던 손으로 푸른 강 멀리 돌을 던졌습니다. 차돌은 강 위에서 졸고 있던 바람을 깨웠습니다. 찰랑찰랑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을 지켜보던 아저씨의 눈이 별처럼 반짝 빛났습니다. 이마를 덮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날렸습니다. 아저씨는 다시 분꽃 같은 붓을 들고 화폭 위의 흰 부분에 색색으로 죽죽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강에서 일어난 물이랑처럼 하나 둘, 여러 가지 물감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였습니다.

'아.'

그림을 보던 환이는 터질 것 같은 가슴에다 두 손을 단정히 모았습니다.

화폭의 빈 하늘에 아저씨가 힘차게 그려 넣은 것은 층층이 떠오르는 일곱 빛깔의 무지개였습니다. 무지개는 강에서 하늘로 둥글게 둥글게 비단띠처럼 피어 올랐습니다.

실물결이 와 닿는 강가의 목화밭에는 다래가 하나 둘 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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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준이는 백화점에 가자고 엄마를 졸랐습니다.

"엄마, 언제 데려갈 거야?"

"아빠가 월급을 받아 오면 가자꾸나."

"그럼 몇 밤을 자야 해?"

"가만 있자, 오늘이 십오 일이니 열흘 남았구나."

"열흘이면 열 밤을 자야 하지, 엄마?"

"그렇지, 네 열 손가락 전부를 꼽아야지."

"와, 그렇게나 많이."

이번에는 엄마의 대꾸가 없습니다. 엄마는 빨래를 하기 위해 이불 홑청을 뜯고 있습니다.

"에이, 엄마 시시해."

준이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대문에 달아 놓은 방울종이 한참을  딸랑딸랑 울립니다. 엄마는 대문 틈으로 빠꼼히 내다보이는 골목을 보면서 한숨을 포옥 내쉽니다.

아빠의 월급을 받으면 집 살 때 빌린 돈 이자 물어야지, 곗돈 내야지, 할아버지 약값 보내 드려야지, 준이의 유치원비 내야지, 그러고 나면 한 달 생활비도 달랑달랑한데 저렇게 백화점에만 가자고 조르니 은근히 준이가 미워집니다.

옆집 리태네 엄마는 속도 모르고 백화점 구경시켜 주는 것이 뭐가 어렵느냐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준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가 완구점 앞에서 비싼 로봇을 사 달라고 떼를 쓰는 통에 혼이 난 엄마입니다.

엄마는 수돗가에서 시름을 씻어 버리기라도 하는 양 이불 홑청을 빨았습니다. 몇 번이고 맑은 물로 헹구었습니다.

 

대문의 방울종이 다시금 딸랑딸랑 울리었습니다. 꽃밭가에 와서 쭈그리고 앉은 준이의 얼굴빛이 노오랬습니다.

"왜, 누구하고 싸웠니?"

"아아니?"

"그런데 왜 그러니?"

"엄마, 나 점심 먹은 거 다 토했어."

"뭐라구? 낮에 사 먹은 호떡이 체한 거로구나. 내가 뭐랬니? 군것질 심하게 하지 말라 않던."

엄마는 약국으로 달려가서 소화제를 사 왔습니다. 그러나 준이는 소화제를 먹고도 다시 토했습니다. 자리에 뉘이자 어지럽다며 울었습니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아빠가 달려왔습니다.

"이상한데, 병원에 한 번 가 봅시다."

아빠가 준이를 업고, 엄마는 준이의 신발을 들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준이를 진찰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였습니다.

"머리 사진을 한 번 찍어 봐야겠는데요."

엄마 아빠는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바로 서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한참 후, 컴퓨터실에서 나온 의사 선생님이 급히 엄마 아빠를 찾았습니다.

"수술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준이는 이내 환자 옷으로 갈아 입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큰 주사를 맞으며 수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울고 있는 엄마를 보고 준이가 말을 걸었습니다.

"엄마, 왜 울어? …엄마도 아파?"

"……."

"나처럼 많이 아파?"

"……."

"엄마, 내가 엄마 것까지도 아플게. 엄마, 울지 마."

"준아…."

"엄마 우는 거 난 싫어."

"……."

"엄마, 내가 엄마 것까지도 울게. 엄마는 웃어. 나는 엄마 웃는 얼굴이 젤 좋아."

이 때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준이를 조용히 밀차 위로 옮겨 실었습니다. 아빠는 담배를 물고 벽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엄마가 밀차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준아, 수술을 받다가 하느님을 뵙게 되거든 준아, 엄마 아빠와 더 살게 해 달라고 빌어라, 응. 그 곳이 천사님들이 계시는 꽃대궐이더라도 준아, 꼭 그렇게 빌어야 한다. 엄마 아빠도 빌게. 우리 준이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 올리고 있을게. 설혹 집이 없어지고, 라면을 먹고 산다더라도 준아, 엄마는 우리 준이와만 함께 산다면 늘 감사 기도를 잊지 않겠다."

준이의 눈동자 속에 엄마가 사뿐 들어섰습니다.

"걱정 마, 엄마. 나는 얼른 나아서 백화점에 가야 해. 백화점에 가서 엄마 선물을 사야 해."

"엄마 선물?"

"응."

"무슨 선물인데."

준이가 엄마의 귀를 가만히 잡아당겼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기운 속옷을 입었잖아. 내가 전번에 봤어. 그래서 할머니가 와서 준 돈하고, 아빠 친구가 와서 준 돈하고를 베개 속에 감춰 뒀어. 백화점에 가서 엄마 속옷 살려고."

하늘에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별들은 모두 준이가 들어가 있는 수술실을 초롱초롱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바람이 기지개를 켰습니다.

달맞이꽃이 노오랗게 입술을 여는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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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악보

 

솔섬 국민학교는 학이 불티처럼 날아와 앉는 솔밭 가운데에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소나무가 흔들려 학교의 지붕이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에는 상어등 같은 용마루가 솔숲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입니다. 내내 분교였다가 제 이름을 갖게 된 지 겨우 한 살 밖에 안 된 학교. 소나무의 잔가지가 와 닿는 창가에서 보면 앞섬의 귀퉁이에 있는 등대 너머로 먼 수평선이 가물거립니다. 그리고 배가 지나가는 자리는 바닷물이 인두자국처럼 은빛을 띄우기도 하지요.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까지 합해서 네 분. 학생 수도 적고 교실도 모자라서 1학년과 3학년, 2학년과 5학년, 4학년과 6학년이 각각 한 교실에서 사이좋게 배웁니다. 바닷가, 울타리도 치지 않은 모래밭이 곧 운동장이기 때문에 쉬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공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기보다는 물오리를 쫓아다니거나 까치집을 지으며 노는 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벼랑에서 꽃을 피운 풍란이 솔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내 오기도 하고, '땡땡' 학교의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거슬러 가기도 하지요. 가끔 길을 잘못 든 물새가 열어 둔 창문으로 교실에 들어오기도 해서 아이들의 함성을 받으며 나가는 것을 그려 보세요. 멀리 태평양으로 트인 바다 가운데서는 돌고래가 더러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보이기도 해서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갑자기 학교 안이 떠들썩했습니다. 솔잎으로 귀를 후비며 놀던 솔바람도, 모래성을 허물고 있던 잔물결도 일순 숨을 죽였습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풍금이 왔다아!"

"어머, 풍금이 저렇게 생겼다냐?"

"조용히 해요, 조용히."

"어머, 저 소리 좀 들어 봐."

"쉬! 조용히 하라니까."

한 쪽에서 풍금이 울리면 다른 교실의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또 술렁거려서 공부가 안 될 것을 아신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풍금을 교단 위에 올려놓게 했습니다.

급히 나오느라고 다른 아이의 신발을 신은 아이, 서로 앞줄에 나서려고 목을 움츠려서 일부러 키를 작게 하는 아이…. 그들을 정리하느라고 선생님 세 분은 한참이나 애를 먹었습니다.

드디어 키가 크고 푸석머리인 이 선생님이 교단 위에 올라가서 풍금 앞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코를 훌쩍이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파도만이 제 발걸음을 소리내어 재어 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섬 아이들이 육지 꿈을 꾸다가 어슴프레 듣는 철썩이는 소리였습니다. 밀려 오는 파도 소리를 따라 풍금이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도, 미, 솔, 도, 도레미파솔라시도….'

갈매기가 두 마리 용마루 위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마을 쪽으로부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맨발로 달려왔습니다.

이 선생님이 처음 연주하신 곡은 <애국가>였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고향의 봄>을, 그리고 <섬집 아기>, <이순신 장군> 등을 크게 풍금에 맞춰 불렀습니다.

솔바람은 풍금 소리와 아이들의 노래를 사방으로 실어 갔습니다. 바닷가에서 파래를 뜯던 아주머니들이, 그물을 손보던 아저씨들이 허리를 폈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동안 교장 선생님은 발 밑에서 모래가 쓸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인 모래펄에 밀물이 어느 새 다가와서 아이들의 고무신 코 언저리를 핥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만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올라 발목을 적시는데도 움직일 줄 모르고 "선생님, 한 곡만 더요, 한 곡만 더 불러요" 하고 졸라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얼 부를까?" 이 선생님이 한 곡만 더 할 생각으로 물었습니다.

"<등대지기>요."

뒤쪽에 선 여자 아이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선생님, <등대지기> 불러요."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좋아하 했습니다. 누군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모두 등대가 서 있는 노루섬 쪽을 향해서 돌아섰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염이 허연 등대지기 할아버지가 사는 곳, 밤이면 고기잡이 나간 아이들의 아버지와 삼촌과 그리고 언니를 위해 불을 주는 곳. 등대지기 할아버지가 늘 광실을 닦고 있는 노루섬을 향해서….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사랑의 마음을─

 

다음 날 솔밭 근처 학교의 운동장가에는 어디서 밀려 왔는지 빠알간 해당화 꽃잎들이 악보처럼 길게 띠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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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

 

봉출산 기슭의 봉황리를 아시는지요?

새 중의 새 봉황이가 사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봉황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지요.

이장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곰보 영감이 어렸을 적에 그 시절 어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했어요. 봉황은 닭의 머리에 뱀의 목과 제비의 턱을 가졌대요. 등은 거북의 등이고 꼬리는 물고기의 꼬리 모양인데 키가 사람만한 새가 훨훨 날면서 다섯 가지 소리로 울었다 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에게마다 명주 같은 마음이 찾아 들어와 세상의 모든 싸움이 다 그쳤대요. 그리고 감옥이란 감옥은 텅텅 비고 임금님이 백성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세상이 되었다지 뭐예요.

 

허수아비는 이 이야기를 곰보 영감으로부터 들었어요. 이장집 마당가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서였지요. 곰보 영감은 작대기를 십자로 엮은 다음, 윗부분에 짚을 한 줌 머리 모양이 되게 둘렀어요. 그러고는 거기를 하얀 헝겊으로 씌우고 눈, 코, 입, 귀를 그려 넣었어요. 이 때 허수아비는 이제 막 생겨난 눈으로 곰보 영감을 에워싸고 앉은 아이들을 보았어요. 곰보 영감은 아이들한테 봉황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봉황이 나타나려면 예천이 먼저 생겨서 단물이 난단다."

눈이 크고 검은 아이가 물었어요.

"예천이 무엇인데요?"

"봉황이 마시는 물이야."

"그럼 봉황의 먹이도 딴 새와 다른가요?"

"아암.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를 먹지."

이번에는 코가 펑퍼짐한 아이가 물었어요.

"잠은 어디서 자는가요? 잠자는 곳도 다른 새들하고 틀리나요."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아."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여자 아이가 또 물었어요.

"할아버지, 그런데 봉황이 나타나면 마음이 찾아온다는 말이 무슨 얘기예요?"

곰보 영감은 허수아비한테 테가 떨어져 나간 밀짚모자를 씌우면서 대답했어요.

"사람들이 자기의 본 마음만 잘 지키고 살면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싫어도 좋은 듯, 좋아도 싫은 듯 그저 돈이 많이 생기고 자리가 높이 되는 일이라면 거짓된 짓을 마구 하지.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허수아비라 하는데, 정작 이 허수아비한테 마음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니?"

"진짜가 되지요."

"그래, 봉황이 나타나면 이런 가짜 허수아비도 진짜가 되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살기 좋겠니?"

석류꽃이 두어 송이 더 벌어졌어요. 아이들은 저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대문 밖으로 나갔어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한참 뒤에 허수아비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렸어요. '봉황이 나타나면 진짜가 된다'는 말을 그제서야 알아들은 것이지요.

곰보 영감은 허수아비한테 헌 저고리 하나만을 입혔어요. 그러고는 허수아비를 어깨에 메고 재를 하나 넘었어요.

오리나무 숲길을 빠져 나가자 산자락이 바람을 머금은 파도처럼 주름져 있는 계곡이 나타났어요. 멀리 계곡 아래에는 고양이 걸음을 걷는 실바람까지도 소리를 나게 하는 대밭이 있었어요.

 

그 날부터 허수아비는 대밭골에 있는 이장네 조밭을 지키게 되었어요.

처음 얼마 동안 허수아비는 밭에 들새 산새들이 앉으려다가는 저를 보고 깜짝 깜짝 놀라서 도망가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산토끼가 깡총깡총 다가왔다가 화들짝 눈이 복숭아만해지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내빼는 것을 볼 때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웃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차츰 날이 가면서 그런 일이 자주 있게 되자 허수아비는 시들해지고 말았어요. 새들과 들쥐, 심지어 여치, 베짱이까지도 허수아비를 피해 다니는 것이었으니까요.

허수아비의 가슴은 때로 성큼성큼 저미기도 했어요. 길을 잃고 헤매는 들새를 볼 때나 배가 고파서 울며 지나가는 산새를 볼 때는 더욱 그랬어요. 길 잃은 들새도, 배고파 하는 산새도 모두 불러서 쉬어 가게 하고 싶고 조 이삭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나 허수아비는 가짜이기 때문에 생각하고는 정 반대로 금방 새들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야 했어요.

'내 빈 가슴 속에 마음이 들어와 진짜가 된다면 내 생각과 똑같은 얼굴을 할 수 있을 텐데….'

허수아비는 날마다 봉황 생각을 하면서 닭의 머리에 뱀의 목과 제비의 턱을 가진 봉황을 기다렸어요. 곰보 영감은 유월 장마가 걷힌 뒤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다녀가고 소식이 없었어요. 조밭은 조보다도 잡초가 더 무성했어요. 허수아비는 잡초에 치여서 여위어 가는 조를 볼 때는 그만 주저앉고 싶었지요. 하지만 허수아비는 참았어요. 여름날, 천둥과 함께 쏟아진 소나기한테 입과 코를 반 쪽씩 떼이는 아픔도 견디었어요.

 

어느덧 가을이 왔어요. 푸르던 억새의 머리카락이 하나 둘 하얗게 세고, 먼 산봉우리에서부터 단풍의 빨간 물이 번져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허수아비가 여름 내 지켜 왔던 조들도 고개를 숙였어요. 잡초들한테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여물이 든 조가 허수아비는 여간 신기하지 않았어요.

허수아비는 바빠졌어요. 새들이 익어 가는 조를 보고 그냥 지나가려 하지 않으니까요. 잠깐 한 눈을 팔면 어느 새 가장자리의 조를 쪼고 도망가는 것이었어요. 허수아비는 어서 곰보 영감이 와서 조를 걷어 가 주었으면 했어요. 새들하고 눈싸움을 하기에도 지쳐 있었거든요.

차츰 비어 가는 들판에 달빛이 차 오르기 시작하는 추석 무렵이었어요. 허수아비는 들국화가 피어 있는 공동묘지 길로 상여가 지나는 것을 보았어요. 상여 뒤에는 아이들이 따르고 있었어요. 눈이 크고 검은 아이와 코가 펑퍼짐한 아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아이도 있었어요. 허수아비는 단번에 그 상여가 곰보 영감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황천길이 멀다 해도

문턱 밑에 황천일세

어노 어노 어이 가리 어어노

 

상여도, 아이들도, 상여꾼 소리도 산굽이를 돌아갔어요. 스산한 가을 바람만이 말라 가는 조 잎을 서걱이게 하는 것이었어요.

허수아비는 울음을 터뜨렸어요. 석양 속에서, 달빛 속에서 허수아비는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눈물을 흘렸어요.

허수아비가 울어 버린 건 저녁부터였어요. 허수아비는 발가락 사이로 실낱 같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허수아비의 빈 가슴이 외로움과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흘려 내보내는 슬픔 같은 여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안개가 잔뜩 낀 날이었지요.

허수아비는 안개 속에서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간혹 달팽이가 쉬어 간 적은 있는데 달팽이의 끈적거림하고는 다른 것이었어요. 대밭골을 거쳐 온 바람이 안개를 봉출산 중턱으로 밀어 올렸어요.

"아니, 넌 누구냐?"

발 밑을 내려다 본 허수아비는 깜짝 놀랐어요. 어린 새 한 마리가 거기에 있었거든요.

"당신 발 밑에서 솟아나는 물을 먹으러 왔어요."

"뭐라구? 넌 내가 무섭지도 않니?"

"무섭지 않아요. 당신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가슴이 빈 가짜니까요."

"뭐야? 내가 널 잡아 혼낼 수도 있어. 날 얕잡아 보았다간 큰 코 다친단 말이야."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마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허수아비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어요. 자기의 비밀을 들켜 버렸으니까요.

"도대체 넌 누구냐?"

"저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자라야 하는 어린 새예요."

"넌 나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까 이 밭의 조도 다 먹어 치우겠구나."

"나는 조는 먹지 않아요. 다만 당신의 발 밑에서 솟아나는 이 물을 마실 뿐이에요."

"정말이냐? 그렇다면 물 말고는 또 무얼 먹고 사느냐?"

어린 새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저 초롱한 눈으로 비어 있는 허수아비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어요.

 

다음 날부터 어린 새는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찾아와서 허수아비의 발 밑에서 나는 물을 먹고 가곤 했어요. 그런데 어린 새는 올 때마다 바보이거나 병신인 새들을 데리고 왔어요.

"저기 저 바위종다리는 부엉이한테 놀라서 바보가 된 새예요. 저기 저 머슴새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던진 돌에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새이고요."

"너는 성하지 못한 새들하고만 친하구나."

"그래요. 불쌍한 저 새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제 꿈이에요. 당신의 희망은 무엇인가요?"

"나는 내 마음을 갖추어서 진짜가 되는 것이야."

"그러면 이 새들을 잘 돌봐 주세요. 내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뭐라구? 네가 내 소원을 들어 준다고? 그럼 너는 봉…, 봉…."

"쉿, 조용히 하세요. 저는 아직도 한참을 더 자라야 하니까요."

허수아비는 파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요.

'이제 곧 빈 가슴 속에 마음이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껏 소리도 지를 수 있고, 다니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허수아비의 가슴에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득 찼을 땐 퐁퐁 솟아 나오던 단물이, 가슴이 편해지고 자랑으로 부풀게 되자 더 이상 발 밑에 고이지 않는 것이었어요. 왜 물이 갑자기 줄어드는지 허수아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어요. 어린 새가 와서도 물을 마시지 못하고 돌아가는 날이 잦아졌어요. 그러나 어린 새는 투정을 부리거나 우는 일이 없었어요. 뱀을 닮은 목을 빼어 먼 하늘이나 보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허수아비는 가난한 가슴 속에서만 단물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바보 새들과 병신 새들이 물을 많이 먹기 때문이라고 애꿎게 새들만 원망했어요.

동쪽 하늘에 놀이 붉게 뜬 날이었어요. 매가 한 마리 조밭 위에서 맴을 돌았어요.

순간 허수아비는 엉큼한 생각을 하였어요.

'매가 바보 새들과 병신 새들을 잡아먹어 버리게 하자. 그렇게 되면 어린 새 혼자서 물을 많이 먹고 어서어서 자라게 될 거야.'

허수아비는 일부러 한 눈을 팔고 있었어요. 먼 산 소나무나 보고 고개 넘어가는 구름이나 보았어요. 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내려왔어요. 내려올 적마다 바보 새들을 한 마리씩 채 갔어요.

 

밭 주인인 이장이 나타난 것은 이 날 오후였어요. 이장은 허수아비의 머리 위에 뜬 매와 바보 새들의 짹짹거리는 비명을 듣고 화를 벌컥 내었어요.

"망할 놈의 허수아비 같으니라구. 새를 쫓기는커녕 새를 불러들이고 있었구먼. 곰보 영감이 하는 짓은 모두가 저렇다니까."

이장은 들고 있던 낫으로 허수아비의 발목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허수아비의 옷을 벗겨 버리고, 허수아비의 머리며 가슴을 헤쳐 버리는 것이었어요.

허수아비는 결국 진짜가 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뤄질 듯한 꿈을 순간의 잘못으로 영영 놓치고 만 것이에요.

 

며칠 후, 허수아비가 서 있던 밭 가운데 거북이 등을 한 작은 새 한 마리가 부리를 땅에 박고 죽어 있었어요.

이 새가 봉황리에 났다가 채 자라지 못하고 죽은 봉황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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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눈물

 

비행기가 구름 위로 솟았다.

오월의 나뭇잎새에 바람이 찾아 들 때처럼 구름이 부드럽게 비행기의 창을 스쳤다.

"야, 구름이 내 꼬리보다 아름답다."

옆 우리의 공작새가 탄성을 올렸다.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었던 너희들은 반성해야 돼. 여기까지 한 번 올라올 생각은 안 하고 기껏 나무 위나 날며 살았지 않았느냐 말이야."

타조가 껑충한 다리로 일어나며 비꼬았다.

"맞아. 우리는 너무 시시하게 살았어. 옛적 우리 조상 가운데 한 분은 끝없이 날아서 마침내 하늘 안 쪽의 별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구석에 있는 우리에서 독수리가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대꾸했다.

"지나간 일을 탓하면 뭣 해…."

내내 창 밖만 내다보고 있던 앵무새가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다른 새가 아닌 바로 자기에게 들려 줘야 할 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높이 날아서 멀리 내다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내 탓이 아닌가. 나무에서 풀밭으로, 땅에서 바위로 날면서 그저 과실이나 쪼아 먹고 곡식 몇 알에 만족해서 살았던 나날. 그리하여 마침내 그 하잘것 없는 사탕수수 덫을 놓은 사람들한테 잡히고 말았으니…."

앵무새는 결심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지난 날을 후회하고 한숨만 쉬고 있을 지금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지난 날처럼 헛보고, 헛살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겠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자."

 

비행기가 서서히 구름 밑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땅의 푸른 산과 강이 가까워지니 여기저기서 "어이쿠", "어이쿠우" 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 가운데 서 있는 깃대가 달려 오다가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앵무새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창을 넘어 온 햇살이 발목에서 비껴 가고 있었다.

노을 질 무렵에 비행기의 창고 문이 열렸다. 상자가 화물 트럭으로 옮겨지는데 참새 떼가 지나갔다. 어미 참새와 아기 참새가 나누는 소리를 앵무새는 들었다.

"엄마, 저들은 누구야?"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외국 새란다."

"엄마, 우리도 저 새들처럼 이상하게 생겼으면 동물원에 가서 편안히 먹고 살 텐데. 그지, 엄마?"

"철 없는 녀석아! 쪽박을 차고 얻어먹고 살아도 자유 천지 생활이 최고란다."

이튿날부터 앵무새는 동물원의 새장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사육사가 넣어 주는 모이를 먹으면서. 수많은 구경꾼들을 구경하면서. 고향에 비하면 서늘한 날씨가 불만이었지만 추운 지방에서 잡혀 온 새들이 조금만 더워도 숨을 가쁘게 쉬는 것을 보고 앵무새는 참았다. 그러나 앵무새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고민거리가 이내 나타났다. 그것은 구경꾼한테 붙어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구경꾼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어느 날 이 곳에 먼저 와서 살고 있던 선배가 새로 들어온 앵무새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너희들을 진정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마음에 새겨 둘 것이 있다. 그것은 이제부터 너희들 중에 누구도 이 동물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랐던 고향은 지구 저편에 까마득히 멀다. 일찍이 누구도 이 곳을 탈출해 아프리카로 돌아간 새는 없다."

이 때 앵무새가 선배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들의 고향 아프리카보다도 더 먼 별나라로 날아간 조상도 있다던데요?"

"누가 그러던?"

"부엉이 아저씨가 같이 타고 온 비행기 속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것은 다만 전설일 뿐이야. 그러니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유언비어라는 것이지. 그런 붕 뜨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위험해져. 문제의 새가 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편히 살아가야 돼. 사육사의 말을 잘 듣는다면 맞아서 죽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사육사가 우리한테 가져다 주는 양식은 아주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는 이렇게 살이 쪘느냐, 그 삶의 비결은 간단해. 하느님께서 우리한테 특별히 주신 기가 막힌 재주가 있지 않느냔 말이야. 사람들의 말을 금방 옮길 수 있는 재주. 이것으로 구경꾼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 먹고 배불리 살 수 있다는 말씀이지."

"틀렸어요."

앵무새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 선배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소리를 옮기는 것은 흉내일 뿐이에요. 의미가 담긴 말을 하면서 얻는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흉내 낸 소리로 빌어 먹는다는 것은 비굴한 것이에요."

이번에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앵무새가 말했다.

"갇혀서 살 수록 당당해져야 돼. 땀 흘려서 노력하지 않고 거저 먹으려는 못된 유혹에 넘어가서 이렇게 잡혀 온 신세가 되었잖아. 이제부턴 배가 고프고 고단하더라도 먹을 값어치한 대로만 먹고 사는 거야. 비굴하게 아부해서 살 찌고 사느니보다는 적게 먹더라도 진실되게 떳떳이 사는 삶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그래, 우리는 비겁하게 살지 말자!"

"아프리카의 앵무새답게 우리의 순수를 지키며 살자!"

뜨거운 열기가 새장을 가득 채웠다. 선배가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좋다. 너희들이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나도 처음엔 지금의 너희들 결심 못지 않았거든."

 

날이 밝았다. 날이 저물었다. 다시 해가 떴다.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해를 따라 옮겨 다니다가 달을 따라 옮겨 다녔다. 가을이 그 속으로 왔다가 돌아갔고, 겨울이 또 그렇게 왔다가 물러갔다. 행무새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변하기 시작했다. 오래 된 흙벽에 금이 가듯 그렇게 사이가 벌어져 갔다. 처음에는 "안녕하세요." 를 구경꾼들이 세 번 네 번 해야 간신히 그것도 마지못해서 하는 둥 하더니 이제는 서로 다투어서 저 쪽이 시키지 않는데도 사람 소리를 내곤 했다. 어떤 친구는 한 술 더 떠서 "야, 바보야." 하고 웃기는 말을 옮겨서 얻어 먹는가 하면, 또 다른 친구는 "좀 줘." 하고 비굴한 소리까지 배워서 써먹었다.

오직 그만이 버티었다. 그만이 말과 먹이를 혼동하지 않았고 노래를 유희용으로 쓰지 않았다. 새벽이면 꼭꼭 고향 본래의 앵무새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마음 씨앗을 뿌려서

키워 낸 말나무에는

하늘이 열리고

거짓 씨앗을 뿌려서

키워 낸 소리나무에는

지옥이 열리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그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사육사의 눈 밖에도 났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는 늘 혼자였다.

마침내 살이 비어 버린 몸에 먼 하늘의 별빛이 소롯소롯이 재이는 밤이었다. 앵무새는 횃대 위에 앉아서 가물가물 물결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달빛을 느끼고 있었다. 골 얕은 곳으로 휴지를 몰아가는 바람 소리가 들리다가 그치었다. 앵무새는 낮에 우리 앞을 지나던 늙은 교수와 젊은 학생의 대화를 떠올렸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꽁보리밥을 먹고 있는데 마침 그의 친구 아리스티포스가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았다는군."

"아리스티포스는 왕한테 아첨을 해서 벼슬을 한 철인 아닙니까?"

"맞아. 그 아리스티포스가 디오게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네. '왕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면 그 따위 형편 없는 꽁보리밥은 먹지 않게 될 텐데.'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대꾸했다더군. '이런 꽁보리밥을 먹고 살 줄 알면 왕에게 아첨 떨지 않아도 되련만.' 하고 말이야."

앵무새의 두 눈에 달빛보다도 맑은 눈물이 솟았다.

 

그 때였다. 앵무새의 눈물 방울이 아래의 바위를 스치자 뜻밖에도 바위 속으로부터 말이 흘러 나왔다.

"앵무새야, 울지 마라. 언젠가 우리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앵무새는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위는 산의 맥을 이루고 있다가 동물원의 공사 중에 흙 위로 비어져 나온 지층의 자락이었다.

"그 바위 속에 누가 있어요?"

앵무새가 물었다.

"내가 있다."

"내라니 누구신데요?"

"시조새지. 나는 이 돌 속에서 네가 온 날로부터 계속 너의 하루하루를 지켜 보고 있었다."

"정말이어요?"

"그럼. 나도 너처럼 마음을 지키고 살았으니까. 바르지 않은 곳으로 날개가 날아가면 깃털을 뽑아 버렸고 헛소리를 내면 혀를 끊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실에 의하여 내 몸이 타올랐을 때 하느님은 나에게 여기 이 돌 속에다가 억만 년의 터를 잡아 주셨단다. 앵무새야, 양심을 지키며 본래의 노래를 잊지 않으며 산 너의 양심을 후일에 내가 증언하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진실의 횃불이 밝히는 날, 우리 함께 부활하여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자꾸나."

"감사합니다. 시조새님."

 

앵무새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가슴 위에 고개를 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산 너머 절에서 저녁 종소리가 저렁저렁 울려 오고 있었다.

 

<19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