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감동언어 -이상한 사진기-

코스모스

 

열차는 추석을 고향에서 보내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차가 역에 닿을 때마다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고 타는 사람들 뿐이었다. 영산포, 송정리를 거쳐서 정읍을 지날 때는 이미 객실 통로에는 들어설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아이가 젊은 부부의 눈에 띄인 것은 아이의 손에 코스모스 몇 송이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사람들 틈에서 꽃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것을 보다봇한 젊은 부부는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아이를 불러서 그들 사이에 앉도록 했다.

"서울 가니?"

젊은 부인이 먹고 있던 땅콩을 나누어 주면서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가는 길이냐고 물으려는데 아이가 먼저 젊은 남자 쪽을 향해서 말했다.

"아저씨, 저기 있는 소주병 제가 써도 돼요?"

젊은 남자는 병 속에 술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병을 아이한테 건네 주었다. 아이가 빈 병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헤치고 세면실 쪽으로 갔다.

 

얼마 후에 아이는 소주병에 물을 가득 채워 가지고 돌아왔다. 아이가 거기에 코스모스를 꽂아 창켠에 세워 놓은 것을 보면서 젊은 부부는 마주보며 웃었다.

"그 꽃 누구에게 줄 거니? 엄마?"

젊은 부인이 다시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선생님?"

자꾸 엉뚱한 사람만 늘어놓는 것이 속상했던지 아이가 말했다.

"스웨덴에서 온 제 동생한테 줄 거예요."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구?"

이번에는 젊은 남자가 물었다.

"네. 저희 엄마랑 같이 왔대요."

"저희 엄마라니? 그럼 너희 엄마가 둘이란 말이냐?"

"그래요. 영희는 스웨덴이라는 나라로 입양을 갔거든요."

아이의 작은 입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왔다.

 

"우리는 판잣집이 많은 도시에서 살았어요. 나무가 하나도 없는 돌산이 뒤에 있었어요. 이젠 동네 이름도 산 이름도 잊어버렸어요. 아버지가 날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엄마하고 크게 싸우던 것만이 생각나요.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엄마는 우리를 끌어안고 울곤 했어요. 어떤 때는 집에서 나가 버리겠다고 벼르기도 했어요. 영희와 나는 엄마가 도망갈까 봐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엄마는 끝내…."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까 봐 젊은 부인이 아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차창으로 별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날 밤에도 아버지가 엄마를 막 때렸어요. 이상하게도 그 날 밤에는 엄마가 울지 않았어요. 영희와 나는 엄마 팔을 하나씩 나눠 베고 잠이 들었어요. 근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자리에 엄마가 없었어요. 부엌에도 변소에도 공동 수돗가에도 가 보았어요. 그러나 엄마는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침 일을 나갔나 보다고 기다려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녁 밥 먹을 때가 지났는데두요. 영희를 업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막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래도 엄마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어요…. 그 때부터 내 동생 영희의 별명이 울보가 됐어요."

 

금강 줄기로 짐작되는 개천이 달빛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산굽이를 도는지 열차는 또 한 번 기적 소리를 울렸다.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시장에 가자고 했어요. 우리는 좋아라 따라 나섰어요. 버스를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었어요. 또 버스를 탔어요. 처음 가는 굉장히 큰 시장이었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사 달라는 대로 모두 사 주었어요. 영희에겐 주름치마도 사 주었어요. 사탕을 한 봉지씩 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서 있는 데로 갔어요. 약장수들이 원숭이를 데리고 굿을 하고 있었어요. 원숭이가 재주 넘는 것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아빠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 날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다니느라고 영희와 나는 목이 쉬어 버렸어요."

앞자리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쯧쯧' 혀를 찼다. 젊은 남자가 아이의 손에 초콜릿을 쥐어 주었다.

"우리 영희가 이 초콜릿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고아원에서 초콜릿을 준다고 하면 울던 울음도 금방 그쳤어요. 그러나 고아원에 어디 이런 과자가 많이 있는가요? 어쩌다가 외국 손님이 오셔서 과자를 나누어 주었어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 초콜릿을 먹지 않고 숨겨 두었다가 영희한테 주곤 했어요. 그런데도 영희는 자주 엄마를 찾으며 울었어요….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이 절 불렀어요. 영희가 먼 나라로 입양 가게 되었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엄마 아빠가 찾으러 올 거라고 우겼어요. 그 때 보모님이 말씀하셨어요. 외국에 가면 잘 먹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영희가 좋아하는 초콜릿도 실컷 먹을 수 있다고…. 그 말을 듣고 기가 죽었어요. 나중에는 응낙하고 말았어요. 잘  먹고 잘 살고 대학까지 보내 준다고 해서요."

젊은 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 밑을 눌렀다. 차창으로 별똥이 흘렀다.

"영희가 떠나던 날이었어요. 저는 전날부터 잠을 자지 못했어요. 속도 모르는 영희만 침을 흘리며 잤어요. 영희가 발로 차 내는 이불을 덮어 주다 보니 날이 새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날 아침 어느 때보다도 일찍 영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갔어요. 그러고는 오래 오래 영희의 얼굴과 목을 씻겨 주었어요. 머리도 빗겨 주고, 내 머리핀을 뽑아서 꽂아 주고…. 그러나 영희가 막상 떠날 때 보니 내 손엔 영희한테 줄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생각다 못해 뒷마당에서 코스모스를 한 아름 꺾었어요. 떠나는 영희의 가슴에 코스모스를 안겨 놓고 저는 도망쳤어요…. 멀어져 가는 차 소리를 들으며 창고 속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들먹이는 아이의 어깨를 젊은 부인이 가만히 안아 주었다.

 

열차는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한참 후에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말끔히 개어 있었다.

"그래도 용케 동생을 다시 만나는구나."

"저 쪽에서 우리 고아원으로 연락이 왔어요. 영희네 새 엄마 아빠가 우리 나라 구경을 왔는가 봐요. 그 길에 영희도 왔대요. 영희네 엄마 아빠가 우리 둘을 한 번 만나게 해 주고 싶다는 편지가 원장 선생님한테로 왔어요. 그런데 보내 온 사진을 보니까 저는 도저히 영희를 못 알아 보겠어요. 키도 얼굴도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내 동생 영희가 아닌 것 같다고 하니까 원장님이 웃으셨어요. 헤어진 지 6년이나 되니 못 알아 볼 것은 당연하다구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영희가 더 나를 못 알아 볼 것 같아요. 영희는 그 때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 코스모스를 가져가는 거예요. 우리는 자라서 얼굴도 몸도 변했지만 영희가 떠날 때 내가 안겨 준 이 꽃은 해마다 같은 얼굴로 피거든요."

젊은 부부도, 주위의 사람들도 소주병에 꽂혀 있는 코스모스를 보았다. 전에 없이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목이 가는 것이 그렇게 서글프게 보일 수가 없는 꽃이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들어섰을 때는 차창에 어둠이 완전히 가셔 있었다. 푸르른 새벽빛이 걸쳐져 있는 육교를 지나서 출구를 향하는 아이 뒤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를 호위하기나 하는 것처럼.

출구 밖에 늘어서 있는 마중객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마중 나온 사람의 얼굴을 찾아 서로 악수를 나누곤 했다. 아이가 막 출구를 빠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저 쪽의 마중객들 가운데서 쏜살같이 달려 나오는 아이가 있었다. 바른 손을 마구마구 흔들면서. 아아, 깃발처럼 흔들리는 아이의 손.

두 아이의 얼굴은 코스모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둘이 서로 끌어안는 순간 주위의 어른들은 모두 얼굴을 돌리었다.

해가 뜰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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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은지 아빠는 도시의 청소부입니다. 빌딩 그늘에서, 아스팔트 가장자리에서 도시의 가로수처럼 없는 듯이 서서 일을 합니다. 비 오는 날에나 바람 부는 날에나 한결같이 길을 쓸고 쓰레기를 치웁니다. 주정뱅이 아저씨들이 함부로 토해 버린 오물까지도.

간혹 아빠는 엄마한테 땀 닦는 수건 말고 옥양목 수건을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나가는 날도 있습니다. 도시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장군님의 동상을 닦기 위해서입니다. 여름날 파란 하늘에 떠 가는 흰 구름 조각 같은 새하얀 옥양목 수건으로 장군님의 무릎이나 발등을 씻고 온 날이면 아빠는 은지한테 장군님 이야기를 한 가지 씩 들려 주었습니다. 새까맣게 몰려 오는 왜적을 쫓아 버린 여러 가지 지혜 하며, 달 밝은 밤에 홀로 앉아서 나라를 걱정하며 지었다는 시 하며. 그렇게 훌륭하신 장군님의 동상을 아빠가 닦는다는 게 은지는 퍽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으쓱 올라가는 은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아빠는 조용히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우리 시가 이만큼 별 탈 없이 발전해 가는 것은 장군님이 시의 한가운데 서서 굽어 보시며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지."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 아빠의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하였습니다. 아빠가 일하는 거리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통 사고와 강도, 화재와 데모가….

"아무래도 장군님의 눈, 귀가 어두워지셨는가 봐. 얼굴을 한 번 깨끗이 씻어 드려서 정신이 번쩍 나게 해 드렸으면 좋겠는데, 키가 닿아야 말이지."

아빠는 푸욱 한숨을 쉬었습니다.

"긴 작대기에다 수건을 달아 매서 닦으면 안 되나요?"

엄마가 아빠의 작업복에 단추를 달다 말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장군님의 콧구멍이라도 찌르면 어쩔려구."

"그렇다면 작대기 끝을 솜으로 싸서 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안 돼. 눈을 다칠 수도 있는걸."

아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아빠, 내가 아빠의 어깨 위에 무등을 서도 안 닿나요?"

아빠의 어깨를 두 주먹으로 토닥토닥 두들기고 있던 은지가 물었습니다.

"안 닿지. 장군님의 키는 우리들 세 배나 되거든."

"아빠가 장군님의 무릎 위로 올라가요. 그 위에서 내가 무등을 타도 안 닿나요?"

"참, 그렇구나. 장군님의 받침대 위로 올라가면 되겠다. 그런데 날씨가 워낙 추워서 말이야."

"날씨가 추우면 장군님은 그 자리에 안 서 계시나요?"

"아니지. 장군님은 천둥이 치나 눈보라가 치나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걸."

"그럼 나도 장군님처럼 추워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아빠."

"그래, 그래. 우리 은지가 제법이네. 은지야, 내일 아침에 나랑 함께 가자."

"아이, 신난다."

 

은지는 그 날 밤에 세수를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이도 윗니 아랫니 싹싹 닦고 코도 '흥흥' 세게 풀었습니다. 머리를 빗고 나비 모양의 리본을 달았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장군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 연습도 하였습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한참 동안은 가슴이 콩콩 뛰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은지가 눈을 떠 보니 아빠는 벌써 일어나 양말을 신고 있었습니다. 은지는 벌떡 일어나 옥양목 수건부터 챙겼습니다. 서둘러 얼굴을 씻고 아빠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찬 바람만이 깨어서 빈 가로수 가지를 흔들고 있을 뿐, 도시는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장군님의 동상이 있는 도시의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무렵에야 이른 새벽 바닷가의 게들처럼 자동차들이 하나 둘 나타났습니다.

아빠는 은지를 안아서 장군님 받침대로 올려 주었습니다.

"아빠, 이거."

은지가 신을 벗어서 내려 보냈습니다.

"발이 시리니까 그냥 신고 있으려무나."

"안 돼요. 장군님의 옷자락에 흙을 묻히면 장군님이 싫어하세요."

아빠도 신을 벗고 장군님의 받침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아빠, 그럼 올라갈까."

은지는 아빠의 등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코 앞에서 본 장군님의 표정은 은지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무서웠습니다. 왕방울 만한 눈, 꾹 다문 입.

"장군님, 안녕하세요?"

은지는 방긋 웃으며 인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먼저 옥양목 수건으로 장군님의 눈을 닦았습니다. 호호, 입김을 불어 가며 다음으로는 양쪽 뺨을 문질렀습니다. 코 밑도 훔치고 입 언저리도 잘 닦았습니다. 투구를 문지르고 나서는 귀를 후볐습니다. 아, 은지는 장군님의 귀에 쑤셔 넣은 손가락을 빼내다 말고 소리 질렀습니다.

"아빠, 장군님 귀에서 귓밥이 나왔어요!"

"뭐라구? 장군님 귀에서 귓밥이 나왔다구."

아빠도 깜짝 놀라워했습니다. 급히 은지를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은지가 아래 내려와서 펴 보이는 검지 손가락 끝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으응…. 이상하네? 금방 있었는데…."

두 손바닥을 활짝 펴 들고 두리번거리던 은지가 다시 아빠를 불렀습니다.

"아빠! 아빠, 여기 봐요!"

은지의 꼬막 껍질 같은 작은 손바닥 위에 불티처럼 사뿐히 내려 앉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여린 모양의 하얀 눈송이였습니다.

 

"아빠, 장군님의 귓밥이 이렇게 나와 버렸어요. 이제부턴 장군님이 산동네에 사는 우리들의 소원도 들을 수 있겠죠?"

"그럼, 듣고말고. 앞으로는 우리 시에도 좋은 일이 좀 생기겠다."

눈발이 굵어지는 거리를 은지와 아빠는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갔습니다.

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장군님은 처음으로 입술에 웃음을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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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사진기

 

그 사람의 어릴 적 소원은 도깨비 방망이를 발명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비스킷 나와라 뚝딱' 하면 비스킷이 나오고, '아이스크림 나와라 뚝딱' 하면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그런 방망이를 궁리하고 궁리하는 사이에 어느덧 청년이 되었습니다.

청년이 된 그는 도깨비 방망이보다는 투시경을 만들었으면 했습니다. 콘텍트 렌즈처럼 그것을 끼고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의 옷 속으로 알몸이 보이는 투시경. 그것을 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펴 보면서 '히히히 히히' 웃었으면 하는데, 부속 유리 하나가 애를 먹였습니다.

물론 그 동안도 날이 가고 달이 가서 해가 바뀌고 또 바뀌고 했지요. 나이가 드니 이 사람도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장가도 들어야 했고요. 아이들도 낳아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밥벌이가 되는 것들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어 사는 동안에 어느덧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무엇인가 자기 본래의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꼭 발명해 내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흥미와는 관계가 없고 하늘 편에 설 수 있는 것. 그리고 돈벌이가 안 되어도 좋으니 사람들에게서 맑은 종 소리가 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만들어 내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고 지내는 수도자를 찾아갔습니다. 혼자의 생각은 때로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 동안 살아 오면서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경을 읽고 있던 수도자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는 소원대로 과자가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를 만들었으면 했고, 젊은 날에는 투시경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발명하지 않는 것이 훨씬 잘 된 일이었습니다. 함께 나누어 쓰는 공익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부끄러운 삿된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은 지금에 제가 발명하고자 하는 것은 다릅니다."

수도자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음을 찍는 사진기입니다."

"마음을 찍다니요? 어떻게 그런 사진기가 가능합니까?"

"가능하고 말고요. 엑스 광선을 투시해 찍으면 우리들 머리 속이나 심장 속의 사진이 나옵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이미 나와 있고요. 문제는 이러한 카메라를 만들어도 되겠느냐 하는 도덕성입니다."

"마음을 찍는다…. 글쎄요.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지극히 필요한 물건일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제가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그 날부터 연구실로 들어가서 실험과 조작을 거듭하였습니다.

 

마침내 '마음 찍는 사진기'를 완성한 그는 연습 삼아서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마침 공회당 앞에서는 정치인의 군중 집회가 있었습니다. '국민을 위하여 살고 국민을 위하여 죽겠다'는, 오직 그 분의 가슴 속에는 가난한 국민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서 찰칵, 한 장 찍었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기자를 만나고 있는 예술가도 몰래 한 장 찍었습니다. 그 분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너무도 돈만을 쫓고 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대학교로 들어가서 근엄한 박사님도 찍었습니다. 웃음 소리조차도 미풍에 흔들리는 난초인 양 잔잔히 흐르는 모습에 학생들의 시선이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학생회관으로 가서 학생회장도 찍고, 노동회관을 가서 노조 위원장도 찍었습니다. 그들의 속이 너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지나가는 아저씨도 찍고, 청년도 찍었습니다. 할머니도 찍고, 아이도 찍었습니다.

 

해 질 무렵에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배고픈 것도 잊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 사진을 인화지에 옮겼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바깥으로 나온 그는 전등불 아래에 여러 사람의 마음 사진을 펼쳐 놓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정치인을,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예술가를, 묵향에 싸여 있는 학자를 기대했던 그는 아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감투와 돈다발과 여체와 그리고 또 안락한 침대와 자동차와 비행기들. 딱 하나 시골의 작은 초가집 뜰에 상치며 쑥갓이며 부추가 잘 자라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할머니의 마음인가 보았습니다. 로봇이 찍혀져 나온 사진은 아이의 것일 테고.

 

그는 마음 찍는 사진기를 들고 수도자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수도자가 기도 중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자를 찍었습니다. 수도자가 조용히 눈을 떴습니다.

"그래, 하시는 일은 성과가 있으신가요?"

"네. 이 카메라가 바로 마음을 찍는 사진기입니다. 그런데 거리에 나가서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 인화해 보니 한심스러운 것들 뿐이었습니다. 감투나 돈다발…. 그리고 남자인 경우에는 여자가, 여자인 경우에는 남자가 찍혀져 나왔습니다. 심지어 정의로운 삶을 살겠다고,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 때 수도자가 말을 가로챘습니다.

"아니, 그런데 그 사진기는 왜 여기까지 가지고 왔습니까?"

"수도자님을 찍으려구요. 마음다운 마음을 찍고 싶어서 아까 수도자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이미 찍었습니다."

"뭐라구요? 그건 안 됩니다. 그 사진기를 이리 주세요."

"아니, 왜 그러십니까? 저는 마음다운 마음을…."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수도자는 그의 손에서 마음 찍는 사진기를 빼앗아 내동댕이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건 어느 것보다도 악마가 들어가서 장난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이후로는 절대 이런 것을 만들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신의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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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팬지 화분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제비풀이 있었습니다. 화분이 꽃집에서 이 집으로 팔려 왔을 때 화분에는 팬지꽃 혼자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병아리 솜털 같은 봄볕이 며칠 계속해서 내려쬐인 화분에서 제비풀이 쏘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니, 넌 누구야? 어떻게 여기에 숨어 들어왔지?"

팬지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숨어 들어온 것이 아냐요. 억울하게 묻혀 들어온 것이야요."

"뭐라구? 숨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묻혀 들어왔다고?"

"정말예요. 우리는 봄을 기다리며 평화롭게 겨울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꽃집 아저씨가 마차를 타고 들로 나왔어요. 그러고는 자고 있는 나랑 내 이부자리인 흙을 한꺼번에 퍼 담은 것이었어요. 우리가 실려간 곳은 꽃집의 온실이었어요. 그 곳에서 당신이 화분에 심어질 때 우리 고향 흙이 사용된 거란 말예요. 그러니 이부자리 속에 묻혀 올 수밖에요."

제비풀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말하자 팬지의 퍼런 서슬은 수그러졌습니다.

"그건 그렇겠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은 널 보고 거름 주고 물 주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네가 내 거름을 축내고 있다는 걸 알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왜 가만 두지 않을까요? 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거름도 귀퉁이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먹잖아요."

"한 마디로 말해서 넌 볼품이 없는 풀이거든."

"왜 볼품이 없어요. 오월이 되면 작을망정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요."

"하하하…. 얘가 날 웃기는데. 네 꽃이 우리 꽃을 당할 성 싶으냐? 우리는 꽃이 예쁘다고 소문 나서 먼 나라에서 수입된 꽃이란 말이야."

제비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외국에서 들여 와 온실에서 보호받고 자랄 만큼 예쁜 꽃나무라는데 그런 꽃나무와 견준다는 것은 들판에서 자란 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날 이후, 제비풀은 팬지가 말을 걸어도, 약을 올려도 대꾸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저 한 쪽 귀퉁이에서 없는 긋이 숨을 죽이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물을 주러 나온 주인한테 제비풀은 들키고 말았습니다.

"잡초가 있었군. 뽑아 버려야겠어."

주인의 커다란 손이 제비풀을 향해서 다가왔습니다.

'아, 아! 엄마.'

제비풀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아빠, 안 돼요. 그 작은 풀을 뽑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며 막아서는 아이는 이 집의 아들인 승태였습니다.

"안 되다니? 이건 잡초야. 이런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하는 거야."

"그래도 안 돼요. 어른이 있으면 아이도 있듯이 이런 풀도 있어야 해요."

"어른이 있으면 아이도 있듯이…. 이런 풀도 있어야 한다…. 그래, 네 말도 맞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제비풀은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승태를 보게 되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어떤 때는 승태가 물조리를 들고 와서 뿌리가 흠뻑 젖도록 물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제비풀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나도 이젠 살 만 해'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뽐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4월 어느 날, 소나기가 지나간 날 한낮이었습니다.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팬지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리가 승태는 그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팬지꽃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 때부터 승태는 제비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승태는 팬지꽃한테만 눈을 멈추고 팬지꽃 앞에서만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승태가 팬지꽃 곁에서 그 환한 미소를 지을 때면 제비풀은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비풀은 참도 또 참았습니다. 아니, 자신은 정말로 시시한 풀이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팬지꽃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면서 울먹일 때가 많았습니다.

 

"용기를 가져. 넌 제비풀로서 그만하면 훌륭한 거야."

"그러나 내가 미운 걸 어떻게 해요."

"바보 같은 소리. 너도 꽃을 가진 풀이야. 귀를 기울이고 네 몸 속의 소리를 들어 봐. 꽃을 피워 내려고 열심히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소리가 들릴 거야."

선인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집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지금은 늙어서 반 쪽이 꺼멓게 썩어 들어간 몸이지만, 그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비풀은 선인장한테 물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꽃잎이 크고, 빛깔이 진하고 향기가 많이 나면, 그러면 아름다운 건가요?"

"그런 것은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럼 진짜 아름다움이란 어떤 건가요?"

"아름다움이란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가가 아니야. 진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게 좋은 뜻을 보여 주고 그 뜻이 상대의 마음 속에 더 좋은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빛남이야."

"그럼 나 같은 못난이는 그런 아름다움을 가질 기회가 없겠네요."

"아니야. 네가 품은 좋은 뜻이 누구한테로 가서 좀 더 퍼질 수 있다면, 너도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어. 이를테면 승태가 너를 보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든지 하면…."

제비풀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일어날 만남이 자기에게는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굳게 가졌습니다. 햇볕을 좀 더 받기 위해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고, 팬지꽃이 예쁘다고 해서 아양을 떨지도 않았습니다. 선인장이 가르쳐 준 아름다움만 생각하였습니다. 좋은 뜻을 가지려는, 그리고 좋은 것을 보려는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비와 바람을 맞아들였습니다.

 

5월이 되었습니다. 화분들이 모여 있는 베란다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승태가 앓아 눕게 되어서 집안 식구들의 마음이 그 쪽으로만 쏠렸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얼굴에 열꽃이 핀 승태 곁에 붙어 앉아 '힘을 내 승태야, 힘을 내'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루…. 사흘…. 닷새….

물을 얻어먹지 못한 꽃들은 하나 하나 시들어 갔습니다. 팬지, 제라늄, 튤립, 온실에서 자란 꽃나무들이 먼저 시들었습니다. 오직 제비풀 하나만이 꼿꼿하게 참고 버티어 냈습니다. 아니, 견디는 것 뿐만이 아니고 별 같은 꽃봉오리까지 부풀렸습니다. 그것은 벌이 꽃에서 꿀을 따듯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맑은 비와 상큼한 바람 속에서 제비풀이 따 들인 사랑의 모임이었습니다. 드디어 제비풀한테서 꽃이 마악 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창가에 누운 승태의 눈길이 제비꽃 언저리에 가 닿았습니다.

"그래, 나도 참고 이겨 낼 테다."

승태가 제비꽃을 보고 말했습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승태 아빠가 앓고 있는 승태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저 꽃을 보고 한 다짐이에요."

"꽃이라니 무슨 꽃 말이냐? 팬지도 제라늄도 시들어 버렸는데…."

"팬지 화분 귀퉁이에 별 같이 작은 꽃이 있잖아요?"

"오오! 정말…. 정말 아름다운 꽃이구나."

승태 아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비꽃이 피어 있는 화분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들어 승태의 머리맡에 놓았습니다.

승태의 두 눈 속에는 제비꽃이, 제비꽃 가장자리에는 승태의 눈이 빛이 되어 반짝 반짝 빛을 튀기며 만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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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바람, 달빛 든 저 대금

 

무지개가 자주 숨는 돌밭이 있었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거나 비가 그친 다음, 햇빛 한 켜 저만큼에 하늘의 다리처럼 내걸리는 무지개.

두메 마을 아이들은 무지개를 향해 달렸습니다. 논두렁길을 지나고, 밭두렁길을 지나고, 그리하여 산모퉁이를 돌면 무지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거기는 늘 황량한 돌밭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이런 데로 숨어 버리다니…."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바람조차도 쉬어 갈 데가 없는, 햇빛도 메마르기만 한 돌밭이었으니까요.

"무지개의 뿌리가 여기 어디에 있을 거야."

아이들은 더러 돌을 들어 내면서 무지개의 뿌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내면 또 다른 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간혹 길을 잘못 든 솔씨나 억새씨는 보였으나 무지개의 일곱 빛 찬란한 뿌리는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실망하여 돌멩이를 차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죽순은 땅 속에서부터 애를 먹었습니다. 돌비탈인지라 물기도 적었고, 거름 부스러기도 없었습니다.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도 돌이 괴었고 뻗으려는 발부리에는 혹만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기운이 모아졌는데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죽순은 불끈 일어나려고 하다가 머리를 받혔습니다. 정수리가 얼얼할 만큼 아팠습니다.

'이렇게 딱딱한 땅이 있을까?'

죽순은 다시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죽순의 머리 끝만 뭉개지고 말았습니다.

'아하, 이건 흙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그래, 이건 바위다.'

그제서야 죽순은 저를 막고 있는 임자를 알아 보았습니다.

'이 바위를 어떻게 뚫고 나간단 말인가?'

죽순은 고통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깥 세상에 한 번 나가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다니….'

 

이 때, 곁에 있던 까만 솔씨가 죽순한테 말을 걸었습니다.

"슬퍼하지 마. 우리가 이길 수도 있을 거야."

"어떻게 우리가 이긴단 말이니? 저건 바위라고. 우리 같이 약한 식물이 어떻게 저 깜깜한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위대하다고 했어."

"그럼 너희 같은 작은 솔씨가 바위를 이긴 적이 있단 말이니?"

"이겼다고 했어. 우리 할머니만 해도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오백 살까지 사셨거든."

"오백 살이나?"

죽순은 놀랐습니다. 소나무가 바위 틈에서 오백 살을 먹도록 살았다면, 죽순도 바위를 뚫고 나설 힘이 생기리라 믿었습니다. 믿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했지요. 믿음은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니까요.

이 날 이후부터 죽순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모아지는 대로 계속 밀어 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면서 번개가 일고 천둥이 쳤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날 치고 이렇게 험한 날도 드물었습니다.

우르릉 꽝, 우르릉 꽈앙, 하늘이 깨어지는 듯 요란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딱, 하고 하늘의 칼날이 땅의 것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벼락. 그렇습니다. 벼락이 친 것입니다.

죽순은 귀가 멍멍하였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서 그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풀씨들 놀라겠다. 아니, 늦잠 자는 개구리를 깨우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지.'

죽순은 땅 속으로 스며드는 물을 밤새 받아 먹었습니다. 아랫배에다 다시 서서히 힘을 모았습니다. 번갯살 같기도 하고, 천둥 같기도 한 것들을. 죽순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저는 이대로 여기서 잦아지고 싶지 않습니다. 땅 위로 나가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내어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에게는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하느님께는 기쁨이 되는 그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먼동이 틀 무렵이었습니다. 죽순은 있는 힘을 다해서 해가 솟구치듯 불끈 일어났습니다.

"아!"

죽순은 환희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죽순의 머리 위에 비로소 푸른 하늘이 펼쳐진 것입니다. 어느 한 곳이 비거나 구겨지지도 않은 저 하늘. 그리고 뒤편으로는 산봉우리가 높았고, 아래로는 은빛 나는 냇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정말 죽순이 꿈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습니다.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한 움큼 나와서 죽순의 몸매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산새들이 지지배배 지지배배 축하의 노래를 불러 주었고, 동쪽으로부터 장엄한 햇살이 밀려 왔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벼락을 쳐서 바위를 깨뜨리고 저를 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오게 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한낮은 뜨거웠으나 신비로웠고, 밤은 어두웠으나 은은하였습니다. 잎과 가지 사이에서 가슴 안 쪽의 빛깔로 밀어 올리는 속살이 꽃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할미꽃과 진달래꽃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죽순의 이 행복한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대나무로 몸매가 바뀌면서 차츰 불평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낮의 햇빛은 너무 눈부셨고, 밤의 어둠은 너무 캄캄하였습니다. 바람은 너무 흔들어 대서 귀찮았고, 산새들도 아무 데나 똥을 싸는 것이 싫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나무는 다른 대나무에 비해 형편 없이 못난 제 모습에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바위 틈으로 나오느라고 뭉개져 버린 머리, 그리고 푸른 대나무들하고는 영 다른 검은 살갗. 거기에다 집터도 응달에다 돌밭이었습니다.

'몸은 또 어떤가? 발목이 약하고 쌍골이며 마디마디 옹골차기 때문에 소소한 바람 한낱에도 온 몸이 흔들려 하지 않는가.'

검은 대는 자기의 못난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습니다.

'저 아래 왕대는 얼마나 매끈하게 아름다운가. 그리고 집터도 양지에 기름진 땅이 아닌가.'

한 가지 검은 대한테 위로 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친구 소가 한 마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는 고삐에 매인 채 언덕에서 풀을 뜯다가도 쉴 때면 꼭 검은 대 곁에 와서 쉬었습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면서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검은 대는 조용히 달빛처럼 번져드는 평화를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어서 못 오는 날은 들녘에서라도 "음메에" 하고 울음을 보내 왔는데 그럴 때면 대나무도 가슴에 저미는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은 꾸준히 걸음을 걸었습니다. 진달래가 피고 지고 산나리가 피고…. 지고 그리고 낙엽 위로 눈이 내리고, 다시 봄이 오고….

그 동안에 소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간혹 바람 속에서 그리운 그 소의 메아리 울음 같은 북소리가 들려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대나무는 온 몸을 흔들었습니다. 저도 저 북소리와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나무 잎사귀와 잎사귀가 흔들려서 나는 겉소리일 뿐이었습니다. 대나무 속에 든 솔, 바람 그리고 달빛 젖은 그리움이 소리로 되어지지 않아서 대나무는 답답하였습니다. 그저 달빛 속에 흔들리는 자기의 그림자나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죽어서 소의 메아리가 들어 있는 북과 살게 된다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겠는데….'

그러나 그런 행운이 쉬이 나타날 것 같지 않아서 검은 대는 슬펐습니다.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높은 산에서 내려온 듯한 두 마리의 새가 검은 대 위에서 쉬었습니다. 선생인 듯한 어른 새가 어린 새에게 말하였습니다.

"요즈음 젊은 새들은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살면 그 삶 자체로 그가 되는 것인데."

"어떻게 말입니까?"

"네가 올빼이라면 넌 올빼미 그 자체인 거야. 그런데 올빼미가 부엉이 흉내를 내어서 산다고 해 봐. 올빼미의 삶도 아니고 부엉이의 삶도 아니지. 너는 너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야 해. 그것이 잘 사는 거야."

검은 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 나는 나대로 살아야겠다. 기름진 양지 쪽의 터를 부러워 할 건 없어. 왕대는 왕대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거야.'

그제서야 검은 대는 주변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습니다. 응달이지만 해가 막 떠오르면서 얼마 동안 전나무 잎새로 새어 드는 빛살은 그에게 왕관의 영락을 보는 듯한 황홀감을 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서 띄운 노을이 어쩌다 댓잎에라도 묻어들면 저절로 낮은 음이 고여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먼 데서 북소리가 아련히 들려 오곤 했습니다.

밤이면 하늘 가장 먼 데서 반짝이는 별하고 눈을 맞추는 검은 대였습니다. 달빛도 새벽 달빛이 오래 머물곤 하였습니다. 한낮에도 더러 이내(안개)가 잎 위에 머물렀고 아기 바람은 아예 검은 대한테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봄눈이 검은 대의 발부리에 녹아 들면서 매화가 벙그는 아침이었습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눈이 맑은 사람이 조용히 산자락을 밟고 올라와 검은 대 앞에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달밤에 두 가닥으로 보이던 쌍골대를 이제야 찾았군요. 이것으로 대금을 만들어 산조를 불면 달이 일천강에 흘러 들 것입니다."

 

올해 남산 기슭에는 유난히도 무지개가 자주 선다고 하였습니다. 비가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무지개가 걸린다고들 사람들은 신기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는 무꽃처럼 별이 새하얗게 뜬 밤에 무지개를 보았다고 우겼습니다.

"무지개는 밤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란다. 빛 속을 햇빛이 비쳐 들어서 건너편의 사람들에게 일곱 색의 구름다리처럼 보이는 것이 무지개인 게야."

그러나 아이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지개를 붙들어 달라고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나한테도 무지개를 잡겠다고 뛰어 다녔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향 메밀곶에서였지요. 그 때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지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람만 빈 돌밭을 울리고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외진 적막함과 함께.

 

나는 아이의 손목을 쥐고 무지개가 서 있는 남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산 기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지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국립 극장만이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이가, 저 집안에 무지개가 있을지 모른다며 다시 칭얼댔습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대금 산조'가 연주된다는 극장의 표를 끊었습니다.

연주자의 대금에 얽힌 설명이 안내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천하 명기인 이 대금은 쌍골 검은 대이며, 막 바람이 와 닿는 산골 응달의 단단한 땅에서 자란 대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맑고 옹골차기로 견줄 대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수의 북소리와 함께 대금 산조는 어우러졌습니다. 전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새벽 달빛 같은, 높은 산골짜기에 배인 푸르스름한 이내 같은 소리에 취해 있는 나에게 아이가 가만히 말하였습니다.

"저 봐요. 무지개가 저기 저 대금에서 기어나오고 있어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