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지혜의 나무 - 앙리 구고

저자 앙리 구고

1936년 까르까손느에서 태어났다.

단편집 <사후세계의 영역들(Dépatements et territoire d'outre-mort)>로 단편문학상(Bourse Goncourt de la nouvelle)을 수상했으며,

<불의 발견자(Le touveur de feu)>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수상하는 쥬베날(Jouvenel) 상을 받기도 했다.

쟝 페라, 쥴리엣 그레코, 세르쥬 레기아니 등에게 노랫말을 지어 주기도 하였으며,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France-Inter)>에서 '고귀한 말투(Le Grand Parler)', '여기 어둠이(Ici l'ombre)',

'모든 건 결국 진실로 끝난다(Tout finit par être vrai)'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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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어머니

프랑스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그리고 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날 무렵, 한 여인이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뱃속에 든 아기였다. 그러면 누가 그 아기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의 침묵이었다. 그럼 그 침묵에게 이야기를 해 준 것은 누구일까?

 

아득한 옛날, 이 세상이 막 창조되었을 때, 어느 깊은 산 속에 난폭한 나무꾼과 그의 슬픈 아내가 살았다. 그들은 숲 속 빈 터 한가운데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웃이라고는 주위의 산짐승 뿐이었고, 지나가는 것은 오직 바람과 비와 햇살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나무꾼의 슬픈 아내가 부엌에서 남 몰래 흐느끼곤 했던 것은 그런 단조로운 생활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단조로움 뿐이었다면 그녀는 궂으나 좋으나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의 남편은 마치 어두운 덤불 숲을 보는 듯 사악하고 불길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내를 매만지는 남편의 손길은 날카롭기가 마치 엉겅퀴 풀 같았고, 그것도 반드시 그녀를 심하게 매질하고 난 다음에야 껴안아 주곤 했다. 남편은 매일 저녁 숲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매질을 했다. 어깻짓으로 문을 쾅 하고 밀어젖히고, 한 손에는 굵은 떡갈나무 방망이를 움켜쥔 채 그는 들어왔다. 그리고 오른 팔을 걷어 붙이고는, 한 쪽 구석에서 떨고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매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매일 밤 하는 저녁 인사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허구한 세월이 흘러갔고, 그만큼 수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나무꾼의 아내는 말 한 마디 않고 매일 저녁 퍼부어지는 그 매질들을 참고 견뎌 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도끼를 두른 채 수풀 사이로 멀어져 가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자기 아랫배로 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막 자기 뱃속에서 어떤 새로운 생명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아가야!' 하고, 그녀는 황홀한 놀라움 속에 떨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같은 행복의 순간은 짧았다. 이제껏 견디어 왔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모질고 고통스러운 일이 그녀의 눈 앞에 곧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것. 이제 남편이 날 또 때릴 텐데, 그 매가 너한테까지 미치겠지. 아마 네가 이 세상에 채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널 죽일는지도 모르겠구나. 누가 네 목숨을 구해 준담? 내가 매를 더 안 맞기만 하면 되지. 그렇지만 어떻게? 하느님, 대체 어떻게 내가 매를 더 이상 안 맞게 된단 말인가!'

그녀는 앞으로 태어날 자기 아이에 대한 새로운 사랑과 근심의 힘을 빌어 하루 내내 그에 대한 묘안을 짜 내고자 골몰했다. 그러자 저녁 무렵 마침내 한 줄기 서광이 그녀의 마음 속을 비추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는 자기 남편이 돌아오는 길목을 살폈다. 황혼이 지고 사방이 어둑해지자 여느 때처럼 남편은 일터에서 돌아왔다. 또 다시 그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으르렁대며 이제 막 아내를 내리칠 찰나였다. 바로 그 때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여보. 제발 기다리세요! 제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었거든요. 아주 아름다운 얘기예요. 우선 그 얘기 먼저 들어 보신 다음에, 그 다음에 절 때리셔도 늦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당장 자기가 말해야 할 그 이야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아무튼 어떤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참으로 순박하고 우스꽝스런 옛날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남편은 그녀 앞에 끌려 온 포로인 양 얼빠진 태도로 열심히 듣고 나더니, 아주 흡족해져서 그녀의 등에 매질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밤 새도록 그녀는 이야기했고, 밤 새도록 남편은 둥그렇게 뜬 눈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새 아침의 햇살이 천장을 비추자 그제서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한숨을 쉬더니, 밖이 새벽녘인 것을 보고는 도끼를 허리에 두르고 일터로 나가 버렸다.

저녁 무렵 남편은 다시 돌아왔고, 그녀는 남편이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는 소리를 들었다. 남편에게로 내닫듯 다가간 그녀는 또 다시 말했다.

"잠깐만요, 여보! 오늘은 당신께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어요. 우선 그 얘기를 들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절 때리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놀라운 입에서는 새로운 이야기 하나가 흘러 나왔다. 그 밤이 다 지나도록 남편은 또 다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먹은 보이지 않는 어떤 마력의 실로 공중에 묶인 채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시간은 마치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아내는 침묵했고, 남편은 날이 밝은 것을 보고는 일하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끼를 집어 든 다음 밖으로 나갔다.

 

저녁 그늘이 지자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홉 달 동안, 밤마다 나무꾼의 아내는 매일 자기 뱃속에 든 생명을 보호할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자 남편은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태어나자마자, 지나간 아홉 달 동안의 이야기들이 이 땅에 흘러 들었다. 그 이야기들을 세상에 가져다 준 태초의 어머니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이 땅은 오로지 몽둥이만이 말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리라.

 

 

 

 

 

 

 

궤짝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를 루브(이리 암컷)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괴상하게 생겼다거나 성질이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품위 있는 귀부인인 그녀는 오히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노인네들까지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껏 누구도, 그저 슬그머니라도 그녀의 길고 하얀 손을 만져 보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건장하고 험상궂게 생긴 그녀의 남편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기로였다. 사람들은 그를 루(늑대, 이리)라고 불렀고, 그의 참한 아내가 루브라 불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기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숲 속 길 옆의 버려진 성에서 살았다. 그는 자기처럼 거칠고 험악한 동료 몇 명 이외에는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다. 루브와 우정을 나눌 만한 이들은, 가끔씩 그녀의 채마밭에 와서 노래도 부르고 재주 부리며 춤도 추는 떠돌이 광대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 광대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꿈 같은 그들의 자유가 부러웠다. 물론 겉으로는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척했다. 혹시나 남편 기로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다가 무슨 흉계라도 꾸미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골짜기 너머로 다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녀는 그 모습을 마음 속에 간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브는 숲 속의 오솔길을 거닐다가 아주 괴상하고 무섭게 생긴 괴물과 갑자기 맞닥뜨렸다. 그녀는 도망치려 했는데, "부인, 잠깐만 자비를 베푸십시오."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깜짝 놀라서 멈춰 선 루브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괴물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끔찍스렁 몰골이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늑대 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루브는 두려움에 떨며 머뭇머뭇 말했다.

"당신을 알아요."

"내 이름은 비탈리스요. 언젠가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지요. 당신만을 위해서. 성 요한 성당에서였지요."

"물론 기억해요. 하지만 동물처럼 그런 가죽을 쓰고,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죠?"

그 남자는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진이 빠진 것 같아 보였다. 루브는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게 한 다음 두터운 양모로 옷을 입히고, 잘 구운 고기를 대접했다. 기로는 멀리 멧돼지 사냥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비탈리스, 이젠 말해 봐요."

그 남자, 비탈리스는 루브를 쭉 사랑해 왔노라고 말했다. 성 요한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난 뒤부터 더 이상 다른 광대 일행과 떠돌아 다닐 수가 없었노라고, 또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루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멀리 떠나 버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떠돌이 광대 신분인 비탈리스가 루브 같은 고귀한 부인 곁에서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탈리스는 숲에 머무르면서, 들키지 않고 가끔씩 그녀를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기를 원했다. 늑대 가죽을 뒤집어 쓴 것은 오로지 그의 루브를 떠받들기 위해서였다. 가죽을 쓴 비탈리스는 숲의 짐승과 나무들에게, 아니 세상 모두에게 '자, 보아라, 나는 그녀의 것이다' 라고 말해 왔던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난 비탈리스는 루브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루브의 눈물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리고 얼굴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꿈 밖에 실제로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나는 꿈 속에서 이미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고 루브는 말했다.

창 밖에서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루브의 닫힌 방에서, 두 사람의 하룻밤은 길고도 아름다웠다.

 

아침이 되어 기로는 사냥에서 돌아왔다. 그는 아내가 어젯밤에 어떤 여행자를 초대했다는 말을 늙은 하녀에게서 들었다. 하녀는 그 사내가 저녁 식사 후에도 집을 떠나지 않았으며, 순례 행자들이 묵게 되어 있는 성당으로 가지도 않았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기로는 벌컥 성을 내며 물었다.

"그럼 그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녀는 루브가 기거하는 방의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로는 잠시 얼이 나간 듯 서 있더니, 이빨을 으드득거리면서 루브의 방을 향해 올라갔다. 계단 위에 곧 루브의 모습이 나타났다.

"부인, 어젯밤 혼자 잤소?"

루브는 창백한 얼굴로 떨면서, 그러나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남편을 내려다 보았다. 격노한 기로는 단 걸음에 방문을 열어 제치고 나서, 천천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침대 위는 어지러웠고 이불보는 구겨져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기로는 계속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벽 한 쪽에 떡갈나무로 된 길다란 궤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인, 저걸 여시오. 만일 저 안에 내가 봐선 안 될 그 뭔가가 들어 있다면, 그 날로 부인은 신 앞에 마지막 기도를 올려야 될 거요."

루브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기로는 검은 눈빛으로 아내를 살폈고 그 눈에는 오만과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루브가 입을 열었다.

"나리,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 그리고 그렇듯 천한 일에 허리를 굽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겠다면, 당신께서 직접 열어 보세요."

루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로는 궤짝을 향해 두 걸음 다가섰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부인, 이 안에 남자가 숨어 있지 않다고만 말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리다."

"나리, 그러니 어서 절 죽이고 제 가슴을 꺼내 열어 보세요. 제 비밀이 묻힌 곳은 다른 어디가 아니라 바로 거기니까요."

기로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자신의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는 그녀의 두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부인, 그냥 간직하고 계시오. 난 전혀 알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기로는 문가로 가서 하인을 불렀고, 하인이 나타나자 궤짝을 정원으로 가져다 깊이 파묻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궤짝은 땅 속에 깊이 묻혔다. 그 안에 루브의 연인이 숨어 있었는지 어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 전에 방을 빠져 나갔으리라. 루브는 그랬기만을 바랐다.

세월은 또 다시 흘렀다. 아무도 그 저주 받은 아침의 일을 다시 끄집어 내지 않았다. 1년 뒤 루브는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노변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먼 곳에서, 누군가 그녀로 하여금 남편도, 성도, 그리고 귀족의 그 무거운 위엄마저도 다 잊어버리게 했는지 기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나무와 강

프랑스

 

소년과 소녀, 두 아이가 살았다. 그들은 서로 우정 어린 마음을 나누었다. 소년은 자기 숙부인 또르 쉔느(떡갈나무를 자르는 사람이라는 뜻)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숙부는 툭하면 고함을 잘 치는 고약한 나무꾼이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조카를 침대 밖으로 몰아내며 으르렁거리곤 했다. "숲에 가서 나무를 해 와!"

그러면 소년은 숲으로 가서 저녁 늦게까지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소녀는 날마다 정오가 되면 강가에서 소년을 기다렸다. 그녀는 자갈을 들추며 송어를 잡곤 했다. 가끔씩 가재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런 하잘것 없는 고기잡이가 소녀의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소녀는 자기가 하는 일 때문에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물 속을 돌아다니는 고기들의 은빛 비늘과 매끄러운 헤엄질을 사랑했던 것이다.

"이것 좀 봐." 하고 소녀가 작은 나무꾼 친구에게 말하면, 소년은 말 없이 물 속을 굽어 보곤 했다. 그리고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을 서로에게 눈빛으로 전달하려 애썼다.

때때로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다른 날이야. 난 나도 잘 모르는 다른 데로 가게 돼."

그러면 소녀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뭔가를 생각했다. 그 '다른 날'이 지나고 다시 만나게 되자,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난 어제 물살을 거스르며 산 위로 올라가는 네 모습을 봤어. 너는 금빛 비늘을 가졌더구나. 물 속에 사는 다른 짐승들이 모두 네 뒤를 따르던걸."

그러면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 내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있을 때 네 모습이 보였어. 너는 떡갈나무였고, 네 가지들은 아주 높고 눈부셨어. 숲 속에 사는 나무들이 전부 네 옆에 둘러 서 있었지. 마치 바람이 너의 잎사귀들을 스치며 내는 그 소리를 들어 보려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그런 꿈을 꿨어." 하고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같은 꿈 속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강가에 앉아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갑자기 숲 속 오솔길 사이로 또르 쉔느의 거대한 모습이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놈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이게 일한다는 거냐?"

손에 든 쇠 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그는 계속 소리쳤다.

"장작을 엉망으로 묶어 놨구나. 이 놈아, 가늘고 푸른 나뭇가지로 아주 단단히 매라고 했잖아."

"아저씨,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하고 소년이 대답했다.

"내가 칼을 들이댈 때마다 살아 있는 나무가 신음하면서 자비를 구하는 소리를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는걸요."

그러자 옆에서 소녀가 떨면서 말했다.

"내가 잡는 물고기들도 그렇게 애원을 해요.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잡은 걸 다시 강에다 놓아 줘요."

"닥쳐! 이 물의 계집애야." 하고 또르 쉔느가 잡아먹을 듯이 소리쳤다.

"네가 내 조카를 못 쓰게 만들고 있어. 너 때문에 저 애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거야. 네가 누군지 난 잘 안다, 이 마녀야. 언젠가는 널 잡아 먹을 테다. 널 잡아 비늘을 벗겨서 튀김을 해 먹을 테다!"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또르 쉔느는 아무 말도 않고 어깨에 커다란 자루를 둘러 메더니 집을 나섰다. 소년은 놀라서 뒤를 쫓아갔다. 소년은 숙부가 강 위에 검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물고기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려 퍼덕이며 올라왔다. 금빛을 내는 눈부신 물고기였다. 그러자 소년의 마음 속에서 어떤 커다란 신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좋은 친구였던 그 소녀는 물의 공주였다. 그녀는 이제 잡혔고, 아마도 강둑 풀밭 위에서 죽어 가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소년은 마음이 다급했다. 그는 정신 없이 숙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또르 쉔느는 소년을 멀리 내동댕이 쳤다. 소년의 두 다리는 땅 속에 깊이 박혔다. 그러자 주위의 나무들이 폭풍우처럼 가지를 흔들며 소년을 도우러 몰려 들었다. 또르 쉔느는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도끼를 꺼내 들고 다시 뛰쳐 나왔다. 마치 지옥에서 살아 나온 티탄처럼, 또르 쉔느는 숲 속 여기 저기를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온갖 수풀들이 그의 발걸음을 막았으나 소용 없었다. 나무는 쓰러지고, 풀들은 짓밟혔다.

풀려난 물의 여왕이 이 광경을 보았다. 다른 형제 나무들이 모두 쓰러진 가운데, 오로지 빛나는 금빛 가지를 가진 떡갈나무 하나만이 우뚝 서 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숲의 왕자(소년은 자신이 바로 숲의 왕자였다는 것을 알았을까?)는 이제 곧 쓰러질 참이었다. 물의 여왕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온갖 개울물과 샘물, 강물들을 불러냈다. 그러자 물들이 그녀 주위에 모여 강둑은 넘실거렸고, 마침내 또르 쉔느를 물 속에 끌어 들였다. 그의 몸뚱이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갔다.

 

물의 여왕과 숲의 왕자는, 다시 전처럼 매일같이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든든한 우정으로 굳게 맺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통과 요통,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코르시카

 

두통과 요통, 그리고 죽음, 이렇게 셋이 어느 날 같이 여행을 가게 되었다. 평소 그들은 서로 자주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우연한 만남을 축하하는 뜻에서 어디 가서 근사한 식사라도 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마침 그들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무슨 걱정이람. 저 자갈밭 너머에 사는 목자한테 가서 양 한 마리만 달라고 해 보자구. 조금만 겁을 줘도 순순히 내놓을 거야."

 

목자는 그늘 밑에 앉아 빵과 치즈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두통이 다가가서 인사를 한 후, 눈빛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양들이군."

"뭐 불평할 게 거의 없지요." 하고 목자가 대답했다.

"그 중 한 마리만 갖고 싶은데, 제일 통통한 놈으로."

"돈만 낸다면야 가져가게 해 주겠소."

"허, 돈을 내라구?" 하고 두통이 빈정거렸다.

"이 양반아, 내가 누군 줄 알아?"

"모르오." 목자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건 상관 없소."

"나는 두통이라고 하지. 만일 양 한 마리를 주지 않으면 네 머릿속에 들어갈 테다."

"조금도 겁나지 않소."

목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갖고 있던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두통은 투덜거리며 그의 골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이리저리 날뛰었다. 목자의 머리는 순식간에 열과 고통으로 불붙는 듯 했다. 목자는 뜨거워진 이마를 안고 산 아래 있는 개울가로 가서 차가운 물 속에 머리를 담갔다. 두통은 그 즉시 얼어 버렸다. 비에 젖은 고양이 꼴로 비참한 몰골이 되어, 두통은 벌벌 떨면서 도망쳤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온 두통은 기침을 해 대며 말했다.

"그 목자는 나보다 더 강하던걸."

"걱정하지 말게." 하고 요통이 말했다.

"내가 그 자를 눕혀 버리겠어. 나야 차가운 물 따위는 겁나지 않으니까."

요통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목자에게로 갔다.

"안녕하쇼."

"좋은 날씨군요."

야생 라방드(꿀풀과의 반교목)를 씹으면서 목자가 대답했다.

"나는 요통이라고 하네. 양 한 마리를 줘야겠어. 안 그러면 친구, 당신의 늑골을 뚫어 버리겠어."

"당신의 갈 길이나 가시오." 하고 목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요통 정도야 대수롭지 않은 병이오. 그런 식으로는 내게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거요."

요통은 잔뜩 화가 나서 목자의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목자는 커다란 장작 두 개에 불을 붙이고 그 사이에 이불을 편 다음 드러누웠다. 요통은 땀을 흘리며 들들 앓다가 그만 녹아 버렸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요통은 김을 뿜으며 비실비실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다른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쩔뚝거리며 돌아간 그는, "안 되겠어. 그가 날 이겼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죽음이 나섰다.

"나한테는 안 될 거야."

죽음은 이렇게 뻐기면서 목자가 쉬고 있는 바위 뒤로 다가갔다.

"지금 자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뭔지 아나?" 죽음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아니, 모르오." 목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지 당신은 내 맘에 들지 않는군."

"놀랄 일도 아니지, 친구. 나는 죽음이라네."

"내게서 원하는 게 뭐지."

"더도 덜도 말고 양 한 마리면 돼."

"당신한테만큼은 내가 거절할 수가 없군. 양 한 마리를 어서 가져가시오. 아니, 세 마리, 열 마리라도 원하면 다 가져가시오. 대신, 될 수 있는 한 오래 오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잊어 주시오. 난 가난하긴 하지만 삶을 무척 사랑하니까."

그러자 죽음이 말했다.

"나도 네가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그걸 알고 싶다면, 금방 알려 줄 수 있지."

죽음은 목자 앞에다 자기가 둘렀던 커다란 검은 망토를 던졌다. 목자는 곧 자기가 안개에 뒤덮인 어느 광활한 언덕 위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덕 위에는 수백만 개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죽음이 말했다.

"목자 양반, 이게 당신의 촛불이야."

"아, 정말 잘 타고 있군! 제발 부탁인데, 저것이 한 백 년 동안만 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아, 그런 일은 난 못해." 라고 죽음이 말했다.

"내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다야. 촛불이 꺼지면, 나는 가서 그 사람을 데려오지.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목자는 잠시 동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다시 양을 치던 자기 자갈밭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는 내 생명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다는 거냐? 아니, 그렇다면 내가 왜 양 한 마리를 네게 거저 바쳐야 하지? 너한텐 아무 것도 줄 수 없어, 이 망나니야.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전에 어서 썩 꺼지지 못해!"

목자는 갖고 있던 막대기를 들고 공중에 휘둘렀다. 그러자 죽음은 검은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산보다도 더 강하고, 머리카락보다도 더 연약한 그 죽음은, 아마 여지껏 단 한 번도 수탉 울음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는 그런 마을로 영영 숨어 버렸으리라.

 

 

 

할로윈 이야기

플랑드르

 

옛날 어느 바닷가에 아름다운 성이 있었다. 파도와 바위 틈에 자리잡은 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성벽 가장 높은 곳에는 언제나 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로리안느는 매일 그 창가에서 우울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저녁, 굳게 잠긴 방 안에서 불을 쬐고 있던 아버지에게 로리안느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왜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살 수 없나요? 아침만 되면 저 바위 위를 오르내리며 웃고 즐기는 아이들이 보여요. 재미있는 놀이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애들 말예요. 나는 가끔씩 그 애들을 소리쳐 불러 봐요. 그러면 그 애들은 얼굴을 들고 곧 바닷가로 뛰어 들어가지요. 나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에게 손을 뻗쳐 보지만, 새들은 그저 지나갈 뿐이에요. 나는 그저 혼자 울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내 딸 로리안느야,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들과 가장 공들인 장난감, 그리고 가장 예쁜 옷들을 가지고 있지 않니? 말해 보거라. 이것들 말고 무얼 더 가지면 행복하겠니?"

"저는 가난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자유롭게 저 짠 맛 나는 바다 안개 속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기다란 안락 의자에 앉아 머리를 숙인 채 생각했다. 얼굴은 창백해 있었고,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내 딸아, 나는 널 위해서라면 하늘의 달과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단다. 신께 맹세컨대, 그런 것들보다 더 귀한 것이라도 구해 올 마음이 있단다. 하지만 제발 바다로 통하는 철문을 열 생각은 말아 다오! 바닷바람도 파도 소리도 다 잊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아버지, 제가 이렇게 계속 포로처럼 갇혀 있어야만 한다면, 적어도 제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려 주셔야죠."

"비밀스런 이야기가 날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그 고통에서 풀려 나세요. 우리 같이 풀려 나기로 해요, 아버지."

늙은 아비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렇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아, 이런! 언젠가는 네게 진실이 알려지리라 생각했는데, 바로 그 날이 와 버렸구나. 잘 듣거라 내 딸아. 이 바닷가에는 커다란 검은 바위가 있지. 그런데 그건 저주 받은 바위란다. 네 엄마는 널 낳고 난 다음 나를 옆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단다. '여보, 우리 아이 로리안느는 할로윈의 딸이에요' 하고 말이다. 언젠가 네 엄마가 검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바람을 타고 안개 속 멀리에서 무슨 섬 같은 것이 나타났었다더구나. 그 섬에서 '고귀한 얼굴을 가진 부인, 길다란 금발의 여인이여,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내게로 오시오' 하고 네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사람을 홀리는 듯 부드럽고 감미로웠던지, 네 엄마는 저도 모르게 그만 영혼과 육신이 거대한 파도에 실려 할러윈이 살고 있다는 그 섬까지 둥실둥실 떠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네 엄마는 숨을 거두기 전에, 너를 이 성 안에 보호하고 잘 지키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단다. 네가 이 곳을 떠나면 네 마음은 육신을 떠나 결국 그 검은 바위로 달려갈 것이라 했고, 너 역시 거기서, 그 할로윈이 사는 이승 너머의 소리, 너를 애타게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했단다."

 

불 곁에 있던 로리안느는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버지가 방을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혼자 있게 된 그녀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열려진 창문 밖으로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본 별들아, 내 어머니를 데려간 그 신비스런 목소리의 주인인 할로윈이 대체 누군지 말해 다오. 그리고 왜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는지도 말해 다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벙어리였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고, 매일 수 없이 로리안느는 하늘을 향해 물었다.

"내가 사는 것을 본 하늘아, 예쁜 새들아, 즐겁게 부르는 바람아, 할로윈이라는 자는 대체 누구지?"

그러나 매 번 하늘은 말이 없었다. 결국 로리안느는 침묵했고, 너무 오랫동안 침묵한 나머지 병이 들어 버렸다. 의사들이 와서 로리안느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따님이 곧 죽게 생겼습니다, 나리."

그러자 드디어 아버지는 불 옆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어째서 고통스러워 하는지 나는 안다. 네 병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별들이 내린 것이지. 네 눈은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손은 차갑게 식어 가는구나. 벌써 까마귀 떼가 저렇게 몰려들고 있단다. 사랑하는 딸아, 이제 네 삶을 찾아 가거라. 너에게 바다로 통하는 철문의 열쇠를 주겠다. 그리고 여기 내 칼도 함께 가져 가거라. 이것이 널 이끌어 주기를. 이 칼이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실수 없이 그 말에 따라야 한다."

로리안느는 일어나서 아버지를 껴안았고, 곧 계단을 내려가 성 밖으로 뛰쳐 나갔다.

 

바닷바람과 물 안개가 취할 듯 황홀했다. 바닷가로 뛰어간 로리안느는 물거품에 휩싸인 바위들을 뛰어 넘으면서 이야기로만 들어 온 검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로리안느는 바위 꼭대기에서 두 눈을 감고 불어 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멀리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자신의 영혼에서 울리는 것처럼 아주 가깝게 들렸다. 로리안느는 홀로 파도를 마주한 채 그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귀한 얼굴을 한 딸, 금빛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딸아, 나는 너를 기다린다. 내게로 오라! 너는 널 굳게 지키는 네 아비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널 이렇게 갈구하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이 곳의 사람이란다!"

로리안느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잃었고, 제 몸이 안개에 감싸인 바람을 타고 가볍게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느꼈다.

"잘 있거라." 하고 로리안느는 바닷가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짤막한 비상 끝에 그녀는 다시 발 아래에 땅이 닿는 것을 느꼈다. 주위에는 부드럽게 펼쳐진 풀과 꽃이 피어 있는 나무들 뿐이었다. 그 때 높다란 나무 사이로 늠름한 기사가 뛰어 나왔다. 그가 탄 말은 검은 말이었고, 입은 옷은 붉었다. 날카로운 시선은 너무나 맑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로리안느의 마음은 제 몸을 떠나 훌쩍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기사가 로리안느의 앞에 말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바로 할로윈이란다."

"신비한 일이에요." 하고, 숨을 몰아 쉬듯이 로리안느가 대답했다.

"내가 너를 그토록 불렀었다."

"할로윈, 제가 여기 왔어요.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받들겠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 뿐이에요."

할로윈은 두 손으로 살며시 로리안느의 얼굴을 받쳐 들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생명이다."

로리안느는 대답했다. "나의 왕자님, 그건 당신 거예요."

할로윈은 타고 왔던 말 위에 로리안느를 태웠다. 말은 이내 숲 속으로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맑은 햇살 뿐이었다. 그러다가 곧 날이 저물었고, 소슬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할로윈, 저는 너무 지쳤어요. 제발 좀 쉬었다 가요." 하고 로리안느가 말했다.

"시간이 없단다. 숲에서 다른 공주님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이제 곧 아주 길고 달콤한 휴식을 얻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차가운 달빛이 어슴프레 비쳐 왔고, 로리안느는 울먹였다.

"주인님, 저는 온 몸이 다 얼어 붙었어요. 언제나 도착하게 되나요?"

"이제 거의 다 왔다."

하지만 그러고도 말은 좀 더 달렸다. 마침내 어느 커다란 나무 밑에 이르러서야 말은 멈추었다. 할로윈이 말했다.

"자, 저걸 봐라."

로리안느는 할로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나뭇가지들마다 하얀 옷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들이 수도 없이 매달려 있었다.

"저 여인들이 바로 네 동료들이란다." 할로윈이 계속 말했다.

"자, 저 여인들이 웃고 있는 것을 좀 보렴. 네게 환영 인사를 보내는구나. 곧 내가 사랑하는 너 역시 저들 중 하나가 될 거다.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더 높이, 더 가벼이 걸려 있게 되겠지."

"그러니까 저는 죽어야 하나요?"

"너는 생명을 나에게 주지 않았니. 말에서 내려와라. 이리 와서 내 아내가 되어 다오."

할로윈의 목소리는 끔찍하게 차가우면서도 달콤했다. 그들은 마주 보고 땅 위에 섰다. 로리안느는 다급히 아버지에게서 받은 칼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칼아, 내 길잡이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니?"

그러자 칼이 대답했다. "그의 목을 자르세요."

로리안느는 칼을 들고, 할로윈이 손을 잡으려 할 때 그의 목을 내리쳤다. 떨어진 목은 검푸른 수풀 위로 굴러갔다. 그러자 잘린 목에서 마치 갓 태어난 영혼처럼 맑고 순수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 사랑하는 로리안느, 이제 그 칼을 네게 돌리려무나. 죽음 속에서 난 널 기다린다. 죽음 속에서 난 널 원한다!"

두 번째로 로리안느는 속삭였다. "내 길잡이 칼아,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니?"

칼이 대답했다. "그의 팔을 자르세요."

칼이 두 번째로 휘둘러졌다. 그러자 머리도 없고 팔도 끊긴 할로윈의 몸뚱이에서 황급한 듯한, 그러나 여전히 마력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 사랑 로리안느, 이제 그 칼로 널 찌르고 내게로 오렴! 끝없는 세상에서 난 널 기다린다. 널 원한다!"

세 번째로 로리안느는 중얼거렸다. "길잡이 칼아,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말해 다오."

칼이 대답했다. "그의 다리를 자르세요."

로리안느는 그대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할로윈의 몸뚱이는 어두운 바닥과 나뭇가지 사이에 떠 있었다.

"내 순결한 사랑…." 하면서,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인 양 달콤한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날 버리지 마. 난 널 기다린다. 난 널 원한다!"

그 때 커다란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옷의 여인들이 어찌나 구슬프게 애원하는지, 로리안느의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여왕님, 우리들에게 오세요. 세상에서 그만 벗어나세요. 우리는 당신의 왕국에서 당신을 섬기고 모실 시녀들이랍니다!"

그러자 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얘야, 똑바로 서거라! 잘린 팔과 다리를 숲 속에다 뿌린 다음, 머리를 가지고 어서 여길 떠나거라!"

숲 속 여기저기에 할로윈의 사지를 흩뿌린 로리안느는 그의 머리를 손에 들고 말에 올라 탔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미친 듯이 숲 속을 달렸다.

 

새벽녘에 로리안느는 바닷가에 당도했다. 파도 거품이 어두운 바위 틈을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나운 바람을 마주 한 채 웬 등이 굽은 노파가 서 있었다. 노파는 상복처럼 기다란 검은 천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주머니!" 로리안느가 노파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이 섬을 빠져 나갈 수 있나요? 알고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늙은 여인은 할로윈의 머리를 보더니 그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울기 시작했다.

"오, 할로윈!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할로윈. 나는 애타게 당신을 찾아 다녔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구료!"

그리고 나서 잔잔하게 물이 흐르는 근처의 어느 동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저기에 그 사람의 배가 있단다. 그 배를 타고 가렴. 너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나라로 인도해 줄 거다."

바람이 돛에 부풀자 배는 떠났다. 로리안느는 내내 자기 가슴에 그 귀한 머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할로윈, 나는 당신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나라로 데려가요. 난 당신께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니 숨을 거두는 날까지 밤이나 낮이나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로리안느가 아버지의 성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귀향을 환영하는 축하 잔치가 벌어진 방은 성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방이었다. 사람들은 로리안느가 금 쟁반 위에 할로윈의 머리를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로리안느는 그 머리를 자기 옆의 주빈석에 앉혔다. 그리고 모두에게 말했다. 앞으로 할로윈을 내 남편처럼 섬겨 달라고.

 

 

 

프시케

그리스

 

옛날 어느 왕에게 프시케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세상의 모든 미덕으로 빛을 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마치 무한한 어둠처럼 사람을 빠져 들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움을 먹고 자라는 꽃이었다. 자태는 소심해 보이면서도 차분했다. 그 불행이 닥쳐 왔을 때 그녀는 열 여덟 살이었다.

연약하면서도 완벽하게 빚어진 프시케의 얼굴은, 마침내 에로스 신을 감동시켰다. 프시케가 가끔씩 은밀한 몽상을 즐기러 가는 평화로운 정원에서, 에로스는 떡갈나무 뒤에 숨어 그녀를 지켜 보았다. 한 줄기 햇빛이 프시케의 머리카락을 애무하고 있었다. 에로스는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갔다. 그의 불타는 가슴은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만 둘러쳐진 견고한 요새와 같았다. 그런데 마침내 처음으로 그 요새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는 나무 밑에서 오랫동안 프시케를 쳐다보았고, 곧 취한 새처럼 비틀거리며 천상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그는 어머니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말했다.

"인간들 중의 하나가 제 마음을 꿰뚫어 놓았어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머니보다도 더 고귀합니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녀의 두 눈은 질투의 빛으로 번뜩였다.

"그런 여인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아들아?"

에로스는 대답했다. "프시케입니다."

 

즉각 그 소녀가 살고 있는 왕국에는 검은 안개가 뒤덮였다. 눈 앞이 캄캄하게 된 사람들은 태양 빛을 찾았고, 겁에 질린 왕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이런 재앙을 받을 만한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를 신에게 물었다. 아프로디테가 그 앞에 나타나 말했다.

"네 딸 프시케에게 상복을 입혀서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 데려다 놓아라. 이 땅이 끝나는 곳, 구름에서 가장 가까운 바위 위에, 그 아이 혼자만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괴물이 나타나 그 아이를 아내로 삼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봐야만 네 나라는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

왕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었다. 저녁 무렵 프시케는 기다란 행렬에 이끌려 산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다 내려가자 프시케는 커다란 바위 위에 혼자 남았다. 처음 보는 세상 끝의 무한한 암흑 속에서 그녀의 영혼은 점차 꺼져 들어갔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프시케는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금빛 천장 밖에는 볼 수 없었다. 모피로 된 침대 위였다. 프시케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열린 창문 밖으로 넓게 펼쳐진 초원과 푸른 하늘이 보였다. 프시케는 뒤에서 조심스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곁에 누군가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안개 같아 보였다. 갈대처럼 가냘픈 모습으로 미소하고 있던 그가 말했다.

"제 주인님의 궁전에 잘 오셨습니다."

"누구세요?" 하고 프시케가 물었다.

"제피르(바람의 신)라고 합니다. 방금 전 당신이 죽어 가고 있던 그 산 꼭대기에서 날갯짓 한 번으로 당신을 여기에 데려왔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사라졌다. 프시케가 있는 방 안으로는 가끔씩 새들이 들어와 퍼덕거렸다. 프시케는 새들 사이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쉬었다. 밤이 되자 웬 그림자가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사람의 말 소리가 그녀의 관자놀이 옆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내 얼굴을 보려 하지 말아요, 프시케. 안 그러면 날 영영 잃어버리게 될 거요."

이 말이 끝나자 잠자리 위에 어떤 남자가 누웠다. 그의 몸짓은 다정했고, 그의 위로는 가슴 찡하도록 부드러웠다. 그가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도 밝은 빛 아래서 살게 될 것이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프시케는 베개 옆의 그리운 그림자를 찾았다. 그러나 뻗친 손 끝에 만져진 것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빈 자리 뿐이었다. 종들이 들어와서 프시케에게 향유를 뿌렸고, 과일과 우유 그리고 아망드로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프시케는 정원으로 나가 오래 산책했다. 날이 저물자 곧 전날 저녁의 연인이 돌아왔으나, 밤 공기의 어두움보다도 더 희미해서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나마 그의 얼굴을 구석 구석 만져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머리에 상상되는 그의 모습에 만족했다. 프시케는 그의 이마와 날카로운 콧날을 스쳐 가듯 만져 보고는, 다정하게 입술에다 키스했다. 그 입술이 말했다.

"눈을 감아요, 프시케. 당신은 날 봐선 안 돼요."

아침이 되자 침대 위에는 또 다시 프시케 혼자 뿐이었다. 사람들이 날라 온 점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종들도 모두 돌려 보낸 뒤, 프시케는 정원으로 내려갔다. 낮은 길기만 했고 햇볕은 너무 눈부셨다. 밤이 되자 프시케는 보이지 않는 자기의 남편 옆에서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날이 밝기 한 시간 전, 아직 남편이 잠들어 있는 동안 프시케는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등불을 밝히고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의 몸 위로 허리를 굽히고 살펴 보았다. 높게 쳐든 팔 밑에서 불빛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밝게 드러난 얼굴은 바로 에로스의 얼굴이었다. 그 때 뜨거운 촛농이 잠들어 있던 에로스의 맨살 위에 떨어졌다. 에로스는 두 눈을 떴다. 그리고 곧 고개를 뒤로 돌려 버렸다. 프시케는 짧게 탄식하면서 얼른 등불을 껐다. 되찾은 어둠 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은 날 잃었소."

 

회오리 바람이 프시케를 덮쳐다. 멀리서 폭풍우 같은 울음 소리가 들려 왔고 그러다가 눈을 떴다. 모든 이들에게 버림 받고 내팽개쳐졌던 바로 그 산 꼭대기 바위 위였다. 계곡을 밝히던 횃불의 행렬은 하나씩 하나씩 꺼져 가고 있었다. 하늘 높이 기다란 구름이 달을 두 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몸과 함께 영혼까지 얼어붙은 프시케는 바람 소리만을 들었다. 그 소리는 폭포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섞여 들려 왔다. 그녀는 일어서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 그 곳으로 달려갔다. 심연처럼 입을 벌린 끝 없는 구멍이 나타났다. 두 팔을 넓게 벌린 채, 프시케의 가녀린 몸은 그 곳으로 떨어졌다.

마치 독수리 날개 같은 거대한 손길이 자기를 허공으로 밀어 올려, 피어 오르는 안개 너머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새벽이었다. 어느 강 기슭에서 프시케는 눈을 떴다. 구원의 손길이 그녀를 산 아래에 있는 강가 풀밭 위에다 내려놓은 것이리라. 기다란 망토를 두른 늙은 양치기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미소 짓고는 말 없이 마실 것과 빵을 내밀었다. 늙은 양치기는 초원 끝에 보이는 신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신전 문 앞에 프시케를 데려다 놓고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프시케는 신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이미 버려진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바닥에는 두 개의 등불이 타고 있었고, 그 등불 사이에 아프로디테의 상이 있었다. 프시케는 그리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신상의 발에 이마를 대고 은총을 구했다. 그러자 석상의 입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 아들과 내 명예를 훔쳐갔다. 저 산에 가면 금 양이 살고 있다. 그 양 털을 한 줌 뽑아서 내게 가져오면, 네가 여지껏 내게 끼친 잘못을 모두 용서하겠노라."

프시케는 일어나 산으로 갔다. 마치 산짐승이나 구걸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위로 덮인 황야를 오래 걸었다. 마실 물이나 과일 열매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희망도 다 꺼져 버린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어느 평평한 돌 위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프시케의 어깨 위에 내려 앉더니, 금 양의 털 한 웅큼을 떨구어 놓고 날아갔다. 산등성이 위에, 빛나는 금빛 양이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신전으로 돌아온 프시케는 손에 가진 것을 석상 앞에 내밀었다. 아프로디테는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그래도 여전히 괴롭구나. 숲 속 한가운데 있는 빈 터에 용이 지키고 있는 샘이 있는데, 그 물을 한 병 떠서 내게 가져다 줘야겠다."

프시케는 다시 그리로 갔다. 나무 사이를 똑바로 걸어가면서, 밤이 되면 숲 짐승들의 열기와 자갈 돌들의 냉기 속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숲 속 한가운데 있는 빈 터 끝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바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붉고 푸른 몸뚱이를 가진 용이 그 바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용의 머리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가지보다도 높았다. 프시케는 절망하면서, 마치 죽음에게 다가가듯이 용감하게 용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용은 고개를 숙이며 프시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프시케는 병에 물을 가득 채워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무정한 석상 앞에 다가서려 하자,

"아직도 내 가슴 속에는 한 가닥 미움이 남아 있구나." 하고 여신이 중얼거렸다.

"딸아, 사자들에게로 가거라. 지옥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에게 불사의 향이 들어 있는 함을 하나 청하여 받아 오너라. 그걸 가지고 이리로 오면, 너는 저주에서 완전히 풀려 날 것이다."

 

그래서 프시케는 다시 떠났다. 동굴 끝에 이르자 프시케 앞에 있던 돌 문이 저절로 열렸다. 프시케는 사자들의 만질 수 없는 몸뚱아리들을 헤치며 어두운 동굴을 따라 한참 동안 걸어 내려갔다. 동굴 끝에는 하얀 방이 있었다. 그 곳의 왕좌에 앉아 있던 지옥의 여왕 페르세포네는 즉시 프시케에게 함을 건네 주었다. 프시케는 그것을 가지고 발길을 되돌렸다. 그런데 어두운 동굴에서 막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밝은 태양 빛이 프시케의 두 눈을 찔렀다. 프시케는 나뭇가지처럼 비틀거리며 길가에 쓰러졌고, 그 바람에 함이 떨어져 깨져 버렸다. 그러자마자 흰 연기 같은 것이 프시케의 몸을 감쌌다. 프시케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한 알의 무한이 신들의 모래 시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렸다. 프시케는 깨어났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몸을 굽혀 자기를 들여다 보고 있는 에로스의 눈길 뿐이었다.

"당신의 고통은 이제 끝났소." 에로스가 말했다.

두 사람의 눈길은 따스하게 마주쳤다. 그리고 천상의 하늘 위에는 태양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빵 이야기

루마니아

 

초원에서 가축들을 잃어버린 젊은이가 삶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 때 낙엽 더미 밑에서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슬슬 기어 나와 젊은이 앞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 거냐?"

"내 가축들이 다 도망가 버렸어."

뱀은 쉿쉿거리며 말했다.

"잘 들어. 내가 그것들을 몰아서 숲 바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단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해 주면, 너는 앞으로 어떤 다른 여자하고도 사랑하면 안 돼. 안 그러면 너는 완전히 내 것이 되어 버릴 거야. 육신도 영혼도 모두 말이야. 이만한 흥정이면 괜찮겠지?"

"아니,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하고 그는 대답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하겠어. 그 약속은 꼭 지키겠어."

뱀은 가축을 숲 밖으로 몰아서 초원으로 옮겨 놓았다.

 

어느 날, 친구들을 불러 먹고 마시고 하는 자리에서,

"자네도 아내를 얻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 한 친구가 말했다.

젊은이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가 없다네."

그는 커다란 뱀과 맺었던 약속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제안했다.

"겁 내지 말고 결혼하게. 우리들 모두 든든히 무장을 하고 올 테니까. 만일 그 저주 받은 뱀이 잔치를 훼방하러 오면, 우리가 전부 맞붙어 싸우겠네. 그래서 머리를 두 동강 내 버리겠어."

 

그리하여 남자는 자기가 원하던 옆집 처녀를 아내로 맞기로 하였다. 마침내 결혼식 날이 왔다. 마당에 술통과 식탁들이 차려졌고, 하객들이 모여 브라보를 외치며 축배를 들고 있을 때, 뱀이 신랑 신부가 앉은 뒤에서 쓱 나타났다. 뱀은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신랑의 친구들은 그 괴물이 생각보다 너무나도 크고 사나워 보였기 때문에 얼이 빠진 채 자리에 멍청히 앉아 있었다. 감히 칼집에 손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였다. 식탁 한 가운데 있는 소쿠리에서 금빛 나는 빵이 튀어 나오더니, 사람의 머리처럼 갑자기 말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뱀아,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니?"

"나는 이 신랑을 원한다."

"왜 그를 원하는 거지?"

"그는 나랑 계약을 맺었어. 그가 나에게 맹세했단 말이다. 만일 내가 자기를 도와 주면 절대 다른 아내는 얻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는 날 배신했어. 그래서 그의 목숨을 취하려고 이 곳에 왔단다."

"겨우 그만한 일로 그가 죽어야 한단 말이냐?" 하고 빵이 말했다.

"그가 너에게 무슨 해로운 짓이라도 했니? 그건 아니잖아. 나야말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통 받는 게 어떤 건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사람들은 날 땅 속에다 묻는단다. 나는 거기서 밖으로 빠져 나오지. 그리고 혼자 큰단다. 태양이 날 태우고 익히면 난 다 익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커다란 낫으로 날 거둬 들이지. 그리고 나를 단으로 묶어 두었다가, 지푸라기는 버리고 알곡만 가져 간단다. 그 다음에는 날 갈고 빻아서 밀가루로 만들지. 나는 결국엔 반죽이 되어 화덕에 들어가게 된단다. 나는 불에 타면서 뜨거움을 알았고, 캄캄한 암흑 속에서 두려움을 알았지. 내가 그 고통을 모두 겪었던 것은 네가 지금 여기 식탁 위에서 보는 것 같은 빵이 되기 위해서였어. 그래,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그 모든 고통을 참아 낸 거야. 뱀아, 너도 한 번 그렇게 해 보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뱀의 머리는 식탁 위에 떨어졌고, 몸뚱아리는 둘로 갈라졌다. 혼인 잔치는 계속 되었다.

 

나는 거기 가 보았었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단다. 꼬박 8일 동안 사람들이 흥겹게 춤추는 것을 보고 떠나 왔었지. 어쩌면 지금도 계속 추고 있을지 몰라.

 

 

 

오십 에뀌의 지혜

세르비아

 

옛날에 사람들이 쉬지 않고 싸우기만 하는 어느 마을이 있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늘은 날씨가 좋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와서 날씨는 자기가 예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이 맑으니 누구든 '좋은 날씨'에 대해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과 같게 될까 봐 걱정이 된 누군가가, 저녁이 되기 전에 틀림 없이 비가 내릴 거라고 예상하면, 또 다른 사람이 나와서 제발 그 놈의 일기 예보 따위로 내 고막을 찢지 말라고 악을 썼다. 그러다가 대장장이가 나타나서 갖고 있던 몽둥이를 흔들어 댈 쯤이면, 성질 고약한 여자들이 몰려들어 괴팍한 잡담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요컨대, 그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의견에도 결코 동의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마을 광장의 느릅나무 밑에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한 늙은이가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에겐 지혜가 부족하네."

그러자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군대면서, 사실이지 자기 옆의 이웃들에게는 이성이란 것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저마다 동의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사람들은 가만히 뭔가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늙은이는 그러한 침묵의 늪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보게들, 나는 베니스라는 곳을 잘 알지."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그 곳은 신성한 도시야. 마치 이 곳에서 개밀꽃이 자라는 것처럼, 거기에서는 지혜가 무성하게 자란다네. 그러니 그 곳에 가서 그걸 좀 사 오세. 우리가 그걸 기르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들은 마침내, 말로만 들은 그 도시에서는 진짜로 지혜라는 물건이 잔뜩 난다고 믿었으므로, 그리로 직접 가서 흥정해 보자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가장 진지한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그들은 50에뀌에 식량 한 부대를 지고,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배에 돛을 올렸다.

 

세 사람은 베니스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저마다 잘난 척을 하며 그 곳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다.

"여보시오, 혹시 팔려고 내놓은 지혜가 좀 없으시오?"

그러나 그들을 미쳤다고 여긴 베니스 사람들은, 물을 때마다 어깨만 으쓱할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그 귀한 물건을 찾아 이 거리 저 광장으로 하루 종일 용감하게 쫓아 다녔다. 저녁 무렵, 한 허름한 여관에 들어가 귀 먹은 하녀를 붙잡고 지혜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 보고 있을 때, 얍삽하게 생긴 한 청년이 세 사람이 있는 탁자로 다가와 앉았다.

"아, 재치란 것 말씀이지요?" 하고 청년이 입을 떼었다.

"내가 그것을 팔지요. 지혜요? 그거라면 상자 하나에 마지막 물건이 남아 있습니다. 자, 여러분은 제 맘에 드는군요. 그걸 금화 50에뀌에 양보하겠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세 사람은 얼른 그에게 지갑을 내밀었다. 사기꾼은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생쥐 한 마리를 잡아 철로 된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시 세 명의 손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말했다.

"이 상자 뚜껑은 고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열지 마십시오. 지혜가 이 안에 있으니까요. 지혜의 향기는 아주 자극적이랍니다. 그 향내가 행여 새어 달아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럼, 고향까지 잘 돌아가시기를 빕니다. 행복한 형제들이여!"

세 명의 젊은 멋쟁이들은 다시 떠났다. 그들은 저마다 그 귀중한 보물을 자기 손으로 들고 가고 싶어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지켜 보는 느릅나무 밑의 그 감동적인 침묵 속에서, 지혜가 담긴 상자를 내려 놓는 영광을 서로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 다퉜다.

다음 날 그들이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지혜는 어쨌거나 분배되어야 할 거야. 그러니 먼저 그 냄새만이라도 좀 맡고 싶은걸."

"좋은 생각이야. 나도 그래." 하고 다른 친구가 대답하자, 세 번째 친구도 입을 열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긁어 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침내, 그들은 상자를 싼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나 상자 뚜껑이 채 열리기도 전에 생쥐는 밖으로 펄쩍 뛰어 달아났고, 갑판 밑의 구멍으로 이내 사라졌다. 세 사람은 놀라 그 뒤를 쫓았으나 헛일이었다.

 

세 사람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마을에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도착했다. 그들은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

"지혜요? 꼭 쥐새끼 같이 생겼습디다. 그게 튀어 달아나 버리더라구요. 아마 이 배 밑창 어느 구석엔가 숨어 있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 셋을 욕하면서 손에 든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그 때, 늙은이가 팔을 벌리며 말했다.

"지혜가 바로 저 배 안에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여보게들, 저 배를 뭍으로 끌어 올리세. 배 주위에 파수꾼을 세워서 그것이 어디 다른 데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으면 되네. 우리는 매 주 이 새로운 신전에 와서 그 향기를 맡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도 신 앞에 인정 받는 사람들이 되겠지."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말대로 했다. 그리고 이웃의 날카로운 시선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예민한 코를 가졌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마치 교황과도 같은 엄숙함을 가지고 심오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더 이상 군말을 하며 이웃과 시비를 벌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아기

리두마니아

 

추운 겨울 밤이었다. 어느 길 잃은 여행자가 바람 몰아치는 어둠 저 편에서 빛나는 한 점 불빛을 발견했다. 그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여행자는 장화의 흙을 툭툭 털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시오! 문은 열려 있소!"

여행자는 문을 밀었다. 그러자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따뜻하게 불을 피운 집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집 안에는 아기 요람이 하나 있었고, 그 요람 옆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부뚜막의 냄비 위에서는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잘 오셨소." 하고 늙은이가 중얼거렸다.

"소리를 내지 마시오. 우리 아기가 자고 있으니."

여행자는 굴뚝 곁으로 가서 옷과 머리에 묻은 눈을 털었다. 그런데 그 때, 작은 요람을 둘러싼 커튼 뒤에서 이상한 말 소리가 들려 왔다.

"저는 자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저 우리들의 왕 미로슬라브가 애 못 낳는 자기 부인을 어느 해 어느 날에 내쫓게 될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행자는 깜짝 놀랐다. 늙은이는 추위로 뻣뻣하게 굳은 여행자의 웃저고리를 벗겨 주고 있었다. 여행자는 등 뒤의 늙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방금 들은 말 소리가 분명 당신 아기의 목소리인가요? 대체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여섯 달째요." 하고 늙은이가 대답했다. "요즘은 아이들도 예전 같지 않지요."

그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아기가 깨어났으니 만일 원한다면 스프를 끓이는 동안 그 애하고 얘기를 나눠도 좋소."

여행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요람으로 다가갔다. 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초조했다.

"안녕, 작은 아가야. 네 아빠는 이 늦은 시각에 어디 계시니?"

"아빠는 태양에 계세요. 그는 조금 갖고 많이 만들어요."

"어허, 이것 참 우스운 얘기로군. 그럼 네 엄마는?"

"엄마는 이미 먹어 버린 빵을 굽지요."

"아하.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하고 여행자가 말했다.

"이번엔 감히 네 누나에 관한 소식을 좀 물어도 되겠니?"

"누나는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웃음을 웃느라고 허리를 잡고 있어요."

마침내 여행자는 골이 났다.

"안개 속에 갑자기 떠오른 달처럼 분명하구나. 모두 다 날 놀리는 말이야. 왜 날 농락하는 거냐? 대체 그 수수께끼 같은 소리가 다 무슨 뜻이냐?"

그러자 젖먹이 아기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애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인걸요. 아빠는 땅이 비옥한 남쪽 지방에서 돌아가신 삼촌에게 물려 받은 땅을 경작하고 계시지요. 아버지가 땅에 뿌린 씨앗은 이제 곧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거예요. 조금을 가지고, 많은 걸 하시는 거지요. 그리고 엄마는 오래 전부터 먹을 걸 외상으로 사 오셨어요. 그래서 지금 버는 돈은 전부 그 빚을 갚는 데 쓴답니다. 그러니까 이미 먹어 버린 빵을 굽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누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곱 달 전부터 예쁘게 치장을 하고 자잘한 사랑 타령을 하면서 코 끝에 분을 바르고 그러더군요. 그러더니, 지금은 배가 옷 보따리처럼 통통해졌지요. 아마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새로운 아기가 세상에 나올 거예요. 그래서 나는,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누나가 자기 배를 감싸 쥐고 웃고 있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악마의 턱수염을 비틀어 버릴 말이로군." 입을 멍청히 벌린 채 여행자가 말했다.

"세상에 젖먹이 아기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은 것은 난생 처음이야."

"댁은 순진하군요." 아기가 한숨을 쉬었다.

"아기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기들의 말을 듣는 법을 모르고 있어요. 사람들은 귀머거리고 세상은 잔인하답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계속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난 지쳤답니다."

그리고는 눈을 반쯤 감더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무얼 하러 왔는가,

차라리 한 마리 짐승이라면 좋으련만.

러시아 암 이리가 낳은 아들,

오 그렇다면 골치가 덜 아프련만.

 

 

 

종말이 다가올 때

코카시스

 

옛날 한 군주가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코사크 족과 싸웠다. 그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줄 몰랐으나, 전쟁에서는 아주 뛰어난 군주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흰 머리카락과 함께 노년의 피로가 찾아들었다.

어느 전투의 날 아침, 군주는 자신의 몸이 여느 때보다 훨씬 쇠약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 날 저녁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말은 초원에 풀어 놓고 자신은 따뜻한 난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듯 싶었다. 군주는 이 결정을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젊은 무관에게 말했다.

"얘야, 너에게 내가 쓰던 무기들을 주겠다. 이제부터 국경을 지키고 코사크 족을 정벌하는 일은 모두 네가 맡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과 부인들을 잘 돌보는 일도 다 네게 맡긴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 젊은이의 이름은 캬 보 르갸르(아름다운 눈길이라는 뜻)였다. 그는 평원으로 나가 싸움을 지휘했으며, 강물의 흐름을 살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싸우는 법을 하나 하나 배워 나갔다. 그는 고통과 충성심과 계략을 알게 되었다. 또 승리와 패배, 공격의 기술과 후퇴의 요령도 알게 되었다. 그는 10년 간 말을 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투에서 얻은 보물들과 소, 말, 양 떼들을 수레마다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는 늙은 군주의 성에 도착했다. 동료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난로 옆의 자기 주인에게 다가가 손등에 입을 맞추며 경외심을 표했다. 노인이 그에게 물었다.

"카 보 르갸르, 말해 보아라. 어떤 소식들이 있느냐?"

"군주시여, 저는 제가 벌인 전투에 대해서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당신이 일생 그래 오셨던 것처럼 코사크 족을 정벌했고, 국경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게 있었습니다. 그저께 말을 달리던 도중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신지 않은 네 켤레의 장화가 저희들끼리 어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급하게 올라가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쳐서 서로 떨어뜨리려 했지요. 마치 꼭대기에 제일 먼저 도착하려고 애 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늙은 군주가 대답했다.

카 보 르갸르는 포도주를 한 잔 비우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군주시여,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어제는 길가에서 제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구름 낀 하늘 밑에서 본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처연했기 때문에, 제 마음 속에서 울린 소리가 마치 제 머리 끝까지 닿는 듯 했습니다. 신이 만들어 낸 인간들 가운데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그 신비스런 존재에게 다가갔지요. 그리고 그 몸뚱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 형체도 없는 자루였습니다. 안에는 오물들이 가득했고 벌레들이 수도 없이 우글거렸지요. 저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었지요."

카 보 르갸르는 다시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나서 또 말했다.

"여기서 한 다섯 시간 쯤 달리면 나오는 어느 초원에 이르렀을 때, 저는 그 곳에서 불을 피우고 모여 있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안개와 누더기, 그리고 진흙으로 되어 있는 묘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예언자들의 말씀인 책과 그 밖에 다른 신성한 책들을 불 속에 던져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가가자 모든 것이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고, 제 눈엔 그저 평범한 풀밭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전부 진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을 가까이에 왔을 때, 어떤 아이가 제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혹독한 밤의 추위 속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었는데, 아마 집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군주여, 대체 어떤 어미가 제 아들을 그렇게 옷도 무기도 안식처도 없이 헤매도록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늙은 군주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위 사람들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서 군주가 입을 열었다.

"카 보 르갸르야, 나는 오랫동안 싸워 왔고, 여러 나라들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진정한 사내들도 만나 보았다. 그러나 네가 아는 것 같은 그런 일들은 보지 못했다. 너는 우리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갔다는 것과,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이미 종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다. 그러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네 칼을 넣어 두고 불을 피워라. 더 이상은 전투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카 보 르갸르는 어두운 낯빛으로 마지막 잔을 비우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방을 나갔다. 그러나 동료들은 군주에게 더 물을 것이 있는지 그대로 남았다.

"늙은 아버지시여, 저희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기어 오르려 애 쓰는 그 네 켤레의 장화는 무슨 뜻입니까?"

군주는 대답했다.

"이제 곧 영혼 없는 사람들이 올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존재했던 모든 미덕을 저 버릴 것이다. 관대함이나 명예, 용기 같은 미덕을 말이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욕망밖에는 없는 자들이다. 저 혼자 나무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을 떨쳐 내서라도, 저와 같은 동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밖에는."

그러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흠칫했다.

"아버지여,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사람이 어떻게 영혼도 존엄도 없이 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카 보 르갸르가 길에서 본 인간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은 신께서 지어 주신 것처럼 훌륭하고 고귀하다. 그러나 외모만 빼어날 뿐, 드러나지 않은 이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외모가 아름다운 그만큼, 그 안은 벌레가 들끓는 오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말했다.

"늙은 아버지, 선지자의 책들을 불태우고 있었다는 그 진흙탕 환영들도 역시 언젠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까요?"

"인간이 자기 정신의 산물을 파괴해 버리는 그런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이 땅에는 기사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나요? 그들도 모두 멸망해 버리게 될까요?"

그러자 군주가 다시 대답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굳은 땅 위로 터 오는 푸른 싹처럼, 대 초원 위에 무기도 처소도 없이 벌거벗은 한 어린 아이가 있을 것이다."

군주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오로지 신의 여인만이 자기 아들을 그런 추위와 바람에 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세상의 어느 어미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장미의 주인

아르메니아

 

옛날 아르메니아에 한 왕이 있었다. 진귀한 꽃과 나무들로 가득한 그의 정원에는, 연약하기는 하지만 모든 꽃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장미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장미 나무의 이름은 아나하칸이었다. 그런데 그 장미 나무는 한 번도 꽃을 피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그 나무를 자기 왕비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다. 예언서에서 말하는 진귀한 꽃이 언젠가는 그 나무에서 피어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나하칸의 장미 나무에서 진귀한 장미가 피어 나리라. 그리하여 자기 정원의 주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리라.

 

매일 아침 왕은 나무 앞에 와서 허리를 깊이 구부린 다음 나뭇가지를 살펴 보곤 했다. 하지만 잎새 사이에서 싹 눈이 틀 기미가 보이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러면 왕은 낭패한 얼굴로 일어나 정원사의 멱살을 틀어 쥐기 일쑤였다.

"나무가 계속 이렇게 메말라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감옥으로 가는 거야. 아주 깊고 깊은 지하 감옥!"

왕이 매년 봄마다 정원사를 갈아 치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장미가 피지 않으면 정원사는 감옥으로 끌려가고 다른 사람이 정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바뀐 정원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앞의 불행한 동료처럼 캄캄한 벽 속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열 두 번의 봄이 흘러갔고, 그 사이에 열 두 명의 정원사가 갈렸다. 열 세 번째로 정원사가 된 사람은 삼벨이라는 이름의 당당한 젊은이였다. 삼벨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 저는 제 운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왕은 대답했다.

"네 앞을 거쳐 간 정원사들은 모두 위대한 기술자였고, 나이도 많은 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전부 실패했는데, 너 같은 애송이 허풍쟁이가 어찌?"

"하지만 저는, 제 안에 있는 뭔가가 저를 꼭 성공하게 만들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하고 삼벨이 말했다.

"그게 대체 무어냐, 젊은 미치광이?"

"두려움입니다, 폐하. 감옥에 갇혀 죽는 두려움!"

 

삼벨은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의 사잇길을 걸어 장미 나무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무에게 오랫동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연약한 밑둥 주위의 흙을 북돋아 주고 물도 주었다. 삼벨은 낮이나 밤이나 나무를 지켰다. 바람이 불면 곁에서 보호했고, 첫 서리가 내렸을 때에는 짚으로 감싸 주었다. 삼벨은 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눈이 올 때는 마치 아기의 머리맡을 지키듯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마침내 봄이 왔다. 삼벨은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연약하지만 꼿꼿한 자채를 지닌 자신의 나무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싹이 트지 않았나를 정성스레 살폈다. 정원에 있는 다른 나무들은 사방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으나 삼벨의 나무에서는 한 송이의 꽃도 피지 않았다. 삼벨은 메마른 가지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5월의 첫째 날, 동이 트자 삼벨은 말했다.

"나의 나무야, 대체 어디가 아프냐?"

그런데 삼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무 뿌리에서 길고 검은 흙투성이 벌레가 기어나왔다. 삼벨은 벌레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때 새 한 마리가 삼벨의 손에 내려앉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벌레를 빼앗아 물고 달아났다. 그 순간, 가까운 풀더미에서 나타난 뱀이 벌레와 새를 한꺼번에 삼켜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뱀을 채어 날아갔다. 이 모든 일들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막 태양이 떠오르는 지평선 사이로 독수리가 사라지자, 나뭇가지에 싹눈 하나가 태어났다. 삼벨은 그것을 지켜 보았고, 그 위로 몸을 굽혀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자 성스러운 장미는 아침 햇살을 향해 천천히 몸을 열었다.

"고맙다, 고마워." 하고 삼벨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벨은 이 기쁜 소식을 외치며 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직 잠이 덜 깬 왕은 크게 하품을 하며 호통을 쳤다.

"감히 내 잠을 깨우다니!"

"폐하, 아나하칸의 장미가 피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영원 불멸하실 겁니다. 정원의 주인이시여!" 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삼벨이 외쳤다. 그러자 왕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오, 오, 놀랍도다!" 왕은 속옷 차림에 맨발로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오늘부터 무장을 한 백 명의 호위병들이 이 나무를 지키게 하라."

왕은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소리쳤다.

"나무 주위로 백 리유 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렷다! 그리고 삼벨, 너는 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나무를 지키도록 하라!"

삼벨은 대답했다. "예, 폐하.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왕은 그 후 10년을 더 살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왕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원의 주인도 다른 사람처럼 죽는구나. 그 모든 말들이 다 거짓에 불과했도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원사 삼벨이 말했다.

"아닙니다, 폐하. 정원의 주인은 결코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젊음은 나무를 보살핀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 바로 제가 그 나무를 지켰습니다. 새벽부터 황혼이 질 때까지, 또 황혼녘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제가 지킬 것입니다."

삼벨은 왕의 눈을 감기고,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별빛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별 하나 하나에 모두 인사를 했다.

"안녕, 안녕, 안녕."

 

삼벨은 그 후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살셈바이

카자크스탄

 

살셈바이는 집도, 외투도 없이 살았다. 그는 홀홀 단신이었다. 마을의 토호인 주인의 양떼를 돌보며 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주인이 찾아와서 말했다.

"가을이 되면, 다리 저는 암양을 급료로 받게 될 거다."

"나리, 감사합니다." 라고 살셈바이는 대답했고, 주인은 곧 떠났다.

살셈바이는 구름에게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다리 저는 암양은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거야. 신께서 날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늑대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풀밭으로 다가왔다.

"내게 양을 한 마리 다오. 안 그러면 열 마리를 죽일 테다."

"난 내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어." 하고 살셈바이가 대답했다.

"네 주인에게 가서 내 요구를 전해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살셈바이는 마침 식사 중인 주인의 집 안으로 뛰어갔다. 주인은 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초원으로 돌아가거라. 늑대의 눈을 가린 다음, 아무 것이나 한 마리 골라 잡게 해라."

살셈바이는 되돌아 가서 주인의 말을 늑대에게 전했다. 늑대는 눈을 가린 다음 네 발을 쭉 펴고,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양떼 한 가운데로 펄쩍 뛰어들었다.

'비는 항상 습한 곳에 내린다'는 옛 격언이 있다. 하필이면 살셈바이의 급료가 될, 다리 저는 암양이 순식간에 늑대에게 먹혀 버렸다.

"운명이 그렇게 되어 있었던 거야." 하고 늑대가 말했다.

"눈물을 닦아. 네 암양의 뼈다귀와 가죽은 남겨 줄 테니 그걸 갖다 팔아라. 그러면 몇 푼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거야."

 

살셈바이는 가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암양의 가죽을 들고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도착한 살셈바이는 동전 세 닢을 받고 애꾸눈 직조공에게 그것을 팔았다. 살셈바이는 배가 고팠고 목도 말랐다. 몸을 밀치며 소리 지르는 상인들과 당나귀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는 이 곳 저 곳을 돌아 다녔다. 그 때 거지가 다가와 살셈바이에게 동냥을 구했다. 살셈바이는 거지의 그릇에 한 닢을 던져 주었다.

"고맙소. 당신은 내게 많은 걸 주었으니 나도 당신한테 많은 걸 드리겠소. 신께서 당신을 보호하시기를!"

거지는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살셈바이에게 내밀었다. 살셈바이는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살셈바이는 어느 여관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동전으로 스프와 빵을 시켜 먹은 다음 짐꾼들의 틈에 끼어 한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살셈바이는 길을 떠나는 상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깨었다. 동편 하늘에서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살셈바이가 햇살 아래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큰 소리로 웃고 농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젯밤에 꾼 꿈 얘기를 좀 들어 봐!" 한 사람이 말했다.

"어떤 군주가 있었는데, 그는 아주 부자였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바로 그 군주였어. 태양이 하늘 저 편에서 누워 있는 나를 굽어보고 있는 동안, 달은 내 벌거벗은 웃통 위에서 놀고 있더라구!"

살셈바이는 다가가서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행복한 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상인 아저씨, 그 꿈을 저한테 파세요. 저는 아직까지 그만큼 아름다운 꿈을 한 번도 꿔 보지 못했어요!"

다른 이가 눈짓을 옆에서 했다. "얼마를 낼 수 있는데?"

"나리, 제겐 동전 한 닢밖에는 없어요."

"그럼 흥정이 됐다. 내 꿈은 이제 네 것이다."

살셈바이는 빈정대는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 멀어져 갔다.

 

살셈바이는 여러 마을들과 강들, 숙소들을 돌아다녔다. 이 곳에서는 일거리를, 저 곳에서는 밤을 지샐 지붕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살셈바이의 신발은 점차 누더기로 변해 갔다.

겨울이 왔다. 어느 날 저녁,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은 살셈바이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얼어 붙은 바람을 향해 하소연했다.

"신이여, 전 죽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요. 모두 안녕히! 내 몸뚱이가 다른 짐승들을 살찌우기를."

그런데 살셈바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말라 빠진 늑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드디어 먹을 거리가 생겼군!" 늑대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날 빨리 죽여 다오. 나는 추워서 미칠 것 같구나." 살셈바이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서 듣던 목소린데."

짐승은 살셈바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더니 어두운 공기 속으로 김 나는 주둥이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너는 언젠가 다리 저는 암양을 내게 주었던 목동 아니냐! 그 때는 네가 날 먹였었지. 지난 날의 운명은 그걸 명했어. 그런데 지금은 그 운명이 아마도 너를 구해 주라고 말하는 듯 싶구나. 내 등에 올라 타라. 같이 떠나자."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올라 탄 채, 둘은 눈보라를 뚫고 달렸다. 곧 어느 거대한 숲에 이르게 되었다. 멀리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한 점 불빛이 보였다.

"불빛이다!" 라고 살셈바이가 소리쳤다.

"저 불빛 곁에서 새벽녘까지는 있을 수 있을 거야." 늑대가 말했다.

"강도들이 방금까지 저기서 몸을 덥히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거든. 나는 다시 사냥을 하러 가야 한단다. 그럼 안녕 목동아!"

늑대는 초원의 밤 하늘로 여러 번 '안녕'을 외치며 떠났다. 살셈바이는 강도들의 빈 터로 급히 달려가 모닥불 가까이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들이 먹다 버린 고기 부스러기들을 긁어 먹고 곧 혼곤한 잠에 빠졌다. 살셈바이가 깨어났을 때,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그리고 동녘 하늘에선 막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살셈바이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 가물가물한 불씨가 남아 있는 재 밑으로 언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움직이는 손가락 밑으로 뭔가 단단한 물건이 만져졌다. 살셈바이는 그것을 끄집어 냈다. 꺼낸 물건을 본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금으로 된 궤짝이었다. 안을 열어 보자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가 갓 터 오는 희미한 새벽 속에서 태양보다도 더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살셈바이는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것은 백 명의 거지를 백 명의 왕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살셈바이는 보물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나 나무들로 뒤덮인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갔다. 그러다 길을 잃었고, 잠시 안개 속을 헤매다가 어느 개울을 발견했다. 살셈바이는 물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침내 강물을 막고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나무로 된 집을 발견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살셈바이는 늙은 떡갈나무 밑에 금궤를 숨겨 놓은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로 옆 어두운 구석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아름다웠다.

"당신은 누구세요?" 하고 소녀가 물었다.

"내 이름은 살셈바이라고 합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었어요."

"제 이름은 알티나예요. 불행이 제 위로 떨어졌어요. 여기 계시면 당신에게도 그 불행이 머물 거예요. 여기 누가 사는지 아세요? 늙은 마녀 잘마위제예요. 그러니 어서 피하세요. 이 집엔 저주가 들었어요."

살셈바이는 소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아가씨, 같이 도망칩시다."

"아아,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어요."

알티나는 서둘러 살셈바이를 커튼 뒤로 숨겼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살셈바이는 커튼에 난 구멍으로 밖을 엿보았다. 붉은 눈에 노란 이빨을 하고, 코는 독수리 발톱처럼 앞으로 굽은 괴물 같은 여자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마녀 잘마위제였다. 마녀는 불 앞에 앉더니 길고 메마른 손톱을 내밀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알티나, 이리 와 봐."

소녀는 다가갔다. 잘마위제는 그녀의 어깨와 엉덩이를 만져 보고 나서 말했다.

"쥐들에게 던져 주면 꼭 알맞겠군. 네 몸뚱이 꼴이 이게 뭐냐!" 늙은 마녀가 호통을 쳤다.

"나는 기름진 고기가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살을 찌우거라. 명령이다! 아직 얼마 간은 좀 더 참고 기다릴 테니. 하지만 경고해 두겠는데, 이번 겨울이 다 지나면 말랐건 살쪘건 간에 너를 꼬챙이에 꿰서 구워 먹을 거다!"

잘마위제는 문 안으로 세 자루의 부대를 끌고 오더니 그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날 밤 알티나는 커튼 뒤에서 청년의 품 속에 안겨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녀는 일찍 집을 나갔다. 마녀는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가엾은 소녀는 살셈바이에게 잘마위제가 어떻게 자기를 붙잡아 가두게 되었는가를 들려 주었다.

"아버지가 숲에서 절 잃어버리셨어요. 저는 숲 속을 헤매가 이리로 와서 도움을 청했지요. 마녀는 내 팔을 붙잡고 자기 곁으로 끌어 당기더니 금빛 빗으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어요. 그래서 저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모든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절망 속에서 살았어요. 이제 죽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알티나, 당신은 죽지 않을 거요." 살셈바이가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여기 있도록 해요. 나는 숲 속 깊은 데로 가서 사냥을 해 오겠소. 그리고 겨울이 끝나는 날 당신을 구하러 돌아오겠어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신께서 당신을 보호하시기를!"

 

사흘을 헤맨 끝에 살셈바이는 조그마한 빈 터에 쓰러져 있는 새끼 노루를 발견했다. 그 짐승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까마귀 열 마리가 새끼 노루의 등뼈와 눈을 찔러 대며 괴롭히고 있었다. 살셈바이는 막대기를 열 번 내리쳐서 새 떼를 모두 쫓아냈다. 노루는 가시 덤불을 헤치고 달아나며 살셈바이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살셈바이는 우연히 어느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흐레가 지난 뒤, 살셈바이는 틈새가 벌어진 나뭇가지 밑의 구덩이에 어린 암양이 빠져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셈바이는 짐승을 끌어 올려 풀 밭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어미 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은 내 새끼의 생명을 구했어요. 축복 받으실 겁니다. 저도 언젠가는 당신의 생명을 구해 드리겠어요."

살셈바이는 몹시 흡족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열 이틀 째가 되는 날 아침, 황야를 건너 가던 중에 애처로운 새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살셈바이는 울음 소리가 들리는 덤불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덤불 속을 자세히 살폈다. 가시 덤불 사이에서 작은 새끼 독수리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새끼 독수리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날개는 찢어져 있었다. 살셈바이는 그 짐승을 잘 빼 낸 다음 깃털을 매만져 주었다. 그러자 곧 옆에 있는 바위 위로 어미 독수리가 내려 앉았다.

"남자여, 당신의 헌신은 매우 값진 것이오." 새가 말했다.

"가시오, 난 당신의 마음을 잊지 않겠소."

 

열 닷새가 지난 끝에 살셈바이는 오두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문을 열었다. 잘마위제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오른쪽 팔에는 돌 칼이 들려져 있었고, 왼쪽 손아귀에는 알티나의 머리채가 쥐여져 있었다.

"그래, 바로 너였구나. 이 년이 큰 소리로 이름을 외쳐 부르던 녀석이!" 마녀 할멈은 캭캭거리며 말했다.

"좋다. 너희 둘 다 꼬챙이 구이가 될 테니까!"

살셈바이가 대답했다.

"알티나의 몸값으로 다이아몬드 천 개를 주겠소!"

그러고는 떡갈나무 밑으로 달려가 금궤를 꺼낸 뒤 다이아몬드를 한 움큼 쥐고 돌아왔다. 그것을 던져 주자 마녀는 탄성을 질렀다. 흥분한 마녀가 잠시 눈 앞의 먹이와 칼을 잊고 있는 사이, 살셈바이는 알티나의 손을 잡고 도망쳤다.

바위와 덤불 숲을 이리저리 헤치면서 둘은 계속 달렸다. 그들 뒤에서 숲 전체가 요동쳤고,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잘마위제가 소름 끼치는 소리로 악을 질러 댔다.

"저주 받을 놈들! 너희들은 내 손아귀를 빠져 나가지 못해!"

알티나는 기진맥진한 채 풀밭 위로 넘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난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았어요. 내 위에 올라 타세요."

짐승은 그들을 태우고 단걸음에 달려, 숨 한 번 몰아 쉬는 사이에 마녀가 미치지 못할 만큼 숲 속 바깥으로 멀리 빠져 나갔다. 노루는 그들을 어느 산 아래턱에 내려 놓았다. 그 때 커다란 눈덩이가 멀리 숲 위로 굴러 오는 것이 보였다. 눈덩이는 나무들을 짓밟고 대지를 요동시켰다.

"이 망할 놈들!"

잘마위제는 검은 눈보라 속에서 소리 질렀다. 살셈바이는 경사진 계곡을 따라 알티나를 무너진 나무 더미 사이로 데려갔다. 그 때 야생 양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얼른 제 등에 올라 타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러자 땅이 온통 요동쳤다. 밑에서 늙은 마녀가 산을 삼켜 대고 있었다. 계곡들 사이로 마녀의 찌푸린 얼굴이 보였고, 무너진 산더미 위로는 길게 자란 손톱이 나타났다. 그 손길이 살셈바이와 알티나를 막 덮치려 할 때, 하늘에서 독수리가 나타났다. 산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동안, 새는 살셈바이와 알티나를 멀리로 데려갔다.

새는 그들을 어느 마을 어귀에 내려 놓았다. 살셈바이와 알티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말해 주고 있었다. 둘은 곧 결혼하여 검소하게 살았다. 얼마 후 아기도 태어났다.

 

어느 일요일 날, 살셈바이는 풀밭 위에 누워 있었다. 아기가 가슴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알티나는 무릎을 꿇고 남편 위로 몸을 굽힌 채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살셈바이가 웃으며 말했다.

"오래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 꾼 꿈을 샀었소. 역시 그러기를 잘 했군. 그것이 날 떠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여기 귀한 대지 위에 누워 있고, 살아 빛나는 태양인 당신은 날 지켜 보고 있지 않소! 달덩이처럼 황홀한 내 아들은 내 가슴 위에서 놀고 있고,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오."

그러자 살셈바이의 마음 속에는 지나간 날들과, 자기가 방황하며 걸쳤던 누더기가 떠올랐다. 그는 그것들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갈가리 해진 윗도리는 정원의 나무에 걸려 있었고, 그는 바로 그 밑에 누워 있었다. 살셈바이는 손을 뻗어 누더기 옷을 만져 보았다. 옷 주머니에서 한 줌의 모래가 만져졌다. 언젠가 거지가 동냥 받은 동전 한 닢에 대한 대가로 살셈바이에게 준 모래였다. 살셈바이는 그 모래를 바람 속으로 흩뿌렸다.

초원 위에는 곧 수백 마리의 말과 양, 소, 낙타들이 나타났다. 모래알 하나에서 짐승이 한 마리씩 생겨 난 것이다. 이웃들이 놀라서 달려와서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 많은 가축들이 대체 어느 나리의 것일까?"

"그것을은 내 것이고, 우리 식구들의 것이오."

살셈바이가 대답했다.

"재물도, 무한한 아름다움도 모두 우리 식구에게 속한 거라오."

 

 

 

아귀지옥과 극락

일본

 

옛날, 카자이라는 유명한 무사가 있었다. 그는 사방의 적들이 자기의 육신을 노리고 위협하는 것에 너무나 지친 나머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날, 영혼이 그에게 말했다.

"부디 날 찾아 보아라."

카자이는 몹시 놀랐다.

"아니, 그럼 내가 널 잃어버렸단 말인가? 네게도 입이 있으니, 내 혼아, 말해 다오. 넌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그 곳이 어디든 너를 찾으러 가마."

"난 아귀지옥에 있어. 아니 어쩌면 극락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혼은 이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카자이는 자기 집 벽에 걸린 검을 꺼내 들고 영혼이 있다는 그 곳을 찾기 위해 방랑길에 나섰다. 되는 대로 이 곳 저 곳을 헤매고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절 앞을 지나가다가 웬 수도승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카자이는 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극락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수도승은 이렇게 반문했다.

"너는 많이 울었느냐?"

"무사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들아, 너는 네가 가려고 하는 그 곳으로 통하는 길을 계속 갈 수 없을 듯하구나."

"그러면 현자여, 아귀지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무사여, 난 그걸 모른다네." 하고 수도승이 대답했다.

"그저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로지 세 명의 현인만이 미로를 뚫고 그 곳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고 하지.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그들이 걸어 온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네."

"왜 그렇습니까, 현자여?"

"왜냐하면 첫 번째 현인은 미쳐 버렸고, 두 번째 현인은 시력을 잃었으며, 세 번째 현인은 사람들이 묻는 수많은 질문에 자기는 그저 자기 안에 있었을 뿐이라고만 대답했기 때문이지. 그는 그것 외엔 다른 말을 전혀 하려 들지 않았다네."

낙담한 카자이는 수도승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계속 길을 갔다. 밤이 되자 그는 허름한 주막에서 묵었다. 자기 혼이 있다는 그 장소에는 영원히 다가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재 속에서 꺼져 가는 한 점 불꽃 같은 가늘고 미약한 한 줄기 희망이 새롭게 피어났고, 카자이는 다시 길을 떠났다. 카자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즈라는 마을에 있는 시장까지 걸어갔다. 그는 잠시 채소와 과일을 잔뜩 쌓아 놓은 수레들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동전 몇 푼으로 밥을 한 그릇 사서는, 방해 받지 않고 먹기 위해 어느 나무 밑으로 가서 앉았다.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을 때, 당나귀를 탄 어떤 사람이 카자이 앞을 지나갔다. 카자이는 꾸벅 꾸벅 조느라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 사람이 누군지 그는 금방 알아 차렸다. 카자이는 옛날 강도들의 뒤를 쫓다가 이즈 산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사람을 만났었다. 그는 숲에 살고 있던 은자였는데, 길 잃은 카자이를 자기 처소에서 재운 다음, 마을로 가는 길까지 데려다 주었었다.

그로부터 15년, 아니 20년이 흘렀을까. 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주름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카자이는 그의 이름까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쿠인,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카자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안개 사이를 뚫고 솟아나 있는 숲가의 낮은 집까지, 먼 발치를 두고 그 뒤를 쫓아갔다. 카자이는 감히 문 앞에 다가갈 생각도 못하고 초목 사이에 숨어 오랫동안 기다렸다. 마침내 황혼이 지자, 카자이는 문가로 다가가 은자를 조용히 불렀다.

"하쿠인 선생님!"

카자이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은자가 손에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뭘 원하느냐, 아들아?"

"절 기억하십니까?"

"들어 오너라." 하고 늙은 은자가 대답했다.

 

같이 차 한 잔을 들고 난 후, 카자이가 입을 열었다.

"하쿠인 선생님, 저는 극락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또 아귀지옥으로 가는 길 역시 찾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혼이 어느 날 제게, 자신이 그 두 곳에 다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발 절 도와 주십시오.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은자는 방문객을 오랫동안 주시하며 침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을 경멸하는 듯한 냉소적인 표정이 되었다. 카자이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관자놀이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청하다니 넌 대체 누구냐?" 하쿠인이 매정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난폭하고 짐승 같은 녀석, 시골 촌뜨기에 날강도 같은 놈. 난 확실히 알고 있지. 넌 산짐승보다 더 역한 냄새를 피우니까. 그 날 내가 널 무심히 내 지붕 아래 맞아 들였던 이후로 15년이 흘렀지만, 나는 네 그 고약한 냄새와 그 멍청한 눈빛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내가 어찌 그걸 잊을 수 있을까?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네가 극락과 아귀의 길을 쫓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개를 신의 문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낫지!"

카자이는 핏기가 싹 가셨다. 눈빛은 끔찍스럽게 굳어졌고, 입술은 떨렸다. 이제껏 자신을 그런 식으로 모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몰려든 분노가 카자이의 육신 밖으로 넘쳐 흘렀다. 카자이는 검을 쥔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막 은자를 내리치려 하자,

"여기가 바로 아귀지옥으로 통하는 길이네." 하고 하쿠인이 말했다.

부드럽고 순박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간 은자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카자이는 곧 두 팔을 늘어뜨렸다. 카자이의 얼굴에도 겸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은 마치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카자이는 늙은 은자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 때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극락으로 통하는 길일세."

 

이렇게 해서 카자이는, 자기 혼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

 

 

 

뱀의 눈

일본

 

옛날 '미'라는 이름을 가진 승원(수도원, 절) 옆에 찻집이 하나 있었다. 어떤 소녀가 매일 그 찻집에 와서 쉬어 가곤 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는 법이 없이, 그저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잠시 앉아서 향기 나는 차 한 잔을 마시고, 밀떡을 몇 입 깨물고는 수줍어하며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 옆에 있는 승원으로 기도를 하러 가곤 했다. 찻집 아들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왔을 때는 그녀에게 직접 차를 대접했고, 그녀가 머물러 있는 동안 몰래 숨어서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세 번째 왔을 때는 문간에서 과장된 예의로 더듬거리며 그녀를 맞았고, 자기 의자로 가서 푹 파묻힌 채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며, 어리숙하게 넘어지기도 했고, 조용히 속으로 웃으면서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이웃의 어느 늙은 부인에게, 찻집에 오는 소녀에게 자기 얘기를 좀 좋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 날, 늙은 부인은 소녀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털썩 앉아서 찻집 아들에 대한 칭찬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이미 어수룩한 찻집 아들의 행동에서 다 드러난 사실들, 그가 소녀에게 몹시 반해 있다는 것을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늙은 부인의 이야기는 앳된 소녀의 마음을 너무나도 감동시켰다. 소녀는 오랫동안 눈을 내리깔고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저는 미 승원에서 100일 동안 불공을 드리기로 했어요. 그 기간이 지나면 그 분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을 거예요. 만일 그 때까지 절 원하고 있다면 말이에요."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100일은 아주 더디게 지나갔다. 찻집 아들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혼인을 올렸다.

 

혼인 날, 신랑과 신부가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마을을 덮쳤다. 혼례는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그 보기 드문 폭우를 앞으로 번성할 길조라고 애써 이야기했다. 사실 상 그 날부터, 행운이 찻집에 들어와 앉은 것처럼 보였다. 손님들은 점점 많아졌고, 젊은 신부는 곧 임신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세상에 줄줄이 이어질 자손들 가운데 첫 번째 장손을 순산할 것이라고 점쳤다. 해산 날이 다가오던 어느 날 저녁, 등불을 끈 다음 잠자리에 든 신부는 자기 남편에게,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날 만큼은 혼자 있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깜짝 놀라서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으나, 신부는 자기 뜻을 조금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만일 남편이 자기 뜻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영영 떠나 버리겠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해산의 고통이 밀려 들자 그녀는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혔다. 남편은 계단에서 입술을 깨물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는 아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극도로 초조해진 남편은 산파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문 너머에서 아내에게 애원했지만, 대답 대신 고통스런 비명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남편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벌어진 광경을 본 남편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떨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상 위에서는 거대한 뱀이 갓 태어난 아기의 몸을 칭칭 감은 채 끝이 갈라진 혀로 몸을 핥아 주고 있었다.

뱀은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치 두 알의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했다. 뱀은 짤막하게 쉭 소리를 내지르더니 이내 수줍고 어여쁜 젊은 아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아, 이런, 조급한 사람!" 그녀는 두 눈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이젠 당신의 집에 머무를 수 없게 됐어요. 내 혼에서는 피가 흘러요! 당신에게 내 눈 한 쪽과 우리 아들을 맡기겠어요. 그 애에게 이 눈알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빨지 못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아이는 모든 악에서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을 거예요. 훗날에 만일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승원 뒤에 있는 호숫가로 오셔서 절 부르세요. 그러면 제가 나갈 테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마치 그 방 안에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불 위에는 갓 태어난 아기와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그 신비한 눈알만이 남아 있었다.

 

이 마법 같은 이야기는 곧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기적이 일어났던 그 집을 구경하러 몰려 왔다. 며칠 뒤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 뜸해졌으나, 사람들은 어미에게서 버려진 어린 아기가 자기 어미의 눈에서 나오는 젖만 먹고도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보고 매우 신기해했다. 사람들이 너무나 지껄이고 다녔기 때문에, 마침내 그 나라의 군주도 마법의 눈알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역시 아들을 갖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자기도 갖지 못한 그런 귀한 물건을 하찮은 찻집 주인이 갖고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 애꾸눈 하인을 시켜 그것을 훔쳐 오게 했다.

뱀 여인의 남편은 그 일로 몹시 놀라고 괴로워했다. 아이는 다른 평범한 음식은 전혀 먹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끊임 없이 흐르는 눈물과 점점 더 창백해지는 아기의 얼굴은 그에게서 마지막 희망까지도 빼앗아 가는 듯 했다. 그 때 불현듯 아내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혼이 질 무렵, 그는 미 승원 뒤에 있는 호숫가로 나가 아내를 애타게 불렀다. 곧 황혼에 물든 장미빛 안개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물가를 향해 헤엄쳐 왔다. 그는 아내에게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고, 갑자기 거센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아이를 먹여야 할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아내는 커다란 슬픔이 담긴 한 쪽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일이 그렇게 됐다면 할 수 없지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머지 오른쪽 눈알을 뽑아 남편에게 내밀었다.

"전 이제 장님이 되었군요. 아아, 저는 이제 우리 아기가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요. 애가 다 자라 어른이 되면, 그 애가 미 승원의 종을 쳐서 울리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하면 나는 매일 아침 날이 밝았다는 것과, 매일 저녁 해가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제게 그것을 알려 주는 사람은 바로 내 아들이 될 거구요." 

 

세월이 흘렀다. 찻집 주인과 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미 승원의 종지기가 되었다.

이것은 옛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제 아무리 기이하다 해도, 그 진실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사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아들

중국

 

옛날 가족이 없는 한 소년이 살았다. 소년의 부모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마을 토호의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삶은 복 없는 긴 여행 같았다.

어느 저녁, 하루 종일 쟁기를 밀고 난 소년은 소의 목을 쓰다듬으며 잠시 흐느꼈다. 그는 중얼거렸다.

"왜 나는 쓰디쓴 나무 뿌리나 풀 뿌리 밖에는 먹을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사랑 받지 못하는 걸까?"

그 때 갑자기 짐승의 커다란 울음 소리가 황혼녘의 대기를 진동시켰다. 소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숲 속에서 뛰쳐 나온 호랑이 한 마리가 소년이 있는 밭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호랑이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네 아비다."

"제 아버지라구요? 어디 증명을 해 보세요." 시아는 온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봐라, 내 아들아." 호랑이가 이렇게 말하면서 앞발을 시아에게 내밀었다.

시아는 그 앞발에 빛나는 은팔찌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를 땅에 묻기 전에 손목에 끼워 드렸던 바로 그 은팔찌였다. 시아가 말했다.

"왜 호랑이 가죽을 쓰고 나타나셨나요?"

"내 등에 올라 타거라, 얘야. 어서 떠나자."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올라 타고서 그들은 같이 떠났다. 호랑이의 굴은 숲 속 아주 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몇 년 동안 평화로이 지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사냥을 나가서 먹이를 물어 왔고, 시아는 자기 몫의 고기를 굴 앞에 불을 피워 놓고 구워 먹었다. 밤이면 나무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시아는 가끔씩 새들의 노래에 피리를 불어 답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버지 호랑이가 시아에게 말했다.

"시아야, 너도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 오늘 밤 같이 숲과 들판을 건너 마을로 내려가 보자."

아버지와 아들은 숲과 들판을 지나 소리 없이, 등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는 마을 앞에 다다랐다. 긴 천 조각 같은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다. 마을 공터에는 소녀들이 웃고 재잘대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조금 떨어진 은신처에 숨어서 소녀들을 관찰했다. 아버지 호랑이가 말했다.

"어느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골라 보아라."

시아는 좀 더 오래 그들 모두를 자세히 관찰하고 나서, 마침내 대답했다.

"저기 나무 밑둥에 혼자 기대 앉아 있는 저 못생긴 애가 좋겠어요."

그러자 호랑이는 포효하며 뛰쳐 나갔다. 세 번을 뛰어 오른 호랑이는 벌써 그 소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다른 소녀들은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린 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버렸다. 호랑이는 노획물을 가지고 마을 밖으로 나왔다. 뒤쫓아 온 시아가 자기 등에 소녀를 업었다. 아무도 그들을 쫓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숲 안 쪽의 동굴로 돌아왔다.

 

그들 모두는 근심 없이 살았다. 3년이 지나자 호랑이가 말했다.

"아들아. 우리도 이제 사돈 어른들께 정중한 예의를 갖춰야겠다."

"그건 맞는 말씀이에요." 하고 시아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빈 손으로 마을에 갈 수는 없어요. 어디서 적당한 선물을 구하지요?"

"너는 씻고 머리를 빗어라. 나머지 일은 나에게 맡겨 다오."

호랑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혼자 마을로 내려갔다. 시장 사람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자, 기름진 돼지 고기와 술 한 병, 또 두 광주리의 쌀은 훔쳐 낸 다음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시아와 그의 아내는 길을 떠났다. 시아는 여행을 즐겁게 하려고 피리를 불었고 아내는 노래를 했다. 아버지 호랑이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놀라 겁을 먹을까 봐 멀리에서 그들을 뒤따랐다. 정오 무렵, 한 떼의 도둑들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 도둑들은 모두 허리춤에 단도를 세 자루씩 차고 있었다.

"쌀과 술, 돼지 고기를 다 내려 놔라!" 도둑들이 호령했다.

"어떻게 이걸 당신들에게 주겠습니까?" 시아의 아내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 친정 식구들을 위한 선물인데요."

도둑들은 크게 웃으며 빈정거렸고, 단검을 꺼내 들고 겁을 주었다.

시아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아버지!"

그러자 곧 호랑이가 대답했다. "오냐, 시아야. 내가 여기 있다!"

호랑이가 나타나자마자 도둑들은 비명을 연발하며 숲 속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밤이 찾아 들 무렵, 마을 앞에 이르렀다. 호랑이가 말했다.

"너희들만 들어가거라. 내 앞발은 더러운 데다 몸에선 수풀 냄새가 난단다. 그러니 난 밖에 머물러 있겠다. 그저 식사 때가 되면 먹을 것이나 조금 갖다 주려무나."

시아의 아내는 남편을 이끌고 부모의 집 앞까지 갔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어머니가 문을 열러 나왔다. 어머니는 방문객들 앞에 등을 높이 치켜들더니, 등불 밑에 자기 딸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드러나자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유령이라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제발 진정하세요. 저는 유령이 아니에요. 절 물어 갔던 그 호랑이는 사실은 착한 사람이었고, 저를 며느리로 삼았어요. 그래서 전 여기 이 분과 혼인했어요. 저희는 행복하게 살아요. 몇 가지 선물을 들고 이렇게 문안을 드리러 온 것 뿐이에요."

그러자 어머니는 두 팔을 활짝 벌렸고, 딸도 그렇게 했다. 모녀는 울고 웃으며 오랫동안 서로를 포옹했다. 아버지도 맨 발로 달려 나와 사위를 껴안았다. 그들은 다 같이 먹고 마시며, 조상을 위해 음악도 연주하면서 오래도록 즐겼다. 한참 후에 시아는 돼지의 넓적다리 하나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호랑이가 다가왔다.

"고맙다, 아들아. 이젠 작별해야겠구나. 나는 간다. 널 도와 주려고 나는 짐승의 가죽을 쓰고 있었단다. 난 이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 이제 저승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 네 처와 함께 숲 속으로 돌아가거든, 제일 커다란 나무 밑을 파 보거라. 머리칼 여섯 가닥과 금처럼 빛나는 것 세 개, 그리고 눈처럼 하얀 것 세 개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호랑이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내 안개처럼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시아와 아내는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숲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숲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리털 여섯 가닥이 나왔는데, 그 밑에는 구운 도기 여섯 개가 있었다. 세 개는 금으로 가득했고, 나머지 셋은 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집과 밭, 가축들과 목초지를 샀다.

 

시아는 나이가 들어서도 피리 부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다. 시아의 연주는 너무나 훌륭했다. 어느 날, 시아의 연주에 감동한 저승의 신 치가 시아를 자기 왕국으로 초대했다. 시아는 그 무렵 100살에 가까워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저승으로 갔다. 아내는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치의 왕국 문 앞까지 시아를 뒤따라 갔다. 그녀가 말했다.

"여보, 속히 돌아오세요! 매일같이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글쎄…." 시아는 말 끝을 흐리며 치의 왕국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래도록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오솔길로 걸어오는 남편을 보았다.

"오셨군요! 집으로 들어가요."

그들은 같이 걸었다. 그런데 그녀는 곧 남편의 발 아래 짓밟히는 풀이 꺾이지 않는 것과, 남편의 신발이 늪의 진창에 빠져들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개울물 위를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걷는 것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땅 위에 누웠고, 이번에는 남편 시아가 그녀를 기다릴 차례가 되었다. 마침내 그녀 역시 안개처럼 가벼워졌을 때, 남편은 피리를 불고, 아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사람은 같이 치의 나라로 돌아갔다.

 

 

 

완덕(完德)의 길로 떠난 리앙

중국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 가오라는 인물이 마침내 중국 황제의 권좌에 올라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황제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 것을 명했다. 그는 가신들의 칭송과 만송이의 꽃으로 장식된 영예의 선물을 받았고, 백성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제껏 겪어 본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한 만 명의 악사들이 펼치는 연주와 만 가지 향내의 어우러짐을 실컷 즐겼다. 잊지 못할 대주연이 끝나 갈 무렵, 그는 신하들에게서 제국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 아홉 정승과 네 대신을 자문실로 소집시켰다.

국무 대신 리앙은 붉은 비단 옷에 금빛 허리띠를 두른 창백하고 조그만 남자였다. 그는 자기 차례가 되자 황제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폐하, 영존하소서! 당신의 미천한 종은 오늘 온 나라 안이 평안하다는 것과, 바람은 이롭게 불고 비는 적당하게 내리며, 당신의 백성들이 커다란 걱정 없이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룁니다. 그런 고로, 대신의 명분을 갖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제가 오늘 감히 존귀하신 폐하 앞에 간청하나이다. 이대로 속세에서 물러나, 조용한 산중에서 마음을 닦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뭐라고?" 가오 황제가 놀라서 반문했다.

"너는 날 버리려 하느냐?"

황제는 눈썹을 찌푸리며 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검은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네 벼슬이 보잘것 없이 여겨져서 그러느냐?"

"절대 아니옵니다. 오히려 정 반대이옵니다. 저는 그것이 제게 너무나 과분하다고 여기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떨어짐도 급해지는 법이지요. 폐하, 저는 떨어져서 다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터무니 없는 소릴 하고 있구나." 황제가 말했다.

"네 부는 견고하고 네 명예는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 만한 것. 너는 거친 옷을 입고 나뭇가지로 만든 움막 안에서 매일 매일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받기 위해 그 모든 걸 버린단 말이냐? 리앙, 내 친구여! 나는 네 말에서, 널 그토록 풍족하게 해 준 삶에 대한 무례함 밖에는 찾아 볼 수가 없구나."

"욕망도 구속도 없이, 적게 먹고 헐벗게 입으며, 사시사철이 오가는 것을 그저 지켜 보는 것. 폐하, 세상의 어떤 명예를 그 자유로움에 견줄 수 있겠나이까?"

"대신이여, 너는 네 본분을 잊고 있다. 나는 제국을 위해 헌신할 강인하고 명철한 인물이 필요하다."

"폐하께서는 이미 그런 사람들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당신의 제국은 저 하나 없다고 해서 절뚝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가오 황제는 늙은 리앙의 마음을 꺾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물러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를 다시 곰곰이 따져 보도록 하라. 그래서 내일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리앙은 관직을 떠났다. 어느 날 저녁, 리앙의 집 대문가에 있는 앵두나무 위로 달이 떠오를 무렵 세 명의 고관 대신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리앙은 손님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황제께서 우리를 보내셨소. 황제는 그대를 무척 사랑하고 계시고, 그대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시오. 황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시길 바라오. 황제 곁에 머믈로 계시오. 그 분은 그대가 자신의 내밀한 조언자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오."

"허나 그 분은 세상에서 제가 제일 갈망하는 것을 베풀어 주실 수 없으십니다." 하고 늙은 리앙이 대답했다.

"대체 그게 무엇이오?"

"영혼의 안식입니다."

리앙은 그들에게 차를 대접했고, 문 밖까지 배웅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리앙은 아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아 온 호화로운 처소를 떠나 산 속의 움막에 칩거하며 홀로 덕을 쌓아 가겠노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여기서 수련하실 수는 없으십니까?"

"이 곳은 너무 안락하오."

"여보, 전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곧 되돌아 오실 겁니다. 당신은 잘 먹고, 잘 마시고, 빛나는 비단 옷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는 대신들의 회의에서 말씀하시거나, 학자들과 함께 행차하시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세요. 당신은 아마 며칠 동안, 추워서 감기에 걸리기 전까지만 숲 속에 머물러 계시다 돌아오실 거예요!"

"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저와 아이들을 의지할 곳도 없이, 또 돈도 없이 내버려 두시겠어요? 당신은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도주하려는 도적인가요?"

"여보, 만일 내가 죽는다면, 당신은 그런 날 두고 도망자라 하겠소?"

"하지만 당신은 살아 계시잖아요!"

"난 더 이상 당신이 속한 세상에 있지 않소."

 

다음 날 아침, 리앙은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일찍 집을 나섰다. 그는 갈아 입을 옷고, 신발도 챙기지 않았고 단 한 자루의 음식 부대도 짊어지지 않았다.

제국의 수비대가 1년 동안 리앙을 찾았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가오 황제는 자기가 매우 아끼던 대신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궁궐의 대문 위에 방을 붙이게 했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늙은 리앙의 칩거에 대해 조그마한 정보라도 알려 오는 자에게는 한 부대의 금과 대신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쓰여 있었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궁궐 앞 광장에 모인 군중을 헤치고 나서더니 방을 찢어 들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말했다.

"폐하, 리앙 대신은 백운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그는 매우 말랐습니다만 건강하고, 자기 움막 앞에다 우스울 정도로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어 아주 열심으로 가꾸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매우 행복해 보였습니다."

나무꾼의 말에 황제는 몹시 반색을 표했다. 황제는 곧 마차를 준비시켜 은자가 산다는 백운산으로 떠났다. 사흘을 여행한 끝에, 경사 진 산길을 오르던 황제 일행은 드디어 리앙을 발견했다. 리앙의 주위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사슴이 풀을 뜯고 있었다. 황제는 말에서 내려 두 팔을 벌리고 리앙에게 다가갔다. 늙은 은자가 말했다.

"폐하, 부디 부귀영생하소서! 폐하를 뵙게 되어 기쁩니다. 사실 저도 폐하가 그리웠습니다."

"리앙, 내 사랑하는 대신." 황제가 말했다.

"우리는 사방으로 그대를 찾아 다녔네. 백성들이 그대를 외쳐 부르고, 그대의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나 역시 그대가 없어서 날마다 고통 받았네.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저 마차를 보게. 내 말들까지도 그대를 궁전으로 모셔 가기 위해 안달이 나 있네."

"기꺼이 돌아가지요." 하고 선량한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이 행복한 귀환에 감히 하나의 조건을 내걸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저와 함께 제 움막에서 차를 한 잔 드실 수 있겠사옵니까?"

"물론 기꺼이 그리 하지." 하고 황제가 말했다. "날 인도해 주게나."

 

꼭대기가 안개로 자욱한 바위와 나무들 사이로 그들은 경사진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마침내 깊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옆에 도착했다. 그 심연과 같은 낭떠러지 위에는 다리가 하나 걸쳐져 있었다. 썩은 나무통으로 된 그 다리는 물보라에 젖어 흔들렸다. 리앙은 마치 몽유병자와도 같은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건너갔다. 그리고는 반대편에 있는 자기 움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거의 다 왔습니다."

가오 황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무통을 발 끝으로 한 번 디뎌 보다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는 신음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폐하, 겉옷과 신발, 그리고 두려움을 모두 벗어 던지십시오. 그것들이 폐하의 주위를 무겁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허나 나는 삶에 매달려 있네!"

"그걸 잃을 각오를 하십시오, 폐하."

"리앙, 나는 그럴 수 없네. 보게나, 나는 무게가 실하게 나간단 말일세. 이 나무 다리는 무너져 버릴 거야!"

그들은 잠시 얼굴을 마주한 채, 심연의 물살 이 쪽 편과 저 쪽 편에 서 있었다. 마침내 리앙이 말했다.

"그러니 폐하! 폐하께서는 폐하의 세상으로 돌아가시고, 저는 제가 있는 세상에 그대로 남게 해 주십시오. 부디 만복이 깃드시기를! 차는 저 혼자 마시도록 하지요."

리앙은 그렇게 말한 다음, 발걸음을 돌려 움막 안으로 사라졌다.

 

 

 

귤나무의 진실

중국

 

남편과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산 아래 있는 흙집에서 살았다. 남편은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고 밭을 갈았으며, 아내는 집안일을 꾸려 나갔다. 그들은 근심 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

 

어느 봄 날 아침, 남자는 언덕 수풀 사이에 숨겨 둔 덫을 걷으러 갔다. 그런데 막 귤나무들 사이를 지나려 할 때 어느 소녀가 맨발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녀는 기적처럼 아름다웠고, 샘물보다 더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녀가 너무도 생기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었으므로, 그는 마음 한 구석이 갑자기 세차게 뚫린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생각했다.

'곧 씨 뿌릴 때가 다가오는데. 나에게는 밖에는 일이 있고, 안에는 행복이 있지.'

"얘야, 날 지나가게 해 다오." 하고 그는 말했다. 소녀는 대답했다.

"난 매일 당신을 보지만, 당신은 날 보지 못했어요. 매일 밤마다 난 당신의 꿈을 꾼답니다. 제발 1년 만이라도, 아니 구름이 태양을 잠시 가릴 동안만이라도 절 사랑해 주세요. 시간이야 얼마가 되었든 상관 없어요."

그는 갑자기 피가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그를 이끌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저녁 바람이 일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저녁 상을 내 왔다. 그는 소녀를 생각하며 꿈 꾸듯 앉아 있었다. 소녀의 눈길은 안개에 젖은 듯 했고, 머리카락은 수풀 사이로 흐트러져 넘실거리는 듯 했었다. 그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그는 귤나무 숲으로 달려가면서, 그 곳에 제발 아무도 없기를 빌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토록 애타게 바라고 있던 바로 그 소녀가, 신선하고 생기 넘치는 자태로 거기에 있었다. 소녀는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다시 소녀에게 이끌려 갔다.

저녁에 그는 자기 밥그릇 앞에서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난 불행해. 내 영혼은 차디차고, 나는 죽을까 봐 겁이 나오."

"그만 쉬세요, 여보." 하고 아내가 말했다.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무거운 고통을 느끼면서, 나흘, 닷새, 엿새 동안 그는 저녁마다 숲에서 소녀를 만났다. 이레째 되는 날 아침, 아내는 여느 때처럼 그의 어깨에 자루를 걸쳐 주고 나서 몰래 남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녀는 나무 그늘 사이로 숨어서 남편의 뒤를 쫓았다. 남편은 주위의 아무 것도 살피지 않고,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에게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안겨 주었던 그 소녀를 다시 만나 보려는 급한 심정으로 걸어갔다. 아내는 귤나무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숲 그늘 밑에서 한 소녀가 튀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미인이었다. 가슴 속에 와 박히는 고통으로 아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남편과 소녀는 나뭇가지 밑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두 연인은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아내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가 버리자, 그녀는 소녀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는 소녀가 두 팔을 허공에 내뻗고 신음을 하면서 온 몸이 나무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무의 정령이었다.

 

아내는 집으로 되돌아왔고, 남편에게 술을 한 잔 대접한 다음 저녁 상을 차렸다. 남편이 계속 묵묵히 있자, 그녀가 말했다.

"여보,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면, 저는 필요하다면 하늘 끝까지라도 약을 찾아 나설 수 있어요."

남편이 대답했다.

"여보, 어떤 소녀가 말하길, 날 괴롭히고 있는 이 병을 고치려면 당신의 심장과 콩팥, 그리고 간을 먹어야만 한다 하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기꺼이 제 골수라도 당신께 바치고 싶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없는 삶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러니 잘 들으세요. 내일 제게 토끼 세 마리와 자고새 세 마리, 그리고 꿀벌 세 무리를 잡아다 주세요. 그리고 그 소녀를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초대하세요. 우리는 같이 식사를 할 거예요. 그 다음 필요하다면 제 몸을 열고 그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 전부를 가져가세요."

남편은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저녁, 남편은 토끼 세 마리와 자고새 세 마리, 꿀벌 세 무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소녀와 소녀의 다른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즐거워 보였다. 아내는 그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자정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과실주와 곡주를 마시며 즐겼다. 모두 거나하게 취하자, 아내는 살금살금 남편 뒤로 다가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신 친구들을 잘 보세요. 취기 때문에 잠이 들 거고, 그러면 더 이상 자기들의 진짜 정체를 숨기지 못할 거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푸르게 물들었고, 머리카락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변했다. 소녀의 팔은 나무 껍질로 뒤덮였고, 뺨 역시 밤색 나무 비늘로 뒤덮였다. 그리고 초롱한 눈은 이내 생기를 잃더니 어느 순간 나무 옹이로 변했다.

"여보,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오?" 남편이 신음하듯 물었다. 아내가 대답했다.

"날이 밝기 전에 이 나무들을 숲으로 가져가세요. 그리고 귤나무 주위에 지푸라기를 뿌린 다음 이 나무들을 올려놓고 불을 피우세요. 그러면 당신은 풀려날 거고, 저도 역시 그렇게 될 거예요."

 

첫닭이 울었다. 아내와 남편은 귤나무 앞에서 손을 맞잡았고, 불이 높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았다. 곧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남편의 가슴 속에는 더 이상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 아내의 가슴 속에도 희미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편은 내게 상처를 줬어. 어쩌면 나 역시도 언젠가는, 원치 않으면서도 남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지.'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침묵한 채, 천천히 집으로 되돌아갔다.

 

 

 

죽음으로써 다한 우정

중국

 

장은 난징 출신이었다. 그는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아내를 맞지 않고 있었고,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 함께 약간의 밭과 몇 마리 양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은, 정의를 가늠하고 백성들을 교화시킬 재능 있는 인재들을 황제가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장은 생각했다. 그런 고귀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못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가서 필요한 시험을 치르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책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길을 떠났다.

 

장은 열흘 동안 이렇가 할 사고 없이 여행했다. 어느 커다란 도시를 하루 종일 걷던 장은 밤을 지내기 위해 한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바로 옆 방에서 들려 오는 어느 가련한 자의 신음 소리 때문에 조용히 쉴 수가 없었다. 장은 이부자리 위에서 수십 번을 뒤척이다가 결국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여관의 급사에게 누가 이렇게 신음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그는 병든 유생인데 거의 죽기 직전에 와 있으며 그의 병이 전염병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간호하려 들지 않는다고 대답해 주었다. 장은 사람들이 그런 가엾은 병자를 고통 속에 홀로 내버려 둔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다시 올라가 옆 방의 병자에게 도움을 주리라 마음 먹었다. 급사가 장의 뒤를 쫓아오며 만류했다.

"그러다간 선생님도 죽게 되십니다!"

장은 대답했다.

"무슨 상관인가. 만일 내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면 어느 누구도 그걸 바꾸지는 못할 게 아니겠나."

장은 지푸라기로 만든 잠자리 위에서 가엾은 병자가 헐떡이고 있는 작은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자의 얼굴은 지저분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장은 그 위에 몸을 굽히고 중얼거렸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오."

장은 그에게 죽과 차를 끓여 주었으며, 몸을 씻기고 따뜻한 요로 감싸 주었다. 장은 닷새 동안 병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살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엿새 째 되는 날 아침, 환자는 어린 새와도 같이 연약하게 숨을 쉬었지만, 마침내 열이 내린 채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두 눈을 뜨고 장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내가 당신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구료. 당신에게 너무 큰 폐를 끼쳐 몸둘 바를 모르겠소. 내 이름은 환시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장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은 대답했다.

"사람이 그 형제 중 한 사람을 구한다 해서 시간을 잃는 것은 아니지요. 나는 당신이 시련을 헤쳐 나가는 것을 옆에서 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몹시 행복하답니다."

둘은 함께 이야기했고, 곧 든든한 우정을 맺게 되었다. 둘 다 자기 고향을 떠나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이었으나, 병치레와 간호로 인해 이제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일은 너무 늦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여관에서 한 달 간을 더 머물러 있기로 작정했다. 그 동안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시를 읽기도 하면서 그들은 결국 형제의 우의를 굳게 맺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 새 서로가 이별을 생각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헤어지기 전날 밤, 국화와 두견화 꽃잎들 사이에서 환시가 장에게 말했다.

"여보게 아우, 내일은 바로 중양절(음력 9월 9일의 절기)일세. 우리 이 날을 꼭 기억해 두세나. 자네가 허락한다면, 나는 정확히 1년 뒤에 틀림 없이 자네 집을 찾아가겠네. 내겐 부모님이 안 계신다네. 자네 어머니는 이제 나의 어머니일세. 난 벌써부터 그 분께 내 애정을 보여 드리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야."

장은 대답했다.

"형님, 저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형님께서 이 가난한 아우의 집을 찾아 오신다면, 좁쌀을 넣고 끓인 닭고기 죽만큼은 실컷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어찌 형제가 되기로 맹세한 자네와의 재회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환시가 말했다.

둘은 함께 웃었고, 서로를 두 팔로 껴안으며 울었다.

 

집으로 돌아온 장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그 간의 여행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고, 그 후 새로워진 열정을 가지고 더 열심히 일했다.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장은 중양절이 돌아오기 한 달 전부터 자기 뒷마당에 있는 닭 중에 가장 크고 멋진 놈을 골라 살을 찌웠다. 마침내 약속한 중양절이 되자 장은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었고, 향 불을 피웠으며, 식탁 위를 꽃잎으로 장식하고, 의자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아궁이에다 커다란 솥을 걸고 불을 피웠다.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네 친구가 산다는 마을은 여기서 열흘은 걸어야 하는데, 그가 이리로 오다가 무슨 지체할 일이라도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니냐? 그러니 그 사람이 도착한 후에 닭을 삶도록 해라."

"어떻게 환시 같은 분이 중양절 만나기로 한 약속에 늦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장이 대답했다.

"만일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음식을 만든다면, 그는 아마도 제가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소홀한 친구라고 여길 것이고, 그러면 전 수치스러움 때문에 죽을 겁니다."

장은 그렇게 말한 다음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문 밖에 나가 길목을 살폈다. 마을의 자홍빛 나무들 위로 태양이 마치 한여름의 가장 좋은 날처럼 맑게 빛났다. 장은 정오까지 기다렸고, 개 짖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동구 밖까지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정오가 넘자 장의 아우는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저녁이 되어 희뿌연 하늘에 달이 떠오르자, 어머니가 길가로 나와 장에게 말했다.

"장아, 내 아들아! 이제 그만 들어가자. 네 친구는 아마 오늘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그는 옵니다, 어머니. 그는 와요." 하고 장이 중얼거렸다.

장은 아우가 날라다 준 더운 술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자정이 될 때까지 먼 길 바깥을 살피면서 사람 발걸음으로 풀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장이 초조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길 저 쪽으로 마침내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장은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그 그림자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는 바로 환시였다. 긴장이 풀린 장은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는 커다랗게 환성을 질렀다.

"전 형님을 새벽부터 쉬지 않고 기다렸는데, 결국 이렇게 오셨군요! 놀랍습니다! 좁쌀 넣은 닭고기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당과 문간도 모두 깨끗이 쓸었지요. 어서 들어갑시다, 형님!"

환시는 말 없이 장을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등불이 꺼져 있었다. 장은 다시 심지에 불을 붙였다. 환시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우여, 내가 늦은 것을 용서해 주게." 하고 환시가 말했다.

장은 두 팔을 활짝 벌렸으나 환시는 뒷걸음질을 치며 떨었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장에게 말했다.

 

"날 쳐다보지 말게. 난 더 이상 산 자의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네. 아우여, 마지막으로 내 말을 잘 듣게. 우리가 만났던 그 여관 앞에서 자네와 헤어지고 난 뒤에, 나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삿길로 나섰네. 나는 쉬지 않고 일했고, 수없이 많은 낮과 밤들이 마치 손가락 새로 모래알들이 빠져 나가듯이 내 삶을 지나쳐 갔지. 그런데 최근 여러 날 동안, 나는 어떤 나쁜 일에 말려들어 장사를 거의 망쳤네. 그 일 때문에 걱정이 몹시 컸지. 그런데 바로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 바깥의 큰 길에서 중양절을 알리는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예전에 맺었던 약속을 기억해 냈네. 갑자기 무서운 현기증이 몰려 들었지. 자네 집과 내 집 사이는 열흘을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어떻게 단 하루만에 그 길을 다 가겠나! 나는 미칠 것 같았네. 그래서 결국, 오로지 내 넋만이 어두운 바람에 실려 그렇게 먼 길을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 난 아내에게 말해 두었지. '내 아우 장이 틀림 없이 내 장례식에 올 거요. 날 땅 속에 묻기 전에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시오' 라고 말일세. 그리고 아내의 손에 입을 맞춘 다음, 나는 내 목을 그었고, 그래서 여기 이렇게 자네와 약속한 자리에 올 수 있었다네. 사랑하는 아우여! 자네가 내 어리석음과 무심함을 가엾게 여겨 용서해 주기만을 바라네. 그리고 땅에 남은 내 마지막 육신이라도 만나 보기 위해 자네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겠다면, 그러면 난 원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 걸세."

 

이렇게 말하고 나서 환시는 몸을 돌려 문가로 나갔다. 그를 쫓아 나가던 장은 문지방에 걸려 차가운 밤 공기 속으로 넘어졌다. 장이 다시 일어났을 때, 환시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근처 수풀에서 날아 오르는 새들만이 눈 앞에 보일 뿐이었다. 장은 격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우가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장에게 따끈한 술을 조금 마시게 했고, 관자놀이를 소금 탄 물로 문질러 주었다. 마침내 진정이 된 장은, 제발 좀 쉬라고 애원하던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그는 집을 떠났다.

 

장은 여행하는 동안 적게 먹고 적게 잤다.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머물렀던 여관에서 떠났으며, 쉬지 않고 길을 가면서 딱딱한 밀떡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1주일 동안 계속 걸었던 장은 드디어 환시의 고향 마을에 도착했고, 그가 살던 집을 물어 단걸음에 뛰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이웃 사람이 와서, 그 집의 주인이 죽어 아내와 친구들이 모두 가파른 길 너머에 있는 언덕 위에 시신을 묻으러 갔다고 말해 주었다. 장은 곧장 그리로 가 보았다. 그는 커다란 관 옆에 서 있는 환시의 부인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열댓 살의 아이를 발견했다. 그들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겁이 난 얼굴로 무언가를 수군수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곳이 환시의 무덤입니까?"

장이 묻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대답했다.

"당신은 틀림 없이 그 분과 의형제를 맺은 장 숙부시겠군요. 그러면 숙부님, 슬픈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곳에 잘 오셨습니다. 제 남편은 며칠 전 돌아가셨는데, 자기를 땅에 묻기 전에 반드시 숙부님을 기다리라고 제게 당부를 하셨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친척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장례를 치르기로 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군요.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구도 관을 옮겨 놓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장은 몹시 슬피 울면서 죽은 친구의 관 앞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가 지나자, 시신이 들어 있는 떡갈나무 관은 어렵지 않게 들어올려졌다. 장은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환시는 절 위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절 부디 그의 곁에 묻어 주시기를.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흘릴 피를 보고 놀라거나 겁내지 마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장은 그렇게 말한 다음,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어 들고는 눈을 감고 자기 목을 그었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는 몹시 감동했다. 그는 이 일이 후대 사람들에게 하나의 귀감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두 사람이 비록 과거에 급제한 적은 없지만 그들에게 고관의 지위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 앞에 오늘날까지도 '신의의 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작은 사당을 세우도록 했다.

 

 

 

미치광이의 행복

중국

 

백만의 생명

넓은 바다에 비치는

백만의 태양도

단 하나 우주의 그림자이니

 

연못가 늙은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첸은 토끼 털로 된 붓을 들고 자신이 긴 명상을 하다 방금 전 평평한 돌 위에 적어 내려간 짤막한 시구를 바라보았다. 새 한 마리가 잔잔한 물 위를 스쳐 투명한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첸은 눈을 반쯤 감고 몽상에 빠져 들었다. 한 줄기 햇살이 파랗게 깎은 첸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사이, 한 마리 나비가 그의 옷 주름에 날아와 앉았다. 첸은 눈을 뜨고 그 화려한 나비의 날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연약한 잎맥 사이에서 길과, 마을과, 숲과, 쟁기를 끄는 농부들과 바다 위의 배들, 웅장한 궁전들을 발견해 냈다. 그 영상들은 곧 하나로 모였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구름이 만들어 내는 그림 같았다. 그 그림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죽은 자의 얼굴, 순박한 악의로 빛을 발하는 얼굴. 첸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오랜 벗 라오여, 마침내 우리는 화해했구려."

 

나비 날개 위에서 언뜻 나타난 영상의 주인공, 라오라 불리던 그 사내는 옛날 어느 마을의 농부였는데 극심한 불행에 그만 미쳐 버린 사람이었다. 다른 여느 날과 똑같던 어느 아침, 잠에서 깨어난 라오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하인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슬픈 생애 가운데 남자건 여자건, 아니 개마저도, 그를 돌보고 대접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아들마저도 그랬다. 라오의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에 묘한 경멸과 위엄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아마 아직 꿈에서 깨어나질 못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라오를 마구 흔들었으나, 그의 정신을 견고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는 못했다. 가엾은 라오는 누추하고 냄새 나는 방 한가운데서 제 가슴을 상상의 향유로 문질렀고, 눈에 안 보이는 하녀를 불러 자신을 만져지지 않는 수건으로 감싸게 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 마을 공터의 그늘 밑에 앉아 큰 소리로 주위 사람들을 불러 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라오를 조롱하고 놀려댔다. 라오는 수 없는 조롱과 멸시를 마치 숱한 아첨에 둘러싸여 어눌해진 군주와 같은 태도로 들었고, 홀쭉한 자기 배를 매만지면서 고관 대작이라도 되는 양 트림을 했으며, 평상시와 같은 아침 상을 차려 오라고 호령을 했다. 사람들은 라오에게 풀더미와 젖은 채소 찌꺼기를 던졌다. 라오는 그것들을 전혀 거리낌 없이 맛보았고, 손가락을 핥으면서 요리사들에게 자신의 치하를 전하라고 일렀다. 사람들은 곧 라오를 놀려 대는 일에 싫증이 났고, 점차 그의 광기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해서 라오는 자기 상상의 풍요로움 속에서 지냈고, 1년이 다 되도록 무분별한 정신으로, 그러나 행복하게 살았다.

 

첸이 화려한 도시의 삶에 싫증을 내고 라오의 마을로 가서 명상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라오를 치자(痴者)라고 부르고 있었고, 첸은 그 시절 나라 안에서 가장 훌륭한 명의로 손 꼽히고 있었다. 라오가 자기만의 성채 속 미로에서 즐겁게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본 첸은, 그 사내에게 자신의 의술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너그러움도 아니었고, 명예를 바라는 취미도 아니었다. 첸의 마음에 박차를 가한 것은, 광마를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내밀하고도 극심한 자신의 야망일 뿐이었다.

나라에서 제일 가는 의술로 단단히 무장을 한 첸은, 미친 라오의 정신 속으로 침입해 들어가 싸움을 벌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드레 째가 되는 날 아침, 치자는 명증한 의식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광인의 행복을 잃어버린 채, 두 눈을 비비며 비쩍 마른 자기 몸을 만져 보고 나더니, 자신의 비참한 행색에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난 그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서 1년 동안 극락에 있다가 이렇게 다시 아귀지옥 속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첸은 대답했다.

"이보게 친구, 자네의 절망은 날 끝없이 기쁘게 하네. 그것은 자네가 다 나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일세. 나의 의술은 이로써 완성되었네. 그러니 이제 내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게."

라오는 나가려는 첸의 옷 소매를 꽉 붙잡고 소리쳤다.

"개만도 못한 인간! 진흙 투성이인 내 누더기 옷을 좀 봐라. 비쩍 마른 내 몰골과 툭 튀어 나온 갈비뼈, 움푹 들어간 내 얼굴을 보란 말이다. 네가 이러고도 내게 건강을 되돌려 줬다는 거냐?"

첸이 대답했다.

"자네가 무척 여위었고 또 행색이 누추하다는 것은 사실일세. 그러니 가서 따뜻한 옷을 입고, 하루에 두 번씩 좋은 음식으로 섭생을 하게. 만일 자네에게 잘 먹고 잘 입을 만한 돈이 없다고 해도,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 나는 사람들의 몸을 돌보는 의원이지, 사회 악까지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럼 잘 있게나."

첸은 몹시 만족해 하며 사라졌다. 혼자 남은 라오는 너무도 심하게 절망한 나머지 자기 집 마룻대에 목을 매고 죽어 버렸다.

 

다음 날, 라오의 아들은 고을의 판관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 의하면, 의원 첸이 라오의 영혼에게 부주의하게 해독을 끼쳤으며, 또 자기가 끼친 해독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훌쩍 떠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첸이 미치광이의 행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이다. 첸은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고을의 판관은 곧 그를 소환했다. 첸은 자기 행위를 매우 단순하게 변호하고 나섰다.

"제 기술은 미친 자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 행위입니다. 저는 라오에게 제 정신을 찾게 해 준 것 뿐입니다. 그의 행복이란 애초에 환상이었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행복이 다 그렇지 않겠느냐?" 하고 판관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첸 너야말로, 미친 사람의 환상을 없애 버리겠다는 그 오만함 때문에 멀쩡한 농부를 죽음의 나락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 너야말로 미친 사람 아니냐?"

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판관은 판결을 내렸다.

"박식하긴 하나 현명하지 못한 자여!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살 것이다. 네 자신의 광기 때문에 정신을 잃을 유혹에 빠져 들 수도 있으니, 너는 네 거울들을 모두 깨뜨려야 할 것이다. 치자 라오가 언젠가는 널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가거라.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라."

 

그 후로 20년이 흘렀다. 어쩌면 그보다 더 흘렀을 것이다. 첸은 정확하게 얼마 만큼의 세월이 흘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똑같은 날들이, 계절과 구름의 변덕에 따라 다른 외양을 쓰고 끊임 없이 반복되었을 뿐이었다. 첸은 자만이라는 단단한 돌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첸은 다시 자기가 쓴 시를 향해 눈을 던졌다.

 

백만의 생명

넓은 바다에 비치는

백만의 태양도

단 하나 우주의 그림자이니

 

첸은 시구절이 적힌 돌을 물 속으로 던졌다. 한순간 그가 자신을 비쳐 보던 거울 같은 수면은 깨어졌고 나비가 날아 올랐다.

그리고 현명한 사내는, 바람 부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 잠들었다.

 

 

 

나무

인도

 

옛날 어느 나라에 진기한 나무가 있었다. 메마른 황야에 보이는 것이라곤 타 들어가는 밀밭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넓게 가지를 벌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 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 나무의 나이를 몰랐다. 그저 대지와 마찬가지로 오래 되었을 뿐이라고만 전해졌다. 아기를 못 낳는 여자들은 그 나무 밑에 와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빌곤 했고, 남자들은 몰래 그 나무 곁으로 와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곤 했으며, 늑대들도 달이 없는 밤이면 나무에게 와서 무언가를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열매는 매우 훌륭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두 팔과도 같은 커다란 나뭇가지를 따라 너무도 먹음직스럽고 너무도 황홀하게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열매들은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입과 손을 끌어들이곤 했다. 아이들만이 감히 그것을 맛보고 싶어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기이하고도 오래 된 진실을 가르쳐 주곤 했다. 열매들 중 절반은 독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이 든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열매의 외양은 모두 똑같았다. 거대한 몸통 위로 넓게 펼친 두 개의 가지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다른 하나는 생명을 담고 있었으나 그 중 어느 것이 사람을 먹이고 어느 것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열매를 쳐다보기만 할 뿐 만지지는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건조한 가을과 얼어 붙는 겨울도 지나갔다. 눈과 바람은 헛간과 양 우리의 지붕을 날려 버렸다. 초봄의 서리는 새싹을 시들게 했고, 나라 안에는 큰 기근이 몰아닥쳤다. 오로지 평원의 나무만이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열매들도 건재했다. 추위와 서리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성한 숫자로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지상의 늙은 조상만이 기적처럼 눈보라와 폭풍의 해를 입지 않은 것을 보고, 겁을 먹은 채 조심스레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나뭇잎들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금빛의 화려한 열매들을 맛 보고 나서 그 자리에 벼락을 맞은 듯 쓰러지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맛 보는 일 없이 그대로 굶어 죽든가.

확실치 않은 논의로 분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내가 용기를 낸 단호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에게는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내는 오른쪽 나뭇가지 밑으로 다가서서 열매를 하나 땄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고 그 열매를 깨물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래도 사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서로 밀치며 달려 나와 오른편 가지에 달린 열매들을 맛있게 따 먹기 시작했다. 열매를 딴 자리에는 즉히 다른 열매가 열렸다. 사람들은 끝없이 먹고 즐겼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의 두려움을 생각하고 웃으면서 8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은 두 개의 나뭇가지 가운데 어느 가지에서 해로운 열매가 열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왼쪽 가지였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증오와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가지를 두려워하다가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곧 결론을 내렸다. 그 가지는 위험하기만 할 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좋은 과실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으므로, 멍청한 아이가 언제라도 독이 든 과실을 따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마치 복수를 하는 듯한 즐거움으로 그 일을 실행했다.

그런데 다음 날, 오른쪽 가지에 났던 좋은 과실들이 전부 땅 위에 떨어져 썩고 있었다. 자기 몸의 반이 잘려 나간 나무에는 메마른 이파리 몇 장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껍질도 검게 변해 있었다. 가지 위에서 지저귀던 새들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아푸트라

인도

 

옛날 베나레스라는 도시에 살리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단한 학식을 지닌 브라만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런 남편의 학식과 덕망은 그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신들의 뜻과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간통을 범했고, 곧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렵고 수치스러웠다. 자비나 동정을 받을 만한 어떤 희망도 없었다. 그녀는 멀리로 도망을 쳤다. 어느 날 저녁, 도주하던 노상에서 그녀는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는 곧 종려나무 숲에 버려졌다.

소 한 마리가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와서 코를 킁킁대며 벌거벗은 조그만 아기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는 혀로 그 몸을 씻어 주었고, 모로 누워 자기 젖을 빨게 했다. 7일 동안 소는 길가 풀 더미 위에서 어린 아기를 길렀다. 그러던 중 수레를 타고 길을 지나가던 어느 학자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학자는 생각했다.

'이 아기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겠군.'

그는 신이 내린 선물인 그 아기를 팔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에게 아들이 생겼소. 이 애가 이제부터는 내 아들인 것처럼, 당신에게도 역시 아들이 되었으면 하오."

아기는 아푸트라라는 이름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고귀하게 길러졌다. 성년이 되자 아버지는 아이에게 신성한 노래들을 들려 주었다. 아푸트라는 노래들을 정확하게 잘 익혔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신에 대한 제물로 흰 털이 난 소를 바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새벽이 되면 소를 도살하기로 하고 승당의 왼쪽 구석에 묶어 놓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소는 구슬피 울며 떨었다. 아푸트라는 자정 쯤 되어 소를 보러 갔다. 그는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반항 못지 않게 가엾은 짐승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혔다. 그는 소가 도망치도록 도와 주기로 결심했다. 돌들이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 아이와 소는 마을 뒤에 있는 숲까지 뛰어 갔다. 그 바람에 짐승의 힘센 뿔과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던 화환 장식에서 꽃잎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아이는 보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소를 찾아 나선 마을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아이와 소가 숨은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와 소는 마을의 승당으로 다시 끌려 왔다.

아푸트라는 매를 맞았다. 마침내 무거운 몽둥이가 막 그의 머리를 향해 내려쳐질 찰나, 힘센 뿔을 곧추세운 소는 아푸트라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땅 위로 쓰러졌고, 소는 문을 뛰어 넘어 성큼성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푸트라는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째서 저 짐승을 죽이려고 하십니까? 저 짐승의 죽음이 과연 신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때 한 남자가 나서서, 너는 소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당의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가 아푸트라의 생모를 알고 있다고 선언했다.

"어느 날 나는 여행을 하다가, 끝도 없는 방황과 치유될 수 없는 우울증으로 진이 다 빠져 있는 한 여인을 만났소. 그녀의 이름은 살리였소. 그녀는 내게, 자기가 베나레스라는 브라만의 아내인데 그 선한 남편을 배반했기 때문에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고, 검은 눈의 남자 아이를 낳았지만 그 불륜의 씨를 종려나무 숲 속에 버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했소. 그 숲은 바로 아푸트라가 발견되었던 곳이오. 그 여인은 내게 자신의 과거를 다 이야기한 다음, 자기의 죄가 나중에 과연 용서될 수 있을지 없을지 내게 물었소.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소."

사제는 침묵한 청중들을 바라보더니, 아푸트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소년이 타락한 여인 살리의 아들이오. 저주 받은 피가 그의 몸 속을 흐르고 있소. 그의 모습은 우리 마을 전체를 더럽힐 것이오. 그러니 당장 여기서 쫓아 내시오!"

그러자 아푸트라가 대답했다.

"나, 그 여인의 아들은 여러분들께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준 그 여인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나를 신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이 종려나무 숲보다 더 먼 곳에 가서 나를 낳지 못했던 불쌍한 여인! 나는 이제 그녀처럼 길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을 구걸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푸트라를 마을 밖으로 몰아냈고, 그에게 돌을 던졌다. 아푸트라는 등을 구부린 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방황하던 어느 날, 아푸트라는 마두라라는 부유한 도시에 이르렀다. 아푸트라의 외모는 거지나 다름 없었다. 홀쭉한 뺨에 메마른 두 팔, 거기다가 여기 저기 구멍이 난 누더기. 그러나 아푸트라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따스한 인간미가 넘쳤다. 나무 그릇에 검은 빵 부스러기나 말린 야자 열매 같은 것이라도 떨어지면, 아푸트라는 그 비참한 보물을 몇몇 맹인들, 또는 마치 노인처럼 주름진 얼굴을 한 걸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는 행복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해 겨울까지 밖에서 살았다.

어느 겨울 밤, 추위에 지친 아푸트라는 부귀의 여신 락미의 신전 안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여신상의 무릎 위로 한 어린 아이가 기어 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의 다리는 너무도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괴괴한 어둠만이 가득한 텅 빈 신전에서, 아푸트라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달래듯 흔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만일 누가 있다면, 인간이든 신이든 아무래도 좋으니 길 잃은 빈자를 위해 조그마한 동정이라도 베풀 만한 그 누구라도 있다면, 제발 이 아이를 구해 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한 줄기 금빛 광선이 어둠 속을 밝게 비추었고, 그 및 속에서 락미 여신이 나타났다. 그녀는 아푸트라와 빈사의 아이가 있는 짚더미 가까이로 오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들아! 난 너의 선량한 마음을 안단다. 네게 이 그릇을 주마. 가져 가거라. 이건 마법의 그릇이다. 아무리 기근이 심할 때라도 이 그릇에는 언제나 좋은 양식들이 가득할 것이다."

락미 여신은 미소 짓더니, 그녀를 감싸고 있던 빛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버려진 공간 안으로 다시 어둠이 밀려 왔다. 지푸라기 옆에는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푸트라와 아이는 그 안에 있는 과일과 쌀, 좋은 고기로 실컷 배를 채웠다. 그 날 이후 아푸트라는 그 기적의 그릇을 남들에게 베풀었다. 신전 마당의 가난한 자들은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 오는 거지의 무리들로 우글대는 마을 앞 광장은 마치 세 떼들의 울음 소리로 가득한 밀밭 같은 형국이 되었다. 자비를 베푸는 아푸트라의 명성은 날로 커져 갔고, 그 소문은 세상으로 흘러 나갔다.

 

달이 뜨고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밤, 그 소문은 천상에까지 닿았다. 그러자 신들의 왕은 그 너무도 덕망있는 인간의 능력이 언젠가 자신의 권좌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거지의 누더기 옷을 입고 늙은이처럼 구부정하게 지팡이를 짚은 채 아푸트라에게 다가갔다.

"신성한 젊은이, 나는 하늘의 왕일세." 그가 말했다.

"난 자네의 미덕을 다 아네. 자네는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을 충분히 돌보았네. 이제 내 천국으로 가세나."

아푸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들의 왕이시여, 저는 당신의 천국을 조금도 원치 않습니다. 제 천국은 불쌍한 사람들이 있는 바로 이 곳입니다. 그 사람들이 제게로 올 때, 천국은 바로 그들의 눈 속에 있습니다. 그들이 이 고갈되지 않는 그릇 속에 손을 집어넣을 때, 천국은 바로 그들의 행복 안에 있습니다. 천국은 굶주린 어린 아이가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질 때,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천상의 아버지시여, 이렇게 매일 제게 베풀어지는 행복에 비하면 당신의 천국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신들의 왕은 입을 일그러뜨리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호령했다.

"네 자비는 내 맘에 거슬린다! 네 그릇은 이제 아무도 와서 찾지 않는 마른 우물처럼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내 뜻이니라! 잘 있거라, 철 없는 인간!"

신들의 왕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불러 모은 다음, 땅 위 사방에 안개와 소나기를 뿌렸다. 땅은 곧 과실과 초목들로 뒤덮였다. 쌀가마들은 헛간마다 터질 듯 가득 찼으며, 신선한 야채는 사막의 모래 위에서도 무성하게 자라났다. 신전으로 오는 거지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누구나가 길가의 버려진 밭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아푸트라는 기적의 그릇 옆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며 빈자들을 불렀다. 그는 모든 걸 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가지려 들지 않았다.

아푸트라는 사람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사랑을 받다가 내버려진 부자가 갖는 고통, 그런 기이한 괴로움을 알게 되었다. 결국 아푸트라는 다른 하늘 밑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 섬나라로 가는 배를 탔다. 배 안에는 부를 찾아 헤매는 몇몇 상인들이 있었다. 아푸트라는, 비참함과 가난을 만나려는 희망 밖에는 갖지 못한 자기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배는 어느 무인도에 닻을 내렸다. 아푸트라는 땅 위로 내려서서 나무 그늘의 신선함을 잠시 맛보았다. 그런데 곧 저녁이 되면서 졸음이 밀려 왔다. 아푸트라는 깜빡 잠이 들었고, 아푸트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선원들은 그를 섬에 내버려 둔 채 배를 출발시켰다.

잠에서 깬 아푸트라는 작은 섬 안에 오직 자기 혼자 뿐인 것을 알았다. 이제 오로지 세상 전부를 실컷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그의 마법 그릇은 오직 아푸트라 하나 밖에는 먹일 수 없었다. 아푸트라의 절망은 너무나 컸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섬 한가운데 있는 맑은 호숫가로 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착한 물들아, 내게 행복과 고통을 모두 안겨 주었던 이 그릇을 너희에게 맡기마. 만일 사랑을 잃은 어떤 사람이 언젠가 이 물가로 와서 나처럼 기도하면, 이 그릇을 그의 손에 들려 다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푸트라는 풀밭에 누웠다. 그리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하지만 태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푸트라의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영혼은 섬에 누운 자기 몸을 떠났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려는 정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느 나라의 왕자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야기하곤 한다. 그가 자기의 백성을 얼마나 성스러운 자비로 다스렸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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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날 무렵, 한 여인이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여인은 짐승 같은 한 남자의 아내였다. 남편은 여인을 매일 때렸다.

여인에게는 희망도 없었고 반항할 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아기가 생겼다.

여인은 뱃속에 든 아기의 목숨 때문에라도 더 이상 매를 맞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자기 남편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짜 냈다. 하지만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은 이번에는 자기의 가슴을 짜 냈다. 그러자 하나의 대답이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생겨났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여느 때처럼 몽둥이를 들었다.

여인은 그 때까지 자기도 모르고 있었던 어떤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너무도 신비롭고 감동적이었다.

남편은 이야기를 들었고, 몽둥이로 아내의 등을 내리치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홉 달 동안 계속해서 여인은 자기 뱃속에 든 생명을 보호하려는 일념으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자 남편은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을 세상에 가져다 준 태초의 어머니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이 땅은 오로지 몽둥이만이 말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