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9권 인 라이브러리 -1- 고요한 밤의 환상

「평안하세요 (ごきげんよう)」
「평안하세요 (ごきげんよう)」

상쾌한 아침인사가, 청명한 하늘에 메아리친다.
마리아님의 정원에 모여드는 소녀들은 오늘도 천사처럼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높다란 문을 빠져나간다. 더러움이 스치지 않은 몸과 마음을 감싸는 짙은 색 교복. 스커트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세일러 칼라가 펄럭이지 않도록, 천천히 걷는 것이 이 곳에서의 몸가짐. 물론, 지각 빠듯한 시간에 뛰어가는 경박한 학생이 있을 리도 없다.
사립 리리안 여학원 (私立リリアン女學園).
메이지(明治) 34년[1901년]에 창립한 이 학원은, 원래 귀족의 영애들을 위해 설립된 전통있는 카톨릭계 아가씨 학교이다. 도쿄도 내. 무사시노의 옛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녹음이 우거진 이 지역에서, 신의 가호를 받으며 유치부에서 대학까지 일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녀들의 정원.
시대는 변해, 원호가 메이지에서 3번이나 바뀌어 헤이세이(平成)가 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18년의 세월을 온실 속에서 자란 순종배양 아가씨가 포장돼 출하되는 시스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야말로 귀중한 학교이다.

 

도서관이란, 꿈으로 지은 성 같아.
그곳에 사는 책들과 가능하다면 친구가 되고 싶어.
개중에는 까탈스럽거나 낯을 가리는 그런 책도 있겠지만, 한번 친구가 되면 평생을 어울려 지내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거든.
잊지 마. 책으로 태어난 이상, 그 애들은 누군가에게 읽혀지길 줄곧 기다리고 있다는 걸.

 

 

 

▒▒▒▒ 인 라이브러리 Ⅰ ▒▒▒▒

 

그건 학원제가 끝난 이틀 뒤인 화요일 방과 후의 일.
당일날 시간이 안맞아 미처 반납하지 못한 여러 가지 연극도구들을 요시노 양, 시마코 양, 노리코 쨩, 이렇게 넷이서 체육관에 가지러 갔다. 장미관 1층에다 정리를 끝내고 한숨돌릴 즈음, 유미는 견디기 힘든 졸음이 쏟아져왔다.
「유미 양?」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도 서서히 슬로우 페이스가 된다. 조금 앞서 걷던 시마코 양이 이를 알아채고 뒤돌아보았다.
「왜 그래?」
「왠지 말야, 갑자기 무지 졸리는 거 있지.」
「몸이 안 좋아?」
시마코 양은 유미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고는, 「열은 없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냥 졸릴 뿐이라구.」
유미는 「후아아암」하고 하품을 했다.
「얘 좀 봐. 어제 제대로 안 쉬었지?」
요시노 양이 계단을 내려와 대화에 가세했다.
어제 월요일은 전국적으로는 평일이었지만, 리리안 여학원은 그저께 일요일이 학원제여서 그 대체휴일이 되었다. 그러나, 「대체휴일이 뭐땜에 있는건데」라고 정론을 들이대는 요시노 양만 해도 실제론 어제 휴식을 취하기는 커녕 레이 님이랑 놀러다녔다는 걸 유미는 알고 있다. 평일 오전의 영화관은 텅텅 비어서 아주 쾌적했다고 오늘 아침에 뽐내며 얘기해줬으니까.
「가족이 평소대로 활동을 하니까 늦잠도 못잤겠다.」
시마코 양이 감싸주었지만, 그 점에 있어선 유미는 전혀 신경 안쓰고 늦잠을 자는 타입이었다. 또, 후쿠자와 집안도 그걸 허용하는 분위기이고.
「......그보다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래. 낮에 뒹굴뒹굴했더니 밤에 눈이 말똥말똥한 거 있지. 시차 적응 못해서 멍해 있는 거랑 비슷하려나.」
그러자, 요시노 양이 톡 쏘듯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불 속에서 나 홀로 학원제 반성회 같은 걸 하니까 그렇지. 유미 양은 끙끙대는 타입인걸. 이럴 걸 그랬어, 저럴 걸 그랬어, 이러면서.」
「......그런 거」
아냐, 라고 딱 잘라 말 못하는 내 자신이 슬프다. 나 홀로 반성회와는 좀 다르지만, 잠이 들라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라 잠들지 못했다는 건 거의 맞다.
「분명 아직 학원제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이에요.」
그러면서 노리코 쨩이 계단을 내려오더니, 유미의 뒤로 돌아가 「웃차」하고 등을 안마해 주었다.
「어머, 고마워.」
「조금은 편해졌죠?」
「조금 정도가 아냐.」
극락~ 극락에 온 기분. 아, 리리안에 어울리지 않은 예려나. 하지만 천국~ 천국이라고는 잘 안하니까.
「주인공, 수고하셨습니다.」
귀엽구나, 1학년은. 시마코 양은 좋겠다. 이런 쁘띠 쇠르를 빨리도 찾아서.
(......어라?)
위험해. 뭔가, 이건───.
「유미 양은」
시마코 양이 중얼거렸다.
「언니가 곧잘 지적하셨지만, 정말 표정이 잘도 변하는구나.」
「헤?」
나왔습니다요, 오랜만에 「백면상」?
「노리코한테 안마 받으면서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올렸어?」
「왜 그런 질문을?」
「기분좋아 보이다가 갑자기 표정이 흐려져서.」
「......그런 거.」
아냐, 라고 또 다시 딱 잘라 말하지 못한다.
얕볼 수 없구만, 친구여.

 

2층에 들어서자 실내는 따뜻하고 좋은 향기로 감싸여 있었다.
「아아, 수고했어.」
「슬슬 돌아올 때다 싶어 차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어.」
레이 님과 사치코 님이 화사한 미소로 네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로사 키넨시스가 끓이신 차에 로사 페티다의 서빙!」
노리코 쨩이 환희의 탄성을 질렀다.「여기에 차가 로즈힙티면 장미 앙상블이겠네요.」 라고 했더니 정말로 그랬다. 아무래도 장미과자까지는 안 나왔지만.
「차 정도는 끓여줄 수 있어. 우리도 1학년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레이 님이 웃으며「그렇지?」하고 사치코 님을 돌아봤다.
「그럼. 언니들의 취향을 파악하거나 애용하는 컵을 기억해 두거나 그랬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만큼 필사적이었어.」
「왠지 믿겨지질 않아요. 로사 페티다도 로사 키넨시스도 줄곧 상급생인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면서 한숨을 쉬는 노리코 쨩. 확실히 유미도 두 학년 위의 선배들을 보고 자기들과 같은 나이일 때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러는 노리코 쨩도 벌써 상급생 같은 관록이 묻어나잖아.」
레이 님이 말했다.
「네? 당치도 않아요.」
노리코 쨩이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부정한다.
「진짜야. 우리 동생은 아직까지 애 같은데.」
「그건 우리 동생도 마찬가지.」
사치코 님도 한숨을 쉰다. 그렇다곤 해도, 홍과 황, 두 장미님도 참, 귀여운 동생을 앞에 두고 잘도 그런 말씀을. 아니, 본인이 있으니까 일부러 더 그러시는 건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 역시 머지 않아 쁘띠 쇠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관록이......앗」
놀림감이 되고 있는 친구를 옹호하려던 시마코 양. 하지만 이래서야 전혀 옹호가 안된다는 걸 도중에 깨달은 모양이다.
「무리야 무리. 특히 우리 요시노는 말야. 얼른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기다리고 있지만 찾는 기색이 전혀 없으니. 이 상태로는 손녀의 얼굴도 못본 채 졸업하게 생겼어.」
에리코 님과 요시노 양의 약속을 모르는 레이 님은 한가롭게 깔깔 웃었다.
앞으로 약 1개월 후면 제한시간이다. 지기 싫어하는 요시노 양이 저력을 발휘해 동생을 구했을 때, 요시노 양에게 목을 맨 레이 님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남 일이긴 해도 막상 걱정된다.
「그런 점에서 유미 쨩은 좋겠네. 유력 후보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다 1학년들한테도 인기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글쎄, 어떨까.」
어떨까, 라니요 사치코님. 살그머니 넘어가신다니까.「동생을 만들렴」이라고 프레셔를 넣은 게 누구신데요?
「유력 후보자라고 하니, 그 두 사람, 학원제 끝나고 정말 발길을 끊었구나.」
레이 님이 노리코 쨩을 보며 말한다. 노리코 쨩은 「유력 후보자」 또는 「그 두 사람」으로도 칭하는 마츠다이라 토오코 쨩, 호소카와 카나코 쨩과 같은 반이니까.
「어떻게 지내?」
「어떻게......라뇨. 그냥 둘 다 바쁘게 지내요.」
「바쁘게?」
「네. 그래서 좀전에도 유미 님이 모처럼 방문해주셨는데 교실에 없었죠. 토오코는 부활동이고, 카나코 양은 뭘 하고 있는 건지.」
노리코 쨩의 말을 끝까지 못 기다리고 요시노 양이 유미에게 물었다. 「흥미진진」이라고 얼굴에 써붙여놓고서.
「유미 양은 1학년 동백나무반에 뭐하러 갔어?」
「그냥. 인사할 겸 얼굴 보러 갔을 뿐이야.」
「흐응, 누구 얼굴?」
「누구,라니. 그야...... 두 사람 다지.」
샤프 하나라는 보수로 도우미를 받아들여준 그 둘에게 새삼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는 건 거짓없는 마음. 가는 김에, 라고 하면 좀 뭣하지만, 카나코 쨩을 만나면 약속했던 투샷 사진을 언제 찍을지 의논할 생각이었다. 카나코 쨩한테 특별한 요청이 없다면 그대로 2학년 소나무반까지 데리고 가서 츠타코 양에게 찍어달라고 할까 하는 가벼운 맘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들을 다 말했다간 「둘 중 누구?」라고 끈질기게 캐묻는 요시노 양이 더욱 성가시게 굴테니 잠자코 있었다. 나참, 왜 다들 카나코 쨩이랑 토오코 쨩 중 한 명이 쁘띠 쇠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유미는 한번도 걔네들을 동생으로 지명한 적이 없고, 걔네들 역시 동생 입후보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선례가 있어서겠지. 노리코 쨩은 시마코 양의 쇠르(동생)가 되기 전에 이미 장미관에 출입하고 있었다. 시마코 양도 작년에 그랬다는 것 같고. 선례. 선례. 선례. 대대로 로사 키넨시스는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이라 불리는 동생을, 그리고 그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이 다시 동생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이어져 왔다. 요시노 양은 아니지만,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인가' 하는 생각은 한다. 카나코 쨩이냐 토오코 쨩이냐, 그런 식으로 한정짓지 말고, 그렇다고 두 사람을 제외하는 것도 아닌───.
하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하지? 자신이 쁘띠 쇠르가 된 경위를 돌이켜봐도, 유미에겐 전혀 참고가 되질 않았다.
(설마, 지금 여길 박차고 나갔더니 문 바깥에 서있던 1학년과 부딪혀서 그걸 인연으로...... 라는 건)
무리, 무리.
(그럼, 은행나무 가로수길에 있는 마리아상 앞에서 1학년을 불러세우고는 타이라도 바로 매어줘볼까?)
..........
(그러니까 누굴──)
유미는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게 가장 문제인 것이다. 수많은 1학년 중에서 어떻게 하면 동생을 찾아낼 수 있을까. 찾기 쉽게 마크라도 붙어있으면 좋을텐데.
(그러게 말야.)
설령 마음에 든 1학년을 찾았다고 해도, 신청했다가 거절당할 수도 있고. 이미 언니가 있을 가능성도 있고. 프리(Free)라도 수차례 신청을 전부 거절하고 솔로를 지향하는 사람 역시 있을테지. 카니나 시즈카 님처럼.
실내에 떠다니는 로즈힙티의 향기가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실어왔다.

─── 로사 카니나.

 

 

 

▒▒▒▒ 고요한 밤의 환상 ▒▒▒▒▒

 

성냥개비 불꽃이 피워내는 환상.
그건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소녀를 가엾게 여긴 하느님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룰래야 이룰 수 없었던 소망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성냥팔이 소녀의 곁에 찾아왔다.
──너무나 좋아했던 할머니.
다음날 아침, 차가워진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렇기에, 설령 꿈이나 환상으로 치부한다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친다한들, 그 소녀의 소망은 분명히 이루어졌으니까.
그렇다면 난 불꽃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만약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미소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　　◇　　◆

그 날은 살을 에는 추위였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주위에 어스름이 깔릴 무렵, 한 소녀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다고 얼어죽을 지경은 아니다. 비록 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교복도, 코트도, 구두도, 머플러도 챙겨입고 있었으니까. 소녀는 성냥팔이가 아니었다.
(나도 참)
차라리 눈이라도 내리면 좋을텐데. 걸으면서 시즈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바스락바스락 마른 낙엽을 날리우는 초겨울의 찬 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어 마음속 조그만 거스러미를 거침없이 건드리는 듯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똑같이 차갑더라도 눈이 내리는 편이 훨씬 낫다. 조용히 소리도 없이 내려 공기 중에 흩날리는 흙먼지를 살짝 감싸주니까.
「눈」
문득 시선에 머문, 부티끄 가게 앞에 진열된 전나무의 바늘같은 잎에 점점이 내려앉은 하얀 솜. 그 옆에는 조그만 장화와 별 장식. 
촛불 모양를 본딴 색색의 네온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른 바 크리스마스 트리.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징글벨,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빨간 코의 순록. 거리에는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뒤섞여 걸죽한 믹스쥬스처럼 역겹다. 시즈카는 불빛에 몰려드는 벌레처럼 패션빌딩 앞에 훌쩍 멈춰섰다.
어쩌다 보니 서적코너가 있는 5층까지 올라갔지만 특별히 사고 싶은 책도 없어서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처음엔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곤 생각도 못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 말이요. 거기 리리안 여학원 학교코트를 입고 있는 긴 머리 아가씨.」
주위를 둘러보니 긴 머리에 리리안 코트를 입은 「아가씨」라 불릴 만한 사람은 자기 말곤 없는 듯했다.
「저 말인가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협소한 칸막이로 나뉜 점술코너 부스 중 한 곳에서 관상가가 이리로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다.
「한번 보고 가시죠.」
「아뇨, 괜찮아요.」
거절하고 그냥 지나가려 하자, 검정 일색의 복장을 한 그녀는 싱긋 웃었다.
「돈은 필요없어요. 마침 손님도 떨어진 참이었으니까요.」
「.....」
마침이라니. 시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빌딩에는 가끔씩 오지만 이곳 점술코너에 행렬이 늘어선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부스는 3개가 있지만 '용케도 이런 빌딩 안에 들어섰구나' 하고 언제나 감탄할 정도다. 물론 늘 그 멤버인지 어떤지 모르는데다, 시즈카가 오지 않는 시간대에 장사가 잘 될는지도 모르지만. 괜찮다며 거절은 했으나 그대로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해오는 의자에도 앉지 않고 계속 서있으니 관상가는 그걸 동의한 거라 해석했는지 멋대로 시즈카의 관상을 보기 시작했다.
「내년이 전환기일 듯하군요.」
「헤에...」
조금 놀랐다. 아닌 말로 관상가의 솜씨를 전혀 신용하지 않았는데, 약간은 볼 줄 아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어쩌다 소 뒷발로 쥐잡은 건가. 누구나 몇 년에 한 번쯤은 전환기가 찾아올테니까.
「그리고 좋은 일도 생겨요.」
「좋은 일?」
시즈카는 코웃음쳤다. 좋은 일이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
「아빠한테 복권이라도 사시라고 일러둘게요.」
참고하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그 자리를 떠났다. 더이상 관상가 맘대로 뽑아내는 점괘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가까운 장래에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도중 2층 플로어에서 「아냐」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시즈카의 내년 전환기를 맞춘 관상가가 한 말이다. 어쩌면 내년에 객관적으로 「좋은 일」이 자신에게 생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내년에 아무런 희망도 품고 있지 않다. 머지않아 찾아올 「전환기」라는 이름의 변화된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들, 별 감흥도 일지 않았다. 어째서 이토록 냉정히 있을 수 있을까. 주위가 크리스마스 분위기 일색으로 달아오르면 달아오를수록, 자신의 열정만이 식어가고 있다.
빌딩 안에는 이렇게나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시즈카는 홀로 고독했다. 춥지는 않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냥팔이 소녀와 마찬가지다.
1층 출구 근처에서는 상품진열대 공간을 평소보다 조금 줄이고 그만큼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에 힘을 쏟고 있었다.
「5시부터 타임세일! 지금이면 10퍼센트 세일에다 샴페인 한 병, 산타클로스 양초를 덤으로!」
이렇게 점원이 힘껏 목청을 돋구지만 6시부터 타임세일은 아마 20퍼센트 세일이겠지. 크리스마스 케이크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산더미처럼 수북히 쌓인 이 케이크들을 폐점시간까지 다 팔아치우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
「치킨 사세요. 뜨끈뜨끈해요」
새빨간 미니스커트 차림의 점원언니가 이쑤시개에 꽂힌 튀김을 내미는 걸 손을 들어 사양했다.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걸로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없다. 시즈카는 성냥을 사서 빌딩을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없었다. 현관이랑 복도의 등이 켜져 있는 걸 보면 나가신지 얼마 안된 모양이다. 신발장 위의 화병 옆에 「주문한 케이크를 가지러 다녀올게」라는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메모를 한 손에 들고 부엌에 들어갔다. 오븐 안에는 석쇠에 올려둔 닭이 이미 구워져 있었고, 냉장고에는 사발에 담은 샐러드가 역시 차갑게 보관되어 있었다. 
저녁 반찬 체크를 대강 끝내고 부엌에서 나오려던 순간, 엄마가 맞춰둔 건지 밥솥 타이머가 칭 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석쇠구이치킨이든 게살 통조림 과일샐러드든 주식은 밥공기에 담은 백미니까 이런 점은 역시 일본의 크리스마스다.
거실에 들어간 시즈카는 가방에서 통지표를 꺼내어 엄마의 메모랑 같이 벽 옆 찬장 위에 놓아두었다. 마침 쵸코봉봉캔이 눈에 띄길래 하나 집어들고는 소파에 풀썩 몸을 파묻었다. 앉고 나서야 에어컨은 커녕 실내등조차 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일부러 일어나서 켜고 싶은 맘은 안들었다. 복도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에다 옆집 정원에 장식된 일반가정에선 엄두도 못낼 호화로운 크리스마스 트리 전등 덕분에 어슴푸레하면서도 몽롱한 실내의 밝기가 도리어 운치있었다.
그렇게 피곤한 것도 아닌데. 한번 앉으니 막상 일어날 기분이 안났다. '엄마도 아직 안오셨고 하니 한동안은 이렇게 뒹굴거려야지.' 라고 맘 먹고는 쵸코봉봉 은박지를 벗겨 입에 물었다.
「응?」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허벅지 근처에서 뭔가 딱딱한 감촉이 전해졌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좀전에 샀다 깜박 잊고 있었던 100엔샵 스티커가 붙은 성냥갑.
「여섯 갑 한 팩에 100엔이라......」
적당한 가격인지 아니면 싼 건지 모르겠다. 성냥같은 건 여태껏 한번도 사본 적이 없었으니까. 왜 이런 걸 그렇게도 사고 싶었을까.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학교 도서관 소식지인 「라이브러리」 연말호에 「겨울에 읽고 싶은 책」이라는 특집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시즈카는 2주일쯤 전에 몇 권의 동화를 다시 읽었다. 아마 그게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크리스마스 캐롤」, 「눈의 여왕」. 「플란다스의 개」..... 그 안에 「성냥팔이 소녀」도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성냥팔이 소녀」를 읽고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어렸을 때는 굶주림과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이 그저 가엾고 불쌍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음의 문턱에서 환상이라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었던 할머니를 만난 소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꼭 비극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 어른들이 「딱하게도」라며 동정한 건, 그 하룻밤 사이에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소녀는「너무나 좋아하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행복했음이 틀림없는데.

그 때부터였다. 시즈카가 성냥개비 불꽃이 보여주는 환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환상이라......」
시즈카는 비닐을 벗겨내고 성냥갑 하나를 손에 들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바른 자세로 앉아 유리재떨이를 자기 앞에 갖다놓고는 성냥개비 하나를 켰다. 성냥은 생각보다 훨씬 밝고 힘차게 타들어갔다. 실내가 어슴푸레한 탓인지 불꽃이 비추는 곳만 묘하게 또렷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곳만이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같은 이공간이 펼쳐졌다. 성냥개비가 한가운데쯤 타들어가자 훅 불어끈 뒤 재떨이 안에 담았다. 집에서는 아무도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마치 유리세공품처럼 늘 반짝반짝하던 재떨이. 지긍은 타고남은 성냥개비가 하나 놓여 있다. 성냥불을 켜기 전과 켜고 난 후에 변한 점이라곤 그것 뿐.
당연하지. 환상따위 나타날 리 없으니.
그건 소녀를 가엾게 여긴 하느님이 선사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니까.
굶주리지도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으며 오히려 매일 건강하게 학교에 다니는 소녀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이다.
「쵸코봉봉 먹지말걸 그랬어.」
그랬다면 배고픈 성냥팔이 소녀의 심정이 조금이라도 와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내일 죽는다면 하느님이 환상을 보여주실까.」
하느님은 무얼 기준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실까. 유복한 환경에 둘러쌓인 어린 양은 내버려둬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또 한 개의 성냥을 켰다.
불꽃이 만들어낸 노란색 혹은 오렌지색의 양지. 그 안에서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두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 봐. 시즈카는 웃었다. 난 하느님의 손길 같은 걸 빌리지 않아도 내 힘으로 환상을 불러올 수 있다구. 아니, 이런 게 환상일 리가 없지. 단순히 좀전에 하교할 때 본 광경을 VTR을 재생하듯 재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손을 마주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
한 명은 반은 다르지만 시즈카와 같은 2학년. 다른 한 명은 한 학년 아래인 1학년. 두 사람은 쇠르(자매)다. 둘 다 서로 말은 없지만, 그녀들의 머리에 달린 한 쌍의 검은 리본이 행복을 상징하듯 빛나고 있었다.
시즈카는 다 타버린 성냥을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부러운 건 아니다. 그녀들 중 어느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들이 이토록 마음에 남는 걸까.
분명 생각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흐를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지 않은가.

시즈카는 다시 성냥 한 개를 켰다. 불꽃 속에서 떠오른다. 이번엔 마리아상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1학년. 얼핏 갸날퍼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강한 눈빛을 가진 그녀에 대해선 다소나마 알고 있다. 기다리는 상대는 한 번은 쇠르관계를 파기했던 언니. 그 언니가 나타나자마자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한다.
「절 동생으로 삼아주세요」
그것 봐.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시즈카는 쉽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학교 신문인 「리리안 학보」의 기사가 인상에 강렬히 남을 만큼 잘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나중에 그 영향을 받은 여러 자매들이 그녀들의 뒤를 따르듯 원래의 자매관계로 돌아오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서로 겹쳐보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녀의 행동이 고등부 학생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스스로 돌려준 로사리오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제로에서의 스타트가 아닌, 마이너스에서의 역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체면이라든가 세상 이목은 신경쓰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다. 참으로 호쾌한 성격에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 타버린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떨어뜨리고 새 성냥불을 켰다. 이번에 불꽃 속에 나타난 것은 공허한 분위기의 하얀 미인. 얼굴은 떠오르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질 않는다. 그 사람은 앞서 두 1학년이 나온 김에 잠깐 맘속에 떠올렸을 뿐.
바로 성냥불을 불어서 껐다. 그래. 자신이 보고 싶은 환상은 적어도 이런 게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모르겠어.」
시즈카는 머리를 감쌌다.
현실이 괴롭고 힘들어 누군가가 구원해 주기를 갈망하는 주제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제대로 표현 못한다니. 이래서는 하느님이라도 손길을 뻗어줄래야 뻗어줄 수가 없다. 지금의 시즈카에게는 성냥팔이 소녀가 바라던 할머니의 따뜻한 품이나 네로가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과 같은 무언가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 도와줘」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다. 창 밖에서 깜박대는 꼬마전등이 정신사납다. 냉장고의 낮은 신음소리, 밥솥의 보글보글 넋나간 웃음소리, 저기 먼 대로를 질주하는 구급차의 비명소리가 기분에 거슬린다.
나, 어떻게 됐나 봐.
하나하나 아주 미미한 소리. 평소에는 신경도 안썼는데.
『시즈카 쨩』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있었을텐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즈카 쨩처럼 야무진 애가 장미관에 한 명 더 있으면 좋겠어.」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그리운 전임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의 목소리다.
「어머, 지금도 야무진 요코 쨩이 있잖아.」
대답한 사람은 합창부 전임 부장.
생각났다. 이건 아직 시즈카가 1학년이었을 때의 한 장면. 장소는 음악실. 전임 로사 키넨시스는 전임 부장과 절친한 친구로, 합창부 부활동 시작 전이나 혹은 끝났을 즈음에 훌쩍 들러서 수다를 떨곤 했었다. 시즈카는 같이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악보 정리 같은 걸 하다 보면 자연스레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참고로, 「요코 쨩」은 전임 로사 키넨시스의 동생. 세대교체를 한 지금은 당당한 로사 키넨시스다.

「2학년은 그렇지. 요코 한 명만 있어도 별 문제없지만.」
「없지만?」
「1학년에 한 명쯤 더 있었으면 한다는 의미야.」
「흐~응」
그러고선 전임 부장은 시즈카의 어깨를 안고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 앤 안 돼. 언제 이탈리아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어머, 정말이니 시즈카 쨩?」
시즈카가 대답하기 전에 전임 부장이 끼어들었다.
「그런 식으로 거절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쇠르 신청이 들어오는데도 말이야.」
「혹시 그냥 구실 아냐? 실은 마음 속에 이미 정해둔 사람이 있어서, 남몰래 그 사람이 청해오길 기다리고 있다든가 말야.」
실제론 어떻냐며 슬며시 떠본다. 이번엔 전임 부장이 아무 말도 안해서 시즈카는 「글쎄요」라며 애매하게 웃었다.
「글쎄요라니, 그럼 진짜란 말야? 자아, 우리한테 이실짓고 털어놓으셔. 다리를 놔줄테니까. 귀여운 시즈카 쨩을 위해서라면 한 발이 아니라 두 발 다 벗고 나서지.」
「이봐. 경솔히 나서면 안 돼. 상대에게 이미 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랬다간 난장판이 되고 말걸.」
3학년 두 사람은 시즈카를 놔두고 멋대로 얘기를 진행시킨다.
「그래서? 그 사람, 동생 있어, 없어?」
바싹 몰아붙이며 묻는다.
「저기, 전 마음 속에 생각해둔 사람이 있다 라고는 한 마디도......」
「뭐야, 그런 사람 없어? 맥빠지네. 그럼 어때? 우리 하얀 꼬맹이 쪽에 한 사람 비는데.」
전임 로사 키넨시스는 뉘집 강아지처럼 말씀하셨지만 시즈카는 알고 있었다. 누굴 가리키는 건지.
「세이 쨩은 물 건너간 거 아냐?」
세이.
전임 부장의 입에서 새삼 그 이름을 들은 시즈카는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이 죄어오는 듯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시오리 양 때문에?」
전임 로사 키넨시스는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로사 기간티아 앙 부통(백장미 봉오리), 사토 세이 님에게는 동생은 없지만 강한 인연으로 맺어진 운명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몰라. 우리 사치코 쨩이랑 황장미네 레이 쨩에 나란히 견줄 만한 사람은 현재로선 시즈카 쨩 정도밖에 없는데.」
「영광입니다. 로사 키넨시스」
인사치레하듯 미소를 지으며 시즈카는 그 자리를 떠났다.
실제로 말은 안했지만,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에겐 장래 유학이라는 목표가 있어서요' 라는 말까지 준비해 뒀다. 사토 세이 님은 앞으로도 동생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던 무렵의 일이다. 그 시오리 양조차 동생이 될 수 없었다. 누가 그 사람의 동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지금 그 사람 옆에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한 명의 1학년생의 모습이 있다. 이런 미래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행을 미뤄왔던 게 아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시즈카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성냥불을 켰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느님, 절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떠안기 싫은 감정을 누가 마음 속에 키우고 싶어 하겠어. 이런 마음을 품은 채 이탈리아에 어떻게 가.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노래 같은 걸 어떻게 부르라구.
몇 번인가 헛손질한 끝에 겨우 성냥에 불을 붙였다. 빛과 함께 나타난 것은 하느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시즈카가 지금 가장 바라고 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로사 기간티아...., 사토 세이 님.」
「평안해라.」
그 사람은 싱긋 웃으며 시즈카를 맞았다.
「전 당신을 줄곧 좋아했어요.」
「그래? 고마워.」
말이 끝나자마자 윤곽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
들고 있던 각도가 나빴는지 성냥이 앞부분만 태우고 꺼져 있었다. 시즈카는 곧바로 다시 성냥을 켜서 환상을 불렀다. 이윽고 나타난 단정한 얼굴. 이 얼굴에 닿기를 얼마나 바랬는가. 시즈카는 살짝 볼을 만져보았다. 이건 꿈. 그러니 누구한테도 양보할 필요 없고, 아무 것도 상관할 것 없다.
「세이 님. 동경하고 있었어요.」
처음 만져본 그 피부는 차가웠고 표면은 마치 석상처럼 딱딱했다.
「그래? 고마워.」
웃음과 동시에 딱딱한 볼이 마치 모래가 떨어지듯 사르륵 무너져간다. 원래 사토 세이였던 모래는 발밑에 쌓이기도 전에 바람이 어디론가 옮겨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세이 님」
시즈카는 허둥지둥 성냥불을 켰다. 그러자 아까보다 조금 엉성한 모습의 사토 세이. 섣불리 만지면 또 부서지고 만다. 시즈카는 신중하게 다가가서 말했다.
「세이님, 정말 좋아해요.」
그러자.
「그래? 고마워.」
돌아오는 건 아까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뿐. 하지만 시즈카는 기다렸다. 성냥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한 마디 더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TV의 스톱모션처럼 멈춘 채 그 사람은 움직이질 않았다. 시즈카는 계속해서 성냥을 켰다. 그 때마다 가슴 속에 담아둔 말을 속속 꺼냈지만 언제나 그 사람은 미소를 띄우며 「고마워」라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을 들려줄 뿐. 아무리 성냥불을 켜도 이러한 반복이었다. 그래도 '다음엔 어쩌면' 하는 심정으로 계속했다.
여기서는 이렇게 「좋아해」를 연발하면서 현실 세계에선 단 한번도 고백을 한 적이 없는 탓이다. 이 환상은 어차피 자신이 만들어낸 것. 그리 친하지도 않은 후배에게 고백을 받은 사토 세이의 반응을 시즈카가 리얼하게 영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백받았을 때,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그저 웃으며 농담처럼 받아들일까. '이미 동생이 있으니까' 라며 진지하게 거절할까. 아니면─.
「세이 님, 기다려 주세요.」
점점 흐릿해져 가는 동경의 대상을 시즈카는 필사적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다려줄 리 없다. 그건 실체가 없는 환상.
「여기까지 와봐, 시즈카」
마치 그렇게 말하듯 흐릿한 상태로 등을 돌린다.
「기다려요 세이 님. 제발 절 여기서 구해주세요」
어느샌가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여긴 마음 속의 미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세이 님의 모습이 사라져간 어둠 속에서 보일 리 없는 그의 미소가 보였다.
「모르겠어요.」
시즈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니까 방황하고 있다. 모르니까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도.
「시즈카, 넌 뭘 바라는 거지?」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미 대답은 나와 있지 않아?」
그리고 목소리도.

 

「───」
주위를 둘러보자 시즈카는 손가락으로 쥔 부분만 남긴 채 다 타버린 성냥개비를 들고 원래의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옆집 트리 전등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지만, 냉장고나 밥솥에서 나던 소리는 조금도 신경쓰이질 않았다.
「다녀왔다.」
그 때 마침 엄마가 돌아오셨다.
「시즈카, 돌아왔어? 뭐하니, 불도 안켜놓고?」
찰칵 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몸을 감싸는 눈부신 빛.
「이제 왔어? 잠깐 졸았나 봐.」
기지개를 펴고 일어서려 하니까 손발이 얼얼하고 다리가 저려왔다.
「이게 뭐니?」
엄마는 재떨이에 쌓인 성냥개비를 금새 발견했다.
「성냥팔이 소녀 놀이라도 했어?」
「어떻게 알았어?」
시즈카는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냥. 보통 집이면 '담배라도 피웠나'하고 의심하겠지만 우리 딸만큼은 그럴 일이 없으니까.」
「왜?」
「목이나 폐에 안좋은 건 안하잖니.」
「하긴.」
확실히 그 말대로라며 웃었다. 엄마의 대답은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시즈카의 경우 「신뢰할 수 있다」같은 메스꺼운 말을 들어봤자 기분만 잡칠 뿐이었다.
「그래서, 뭐가 나왔는데?」
흥미롭다는 듯 캠프파이어의 흔적같은 숯검댕이 성냥뭉치를 바라보는 엄마를 보고 시즈카는 어깨를 떨구었다. 
「우리 집에서 나올 만한 건 오븐 속의 치킨이랑 냉장고 안의 게샐러드 정도잖아.」
「거기다 케이크겠지.」
엄마는 손에 든 크리스마스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두었던 근처 제과점의 20개 한정 특제 쵸콜릿 케이크다.
「안타깝지만 할머니 유령은 안나왔어.」
케이크 상자를 열며 시즈카가 보고했다. 그러자 부엌에 가려던 엄마는 「무서운 말 하지 마라」라며 돌아봤다.
「엄만 할머니 만나고 싶지 않아?」
「돌아가셨을 때는 귀신이라도 좋으니 만나뵙고 싶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생각 안 해.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성불하지 못하셨다면 안됐잖니.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았다는 말이니까.」
「미련......」
시즈카는 머랭 과자랑 파우더 슈가로 만든 산타클로스 인형을 입에 집어넣고 케이크 상자 뚜껑을 닫았다.
「얘도 참, 아빠도 아직 안 오셨는데 케이크를 먹으면 어떡해.」
엄마가 주의를 줬을 때는 이미 산타클로스는 입 안에서 녹아들고 있었다.
「지금 죽는다면 미련이 남을 원인을 하나 없앤 것 뿐이라구.」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아빠한테 복수하는 거지? 여름에 소면 먹었을 때 핑크면 가로채간 원한.」
「그런 거 아니다 뭐.」
「넌 옛날부터 당하면 끈질기게 기억했다가 상대가 잊었을 쯤에 보복했지.」
과연 엄마. 잘도 파악하셨다.
「그리고 뭔가 못된 장난을 계획할 때는 그런 얼굴을 하고 말야.」
「그런 얼굴이라니?」
「콜라를 다 마신 후처럼 상쾌한 얼굴. 얘, 너 대체 뭘 저지를 셈이니?」
「저지르다니, 사람을 트러블 메이커처럼 말하지 말라구.」
하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시즈카는 생각했다. 자신이 앞으로 하려는 일은 어떤 의미에선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킬 행동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과감히 해야 한다. 이젠 알았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원하는 건 그 사람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 시즈카만을 위해 자아낸 거짓없는 말.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효과적일까. 생각하고 있자니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고동친다.
「우선은 머리카락이라도 자를까.」
시즈카는 자신의 긴 머리를 찰랑찰랑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