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8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 -5- 드라마틱스

1

"에? 안계세요? 당번인데도요?"
사치코님이 계실 거라 생각하고 졸업생 두 사람을 교실로 모시고 갔더니, 정작 사치코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양호위원이 찾아와서는 사치코양을 데리고 갔어"
3학년 소나무반 학생은 유미한테 그렇게 설명한 후, 등 뒤의 전 장미님들을 보고,「아,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양호위원이 데리고 갔다니, 그럼 사치코님은 양호실에 가셨단 말인가요?"
"글쎄, 확실히는 잘. 그 때 여기 계속 바빠서 기억이 잘 안나네. 어머,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 할 필요없어. 사치코양 몸이 안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에이코 선생님이 불렀다던가 그래서 간 거니까.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놀면서 기다리지 그래?"
"하아"
사치코님 반인 3학년 소나무반의 기획은「맛있게 체력측정」. 게임감각으로 체력측정을 하면서 과자를 탈 수 있는 즐거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예를 들어보면. 벽에 딱 달라붙은 사탕을 떼내는「제자리 점프」라든가. 성적에 따라 쵸콜릿을 탈 수 있는「반복 사이드스텝」이라든가. 상체를 뒤집은 높이만큼 같은 길이의 밀개떡을 탈 수 있는「상체 뒤로 젖히기」 ─ 등. 비만을 걱정하는 아버지들에게는 역효과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는 인기만점이란다.
"어이, 한번 해보자"
재밌는 걸 좋아하는 세이님이 즉시 덤벼든다. 팔을 잡아끌린 요코님도「그래」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치코님이 올 때까지 시간 때우기로는 딱 좋다면서. 이렇게 되자「유미짱도 경쟁하자」는 권유에 유미도 에잇 팔을 걷어붙인다. 우선 자리가 빈「반복 사이드스텝」에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대기했다.
"시작합니다. 준비..."
스톱워치를 가진 파트담당의「스타트!」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이드스텝을 시작. 타탁 타탁하고 바닥에 붙은 하얀 테이프를 뛰어넘으며 오른쪽, 왼쪽으로 스텝을 밟는다. 하지만 시작하고 얼마 안있어 자신들이 새기는 리듬과는 다른 발소리가 후다다닥 들려오더니「맛있게 체력측정」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카나코짱?"
무심코 스텝도 따라서 멈추었다.
"유, 유미님"
들어온 카나코짱도 유미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곧「죄송합니다. 저도 끼워주세요」라며 세 명이 정원인 반복 사이드스텝 구역에 억지로 끼어들어서는, 이미 모두 멈춘 상황에서 혼자 사이드스텝을 시작했다.
"무, 무슨 일 있었니?"
"쫓기고 있어요"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곧이어 또 다다다닥 복도를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탁이에요. 모른 척 해주세요"
카나코짱은 필사적으로 사이드스텝을 밟고 있다. 큰 키를 조금이라도 눈에 안띄게 할 셈인지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자세로 사이드스텝은 상당히 힘들텐데.
"기록은 안되겠지만, 뭐 어울려볼까"
세이님이 카나코짱에게 맞추어 사이드스텝을 다시 시작했고, 유미도 뒤따랐다. 넷이면 자리가 너무 비좁다며 요코님은 빠졌다. 추적자는 교실 앞에서 일단 속도를 떨어뜨려 안의 상황을 쓱 보고난 후 다시 뛰어갔다.「모른 척 해달라」고 했으니 되도록 안보려고 했지만, 역시 신경쓰여서 뒷문을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 모습을 확인했다.
"오뎅..."
유미가 중얼거리자, 요코님 역시 그 사람을 보고 「유코...」라고 말했다. 세이님은 진지하게 사이드스텝을 하고 있었던 터라,「유코」를 못본 모양이다. 그 대신 뛰면서 카나코짱을 관찰한 듯, 끝난 후 유미에게 조그만 목소리로「이 애, 배후령짱이지?」라고 속삭였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카나코짱을 유미가 불러세웠다.
"무슨 일인데?"
"그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 바람에. 그래서 도망쳤더니 쫓아와서요"
"어"
어째서 만나고 싶지 않니, 라고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켰다. 이건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몰라. 그 때, 사치코님이 교실로 돌아왔다.
".... 카나코짱. 어째서?"
사치코님은 같이 있는 게 뻔히 보일텐데도 요코님도, 세이님도, 하물며 유미도 아닌, 카나코짱에게 곧장 다가갔다.
"잠깐 따라오렴"
"하아? 어디로요?"
"양호실로"
"왜요?"
카나코짱과 마찬가지로 유미도「왜?」,「어째서?」 같은 의문부사만이 비누거품처럼 퐁퐁 머릿속에 생겼다 사라졌다.
"가면서 얘기할게. 유미도 따라오도록 해"
그렇게 말한 후, 사치코님은 돌아서서 요코님 앞으로 나아갔다.
"언니"
"바쁜가 보네"
"죄송합니다. 모처럼 와주셨는데 소란을 피워서"
"신경쓰지 마. 우리들도 볼 일이 생겼으니까. ... 나중에 또 만나자"
세이님이「우리들 볼 일이 뭔데?」라고 물어봤지만 요코님을 그저 미소지을 뿐, 세이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사치코님과 카나코짱과 유미, 이렇게 셋이서 인파를 헤치며 복도를 걷고 있는데, 조금 앞쪽에 토오코짱의 모습이 보였다.
"토..."
유미가 손을 들며 말을 걸려 하자, 토오코짱은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대로 뛰어갔다.
(이쪽을 보고 있나 했더니 우릴 못봤나.)
그 앞은 체육관으로 통하니까 단순히「작은 아씨들」준비를 위해 서둘러 간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유미는 작아져가는 토오코짱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아까 호시나 선생님이 부르셨어"
걸으면서 사치코님이 말햇다.
"양호실에 아버지가 오셨으니 만나러 오라며 양호위원이 선생님 말씀을 전하러온 거야. 이상하지 않니?"
"에? 토오루 고모부님이 오신 건가요?"
유미가 물었다. 그렇다면 사야코 고모님도 함께 오셨을까. 하지만 사치코님은 아니란다.
"아버님은 그저께 갑자기 뉴욕으로 가실 일이 생겨서, 어제 오후편으로 나리타에서 출발하셨어"
나리타에서 뉴욕까지 얼마나 걸릴까 유미는 생각했다. 바로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 도쿄에 계실지 어떨지.
"뭔가 착각한 거라 생각했지만, 일단 양호실에 가봤지. 역시 사람을 잘못 본 거였어. 그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 왜 언니를 불렀을까요?"
"양호 선생님이 착각한 거야. 그 아버지란 분이 따님을 만나러 왔다고 그러는데다 내 이름이 적힌 티켓을 들고 있었으니 오해하신 모양이야"
"엣?"
한 가지 의문이 풀렸나 싶더니 또 다른 수수께끼가. 그럼 어떻게 사치코님 티켓이 다른 학생의 아버지에게 넘어간 거지. 그러자 사치코님은 웃었다.
"다음에 스구루씨를 만나면 뜨거운 맛을 듬뿍 보여줘야지"
"스구루씨라니. 그럼 범인은 카시와기씨였어요?"
"그래"
외모 등의 특징으로 보건데, 무단으로 티켓을 넘긴 사람은 카시와기씨임에 틀림없다고 한다. 나참 그 사람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거람.
"조금 놀랐어. 양호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호 선생님이 실은 동생도 왔다고 그러시잖아. 유미를 말씀하시는 건가 했더니 아니라고 그러시고. 혹시 아버님의 숨겨둔 애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릴 스쳐가고. 어때, 심장에 나쁘다는 생각 안들어?"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나코짱의 발이 갑자기 멈췄다. 양호실까지 약 3미터 정도 남은 거리였다.
"왜 그래, 카나코짱?"
사치코님이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카나코짱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아무 것도 아녜요」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심각한 표정. 
"설마"
대신 유미가 말했다.
"그래, 유미. 안에 있던 분은 카나코짱 아버지셨어"
카나코짱의 아버지, 란다.
"에엑─!!"
그건 뭐랄까 굉장한 우연의 일치다. 교실로 돌아온 사치코님이 카나코짱을 보고 놀란 것도 얘기를 다 듣고난 지금이라면「아하」, 수긍이 간다. 사치코님은 카나코짱의 정면에 섰다.
"카나코짱. 난 억지로 만나라고는 말 않겠어. 그러니 참견은 여기까지야. 만날 생각이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 안에 들어가. 만나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도 좋아. 단,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떨어져 살고 있으니까 다음엔 언제 만날는지 알 수 없어. 아니 어쩌면 평생 못만날 지도 모르지. 그제서야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고 후회해본들 때는 이미 늦으니까"
참견은 여기까지야. 억지로 만나라고는 말 않겠어. ─ 그렇게 말하면서 사치코님은 간접적으로「만나라」고 하시니, 충분히 참견이라 할만한 어드바이스가 아닐까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풍수지탄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자성어] 이라는 말 그대로야"
한숨을 푹 내쉬는 사치코님. 그러자 아무 말없이 서있기만 하던 카나코짱이 그제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버진, 왜 양호실에 계시죠? 어디 몸이 안좋으신 건가요?"
"글쎄. 난 아무 것도 몰라. 단지 양호 선생님 말씀으론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양호실에 들어왔다나 보던데. 침대를 빌릴 수 없냐고 그러면서"
그걸 들은 카나코짱은 그야말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양호실에 뛰어들어갔다.
"아버지!"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듯이 쳐다보던 사치코님은 유미에게「거짓말은 안했어」라며 싱긋 웃어보였다.

 

 

2

"카, 카나코...?"
카나코짱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다. 카나코짱이 뛰어들어 갔을 때는 호시노 에이코 선생님의 책상 앞에 의자를 끌고와 앉아서는 한창 잡담중. ─ 다시 말해 펄펄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어도 키가 엄청나게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카나코짱의 아버지구나 라고 유미는 생각했다.
"아, 아버지 재수없어!"
몸이 안좋아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연하게 있으니까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부친의 일로 난리를 피웠다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함일까. 이유는 아무튼 간에, 카나코짱은 입을 떼자마자 제일 먼저 아버지를 「재수없어」라고 매도했다.
"카나코짱, 우리들은 이쯤에서"
양호실로 내딛었던 발을 동시에 복도로 되돌리는 홍장미 자매. 아무리 사치코님이라도 이런 전개가 되리라곤 예상못했던 듯하다.
"상관없어요. 두 분 다 들어주세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를"
카나코짱은 아버지를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게"
그러면서 카나코짱의 아버지를 보니 각오를 했는지「함께 계셔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재수없어」라는 말을 듣고만 아버지라니, 대체...
"이 사람은"
카나코짱은 말했다.
"일본 농구대표였는지 뭔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꿈 속에서 살고 있어요. 함께 살았을 때는 어머니를 밤낮으로 일하게 만들고선 자신은 집에서 뒹굴거렸고. 가끔씩 후진양성인가 뭔가 잘난 척 떠들어 대며 코치같은 걸 하긴 했지만 그건 일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에 지나지 않아요"
거기까지 단숨에 내뱉은 카나코짱은 씩씩거리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반론없어?"
"... 응. 그 말대로니까"
그 말대로구나,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지금 카나코짱이 나열한 아버지에 대한 불평 중에서 대체 어떤 것이 카나코짱이 남자를 그토록 혐오하게 만든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렇다. 요즘은 남편이 가사일을 전부 책임지고, 아내가 직장나가는 부부도 늘어가고 있고. 게다가 남편을 일하게 하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아내도 있으니까, 남자만 틀려먹었어 라는 것도 공감이 안가는 얘기다. 꿈만 꾸고 산다는 건, 바꿔 말하면 꿈을 계속 이어나간다고도 할 수 있고. 코치를 맡아서 도움이 된 사람도 있을 거고.
"그래. 어머니가 매일 밤 술에 절어 지내는 것도, 내 키가 이만큼 자란 것도, 연극 대사를 제대로 못외우는 것도, 전부 아버지 잘못이야"
"저기, 호소카와양. 그걸 전부 아버님 탓으로 돌리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에이코 선생님이 진정시켜 보려고 했지만, 역효과. 카나코짱은 실내화로 바닥을 쾅 밟으며 발작을 일으키듯 잘라 말했다.
"전부, 전부, 아버지 잘못이야!"
한 순간,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카나코짱의 분노 파워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응. 아버지가 잘못했구나"
카나코짱의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카나코 말대로다. 전부 이 아버지가 잘못했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말이 마법을 푸는 주문이었는지 카나코짱의 험악한 표정이 점점 무너져갔다.
"카나코짱?"
"나, 나도"
이윽고 울상이 된 카나코짱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었어.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는 건 일에 보람을 느껴서 그렇다는 것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희망을 아버지가 들어줬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도 어머니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아버지한테 발산하니까, 그대로 함께 살면 서로 상처만 줄 뿐이라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려고 그랬던 거잖아"
어라라. 어떻게 된 일인지 카나코짱은 이번엔 아버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난,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어. 키도 크고, 농구도 잘하고. 아버지가 우리 중학교 농구부 임시코치로 왔을 때, 어머니한텐 미안하지만 매주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데.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뭐야, 알고 보니 좋은 부녀잖아, 라고 유미가 생각하던 그 때. 카나코짱이「그렇지만」 하고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유코 선배한테 한 짓만큼은 죽어도 용서못해"
유코. 어라, 오늘 그 이름을 듣는 게 몇 번째더라.
"강제로 임신시켜서 모처럼 들어간 고등학교도 그만두게 만들고. 농구 선수가 되는 꿈마저 아버지가 부숴버렸어"
우왓, 갑자기 엄청나게 심각한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예상대로 사치코님은 유미 옆에서 굳어버렸다.
"잠깐 있어 보거라"
여학교 양호실에서 여자의 적으로 매도당한 카나코짱의 아버지는 허둥대며 스톱을 걸었다.
"아버지가 전부 잘못했지만서도, 강제로란 부분만큼은 정정해 주거라"
"거짓말. 유코 선배는 줄곧 남성혐오증이었어. 중학교 때 언제나「남자따위 필요없어」그랬는걸. 중학교 졸업해서 겨우 반년 새에 뭐가 변한다는거야. 아버지가 뭔가 했을 게 뻔하잖아"
다시 말해, 강제의혹에 대해선 일단 제쳐두고, 카나코짱의 아버지는 카나코짱의 중학 시절 선배와 어떻게 되어버렸고, 그 선배는 아이가 생겨서 고등학교를 중퇴, 동시에 농구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인가 보다. 그리고 이름은 유코.
"유코한테 물어보거라"
카나코짱의 아버지가 말했다.
"물어봤어. 어머니가 정식으로 이혼한다고 하셔서, 그 이유를 듣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유코 선배를 만나러 갔더니, 유코 선배 울고 있었어. 이럴 리가 없었다면서. 아버지가 유코 선배의 인생을 망친거야. 그렇지!?"
"그렇지 않아!"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유미 일행은 앞에서 일어나는 부녀 다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양호실에 사람이 들어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카나코. 미안. 그게 아냐. 전부 오해라구"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까 「오뎅은(전화)」을 찾고 있던 소녀가 서 있었다. 어째선지 요코님과 세이님도 함께. 아, 그랬구나. 이 사람이 유코씨. ─ 뭐야, 고양이가 아니었잖아.「오뎅은」씨→고양이 유코→유코씨는 「오랜만이야」라고 카나코짱에게 살며시 웃어보인 후, 카나코짱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학교에 들어왔다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공중전화를 찾질 못하는 바람에"
유미는「우왓, 역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니 뭐가 아니란 거죠?"
카나코짱은 차갑게 유코씨를 봤다.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천천히 카나코짱 앞으로 다가서는 유코씨는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나 있지, 고등학교 들어간 지 얼마 안있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어. 완치는 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농구는 이제 그만두는 게 좋대"
부활동 고문 선생님에게 상담했더니「매니저 하지 않을래?」라고 권유를 받았다는 유코씨.
"다쳤든 다치지 않았든, 레귤러를 차지하긴 어려웠을 거라고 그러셨어. 참 마음 상하더라. 하지만 그 말이 맞아. 중학교 때는 농구로 그럭저럭 성적을 올렸지만, 고등학교가 되니까 나같은 것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뿐이었어. 키도 더이상 안크고 말야. 객관적으로 보자면 뭔가 다른 일을 시작하기엔 마침 좋은 기회일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직접 볼을 쫓고 싶었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혼자서 고민고민하다가, 문득 호소카와 코치... 카나코 아버지를 생각해 냈어. 역시 옛날에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코치라면 내 기분을 이해해줄 거라고 말야.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전화를 걸고 있었어"

그리고 두 사람은 가끔씩 만나게 되었다. ─ 그렇게 유코씨는 설명했다.
대강의 사정은 잘 알겠다. 하지만 당사자와 카나코짱 이외의 사람, 즉 유미와 사치코님, 요코님, 세이님, 에이코 선생님은 남의 집안 사정을 무심코 들어버린 탓에 솔직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그저 서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살짝 양호실을 빠져나가면 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 내용이 지나치게 심각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소리를 내는 것도 꺼려졌다.
유코씨는 말을 이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고 한 건, 임신한 일이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일을 가리킨 게 아냐. 카나코를 이토록 슬프게 만들고 말았다. 내가 옛날에 맛본 것과 같은,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뺏겨버린 괴로움을 카나코에게 맛보게 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후회가 되어서 울었던 거야. 난 2살 아래인 카나코가 귀여웠어. 정말 내 동생처럼 귀여웠어. 하지만 바보같은 난, 하필이면 카나코의 아버지를 좋아하게 된 거야"
"좋아하게 됐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카나코짱은 되물었다.
"그래. 좋아하게 됐어. 그러니까 카나코가 나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 책임이야"
유코씨는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난 그 때, 피하지 말고 말했어야만 했어. 카나코의 아버지가 멋진 분이었으니까 난 좋아하게 된 거라고.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미움받더라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려줬어야만 했는데"
그리고는 카나코짱을 살짝 안았다.
"미안. 카나코"
"유코 선배, 유코 선배"
키가 큰 카나코짱이 머리 하나만큼 작은 유코씨에게 매달려 눈물을 흘렸다. 울먹울먹, 훌쩍훌쩍.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다섯 명의 여성도 뺨을 적시던 중.
"우어어어엉!"
갑자기 땅바닥에서 분출한 듯한 커다란 소리가 양호실을 뒤흔들었다. 보니 카나코짱 아버지가 우뚝 버티고 서서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굉장해. 성인남자가 애처럼 울고 있어. 조금 놀란 탓에 자기도 모르게 유미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버지, 보기 흉하니까 그만해"
"으, 응. 그렇구나"
필사적으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흐느껴 우는 카나코짱 아버지. 그런데도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우와아아아앙"
어라, 어째서? 카나코짱 아버지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모두들 서로 마주보았다.
"아차, 깜박했구나"
허둥대며 칸막이 건너편으로 달려가는 카나코짱 아버지. 그리고 짚이는 데가 있는지 뭔가 눈치챈 듯한 표정을 짓는 여성들.
"침대에 누가 있나요?"
짚이는 데가 없는 유미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곧 그 대답이 눈 앞에, 그러니까 칸막이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카나코짱 아버지가 안고 나타나 것은 1살 될락말락한 아기였다.

"아까 여기서 기저귀를 갈아입혔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잠들었는데. 분명 아버지가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깬 모양이다"

아기는 아버지한테 안겨 진정이 됐는지 얼굴이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되었으면서도 생긋 웃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카나코짱이랑 닮았다.
"치카코(次子). 다음 아이[次の子]라고 쓴단다"
"치카코"
이름을 부르며 카나코짱은 자기 동생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안아봐"
유코씨가 치카코짱을 아버지한테서 안아들고 카나코짱에게 내민다.
"무, 무리예요"
"괜찮아. 이제 안정이 되었으니까. 조금 어떻게 한다고 안부숴진다구. 그래, 나도 거들어줄게"
카나코짱이 흠칫거리며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 누군가 유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돌아보니 사치코님이 눈으로「가자」며 신호하고 있었다. 요코님도 세이님도 에이코 선생님도, 이미 양호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단란한 가족, 은 아니지만 잠시동안 네 사람만 있게 해주자는 의미이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그리고 유미도 양호실을 나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복도 쪽은 양호실과는 다른 세계였다. 여전히 학생들이랑 손님들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아 참, 오늘 학원제였지.
"그럼 우리들도 어디 둘러볼까?"
세이님이「우웅~」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아직 1시 30분 좀 안되었으니까─"
요코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작은 아씨들」!"
에, 그러니까, 양호실에서 체육관으로 어떻게 가더라. 소형 패닉을 일으키고 있는 유미에게 사치코님이 손가락으로 복도 저편을 똑바로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 가 있으렴. 우리들은 나중에 뒤따라 갈테니까"
클라크 박사 동상같은 언니를 황홀한 눈으로 보면서「넷」하고 대답. [윌리엄 클라크박사 : 세계적인 식물학자 겸 농학자.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명언으로 유명. 일본에 건너와 "훗카이도의 개척자"로 추앙받으며 삿포로 근교 모와이산에 그의 동상이 세워짐]
"아, 에이코 선생님. 카나코짱한테「토리카에바야」할 때 지각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럼"
선생님이랑 학생회장 앞이라지만, 유미는 복도를 뛰어 가기로 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속도를 내진 못했다.
"유미짱 왜 저리 서두르는거니?"
뒤에서 요코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극부 무대에, 산백합회 도우미를 해주고 있는 1학년이 출연하거든요"
사치코님의 대답이 작아져 간다.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모깃소리 같았지만, 확실하게 들려왔다.
"아아, 그 전동드릴?"
- 뭡니까 전동드릴이, 세이님 나빠요.

 

 

3

토오코짱의 에이미는 훌륭했다. 연극부「작은 아씨들」은 대성공이었고, 몇 차례나 앙코르를 받았다. 그런데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잘 아는 사람이 나오면 커다란 박수갈채에 절로「고마워요」기분이 되는 건 어째서일까.
"어쩜, 이미 볼장 다봤다는 얼굴 그만해. 아직 우리들 연극이 남았으니까"
막이 내리고 체육관 출구에서 다시 만난 사치코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넷! 지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렷, 경례했더니 언니는「그럼 그래야지」라며 웃었다.
"연극이 끝나면 함께 학원제를 둘러보자. 카나코짱 일도 있어서 아직 사진부도 못들러봤으니까"
와, 데이트다.
"전 벚꽃정에도 가고 싶어요"
"알았어"
"언니, 커피랑 쿠키 사주세요"
"싫어"
"에엣"
"둘이서 오라며 무료표를 받았는 걸"
전날 시식해준 보답으로 인원수 만큼 놔두고 갔단다. 사치코님은 2장의 식권을 팔랑팔랑 흔들며 웃었다.
"그런 거였구나"
팔짱을 끼고선 그대로 대기실로 사용하고 있는 탈의실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안에 아직「작은 아씨들」의 출연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제히 주목을 받고 말았다.
"아, 실례했어요"
허둥대며 구석으로 이동한다. 유미는 슬쩍 탈의실 안을 둘러봤다. 대기실 집합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요시노양 페어도, 시마코양 페어도 아직 안보인다. ─ 그러다가 한 지점에 눈이 멈췄다. 저 뒷모습은 토오코짱이다. 모두 비슷비슷한 의상을 입고 있는데도, 그곳만 공기가 찌릿찌릿하고 있으니까 바로 알아봤다. 게다가 그렇게 수선을 떨며 들어왔는데 혼자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죽어도 뒤돌아볼까 보냐, 그런 느낌조차 들었다. 
"언니"
유미는 옆에 있던 사치코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실 집합시간에 15분 정도 늦어도 괜찮을까요?"
요청을 받은 사치코님은, 한 순간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곧 조용히 끄덕였다.
"....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서, 토오코짱 뒤에 섰다. 아무 것도 안묻는 걸 보면, 사치코님은 이제부터 유미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채신 모양이다.
"토오코짱, 참 잘 하더라"
"지각한 주제에"
아, 복도에서 본 것과 똑같은「휙」이다.
"어라? 알고 있었어? 그래도 토오코짱이 맨 첫 대사를 하기 전에 왔다니까"
등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살짝 얼굴을 엿보려 하자, 도망치듯 갑자기 걸어가기 시작했다.
"옷갈아 입을 거니까 거기 비켜주세요"
토오코짱도 참, 걸어가면서 등 뒤의 지퍼를 내리려고 몸을 뒤척이니까 좀처럼 붙들기가 애매하다. 도와줄까 하고 손을 내밀면「건들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뿌리치려 들고.
"토오코짱, 저기 있지, 그 옷 벗고 나서 그대로「토리카에바야 이야기」의상을 입을 거니?"
"물론... 그럴 건데요?"
"그걸 벗고, 일단 교복을 입은 다음 다시 교복 벗고, 그리고 나서「토리카에바야」의상을 입으면, 역시 귀찮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럼, 아예 이대로 나가지 않을래?"
"하아?"
토오코짱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얘도 참, 약속했잖아. 토오코짱이 1학년 동백나무반을 안내해 주기로"
"지, 지금요?"
"그래. 미안하지만 지금밖에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잘 부탁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손을 쥐었다. 다행히 지퍼도 아직 내리지 않은 상태고.
"사치코언니~"
손을 끌려나가며 도움을 요청하는 토오코짱. 하지만 사치코님은.
"유감이지만 지각 25분까지는 잠자코 있겠어. 하지만 25분에서 1분이라도 지났다 하면 그 땐 용서안할 거야"
"허락이 떨어졌다. 자, 빨리"
"저게 어디가 허락이라는 겁니까!?"
토오코짱은 끌려가면서 항의해 보지만. 몰라 주는구나. 사치코님의 저건, 명실상부한「허가」라니까. 탈의실을 나서자 토오코짱은 겨우 항의하는 걸 멈추었다. 체념한 건지, 아니면 날뛰는 걸 남들이 보면 꼴사납다는 걸 깨달은 건지.
"어이, 유미? 어디 가?"
도중에 복도를 따라 딱 마주친 유키가 체육관에서 역방향으로 달려오는 누나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불러세웠다.
"유미양? 어머, 토오코짱도?"
노리코짱과 함께 걸어가던 시마코양 역시 눈이 동그래졌다.
"시간없으니까 나중에 봐"
양쪽 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교사를 향해 돌진했다. 구식 드레스를 몸에 걸친 토오코짱은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무슨 퍼포먼스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 유미는 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교회에서 신부를 훔쳐 함께 달아나는 옛날 영화.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유명해서 알고 있다.
"약속같은 건..."
토라진 얼굴로 달리면서도, 에이미는 마주잡은 손을 꼬옥 쥐었다.

 

 

4

 

「산백합회판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는 대혼란과 대폭소인 가운데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야쿠시지 형제가 사고를 쳤다. 연습 때 그렇게 반복해서 확인했는데도 역시 본 무대에서 자기 위치를 착각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안그래도 쏙 빼닮은 두 사람인데다 출연자도 스탭도 막이 열리고 난 뒤로는 자기 일에 정신없었기에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대사가 반대방향에서 들려오자 사태를 파악한 사치코님의 재치로, 무대 오른편과 왼편에서 대기중이던 후쿠자와 남매가 무대 아래 통로를 질주해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거친 방법을 써서 해결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등장씬에 나타난 주인공 두 사람은 무대가 막 시작했는데도 전력질주한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고, 그 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까지 연습 때와는 좌우가 뒤바뀐 연기를 계속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 원인을 제공한 야쿠시지 형제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등장씬에서 유미짱 왜 그리 숨을 헐떡였어?"
"그러고 보니 유키치도 숨을 헐떡이던데"
"....."
얼마나 부러운 성격인가. ─ 야쿠시지 형제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이 예상 이상의 웃음을 터트려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한다.
그리고 재상(요시노양)이 아씨(유키)의 기모노 끝자락을 힘껏 밟는 바람에 두 사람이 같이 바닥을 설설 기기도 했고. 이동중에 어딘가 부딪혀 금이라도 갔는지, 천황(시마코양)이 앉아 있던 마루청이 삐걱대며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상좌에 있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버리는 해프닝도 있었고. 우대신의 어머니(타카다)가「어머니는」이란 대사를 그만「마마는」이라고 해버려서(집에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우대신의 아버지(토오코짱)가「아버지는」을「파파는」이라고 애드립을 넣어 얼버무리기도 했고. ─ 대충 이랬달까.
뭐어,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떠들썩했으니까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개그고 어디까지가 해프닝인지 알지 못한 채 웃으며 봐준 모양이다. 딸과 아들의 화려한 무대를 보러온 부모님이 나중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틀림없다.
카나코짱은 당부한 대로 제시간에「토리카에바야 이야기」무대에 섰다.「사랑스러운 아이들」이란 대사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전보다 조금은 표정이 부드러워 진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건「그랬으면 좋겠다」는 유미의 마음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걸지도 모르지만.
그 후 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대기실에서 화장하고 있을 때, 카나코짱이 노리코짱에게「티켓은 확실히 건네줬어」라고 보고했으니, 아마도 좋은 느낌이 아닐까. 하는 김에 이것도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리자.
"자, 앙코르다"
레이님의 목소리가 출연자들을 무대로 밀어냈다. 카나코짱의 아버지와 유코씨, 치카코짱이 이 체육관 어디선가 보고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유미는 그치지 않는 박수와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객석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5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이 하늘을 향해 뻗어간다.
오랫동안 준비해왔건만, 학원제의 하루는 예년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돌이켜보면 참 밀도있는 하루였다. 바꿔 말하면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알찬 하루였기에 날이 저물면 한꺼번에 그 반동이랄 수 있는 것이 마음 속에 밀어닥쳐 온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쓸쓸하다고 할까, 안타깝다고 할까, 숙연해지는 기분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서는 매년 열리는 전통의 파이어스톰. 들려오는 소리는 아코디언 가락, 기타의 노래소리, 만돌린의 애수. 불을 둘러싸고 원을 만들어 춤추는 소녀들. 거기선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명 유미는 원 속으로 들어가길 주저한 것이리라. 트랙 밖의 둔덕 위에 주저앉아 멀찍이 떨어져서 흔들거리는 파이어스톰의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람. 뭘 하고 싶은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넌 매년 뒷풀이 때면 혼자구나"
어깨를 두드리길래 돌아보니 사치코님이 서 있었다.
"... 매년이라뇨. 우연히 작년이랑 올해랑, 겹쳤을 뿐예요"
"그렇네. 그래서 뭘 하고 있었니?"
"저물고 있어요"
축제 뒤의 쓸쓸함을 곰씹고 있는 것이다.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저물었는데도?"
사치코님은 가지런히 다리를 모아 스커트 플리츠를 무릎 뒤에 여미며 다소곳이 앉았다. 아무래도 함께 해주실 모양이다.
"그리고, 언니는 매년 절 찾아내시는군요"
"방해되었니?"
"아뇨"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사치코님이라면 괜찮아. 사치코님이 아니면 안돼. 축제의 끝에 두 사람은 함께 아무 말 없이 저멀리 불꽃을 바라보았다. 단지 그뿐인데도 점점 마음이 채워져 간다. 축제가 한창일 때,「벚꽃정」에서 차를 마시고, 사진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후지마츠 엔니치무라」에서 놀고, 되도록 많이 보자며 반과 반을 뛰어다니던, 그 때 느꼈던 충실감. 그것과는 전혀 다른 행복이었다. 쭈욱 이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쯤은 똑똑히 알고 있다.
밤이 더욱 깊어지면, 자신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테지. 이 순간을 툭 잘라내어, 그 순간에 끼워넣는 건 불가능하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사치코님이었다.
"유미"
"아, 네"
두근. 어깨가 들썩하고 말았다.
"왜 그러니? 그렇게 놀랬어?"
"아뇨"
"1학년 동백나무반은 어땠는지 물으려 했을 뿐이야. 토오코짱이 안내해 줬다면서?"
"아, 그거라면 정말 근사했어요"
1학년 동백나무반은 노리코짱이 불상마니아라는 데에서 힌트를 얻어,「타 종교의 닮은꼴전」이라고 해서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찾아 레포트를 발표했다.
"그런데, 토오코짱 말로는 노리코짱보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이 더 열심이었다나 봐요. 그래서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결과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대요. 선생님이랑 학부형의 평판도 그런 대로 좋았던 모양이고요."
"그래? 가볼 걸 그랬나 봐"
"에, 안가보셨어요?"
함께 학원제 순례를 하고 있을 때, 1학년 동백나무반 앞을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틀림없이 벌써 보셨나 보다 그랬는데.
"그럴 수밖에 없잖니. 아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전부 돌아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유미가 봤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사치코님이 선뜻 말했다.
"엣"
우와, 위험해. 이런 아무렇지 않은 대화가 눈물샘을 자극하나 봐, 어쩐담. 유미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입장기념으로 비즈[수예품 등에 쓰이는 구멍뚫린 작은 구슬]로 만든 염주리오(?珠リオ)란 걸 받았는데, 토오코짱이 만든 건 바로 알아보겠더라구요. 보세요"
손목에 매달린 팔찌를 벗어서 언니한테 내밀었다.
1학년 동백나무반「타 종교의 닮은꼴전」을 본 사람이 나갈 때 방명록을 쓰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기념품이다. 형태는 로사리오랑 비슷하지만, 십자가는 달려있지 않은데다, 길이도 짧다. 염주와 로사리오의 사촌쯤 되는 팔찌다.
"염주리오? 어머나"
줄 부분은 큰 비즈가 빨강, 하양, 노랑 순서로 배열되어 있고, 본래 십자가가 있어야 할 앞부분에는 작은 비즈로 만든 빨간 장미, 하얀 장미, 노란 장미가 초록색 리본으로 감싸매어 있었다.
"무지 화려... 아니, 칼라풀하죠? 이것만 엄청 눈에 띄더라구요. 다른 사람이 만든 건 같은 색 계열로 맞췄거나 그라디에이션을 넣거나 해서 꽤 세련된 게 많았어요"
"그러고 보니 시마코도 이런 걸 차고 있었어. 하얗고 심플한"
"분명 노리코짱 작품이 아닐까요?"
"그런 느낌이네"
사치코님은 웃으며 팔찌를 돌려주었다.
"토오코짱, 기뻐하지? 유미가 자신이 만든 걸 선택해 줘서"
"글쎄요"
정말 글쎄요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태도였으니까 잘 모르겠다. 토오코짱이 만든 팔찌를 집으면 화난 얼굴을 하고. 그렇다고 다른 팔찌를 집으면 토라진 표정을 짓고. 귀여운 건지 귀엽지 않은 건지. 정말로 글쎄요, 다.
"유미"
사치코님이 일어섰다.
"넷"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한다.
"조금 걷지 않을래?"
"아... 네"
대답을 하고 뒤따라갔다. 나란히 걸어도 괜찮겠지만, 왠지 모르게 반 발짝 뒤에서 걸었다. 반 발짝이 한 발짝이 되고, 한 발짝이 두 발짝이 되었다. 언니는 어디로 갈 작정이실까. 그걸 알 수 없어서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떠들썩한 운동장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샌가 나무들의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유미"
갑자기 사치코님이 뒤돌아봤다.
"네, 넷"
하여간 참, 또 깜짝 놀라버렸다. 그러자 사치코님은 말했다.
"너, 왜 그렇게 날 경계하는 거니?"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유미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는지 어떤지 잘 몰랐다. 그저 언니에게는 그런 식으로 비쳐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떨고 있는 거니? 내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슨 짓.을 할 예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건 그만두렴. 난 단지 너와 함께 걷고 싶었을 뿐이니까"
한숨을 쉬고는 사치코님은 또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질리신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미는 뒤를 따랐다. 언니는「함께 걷고 싶었다」고 했으니까. 따라오지 말라고는 안하겠지. 마리아상 앞까지 왔을 때, 사치코님은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멈춰 서서는 유미에게 물었다.
"작년 뒷풀이 때 우리들이 쇠르(자매)가 된 이후로 딱 1년째라서? 혹시 그것과 관계있니?"
지적받고서 처음으로 유미도 그럴지 모른다고 느꼈다. 아무 말 없자 사치코님은 이해한다는 듯 유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란 애는 이상하구나. 혹시 그 일로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기쁜 일을 기대해야 하는 거 아니니?"
쇼트케익이 유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내가 로사리오를 돌려달라기라도 할 줄 알았니?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했지?"
"네. 그건"
아마 자신은 학원제를 생일같은 기념일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라고 유미는 생각했다. 1년째인 올해는 괜찮다. 하지만 올해 둘이서 축하한다면, 올해 그 기억이 즐거우면 즐거울 수록, 내년에 혼자서 맞이할 학원제가 괴로워진다. 그렇기에─.
하지만, 언니에게는 말할 수 없다. 졸업하지 마세요, 라고는. 말해봤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을 말해본들, 언니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다.
"난 있지, 유미"
"네"
"오늘 밤, 특별히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어"
사치코님은 아이를 타이르듯 천천히 일렀다.
"잊고 있었던 건 아냐. 네 생일이나 화이트 데이 때처럼, 해야지 하고 생각은 하면서 좀처럼 해주지 못했던 경우와도 달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유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오늘만이 특별한 날은 아니니까 그래"
오늘만이 특별한 날은 아니다. ─ 뭘까, 그 말에 담긴 반짝임은.
"내일도 모레도, 변함없이 유미는 내 동생이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텐데. 왜 굳이 1년 단위로 나눠야만 하는 거니. 나에게 있어선, 오늘은 특별할 게 아무 것도 없는, 어제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인데"
"아..."
사치코님의 말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유미의 마음에 내린다. 받아들고 보니 처음으로,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란 걸 알았다.
"내 말의 의미, 알겠니?"
유미는 이번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눈물이 흘러나왔어요"
"바보네"
어쩌지, 눈물이 멈추질 않아.
기뻤다가, 슬펐다가, 안타까웠다가, 고마웠다가, 정말 좋아했다가, 외로웠다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무슨 맛인지 모를 눈물이 계속 흘러 넘쳤다. 유미는 사치코님에게 매달렸다.
언니가 울렸으니까, 사양할 필요없어. 설령 모든 게 언니 탓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유미는 사치코님의 단 한 명뿐인 동생. 그러니 독점해도 괜찮아.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한동안 안아주던 사치코님은 살짝 몸을 떼어내고선, 엉망이 된 유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유미"
그리고 말했다.
"동생을 만들렴"
"에...."
사치코님은 거짓말쟁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라고 했으면서, 쇠르(자매)가 된 지 1년째인 오늘, 결코 쉽지 않은 숙제를 유미에게 내렸으니까.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 아프다는 의미와 더불어, 뭔가를 깨닫거나 할 때 쓰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