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6권 버라이어티 기프트 -4- 독이 든 사과

                                                       버라이어티 기프트 IV

 

 

「저기, 유미님이 대개  빨갛고 둥글둥글한 걸 가리키신 거라면, 그 건 달마대사라고 실제로 살아 계셨던 스님이 좌선을 하는 모습을 모델로 한 완구에요.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불상하곤 다르지 않을까요. 흔들려도 일어나도록 만들어져서 행운을 비는 물건이거든요.」 
  노리코쨩은 담담히 설명해 줬다. 유미는 실제로 있었던 스님이라고 마음의 메모장에 기록했다. 
  흥미를 느꼈을 순간에 적절한 강의를 해 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행운을 비는 물건……아, 선거할 때 자주 보이지.」 
「네. 우선 소원을 빌 때 한 쪽 눈을 뜨게 해주고, 이뤄진 후에 나머지 눈도 그려 넣지요.」 
  소원이 이뤄지면 얼굴을 그려 준다. 그런 건 테루테루보즈와 비슷한 걸지도. 
  그 순간. 
「미안해요, 늦어져 버렸어요」 
  시마코였다. 
「그런 의미로 봐도, 오히려 답례나 부적 같은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죠.」 
  노리코쨩은 이야기를 매듭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찻주전자를 가지러 서둘렀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언니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즐거워 보이네.」 
  ――라는 건 데쟈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비스킷문이 열리며 이 번엔 3학년 두 분이 나란히 등장했다. 
「아, 질러 버렸어, 질려 버렸어. 」 
「아아, 정말. 레이가 얘기한 대로네요.」
  황장미님《로사 페티다》이신 하세쿠라 레이님. 홍장미님《로사 키넨시스》이신 오가사와라 사치코님. 
「황장미님《로사 페티다》께서 무슨 얘길하신 거죠?」 
  노리코쨩이 컵을 두 개 더 내오면서 물었다. 
「우리가 늦어도 요시노쨩이 개봉해 미리 다과회를 시작할 거라고 했어.」 
「그럼 레이님은 이 상자가 있다는 걸――」 
  유미가 중얼거리자, 레이님은 웃었다. 
「물론, 알고 있었지. 왜냐하면 이 걸 가져온 사람이 나거든.」 
「에엣!?」 
  요시노씨과 유미는 동시에 반문했다. 
「하, 하지만 카드의 글씨는……」 
「아, 알았어? 에리코님의 글씨야.」 
  변함 없이 빈틈없는 글씨를 쓰고 계신다고 얘기하는 레이님. 찢어진 포장지에 달라붙어 있던 카드를 뜯어내 차분히 바라봤다. 
「저기, 이 과자를 들고 오신 쪽은 레이님. 그리고 카드를 붙이신 쪽은 에리코님……이십니까?」 
  유미는 확인했다.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정돈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그러니 에리코님 것이야. 난 단지 맡아서 여기까지 들고 왔을 뿐이고.」 
「맡다니, 언제？」 
  요시노씨가 질문했다. 아니, 힐문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조금 전에.」 
「조금 전에?」 
「청소 시간을 제끼고 별도로 에리코님을 만나고 왔어. 대학교 건물까지 뛰어 갔다니까.」 
「대학교 건물!?」 
  이 번에는 시마코씨까지 더해져, 2학년 전원이 소리를 높였다. 
「으응. 역시 교복을 입지 않고선 들어오기 난처하셨나 봐. 고등부 부지 내엔.」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하지만 에리코님은 다른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런데 어째서……」 
  에리코님께서 리리안 여대의 학교 건물에 있는 건지 시마코씨가 얌전히 물었다. 
  “그래, 거기.”라며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건 그 쪽 부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만나려고 그러신 거지. 어젯밤, 전화가 걸려 와서 선물을 들고 갈테니 나와 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레이님은 청소 시간을 띙구고 에리코님을 만나셔서 이 종합 선물 세트를 맡아 그 걸 장미의 관에 놔두러 오신 다음, 담당하고 있는 청소 구역으로 돌아 갔다는 얘기다. 피곤하시겠어. 
  그러나. 
「 나, 듣지 못 했어.」 
  요시노씨는 샐쭉해졌다. 
  어젯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만큼 시간이 있었는데 어째서 가르쳐 주지 않은 건지 물어 본 것이다. 
  ‘뭐어 확실히.’ 라고 유미도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촌 자매이기도 한 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 집이 있어서 이웃사촌인데다 오늘 아침도 함께 등교했고 점심시간도 이 장미의 관에서 모두 함께 도시락 먹으면서 수다 떨었으니, 그 걸 얘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님은 태연히 대답했다. 
「응.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지.」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야? ……아니, 않으셨나요?」 
  1학년생들 앞이었기 때문에 요시노씨는 어미를 고쳤다. 유미는 이미 익숙해 졌지만, 역시 교내에선 선배와 후배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모범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요시노가 기분이 언짢아서 그런 때 에리코님의 얘기를 하면 더욱 더 불쾌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게다가 이 과자가 누구한테 왔는지 얘기하면, 싫어도 에리코님이 오셨다는 걸 알아차릴 테고.」 
「그렇다면, 알겠습니다만.」 
  알겠다고 한 요시노씨는 레이님이 와서 이 상자의 주인을 얘깃거리로 삼을까봐 제멋대로 내용물에 잽싸게 손을 대었다. 그리고 요시코씨가 그럴 거라고 미리 간파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레이님.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고민거리가 있었을 뿐이에요.」 
  요시노씨의 고민거리라고 하면 아마 여동생 문제겠지. 얄궃게도 그 건 에리코님이 얽힌 문제다. 
「그래서, 에리코님은요? 레이님께 선물을 건네 주고 바로 돌아 가신 건가요?」 
   유미는 물었다. 대학교 건물까지 오셨다면 고등부에도 들려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 눈에 띌지 모른다는 이유에 무심코 납득해 버릴 뻔 했지만, 실례지만, 에리코님은 그런 일을 염려하는 타입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졸업생이라며 당당히 들어 올 것만 같은 사람이다. 
「그러셨나 봐. 나도 얘길 듣고 한 번 뵙고 싶다고 생각해서 청소가 끝난 다음 레이와 함께 대학교 건물까지 가봤지만, …이미 가버리셨어.」
  사치코님도 옆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다음에, 용무가 있으신 것 같았어. 그래서가 아닐까?」 
  레이님은 턱에 검지를 대며 기억을 되살렸다. 
「사실일까?」 
  요시노 탐정은 팔짱을 낀 채 끊임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리코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뭔가 음모의 냄새가 감돌고 있다는 거지. 이 양철통에서.」 
  요시노씨는 손가락으로 양철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쿠키나 쵸코렛을 먹고 있던 1학년생 세 아가씨의 얼굴에서 ‘스윽’하며 미소가 사라졌다. 
「괜찮아. 독은 들어가 있지 않으니. 아마.」 
「아니에요, 그런 염려를 하는 건.」 
  그렇게 웃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대답한 사람은 노리코쨩이었다. 
  물론, 노리코쨩도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도 여기에 독이 들어가 있다고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음모란 얘기를 듣고 나서도 그 걸 기분좋게 계속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그 건 역시 무리란 얘기지. 더구나 그 말을 한 장본인한테 권유받았으니 벌써 뭔가 의미 불명의「음모」에 말려든 게 아닌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음모라.」 
  레이님이 잼 샌드 쿠키를 들어올려 전등 빛을 가렸다. 
「요시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에?」 
「그 게 말이지, 에리코님. 나한테 이 걸 전할 때 『요시노쨩에게 안부 전해 줘.』라고 얘기하셨거든.」
  2단으로 겹쳐진 쿠키의 위 쪽에 진열창처럼 열린 구멍 사이로, 살구 아니면 사과일지 모르는 노란색 잼이 호박처럼 반짝반짝 빛나면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독이 든 사과

 

  구름이 무거웠다. 
  그 걸 올려 보는 자신도 무거웠다. 
  하지만, 무거운 느낌이 드는 건 어느 부분일까? 
  몸인지 마음인지, 그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집에서 들고온 선물을 넘기고, 홀가분해 졌을텐데 이 건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생각하면 해답은 바로 나올 것 같았지만, 생각하는 것도,  얻어낸 해답을 갖고 새로운 해답을 구하는 작업도, 지금은 뭐든지 무겁고 귀찮았다.   그래서 잠시 이 "무거움"을 내려놓는 셈치고, 난 나 자신을 분수대 앞의 벤치 위에 내려놓기로 했다. 
    「이영차.」 
  나이먹은 노친네 같애. 
  그리고 또다시 하늘을 올려 봤다. 
  무거운 구름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건 그 걸 올려다 보는 자신도 마찬가지.   약간 추운 탓인지, 아니면 지금 수업하고 있는지 분수의 주변이나 잔디밭 안에는 학생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여대이라기보다 차라리 폐장 직전의 공원이라 부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고등부의 체육대회를 엿보러 왔을 때는 운동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여기 근처에도  학생이나 학부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게 겨우 이틀 사흘 전의 얘기지만 이미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지.’하고 나는 쓴웃음 지었다. ‘봉투에 넣은 그 종합 선물 세트가  이렇게 자기한테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니,’라고. 손에서 놓자마자 이 꼴이었다.      그 걸 갖고 있는 동안에는 깜짝 상자나 트럼프의 조커를 손에 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걸 사용하면 요시노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렇다면, 그 종합 선물 세트는 나한테 풍선이나 다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걸 손에서 놓자마자 뛰던 가슴이 가라앉아 버렸겠지. 
  하지만 그러면 단지 땅바닥에 다리가 닿았다는 것일 뿐인데, 무겁게 느껴지는 이 중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현실과 같은 무거움이었다. 
  나는 구두코를 쳐다봤다. 
  과자의 종합 선물 세트는 내 마음을 북돋아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가지고 있어도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게임에서 조커를 최후까지 쥐고 있는 사람은 진다. 더구나 깜짝 상자는 누군가 눈치없이 상자를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물건.   그래서 놓아 버린 나는 멀리 떠나서 웃고 있으면 괜찮아. 
 「실례합니다만 토리이 에리코님 아니십니까？」 
  목소리에 문득 제 정신으로 돌아 오자 눈 앞에 발목까지 오는 까만색 부츠를 신은 다리가 한 쌍. 발 끝이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 말씀하시는 당신은 사토 세이님이군요. 왠지 모르지만 굉장한 우연이네요! 」 
  나는 빙그레 웃고 일어선 다음 양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편안하셨나요？」 
 「네, 덕분에.」 
  두 사람은 농담 삼아 타인 행세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예상치 못 한 장소에서 지인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아주 쑥스럽기 마련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리리안 여학원에 뭔가 볼 일이 있어? 잊어 버린 물건이라도 있나 보지?」 
  세이가 물었다. 그녀는 고등부를 졸업해 리리안 여대에 진학했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고등부와 같은 부지 안에 있는 다른 건물에 고등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 세이가 있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 보며 서있는 나는 고등부의 졸업생일 뿐인 이 대학의 "외부인"이었다.   우리는 불과 반 년 사이에 굉장히 달라져 버렸던 것이다. 
 「졸업하고 나서 반년이 지나고서야 잊어 버린 물건을 가지러 오다니,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웃음을 띄운 뒤,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자기 자신은 어떤 의미로 보면 잊어 버린 물건이 있어서 온 걸지도 모른다’고.
  난데없이 유치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세 사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분수가로 달려 왔다.  학부형회라서 남아 있었는지, 그 뒤에 어머니 같은 여성들이 이야기하면서 걸어와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했던 내 주위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시간 있어? 차라도 마시지 않을래?」 
  세이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대학 안에 있는 다방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조용하네.」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가는 길 내내 학교 건물을 올려 보면,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한데  전등이 켜져 있지 않은 교실 쪽이 많았다. 
 「시험중이거든. 난 도서관에서 최후의 벼락치기를 하고 있지만.」 
  세이가 웃었다. 
 「에리코쪽은？」 
 ‘아아.’라며 나는 쓴웃음 지었다. 
 「오늘 일반 교양 과목의 시험이 끝났어. 그리고 몇 가지 제출해야 되는 게 있긴 하지만.」 
  나 자신은 1학기 시험의 마지막 날, 오후가 비어 있는 틈을 타 모교를 찾아 왔던 것이다. 다른 대학도 고만고만한 일정이겠지.
 「후응, 그렇게 성실하다니. 바쁜 건 에리코한테 잘 맞는가 봐.」 
 「그런가 봐.」 
  휴게실은 생각보다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시험 도중에 폐쇄하고 있는 시설도 있기 때문에  그 만큼 이 쪽에 몰려 오는 것이라고 했다. 
  세이는 블렌드 커피, 나는 밀크티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컵의 온기가 차가워진 손가락 끝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생각 외로 바깥 공기가 차가웠나 보다. 
 「손녀가 생겼다면서?」 
  나는 친구를 향해 물었다. 벌써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 동향을 물어 볼 작정으로.
 「손녀？ 아아, 시마코의 여동생 《스루》 얘기구나.」 
  세이의 여동생《프띠 스루》, 시마코는 우리가 3학년일 때 1학년생이었기 때문에 세이는 대학교에 다니게 되고 나서야  여동생의 여동생, 즉「손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때？ 귀여워?」 
 「우?응, 어떨지. 귀여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졸업한 뒤의 손녀라서 얼굴을 알고 있는 게 전부야.」 
  그런 말을 하며, 세이는 시마코 여동생의 성명과 리리안답지 않게 특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취미를 가르쳐 주었다. 피부색이 차이나기 때문에 에리코가 좋아할 타입이란 견해를 덧붙여서. 
 「뭐라 해야할지……그렇지, 시마코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생기면 안도가 되지만, 나로선.」 
  블랙커피를 마시며 웃음을 띄었다. 세이의 표정은 안도감 속에 아주 약간의 씁쓸한 맛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가 된 기분은 아무래도 맛 볼 수 없었나 보네.」 
  나는 설탕 반 스푼을 더해 밀크티를 저었다. 조그만 컵  속에 베이지색의 소용돌이가 빙빙 돌았다.
 「그 대신 유미쨩을 귀여워 해줬으니 괜찮아.」 
 「역시 세이는 유미쨩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요시노쨩도 귀여워해주고 싶었는데 레이랑 에리코가 시도때도없이 귀여워 해주고 있어서 틈이 없었어.」 
 「어머, 그렇게 보였어?」 
  시도때도없이 귀여워 해줬다는 얘길 들어서 나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보였고 말고. 에리코는 요시노쨩이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괴롭혔지.」 
 「후후.」 
  역시 친한 친구. 확실히 나는 요시노쨩이 귀엽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요시노쨩이 수술하고 나서 건강하게 되고 나서는 새삼스럽게. 
 「에리코 상대로 대등하게 덤벼들다니 근성이 좋지.」 
 「맞는 말이야.」 
  그 애가 훌쩍훌쩍 울면서 도망쳐 버릴 듯한 약골이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물러서지 않고 되받아치는 요시노쨩의 똑바른 눈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요시노쨩같은 애는 찾아 보기 힘들지.」 
  나는 눈 앞의 세이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내 그 별 볼 일 없는 한 마디에 뭔가 느꼈는지  세이가 또다시 「좋은 게 좋은 거지」란 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곰탱이 사내《熊男》하곤 썸씽이 있었어?」 
  곰탱이 사내. 그 사람은 리리안 여학원 이웃인 하나데라《花寺》학원에서 강사를 맡고 있고 내가 좋아하게 된 연상의 남성이다. 
 「있었다고 해야 되나,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야 하나. 어떡하면 좋지 쪽이야.」 
  좋아하는 남자지만, 애인은 아니다. 한 번 교제 신청을 해서 거절당했다. 그 다음에 친구로 다시 출발했지만,  반 년 간 사귄 지금도 여전히 친구인 채였다. 
 「스톱.」 
  세이가 막아섰다. 
 「나한테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조언을 구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기대도 안 했어. 그런 고민은 아니고.」 
 「그러면, 뭔데?」 
 「라이벌이 나타났다고 할까.」 
 「곰탱이 사내한테 여자가 있었어?」 
세이는 인기있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다고 대단히 실례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라이벌이라고 해도 그런 관계의 여자는 아니다.
 「저 쪽이 먼저 있었지만.」 
  곰탱이 사내를 사이에 두고 저 쪽과 이 쪽. 
 「마치 요시노쨩이잖아?」 
  레이를 사이에 두고 저 쪽과 이 쪽. 
 「그래. 그래서 조금 요시노쨩하고 붙어 보고 싶어졌던 거야.」 
 「뭐야、그 건.」 
  나는 세이에게 산백합회에 과자로 채워진 통을 건네준 얘기를 요약해 줬다. 나는 잠시 시간을 되감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아주 조금, 눈을 떼고 싶어지는 때도 있었다. 
 「야마노베《山?》씨 말이지.」 
  나는 한 박자 둔 다음 털어 놓았다. 
 「아이가 있어.」 
 「에엣」 
  세이가 예상대로 반응하자 만족스러웠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여자애. 이상한 건 아니야. 부인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렇지만――」 
  야마노베씨는 부인과 사별한 가엾은 사람이었다. 내 주변 인물들은 그에 관해 거기까지 밖에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돼, 조금이라도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서 온갖 질문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이나 오빠들은?」 
 「모르고 계셔. 말씀 드리면 반대하시겠지.」 
 「그렇다면, 그렇지만――」 
 「거짓말은 하면 안 돼. 다만, 묻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거야.  우리 정말로 아무 관계도 아니고 친구야. 친구한테 아이가 있는 걸 부모한테 이러쿵저러쿵 말씀드리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지만――」 
  세이는 아까 전부터 똑같은 맞장구만 반복해서 치고 있었다. 일단 동의는 하지만 뭐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에리코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부모는 관계없다, 거기까진 알겠어.  하지만 그 건 반 년 전에나 통하는 얘기지. 이제 와서 라이벌이 나타났는데 아무 관계도 없을 리 없지.」 
  이런 세이의 지적은 지당했다. 하지만 사실은 최근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이 말이죠. 이 번에 딸을 만나면 어떻겠냐고 물어 봤어요.」 
 「잠깐 기다려 봐.」 
  이 번은 「그렇다면, 그렇지만――」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렇다면 그렇구나. 
 「이 건 날 친구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딸과 만나 달라는 건 부모님과 만나 달라는 것과 동의어라고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그 한 마디를 듣고 난 다음, 나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최후로 그를 만난 게 지지난 주의 일이니 대략 2주가 지났다.   나는 예상 외의 일이 벌어져도 대부분 가볍게 받아 들이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 번만큼은 역시 난감했다.   어쨌든, 인생과 연관된 중대사항인 걸.   떠오르거나 쿵하고 가라앉는 일의 연속. 
  이 뜨고 가라앉는 감정을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서, 그래서 옛날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어떻게든 될 지도 몰라  일기를 읽거나 앨범을 열어 보곤 했다. 결국에는, 두 번 다시 입을 일이 없을 것 같던 고등부 교복마져 걸쳐 보는  기이한 행각을 일삼았다. 
  리리안의 체육대회에 들렀던 것 역시 그 연장선상의 행동이었다.   뭘 해 봐도 고등부 당시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 따위 없다는 걸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고,  어차피 또다시 가라앉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혹시」하고 마음 속 어딘가 기대를 걸며 반 년만에 모교의 정문을 빠져 나갔다.  레이의 얼굴을 보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 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의외로 나한테 활기를 불러 일으킨 사람은 요시노쨩이었다. 경기 전부터 불붙어 있는 요시노쨩이  나한테는 눈부시고 얄미운데다가 귀여워서 무심결에 건드렸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요시노쨩은 내 도발에 넘어가 주었다. 더구나 무모한 약속까지 선물로 안겨 주면서.  요시노쨩과 만나고 있던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내가 애정을 갖고 있던 나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세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 봤다. 
 「만나야지.」 
 「아이 딸린 사람인데 괜찮은 거야?」 
 「으응. 나는 괜찮아.」 
  야마노베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리 아이가 딸려 온다 해도 그 남자 자신의 매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 달라고 얘기하면 만난다. 그런 건 당연하지. 
 「그럼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거지?」 
 「상대와 사귀는 방법일까.」
 「하하아, 그래서 요시노쨩――」 
  말을 꺼내면서 세이는 손을 들었다. 
 「미안, 에리코. 잠시만 기다려 줘. 어이, 여기 여기.」 
  세이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다방의 입구에는 여기의 학생인 것처럼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신호를 알아챈 그녀는 우리 탁자에 종종걸음으로 다가 왔다. 
 「저기요, 사토씨. 아무리 저희 집이 학교 가까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게 부려먹지 마세요.」 
  말하면서 그 사람이 내민 건 수업 용으로 보이는 공책. 그리고 그 걸 공손하게 받아드는 세이. 
 「헤이헤이, 질투하는 것?」 
 「전혀. 얄미워서 그런 거에요. 고등학교 때 모든 사람의 동경이었다는 거, 사실은 거짓말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세이는 후배한테 인망 있었어요.」 
  나는 이야기의 내용에 무심코 참견했다. 처음으로 내 존재를 알아챈 세이의 친구는 그 때 「안녕하세요」하고  가볍게 인사를 걸었다. 
 「이 분은?」 
 「친구인 토리이 에리코상. 참고로, 고등학교 동창.」 
 「아아, 황장미님《로사 페티다》시군요. 전 사토와 같은 반인 가토《加東 景》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가토씨. 황장미님《로사 페티다》라고 해도 전(前)이 붙지만요. ……하지만 잘 알고 계시네요.」 
 「후쿠자와 유미쨩이 가르쳐 줬거든요.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틀리지 않고 하는 게 재밌어서 멤버의 이름까지 외워 버렸어요.」 
  홍장미님《로사 키넨시스》 백장미님《로사 기간티아》 황장미님《로사 페티다》, 홍장미님《로사 키넨시스》  백장미님《로사 기간티아》 황장미님《로사 페티다》, 홍장미님《로사 키넨시스》 백장미님《로사 기간티아》  황장미님《로사 페티다》.   그 중 제일 발음하기 힘든 건 황장미님《로사페티다》라고 가토씨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전(前) 홍장미님은 결석인가요? 아니면 지각하고 계실 뿐인가요?」 
 「오늘은 두 사람의 동창회야.」 
 「어머, 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장면을 기대했는데.」 
  진심으로 아쉬운 듯이 중얼거리는 그녀는 아마 세이를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세이의 뒷배경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 케이씨. 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지?」 
  갑자기 세이가 물었다. 
 「뭔데요?」 
 「아버지의 애인.」 
 「으응」 
가토씨는 탁자 맡에 선 채로 천장을 쳐다 봤다.「아버지의 애인」이라고 듣자 난 곧장 오가사와라 사치코네 집을 떠올렸지만,  가토씨 아버지의 경우는 부인이 있는데 따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주 옛날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 점은 야마노베씨와 비슷했다.
 「저희 집의 경우, 아버지께서 아프셔서 상당히 긴급한 사태였거든요. 이 쪽이나 저 쪽이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안 되니  필사적이었고요. 그래서 위기를 넘겼을때 이미 동지애 비슷한 걸 느꼈지요. 뭐어, 돌이켜 보면 굉장히 좋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있었다는 느낌일까요. ……그런데 이런 게 참고가 되나요?」 
 「참고가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떡하면 좋을지는 참고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야마노베씨 반대편에 있는 딸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 나름대로 반드시 이런 저런 고민이 있다는 것. 그 건 절대로 잊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 다행이네요.」 
  가토씨는 나한테 생긋 웃고 나서 바로 세이를 향해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세이씨, 이 노트를 빌린 댓가는 비싸요.」 
 「응. 이미 몸으로 때웠으니 이 걸로 무마하면 안 될까?」 
  세이는 가방에서 여행사의 봉투를 꺼내서 가토씨에게 건네 주었다. 
 「아, 즉시 갔다 왔군요. 으응, 괜찮아요. 수고하셨어요.」 
  내용물은 비행기표로 보였다. 응, 보아하니 낯가림이 심한 세이도 여행에 동행할 정도의 친구를 찾아낸 거구나. 
 「실례했습니다.」 
  공책하고 티켓을 교환했을 뿐이고, 말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던 가토씨의 뒷모습을 전송하고 난 세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보며 귀속말했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면 용납할 수 있대. 어때?」 
  어때? 라고 해도 말이지. 
 「세이도 알고 있죠?」 
  좋은 사람은 성격에 안 맞다. 억지로 연기하려면 더욱 더 무리일테고. 
 「저는 귀여운 공주님을 괴롭히는 계모가 성에 맞아요――」 
  나는 탁자에 푸욱 엎드렸다. 예전에 연기한 신데렐라의 계모역은 그래서 나한테 적격이었다. 
 「「거울아 거울」같은 것 말이야?」 
 「그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요시노쨩 버젼이라면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던지면서 뒤쫓아 올 거에요, 반드시.」 
  그 광경이 눈에 떠올랐다.   비겁하지 않나요, 비겁하지 않나요, 비겁하지 않나요, 비겁하지 않나요. ――라고. 
 「즐거워 보이네.」 
  혼자 싱글벙글대는 나한테 세이는 눈쌀을 찌푸렸다. 
 「선물한 그 과자에 설마 독은 들어가 있지 않겠지.」 
 「과자엔 들어 있지 않지만――」 
  나는 컵에 남아 있는 밀크티를 잠자코 비웠다. 
  요시노쨩은 그 종합 선물 세트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전달 받았을까. 
  완전히 차가워진 줄 알고 있었는데, 몸 안에 흘러 들어 온 밀크티는 몸 속을 따뜻하게 채웠다. 
  그리고 나는, 아까 전보다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