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숙공주와 김 총각

"공주 마마, 송구하지만 조금만 쉬어 가면 안 될는지요?"

앞서 걸어가는 공주를 붙들고 유모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미안하구려, 유모. 많이 힘들지? 내가 급한 마음에…."

"아니옵니다, 마마. 이 늙은 것이 기력이 다해 괜히 마마께 폐를 끼쳐 드려서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공주는 그렇게 말하는 유모의 손을 잡고 근처 바위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행선지도 없이 마냥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마마,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어디 묵을 곳을 찾아 보겠습니다."

공주와 유모는 서로의 얼굴을 측은하게 쳐다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하늘은 바야흐로 진달래 빛 고운 색깔로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처연하고 쓸쓸한 생각이 진달래 꽃잎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젊은이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닐지 모르나 이 곳 사람이 아닌 듯 한데…. 혹 누구를 찾아 오셨습니까?"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유모는 젊은이가 내심 반가웠다.

"어쩌다 길을 잃어 이 곳까지 왔소이다. 이제 날도 저물어 가는데…, 이 근처에 어디 하룻밤 묵을 곳이 없겠소?"

유모는 젊은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저런, 여기서 마을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라도 하룻밤 묵어 가시지요."

말하는 품이나 행동거지가 산에서 나무나 하고 사는 여느 나무꾼과는 다른 젊은이였다. 유모는 곧장 공주를 모시고 젊은이를 따라 나섰다. 젊은이의 집은 산기슭에 있었는데 방 안에는 서책들이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젊은이는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한 후 서둘러 밥을 지어 상을 차려 내 왔다.

"혼자 살고 있어 그다지 먹을 만한 것이 없소이다. 부족하지만 한 끼 허기를 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주와 유모는 새벽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양에서 이 곳 속리산까지 종일 걸어왔는지라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보아하니 이런 산골에 사실 분은 아닌 듯 한데 어찌 이런 산중에 혼자 살고 계신지요?"

"허허, 그리 보이십니까? 실은 제 조부님의 함자가 김자 종자 서자 이십니다. 지금의 임금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지요."

그는 어린 임금 단종을 보호하려다 아들과 함께 세조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한 김종서 대감의 친손자였다.

"그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저 혼자서만 이 곳까지 피신해 온 것입니다."

젊은이의 말에 공주는 입술을 꼭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이 많은 업보를 어찌 하시렵니까?'

그 모습을 본 젊은이는 의아한 듯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갑자기 왜 눈물을 흘리시는지…."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던 유모는 그제야 속사정을  말했다.

"실은 이 분은 공주 마마이십니다. 그런데 그만 전하의 노여움을 사서…."

공주는 천성적으로 품성이 착하고 마음씨가 고왔다. 그녀는 아버지 세조가 무자비하게 왕위를 찬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이 어린 단종을 죽이려 하자 그냥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 어찌 어린 조카를 죽이려 하십니까? 이는 혈육 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옵소서, 마마!"

공주가 피눈물을 토하며 간청했지만 세조는 오히려 공주를 나무랐다.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썩 물러가거라!"

"아바마마! 자식 된 도리로서 그릇된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제발 소녀의 말을 저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매일같이 공주의 간언은 계속되었고 진노한 세조는 마침내 공주에게 무거운 벌을 내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불안한 사람은 정희왕후였다. 세조와 공주 사이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공주가 목숨까지 잃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정희왕후는 조용히 공주의 유모를 불렀다.

"지금은 공주의 앞날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당분간 네가 공주를 데리고 멀리 피신해 있도록 하라."

정희왕후는 약간의 패물을 챙겨 공주와 유모를 몰래 대궐 밖으로 내보내고, 세조에게는 공주가 급작스레 죽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공주와 유모는 대궐을 떠나 무작정 이 곳 속리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유모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사뭇 비탄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어쩐지 처음 뵙기에도 예사 분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허 참! 이 무슨 기이한 인연인지 알 수 없으나 갈 데를 정하실 때까지 저희 집에서 편히 지내십시오. 세인들의 눈을 피하기엔 여기가 그만일 겁니다."

공주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었다. 유모는 젊은이에게 감사의 뜻으로 가지고 있던 패물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이것으로 보답이 될지 모르나 부디 사양치 말고 받아 주십시오."

"이런 귀한 패물을 내놓았다간 금방 신분이 들통날지 모릅니다. 나중에 세상이 잠잠해지면 그 때 받도록 하겠습니다."

젊은이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 날부터 젊은이의 집에서 살게 된 공주와 유모는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공주는 무엇보다 젊은이가 학문에 조예가 깊고 인품 또한 훌륭하여 점차 마음이 끌렸다. 젊은이 역시 공주의 심성에 끌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유모의 주선으로 어느 날 두 사람은 정화수 한 사발을 떠 놓고 조촐하게나마 혼례를 치렀다.

세월이 지나 슬하에 자식도 생겨나고 세상도 조금씩 평화로워짐에 따라, 젊은이는 유모가 갖고 있던 패물을 팔아 집과 땅을 장만하여 농사를 지으며 그럭저럭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님! 마님!"

유모가 성급히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오? 어찌 그리 급하게 뛰어오오?"

유모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공주가 방문을 열고 내다 보았다.

"내일 전하께서 이 곳을 지나가신다 합니다!"

공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 년을 죽은 목숨으로 살아 왔지만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 수록 가슴에 사무치고 또 사무쳤던 것이다.

그 무렵 세조는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 다니며 자신이 저지른 죄과를 부처님께 참회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에 공주가 사는 마을을 지나치게 된 것이었다.

다음 날 공주는 먼 발치에서나마 아버지의 모습을 보려고 대문 안에 몸을 숨기고 문 틈으로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이윽고 저 멀리서 천천히 어가의 행렬이 다가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공주의 집 앞에 이르러서 그 행렬이 멈추더니 세조를 수행하던 한 신하가 집 앞에서 놀고 있는 공주의 아이들을 세조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여 데려오라고 명했던 세조는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보고는 더욱 기이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 참으로 나를 많이 닮았구나. 내 눈이 잘못 되었는가?"

"아니옵니다, 전하! 정말 신기한 일이옵니다."

세조가 아이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매만지는 모습을 본 공주는 차마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흑흑…!"

갑작스러운 울음 소리에 세조는 두리번거리며 신하에게 물었다.

"이게 웬 울음 소리인고?"

신하도 영문을 몰라 주위를 살피는데 공주의 아이들 중 큰 아이가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의 울음 소리입니다."

"네 어머니의 울음 소리?"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세조가 아이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무슨 연유로 그리 우느냐?"

세조는 마당에 엎드려 서럽게 우는 공주에게 물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조를 바라보았다.

"아니, 넌?"

"아바마마! 소녀 지난 날 아바마마의 노여움을 피해 이 곳으로 도망을 와 이렇게 살고 있사옵니다.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시옵소서. 아바마마! 흑흑…."

세조는 얼른 다가가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공주를 품에 안았다.

"난 이제껏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모든 것이 다 이 죄 많은 아비의 허물이니라. 이 아비가 잘못했느니라…."

세조는 방으로 들어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이 아이들의 아비는 누구냐?"

공주는 잠시 망설였으나 아이들의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옛날 정승을 지냈던 김종서 대감의 손자이옵니다. 지금은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

세조는 뜻밖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 정도 재목이면 훌륭한 부마를 얻은 셈이다. 내 한양으로 올라가서 너희를 부를 터이니 이제부터 나와 함께 지내렴."

세조는 공주의 손을 부여잡고 따뜻하게 말했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공주에게서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김종서의 손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인, 이제 와서 한양에 가 본들 누가 나를 반겨 주겠소? 조정은 여전히 지난 날의 반정 공신들이 세력을 잡고 있소. 지금 내가 나선다면 공연히 문제만 일으킬 뿐이오."

"……."

"내일이라도 대궐에서 사람들이 온다면 아니 갈 수도 없을 터,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이 곳을 떠납시다."

세상의 일이란 어느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공주였기에 조용히 남편을 따라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공주는 남편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