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호위의 결과

한민수는 한판서 댁 소실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한민수는 얼굴이 갸름하고 피부가 흰데다 눈이 초승달처럼 흰 것이 늘 웃는 상으로, 생김이 마치 여우같았다.

생김새 뿐 아니라 하는 짓도 영락없는 여우였다. 비록 머리는 좋았지만 그만큼 잔꾀가 많아 약은 짓 하기가 일수였던 것이다.

눈치도 귀신같았는데, 주변 사람의 기분이 언짢거나 혹은 그 반대로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하면 어느 쪽이든 그때그때 비위를 잘 맞추어, 단시간에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데 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별난 재주가 있다 해도 타고난 신분만은 한민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 판서의 본처가 싸늘한 시선으로 한민수를 바라보며 벌레 취급하는 일이나, 그 본처 소생의 자제들에게 아무리 비위를 잘 맞춰주어도 결국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민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장난감처럼 함부로 대하는 것에도 아무소리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토록 마음 고생을 했으면 양반이 밉고 신분제라면 치가 떨릴 법도 한데, 한민수는 전연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양반을 동경하고 신분 상승을 갈망했다. 본래부터 탐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한민수는,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신분제에 편승하여, 기호가 오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한편 한민수의 어머니는 미색이 뛰어나, 한 판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한민수는 이것을 이용하여, 한 판서 즉 아버지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게끔 하는데 성공했다.

한민수는 아버지의 측은지심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원조를 얻어 경기도 안산에 서당을 차렸다.

서당의 위치가 경기도 외곽이 된 것은, 아무래도 서울 본가 근처에서는 한민수의 신분 때문에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민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마을 유지의 자제들을 자신의 서당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한민수의 서당에는, 지금은 비록 가세가 쇠하였지만 예전에는 많은 문관을 배출했다는 황 생원 댁 아이부터 만석꾼의 아이까지, 내세우는 간판마다 나름대로 그 내용이 화려한 아이들밖에 없었다. 유독 한 아이만이 평범한 양민의 자제였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윤성이라고 하였다.

한민수가 윤성이를 받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한민수가 서당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었다. 쉬는 시간, 밖이 소란스러워 한민수가 나가보니, 학동들이 사립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 밖에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윤성이었다. 한민수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남자는 아이를 서당에 보내고자 찾아 온 것인데, 그 신분이 평민이라, 학동들이 불만을 갖고 텃세를 부리는 중이었다.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아이 역시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당시 서당의 학채는 학부모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많이 좌우되었다. 때문에 한민수는 가난한 농군의 자식을 가리키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한민수는 모른 척 돌아섰다. 바로 그 때 학동들이 내뱉은 말 중 하나가 한민수의 귀를 때렸다.

“네 주제에 공부는 해서 뭐하게?”

신분을 운운하며 비아냥거리는 그 말이, 과거, 본처의 자제 중 하나가 한민수에게 던졌던 말을 생각나게 했다.

“제 아무리 공부해봤자 과거 시험도 치를 수 없는 주제에, 뭐하러 그렇게 공부를 악착같이 하냐? 질긴 녀석 같으니!”

한민수는 무시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동병상련이었던 걸까? 한민수는 평소같으면 눈에 차지도 않을 백미 서 말을 학채로 받고 윤성이를 학생으로 들였다. 평소 한민수답지 않은 선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무튼 그 날 이후 윤성이는 한민수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막상 눈앞에 앉혀놓고 보니 원하던 학생이 아니었던 탓에 짜증만 났다. 자연히 윤성이에게 소홀히 대하고 다른 아이들과 차별하게 되었다. 가령 글자를 익히는 배강 시간에는 시큰둥한 얼굴에 가르치기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일 5일 간격으로 하는 연송 시에 더듬거나 틀리면, 다른 아이의 경우 웃으며 격려하였지만, 윤성이의 경우 독설을 퍼부어 아이의 눈물을 속 빼놓았다.

한편 윤성이에게는 전학을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전학이란, 학습 진도에 따라 순서에 맞게 앉은 다음, 학습 진도가 높은 학생이 그보다 낮은 학생을 가르치는 학습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는 윤성이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민수는 진작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윤성이 제 풀에 지쳐서 스스로 나가줬으면 하는 게 한민수의 솔직한 바램이었다. 그러나 윤성이에게서는 좀처럼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한민수는 별 도리 없이 윤성이를 옆에 앉혀놓고 별도의 지도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원하지 않는 학생, 낮은 학채, 거기다 별도의 수고까지. 이러니 한민수의 눈에 윤성이가 예뻐 보일 리 없었다. 날이 갈수록 윤성이에게는 미운털이 박혔다. 윤성이를 대하는 한민수의 태도는 거칠어져만 갔다.

한편 한민수는 마을 훈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제사나 생일 혹은 혼례 등의 경사가 있으면, 빠지는 법 없이 초대받았고 융숭한 대접이 뒤따랐다. 한번은 황 생원 댁 아이의 동생이 태어났는데, 이 때 한민수가 나서서 작명을 해주었다. 삼일 밤낮을 고심한 끝에 지은 이름으로, 한민수는 이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외에도 마을에 문서를 써줄 일, 예를 들어 상량문이나 축문, 결혼집에 필요한 택일이나 궁합, 사주 따위를 써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즉 한민수는 선생 소리를 들으며 마을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것이, 마치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몹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민수가 서당을 차린 지 2년째 접어들던 해에, 한 판서가 병으로 자리에 몸져 누웠다. 한 판서는 앓아누운 지 한 달 만에 의원의 권고에 따라 벼슬도 사직했다. 서울 소식은 곧 안산까지 전해졌다. 마을에서는 한 판서가 곧 죽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민수는 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사나흘에 한 번 서울 본집에를 다녀왔다. 그 날도 접장에게 진도를 일러주고 자습을 명한 뒤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가던 도중 한민수는 중요한 것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이 아니라, 아버님꼐 드리기 위해 이름 난 의원에게 부탁하여 지어 놓은 약이었다. 한민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직은 온 길이 더 가깝구나! 시간도 이르니 되돌아가서 가져와야겠다.’

결심을 굳힌 한민수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멀리 서당이 보이는데 한민수의 시야에 방을 빠져나오는 아이가 잡혔다. 윤성이었다.

‘아니, 저 놈이 수업 중에 어디를 가는 게야?’

그러나 이내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럼 그렇지! 제깟 놈이 제대로 공부할 마음이나 있었겠어? 내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저 모양이었겠구만!’

한민수가 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방 안에서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이 놈들이 공부는 안하고?’

한민수는 당장 방문을 열어젖힐 듯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중에 자신의 이름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훈장님 아버님, 그러니까 한 판서 어르신, 정말 돌아가실까?”

“훈장님은 무슨! 님은 빼! 첩의 자식한테…. 아무튼 판서 어른 돌아가시기만 해봐,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이 서당 당장에 때려치운다. 아! 그러고 보니, 더 이상 판서 어른도 아니잖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야, 야, 예전에 훈장이 내 동생 이름 지어줬던 거 기억 나냐? 그 때 거드름 피우는 꼴이라니! 근데 우리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그 이름 호적에 안 올리셨대! 얼마 전에 몰래 따로 새 이름 받으셨잖아!”

아이들은 박장대소했다. 한민수는 처음에는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다. 그러나 차츰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여태껏 힘들여 쌓아왔던 발밑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내, 아이들에게 얼마나 잘 해 주었는데! 아이들은 줄곧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가?! 마을 사람들까지도! 내가 그들을 다 알고, 이용하는 줄만 알았더니 그들이 나를 기만하고 있었구나! 척 하느라 있는 힘껏 발버둥치고 있던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어! 허허, 내 훈장 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였어. 그 동안 너무 오래 호가호위해서, 아버지의 후광을 진짜 내 가죽인 줄 착각해 버린 게야.’

한민수는 허망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 뒤꼍에서 인기척이 났다. 한민수는 깜짝 놀라, 사립문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음 순간 한민수의 눈이 커졌다.

‘아니, 저 아이가?’

서당 건물 뒤에서 돌아나온 아이는 다름 아닌 윤성이었다. 윤성이의 손에는 바가지가 들려있었다. 윤성이는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로 뛰어올라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 안의 아이들은 잠시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뭐야? 신발도 안 벗고! 이래서 가난하고 못 배운 것들은….”

빈정거리는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성이는 바가지에 든 것을 방 안의 아이들에게 끼얹었다.

“엑! 퉤퉤, 이게 뭐야? 오줌이잖아! 저 놈이 실성을 했나?”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성이는 바가지를 집어던지며 호통을 쳤다.

“에라, 이 더러운 놈들아! 네 놈들이나 이 오물이나 똑같다!”

방 안의 아이들이 사나운 기세로 윤성이를 밀쳤다.

“뭐야?”

“뭐래는 거야, 저 놈이!”

윤성이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들었다.

“그래, 배웠다는 놈들의 꼬락서니가 그런 것이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비겁하게 헐뜯기나 하고! 그것도 제 스승을, 제 스승을!”

감정이 북받쳤는지, 윤성이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아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윤성이의 입바른 소리에 조금은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윤성이의 돌연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윤성이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있기만 했다.

한민수는 다시 한번 눈시울이 뜨뜻해짐을 느꼈다. 한민수는 가슴을 치며 생각했다.

‘민수야, 민수야, 이 어리석은 놈아! 평소 아주 똑똑한 사람인 척은 다 하더니, 정작 사람 보는 눈은 없었구나!’

한민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흐를 때마다, 마음 깊이 박혀있던 욕망들도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민수는 서당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오직 윤성이 한 명만을 아무런 대가없이 가르쳤는데, 그 사이가 부자지간으로 보일만큼 다정한 사제지간이 되었다.

 

 

※ 본 시나리오는 원천자료를 바탕으로 극화하여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검수위원]

＊원천자료 : 오 성(세종대학교) / 이장우(세종대학교)

＊시나리오 : 한창완(세종대학교) / 최은경(세종대학교) / 김정현(세종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