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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트】/기타(비문학)

오드리 헵번이 하는 말 (Words from Audrey Hepburn)

by 안나 로제 2020. 4. 28.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Wherever you're going, I'm going your way.

 

달빛이 흐르는 넓은 강아, 난 언젠가 널 멋지게 건너겠어.

오, 내 사랑을 부셔 버린 당신, 당신이 어딜 가든지 난 따라가겠어.

 

 

오드리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을 즈음, 영화사는 그녀에게 이름을 바꿀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 당시 할리우드에는 팜므파탈의 이미지인 캐서린 헵번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헵번이라는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원한다면 이름도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는 평소에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녀의 신념은 영화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역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영화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면 출연하지 않았어요. <안네의 일기>의 안네 프랑크 역을 제안 받았을 때도 한 사람의 비극을 소재로 삼아 대중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습니다. <파계>를 찍을 때는 자신이 겪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쟁 장면을 넣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연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파계>에서는 전쟁 장면은 나오지 않고 폭격 소리만 나옵니다. 또 할리우드의 유명한 배우들이 백 편 이상 영화를 찍는 데 비해 그녀는 평생 스물 일곱 편만 찍은 것만 봐도 자신의 소신에 맞게 살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드리의 이런 신념들이 모여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럽적인 기품과 우아함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캐서린 헵번이 여왕 같은 이미지라면 오드리 헵번은 공주 같은 이미지로요. 만약 신인이라는 이유로 캐서린 헵번에 밀려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면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다울 때 가장 빛이 납니다. 후미진 풀숲에 혼자 뚝 떨어져 피어 있는 풀꽃도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걱정했다면 아마 나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 오드리 헵번

 

 

행복을 찾아서 길을 걷지 않았지.

옳은 길을 걷다 보니 행복이 깃들었지.

- 박노해(시인)

 

 

나는 항상 나를 꼭 껴안아 줄 누군가를 찾아 다녔어요.

- 오드리 헵번

 

 

하루를 골라라. 그리고 철저하게 그 날을 즐겨라.

나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 현재의 어느 한 순간도 망치고 싶지 않다.

- 오드리 헵번

 

 

우리의 삶은 성인과 아이 모습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며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이 진실이라 생각했는지 탐색해야 한다.

- 오드리 헵번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소유형 인간과 존재형 인간으로 분류합니다.

소유형 인간은 돈과 명성, 신분과 지식, 기억 등에 묶여 있는 인간인 반면,

존재형 인간은 소유와 탐욕을 떠나 오로지 지금, 여기를 추구하는 인간이지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저 하루살이처럼 오늘 하루만 잘 살자고 마음 먹는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살지만 정말 그렇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다만 확실한 건 오늘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의 내 인생이 마음에 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금까지 살아 온 오늘의 결과인 것처럼 하루 하루 잘 살아 내는 것,

그것 말고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당신이 그 곳에 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 오드리 헵번

 

 

한 시간 동안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을 슬픔은 없다.

- 몽테스키외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남의 시선에 따라 살지 않고 소신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지식과 경험이 녹아든 문장들을 읽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며 사는 법을 알게 되니까요.

- 저자 김재용

 

 

스스로에 대해 완벽하게 솔직해져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직면하고, 숨기려 들지 마라. 대신 다른 장점을 개발해라.

- 오드리 헵번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를 선물하는 것이다.

- 오드리 헵번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샘 레벤슨(Sam Levenson)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 이선희, <그 중에 그대를 만나> 中

 

 

Impossible → I'm possible

 

오드리는 결혼하면 어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이나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어요.

첫 남편 멜 페러는 전 아내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도 있었고, 동화 작가이자 댄서, 가수이자 감독이었습니다. 오드리와는 몇 개의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과 댄서로 무대 인생을 시작했던 것 등 공통점이 많았지만 가치관은 달랐지요. 아들 션이 태어나자 오드리는 일을 줄이고 아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일 중독자인 멜 페러는 계속 일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좋은 아내가 되었다고 느낀 그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드리는 최고의 배우로 사랑받는 데 비해 멜은 감독이나 배우의 일이 풀리지 않아 자존심 상해 했죠. 멜이 스페인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8개월 동안 오드리가 열 여섯 번이나 가서 뒷바라지를 했지만 결국 서른 아홉 살에 이혼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는 열네 살 때부터 오드리를 좋아하던 팬이었습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정신과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오드리보다는 열 살 연하였지만 이혼의 아픔을 겪고 방황하던 그녀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특히 아들 션이 부모의 이혼으로 받게 될 영향에 대한 정신과 의사로서의 조언을 해 줘서 쉽게 가까워졌죠. 두 사람은 스위스 모르주 시청에서 서른 명 정도의 손님만 초대해 작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남편의 수입 범위 내에서 평범한 주부로 사는 게 오랜 꿈이었던 그녀는 안드레아의 사이클에 맞춰 생활했지요. 두 번째 결혼은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았지만, 안드레아는 세계적인 스타가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점점 그 광택을 잃어 가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스위스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안드레아의 불륜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곧바로 로마로 돌아가 이탈리아인의 부인으로 살았지만,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지요. "남편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고, 사랑이 존재한다면 불성실함은 있을 수 없다."며 쉰 한 살 때 두 번째 이혼을 했습니다.

세 번째 연인 로버트 월더스와는 결혼하지 않고 동반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책에 대한 열정,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보듬었지요. 로버트는 아내와 사별한 뒤였고, 오드리는 이혼했으니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드리는 로버트를 강아지만큼 환상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로버트는 오드리를 자신이 감히 결혼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친구라고 하면서 어떤 연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사랑했습니다. 로버트와는 유니세프 활동도 같이 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보낸 걸 보면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고,

사랑이 존재한다면 불성실함은 있을 수 없다.

- 오드리 헵번

 

 

돌이켜 보면 힘든 시절은

내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오드리 헵번

 

 

나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덜 냉소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 오드리 헵번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 쇼펜하우어

 

 

누군가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녀는 그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 주고자 했다.

- 로버트 월더스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크리스마스에 자식들에게 들려 준 시]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 한 번 어린 아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절대로 네가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들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져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이제 당신이 갚을 차례예요. 세상의 이치죠.

-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中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해요.

-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中

 


 

 

오드리 헵번 연대기

 

1929년 5월 4일

브뤼셀에서 오드리 캐슬린 반 힘스틀라 루스턴 탄생('헵번'이라는 성이 그녀의 이름에 추가된 것은 1939년 4월 6일이다).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 네덜란드 남작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4년 (5세), 영국 켄트주의 기숙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6세), 아버지 조셉이 집을 나갔다.

1938년 (9세), 부모의 이혼으로 오드리 어머니가 양육권을 받았다.

 

1939년 (10)세,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아른헴으로 이사했다.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아버지를 만났다.

전쟁으로 인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1945년 (16세), 네덜란드가 오드리의 생일 5월 4일에 해방되었다.

키 168센티미터에 체중 39킬로그램으로 황달, 천식, 빈혈, 부종 등 각종 질병이 생겼다.

 

1948년 (19세), 어머니와 런던으로 이주했다.

영국 발레계의 전설 마리 램버트와 함께 공부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1950년 (21세), 영국 합동 영화사의 <천국의 웃음>에서 담배 파는 아가씨로 처음 출연.

흥행에 실패해 배우로 주목받지 못함. 제임스 헨슨과 약혼했다.

 

1951년 (22세), <몬테카를로 베이비> 촬영 중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눈에 띄어 <지지> 주연,

<로마의 휴일> 주인공으로 이 중 발탁됐다.

 

1952년 (23세), <로마의 휴일>이 여름 내내 촬영되었고, 브로드웨이에서 <지지> 공연이 끝났다.

8개월 간 전미 순회 공연을 떠나 오래 떨어져 있게 되자 제임스 헨슨과 파혼했다.

 

1954년 (24세), 8월 <로마의 휴일> 개봉.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

홍보 만찬에서 그레고리 펙으로부터 멜 페러를 소개 받았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인연이 된 <사브리나> 촬영을 시작했다.

 

1954년 (25세),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연극 <오딘>으로 연극 부문 여우주연상인 토니상을 수상했다.

12살 연상의 멜 페러와 함께 스위스에서 결혼 후, 뷔 르켄 스톡에 살림집을 차렸다. 임신을 했으나 유산.

<사브리나> 개봉 뒤 <전쟁과 평화>를 남편 멜과 함께 촬영했다.

 

1956년 (27세), <사브리나>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화니 페이스>와 <하오의 연정> 촬영.

 

1957년 (28세), <화니 페이스>와 <하오의 연정> 개봉.

1959년 (30세), <파계>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

<용서받지 못한 자> 촬영 중 말에서 낙마해 유산. 25년 만에 아버지와 다시 상봉.

 

1960년 (31세), 첫째 아들 션 페러를 스위스 루체른에서 낳자 연기를 잠시 중단.

3개월 뒤 <티파니에서 아침을> 촬영.

 

1961년 (32세),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헵번 룩'을 탄생시켰다. <뜨거운 포옹>, <샤레이드> 출연.

1964년 (35세), <마이 페어 레이디> 엘라이자 둘리틀 역할을 했던 <뜨거운 포옹>으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1965년 (36세), 스위스 톨로 세나즈에 '라 페지블'이라는 집을 장만.

1967년 (38세), <어두워질 때까지> 시각 장애인 역할 촬영. 남편 멜과 이혼 발표. 스위스 집으로 돌아왔다.

1968년 (39세), 크루즈 '칼리스토' 호에서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사랑에 빠졌다. 토니상 특별상 수상.

1969년 (40세), 열성 팬이었던 10살 연하의 안드레아 도티와 모르주 시청에서 재혼.

1970년 (41세), 둘째 아들 루카 도티 출산. 유니세프 프로그램 '사랑으로 하나 된 세상'에 참여했다.

1976년 (47세), 영화계에 복귀, <로빈과 마리안> 촬영.

1980년 (51세), <뉴욕의 연인들> 촬영. 로버트 월더스 만남. 아버지 사망.

1982년 (53세), 안드레아와 정식 이혼.

1986년 (57세), 라 페지블로 이주.

1987년 (58세), <연인과 도둑> 출연.

1988년 (59세),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 에티오피아로 가서 구호 임무를 맡았다.

1989년 (60세), 마지막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카메오로 출연.

1990년 (61세), 골든 글로브 시상식 평생 공로상 수상.

1991년 (62세),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1993년 (64세), 라 페지블에서 영면.

 

 

참고한 책

 

<오드리 헵번, 스타일이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2010, (주)신원문화사, 마틴 지틀린

<오드리 헵번이 될 수 있는 50가지 습관> 2004, 영림카디널, 나카타니 아키히로

<오드리 헵번-사랑을 남기고 간 천사> 2003, 달과소, 알렉산더 워커

<워너 비 오드리> 2009, 웅진윙스, 멜리사 헬스턴

<오드리 헵번-스타일과 인생> 2004, 푸른솔, 스테파니아 리치

 

 

인물

 

멜 페러 (Mel Ferrer, Melchior Gaston Ferrer)

첫 번째 남편. 그레고리 펙의 소개로 만나 12살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결혼 후 페러는 계속 일에 실패하고 오드리는 승승장구하자 언론은 멜이 오드리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일로 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고 페러가 제작한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를 함께 찍고 난 뒤 이혼했다.

 

안드레아 도티 (Andrea Dotti)

두 번째 남편.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다.

10살 연하로 첫 남편과 별거 상태에서 혼자 유람선 여행을 갔다가 만났다.

정식으로 이혼한 지 2개월 만에 결혼한 후, 13년 간 살았지만 잦은 외도로 이혼했다.

 

로버트 월더스 (Robert Wolders)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영화 배우이다.

오드리보다 7살 연하인 그는 25살이나 연상인 아내 <폭풍의 언덕> 주인공 오베론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드리를 만났다.

13년 간 오드리의 동반자로 살면서 유니세프 일을 같이 했다.

아버지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여자만 순수하게 사랑하는 남자였다.

 

숀 헵번 페러 (Sean Hepburn Ferrer)

첫째 아들. 1960년 7월 17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배우 멜 페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화 제작과 홍보 일을 하고 있으며,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을 설립해 아이들을 돕고 있다.

세월호 팽목항에 기억의 숲을 조성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루카 도티 (Luca Dotti)

둘째 아들. 1970년 2월 8일 로잔에서 두 번째 남편인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션과 함께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을 설립해 어린이를 돕고 있다.

'오드리 헵번 뷰티 비욘드 뷰티' 전시회에도 참석했다.

 

위베르 지방시 (Hubert de Givenchy)

1927년 프랑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패션 사업에 입문해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오드리와는 <사브리나>에서 흰색에 검정 꽃무늬 자수가 있는 드레스로 인연이 되어 40년 간 콤비로 지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블랙 드레스를 선보이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랐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 등 미국과 유럽의 귀부인들이 주 고객이다. 2018년 3월 타계했다.

 

페라가모 (Salvatore Ferragamo)

오드리의 '헵번 룩'에 슈즈를 완성해 준 사람이다.

오드리가 발레를 한 것에 착안해 편하고 굽이 낮은 구두를 주로 만들었다.

'오드리 슈즈', '오드리 메리제인 슈즈'를 유행시켰다.

오드리의 발이 키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며 영국계의 귀족적인 계보를 잇는 스타라고 평가했다.

오드리의 구두골은 피렌체 사바토레 페라가모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음악

 

티파니에서 아침을 : Moon River

로마의 휴일 : Debussy "Clair de lune"

마이 페어 레이디 : I could have danced all right

사브리나 : Sting "Moonlight", La vie en rose

영혼은 그대 곁에 : Smoke gets in your eyes

전쟁과 평화 : Paul maurat "natasha waltz"

하오의 연정 : Fascination

 

장소

 

스위스 집 '라 페지블'

Route de Lully, Rue du Centre, Tolochenaz, Switzerland

 

벨기에 브뤼셀 생가

Rue Keyenveld 48, Brussels 1050, Belgium

 

묘지

Chemin des Plantees, Tolochenaz, Morges 1131, Switzerland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Always), 1989년, 미국

연인과 도둑(Love Among Thieves), 1987년, 미국

뉴욕의 연인들(They All Laughed), 1980년, 미국

혈선(Sidney Sheldon's Bloodline), 1979년, 미국

로빈과 마리안(Robin And Marian), 1976년, 미국

연제나 둘이서(Two For The Road), 1967년, 미국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 1967년, 미국

백 만 달러의 사랑(How To Steal A Million), 1966년, 미국

뜨거운 포옹(Paris-When It Sizzles), 1964년, 미국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1964년, 미국

샤레이드(Charade), 1963년, 미국

아이의 시간(The Children's Hour), 1961년, 미국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년, 미국

언포기븐(The Unforgiven), 1960년, 미국

그린 맨션(Green Mansions), 1959년, 미국

파계(The Nun's Story), 1959년, 미국

화니 페이스(Funnt Face), 1957년, 미국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 1957년, 미국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1956년, 미국

사브리나(Sabrina), 1954년, 미국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년, 미국